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잃은 지 7년째 되는 해였다. 두 딸과 아들 하나만 바라보며 살고 있던 그때 집 안에서 그녀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그림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변의 빈정거림을 참아가며 모았던 그 그림들. 그리고 자녀들이 모두 출가한 뒤 다시 찾아온 인생의 위기에서 그림은 또다시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판교에서 만난 하효순(河孝順·66)씨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그녀 나이 41세였다. 하늘같이 믿고 의지했던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녀 곁에는 아이 셋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강한 생활력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편안한 삶을 살아왔다. 고향인 진주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여자도 할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어머니 뜻에 따라 상경해 중앙대학교 보육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대학을 채 졸업하기도 전에 취직 제의가 들어왔다. 막연히 꿈꿔왔던 큰 회사의 비서 자리였다.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회사에 다니다 남편을 만났다. 그녀가 일하던 인천제철은 인천시청 근처. 자주 점심을 먹으러 가던 곳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알고 보니 지인의 친구였고, 자연스레 연애가 시작됐다. 그리고 결혼했고 아이 셋을 얻었다.
빈정거림 속에서 수집한 그림들
느닷없는 남편의 죽음. 하늘이 무너졌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뭘 해야 할지도 몰랐죠. 남편에게만 의지하고 살았었으니까. 세상 물정을 모르니 돕겠다는 다른 이들의 선의도 악의로 느껴졌어요. 날 깔보고 우습게 여기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죠. 그래도 다행인건 딱 하나 제대로 결심한 것이 하나 있었어요. 아이들은 제대로 공부를 가르쳐, 바르게 키우겠다는 결심이었죠.”
생계는 부동산 사업을 크게 하는 친구를 도우며 유지했다. 오직 아이들의 공부에만 집중하며 지냈다. 그 와중에 유일한 그녀의 버팀목이 된 것은 그림이었다.
“동양화를 좋아하셨던 아버지 영향인지 자연스럽게 그림을 좋아했어요. 남편과 백화점에 가면 늘 들르던 곳이 있는데 맨 위층이었어요. 그곳에 갤러리와 분재 매장이 함께 있었는데, 남편은 분재를, 저는 그림을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그때부터 그림을 한 점씩 사모으기 시작했어요.” 당시만 해도 그림을 산다는 것은 주변으로부터 쉽게 이해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집이 화랑이냐는 핀잔은 양반이었다. 어떤 친구는 돌았냐고도 했다.
동향 사람이라 더 애착이 갔던 박생광(朴生光·1904~1985) 화백의 작품은 할부로 구입하기도 했다. 그밖에 배정례(裵貞禮·1916~2006),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1913~2001), 문봉선(文鳳宣·1961~ ) 화백 등 내로라하는 작가의 그림들로 집안을 채워나갔다. 남편을 보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한 삶의 낙은 갤러리를 찾는 것이었다. 갤러리 직원들은 그녀를 ‘청담동 지영이 엄마’로 잊지 않고 기억할 정도였다.
“문봉선 화백은 그가 대학원생일 때 처음 만났어요. 작품에 관해 묻자 수줍어하던 문 화백이 아직도 생각이 나요. 그 이후 그분의 작품을 하나 더 살 기회가 있었는데, 사정상 다시 돌려드려야 했어요. 그때도 절 기억해 주시더라고요. 그림을 수집하는 것은 단지 작품을 소유하는 것 이상으로 작가와의 관계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죠.”
큰딸 한마디에 정신 번쩍, 생계현장 속으로
어느 날 “엄마 우리 괜찮아?”라는 큰딸의 질문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고 했다. 부동산 경기는 꺼져가고 있었고,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을 주변의 지인들에게 그림을 팔아 위기를 겨우 넘기고 있는 상태였다. 남편을 보내고 난 뒤 7년째, 아이의 지적에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야겠다는 각오가 생겼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광명의 프랜차이즈 피자 매장이었다. 젊은이들과 계속 만날 수 있고, 일찍 끝날 수 있는 일을 찾다 발견한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기대 이상으로 잘 됐죠. 잘 돼야만 했고.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같이 왕복 34km 거리를 출근했어요. 시장도 직접 다니고, 주방에서 설거지도 도맡아 했죠. 그 매장을 시작하면서, 본사 회장에게 그 지역의 랜드마크로 만들 것이라고 큰소리 쳤는데, 실제로 그렇게 됐죠. 덕분에 빚도 갚고 세 아이의 교육도 제대로 시킬 수 있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자식 농사’만큼은 떵떵거릴 수 있게 됐다. 첫째 딸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모 대학 교수로 활동 중이고, 둘째 딸은 국내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로펌에서 11년째 비서로 근무 중이다. 막내아들은 국내 은행을 다니다 뉴욕주립대학에서 MBA를 마치고 미국 유명 컨설팅 회사에서 근무 중이다.
짧게 보낸 두 번째 결혼과 맞닥뜨린 지옥
그렇게 생활이 안정되어 갈 때쯤 큰 결심을 하게 된다. 재혼이다. 54세가 됐을 때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살다가 큰애 결혼시키고, 막내 군대 보내고 나니 뒤를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아이들은 내 손에서 멀어져 가고, 밥 한 끼 함께할 사람이 없게 되더라고요. 자식도 소용 없다는 생각을 할 때쯤 친구들의 소개가 있었어요.”
차관까지 지낸 관료 출신에 무엇보다 성격이 잘 맞았다. 둘 다 따지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일은 순식간에 진행됐고, 그렇게 두 번째 인생은 순조로운 듯 보였다. 새 남편의 고향에 내려가 살겠다는 결심도 했고, 집도 마련했었다.
하지만 10년이 채 안 돼 남편을 식도암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모든 게 내 탓 같았다. 남편을 두 번이나 떠나보내고 남겨진 여자의 마음이 편안할 리 없었다.
“지옥 같았어요. 세상 사람 모두가 내게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고, 누구와도 눈을 마주칠 수조차 없었어요. 계속해서 숨고만 싶었고, 실제로 집 밖에 나가지 못하고 커튼이 드리워진 방에 숨어 있었죠. 건강도 순식간에 악화됐고요.”
그래서 미국 뉴욕에 있던 아들에게로 갔다. 한국에 있는 것만으로도 비난받는 기분이었다. 그때도 힘이 되어 준 것은 그림이었다.
“유명한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많지만, 센트럴파크 근처에 작은 화랑들이 많아요. 그곳에 출근도장 찍듯 매일 가서 종일 그림만 보고 살았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는 아들이 함께 관광지에 갔다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카메라 뷰파인더 속에 비치는 엄마의 얼굴이 너무 슬퍼 보인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죠.”
그 이후로 2년을 더 그렇게 살았다.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하고, 큰 소리도 못내고 그렇게.
고희(古稀)에 개인전 통해 인생 되돌아볼 터
집 안에만 머물다 인생의 활기를 찾은 계기는 두 권의 책이었다. 부산의 친구가 선물한 컬러링북과 며느리가 가져다준 흔한 잡지 한 권.
무채색의 컬러링북에 하나하나 색을 입혀가다 보니 그림은 소유하고,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스스로 색을 입히고,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지금 그림 인생의 원천이 된 갤러리 겸 커뮤니티인 ‘아트담’이다.
“살면서 4B연필 한 번 잡아본 적 없었는데 그림을 어떻게 그릴 수 있겠어요. 그냥 무작정 이곳으로 찾아와 졸랐어요. 유치원 다니는 아이 한 명 가르친다는 기분으로 가르쳐 달라고. 그 이후로 2년 가까이 한 번도 결석 없이 나왔어요.”
그렇게 세 번째로 그녀의 인생에 다시 기둥이 된 그림은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림을 직접 그려서가 아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관계들과 자신감, 재발견한 삶의 목적 때문이었다.
“지금은 전에 무심히 지나쳤던 작은 것 하나하나가 다르게 보여요. 이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꽃잎이 어떻게 나고 지는지. 세상이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유심히 관찰할 수 있게 됐죠.”
무작정 피하려는 삶,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던 삶에서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물론 건강도 되찾았다. 이제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도 몇 잔 마실 수 있게 됐다.
“이렇게 개인사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고,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된 것이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죠. 회원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스케치하러 이곳저곳 다니고, 마음을 나눈 것도 큰 도움이 됐어요. 이제는 손주들한테도 피자 할머니가 아닌 화가 할머니로 설 수 있어 더 좋고. 앞으론 손주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하효순씨의 또 다른 도전은 이제 개인전이다. 개인전은 아마추어에서 대중에게 평가를 받는 위치로 올라선다는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사이에선 단순한 전시 이상의 무엇이다. 그동안 아트담 회원들과 함께했던 두 번의 그룹전과는 성격이 다르다.
“제 나이 일흔 살을 기념해 그간에 그린 작품들이 모여지면 전시회를 하는 것이 꿈이에요. 열심히 노력해서 그리다 보면 그 결과물들을 남에게 보여줄 마음이 생기겠죠. 나이가 많더라도 무언가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증명해내고 싶어요.”
그 이야기와 함께 그녀가 내보인 자신의 작품의 제목은 ‘내 인생의 오후’였다. 그림 속에서는 곧 황혼을 앞둔 슬픔보다는 행복한 오후의 한순간이 느껴졌다. 이미 전해들은 인생의 굴곡이나 어려움이느껴지지 않는 그런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늙는 건 생각보다 그리 나쁜 건 아니에요. 불필요하게 의식하지 말고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으면 해요. 밝은 면만 보고 지내다 보면 어느새 인생은 아름다워져 있을 겁니다.”
‘자동차 왕’으로 불리는 헨리 포드(Henry Ford)가 80세 생일을 맞아 열린 축하연에서 “당신이 일생 동안 이루어 놓은 훌륭한 일들 가운데, 가장 크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야 물론 나의 가정입니다.”
인류의 과학사에 남긴 공적으로 노벨 물리학상과 노벨 화학상을 연이어 수상한 폴란드 태생의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퀴리 부인)는 “가족들이 서로 맺어져서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어떤 부나 명예보다도 가정, 가족관계가 귀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특히 실버 라이프를 살아가는 남성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가정, 특히 아내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노후에 아내 없이 혼자 살아가는 남성보다 더 비참한 존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근래에 들어 결혼 생활 20년이 지난 뒤에 하는 ‘황혼이혼’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지난해 통계를 보면 결혼해서 30년이 넘은 부부의 이혼건수가 2004년에 4600여 건, 2009년에 7200여 건이었던 것이 2014년에는 1만300여 건으로 10년 만에 3배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이러한 헌상은 ‘남은 인생은 남편이 없어도, 아니 남편이 없어야 잘 살 수 있다’는 실버 세대 여성들의 독립선언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남편들은 월급을 가져다 주는 것, 즉 확실한 ‘현금출납기’의 역할만으로 집안에서 왕 노릇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가사노동에서부터 자녀의 육아, 진학, 결혼에 이르기까지 가정에서의 모든 일들은 아내에게 떠맡기고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오랜 유교적 전통과 남성 중심 교육의 결과로 대다수의 아내들은 그것을 당연히, 혹은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며 살아 왔습니다.
그러면서 대다수 부부들은 어쩌면 돈보다 더 중요한, 부부간의 대화와 소통 없이 같은 울타리 안에서 동거인 비슷한 생활을 지속해 온 것입니다. 그러다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면서, 졸지에 ‘현금인출기’ 기능이 사라진 상태에서, 부부가 집안에서 얼굴을 맞대며 지내야 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늘어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전개됩니다. 이런 상황은 필연적으로 남편과 아내의 위상 역전, 혹은 갈등 증폭 현상을 불러오게 됩니다.
평생을 가장으로 군림해 온 남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건 정말 있을 수 없는, 견디기 힘든 참담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직장에서 퇴직을 하고 나면 누구나 외롭고 허전하고, 때로는 상당 기간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헤매게 됩니다.
그런 공허함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내인데, 정작 가장 필요하고 가장 의지하고 싶은 순간에 아내는 그런 남편들의 언덕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그 아내들을 나쁘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며,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월급봉투를 무기로 삼고, 가정의 문제를 등한시해온 긴 세월동안, 아내는 가정 내에서 자기만의 성벽을 굳건하게 쌓아 왔습니다.
그러니 현금인출기라는 유일한 무기마저 잃어버린 남편이 그 두터운 벽을 뚫고 들어가기에는 역부족의 상태가 돼버린 것이지요.
아내 역시 이성적으로는 남편이 안됐다거나, 잘 대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이미 남편과의 사이에 세워진 심리적 장벽은 그 자신조차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높고 튼튼한 것이 돼버렸으니까요.
오히려 은퇴하여 집에 박혀 있는 남편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질환까지 앓게 되는 여성들의 수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은퇴남편 증후군(Retired Husbands’ Syndroms)’이라는 생소한 정신질환까지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시작된 부부간의 갈등이 발전하여 급기야 황혼이혼의 폭발적 증가라는 사회문제로까지 비화하게 된 것입니다.
황혼이혼을 당한 남편들의 그 이후의 삶은 거의 오아시스조차 말라 버린 사막에서의 생활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맙니다.
노후에 벌어지는 부부갈등의 경우 자식조차도 아버지를 이해하거나 아버지의 편에 서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아내들이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식들 역시 성장기에 아버지는 ‘돈 버는 기계’였을 뿐, 아버지와 따스한 인간적 교감을 나눠 본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남편이 없어도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없지만, 남성의 경우는 배우자 없는 혼자만의 삶을 제대로 유지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남편들은 평생 동안 직장생활 말고는 먹고, 입고, 자고, 살아가는 거의 모든 일을 아내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해 왔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막고 행복한 노후의 필수 조건인 ‘배우자와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제 경험을 토대로 말씀드리자면, 은퇴하기 훨씬 이전부터 남편들이 스스로 현금지급기 역할을 넘어서는, 아내가, 그리고 가정이 필요로 하는 다기능설비(multi-functional equipment)가 되기 위해 노력과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남편들의 발상의 전환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밥해 먹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소위 3D 업종에 해당하는 가사노동에서부터, 자녀 교육, 진학, 결혼 등의 일들이 결코 아내만의 일이 아닌,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데서 발생하는 ‘공동의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함께하는 것을 생활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아내도 노후에 남편을 위해 밥 짓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을 즐거워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저는 은퇴한 이후로도 상대적으로 아내와의 원만한 관계를 향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것은 제가 그런 일들을 잘해서가 아니라, 아내가 평소의 저의 그런 자세와 노력을 인정하고 평가해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평상시부터 아내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평상시 아내와 함께 외식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차를 마시는 생활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만약 주말의 취미생활을 아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요.
평상시 주말에 골프 치는 노력과 시간의 절반만이라도 아내를 위해 할애한다면, 노후에 아내가 남편을 배려하는 노력과 시간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입니다.
요컨대, 갑자기 늘어난, 두 사람이 함께 보내야 하는 시간을 어색한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평상시에 함께 시간 보내는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건인 아내를 곁에 잡아 두고, 변함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해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아내가 자신만의 성을 높이 쌓아 올리지 않도록 하는 관심과 배려를 잊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지 못한 상태로 노후를 보내게 된다면, 무엇보다 아내가 살고 있는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아내의 독자적 영역에 간섭하거나 허물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은퇴한 이후에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아내는 남편의 뜻에 따라서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면, 조만간 황혼이혼 통보서를 받아 들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실버 세대 남성들이여!
“형! 남자가 나이 들면 필요한 세 가지가 뭔지 알아? 마누라, 집사람, 와이프래!”라는 실버 보험광고에 등장하는 배우 송재호의 너스레는 결코 너스레가 아닌, 100% 진실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삽시다.
>> 조용경(趙庸耿)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해서 한국은행을 거쳐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故 박태준 회장의 비서부장과 홍보부장과 회장 보좌역으로 일했다. 포스코건설 인천 송도신도시사업본부장과 지난 2009년부터 2012년 3월까지 포스코엔지니어링(전 대우엔지니어링)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현재 포스코엔지니어링 상임고문, 한국트라이애슬론연맹 부회장, (사)글로벌인재경영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어느 날, 남대문 시장 노점에서 메뚜기 설 볶아놓은 것을 한 대접 사왔다. 위생처리 겸 프라이팬에 다시 한 번 더 볶은 후 맛있게 집어먹고 있을 때, 퇴근하여 거실로 들어서던 며느리가 흠칫 놀라며 얼굴을 찌푸렸다.
“어머니… 어떻게 그것을, 잡수세요?”
“먹어봐라, 고소하다! 아, 이제야 메뚜기 솟증[素症]을 풀었다!”
노릿노릿 잘 볶아진 메뚜기 두세 마리를 집어건네자 며느리는 뒷걸음질을 치며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웃었다. 물방개와 잠자리 여치를 잡아 구워먹은 옛이야기를 하면 꾸며낸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무논과 수초 많은 개울이나 못[池] 가장자리에서 우렁이와 개구리를 잡아먹었다면 그런 곳(무논 등)이 어디 있느냐며 과장하여 표현하는 줄 안다.
산속 계곡 물속에서 다슬기와 가재를 잡아먹었다면 그 정도는 믿어준다. 산행하다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란다. 특히 참새 개구리 잠자리 물방개를 잡아 구워먹고 구운 물방개의 살찐 뱃대지가 입안에서 툭 터질 때의 쾌감이 좋았다고 하면 “아, 어머니 몬도가네!”라고 한다.
그렇다. 며느리는 나를 몬도가네 버금가는 못말리는 여사로 알고 있다. 김장배추도 푸른 잎이 많이 달린 뻣뻣하고 못생긴 야생 배추를 쭉쭉 찢어먹기 좋아하고, 썰어서 버리는 배추김치 대가리조차 와삭와삭 씹어먹는 나에게 더러는 연민의 눈초리도 보낸다. 뿐인가, 보리쌀을 두 번 삶은 순 꽁보리밥과 누런 다시멸치 몇 마리 넣은 멀건 된장국 만으로 식사하길 좋아하고, 찬밥 물에 말아 새우젓 한 가지로 혹은 된장에 박은 고추장아찌 두세 개로 한끼를 때우곤 “아 잘먹었다!” 만족한 낯빛의 나를 더러는 멸시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한다.
가마솥 가득한 보리밥을 보며
가난에 절어서 먹을 음식 같지 않은 조야한 것들로 목숨을 연명해온 당신의 성장과정이, 또한 그때로부터 수십년을 더 살고도 그것을 잊지 못해 즐기는 당신의 지금 모습이 너무나 안쓰럽고 불쌍하여 눈물을 머금기도 한다.
그럴 것이다. 수십년을 지나고도 상기도 그때의 입맛이 뇌리와 심층 켜켜에 박혀, 그렇게 양육된 살과 뼈와 피가 영혼까지 흡수하여 향수(鄕愁)라는 미명으로 그립고 그리워 찾게 되는, 그 즈음의 먹거리며 하늘이며 바람이며 공기며 사람냄새 풍기던 촌스럽고 순박하던 인심이며, 그것은 진득한 사랑이며 아픔이었다.
1950~60년대는 모두가 가난할 때였지만 농촌은 더욱 가난했었다. 그러나 찢어지게 가난한 삶 속에서도 여자들은 더욱 바닥 대접을 받았다. 우리 집만 해도 그랬다. 대가족으로 가마솥 가득 보리밥을 지으면 가운데 한움큼 얹은 쌀은 보리쌀과 섞어 할아버지 아버지 오빠 할머니 순서로 밥을 담고, 나머지는 전부 보리밥으로 어머니를 비롯한 여자들 차지였다. 보리밥뿐만 아니라 나물밥 무밥 고구마밥 등으로 곡식을 아끼기도 했지만, 그나마 여자들에게는 별미이기도 했다.
당시의 김장밭 배추는 비료나 속성 영양분을 주지 않아 푸르고 질기고 가운데만 노란 속잎 이 조금 차 있었는데(지금은 푸른 잎이 거의 없지만) 노란 부위는 어른들 상에 썰어놓고 푸르고 억센 겉잎과 대가리는 여자들 차지였다. 갈치나 고등어를 굽거나 졸이면 살은 전부 어른 상이고 여자들은 대가리와 꼬리부분, 닭 백숙을 하면 껍질과 국물 정도 맛보는 형편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나는 막내라 어른 상이 물려지면 남은 반찬을 제일 먼저 차지하는 특혜를 누렸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 섭취했던 음식은 그야말로 현대에 와선 웰빙식이나 다름없다. 비료나 속성 영양제를 주어 성숙시킨 인공식품이 아니라 천연의 햇살과 바람과 흙이 키워낸 ‘자연식’ 그대로였다. 사람들의 인성도 우직스러웠지만 대체적으로 순수하고 소박했으며 교활하거나 사기치는 사람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지금은 먹을 것이 넘쳐서 젊은이들은 다이어트 식품 섭취와 자기관리에 혈안이 되어 영양실조로 비틀거리는 웃지못할 현상이 일어나고, 오히려 못살 때 먹던 ‘자연식’을 찾는다. 자연식을 찾아 귀촌하는 사람도 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현상인가.
금쪽이야 보물이야 품던 ‘아들’들이 TV에서 걸핏하면 고만한 여성에게서 뺨을 맞고, 하이힐에 무릎이 차이는 수난과, 설거지며 아기 키우기에 비지땀을 닦고 있음을 본다. 장모 눈치 아내 눈치 살피기로 눈동자는 연일 충혈되어 있고, 사나이다운 기개는 어디에도 없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과연 저 남자들이 이 나라를 지켜줄 수 있을까 심히 불안해진다.
남녀 성의 특징은 유전자부터 너무나 다르다. 특성이 그 성의 적성이라면 각각의 역할이 분명히 다르거늘, 여자 남자 특성이 뒤죽박죽 혼성되어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다.
당시, 딸들이라고 남자들에게 당하고 살지만은 않았다. 열 두세 살부터 열 대여섯 살까지 동네 여식들은 밤마다 수틀을 들고 어른 출타중인 동무집으로 몰려들었다. 시집갈 준비로 신부의 필수 혼수인 베갯잇을 수놓아 만들고 횃대보와 상(床)보도 십자수를 놓고, 버선을 수십짝 만드는 등 등잔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고 수를 놓았다. 재잘재잘 수다도 떨었다. 그러면서 사흘이 멀다하고 공동야식도 했다. 모두가 각자 집에서 쌀 두세홉, 배추김치 한 쪽씩을 훔쳐와 모두어 밥을 지었다. 갓 지은 하얀 쌀밥에 노란 속 김치를 쭉쭉 찢어 걸쳐서 한입 가득 우겨넣고 씹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오빠만 먹는 흰 쌀밥과 노란 속 배추김치를 그릇 수북히 담아 원을 풀었다.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햐얀 쌀밥은 입안에서 제대로 씹히지도 않고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부드럽고 노란 배추속잎은 시퍼렇고 질긴 배추잎에 길든 이빨을 간지럽혔다.
어떤 동무는 자기 집 닭서리를 유도하여 닭백숙을 만들어 영양 결핍의 여식들 몸뚱이에 기름을 넣기도 했고, 더러는 집에서 담근 밀주를 퍼내와 마른 명태를 찢어 음주도 즐겼었다.
황혼의 가장 소중한 자산은?
감히 집 곡식을 훔쳐와 이렇듯 야식을 즐길 수 있는 여자들은 그나마 딸자식들이었다. 며느리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행위들이었다. 딸자식은 부모에게 들켜도 나무람을 듣는 정도로 끝났지만 며느리들은 심하면 쫓겨나거나 좀 더 엄한 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져도 너무나 달라졌다. 숙녀가 신사의 빰을치는 것이 예사로운 세상이 된 것 이상으로 늙은이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공경심 따위는 진작에 없어져 기대도 않는다지만, 일 나가는 며느리가 살림 사는 시부모 부려대는 모습에는 한숨이 절로 터진다.
세상이 미친년 널뛰듯 뒤집어져 버린 것을 어찌하느냐고 많은 어른들이 포기하는 척 이해하는 척 말들도 하지만, 삿대질에 거친 말 거침없이 내뱉는 젊은이의 눈앞 폭력이 두렵다 해도, 또한 그 며느리에 의지하여 밥을 먹는 상황이라 해도, 자신의 정체성을 저버린 당신의 모습은 처량하다. 스스로 만들어낸 푸대접이며 상황설정이라는 생각이다.
황혼녘의 우리 모두에게 남아 있는 가장 소중한 재산은 오로지 ‘시간’뿐임을 누구나 다 알면서 그 시간을 온통 빼앗기고 사는,빼앗기는 줄도 모르고 착취 희생을 즐기며 자위하는 어른들도 많다니, 각각의 마음을 누가 어쩌겠는가.
누구나 인생은 한 번뿐이며,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유일한 내 재산인 ‘시간’은 천금 만금보다 더 윗자리의 소중한 것이거늘, 진정 나를 위해 그 시간을 보듬고 살고 있는지 열 번 스무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최근 ‘존엄한 죽음’을 위한 법이 통과되었다.
회복되지 못할 말기암 환자나 다른 위중한 병으로 회생불능의 상태임을 의사가 진단하면,더 이상 숨이 붙어 있게 연명치료를 하지 않아도 불법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이전 법은 회생불능의 환자라 해도 온갖 생명 연장 장치를 환자에게 설치하여 숨이 끊어지는 시간을 늦추거나 기적처럼 회복도 시키는 의료법을 의사들이 강행했지만(그러지 않았을 경우 의사는 살인죄로 제소될 수도 있으므로),이제는 환자가 입원 당시에 승낙을 하지 않아도 가족들로 인해 생명 연장 장치를 거두어 버리거나 아예 하지 않아도 된다는 법이다.
물론 옛날에도, 현재도 우리 풍습에 ‘객사시키지 않는다’며 가망이 없다는 환자를 가족들이 퇴원시켜 집으로 옮겨가는 경우는 있었다.그리고 실제 종합병원 등에서는 법이 통과되기 이전부터 내부적으로 행하여지고 있었다.대개 가족들이 금전적인 이유로 혹은 환자의 원함으로 이루어지고는 있었지만, 이제 그것이 정식으로 합법화된 것이다.
살아나지 못할 환자인데 온몸에 주저리 주저리 생명줄을(인공호흡기등) 시설하여 고통을 줄 필요가 없다는 취지인 듯싶지만(그러한 부분도 없지 않다),여기에는 의도적인 많은 위험한 요소들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세상에 죽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죽을 시간의 장단(길고 짧음)이 있을 뿐 모두 죽지만, 상호간(가족관계등)의 이해관계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충분히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일한 ‘내 자산’은 ‘내 시간’ 이다
몸이 건강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죽을 병이면 생명 연장 시설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병원에 입원케 되면 백명의 환자 모두가 ”어떤 방법으로든 살려달라“고 의사에게 매달린다고 한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고 현실이라는 것이다.
본인의 의사를 분명히 밝혀둠이 어른들이 갖춰야 할 순서이다. 본인의 의사가 없으면 가족들이 각각의 의견을 내놓는 살벌한 분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큰아들은 ‘연명’ 시설을 말자 하고 둘째아들은 ‘시설을 하자’는 상반된 의견으로 내 목숨이 자식 손에 달려 있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그들에게 상처를 안겨주게도 된다.
정부도 그렇다. 이런 엄숙하고 중대한 법을 합법화시키려면 따뜻한 대접을 받으며 인생을 정리하면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호스피스 병동시설이 우선 만들어져 병행되어야 하고, 문제화될 수 있는 부분을 의혹이 없도록 규정을 마련해야 되겠지만,어쨌거나 가장 먼저 법시행을 맞이하는 당사자는 바로 우리 어르신(노안)들이다.
오로지 유일하게 내 재산인 앞으로의 내 ‘시간’을,즐길 일이고 아낄 일이다.당당하게 변한 세상과 맞서면서 소리도 질러보고 노래도 불러보고 하고 싶은 일을 세상 눈치 볼 것 없이 즐길 일이다. 내 코가 석자인데 내 떠난 후의 남은 사람 걱정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다. 이제는 오로지 나만 위해 살아야, 후회없이 쉽게 미소 머금으며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지 않겠는가.
자식과 같이 산다고 생각하니 갈등이 생길 것 같다. 하지만 배우자와 둘만 살자니 뭔가 적적한 느낌이 올 때도 있다. 손주 녀석들이 보고 싶어 전화기를 들지만, 막상 보려고 하면 귀찮아 수화기를 내려놓기도 한다. 자식과 ‘함께 사는 것’이 망설여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와도 맞물려 있다. 여유로운 황혼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 거기에 자녀 내외와의 갈등이 생길 것에 대한 걱정과 ‘품 안의 자식이 나태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더해지면서 지레 겁을 먹는 것이다.
가정경영연구소의 강학중 소장은 “자녀와 ‘함께 사는 것’은 해보지 않고 겁먹을 일이 아니다. ‘같이 사는 것’은 장점이 많아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설명한다. 같이 사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만 부각이 돼서 그렇지, 자식과 부모의 지혜를 모은다면 세대 간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해도 좋다는 뜻이다.
함께 살기. 도전해보자. 그 전에 확실히 해둬야 할 것은 동거의 목적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동거 그 자체가 목적인지, 행복을 위한 선택인지 말이다. 그것이 후자라면 강 소장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서로 합의하라
“같이 살면 어떤 갈등이 생길지 미리 예상을 해보세요. 그리고 그 예상 문제에 대한 모범 답안을 생각해본 후 동거를 시작하면 마음가짐부터 달라질 거예요.”
사실 자식뿐만 아니라 어떤 누구와 같이 산다고 해도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수십 년 같이 산 배우자와도 가끔은 다툼이 생기는데 세대 차이가 나는 자식이나 사위·며느리는 두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같이 살면서 이런 갈등을 피하려고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갈등이라는 것은 가족 구성원에게 문제가 있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구조적으로 한 집에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예상 문제들을 미리 준비해놓는다면 갈등은 가벼운 문제가 되고, 해결은 쉬워진다.
생활비 분담과 같은 경제적인 것부터 육아와 집안일의 분담 등 예상 문제들을 생각해보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같이 살다보면 가사는 여자가 담당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도 합의가 필요하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수평적으로 변하고 있는 요즘은 어느 한쪽의 주도나 강요에 따른 분담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강 소장은 설명했다.
“구성원 모두의 대화를 통해 만든 규칙을 A4 용지 분량으로 작성해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가령 ‘아침밥은 어머니가, 저녁밥은 며느리가 한다’ 등 간단한 것 말입니다. 연초에 이것을 만들었다면 분기별로 가족회의를 통해 개정해도 좋겠죠.”
강 소장은 갈등이 없어 좋은 시기인 동거 초기에 미리 어려운 이야기를 터놓고 이야기해보라고 조언한다. 예를 들면, 지금은 함께 살지만 누구나 그것을 원치 않을 때엔 서로 감정 상하지 않고 나가서 사는 것이 있다. 이것을 미리 말해둔다면,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갈등이 생겨 따로 살고 싶어졌다는 오해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거리를 지켜라
“신랑과 신부가 결혼을 했으니, 양가 부모들은 ‘자식이 아니라 남이라고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인생의 또 다른 출발점인 만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식과의 거리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 소장은 우리나라의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망치는 가장 큰 이유는 지나친 밀착 관계 탓이라고 설명했다. 자식이 성인이 됐거나, 결혼을 했으면 부모도 자식을 정서적으로 내보내고, 자식도 부모 품을 떠나 자립을 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 그렇지 못한 경향이 있다는 것. 그는 ‘함께 살기’ 위한 올바른 방법은 심리적·정서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이것을 ‘아름다운 거리’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에 실패하면 상호 의존적이 되거나, 한쪽의 영향력이 커져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릴 때의 자식과 성인이 된 자식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성인 자식의 행동양식이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닐 수가 있거든요.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부모에게만 요구되는 사항은 당연히 아닙니다. 자식들도 부모를 부모이기 전에 한 남자와 여성으로서 존중하는 게 당연하죠. 가끔은 부모가 자식 방에 들어오면 잘못됐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반대로 그런 경우에는 자식도 부모 방에 마음대로 드나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같이 살면서, 서로의 독립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형태의 동거가 늘고 있다. 간섭이나 강요는 없다. 대화와 타협, 그리고 존중이 존재한다.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다섯 자녀의 내외와 한 건물에서 함께 사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 건물에 살지만, 각각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모두 다르다. 한곳에 살지만, 독립적인 환경을 보장하는 것이다.
“같이는 살지만, 서로의 독립적인 생활과 취향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생활권 안에서 각자가 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같이 살면서도 자식이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부모도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노후 준비를 차근히 하는 것이 좋은 동거입니다.”
같이 살기? 장점이 많다
“요즘은 자식과 같이 살지 않는 것이 쿨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사실 두려워서 회피하는 것이면서 말이죠. 자식과 같이 살면, 즉 대가족이 되면 좋은 점은 많습니다.”
강 소장은 같이 살기의 가장 큰 장점 중 첫 번째가 역할 분담이라고 했다. 부모가 가진 경륜이 자식 내외와 손주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조부모와 함께 사는 가정의 아이들은 생활부터 다르다고 그는 말한다. 사람과 만나 소통하는 데 있어 구사하는 어휘의 범위도 커지고, 어른들을 대하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것이 더욱 깊다는 것이다. 가사 분담하는 것도 힘든 일의 부담을 줄일 수 있어 좋다.
두 번째로는 중년에 느끼는 외로움을 없애준다는 것이다. 손주의 육아를 일부분 담당하면 자식들에게도 큰 혜택이 되겠지만, 반대로 부모에게도 좋은 영향을 준다. 손주들에게 느끼는 생동감이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줘 외로움을 달래주기 때문이다. 손주들의 학습을 도와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컴퓨터나 스마트폰 조작법 등이 익숙하지 않을 때 그들에게서 배울 수도 있다.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활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거를 시작할 때 회의를 통해 생활비를 합리적으로 분담한다면 부모와 자식 모두 경제적인 부담을 반으로 줄일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공동 경비를 모아 가족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산다든지 여행을 간다든지 할 수 있어 가족의 화목을 다질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최근 들어 성인이 된 자녀와 함께 살아가는 황혼의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함께 사는 이유는 다양하다. 두 세대 이상의 더부살이는 우선 경제적으로 지출을 줄여준다. 자녀가 맞벌이를 한다면 양육에도 커다란 도움이 된다. 하지만 대신 크고 작은 갈등도 함께 많아진다는 점은 주의해야 한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현명한 ‘더부살이 방법론’이 중요해진다는 얘기다.
최근남(64세·남)씨 부부는 서울 구로구의 아파트에서 지난해 10월부터 아들 최현웅(36세·가명)씨와 다시 함께 살고 있다. 아들이 스무 살이 된 이후 16년 만이다. 은퇴 이후 부쩍 외로움을 느끼던 부부였다. 전세금을 피해 도망친 아들의 ‘귀향’이 반가웠다. 아들 내외가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화장실이 달린 큰 방을 비워주고 도배도 새로 했다. 사람 소리가 나는 것이 좋았다. 최씨 부부에게도 활기가 돌았다. 장을 보러 나서는 일이 많아졌고 식사도 식사다워졌다.
하지만 얼마 뒤부터 갈등이 시작됐다. 아들의 생활습관을 두고 “애도 아니고 뭐니?” 한마디 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얼마간 말이 오갔다. 기억나는 아들의 대답은 “나갈게요, 나가면 되잖아요!” 였다. 이후 아들과의 충돌은 점차 많아졌다.
한 지붕 2~3대 가구 늘어가는 추세
그동안 우리사회에서는 ‘핵가족화’가 진행돼 왔다. 산업화, 도시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독립한 뒤에 다시 집으로 들어오거나 성인이 된 후에도 아예 독립하지 않는 자녀들이 늘고 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함께 사는 자녀를 ‘캥거루족’, 독립한 뒤 다시 집에 들어오는 자녀를 ‘연어족’으로 부르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부모와 성인이 된 자녀가 한 지붕에서 사는 사례는 점점 늘어가는 추세다. 서울시가 2000~2010년 통계를 분석해 발표한 ‘서울가족구조통계’에 따르면 30~40대 성인 자녀가 가구주인 부모와 동거하는 수가 10년 새 91%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최근 자료인 지난해 통계에서는 60세 이상 서울시민의 45.2%가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비단 한국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나타난다. 독립정서가 강한 미국조차도 18~34세 10명 중 3명(29.9%) 가량이 부모의 집에서 살고 있다는 조사가 나온다. 이 비율은 1990년 26.8%, 2000년 27.7% 등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데, 현지 언론은 지속된 주택가격 급등을 원인으로 보고 있다. 일본에서는 20~30대 부모의 집에서 살아가는 30~40대가 약 300만 명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녀와 함께 사는 60대, 생활만족도 높아
두 세대가 함께 살면 가족의 삶이 풍성해진다. 다수의 학술연구 결과는 60대 이상 부부들이 자녀와 함께 사는 경우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자녀 역시 부모와 함께 사는 경우 생활 만족도가 높아진다. 이는 주로 주거·육아 등의 부분에서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서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일부에서는 아예 두 세대가 각각 살아가기에 용이하도록 설계된 집을 짓고 살기도 한다. 각자의 생활을 최대한 존중한 것이다. 경기 용인시에 거주하는 정순이(59세·여)씨는 전원주택으로의 이사를 계획하면서 아예 아들 내외와 살기 위한 집을 지었다. 두 세대가 한 지붕 아래에 거주하며 가깝게 소통하며 지내면서도 자잘한 간섭이 생길 여지를 없앴다. 정씨는 “주말 낮 북적대는 소리에 우리 부부도 활기를 얻게 됐다”면서 “아들 내외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니 며느리도 큰 불편이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아예 두 세대가 함께 사는 것을 고려해 집을 짓는 경우도 늘어가는 추세다. 특히 서울 등 대도시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의 경우 성인자녀와 살기에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주택시공업체 H사 관계자는 “두 세대가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짓고 싶다는 문의가 늘어가는 편”이라며 “최근에는 대형 건설사 아파트 중에서도 세대가 분리된 형태가 나온다”고 말했다.
자녀와 한 집서 살아가려면 갈등관리 중요
다만 예기치 못한 부분에서 갈등을 겪을 수도 있다. 김태현 성신여대 교수(여성학)는 “성인이 된 자녀라고 해도 생각, 관심사, 생활방식은 크게 다를 수 있다”며 “성인자녀들은 부모보다는 배우자나 자식들과 더 밀접함을 느끼고 있어 이러한 세대차이가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성인이 된 자녀의 생활과 가치관 등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조언이다.
특히 자녀가 어린 시절을 생각하고 권위적인 방식으로 소통에 나서는 경우 갈등이 커지기도 한다. 앞선 최씨의 경우 아들의 생활방식에 대한 아버지의 언급 이후 다툼이 잦아졌다. 최씨의 의도와 달리 아들에게는 권위적인 간섭이 됐을 수 있다는 얘기다.
때로는 경제적인 부분도 갈등의 불씨가 된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의 ‘은퇴리포트’에 따르면 성인 자녀 1명과 함께 살 때 추가로 필요한 생활비는 월 98만원이다. 보고서는 60대 부부가 중산층 수준의 생활을 하는 데 월 258만원이 필요한 반면, 자녀 2명과 3년가량 함께 사는 경우라면 총 7056만원의 생활비가 추가로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청춘합창단 이전과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단원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인생의 황혼기를 넘어 추락할 수 있는 상황에서 제2의 인생으로 반등할 수 있는 변곡점이 되어 준 사건이었습니다.”
권대욱 단장은 청춘합창단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남들 눈에는 성공한 인생을 살아온 것처럼 비치지만,오롯이 나만을 위한 삶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청춘합창단에 도전하게 됐고, 그 도전은 지금의 이상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했다.
“떨어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오디션 도전을 위해 주주를 설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어려울 땐 정면 돌파하는 평소 지론대로 움직였죠. 덕분에 마음 편하게 활동할 수 있었고, 방송으로 얻은 지명도 덕분에 회사 활동에도 도움이 돼 모두가 행복한 결과를 얻었습니다.”
유엔본부에서의 공연에 대해서는 일종의 책임감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통일에 의구심을 갖는 세대에게 우리 스스로가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를 제공해 주고 싶었습니다. 청춘합창단 단원 모두가 분단에 대한 책임과 통일에 대한 권리가 있는 세대라 생각하고 유엔 공연을 추진하게 됐고, 이제는 평양공연을 꿈꾸고 있습니다. 소외된 이웃과 시니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이 우리의 창단 목적임을 잊지 않고 꾸준히 활동해 나갈 것입니다.”
청춘합창단의 미래에 대해서는 영원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구성원의 변화는 있더라도 합창단 자체는 계속 명맥을 잇도록 한다는 것이다.
“체력적인 문제 등으로 활동 지속이 어려운 단원이 생기면 명예단원으로 물러서서 언제든 찾아올 수 있도록 하고, 빈자리는 오디션을 통해 제2의 인생을 꿈꾸는 또 다른 중년에게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수십 년간 이어져 오는 브로드웨이의 작품들처럼 계속해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도록 하고 싶습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다. 갑작스레 지휘자의 손끝이 하늘을 향한다. 그러자 실내의 모든 눈동자가 그 끝을 좇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일시에 숨과 함께 소리를 내뱉는다. 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게, 속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아야 한다. 그 사이에 그들의 시선은 정면의 손끝과 청중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갔다. 소리와 시선 사이엔 날카로운 긴장감만이 맴돌았다. 직접 목격한 청춘합창단의 공연은 예상 이상으로 진지했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평균 나이 65세’, ‘KBS ’, ‘유엔본부에서의 공연’. 이는 모두 청춘합창단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청춘합창단은 2011년 7월 3일부터 10월 9일까지 방영된 KBS 2TV의 간판 예능프로그램 해피선데이의 을 통해 조직된 시니어 합창단이다. 합창단에는 당시 나이 84세부터 52세까지 대학 교수, 양봉업자 등 다양한 나이와 배경의 중년들이 7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모였다.
은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1년 전 유사한 형태인 ‘남격합창단’을 방영하면서 엄청난 대중의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청춘합창단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청춘합창단은 방영이 거듭될수록 단원들의 인간적인 모습과 황혼의 나이에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장면들로 시청자들의 큰 사랑을 얻었다.
프로그램 종영 후 청춘합창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는 듯했지만, 최근 다시 한 번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들이 지난 6월 15일 미국 뉴욕에 위치한 유엔본부에서의 역사적인 공연을 치렀기 때문이다. 청춘합창단의 공연은 유엔에서 제정한 ‘세계 노인 학대 인식 제고의 날’(6월 15일)을 기념해 열렸다. 이 공연에서 청춘합창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아리랑’ 등 12곡을 불렀다. 특히 청춘합창단은 공연 이틀 전 생일(6월 13일)이었던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깜짝 선곡하기도 했는데, 공연을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반 총장은 무척 기뻐했다고. 이 공연을 위해 청춘합창단은 ‘마이 웨이(My Way)’와 ‘유 레이즈 미 업(You Raise Me Up)’과 같은 팝송 레퍼토리를 일부러 준비했고, 한국어 노래들은 자막을 준비하는 등의 정성을 기울였다.
지난 7월 KBS 인간극장을 통해 소개된 유엔 공연 도전기의 주인공이었던 김삼순 단원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청춘합창단에서의 활동이 제 인생을 모두 바꿔 놓았죠. 그전까지는 딸들을 위한 인생을 살았다면 지금은 온전히 제 인생을 사는 느낌입니다. 청춘합창단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아마 모두들 마찬가지일 겁니다.”
2011년 방송 종영 후 청춘합창단은 본격적인 합창단으로서의 활동을 위해 변신을 꾀했다. 강동구립여성합창단의 김상경 지휘자를 영입해 지금까지 연습과 공연을 함께하고 있다. 앰배서더 호텔의 권대욱 사장이 단장을 맡아 역사적인 유엔 공연의 일등 공신 역할을 했고, 방송을 통해 간과 신장을 이식 받은 사연이 소개됐던 이만덕 단원은 총무를 맡아 합창단의 모든 살림을 도맡았다. 당시 이만덕 총무는 수술 직후여서 몸과 연결된 의료기기를 휴대하고 오디션에 나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다행히 지금은 완치돼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청춘합창단이 방송에서 마지막 도전으로 참가해 은상을 수상했던 2011년 국민 합창대축제 대회에서 솔로 파트를 맡아 전 국민을 감동시켰던 최고령의 노강진 단원은 현재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 중이다.
그 밖의 개인 사정으로 활동을 못하게 된 단원들의 빈자리는 엄격한 오디션을 통해 채워졌다. 현재 원년 멤버는 약 절반 정도가 남은 상태. 지금은 KBS 오케스트라 하피스트 출신으로 관심을 모았던 배용자 단원이 최고령 왕언니 역할을 맡고 있다.
유엔본부에서의 공연 탓인지 청춘합창단을 찾는 이들의 요청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한 달에 두세 차례 공연이 몇 달 전부터 예약될 정도다. 정부부처부터 지자체에 이르기까지 찾는 곳도 다양하다.
왕언니 배용자 단원은 “이제는 무대를 앞두고 심하게 긴장되지 않을 정도로 활동이 익숙해졌습니다”라며 “동료 단원들과 신 나게 무대를 즐기는 것이 행복합니다”라고 말했다.
워낙 많은 인원이 모이는 탓에 연습장소 마련도 쉽지 않았다. 결국 과천시민회관에 어렵게 터를 잡고 매주 화요일 연습 중에 있다. 힘들게 자리를 잡은 만큼 연습에는 열정적이다. 김상경 지휘자도 연습과정에서 자발적인 연습을 강조했다.
“청춘합창단은 다른 합창단과는 다르게 상대의 실수나 단점을 지적해서는 안됩니다. 특성상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고, 대신 다른 단원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스스로가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현재 청춘합창단은 내년 5월 6일에 있을 정기연주회를 준비하고 있다. 통일기금 모금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공연을 위해 새로운 레퍼토리 연습에 한창이고, 새로운 단원도 모집 중이다.
권대욱 단장은 “중년들은 남은 인생 시간을 보내는 데 몰두하기 쉬운데, 그래선 안 됩니다. 살아가는 이유를 스스로 만들고, 청춘합창단의 단원들처럼 가슴 뛰는 일을 찾아 행동에 옮기셨으면 합니다”라고 조언했다.
원로가수 명국환(82)의 명함은 상당히 단순하다. 한문으로 원로가수 明國煥이라고 쓰여 있고 그 밑에 덩그러니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뒷면에는 데뷔연도와 히트곡 4곡이 적혀 있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무심함 속에 보이는 원로의 품격은 비로소 말을 해보니 알 수 있었다.
지난해 12월, ‘2014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장에 눈썹이 짙은 노신사가 포토월 앞에 섰다. 기자들은 ‘누구지? 일단 찍고 보자’라며 연신 플래시를 터뜨린다. 허나 노신사가 말끔한 정장을 입고 포토월에 서 있으니 어떠한 상을 받는 수상자 정도로만 짐작할 뿐, 그가 누군지 정확하게 이름 석자를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무더위가 한창이던 여름 영등포 거리에서 그를 만났다. 수많은 인파 속에 뒤섞여 있었지만,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듯한 그의 이름은 명국환. 60년 전에는 한국 가요계를 주름 잡았던 가수, 지금은 원로라는 수식어가 붙은 가수다.데뷔연도는 1954년. 그가 데뷔했을 때 태어난 사람도 이미 환갑을 넘었다. 그 세월만큼이나 가수 명국환이라는 이름 앞에 붙는 단어는 고귀하다.
원로(元老). 한 가지 일에 오래 종사해 경험과 공로가 많은 사람이라는 뜻. 결국 명국환에게 원로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그가 우리나라 대중가요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해 참석한 ‘2014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에서 자리를 빛낸 이유도 이와 같다. 우리나라 대중문화 발전에 공로가 큰 점을 인정받아 보관문화훈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의 나이 여든 둘. 어쩌면 가수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랐을지도 모르는 이때. 그는 가장 큰 보상을 받은 셈이다.
노신사 명국환이 인터뷰 도중 노래를 한다. 두 눈을 지긋하게 감고 부르는 그의 노래는 젊은 시절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구슬프고 애잔하다. 하지만 그 깊이는 황혼이 돼서야 더욱 은은한 빛을 발산하고 있다.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본 여든 둘의 나이에도 자신은 아직도 ‘노래밖에 모르는 숙맥’이라고 표현하는 명국환. 나이 탓인지 사람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해 대답하는 목소리가 자주 커지지만 옛 시절의 기억들을 토해내는 목소리는 꽤나 또렷하다.
◇악극단원을 꿈꾸던 소년
소년 명국환의 꿈은 악극단원이 되는 것이었다. 악극단원이 돼 전국을 돌아다니며 마음껏 노래하는 것. 그에게 그 꿈은 최고의 낭만이자 로망이었다. 밤이면 동구밖으로 나가 노래를 부르던 소년. 고향 황해도 연백에서 그는 이미 귀여운 스타였다.
“노래 한곡 해 보거라”하는 어른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구수하고 애달픈 노래 솜씨를 뽐낸다. 신청하는 노래 대부분 다 불렀을 정도로 음악을 사랑하던 소년 명국환이었다.하지만 그 시절은 목청 하나 믿고 돈을 번다는 것에 부정적인 시기였다. 그의 아버지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네가 노래를 잘 해봐야 얼마나 잘 하겠느냐’는 생각에 악극단원이 된다는 꿈을 포기하라며 소년 명국환에게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야말로 부모님의 결사반대였던 것이다.
“제 성격이 온순해서 그렇지 않은데 그때는 아버지가 반대하시자 대들었어요. 나는 가수가 될 거라면서요. 간섭하면 반항을 하겠다고 역으로 아버지께 엄포를 놓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호소력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지역 콩쿠르 대회에서 남인수의 ‘남아일생’을 불러 3등에 입선해 가수가 될 소질을 보이더니, 6·25전쟁이 끝난 직후 열린 전국 콩쿠르 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가수의 꿈을 마침내 이룬다.
“전국 콩쿠르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나서 그 다음해에 정식적인 가수로 데뷔를 했죠. 그게 1954년입니다. 그때 생각했죠.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말이죠.”
◇없어서 못 팔았던 레코드
“6·25전쟁 이후 이북의 실향민을 달래는 노래인 ‘백마야 울지마라’가 엄청난 히트를 쳤어요. 여기에서 ‘백마’는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것인데, 그것이 실향민들의 아픔을 잘 보듬어 줬던 것 같습니다.”
절절한 노랫말과 애절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명작 한 곡이 탄생했다. ‘백마야 울지 마라’다. 이 노래가 전파를 타자 전국 팔도에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레코드 상들은 이 레코드를 사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었다. 레코드 가게 근처의 여관에서 발매 전날 밤을 새워 사가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했다.
그가 백마야 울지 마라, 아리조나 카우보이, 방랑시인 김삿갓, 내 고향으로 마차는 간다 등을 잇따라 히트시키던 그 시기에 대중이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수단은 레코드가 아니면 라디오뿐이었다. 그마저도 여건이 열악해 사전 녹음방송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서 라디오 생방송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도 많다.
“1960년대 흑백TV의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에는 라디오 전성 시대였죠. 그런데 오로지 생방송밖에 할 수 없었죠. 라디오에 출연하면 모든 장르의 노래를 총망라해서 불러야 했는데, 어떤 때는 음정과 가사를 모르는 노래도 불렀습니다. 라디오에도 방청객이 있던 그때에는 가사를 틀리면 그들에게 사과를 하고 다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네요.”
◇청춘의 삼색 깃발
“장미꽃이 피어나는 새파란 가슴 / 저 하늘에 펄럭이는 청춘의 삼색 깃발 / 달 실은 청노새야 달려가자 / 별 실은 청노새야 달려가자.”
명국환의 노래 ‘청춘의 삼색 깃발’의 가사 중 일부분이다. 그의 이 노래는 당시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통제가 심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6·25전쟁 이후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 이 노래는 사찰계(현 국정원)의 타깃이 되기 쉬운 먹잇감이었다.
작사가 손로원은 노랫말을 쓰면서 전후의 아픔을 딛고 더 좋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자는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 그러나 그 가사가 발목을 잡았다. ‘장미꽃’과 ‘깃발’ 그리고 ‘달려가자’는 노랫말이 문제였다. 지금이야 장미의 색깔도 가지각색이지만 통상 ‘장미는 빨간색’이라는 통념이 있던 시절, 그것은 공산주의의 빨간색을 상징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깃발’ 또한 북을 상징하고 ‘청노새가 달려가자’는 것도 ‘북으로 당장 넘어가자’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6·25전쟁 때 뿜었던 피가 채 마르지 않았던 그 시절 그 곡은 그렇게 해석됐다.
작사가 손로원과 명국환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사상이 의심된다며 사찰계에 불려갔던 것도 수차례. 졸지에 ‘빨갱이’로 낙인 찍힐 판이었다.
“정말 당혹스러웠죠. 노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빨갱이’로 몰릴 판이었으니까요. 조사 과정에서 손로원 작사가는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을 강하게 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정말 아찔했던 순간이었죠.”
◇원로의 꿈
명국환은 여전히 현역이다. 그리고 왕성하다. 인터뷰가 끝난 다음 날에도 부산에 공연을 하러 갈 만큼 노래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전국 팔도를 누빈다. 하지만 이런 현재가 오기까지 오랜 기간의 정처 없는 휴식 기간이 있었다.
“1985년에 KBS에 ‘가요무대’가 생기고 나서 무대에 많이 섰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후배들이 자리를 채우면서 제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더라고요. 어쩔 수 없었죠. 그래서 원하지 않게 계속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 미련하죠. 다른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노래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 다른 일을 못하겠더라고요. 정말 노래밖에 모르는 숙맥이었지 뭐.”
이제는 후배 가수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 여든이 넘은 나이지만 품고 있는 꿈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꿈을 말해달라는 기자의 말에 머쓱해 하면서도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보이며 이야기한다.
“남들이 이 나이 들어서 이런 말을 하면 욕심이라고 해요. 앞으로 10년만 더 노래를 하고 싶어요. 사실 제 목소리가 살아 있으니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이 나이에 현역으로서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정말 행운인 것 같아요. 아직도 공연장에 가면 한 차례 공연에 몇 백만원을 받으니 이만한 능력이 어디 있겠어요?”
1970년대부터 KBS 가요무대가 시작됐던 1985년까지 이렇다 할 소득이 없이, 노래만 불렀던 ‘숙맥 원로’ 명국환은 이제 옛 것을 그리워하는 오늘날 더욱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중견 제조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P(70·남)씨는 아들의 사업 때문에 지난 몇 년간 적잖이 골머리를 앓았다. 목돈을 들여 차려준 대형 음식점이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아서다. 처음의 적자는 초창기라 그런 것이려니 했다. 어느 정도 장사가 궤도에 오르면 아들도 번듯하게 자립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매출은 개선되지 않았다. 아들은 돈이 부족할 때면 다시 P씨를 찾아왔다. 아들의 식당은 ‘돈 먹는 하마’가 됐다.
황혼기에 접어든 장년층이 자녀들의 창업 실패로 고민을 겪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 이는 경제발전기의 주축을 이뤘던 1940~1950년대 출생자들이 장·노년기에 접어들게 된 결과로 분석된다. 30~40대가 된 자녀세대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새로 사업을 시작하거나 실패하는 사례도 많아졌다는 것이다. 창업컨설팅 업계 한 관계자는 “정확한 통계분석을 하긴 어렵지만, 최근 몇년간 30~40대 자녀가 창업에 실패하는 사례가 점점 많아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녹록지 않은 현실, 부모 절반 “창업 반대”
부모 입장에서 자녀가 창업을 해보겠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 이를 뿌리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에 따라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의 사업자금을 제공하기 일쑤다. 대개 자녀들이 ‘빌려달라’며 받아가는 경우가 많지만, 사업이 생각한 대로 잘 풀리지 않는 경우에는 사실상 사라지게 되는 돈이다.
문제는 성공보다 실패의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이는 관련 통계에서 잘 나타난다. 통계청이 지난해 발표한 ‘2013년 기업생멸 행정통계 결과’에 따르면 기업의 1년 생존율은 59.8%, 5년 생존율은 30.9%에 불과했다. 절반 가까운 기업이 생긴 지 1년 안에 문을 닫고, 3년이 지난 뒤에는 10곳 중에 7곳이 망한다는 얘기다.
경험이 부족한 청년들의 경우는 실패 확률이 더 높다. 대표자의 연령대가 어릴수록 기업이 5년 이상 생존하는 비율이 낮아진다. 30대 미만 대표자가 창업한 기업 80%가 5년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의 창업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2013년 현대경제연구원의 ‘창업에 대한 대국민 인식조사’에서 ‘자녀가 창업한다고 하면 반대하겠다’(52.1%)는 응답이 과반에 달했던 것은 부모 세대의 불안감을 보여준다.
부모돈 창업, 폼나는 것만 찾다가 십중팔구 실패
전문가들은 특히 자녀세대가 부모에게 종잣돈을 얻어 창업하는 ‘캥거루형 창업’의 경우 사업체의 생존율이 훨씬 낮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상대적으로 손쉽게 거액의 자본금을 조달했기 때문에 사업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신중함에서 차이가 나기 쉽다는 것이다. 실제 이들은 사업타당성을 분석하기보다 ‘폼나는 업종’을 택한다든지, 실제 비용을 따지기보다 ‘유명한 곳’을 선호하는 경향이 종종 관찰된다.
앞서 소개한 P씨 아들의 실패 사례는 전형적이다. P씨의 아들은 외국에서 음악을 전공한 뒤 귀국해 이렇다 할 직업이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음식점 경영에 뛰어들었다. 아버지의 지원을 등에 업고 국내 최대 상권인 홍대입구와 강남역에 한 곳씩 두 개의 점포를 냈다. 홍대입구에서는 아예 건물의 3개 층을 빌렸다. 직원 수만도 20명에 달했다. 매달 2500만 원에 가까운 점포임대료와 4000만 원 가량의 인건비가 나갔다. 반면 음식점의 매출은 수익을 내기에 충분치 않았다. 아버지를 찾는 일은 점점 많아졌다.
김병오 FC창업코리아 대표는 “자본금이 충분하면 어떻게든 성공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진 창업준비자가 많다. 하지만 투자가 많은 것이 높은 수익률을 보장하지 않는다”며 “자본은 어디에서나 물론 중요하지만 창업시장에서는 자본의 힘이 상대적으로 통하지 않는다. 창업자 본인의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초보 사장은 직원들의 ‘봉’, 경험이 풍부한 조력자 필요
초보 창업자라면 점포와 수익성 등을 아무리 꼼꼼히 따졌다고 해도 여전히 큰 위험 요인이 남는다. 거래처와의 문제, 고객의 항의처럼 예상치 못한 위기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특히 창업자가 직원들에 대한 통제·관리 경험이 없는 경우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사장보다 경력이 풍부한 직원들은 때때로 사장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설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한 창업 컨설턴트는 대형 횟집을 창업한 C씨(37·여)의 사례를 소개했다. C씨의 횟집에서는 물고기가 별 이유 없이 죽어나갔다. 경력 10년의 주방장도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매일 새 물고기 수십만 원어치를 새로 사서 채워 넣었다. 주방장이 생선 공급업자와 짜고 벌인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꽤 먼 훗날의 일이었다.
전문가들은 창업을 희망하는 업종에서 일단 경험을 쌓은 뒤 창업에 나서야 실패의 확률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부모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김병오 대표는 “부모가 자본금을 대주고 손을 떼기보다 일정 부분 함께 경영을 하면서 자립을 도와준다면 자녀 사업의 연착륙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잘할 수 있는 일’ 찾으면 성공확률 높아져
모든 창업이 위험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성공하는 창업사례도 분명 있다. 부모 입장에서 자녀에게 잔소리를 하기보다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렇다면 자녀의 사업이 ‘되는 창업’인지 미리 감지할 방법은 없을까.
금융기관 퇴직자 J(63·남)씨의 사례는 참고가 될 만하다. 특별히 공부를 잘하지도,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지도 않은 아들이었다. J씨는 일찍부터 ‘좋아할 만한 일’을 찾으라고 강조해왔다. 자동차를 좋아하던 아들이 튜닝전문업체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튜닝전문업체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기꺼이 자금을 지원했다. 아들의 사업은 인터넷에서 마니아들의 입소문을 타고 성장했고 지금은 꽤 많은 순이익을 올리고 있는 유명업체가 됐다.
창업 컨설턴트가 추천하는 창업도 이런 형태다. 창업자 본인이 좋아하고, 잘 아는 분야를 택하는 경우 실패의 위험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시장일수록 매출기반을 안정적으로 확보해 나갈 가능성이 크다.
한편 자녀의 성공적인 창업은 훌륭한 절세수단이 되기도 한다. 정부는 부모가 자녀의 창업자금을 지원하는 경우 증여세를 감면하는 조세특례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 제도의 기준을 충족한다면 5억 원까지는 세금 없이 증여가 가능하고 30억 원에 대해서는 5억 원을 제한 금액에 10%의 세율로만 과세되도록 해 세금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한반도 북방계 식물의 뿌리를 찾아본다’는 거창한 구호와 함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2015년 7월 14일부터 8월 2일까지 외교부와 코레일이 공동 주관하는 ‘유라시아 친선특급’에 참여한 것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km, 다시 모스크바에서 베를린까지 2612km, 총 1만1900km의 거리를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19박 20일간의 대장정에 나서며 우선은 차창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시베리아 숲으로 들어가 식생을 관찰하겠다는 나름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분단된 조국에서 살아온 탓에 한나절 이상의 열차 생활을 해본 경험조차 없어 20일 간의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는 미지의 여행길이었지만, 야생화와의 만남은 시작부터 대박이었습니다. 저녁 9시 35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밤새 어둠을 달린 열차가 시베리아 벌판에서 첫 여명을 맞을 즈음 차창에선 이미 분홍색 꽃물결이, 열차에서의 첫 밤을 설친 이방인의 잠을 저만치 쫓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국내의 경우 강원도 태백 지역이 남방한계선으로 대관령 등 몇몇 지역에서 수십에서 수백 포기 정도 자생하는 게 전부인 분홍바늘꽃이 철로와 자작나무 숲 사이 풀밭에 간단없이 피어 시베리아 횡단 철길 내내 꽃물결을 이루다니, 과연 북방계 식물의 텃밭임을 실감했습니다.
국내에 자생하는 4종의 바늘꽃 가운데 바늘꽃과 돌바늘꽃은 흰색의 꽃도 작고 키도 1m 미만으로 작은 데 반해, 분홍바늘꽃과 큰바늘꽃은 키도 1.5m 안팎으로 클 뿐더러 꽃색도 분홍색으로 화려한데, 둘 다 북방계 식물입니다. 꽃이 진 뒤 맺는 씨방이 바늘처럼 길다고 해서 바늘꽃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겨울에는 이른바 ‘설국열차’라 불릴 만큼 철로 좌우가 눈으로 뒤덮인다면, 여름에는 분홍바늘꽃을 비롯한 숱한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야생화 천국입니다. 남한에서는 이미 멸종되고 북한 일부 지역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진 좁은잎해란초와 애기황새풀, 바이칼꿩의다리 등이 역시 쉴 새 없이 철길 좌우에서 얼굴을 내밉니다.
블리디보스토크를 떠난 열차가 4일 만에 바이칼 호숫가로 들어섭니다. 바다처럼 넓은 바이칼 호를 열차가 다가섰다 멀어졌다 반복하는 사이 동은 트고 새벽 햇살을 받은 분홍바늘꽃이 푸른 물결을 배경으로 출렁입니다. 달리는 열차에서 흔들리는 가운데 담은 분홍바늘꽃 사진이 오히려 수채화처럼 멋진 분위기를 선사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짝사랑하듯 멀리서 바라만 볼 수는 없는 일. 마침 이르쿠츠크에서 내린 ‘유라시아 친선특급’ 원정대가 바이칼 호수 인근의 ‘건축-인류학 박물관 딸지’를 둘러보는 사이 호숫가 숲으로 달려가 푸른 물결을 배경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분홍바늘꽃을 카메라에 담는 데 성공했습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여정은 옛말을 깨닫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날 무렵 한창 피어나던 분홍바늘꽃이 어딘가부터 다소 시들해 보이더니 열흘쯤 지나 모스크바를 지날 무렵부터는 분홍의 꽃 색을 잃고 옆구리에 기다란 씨방을 잔뜩 달고 서 있는 게 어느덧 황혼을 느끼게 합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분홍바늘꽃이 피고 지는‘한여름 밤의 꿈’을 경험하는 색다른 여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