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꽃과 새들이 인사하고 잠이 덜 깬 고양이는 주인의 등에 기대 졸고 있다. 전신줄을 달리는 것은 놀랍게도 쥐가 아닌 다람쥐다. 태국 음식점의 아낙네는 요리 재료 파인애플을 싣고 가게로 향하고 기타를 맨 연주자는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다. 이것이 치앙마이 올드시티의 아침 풍경. 오늘은 숙소 바로 앞에 있는 왓치앙만 사원에 들러 진한 향의 프렌지파니(참파꽃)로 지인을 추모하는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늘 가는 카페로 가는데 골목길 벽화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소원하기를 멈추고, 실행하기를 시작하라(stop wishing. and start doing).”
치앙마이를 설명하는 두 개의 말은 ‘사바이 사바이(천천히 천천히)’와 ‘마이 밴 라이(괜찮아요)’다. 겨울에 힘 빼고 살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될까. 겨우내 추위와 미세먼지로 움츠렸던 어깨와 관절이 다 아파오는 것 같다. 맹세코 다음 겨울엔 따뜻한 나라로 피신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시니어에게 최적의 체류 여행지로 각광받는 태국 북방의 장미 ‘치앙마이’를 소개한다. 사방 어디에 눈을 둬도 초록이어서 저절로 힐링이 되는 곳. 특히 건기인 12월에서 2월은 한국의 강추위와 미세먼지를 피해 최고의 쾌적함을 누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아침엔 20℃, 낮엔 30℃까지 올라가는 일교차가 큰 날씨이지만 건기라서 습하지 않다. 오히려 아침저녁으로는 약간 쌀쌀하기까지 한 쾌적한 날씨다.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에겐 한두 차례 방문 경험이 있는 겨울 휴양지이기도 하다. 치앙마이에 한 달에서 석 달 혹은 일 년 이상 머무는 장기투숙객이 많은 이유는 장기투숙을 할수록 저렴해지는 숙박비와 한식 생각이 안 날 만큼 입맛에 맞는 음식, 맨발로 화장실을 들어가도 될 만큼의 청결한 숙박 시설, 그리고 긴장을 놓고 있어도 소매치기당할 걱정을 안 해도 되는 안전함 때문이다.
사바이 사바이, 슬로 라이프!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한 목소리와 미소로 응대하는 태국인들은 길을 막고 선 차가 비켜주면 오히려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들이다. 스쿠터나 오토바이 소음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아무리 길이 막히고 답답해도 경적을 울리는 일은 거의 없다. 인도나 횡단보도도 제대로 없고 오토바이 소음이 심해 처음엔 다소 불편함이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순한 사람들로 인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평화로워진다. 잘못 계산한 커피 값도 너무 많이 냈다며 굳이 찾아와 돌려주는 곳. 물건을 놓고 나간 뒤 한 시간이 훨씬 지나서 가도 그 자리에 곱게 놓여 있는 곳. 라오스와 미얀마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그곳은 다 같이 가난한 나라여서 비교할 대상이 없는 데서 오는 행복이라 여겼다. 치앙마이에서는 빈부의 격차가 있는데도 남의 것을 탐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 욕망이 뿜어내는 독소가 안 느껴져 평화롭다.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아 답답한 면도 있지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정성을 다하는 마음, 예의 바름과 친절함은 치앙마이에서의 생활을 내 집처럼 편하게 느끼도록 해줬다. 카페도 밥집도 다섯 시면 문을 닫는 곳이 많고 일부를 제외하면 허름한 가게와 유명한 가게의 음식 값이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도 신기했다. 받을 만큼만 받고 필요한 만큼만 벌 뿐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워라밸을 실천하는 사람들. 아무리 바쁜 마사지사도 연말 대목은 가족과 함께 보내느라 일을 쉰다.
‘한 달 살기’를 작정해도 가자마자 어찌 현지인 코스프레(?)가 가능하겠는가. 한국에서 딴 동네로 이사를 가도 주변 파악에 한 달은 족히 걸린다. 그러니 과욕은 금물이다. 이곳 레지던스 대여 단위대로 석 달이나 일 년 이상 산다면 모를까. 한 달을 살기에는 여전히 여행자의 마음이라 해야 맞을 것 같다. 다만 지내는 동네가 산티탐처럼 좀 더 주택답거나 아파트형 레지던스처럼 한국에서 살던 구조와 비슷하다면 빨리 안정을 찾을 수도 있겠다. 소소한 골목 탐험이나 카페 탐험, 뒷골목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올드시티에 집을 얻는 게 좋다. 한 달 살기는 어떤 조건으로 사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한 달 기준 장기 렌트 시 30만 원에서 60만 원이면 부부가 살기에 괜찮은 숙소를 구할 수도 있다. 저렴한 생활비로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살아보는 기회를 얻는 셈이다. 교통은 한국처럼 지하철이 있거나 버스 노선이 다양하지 않아 처음엔 적응이 안 되고 불편하지만 조금만 익숙해지면 썽태우(합승택시)나 그랩(일명 태국판 카카오택시)으로 목적지까지 쉽게 이동할 수 있다. 렌트카는 우리와 반대쪽 핸들인 데다 일방통행이 많아 활용하는 사람이 흔치 않다. 가장 저렴할 것처럼 보이는 툭툭은 바가지가 심하므로 권하고 싶지 않다.
요가 학교에서 투어 프로그램까지
장기 체류자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요가나 태국 마사지를 배우기도 하고 쿠킹 클래스에서 팟타이나 양꿍 같은 태국 요리를 만들어보기도 한다. 올드시티의 토요시장, 일요시장을 비롯해 왓(wat)이라 불리는 수많은 아름다운 사원만 방문해도 다 못 볼 만큼 볼거리가 충분하다. 가는 곳마다 산재한 여행사에서 치앙라이, 치앙다오, 빠이 등으로 가는 근교 여행 프로그램은 물론 무아이타이, 카약, 집라인, 자전거, 에코 트레킹 같은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해 심심할 틈이 없다. 태국 북쪽 라오스 국경에 있는 우돈타니에서는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연꽃바다를 볼 수 있다. 걷다가 피곤하면 타이 마사지를 받고 아름다운 카페에서 재충전하기 좋은 곳. 머물수록 점점 더 있고 싶어지는 쉼터 같은 곳이 치앙마이다.
언제나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사와디카(안녕하세요)”, “코쿤카(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는 친절한 사람들이 있는 곳, 극성스럽게 살지 않아도 충분히 잘 지낼 수 있음을 알게 해주는 곳. 그래서 치앙마이에 처음 오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오는 사람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 달만 있어보려고 왔는데 몇 달째 있네요”라거나 “치앙마이만 다섯 번째예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한 달 살이 팁
숙소의 선택 인터넷만으로는 주변 환경(소음이나 분위기. 교통편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직접 가서 보고 고르길 추천한다. 장기 입주의 경우 협상에 따라 할인 폭이 크다.
교통 택시인 툭툭, 합승택시인 썽태우, 최근엔 버스도 생겼지만 가장 합리적이고 저렵한 가격에 이동하는 수단은 그랩(grap, 동남아의 우버)이다. 렌트카는 오른쪽 핸들이니 참고할 것. 스쿠터도 외국인의 경우 오토바이 면허가 있어야 대여 가능하다.
멀리 와 있다는 생각을 가끔씩 해본다. 2002년 한일월드컵 경기를 위해 서울 마포 상암동에 월드컵경기장이 생겼다. 근처의 난지도 쓰레기매립장은 환경재생 사업을 통해 월드컵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이 공원은 2002년 5월 1일 개장했다.
이곳과 가까운 성산동 거주 주민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공원 개장을 기념할 수 있는 운동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 무렵 인라인스케이트가 붐을 이루던 때라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마음이 끌렸다. 개장일 새벽, 안전장비를 착용하고 혼자 공원으로 나갔다. 초보자였으므로 누가 넘어지는 모습을 볼까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사는 곳이 공원과 가까워 매일같이 새벽 운동을 나갈 수 있었다. 모 일간지의 인라인스케이트 관련 기사와 인터넷에 소개된 교본을 보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렇게 3개월쯤 지나자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있는 실력까지 갖추게 되었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H대학교 인라인스케이트 동아리에 참여해 젊은이들과 함께 한강변 남단 코스도 라운딩했다. ‘인라인 마라톤 대회’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힘든 일도 있었다. 2004년 초 운동을 하러 나가다가 월드컵경기장과 평화공원 사이 횡단보도 건널목 대로에서 대형 교통사고로 우측 다리를 크게 다쳐 1년간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 기간을 제외하곤 인라인스케이트 타는 걸 쉬어본 적이 없다. 스피드나 슬라롬(속도를 겨루는 경기)을 즐겨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이처럼 오래 한 종류의 운동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경계가 느슨해지곤 한다. 운동을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이다. 특히 인라인스케이트는 보호 장비를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 가끔 멋 부리느라 보호 장비 없이 타다가 대형 사고를 겪는 사람들을 본다.
고수가 되려면 실력과 함께 겸손함을 겸비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 수련까지 할 수 있다. 초보자들이 도움을 원할 때 나는 인간적 차원에서 남녀노소 관계없이 성심성의껏 지도를 해준다. 그럴 때 큰 보람을 느끼고 행복하다.
지난해 말부터 6세 손주에게 인라인스케이트를 가르치고 있다. 뭐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재미가 있다. 새해엔 손주 녀석이 자력으로 제대로 탈 수 있도록 더 세심한 지도 방법을 고민해봐야겠다. 손주 녀석의 실력이 향상되면 손주의 유치원 친구들에게도 가르쳐주고 싶다. 그래서 그 녀석들이 자라 손주와 헤어져 서로 다른 학교에 진학하더라도 인라인스케이트를 통해 맺은 우정이 오래 유지되길 기대해본다.
새삼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새해 바라는 게 있다. 옛날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며 시간을 함께 보낸 동호인들을 SNS를 통해서라도 만나고 싶다. 그들과 다시 소통할 수 있다면 시니어답게 천천히, 그러나 멋있게 나를 보여주고 싶다.
요즘은 ‘둘레길 걷기’가 대세다. 매일 30분에서 1시간 정도 집 근처에서 산책하고, 둘레길 걷기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는 것이 좋다. 걷기 왕초보인 필자가 걸어보니 건강을 지키는 데 알맞은 거리와 시간은 10km 안팎의 3시간 정도다.
아무리 건강을 위해 걷는다 해도 무작정 걷기만 하는 곳은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걸으면서 역사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길이 좋다.
성곽 따라 낙산공원
한양도성박물관을 관람한 뒤, 성곽길을 따라 올라간다. 낙산 성곽은 영화나 드라마 촬영이 많이 이루어지는 곳인데, 석양과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낙산공원 전망대에서는 서울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성 밖으로 나가면,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쓴 이수광이 살았다는 ‘비우당(庇雨堂)’이 있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빨래를 하면 자주색 물이 들어서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샘도 있고, 정순왕후가 기거했던 정업원(淨業院)도 있다. 낙산공원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이화동 벽화마을과 이승만 대통령이 해방 후 귀국해서 살았던 이화장(梨花莊)도 관람할 수 있다.
✽동대문역 10번 출구→동대문성곽공원→한양도성박물관→낙산공원→중앙광장→동숭동 어린이집 길→이화동 벽화마을→이화장(사전예약)
성북동 동네 한 바퀴
길상사는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은, 요정 ‘대원각’ 주인 김영한이 대원각을 기증해 만든 사찰이다. 길상사에는 특별한 것 3가지가 있다. 김영한과 시인 백석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시비(詩碑), 법정 스님의 유품실인 진영각, 성모 마리아 상을 닮은 관세음보살 상이다. 최순우 옛집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兮谷) 최순우가 살던 집이다. 이곳에서 그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했다. 최순우 옛집을 나와 대로변을 따라 위로 걸어가다 보면 덕수교회가 나온다. 이종석 별장은 덕수교회 뒤편에 있으며 교회에서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별장은 마포에서 젓갈을 팔아 대부호가 된 상인 이종석이 지은 별장이다. 마지막 코스인 심우장(尋牛莊)은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이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왔을 때 지인이 마련해준 곳으로, 한용운의 유품과 그가 직접 심은 향나무가 있다.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길상사(마을버스 02번 이용)→최순우 옛집→이종석 별장→심우장
조선의 정궁(正宮), 경복궁
경복궁 안에는 왕실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국립고궁박물관과, 서민의 생활 문화를 알 수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고궁박물관이 나온다. 관람을 끝내고 경복궁을 돌아본 뒤,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청와대 정문 앞길로 나와 경복궁 담을 따라 걸으면 다시 경복궁역 3번 출구 방향이다. 여기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가 있다. 일명 ‘체부동 먹자골목’이다.
✽경복궁역 5번 출구→국립고궁박물관→경복궁
댄스 스텝에서 남자 스텝은 거의 대부분 전진하는 스텝이다. 그러나 가끔 뒤로 가는 스텝이 있다. Back Check, Back Lock, Back Whisk, Back Corte 등이다. 가장 어렵다. 앞만 보고 가다가 뒤로 간다는 것은 루틴이 아주 훤해서 여유가 있지 않으면 자칫 까먹고 실수하기 좋다. 뒤로 가는 스텝이 모양이 제대로 나올 리 없다.
당구에서도 대부분 공이 앞으로 진행하는 형태로 친다. 끌어치기가 유일하게 백 스핀으로 공의 아래쪽을 치면 수구가 앞 목적구에 맞고 나서 공이 뒤로 굴러 오는 기술이다. 4구에서는 이 기술이 필수이다. 동호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3구에서는 끌어치기를 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공이 앞으로 진행하는 길만 보다 보니 뒤로 끌어치기 해서 3 쿠션을 만드는 기술은 못 보는 것이다.
자동차 운전도 전진은 쉽지만, 뒤로 가는 후진은 어렵다. 고개를 돌리지 않으면 안 보이기 때문이다. 전진은 감이 익숙하지만, 후진은 고개를 돌리고 보면서도 단순히 보이는 것 외에도 몸이 익숙하지 않아 접촉 사고를 내기도 한다.
유모차를 앞세우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초보 아줌마가 있었다. 횡단보도를 거의 건널 무렵 유모차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이 아줌마가 진행을 멈추고 그걸 주우려는 찰라 신호대기 중이던 자동차가 돌진했다. 하마터면 엄청난 비극이 발생할 뻔 했다. 전진만 입력되어 있는 세상에 잠시 멈춤조차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좀 더 뒷쪽에 떨어졌더라면 되돌아 가야 하는데 이미 신호는 바뀌어 있었다면 여지없이 사고로 이어졌을 것이다.
앞으로 걷는 것은 익숙하지만, 뒤로 걸어보라고 하면 힘들어 한다. 연습해 보면 할 수는 있지만, 눈이 앞을 보기에 적당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안 해봐서 뒤쪽은 어려운 것이다.
앞만 보고 달려온 시니어들은 뒤를 돌아보기 싫어한다. 앞만 보고 달리기에는 익숙해져 있는데 뒤를 돌아보자니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남들은 앞만 보고 달리는데 혼자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퇴보를 뜻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지나온 과정이 힘들어서 일지도 모른다. 다시 군대에 입대하라고 하면 돈을 준다고 해도 싫다는 사람이 많다. 다시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의외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사람이 많다. 그때는 고민도 많고 고생도 많이 해서 너무 힘들었다는 것이다
‘꽃길만 걷고 싶다’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은 지나온 과정이 꽃길이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의미이거나 반대의 경우로 지나 온 과정이 험난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희망을 갖자는 것이다.
사람이 죽을 때는 그간의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되돌려 보인다고 한다. 더 이상 앞은 기대할 수 없으니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낙원상가는 서울 종로 3가 탑골공원 뒤에 있다. 종로 3가 사거리에서 안국동으로 가는 남북 도로가 낙원 상가를 통과한다. 질주하는 차 소리가 시끄럽고 컴컴해서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길이다. 그런데 건물 밑으로 난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인사동이다. 나지막한 건물만 있는 인사동에서도 그래도 번듯한 고층 건물들이 있는 동네로 이어진다. 인사동에 자주 다니는 사람들도 이 길을 경계로 탑골공원 쪽은 으슥하고 허름해서 안 간다고 한다. 한옥이 줄지어 있는 익선동도 이 건물을 경계로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원래는 이 자리가 낙원 전통시장이 있던 자리이다. 서울시에서는 종로3가 사거리에서 안국동으로 도로를 내고 싶은데 수많은 시장 상인들의 삶터이니 철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만들어낸 아이디어가 도로도 건물 1층으로 통과하게 내고 시장은 낙원상가를 지어 지하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래서 낙원상가 지하는 전통시장에서 파는 생선가게, 정육점, 옷 가게 등 도심 속의 전통시장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다. 지상에 안 보이기 때문에 인근 통인시장처럼 세인의 관심을 못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낙원상가는 나름대로 도시의 명물로 거듭났다. 1960년대에 주상 복합건물로 지어진 건물로 청계천의 세운 상가, 홍제동의 유진상가처럼 그 당시에는 알아주는 대형 건물이었다. 세운 상가처럼 철거 위기까지 처했던 이 건물이 지금은 미래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낙원상가 건물은 15층 건물로 6층부터 15층까지는 낙원 아파트이다. 5층이 사무실이고 4층이 옛 허리우드 극장이 있던 자리이다. 지금은 ‘젊은 극장’이라 하여 ‘낭만 극장’과 ‘실버 영화관으로 변모했다, 입장료 3천원으로 고전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상영하여 마지막 상영이 오후 6시 무렵이다. 그전에는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대형 캬바레도 있었다.
악기상가가 된 것도 흥미롭다. 건립 당시 마침 종로 일대 정비 사업으로 악기 상들을 철거했는데 그때 철거된 가게들이 낙원상가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 경험으로 서울시가 황학동 풍물시장을 신설동 한 건물로 몰아넣은 것이나, 청계천 공구상들을 장지동 가든 파이브로 유도한 것처럼 비슷한 업종은 한 건물로 몰아넣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70년대에는 포크송 시대였다. 젊은이라면 누구나 통기타 하나쯤은 만질 줄 알던 시대라서 기타가 잘 팔렸다고 한다. 지금도 초급용 통기타는 10만 원 선이면 살 수 있다. 고가의 기타들은 몇 벡만 원 한다. 그 당시부터 교회 밴드도 급속도로 성장하여 악기 수요가 많았다. 1980년대는 통금이 해제되고 아시안게임, 88올림픽 특수로 흥청망청하던 시대였다. 인근에 요정이 많아 라이브 밴드의 수요가 폭증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악기는 물론 낙원상가는 음악인의 동네로 밴드 공급 역할도 했다고 한다. 90년대에는 노래방이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라이브 밴드의 수요가 줄어들고 금융위기까지 덮쳐 낙원상가도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시봉 열풍, 아이돌 인기 등에 힘입어 다시 복고풍이 불면서 안정적인 위치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최근 건물을 리모델링하면서 가게들이 환하게 정비되고 화장실도 깨끗해졌다. 주변 탑골 공원 주변은 허름하고 복잡하지만, 악기 상가는 쾌적한 분위기라서 돌아볼 만 하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함께 다닌 동기동창 상조회 모임을 두 달에 한 번씩 갖는다. 이날은 치매를 앓는 친구를 만나려고 친구 집 가까운 곳으로 장소를 정했다. 20명 친구 중 13명이 모였다.
필자의 친구 중 첫 치매 환자인 셈이다. 언제나 쾌활했고 친구들 간 신의도 남다르게 좋았던 그 친구는 운동도 잘했고 무엇보다도 사교댄스를 아주 잘 추는 실력파 춤꾼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동안 몇 개월 모임에 불참한 사유가 치매라는 전갈에 모든 친구들이 놀랐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 친구라니… 믿기지 않았다.
이날 모임에는 아내와 함께 동행했다. 어딜 봐도 전혀 치매환자로 보이지 않았다.
회원 모두의 바람으로 집 근처 가까운 곳에 아내와 동행하도록 한 것은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음식은 먹긴 했으나 술은 금주라 했다. 술을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유머감각도 좋은 친구였는데… 아쉬움이 가득 밀려왔다.
친구는 애써 말을 안 하려는 건지 조심하는 건지 아내 눈치만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건강했을 때 친구는 조그마한 청소대행업을 했다. 이제는 남편 수입이 없다 보니 아내가 어린아이 돌보는 돌보미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이날도 저녁시간에 일하러 가야 한다며 남편을 우리들에게 부탁하고 떠났다.
친구 아내가 “여기서 저 횡단보도만 건네주시면 집 찾아갈 수 있어요”라고 말했을 때 필자는 고개를 돌리고 못 들은 척했다. 울컥해지는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친구 아내가 자리를 뜬 뒤 옆으로 가서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건네도 단답형으로 웃기만 했다. 그런 친구를 보면서 필자가 치매를 앓게 되면 우리 식구들은 어떤 마음일까 생각해봤다.
친구 아내가 자리를 뜨지 않았다면 그런 것들을 물어보고 싶었다.
‘만약’을 생각해본다. 필자가 아니고 아내가 치매환자가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아려왔다.
옆자리에 앉아 친구에게 음식을 많이 권했다. 그렇게밖에는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렇게 눈치껏 의사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 새 모임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다행히 친구는 가족의 힘으로 많이 극복하고 있는 듯했다. 특히 두 딸들의 후원이 남다르다는 얘기도 있었다.
모임 장소 근처에 살고 있다고 해도 혼자 보내기에는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함께 걷기로 했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집을 찾아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 아직 정상인과 다를 바 없는데 치매환자로 대해야 한다는 사실이 힘들었다.
친구가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필자는 돌아섰다.
필자도 필자 아내도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거리에서 한참이나 눈물을 훔치다가 머리를 푹 숙인 채 집으로 가는 전철에 올라섰다. 마음속으로는 친구가 이 상황을 반드시 극복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강화도는 서울 서쪽에 위치해 있다. 자가용이 있던 시절에 몇 번 가보고 그 후로는 오랫동안 외면하던 곳이다. 초지진, 광성보 등 해안에 초라한 진지가 남아 있을 뿐 별로 기억에 남는 것들이 없다. 마니산은 올라가는 계단만 보고 왔고 전등사는 다른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절이었다. 어느 식당에 갔다가 음식이 너무 맛이 없어 일행들이 젓가락만 돌리고 있어 뒷산에 있는 고들빼기를 좀 뜯어와 겨우 한 끼를 먹은 적도 있다. 폭우를 만나 하마터면 급류에 휩쓸려 일가족이 몰사할 뻔하기도 했다. 석모도에 갔을 때는 불친절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왔다. 강화도의 밴댕이회가 유명하다지만 생선회는 어디나 비슷비슷하다.
얼마 전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 회원 40명이 대중교통으로 강화도에 다녀왔다. 강동 쪽에서 전철로 송정역까지 2시간 걸렸고, 송정역에서 다시 3000번 버스를 타고 1시간 반을 달리고 나서야 강화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다음 날부터 시작된다는 장마 때문인지 날씨는 푹푹 찌고 불쾌지수가 높았다.
이번에는 시내 쪽으로 가봤다. 횡단보도 신호등을 대여섯 개 지나자 남문이 나왔다. 남문을 지나서 조금 더 가니 서문이 보였다. 서문 안쪽으로 다시 시내 도로로 되돌아 나오는 길에 용흥궁이라는 표지가 있었다. 도로 안쪽에 작은 표지판이 있어 미리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가면 지나치기 쉽다.
용흥궁은 철종이 19세 때까지 살던 사저였는데 그 후 기와집으로 새로 지었다. 성공회성당이 높은 자리에 위용을 자랑하고 있어 하마터면 못 보고 갈 뻔했다. 이 광장이 이번 관광의 하이라이트였다. 심도 직물이라는 큰 직물회사가 있던 자리라고 했다. 한쪽으로는 강화 문학관이 있고 마침 조경희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지나칠 뻔 했던 곳이 고려 궁지도 관람할 수 있었다. 강화 성당을 보고 언덕을 올라갔는데 초라한 한식 대문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고려 궁지’였다. 입장료는 900원, 경로우대는 무료였다. 서울 선정릉의 4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곳인데 이곳이 바로 고려시대 몽고의 침략 당시 도읍을 개성에서 강화로 옮긴 곳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왕이 있었던 곳이다. 1232년부터 39년간이었다. 그 당시에도 불에 탔고 개화기에도 프랑스 선원들이 불에 태워 다시 지었다. 이곳에는 그 유명한 외규장각이 있다. 전철 한 칸의 3분의 1 정도 되는 작은 건물이다. 조선의궤를 따로 보관하던 곳인데 프랑스 선원들이 훔쳐갔던 의궤를 얼마 전 프랑스에서 영구 반환받아 조명을 받았던 곳이다.
고려 궁지 성벽을 따라 북문 쪽으로 올라갔다. 아름드리 벚꽃 나무들이 도열해 있었다. 제철에 오면 볼 만할 것 같았다. 강화도에도 둘레길이 있다. ‘강화 나들길’이라 하여 6시간짜리 코스가 20개나 있다. 지금 이웃 교동도에는 연육교가 있어 강화도와 연결되고 석모도도 곧 다리가 완성될 예정이다. 자동차가 있으면 하루 일정으로 교동도까지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가 없으며 1박 정도 예상해야 한다. 오가는데 너무 멀어 진이 다 빠지는 것 같다. 그래도 강화도는 서울의 관문으로 외세 침략을 일선에서 막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1970년대 서울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앞으로 역사와 관광의 이점을 잘 살린다면 가볼 만한 장소가 될 것 같다.
백세시대, ‘얼마만큼 살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가치를 두는 이가 많아졌다. 언론인 최철주(崔喆周·75)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장수시대라는 착각에 빠져 우리의 삶이 더욱 오만하고 지루해지는 것을 경계한다. ‘웰빙’을 위한 ‘웰다잉’을 이야기하는 그의 생각을 에 담았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이른바 ‘웰다잉법’이 2018년 2월부터 시행된다. ‘죽음’과 관련한 법인 만큼 제정 단계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시행을 수개월 앞둔 현재, 나라 안팎의 혼란과 희석되며 이에 대한 관심이 흐려졌다. 그러나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 그동안 글과 강연을 통해 ‘웰다잉’을 알렸던 최철주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작년에 김영란법이 만들어졌잖아요. ‘웰다잉법’도 우리가 필요해서 여론을 모아 만든 건데, 막상 시행하려 하니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요. 아니, 잊어버린 거죠. 우린 그렇게 죽음을 기피하고 도망가려 해요. 김영란법도 처음 시행됐을 때는 논란과 혼란이 많았죠. 이제 내년이면 웰다잉법도 그런 상황이 벌어질 거예요. 그 전에 우리 스스로 이 법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알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쓰게 됐어요.”
웰다잉법은 ‘존엄사법’이라고도 하는데, 자칫 안락사로 오해하거나 죽음[死]이라는 단어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가 많다. 그는 괜한 시비를 막기 위해 되도록 ‘웰다잉법’이라 말하지만, 이번 책의 제목에는 ‘죽음’을 정면으로 내세웠다. 그 앞에는 ‘존엄한’이라는 수식어가 묵직하게 놓여 있다. 그가 말하는 ‘존엄’이란 무엇일까?
“사람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며 사는 것, 그렇게 살다가 사람다운 모습으로 떠나는 것이 ‘존엄’이라 생각해요. 광화문 사거리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없던 횡단보도가 생겼어요. 차보다는 사람을 우선시하는 거죠. 여성을 성희롱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건 여성의 존엄을, 학교나 군대에서 함부로 폭행하지 말라는 건 우리 아이들의 존엄을 지키려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 삶 모든 부분에 존엄은 필요해요. 인간의 존엄을 최고의 이념으로 하는 게 헌법이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 삶의 마지막에는 존엄이 없느냐. 존엄하게 살다가 존엄한 모습으로 떠나도록 해야겠다. 그게 웰다잉법의 목적입니다.”
집안의 어른이 먼저 죽음을 논하라
웰다잉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다.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사전에 작성해놓은 서류에 따라 자신의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역시 ‘생명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고 오해하기 쉬워, 그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일 수밖에 없다.
“연명의료는 더는 의학적 치료 효과가 없는 말기 단계에 이뤄지는 심폐소생술이나 약물 투여 등을 말합니다. 무조건 치료를 안 한다는 게 아니에요. 치료할 것은 다 하고, 어느 때가 되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 떠나야 하는데 환자나 가족들이 그걸 인정 못하는 거죠. 그건 우리가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다 막상 죽음이 다가오면 굉장히 고달파 해요. 평소 죽음을 고민하지 않았다면, 막연히 본능적으로 연명의료를 선택할 수밖에 없죠.”
그는 연명의료 과정에서 고통을 이기지 못해 팔다리가 묶여 발악하다가 혼수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기억한다. 더욱 애석한 점은 말기 환자 대부분이 자신이 아닌 자녀나 주변인의 결정으로 연명의료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기자에게 “부모님이 사전연면의료의향서를 써두었다고 해도 막상 그 상황이 닥치면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속 시원한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기자에게 그는 “자식으로서 쉽지 않다”며 “부모가 먼저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평소 부모와 자식이 죽음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야 하는데, 자식이 먼저 그런 이야기를 꺼내봐요. 불효막심한 자식이라 괘씸하게 여기죠. 그러니 집안의 어른이 먼저 대화의 단초를 열어야 해요. 또 ‘나는 내 인생의 마무리를 이렇게 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것을 문서화해두고 보관 장소까지 알려주는 것이 좋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런 순간이 닥쳤을 때 가족끼리 의견이 분분해져 다툼이 나고, 한 사람의 죽음이 엉망이 돼버립니다. 그럼 그게 자식들의 가슴에 응어리로 남게 되고요.”
그는 식탁에서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소통이 어렵다는 요즘 가족, 그들이 죽음을 논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만 봐도 죽음이 등장하잖아요. 가령 ‘얘, 그 주인공 보니까 마지막에 그렇게 죽는 게 안 좋아 보이더라. 나는 나중에 그렇게 하기 싫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또 장례식장을 다녀오거나 주변에 연명의료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례를 통해 자신의 바람을 드러내보기도 하고요. 우리가 살면서 중요한 두 가지가 뭘까요? 생명과 돈이죠. 평생 벌어놓은 돈 자기가 결정해놓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나라가 또는 자식이 결정하잖아요. 그래서 유서는 많이들 써두죠. 그럼 내 생명은요? 내가 결정해두지 않으면 의사나 가족이 연명의료하겠죠. 그렇게 중요한 걸 왜 남에게 맡기나요? 죽음도 돈처럼 자기주도권을 가지고 스스로 결정해야 해요.”
죽음에도 롤 모델이 필요하다
아무리 친근하게 설명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죽음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럴 때면 하는 수 없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 그다.
“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몇 년 뒤 아내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죠.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때를 계기로 웰다잉 공부를 하고 책도 쓰게 됐어요. 내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고 웰다잉에 대해 말하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하기 힘들어해요. 난 그게 좀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지난 아픔을 드러내게 되죠. 그래야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니까요.”
그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로 죽음을 공부하게 됐지만, 누구든 죽음을 생각하고 배우길 바란다고 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인생의 롤 모델을 정하듯, 죽음에도 롤 모델 찾기를 권했다.
“좋은 죽음은 우리 삶에 좋은 지침서가 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처럼 최후의 순간에도 위엄과 존엄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우리는 감동을 하죠. 시각장애를 딛고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낸 강영우씨는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에 기자회견을 열었어요. 자신이 시한부라고 밝히며 그동안의 삶이 행복했고 도움을 준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죠. 존엄하게 삶을 끝내는 이들을 보며 내 인생도 그렇게 마무리하겠다고 느끼면, 지금의 삶을 더 의미 있게 살겠다는 마음이 생겨요. 난 이렇게 죽으려고 한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지? 보람 있고 좋은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더 알뜰하게 살게 돼요. 잘 죽기 위해 잘 사는 것, 웰다잉을 생각하면 삶은 자연히 웰빙이 됩니다.”
초등학교 통지표에 ‘의자에 앉는 자세가 바르지 못하다’는 말과 함께 나오던 단골 멘트는 ‘나름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서 오류가 많다’였다. 필자는 그 시절 자그마한 걸상에 비스듬히 앉아 선생님의 설명을 듣기보다는 마루 사이에 낀 지우개 가루를 쉽게 파내는 방법 따위를 생각하느라 골몰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 말씀이 맞다.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올 땐,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노량진의 오래된 동네라 구불구불 골목이 많았다. 필자는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새로운 경우의 수를 조합해보느라 분주했다. 가끔은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 헤매기도 했지만 나만의 지름길을 발견하면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수학 문제를 풀 땐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풀려고 애를 썼다. 책읽기를 좋아했지만 정답에 동의하기 어려워 국어 성적은 늘 형편없었다.
새로운 것을 찾는 성향은 어른이 돼서도 여전했다. 특히 운전할 때 도드라졌다. 길을 가다 막히면 망설임 없이 골목을 찾아 들어갔다. 운이 좋게 지름길을 발견할 때도 있지만 길을 찾지 못해 되돌아 나와야 할 때도 많았다. 그러면 아이들은 “엄마, 오늘도 또 길을 잘못 들었잖아. 제발 아는 길로 가” 하며 뒷좌석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왜 아는 길 편안한 길을 놔두고 굳이 새로운 길을 찾아 헤매는 걸 즐길까? 집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지하철역으로 들어가 이쪽 혹은 저쪽 플랫폼에서 전철을 기다리는 일. 전기요금 고지서를 받고 세탁소에 맡긴 세탁물을 찾으며 치킨 먹을래 피자 먹을래? 집으로 전화 거는 일. 이런 시시콜콜한 일상 너머에 존재하는 거대하고 새로운 세상은 헤매지 않고는, 호기심 없이는 발견되지 않는 세상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필자에겐 낯선 것 자체가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다. 그래서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의 요란한 소리와 불규칙한 진동, 간질간질함에서부터 설렘은 시작된다. 입국 허가 스탬프를 찍어주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무뚝뚝하지만 생김새는 저마다 다르다. 칭다오 버스 안에서 맡았던 퀴퀴하고 쿠린 냄새는 여행을 후회하게 만들고, 말간 얼굴에 순진한 미소로 다가와 빵 값을 사기치던 하노이 소녀에겐 버럭 화를 내기도 했지만 이런 불쾌함이나 두려움도 낯섦이라는 필터를 통과하고 나면 행복한 경험이다.
“여행은 문과 같다. 우리는 이 문을 통해 현실에서 나와 꿈처럼 보이는 다른 현실, 우리가 아직 탐험하지 않은 다른 현실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이다.”
기 드 모파상의 말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는 필자의 삶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지난 주말 서울 하늘은 푸른 바다 빛이었다. SBA 희망설계재능기부연구소 (박주순 소장) 산악회원 (전창대 산악대장) 12명은 아침 10시 동대문역에 모였다. 흥인지문에서 낙산공원을 오르고 와룡공원을 지나서 말바위 안내소까지 걸었다. 잘 다니지 않는 길이지만 꼭 걷고 싶은 성곽길이다.
올겨울 제일 추운 날씨에 모두가 에스키모처럼 중무장이다. 낙산은 북악ㆍ인왕ㆍ남산과 함께 내사산을 이룬다. 서울의 내사산을 잇는 서울 성곽길은 서울의 4대문(숙정문ㆍ흥인지문ㆍ숭례문ㆍ돈의문터)과 4소문(창의문ㆍ혜화문ㆍ광희문ㆍ소의문터) 및 성곽길 18.2Km를 따라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체험하는 탐방로다.
낙산은 해발 125m의 낮은 산으로 산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 또는 낙산 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서울 종로구와 성북구에 걸쳐 자리한 산으로 서울 도성의 동산(東山)에 해당 된다. 낙산은 풍수지리상 서쪽 우백호인 인왕산에 대치되는 동쪽 좌청룡에 해당된다.
낙산 정상에 낙산공원이 조성되어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대학로, 벽화로 유명한 이화마을 등과 연계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오를 수 있는 곳으로 성곽 안팎으로 서울 시가지를 조망하기에도 좋다. 성곽길이 예쁘게 조성 되어있어 누구나 탐방하기에 편하다. 낙산공원에서 혜화문을 가려면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한양도성은 북악산(342m), 낙산(126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길이 약18.2Km, 높이는 약12m의 성곽으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축조되었다. 한양도성은 태조4년(1395)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곧바로 정도전이 수립한 도성 축조 계획에 따라1396년 농한기인 1,2월의 49일동안 전국에서 11만8천명을 동원 성곽의 대부분을 완공하였다.
가을 농한기인 8,9월의 49일 동안에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는 동시에 4대문-동쪽 흥인지문, 서쪽 돈의문, 남쪽 숭례문, 북쪽 숙청문(숙정문으로 개칭)-과 4소문-동북 홍화문(혜화문으로 개칭), 동남 광희문, 서북 창의문, 서남 소덕문(소의문으로 개칭)을 준공 하였다.
성곽길을 따라 오르면 와룡공원이 나왔다. 날씨는 몹시 추웠지만 바다처럼 푸르른 하늘을 보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양지바른 쉼터에 풍성한 뷔페식당이 차려졌다.
정상주잔을 높이 들고 “위하여!”를 소리 높여 외쳤다. 나이를 잊고 재능기부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건강을 다지는 회원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말바위 안내소에 삼청공원으로 하산하였다. 칼국수와 막걸리 한 사발에 추위도 사르르 녹고 말았다. 잘 다니지 않지만 꼭 한번쯤 걷고 싶었던 도성길을 완주한 기쁨은 무엇으로 바꿀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