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한글날은 훈민정음 반포 570주년을 맞는 해라는 데 더욱 의미가 있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기 때문에 특별한 날이 아니면 한글을 인식하며 지내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매일같이 한글을 떠올리고 그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해 고민하는 이가 있다. 세계 최초로 한글 디자인 패션브랜드를 세상에 내놓았던 ‘이건만 에이엔에프(LEE GEON MAAN AnF)’의 이건만(李健滿·54) 대표다. 읽고 쓰기 쉬운 우리 한글이지만, 디자인에 접목하는 것에는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한글이기에 더더욱 포기할 수 없다는 그의 다부진 말투에는 남다른 사명감이 스며 있었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한글 디자인 패션브랜드를 세울 수 있었던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유학 생활을 하며 샘솟았던 애국심이 심지 역할을 했다.
“해외 나가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고 하잖아요. 어느 날 학교 도서관에 갔는데 일본어로 된 책은 많고 한국어로 된 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방학 때면 한국에 나와 우리 책을 사서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죠. 또, 외국 작가들에게 한국적인 것을 찾으라고 하면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 것을 고르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한국의 문화를 디자인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었죠.”
다양한 한국 전통 문양들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이 역시 중국 문명의 영향 때문에 차별화하기가 어려웠다. 그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닌,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언어나 사상 등이 반영돼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맺혔다. 그리고 그 생각의 종착점에 ‘한글’이 있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아티스트로서 화려한 삶을 살 수도 있던 그였다. 그러나 교수로 활동하던 시절, 결국 심지에 불이 붙고야 말았다.
“친구가 어느 날 ‘너 1야드에 실이 몇 개 들어가고 넥타이가 몇 개 나오는지 알아?’라고 묻더라고요. 모른다고 했죠. 미국에서 공부할 땐 그런 걸 배운 적도 없고, 특히 유럽은 브랜드를 중심으로 디자이너가 어떤 창의적인 디자인을 하느냐가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한국 섬유 시장은 OEM형태로 움직이다 보니 그런 것도 가르쳐야 했던 거예요. 내가 공부하고 온 걸 그대로 가르치는 것은 소용이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들에겐 ‘21세기엔 디자이너가 브랜드가 되는 시대가 온다. 너희들의 몸값이 달라지고 디자이너가 경영자가 돼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근데 그 말을 들은 의대, 공대 다니던 학생들이 전과를 한 거예요. 덜컥 책임감이 생기고 겁이 나더라고요.”
그의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은 자신이 이야기했던 것들은 그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디자이너는 직급이 올라가도 차장 정도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한마디로 디자인만 해서는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인데, 멀쩡한 전공을 박차고 나온 학생들을 보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과연 그렇게 되느냐, 내 이야기가 맞느냐 틀리느냐를 증명해 내기 위해 그는 교수직을 뒤로하고 현장에 뛰어들게 된다. 그렇게 제자들과 합심해 만든 것이 지금의 ‘이건만’ 브랜드다.
한글과 패션, 트래디션과 트렌드를 접목하다
2000년, 처음 회사를 설립했을 때도 그랬고 현재까지 가장 힘든 점은 한글을 패션에 접목하는 일이라고 한다. 알파벳처럼 나열문자가 아닌 자음과 모음이 어우러지는 입체문자인 한글을 제품에 효과적으로 입히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특히 한국인에게는 한글이 언어이기 때문에 디자인 요소가 아닌 글자로 읽힌다는 게 문제였어요. 그래서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는 과정을 거쳤죠. 한글의 형태적 분석도 하지만, 그보다는 한글이 가진 의미에 대해 공부했어요. ‘한글이 대체 우리에게 뭐지?’라는 물음을 던지고 그런 고민을 디자인에 담으려고 했죠. 디자이너들도 고충이 있죠. 지금까지 디자인한 작업물만 3000개가 넘는데 또 새로운 것을 창작해야 하니까요. 우린 다른 곳처럼 카피할 수 있는 디자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쟁업체도 없으니 오히려 더 힘들죠.”
그렇다고 그들만 한글 디자인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오래 버티지 못하거나 단기적인 작업에 그쳤다고 한다. 이 대표는 그만큼 한글을 패션에 접목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길이라고 설명했다.
“한글과 패션, 한마디로 트래디션(tradition)과 트렌드(trend)라 할 수 있죠. 어찌 보면 그 두 가지를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차라리 한글 디자인으로 패션이 아닌 자개함 같은 소품을 만드는 게 훨씬 쉬울 거예요. 그렇게 하면 그저 인사동에서 사는 관광 상품에 지나지 않거든요. 한국 사람이라면 그런 기념품을 더욱 살 이유가 없죠. 그래서 역설적으로 스카프, 넥타이, 핸드백 제품을 디자인하게 됐어요.”
차별화된 전략 덕분에 이건만 브랜드의 제품은 국내외 인사와 패션 마니아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건만 한글 넥타이는 청와대·정부부처·공공기관의 귀빈 의전용 명품으로 납품됐고, 한국 브랜드 최초로 일본 대형 백화점에 입점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우여곡절도 많고 힘든 점이 많았지만, 이만하면 성공반열에 올랐다 할 수 있지 않은가? 그에게 ‘성공’이란 조금 다른 의미였다.
“아마 실패한 것들을 이야기하자면 무척 많을 거예요. 아무래도 추진하던 일이 실패하면 그만큼 금전적으로 손해가 생기거든요. 저는 그걸 수업료라고 해요. 수업료 굉장히 많이 냈습니다(웃음). 그런데 성공의 기준이 뭐냐. 성공과 출세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출세는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 건데, 그렇게 따지면 아직 출세는 못 한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일을 시작하고 대학에 관련 커리큘럼이 생기고, 많은 유통라인에 개인 디자이너 브랜드의 입점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것에 제가 작은 역할을 했다고 봐요. 돈 벌고 유명해지는 출세보다는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있는 성공을 하고 싶어요. 출세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면 바로 낫씽(nothing)이지만, 성공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도 역사에 남고 하나의 장르를 열고 패러다임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성공입니다.”
디자이너 경영자가 이어갈 ‘이건만 에이엔에프’
그는 후배 디자이너들을 위한 디딤돌 역할을 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이러한 점은 ‘이건만 에이엔에프’만의 경영방침에서도 드러난다. 무엇보다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열정을 발휘하는 이 대표는 경력자보다는 신진 디자이너 채용을 우선시하고, 매출의 20%가량을 디자인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사업을 시작할 때에도 목표로 삼은 것 중 가장 첫 번째가 ‘동종 업계 디자이너 월급의 2배를 주는 회사’였다고 한다. 디자이너 출신 경영자다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회사와 후배들을 향한 애정으로 에너지가 가득한 그에게도 요즘 걱정거리가 생겼다. 나이가 드니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실감한다고. 열심히 운동하며 자기 관리에 힘쓰면서도 디자이너들의 역량 강화에 더욱 힘을 쏟게 된다는 이 대표다.
“요샌 나이 드는 게 무섭더라고요. 아,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그냥 이대로 끝나버리는 거 아냐? 그런데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쥐고 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해외만 봐도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명품 브랜드가 오랜 세월 명맥을 유지하고 있죠. 코코 샤넬이 죽었다고 그 브랜드가 힘을 잃은 것은 아니잖아요. 브랜드를 이끌어갈 디자이너를 키웠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우리 직원들에게도 디자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영, 마케팅, 유통, 소비자 심리 등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어요. 제 욕심에 그런 거지만, 아마 다들 엄청 피곤할 거예요. 그래도 우리 브랜드를 물려줄 인재를 만들려면 어쩔 수 없죠.”
그는 한글이 담긴 디자인 브랜드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자신이 아닌 누구라도, 또 더 많은 이들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힘들고 더디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는 사명감도 있었다.
“일이 힘들수록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해요. 내가 이 일을 왜 하는가? 돈을 위해서? 돈을 벌려고 했으면 다른 일이 얼마든지 있겠죠. 명예를 위해서? 그럼 대학교수로 남아 있었겠죠. 브랜드를 하나 육성하려면 굉장히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해요. 애초에 요행을 바라고 시작한 일은 아니니까 서두르지 않죠. 남들보다 큰 솥을 만들었기 때문에 밥은 늦게 짓더라도 그만큼 더 많이 지으면 되잖아요. 이미 이만큼 달려왔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요. 끝도 보이지 않지만 그 시작도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와버렸죠. 그럼 어떻게 하겠어요? 돌아가나요? 일단 달리고 보는 거죠.”
인생 2막, 얻는 게 없어도 일단 달리고 본다!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하는 그의 이야기 속에 어쩐지 순탄치만은 않았을 지난 일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10여 년, 한글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혹시 후회하는 마음은 없는지 물었다.
“아마 대학에서 교수생활도 하고, 굉장히 유명한 아티스트가 됐을 것 같아요. 하지만 결코 후회는 안 해요. 그 삶은 지금이라도 다 벗어던지고 할 수 있는 것들이거든요. 오히려 공부를 많이 한 건 후회해요. 대학교, 대학원, 그리고 유학까지. 지금 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겠다 싶어요. 똑똑하고 아는 게 많다고 사업을 잘하고 세상사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러한 후회 역시 이만큼 살아봐서 알게 된 것이라고. 그는 공부하던 30대 중반까지를 인생 1막, 그 이후로부터 현재의 삶을 인생 2막이라고 설명했다.
“인생 1막은 어느 정도 계획대로 됐어요. 공부는 열심히 하고 노력하면 점수 잘 받아서 좋은 대학 가고 그것에 만족할 수 있거든요. 근데 인생 2막은 노력한다고 다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왜냐하면 공부는 정량이 있고 그 조건에 맞추면 되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다들 머리 굴리고 있거든요. 변수가 생기죠. 내비게이션이 안 막히는 길을 알려 주면 그대로 가나요? 머리 써서 다른 길로 가는데 또 막히잖아요. 그러니 게임이 안 되죠. 근데 아직은 다 내 것만 같아서 욕심도 내고 그렇기 때문에 실패하더라도 달릴 수 있는 것 같아요. 2막까지는 노력한 만큼 얻는 게 없더라도 일단 해보려고요.”
그는 노력하는 만큼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인생 3막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때가 되면 얼마만큼을 노력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혜안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간의 수명이 1000년 정도 되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거예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 인생의 룰을 깨닫게 되는 거죠. 아마 인생 3막은 그런 룰을 깨달았을 때 찾아오는 게 아닐까 해요.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알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구분하는 시기인 거죠. 그러면 자연히 무리한 계획을 세우거나 욕심을 부리지도 않을 거고요. 그렇게 욕심을 덜고 농부의 마음으로 늙어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끝으로, 그에게 인생 3막은 언제쯤 오리라 예상하는지 물었다.
“글쎄요. 철들면 죽는다잖아요. 아마 저도 그냥 이렇게 살다가 눈 감는 순간에 ‘아휴,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한마디 하고 깨닫지 않을까요?”
여백서원(如白書院)의 주인장 전영애(全英愛·65) 서울대 교수에게 “정말 나이가 안 들어 보이신다”라고 말하자 “철이 안 들어서”라는 대답이 웃음과 함께 돌아온다. 어쩌면 이 각박하게만 보이는 세상에, 서원이라는 고풍스러운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철이 안 든 일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철이 안 든 게 아니라 자신이 올바른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에 실천할 수 있는 일일 수도 있다. 서원에서 확인한 책과 책의 가치에 관한 문답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 사진 이신화 여행작가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걸은리의 여백서원(如白書院)은 말 그대로 책의 집이다.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가 아버지의 호 여백(如白)을 빌려 와 ‘맑은 사람들’을 위해 만든 이 공간에는 전원의 한적함과 생명력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었다. 인터뷰는 늦은 매미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지고 있는 가운데 소장한 책이 몇 권이냐는 질문부터 이뤄졌다.
“우와, 책이 얼마나 되나요?”
“몰라요. 그런 거 알아 뭐해요.(웃음)”
서원을 통해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다
전 교수는 올해 모교인 서울대에서 20년 동안의 교수 생활을 마치고 은퇴했다. 2009년에 국내 최초로 괴테 시 전집을 번역하고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로부터 괴테 금메달을 받는 등 독일문학 분야에서 학문적인 업적을 탄탄히 쌓은 그녀에게 아쉬운게 있는지 궁금했다.
“늘 그렇죠. 절대적인 낙원이 어디 있겠어요. 이곳도 사람들 보고 숨 좀 쉬라고 만들었지만, 언제나 위협이 있죠. 예를 들면 여기에 조경을 잘 해놓으니까 주변에서는 농사도 못 짓는 땅인데 비싸게 내놓고. 갑자기 수영장 딸린 별장을 짓는다는 등 뭐 그런 얘기들도 있고. 도리 없죠.”
못다 한 걸 물으니 개인이 아니라 서원을 먼저 생각한다. 서원의 완성을 떠올린다. 전 교수에게 여백서원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좋은 사람들이 많이 오세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더 바랄 게 없어요. 조경하시는 분도 오고, 을 읽으시고 암 치료 받는 분도 오시고. 그분들 중에 놀라운 분들이 많아요. 세상에 이상한 사람들이 난리 쳐도 귀한 분들이 숨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 처음 만난 사람들이 여기서 밤새도록 얘기하고 그래요.”
전 교수는 만난 사람들에 대해 연신 예쁘고 아름답다는 표현을 거듭했다. 마치 세상을 다시금 발견하게 된 사람처럼. 그녀는 자신이 운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어머니와 할머니가 참 좋은 분이어서 순전히 조상 덕에 잘 사는 게 아니냐며 웃음 짓기도 했다.
귀하게 여긴 책에서 느낀 힘
전 교수는 오래된 보자기에 싸 놓은 책들을 조심스레 꺼내 보였다.
먼저 어머니(김한섭)의 책. 1990년에 작고한 어머니는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 평생 고생만 한 그 어머니가 필사한 책이 있다. 배움에 대한 욕망이 컸던 어머니는 책이 귀했던 시절, 한지에 책을 베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보고 외웠다. 소설본, 조선시대 가사를 적은 두루마리들이 전 교수의 손에 남았다.
그리고 아버지(전우순)의 책.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으로 사업을 했던 아버지는 60대 후반에 등산을 시작해 90세까지 매년 에베레스트를 올랐다. 그의 조부는 소수·도산서원장을 지낸 유학자인데, 250년 전 괴테의 글은 줄줄 읽는 딸이 증조부의 글을 못 읽는 게 안타까워 조부의 문집을 한글로 번역해 1000장의 종이에 붓으로 썼다. ‘91세 우순이 피로 번역하고 쓰다’라고 서명한 번역 작업을 2011년 6시간 반에 걸친 담도암 수술을 받은 뒤 마무리하고 6개월 만에 별세했다.
여백서원에는 괴테의 초간본(1819), 희귀본(1853)을 비롯한 200여 권의 독일문학 관련 서적이 있다. 바이마르 괴테학회 재정 감사였던 홀레씨는 별세하기 직전 다시 전 교수를 식사에 초대했고, 며칠 후 “당신이 갖고 있는 게 가장 좋겠다”면서 항공편으로 자신의 장서를 부쳐 왔다. 홀레씨가 임종을 앞두고 정리를 해서 보낸 것이다. 다들 훌륭한 사회인들인 당신 자녀들도 있는데 홀레씨는 가장 귀중한 책들을 전 교수한테 보냈던 것이다.
“그 책들을 누구에게 보내야 가장 귀하게 읽히고 잘 보관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신 것 같았어요. 11일 동안 그 집에 쌓인 수많은 편지를 보고 여러 일화를 들으면서 그의 생애가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던지요.”
여백서원에는 이 책들과 함께 전 교수가 시의 스승으로 모시는 동독 출신 시인 라이너 쿤체의 책, 학문의 스승으로 모시는 헨드릭 비루스 교수의 책, 자신이 쓰고 번역한 책, 교양수업 ‘독일 명작의 이해’를 수강한 제자들이 종강 때 각자 한 권씩 만든 책, 서원에 다녀간 사람들의 책까지 소중하게 간직돼 있다.
전 교수는 여백서원의 존재 이유로 이처럼 좋은 책의 보관과 함께 좋은 사람들의 보존을 든다. 책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 한국에 대해 알고 싶은 외국 시인 누구에게나 여백서원은 열려 있다. 책이 있는 집, 서원에서 삶의 여백을 찾도록 해주고 싶다고.
힘들면 책을 읽어요
전 교수는 몸이 힘들면 책을 읽고 책을 읽다 머리가 아프면 몸을 움직인다. 그녀는 글을 알면 세계가 열린다고 말한다. 그래서 시험을 보려고 배우거나 출세하려고 배우는 건 너무 불쌍하다고도 했다.
“차 한 잔을 마셔도 사람이 가까워지는데 누군가가 온 힘을 기울여 쓴 책을 읽는다는 건 상당히 많이 받는 거예요. 그러면서 남들을 이해하게 되고 그러는 거지. 그래서 나이 먹어서 책을 읽는 것은, 아무 거나 읽어도 좋은 거예요.”
그녀와 괴테의 인연은 남다르다. 어떻게 괴테를 접하게 됐는지 물어봤다.
“중학교 때 어디선가 시를 하나 봤어요. 그때는 괴테도 모르고 시 제목도 몰랐어요. 그런데 괴테가 쓴 이라는 만년의 시집이 굉장히 중요하고 정말 어렵거든요. 그 책 한 권을 다 읽으니 끝에 괴테가 그 시집에 넣지 않고 버린 것을 편집자가 넣은 시가 몇 편이 붙어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에 제가 중학교 때 봤던 시가 들어 있는 거예요. 하도 놀라서 중학교 때 읽은 그 시가 어떻게 아직까지 잊히지 않고 기억 속에 남아 있었을까, 그 이유가 뭘까 고민하며 그 시를 분석하는 게 제가 독일의 출판사에서 낸 괴테 연구의 첫 페이지입니다.”
4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괴테의 시
중학교 때 본 시를 다시 보게 되기까지 어언 40여 년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남아 있는 괴테 시의 힘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괴테 본인이 많은 힘을 거기에 쏟은 거예요. 그게 읽는 사람에게 다가온 거죠. 놀라운 체험이었어요. 괴테는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건 하나도 안 썼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평생 연시를 썼어요. 그렇다면 평생 연애 경험이 있다는 건데, 그게 뭘 저지른 게 아니고 아름다운 글을 남김으로써 그 단계를 넘어선 거예요.”
전 교수는 자연스럽게 예술의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선 숭고한 단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괴테가 전 교수에게 어떤 롤모델로 작용한 부분이 있을지 궁금했다.
“괴테에게서 탐나는 점이라면 자만이 아닌 자긍심이었어요. 예를 들어 저는 계단을 꼭 뛰어다녀요. 그런 제 모습을 보면 어떤 사람은 스포티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바쁘다고 해요. 그런데 제가 계단을 뛰어다니는 건 계단을 걷는 게 힘들어서예요. 물론 괴테가 계단을 뛰어다니고 그러진 않았어요. 그런데 그 사람의 생활 태도가 그랬어요. 힘든 게 있을 때 그렇게 극복하더군요. 그게 자긍심이죠. 눌리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극복하는 것. 세상을 대하는 훨씬 더 적극적인 태도죠.”
우리 의젓하게 살자
그녀가 인터뷰 내내 강조한 말이 있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 모두가 다 힘드니까, 힘든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말이었다.
“자기 분야에서 잘하시는 분에게는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박수를 치고 싶어요. 힘 안 드는 일이 어디 있어요. 하지만 의젓하게 살아야 해요. 옆도 좀 돌아보고. 애들이에요? 울기만 하면 돼요?”
최근에 흔히 쓰이는 헬조선이라는 말에 대해서, 그녀는 매섭게 비판했다.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 치고, 우리를 누가 여기에 넣은 건가요? 우리가 만든 건데. 금수저, 흙수저… 뭐 어쩌라고요. 형편이 어려운 건 다 알지만 누구나 어려워요. 그런데 승복이라는 게 없고 ‘넌 운이 좋아서 그런 거고 난 재수 없어서 이러고 있어서 너 미워’, 이거 아니에요? 나보다 힘들지만 열심히 사는 사람을 돌아보면 나도 힘을 얻고 그러는 건데 애들처럼 찡찡거려서 되겠어요? 부딪혀서 아프면 자기가 부딪힌 거지 그게 기둥이 때렸어요, 땅바닥이 때렸어요? 자꾸 남 탓하고 여건 탓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정서가 그렇게 가는 것 같아서…. 남 탓하는 건 어마어마하게 잘 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건 못 하는 것 같아서 걱정돼요. 우리 좀 의젓하게 살자고요.”
책이 즐거우면 계속 하고 싶어진다
서원 본관을 둘러보니 그녀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이 만든 책들이 보였다. 한 학기 교양 수업을 듣고 만든 책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책들이었다. 그녀의 수업은 교재가 없고 시험이 없는 대신, 각자 학기말에 교재를 만들어 내게 한다. 그녀가 갖고 있는 공부 철학이다.
“공부는 자기가 스스로 해야죠.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것 정도로 제가 잘 가르칠 자신이 없어요. 내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였고. 요즘 부모님들은 어떻게 그렇게 자신이 넘치는지 모르겠어요.”
가끔씩 독자들이 물어보는 말, 손주가 책을 안 읽는데 어떻게 읽게 하느냐는 고민에 대해 전 교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세상에! 아이가 책을 읽지 않으려 하면 읽지 말아야죠. 왜 읽어라 마라 해요. 아이는 책 읽는 시간이 즐거우면 나중에도 즐겁게 책을 읽게 돼요. 전 아무리 바빠도 잘 때가 되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줬어요. 아이들도 그 시간이 너무 즐겁기 때문에 책에 익숙해졌어요. 아이들에게 피아노 배우라고 들들 볶으면 아이들은 피아노를 배우는 게 아니라 들들 볶는 걸 배우게 돼서 대대로 들볶게 돼요. 그러나 엄마가 즐겁게 피아노를 치면 애들도 피아노를 치죠. 그걸 왜 억지로 시켜요? 책을 같이 재미있게 읽으세요. 즐거우면 즐거운 시간의 기억을 되풀이하고 싶어지죠. 그런데 즐거운 시간이 안 만들어지니 책과 멀어지는 거죠.”
고서의 향기를 품고
즐거움과 보람은 전 교수가 지향하는 공부법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행해졌다.
“사람들이 운동이 중요하다는 거 다 알잖아요? 그런데 돈을 내고도 안 하기도 하고. 하지만 운동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노동이에요. 노동을 하면 보람이 있으니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는 게 제 주장입니다. 일을 안 시키면 약해져요. 제 아이들이 걷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시킨 일은 현관에서 냉장고까지 우유를 배달하는 거였어요. 자기가 우유 배달을 안 하면 온 식구가 우유를 못 먹게 되죠. 얼마나 보람 있어요?”
전 교수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을 ‘말도 아닌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대신 ‘올바른 목적이 있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도 바르다’는 말을 믿고 있었다. 그러한 마음이 그녀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고 지금 여백서원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이가 들어가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도 그녀다웠다.
“나이 들면 얼마나 좋은데요. 저는 젊었을 때도 나이 들기를 소망했어요. 언제나 지금이 좋은 때여서, 두려움 등의 온갖 생각이 하나도 없어요.”
고서(古書)의 기품이 나는 전 교수 같은 분들이 세상에 온전히 남아 있으면 그게 바로 세상이 나아지는 길이 아닐는지. 여주에서 올라오는 차 안에서 내내 ‘말이 서야 나라가 선다’던 함석헌 선생의 문구가 맴돌았다.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를 졸업하고, 1996년부터 모교인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지내다 올해 은퇴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원 수석연구원, 뮌헨 대학과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의 초빙교원을 겸임했다. 2011년 바이마르에서 ‘괴테금메달’을 수상했다. , , (공저), , , , , , 등 60여 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해외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제일 어려운 것이 자녀들에게 모국어 사용능력을 교육하는 문제다. 외국인을 생활인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드문 시대, 동네마다 있는 중국집은 중국인들이 운영하였는데 중국화교 아이들은 반드시 중국어를 사용하였다. 어른들은 중국인의 그런 모국어교육열에 대하여 많이 칭찬하였다 중화문화, 중국인의 단결력, 애국심이 이 모국어 사용에서 나온다는 말도 했다
그런 말들은 필자가 직접 확인하기도 하였으니 살아있는 교육이기도 하다 외국에서 모국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곧 애국심과도 연결된다는 것은 한국 내에 거주한 화교의 예에서 필자가 그들과 같은 입장이 되었을 때 당연히 실천해야하는 것으로 내 안에 각인 되어있었다.
경제적 기반은 그 곳 사회에 뿌리 내릴 수 있는 성역이다. 그 일에 열중하다보면 이중 언어 사용이란 쉽지 않은 작업을 잘 해낼 수가 없다. 이민1세는 영어를 익혀야 하고 아이들에게는 한국어를 가르쳐야 한다. 결코 쉬운 목표는 아니다, 대체로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모국어를 사용하도록 최선의 노력은 한다. 이런 힘겨운 노력으로 2세들은 한국어 조금은 한다. 그러나 그들의 한국어는 두 번째 언어라 어색하거나 스핑크스 같은 괴이한 말을 사용하게 된다. 한국어 구사력의 다름은 종종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오해가 발생 한다.
엇나간 대화
미국의 친구가 “딸과 말다툼 좀 했다”면서 어처구니없음을 한참 이야기한다.
딸이 늦둥이로 셋째 아이를 출산하였다. 식구가 늘었으니 변두리 단독주택으로 이사하면서 집을 늘렸다. 대학 졸업 후 금방 직장을 잡아 자립 잘 한 딸이 대견하여 이번 두 번째 집 살 때는 몫 돈 보태주었단다
친구 딸은 생각하지도 않은 도움이 반갑고 놀라운 모양이었다. 잠깐 사양하더니 행복으로 받았다.
“엄마는 거지처럼 살면서 이런 큰돈을 만들었네! 라는 딸의 감사의 말에 친구는 “거지처럼”이란 말에 눈이 홱 돌아갔단다. “왜 내가 거지처럼 사니?”라고 화를 내었더니 딸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하더란다. 딸의 거지처럼은 ‘알뜰하게 검소하게’란 의미인데 엄마는 ‘품위 없는, 문화를 모르는, 구두쇠’로 알아들어 화가 났던 거다. 화를 낸 후에 생각하니 미국서 태어난 딸의 한국어 수준을 오해한 엄마가 속 좁다 싶어 또 화가 났다.
내가 뉴욕에서 만난 중국인 2세들 중에는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아주 쉬운 한자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성인이 된 필자 아이들이 쓰는 한글은 너무 치졸하여 몸에 맞지 않은 옷 걸친 것처럼 글자 따로 사람 따로다
어제 우리 집 정원 일 한 중국교포는 이북 사투리의 한국말이 유창하다. 중국에서는 이북에서 온 한국인이 개척 한 마을에서는 이북 사투리 남한에서 온 사람들이 주축인 마을에서는 남한 사투리를 사용한다는 말을 했다.
필자는 한 번 생각해보았다. 중국에서는 중국인과 한국인은 외모에서 정체성을 가릴 수 없으니 언어로 정체성을 웅변한다. 미국에서는 언어가 아니더라도 신체적인 증거와 사고, 습관 문화로 한국인의 정체로 산다는 것이 그리 어려울 것이 없다 그건 중국인에게도 같을 것이다. 모국어를 강조하지 않아도 2세들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엄청난 통증을 동반한 열병을 꼭 앓게 된다. 한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조국사랑은 그 기간에 충분히 형성되지 않을까 한다.
동네 공원에서 할 일없이 벤치에 앉아있는 노인 분들을 보면 마음이 짠합니다. 나도 저 나이되면 저렇게 될까? 스스로에게 반문도 해 봅니다. 어제의 조국근대화이 역군들이 나날이 변하는 새로운 IT신기술에 적응하지 못하고 나이라는 덫에 걸려 젖은 낙엽처럼 공원 벤치에 조각상처럼 붙어 있습니다. 날지 못하는 날개 부러진 새와 같습니다. 이런 분들을 일으켜 세워 노동현장으로 또는 산업 역군이란 새로운 명찰을 다시 달아줄 일은 진정 없는 것인가? 안타깝기만 합니다.
풍부한 영양공급과 보건위생환경의 개선으로 노인의 건강도 좋아졌습니다. 지금의 70대는 과거의 40대와 맞먹는 체력과 지남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바로코앞에 다가 왔다고 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고령화 시대입니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고령 사회에 노인을 위한 사회복지도 문제지만 집안에서도 갈 곳 없는 노인의 문제가 새롭게 부상합니다.
농경사회에서는 고령자의 일손도 필요했지만 산업사회에서는 고령자의 역할이 거의 필요 없습니다. 달나라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달나라에 가서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노후를 보내던 방식으로 노후를 준비해서는 막상 우리가 노인이 되면 준비 부족으로 당황할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의 8~90대의 노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는 관심을 갖고 지켜봅니다. 노년을 살아보지 않은 젊은 노인문제 전문가 보다 지금의 노년을 살고 있는 분들의 체험이 더욱 값지다고 생각합니다. 60세 정년퇴직하고 건강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 건강을 가진 사람이 무었을 어떻게 하면 팔팔하게 100세 까지 행복하고 즐겁게 살다가 웃으며 저세상으로 갈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늘 나랑 산책로에서 만난 분은 37년생으로 올해 79세라고 합니다. 스스로 건강관리를 잘 해서인지 젊게 보이고 건강해 보입니다. 엎드려 팔굽혀 펴기를 30개나 너끈히 해냅니다. 조심스럽게 하루의 일과를 물어봤습니다. 아침은 할머니가 더 주무시도록 6시에 집을 나와 3천 원짜리 해장국을 사 먹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전거를 친구삼아 자전거 전용도로를 2시간 정도 느리게 달리고 공원에 설치된 운동기구룰 이용하여 운동을 하다가 10쯤 도서관에 가서 신문이나 잡지 또는 책들을 두시간정도 뒤적이다 보면 점심때가 된다고 합니다.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후 시간은 어린이 대공원이나 잠실 올림픽 공원에 가서 산책도 하고 과천 경마장에 가서 마권은 사지 않고 달리는 말들을 구경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내게 내미는 수첩에는 매일 어디 갈 곳이 적혀있습니다. 오라는 곳은 없지만 체력에 맞춰 갈 곳을 미리 알아서 준비한다고 합니다. 친구들하고 같이 어울리면 좋지 않으냐고 내가 물어봤습니다. ‘친구 그거 나이 들면 아무 소용없어 태반은 죽고 요양원에 있기도 하지만 비교적 건강한 친구하고 만나지 않아, 나이가 드니 서로 말 하려해도 발음이 어눌하고 귀도 어두워 서로 잘 알아듣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말하다가 단어가 생각이 않나 서로 거시기, 거시기 하다가 말아, 이제는 만나지 않아.’ 하십니다.
노후 준비로 혼자 지내는 법을 미리 알아두고 연습하라고 충고 합니다. 식사도 혼자 챙겨 먹어야 하고 운동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고 친구도 필요 없으니 혼자 놀러 다닐 곳도 미리 알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뇌 훈련으로 영어알파벳 ABCD를 외우고 한글 가나다라를 소리 내어 외우면 아주 좋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랬더니 귀에 소리가 들리는 이명현상도 줄어들고 눈도 많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알파벳 차례를 잊지 않으려고 정신 바짝 차린 덕분이랍니다. 나이든 분들의 오늘은 우리의 내일의 모습입니다. 오늘을 어떻게 지내는지 잘 살펴보면 선행학습의 효과가 있습니다.
2011년 대전 유성구 금고동 ‘안정 나씨’ 종중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조선시대 미라 4기가 발견돼 학계의 큰 관심을 모았다. ‘안정 나씨’ 묘에서 출토된 미라 4기는 나신걸(1461~1524)과 부인 신창 맹씨(15세기 말~16세기 초), 그리고 나부와 부인, 용인 이씨가 각각 합장된 부부의 미라다. 이때, 무덤 안에 있던 조선시대 복식 150여점과 다양한 부장품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16세기 초의 의생활을 알 수 있어서 복식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가치가 크다.
그런데, 당시 출토된 것 중에 아주 중요한 유물이 또 있다. 바로 나신걸이 부인인 신창 맹씨 묘에서 나온 편지인데, 이 편지는 현재까지 발견된 편지 중에서 가장 오래된 ‘한글편지’다. 한글이 1446년에 창제, 반포되었고, 한글을 반포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한글로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매우 크다.
편지는 군관으로 영안도에 나가있는 남편 나신걸(1461~1524)이 고향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것인데, 영안도는 1470년부터 1498년까지 사용한 함경도의 옛 지명으로, 이 편지를 쓴 시점은 적어도 1498년 이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편지 내용은, 군관 등 남성들이 입던 철릭(조선시대 무관이 입던 공복)을 보내달라는 이야기와 부인을 위해 분과 바늘을 사서 보낸다는 것, 그리고 “너무 농사에 힘쓰지 말라”는 부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물론, 편지를 고이 간직해온 것으로 봐서, 부부간의 애틋한 사랑을 알 수 있다. 다음은 편지의 일부분이다.
‘안부를 끝이 없이, 수없이 하네,
집에 가서 어머님이랑 아기랑 다 반가이 보고자 하다가
장수가 혼자 가시며 날 못 가게 하시니 못 다녀가네.
이런 민망하고 서러운 일이 어디에 있을꼬.
또 내 삼베 철릭이랑 모시 철릭이랑
성한 것으로 가리어 다 보내소.
또, 분하고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네.
집에 못 다녀가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 있을꼬.
울고 가네. 어머님과 아기를 모시고 다 잘 계시소.
내년 가을에 나오고자 하네.’
필자의 남편도 ‘안정 나씨 문중’의 한 사람이다. 그런데, 500년 전의 조상도 이렇듯 아내에게 애틋한데, 필자의 남편은 그런 조상의 피를 물려받았을 만도 하건만, 무뚝뚝하기가 한이 없다. 남편에게 지금까지 편지는커녕, 메모 한 장도 받아 본 적 없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나씨 부인’ 맹씨가 한 없이 부럽기만 하다. 그래도 더 기다려 보면 필자도 남편에게 연서(戀書) 한 장 받아 볼 수 있을까? 혹시 연서(戀書)라도 한 장 받게 되면 액자에 넣어서 거실에 걸어 두었다가 무덤에 넣어 달라고 해야겠다. 누가 알겠는가! 혹시 500년 뒤에 출토 될지!
‘나씨 부인 김영선, 묘에서 연서(戀書) 나오다’
플레이스토어에서 한글로만 검색해도 모두 쉽게 다운받을 수 있다.
시니어들이야말로 꼭 필요한 앱이 많다.
그러나 스마트 폰에 따라서는 제공 자체가 안 되는 앱이 있음을 양해바랍니다.
저도 지난달 해당 휴대전화생산업체 고객센터에 가서 전체포맷을 하여
다시 다운받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수도권사는 분들 지하철 앱
어느 역에서 어느역 도착인지 알려주면 어디서 환승하라는
친절함을 물론 어느 번호 앞에서 타면 환승하기 위해
별로 안 걸어도 되는 가장 빠른 이동상태로 기동력 있게
활동하기 좋다. 주말에 주중에 시간대가 다르고 1호선이나 9호선은
급행이 있는 시간도 알려준다.
네이버지도앱
출발지와 도착지를 입력하면 대중교통으로 개별자동차로
가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 걸릴 시간 ,걷는 시간까지
거리까지 다 알려준다.
필수로 다운받을 필요가 있다.
카카오택시앱/T맵택시앱
콜택시는 콜비용을 받는데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비용을 안 받는다. 아주 유용했던 적이 많았지만 특히 창고 세일하는 매장근처는
거리가 주차장일 정도로 꽉 차서 저렴하게 구입한 물건을 들고 이동하기 힘들 때
매장을 출발지로 집을 도착지로 하여 택시앱으로 택시를 부르면
아주 편하게 귀가에 도움이 된다.
어르신들이야말로 택시정류장까지 가는 것조차 힘들 때 아주 유용한 앱이니
젊은이들 보다 오히려 필요한 것이다.
사무실이 많은 동네에 거주하는 필자는 주중의 출퇴근시간에는 오히려 빈 택시가
많으나 주말이나 주중에도 출퇴근시간이 애매한 중간시간에 빈차가 안 지나다닌다.
근처에 가산디지털단지역근처에 서있는 택시를 택시앱으로 불러서 이동하기에
꼭 필요한 앱이다.
스팸차단앱(후스콜)
급한 회의 중 오는 전화에 어떤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스팸차단앱
이 스마트 폰에 깔려있다면 아예 가려서 받게 되니 딱 좋다.
비디오나 사진편집앱: Snapseed
동영상이나 사진 원하는 대로 편집가능: QUIK앱, 키네마스터앱
(모임에서 즉석에서도 바로 사진 몇 장으로 편집하여 만들 수 있다.)
그 외에도 아주 많은 앱이 있다.
커뮤니티활동에 좋은 앱
카카오 톡이나 네이버밴드,포털사이트카페나
블로그나 SNS (페이스북,인스타그램,폴라,유튜브)
는 앱을 다운받아 놓으면 본인 스마트 폰에서 사진을 선택하여
바로 공유할 수 있어서 쉬운 커뮤니티활동에 임할 수 있고
블로그에 필요한 정보를 바로 올려놓을 수 있어서 편리하다.
'가온'은 '가운데'를 뜻하는 우리말인데, 새문안로 3길이 한글 이야기의 중심거리이기 때문에, 이 길을 ‘한글 가온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한글 가온 길에 가면, 한글학회와 주시경선생의 집터, 그리고 주시경선생과 헐버트선생의 부조가 새겨진 조형물이 설치되어있다. 또, 이야기꾼 전기수 할아버지와 각종 한글 조형물,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있다. 그리고, 이런 한글 가온길을 해설하는 한글학자 김슬옹 박사가 있다.
◇ 한글학회
한글학회는 주시경선생이 운영하던 국어강습소의 졸업생과 동지들하고 뜻을 같이하여,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대중에게 한글이 바르게 보급되는 것을 목적으로, 1908년에 ‘국문연구회’를 설립한 것인데 그 후, 1911년에는 ‘조선 언문회’로, 1921년에는 ‘조선어 연구회’로, 1931년에는 ‘조선어학회’로 그 이름이 바뀌어 오다가 1949년에 오늘날의 ‘한글학회’가 된 것이다.
그런데, 한글학회가 지금의 새문안로 3길에 자리 잡기까지에는 사연이 있다. 1908년, 창립한 한글학회는 여기저기로 10여 차례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많은 자료와 서적 등을 가지고 이사를 다니느라 고생 하는 것을 보다 못한, 초대 법무장관이었던 이인선생이 평생에 걸쳐 마련한 돈과 집을 기증하였고, 이를 계기로 모금운동을 벌여 1977년에야 비로소 지금의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3길에 한글회관을 마련하여, 한글학회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 주시경선생과 그의 집터
한글 가온길에는 주시경선생의 집터가 있는데, 선생의 살림살이가 항상 궁핍해서, 조그만 집은 5남매와 책들로 비좁아, 발 들여 놓을 공간도 없을 정도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 독지가가 집을 마련해 주었고, 이후 주시경선생의 집은 ‘한글발전연구소’ 역할을 하게 되었다. 평생, 한글 연구에 몸 바쳐 오던 선생은 1914년, 39세의 젊은 나이에 이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곳은 지금은 '용비어천가'란 이름의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도렴2동 녹지공원 ‘주시경 마당’에는 한글 발전에 초석이 된 주시경선생과 헐버트선생의 동상, 그리고 부조가 조형물로 설치되어있다.
◇ 헐버트선생
헐버트선생은 2013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도 선정된 미국인으로, 한글이 가장 과학적이고 훌륭한 글자라고 주장하며 세계에 한글을 알리는 데 공헌한 인물이다. 선생은 우리나라 한글로 된 라는 책을 만들었다. '조선 글자가 중국 글자에 비해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오.' 하면서 한국인보다 더 한글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양화진 절두산에 있는 그의 묘지 비석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나는 웨스트민스턴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하노라.’
◇ 김슬옹 박사
한글 가온길과 떼어서 생각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한글학자 김슬옹 박사다.
그는 젊은 시절에 철도공무원의 꿈을 안고 철도 대학교에 다니던 사람이다.
어느 날, 외솔 최현배선생의 영향을 받아 그분의 뜻을 이어 받고자 철도공무원의 꿈을 접고. 최현배선생이 강의를 맡고 있던 연세대 국문과에 입학 하였다. 그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한글 사랑과 바른 한글사용의 보급에 힘쓰고 있으며, 현재 ‘한글학회 연구위원’으로도 일하고 있다.
그가 대학시절, 당시에 널리 사용하던 ‘서클’이란 모임이름을 ‘동아리’라는 이름으로 바꾸는 일과, 음식점에서 사용하는 ‘메뉴판’이라는 이름도 ‘차림표’라는 이름으로 바꾸는데 앞장서서, 지금은 그런 한글이 널리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슬옹’이란 그의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 아니다. 그는 ‘슬’기롭고 ‘옹’골찬 마음으로 한글을 사랑하는 옹달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김슬옹’으로 개명하였다.
김슬옹박사의 한글사랑이 온 국민에게 널리 퍼져서, 국민 모두가 한글을 사랑하는 ‘김슬옹박사’와 같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풍류-이스탄불, 풍류-베이징, 풍류-밀라노, 풍류-홍콩에 이어 풍류-서울 전시회(7월 13일~8월 9일)를 포스코미술관으로부터 초대받았다. 자랑스러운 조상 덕이었다. 그중 이탈리아 밀라노에서는 유럽을 대표해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유럽 예술과 패션의 중심지로 알려진 밀라노는 사진이 태동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런 도시가 2012년 9월 24일부터 말일까지를 ‘한국문화주일’로 선포했다. 우리 영화 등을 밀라노 상영관에서 개봉하고, 밀라노 광장에서 케이팝 공연과 한글을 소개하는 문화행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풍류-밀라노 사진전이 밀라노 사진학교(FORMA) 전시실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유럽 최초로 우리 문화주일을 선포하는 이탈리아 대한민국 총영사관과 밀라노시의 공동 축제였다.
전시 관람객은 날이 거듭될수록 늘었고, 전시작품에 대한 진지한 질문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 부부는 행복했다. 특히 전시 마지막 날에는 한 관람객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았다. 마감 시간이 임박한 저녁 7시경 관람객 무리에서 한 부인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부인은 작품 아래 붙여진 설명을 우리말로 읽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녀에게 한국어를 공부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설명서에 이탈리아어로 쓰여 있어 작품의 콘셉트는 이해했지만, 그 내용을 직접 한국 발음으로 듣고 싶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 관람객들이 둥그렇게 작품 앞에 모였다. 난 그들을 바라보며 작품 설명을 우리말로 천천히 읽어주었다.
“사진도 청각 예술의 소리처럼 증발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비록 말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의 정서를 이해하려는 관람객들의 열정에 나는 놀랐고,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관람객이 감상을 전해주었다.
“당신의 말을 듣고 작품을 보니 한국은 참 아름답고 고상한 나라란 것을 알겠어요.”
그때 느낀 벅찬 감동은 아직도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젊은 날 뜻도 모르고 겉멋에 흥얼거리던 칸초네 가락이 언뜻 떠올랐다.
풍류를 사랑했던 조상의 멋을 우린 사진기 뷰파인더 안에서 만날 수 있었다.
바람과 물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쉽게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특별한 장치가 필요했다. 시간이라는 날줄과 공간이라는 씨줄이었다. 그렇게 그 바람과 물에 맞는 그물을 엮으면서도 그 간격의 밀도가 또한 관건이었다.
내 사진기는 수많은 조합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내가 볼 수 없었던 세상을 사진기는 열어 주었다. 또한 바람과 물은 나라와 민족을 넘어서는 공통의 언어였으며, 창조의 숨결, 흐르는 생명이었다. 이렇게 준비된 사진을 통해, 관객의 내면 깊이 침잠해 있던 낯설음과 낯익음이 되살아나 새로운 이야기 길이 열리길 바랐다. 전시회가 나의 독백이 아니라 관객이 전시회를 완성시키는 주체이길 원했다. 관객과 작가 사이의 바람직한 긴장감.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는 호숫가 살얼음판 위를 걸을 때 전해지는 얼음의 울림을 기대했다.
스틸에는 동영상처럼 프레임마다 이어지는 스토리가 없다. 그래서 전시 중에 우리의 잠재의식 깊이 숨어 있는 이야기가 열렸으면 했다. 더 나아가 우리 조상들이 유언으로 후손들에게 남기고자 유전인자에 새겨놓은 우리 어른들의 오랜 이야기 말이다. 그 새로운 지혜의 이야기 길을 빛으로 나누고 싶었다.
포스코미술관 전시 중에는 초등학교 아이들의 방문이 있었다.
어른과 함께한 의젓한 아이들이었지만, 나는 당황했고 긴장했다. 아이들에게도 너무나 커다란 전시장이라 먼저 그 규모에 지루해하는 기색이 보였다. 먼저 전시장 안을 한껏 달려보게 했다. 여러 아이들의 달리기 소리에 당번 큐레이터가 질겁하여 뛰어 나왔지만 곧 상황을 이해했다. 그렇게 아이들과 아름다움에 대한 얘기를 시작해야 했다. 있는 듯 없는 듯 일하는 바람, 낮은 데로 흐르며 아낌없이 자신을 주는 물…. 그 나이 아이들이 듣기만 해도 웃음이 터지는 ‘똥’ 이 아름다울까? 등으로 족히 한 시간을 넘어, 어느 투어 못지않게 진지한 풍류를 나눌 수 있었다.
특히 이번 포스코미술관 전시에서는 그동안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연재하였던 18편을 가로 50cm로 디자인하여 작품 사이에 진열하였다. 그리고 다큐영상실에서는 예멘의 딸들(daughters of Yemen), 몽골의 색(color of Mongolia), 우리들…(about us…) 세 영상이 각각의 모니터로 상영되어 서로 다른 생각으로 인해 생겨나고 있는 난민들과 전쟁으로 파괴되어 이젠 사진으로만 남게 된 문화재들을 알리는 사진의 힘을 얘기했다.
새로운 단어가 방송에서 나온다. 그러면 순식간에 전국 방방 곡곡 모든 사람들이 그 말들을 순식간에 사용하는데 놀라운 속도다.
내가 살고 있을 때 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다. 난 그 말이 나온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이를 막론하고 그런 의미의 말을 사용할만하면 정확하게 전 국민이 사용하는 거다. 그 전파 속도도 놀랍지만 발음도 의미도 정확하게 정말 잘 사용한다는 게 놀라웠다. 나는 바로 안 나오는데 그들은 젊은이들이나 주부들은 물론이거니와 아주 나이가 많은 분들도 정확하게 그 발음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외래어들의 발음이 엉망인 국민들이지만 그들이 그렇게 되는 이유는 받침이 없는 가나로 발음 표기를 하기 때문에 절대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중학교 영어시간에 어머니들을 초청했다. 영어 선생님은 정확하게 발음을 했지만 전 학생들은 테이블을 ‘테이부루’ 라고 발음했다. 수 십 번을 영어 선생님이 발음을 해 주면서 반복을 시켰지만 허사였다. 가만히 책을 들여다보니 발음기호가 가나로 그렇게 되어 있었다. 거기 쓰여 있는 대로 읽으면 학생들의 발음이 정확했다. good bye는 ‘구또바이’ happy birthday는 ‘핫삐바스데~’ camouflage는 ‘카무후라쥬’ macdonald가 ‘마꾸도나르도’ 등등 정말 어처구니없는 발음기호로 쓰여 있었다. 내가 가나를 다 배우고 나니 절대로 그렇게 밖에는 더 이상 어떻게 표기가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웃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한글의 놀라움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처음에 그들이 하는 영어에 몹시 웃음이 나왔었지만 점점 그렇게 웃을 수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그렇게 밖에는 안 되는 언어를 가진 죄 밖에는 없었으니까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들 나름으로 외래어들을 자기들에게 맞게 만들어 내는 기술도 대단하다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화미콘’ 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냥 그게 TV게임 전용기를 외래어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 줄만 알았다. 그게 아니라 패밀리 컴퓨터의 준말로 가족 전체가 즐기는 컴퓨터란 의미라는 것이었다. 그런 놀라운 제조 외래어들이 얼마나 난무하는지 알 수가 없는데 일본인들은 어느 누구도 전연 헷갈리지 않고 발음도 정확하게 사용하처도 절대 안 틀리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쓰는 게 정말 놀라운 수준이다. 발음이 전 일본인들이 똑같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자신만만하게 그 발음을 고수하고 사용한다. 어느 한 사람 손가락질 안 한다. 영어 발음을 귀신같이 잘하는 사람일지라도 자기들끼리는 그 발음으로 통한다.
가끔 전철을 타면 영어로 떠들어대는 청소년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물론 동양인이다. 중국인이나 다른 동양인 학생들이 여행을 온 건지 우리는 얼굴과 차림만 보고는 구별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한참을 그렇게 같이 가다가 우리말로 하는 게 들린다. 왜 여기가 한국인데 우리의 위대한 한국말을 안 쓰고 영어로 하는지 알 수가 없지만 비밀스런 말인가? 하며 이해해 주려고 노력은 해 본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절대 그런 일본 청년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발음상의 문제로 그럴까?
자존심을 가지고 일본인이라는 것으로 발음이 틀려도 외래어들은 틀린 발음으로 쓰거나 자기 국민들 정서에 맞게 만들어 내놓은 말을 온 국민이 마다않고 자랑스럽게 쓴다. 미국인이 가장 놀라는 것도 어떻게 그렇게 맘대로 외래어를 만들어 내는지 놀라웠다고 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 미국인도 ‘화미콘’에 대해서 어찌나 온 국민이 자연스럽게 사용하는지 일본말인 줄 알아서 자기도 그렇게 말했다고 그러다가 어느 날 그게 준말이란 걸 알고 황당했었다며 그러나 아주 구또(GOOD) 라며 엄지를 치켜 올렸던 게 기억난다. 그들의 자존심을 이해하게 하는 구석이다.
라오스여행은 출발 이틀 전에 결정됐다. 딸 친구가 아파서 못가게 된 자리에 무임승차 하게 된 것이다. 시간이 없었던 탓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길을 나섰다. 갑작스레 준비된 이 여행은 ‘꽃보다 청춘’에서 나피디가 비행기표 한 장 달랑 주고 킥킥거리며 웃던 그 여행을 닮았다.
밤비행기를 타고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에 도착했다. 방비엥과 루앙프라방에 가기 위해서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공항에 도착해 호텔까지 택시를 탔다. 하룻밤을 보내고 비엔티엔에 가기 위해 여행자거리로 나섰다. 여행자거리는 한산했다. 짐을 들고 지나는 우리를 향해 툭툭이 기사가 “툭툭” 하고 속삭였다. 처음엔 그 소리가 우스웠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라오스 어디서나 툭툭이를 볼 수 있고 툭툭이 기사의 “툭툭” 소리에 “나이트 마켓, 하우 머치?”가 저절로 나와 흥정을 시작하곤 했다.
달러를 라오스 돈인 낍으로 환전을 해야 하는데 은행 문이 닫혀있었다. 생각해 보니 일요일이었다. 다행히 열려있는 환전소가 있어 환전은 어렵지 않았다. 100불을 환전하니 80만낍이 넘는 어마어마한 돈이 손에 들어왔다. 방비엥으로 가는 버스티켓을 예약하고 간단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여행사를 찾아다녔으나 문을 연 여행사를 찾지 못했다. 처음엔 어디든 있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한낮의 열기와 무거운 가방 때문인지 젖은 솜처럼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여행자거리에 있는 호텔에 들어가 도움을 청해보았다. 프론트에 있는 직원이 애써보았지만 빈자리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리를 잘 모르니 그 자리에서 맴도는 기분이었다. 툭툭이를 타고 트래블 에이젠시를 찾아볼까 하는데 툭툭이 기사와 말이 안통했다. 우리는 방비엥 가는 버스티켓 파는 여행사에 데려다 달라 하고 툭툭이 기사는 방비엥까지 자기가 가겠다는 것 같았다. 한참 말을 주고받았는데 서로 다른 말만 되풀이했다. 그 때 선한 인상의 흑인청년이 다가왔다. 툭툭이 기사와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문을 연 여행사가 있다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툭툭이 기사는 눈 앞에서 손님 하나를 잃고 말았다. 흑인청년이 가르쳐 준 대로 걷다가 한글로 커다랗게 ‘방비엥, 루앙프라방 버스티켓’이라고 써 진 간판을 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가보니 한국식당이었다. 거기서 1시반 티켓을 예약하고 라면과 라오스 볶음밥으로 점심까지 해결했다. 약속한 시간에 미니밴 기사가 빈차를 가지고 나타났다. 우리 들만 가게되나 했는데 여행자거리 골목골목을 누비며 예약된 사람들을 태웠다. 한인 식당을 통해 예약해서인지 하나같이 한국 사람들이었다. 미니밴 하나를 가득 태운 후에 출발한 차는 버스와 택시, 자전거와 오토바이, 경운기와 소들이 함께 달리는 2차선 도로를 마구마구 달렸다. 추월에 추월을 반복하는 아찔한 운전에 눈을 감을 수도 뜰 수도 없는 난감한 상태로 4시간을 달렸다.
구불구불 산길을 거쳐 방비엥에 도착하니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어질어질했다. 허리가 44 밖에 안돼 보이는 기사는 도착하자마자 얼른 밴 위로 올라가 어마어마한 무게의 트렁크들을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트렁크를 받아 든 여행객들은 바삐 사라졌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나 두리번거리는 우리 곁에서 “툭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리버뷰 방갈로, 하우 머치?” 라오스에서 처음 올라탄 툭툭이는 먼지를 일으키며 소박한 시골마을을 가로질러 달렸다. 툭툭이를 타고 방비엥 마을을 달리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재미있고 즐거운 일들이 기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