얼마 전 “15세기 ‘분청자기’ … 크리스티서 33억 원에 낙찰”이라는 한 국내 일간지의 기사를 보고, 몇 년 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전시된 분청자기(粉靑瓷器)를 본 한 미술 애호가가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글의 헤드라인이 떠올랐습니다.
“수세기 전 찰흙으로 빚은 그릇이 현대성을 말하다.”
이는 반세기 전인 1962년, 한국의 문화유산을 처음 유럽 대륙에 대규모로 전시했을 때, 이를 본 파리지앵들이 남긴 감탄과 맥을 같이합니다. 그들은 “분청자기에서 현대미술적 감각을 보았고, 한국에는 500년 전에 피카소(Pablo Picasso)가 있었다”며 찬사를 보냈습니다.(‘그가 있었기에-최순우를 그리면서’(2017) 참조, 위의 내용은 2016년 2월 본지에 실린 내용과 일부 겹침을 밝힙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고려청자나 조선시대의 청화백자를 두고 말한 게 아닙니다. 15~16세기 이 땅에 ‘돌연변이’처럼 나타난 분청자기에 대한 논평입니다. 분청자기를 보고 눈을 크게 뜬 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관람자들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홀렸던 것입니다.
고려자기나 중국과 일본의 도자 예술품이 보여주는 한결같은 완벽성, 그래서 냉기마저 감도는 고매(高邁)한 것과는 거리가 먼 도자기를 만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인의 숨소리와 손길이 숨김없이 전해오는 순박한 정감을 그네들도 느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파리지앵과 뉴요커들은 암흑시대와도 같던 15~16세기의 틀을 벗어난 그 자유분방함에서 과감한 현대성을 목도했던 것입니다.
우리네 문화예술에 깊숙이 빠진 서구인들이 “한국인은 아방가르드(avant-garde) 정신이 풍부하다”고 예찬하는 데는 이처럼 오랜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학교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학교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前 회장, 간송미술재단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