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에서는 현대 의학이 신의 영역까지 넘보고 있다고 평가하지만, 아직도 몇몇 질환은 경험 많은 의료진도 쉽게 발견해내기 어렵다. 명의를 찾아 의료 쇼핑을 하는 환자가 적지 않은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병원에 가면 병을 속 시원히 밝혀내고 치료해주길 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더조은병원에서 만난 심재숙(沈載淑·73)씨도 그랬다.
심재숙씨는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꽃중년이었다. 출가한 자녀가 가끔 걸어오는 전화를 기다리고, 남편과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즐기는, 은퇴한 부부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가끔 저리곤 하는 다리가 신경 쓰였지만, 아직은 장보는 일도, 산책을 다녀오는 일도, 집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도 큰 문제 없었다. 집 앞 도봉산 등산은 엄두를 내기 어려웠지만, 주변의 둘레길 정도는 쉽게 다닐 수 있었다.
무릎이나 다리가 문제인 줄 알았는데…
그러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작년 초쯤이다. 다리가 저리는 날이 점점 더 많아졌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극심한 통증이었다. 심재숙씨는 그 당시 자신을 괴롭혔던 통증을 출산의 고통에 비유했다.
“엄청났죠.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처음엔 조금 먼 데를 다니는 것이 힘들었는데, 나중에는 집에 가만히 있어도 욱신거렸어요. 너무 아파 눈물이 날 정도였죠. 마치 다리 속을 헤집고 누가 힘줄을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찾은 곳이 더조은병원. TV를 시청하다 알게 된 병원이었다. 그때만 해도 TV에 출연했던 그 의사를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저 몸 아픈 것이 더 심해지면 저길 가봐야겠다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통증은 더 심각해졌고, 지난해 2월 더조은병원 도은식(都恩植·59) 병원장을 만나러 갔다. 심씨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무릎이나 다리가 문제인 줄 알았는데 허리가 문제라고 하더라고요. 난생 처음 들어본 병명이었어요. 옆구리 디스크라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덜컥 겁이 나서 일단은 통증을 완화시킬 수 있는 시술을 먼저 해달라고 했어요. 병원에선 임시방편이고 또 아파올 것이라고 했지만, 당장 수술을 결정하기엔 두려웠거든요. 그래서 신경성형술 시술만 받고 퇴원했어요.”
병원에서 맞은 크리스마스와 새해
도 원장은 심씨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환자 중 한 명으로 기억했다.
“MRI를 찍어보니 극외측 디스크였어요. 환자들이 병명을 어려워해 옆구리 디스크라고 설명해줘요. 이 질환은 보통의 디스크와 마찬가지로 허리가 노화되는 과정에서 디스크가 밀려나와 생기는 병인데, 뒤쪽이 아닌 옆으로 밀려나오면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골치 아픈 것은 밀려나오는 부위에 신경절이 있는데, 디스크가 이곳을 건드리면 아주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요. 신경들이 몰려 있거든요. 평범한 디스크하고는 비교가 안 되죠.”
병원에서 심씨에게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반년은 평범한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문제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허리가 다시 아파왔다.
“그래도 수술을 피해보려고 다른 병원에 갔어요. 수술 없이도 허리를 잘 고치는 병원으로 유명하다고 해서 찾아가봤는데 허사였어요. 계속 주사만 놔주는데 효과가 하나도 없었죠.”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동안 통증은 더 심해졌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생각나는 사람은 도 원장뿐이었다. 바로 병원을 찾아 12월 27일로 수술 날짜를 잡았다. 다들 크리스마스며 들뜬 연말 분위기를 즐길 때였지만 그런 것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심씨의 허리는 그마저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수술 날짜까지 기다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병원 침대에 누워야 했다.
“수술을 사흘 앞두고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어요. 얌전히 누워 있어도 통증은 멈추지 않았죠. 수술 날짜까지 기다릴 수 없었어요. 그래서 무작정 병원을 찾았어요. 일단 입원부터 해서 무슨 수를 써서든 통증부터 가라앉혀야 살겠다 싶었죠. 지금 생각하면 병원에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결국 새해를 병원에서 맞이했어요.”
디스크 환자 중 극외측 디스크는 약 15%
결국 심씨는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12월 23일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과 함께 통증을 줄이는 처치도 진행됐다. 도 원장은 심씨의 당시 반응이 충분히 이해된다고 말했다. 극외측 디스크 환자들이 대부분 겪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극외측 디스크 환자의 공통점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다는 거예요.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통증과는 차원이 달라요. 그리고 중년 이후의 고령 환자들에게 많아요. 노화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니까요. 다리에 힘이 풀리는 증상도 흔해 다른 병원을 거쳐 오시는 분이 많아요. 안타깝게도 극외측 디스크는 진단 과정에서 발견 안 되는 경우들이 있거든요.”
병원에서 허리 진단을 위해 MRI 촬영을 할 때는 대부분 시상촬영이라는 방식을 사용한다. 허리를 환자 옆에서 본 모습으로 촬영하는 것인데, 일반 디스크 환자를 진단할 때는 이러한 촬영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 시상촬영만으로는 극외측 디스크를 진단하기 어렵다는 것. 척추를 위에서 본 모습으로 단면을 촬영하는 관상촬영을 해야 극외측 디스크를 잡아낼 수 있다.
디스크 환자 중 극외측 디스크 환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 더조은병원에서 2014년 1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1년간 내원한 환자 138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극외측 디스크 환자는 약 15% 정도였다. 적지 않은 숫자다. 디스크 환자 중 15% 정도는 자칫 제대로 된 진단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도 원장은 극외측 디스크는 수술도 쉽지 않다고 설명한다. 디스크나 튀어나온 부분이 손이 쉽게 닿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평범한 디스크는 등 쪽으로 튀어나오니까 절개 부위가 크지 않아도 수술이 가능해요. 수술시간도 짧고 회복도 빠르죠. 그러나 극외측 디스크는 수술이 꽤 까다롭습니다. 만 명이 넘는 환자를 수술한 저도 두세 시간이 훌쩍 걸리니까요. 또 자칫 수술이 제대로 안 되면 다리저림과 같은 후유증을 앓을 수도 있어요. 의사 입장에선 신중을 기해야 하는 수술입니다.”
요즘 척추수술을 하는 신경외과 전문의들에게는 한 가지 딜레마가 있다. 병원들이 무리하게 척추수술을 한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사회에 확산되면서, 수술을 꺼리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것. 도 원장은 제대로 된 진단을 통해 정확한 치료가 이뤄지면 문제가 없는데, 나쁜 선입견 때문에 되레 수술을 받아야 할 환자가 수술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실제로 최근 신경외과나 정형외과 병원에선 전체 치료 중 수술이 차지하는 비율이 몇 % 이하라며 광고할 정도다.
“일종의 교통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증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환자에게 맞는 치료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해요. 허리 수술이 필요 없다면, 왜 1년에 12만 건 이상의 수술이 전국에서 이뤄지겠어요. 분명 허리 상태에 따라서는 수술만이 해결책인 경우가 있어요. 환자에게 한 가지 치료법을 고집하고 강요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다행히 수술이 필요 없다면 보존적 치료를 하고, 어쩔 수 없다면 수술 치료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의 사랑 큰 힘 돼
심씨의 수술은 모두의 바람처럼 무사히 끝났다. 미국에 있다 놀라 귀국한 막내딸과 남편이 병원을 지켰다.
“수술이 생각보다 무섭지는 않았어요. 허리에 칼을 댄다고 해서 처음엔 겁이 났지만, 워낙 통증이 심해서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마음이 컸죠. 그리고 옆에서 늘 지켜주는 남편이 있어서 두렵진 않았어요. 제 수술 때문에 남편이 고생 많았죠.”
사실 심씨의 큰 수술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3년 건강검진에서 대장암 판정을 받고 암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때도 힘이 되어준 사람은 남편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찾아온 몇 차례의 고비는 부부의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해줬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아침과 저녁 한두 시간의 짧지 않은 산책을 거르는 법이 없다고 심씨는 말한다.
“남편에겐 늘 감사한 마음이에요. 수술 후 집안일도 많이 도와줘서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이젠 주변에서 허리 치료에 대해 물으면 수술도 아프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여유를 찾았어요. 빨리 수술할 걸 괜히 겁냈다 싶기도 해요. 앞으로 허리 때문에 더 이상 고생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스트레칭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 몸이 좀 더 나으면 다른 운동도 해볼 생각이에요.”
극외측 디스크는 보통의 디스크와 마찬가지로 허리가 노화되는 과정에서 디스크가 밀려나와 생기는 병인데, 뒤쪽이 아닌 옆으로 밀려나오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골치 아픈 것은 밀려나오는 부위에 신경절이 있는데, 디스크가 이곳을 건드리면 아주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요.
꾸미는 것보다는 자연스러운 걸 좋아하는 편이다. TV 드라마도 너무 만든 이야기가 들어 있어나 판타지물보다는 일상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즉 작가 김수현식 드라마를 좋아한다.
글도 단순하고 꾸밈없는 글을 좋아한다. 흔히들 기가 막힌 경치를 보면 한 장의 그림엽서 같다고들 하는데, 필자는 이런 표현도 별로다. 엽서 한 장으로 어찌 광대한 풍경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냥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정도가 좋다.
사람도 자연스런 사람을 좋아하는데 예를 들면 조영남씨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 반대로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미친 ×만 좋아한다고 흉을 본다. 또 솔직하고 담백한 말을 좋아해서 솔직하지 않은 사람과는 대화를 즐기지 않는다. 뭔가 감추고 있는 듯한 사람과의 대화는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아들이 어렸을 때 잠깐 알고 지내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돈을 많이 벌고 아들은 미국에 남기고 부부만 역이민을 온 아들 친구 부모가 있다. 그 부부는 가끔 우리에게 전화해서 식사나 하자고 하는데 몇 번 만나보니 자기네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지 않고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때운다. 도대체 우릴 왜 만나자고 했는지 모를 정도다. 그러면서도 우리 이야기엔 경청을 한다.
지난번에도 만나자고 전화를 해와 아들 체면을 봐서 웬만하면 나가자고 했지만 남편은 칼같이 끊고 거절을 했다. 우리 나이에 싫은 사람 만날 일 없다며…. 보수적이면서 반듯한 남편은 자신과 성향이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 남편이 필자를 이야기할 때는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표현한다.
필자는 숫자에 대한 기억력이 좋아 아직까지도 아들네를 포함한 온가족의 주민번호, 통장번호도 등 별의별 것들을 다 기억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깜빡깜빡하는 병이 있어 돌아서면 잘 잊는다. 물 먹으러 가다가 안경 벗어놓고 못 찾고, 신발 신다가 꼭 쓰고 나가야 할 선글라스는 잊어버리고 나가는 등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런 건망증이 늙어서 생긴 게 아니라 초년 시절부터 그랬다. 이 병 때문에 평생 동안 잃어버린 물건도 많다.
어릴 때부터 구박도 많이 받았다. 신은 하나를 주면서 다른 하나는 빼앗아가는 것 같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맞나보다. 깜빡병 때문에 남편한테 잔소리도 많이 듣고 구박도 많이 받는다. 우스갯소리로 우리 집 도우미 이모가 “아저씨, 언니 너무 구박하면 내가 장애인센터에 ‘장애인 학대’로 신고할 거예요”라고 말할 정도다(나는 10여 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 후유증으로 장애인이 되었다).
혹시라도 애인이 그랬다면 다~ 용서가 될 텐데 말이다. 세상의 모든 애인은 애처롭고, 모든 아내는 억척스럽다는 말이 있는데 난 애인이 아니고 아내다. 그렇게 심한 구박(?)을 받고도 건재하니 말이다.
미칠 노릇이다. 살면서 ‘힘’ 하나는 남부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소변마저 시원하게 해결하기가 어렵다. 누구에게 하소연하기도 민망하다. 아내는 소변 하나 제대로 못 봐 속옷에서 냄새가 난다며 핀잔을 주기 일쑤다. 바로 전립선에 문제가 생긴 사내들 이야기다. 일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남성이 노화 과정에서 피하기 어려운 것이 전립선 비대증이다. 이 질환을 정말 피해갈 방법은 없을까? 있다면 해결 방안은 무엇인지 한양대학교병원 비뇨기과 조정기(趙正琪·39) 교수의 도움으로 알아봤다.
전립선은 최근 전립샘으로도 불린다. 영문 의학 용어가 일본식으로 번역된 것을 그대로 도입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실제 전립선 모양이나 기능을 고려할 때 샘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그러나 기사에선 아직 독자 편의를 위해 전립선으로 표기한다).
전립선이 샘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이유는 실제로 전립샘이 정액의 우윳빛 액체(전립선액)를 생성해 정자의 운동을 돕는 역할을 하고 남성호르몬 생성에도 관여하기 때문이다.
전립선은 부피로 따지면 약 20cc 정도의 크기로 밤톨 하나만 한 크기를 상상하면 된다. 방광 바로 밑에서 요도가 시작되는 부위를 감싼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그 모양이 하트와 비슷하다고 해서 ‘사랑의 장기’로 불리기도 한다.
중년 남성의 삶의 질 무너뜨려
조정기 교수는 전립선 비대증의 원인 중에서구화된 식생활 등도 있지만 노화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피해갈 수는 없을까?
“실제로 발병률을 조사해보면 나이가 많을수록 이 병을 앓는 비율도 높아지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대략 60대에는 50%, 70대에는 70%, 80대에는 80% 정도의 조사결과를 보여요. 결국 대부분의 남성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전립선 비대증을 피하기 어려워진다는 얘기죠.”
전립선은 맨 가운데의 중심부와 이를 감싸고 있는 이행대 그리고 이행대를 다시 감싸고 있는 말초부로 구분하는데 비대증의 경우는 이행대가 부풀어 오르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증상이다.
전립선 비대증이 환자를 괴롭히는 것은 부피가 커지는 과정에서 요도를 압박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방광까지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변이 시원하게 나오지 않고, 일을 보고 나서도 잔뇨감이 들며, 자주 마려운 증상이 나타난다. 모두 소변과 관계된 증상들뿐이다. 특히 한밤중에 소변이 마려워 잠에서 깨게 되는 ‘야간 빈뇨’는 시니어들의 삶을 떨어뜨리는 전립선 비대증의 대표적 증상이다. 이밖에 소변을 다 보고 난 후 방울방울 떨어지는 증상(배뇨 후 요점적), 소변이 마려우면 참지 못하는 증상(요절박), 소변을 참지 못해 옷에 묻히는 증상(절박성 요실금) 등도 중년 남성의 자존심을 뭉개곤 한다.
조 교수는 “실제로 저를 찾아오시는 환자 중 상당수는 수면장애도 함께 앓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밤에 제대로 잠을 못 자니 낮의 일상생활에도 문제가 생기고 건강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죠. 대수롭지 않은 증상이라고 생각하고 참는 사람들이 많은데 가급적 초기에 치료를 받길 권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라고 조언한다.
비대한 전립선은 종양과 유사
그렇다면 전립선 비대증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조 교수는 소변과 관련해 불편함이 생겼을 때 비뇨기과 전문의가 직접 만져보는 촉진을 통해 검사하는 것이 제일 확실하다고 설명한다. 정식 명칭은 ‘직장수지검사’라고 불린다.
“경험 많은 비뇨기과 전문의는 손으로 만져보고도 전립선 비대증인지 아닌지 혹시 전립선암은 아닌지 단번에 알 수 있어요. 또 전립선 비대증이라면 그 크기는 얼마나 되는지도 확인이 가능해요. 환자 입장에선 검사 과정이 부끄러울 수 있겠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웃음).”
이외에도 소변검사와 혈액검사, 소변의 배출속도를 측정하는 요속검사, 초음파검사 등으로도 진단을 한다. 그런데 조 교수는 전립선 비대증이 일종의 종양과 비슷하다며 재밌는 설명을 한다.
“결국 궁극적인 방법은 수술을 통해 절제해내는 것이 최선이니까요. 전립선 비대로 인해 요로가 눌리는 것을 물리적으로 속 시원히 해결하기 위해선 수술이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종양과 비슷한 특징을 갖는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즘엔 좋은 약물이 많지만, 혈압이나 당뇨 등으로 평소 드시는 약이 적지 않다면 부담이 될 수 있어요.”
물론 악성종양인 전립선암과는 확연히 다른 특성을 갖는다. 전립선암은 비대증과 달리 말초부에서 발생하고, 대부분의 다른 암과 마찬가지로 자각증상이 거의 없다. 제대로 된 진단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전립선의 약물치료가 의료 현장에서 선호되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장기 복용해야 하고 부작용까지 염려되기 때문이다. 약물은 증상을 완화시킬 뿐이지 물리적인 개선 방법이 아니다. 약물치료를 중단하면 다시 같은 증상에 시달려야 한다. 또 약물로 인해 기립성 저혈압이나 성기능 장애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치료를 위한 수술에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요도로 내시경 장비를 넣어 전립선 일부를 절제하는 경요도 전립선 절제술과 레이저를 사용한 수술법이 널리 쓰인다. 레이저 수술은 레이저로 태워 없애는 KTP 레이저 수술과 사과의 속을 파듯 레이저를 이용해 양성종양만 절제해 방광안에 넣고 갈아서 꺼내는 홀뮴 레이저 수술이 있다. 100cc 이상으로 부풀어오른 전립선에서 양성종양만을 적출해버리는 전립선 적출술도 있다. 최근에는 절개를 적게하는 최소침습적 수술방식이 선호되는데, 레이저 수술이나 경요도 전립선 절제술이 여기에 속한다. 최신 치료 방법으로는 좁아진 요도의 공간을 확보하는 스텐트 삽입술이 있다. 비용이 비싼 것이 단점이지만, 반영구적인 사용이 가능한 전립선 결찰술도 개발되어 대중화를 앞두고 있다.
쏘팔메토 너무 의존하지 마세요
전립선 비대증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쏘팔메토다. 쏘팔메토는 오래전 북미 인디언들이 민간요법으로 썼던 작은 야자나무 열매로 건강식품으로는 보기 드물게 미국 식약청(FDA)의 판매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조 교수는 지나친 맹신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환자 중에도 쏘팔메토를 드시는 분이 많아요. 하지만 기대할 수 있는 효능은 병원에서 처방하는 약보다 훨씬 약한 수준이에요. 배뇨 증상을 겪는 환자가 많아지면서 전립선 비대 관련 시장도 커지고, 제약회사에서는 건강식품을 많이 내놓고 있어요. 하지만 전립선 비대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면 드셔도 큰 효과는 보기 어려울 겁니다. 정확한 진단 아래 치료를 받으시는 게 회복이 훨씬 빠를 겁니다.”
전립선 비대증과 관련한 조 교수의 당부는 계속됐다. 바로 수술 후유증에 대한 선입견이다.
“전립선 비대증 치료를 위해 수술을 받으면 요실금이 생길까봐 많이 걱정하시는데요. 일부 환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일시적인 증상입니다. 수술 후 성기능 장애에 대해 걱정하시는 분들은 전립선결찰술도 적극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삶의 질에 크게 영향을 주는 전립선 비대증을 더 이상 간과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궈서야 되겠습니까(웃음).”
그 때 참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해서 벌어 온 돈으로 일곱 식구의 입에 풀칠하기 바빴습니다. 사실 우리 집만의 일이 아니었죠. 그땐 다 그랬죠. 아니 다 그렇게 사는지 알았습니다.
이밥에 고깃국이 최고인지 알았던 그 시절에는 학교에서는 흰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냐고요? 쌀이 부족해서였죠. 그러니 쌀 조금에 보리쌀을 듬뿍 섞어 지은 시커먼 밥은 식감도 맛도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못할 짓이었지만 그 시절 어머니한테 보리밥 먹기 싫다고 떼쓰던 일이 생각날 때면 참 많이도 민망하네요.
어쨌든 그 당시 점심시간이면 언제나 담임선생님이 몽둥이를 들고는 도시락 뚜껑을 열고 검사를 했습니다. 혼식검사입니다. 혼식?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사어가 됐습니다만 학생들 도시락엔 반드시 잡곡이 섞여 있어야 했습니다. 문교부 그러니까 지금의 교육부 지시사항이었죠. 권력의 서슬이 청람보다 퍼렇던 시절이니 위쪽 지시사항 하나면 만사가 형통하는 시절입니다.
쌀밥을 싸온 부잣집 아이들은 먼저 담임선생의 몽둥이로 머리를 몇 대 맞고 시작해야 했습니다. 교무실로 가서 반성문도 쓰고 어머니도 불려왔습니다. 그러니 도시락도 자연히 진화했습니다. 몽둥이세례를 받지 않기 위해 자식을 사랑하는 부잣집 어머님은 당연히 머리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한 학생이 도시락 뚜껑을 열었습니다.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하얀 쌀밥인데 누런 완두콩이 몇 개 박혀 있었습니다. 선생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이 도시락이 과연 쌀밥인지 잡곡밥인지 헷갈려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담은 몇 알이라도 완두콩이 박혀 있었으니 혼식이 아니라며 몽둥이로 머리를 때릴 수는 없었습니다.
학생의 승리였습니다. 담임선생은 몽둥이를 힘없이 떨구고 교무실로 돌아갔고 학생은 환호하며 누런 완두콩 몇 알을 걷어내고는 쌀밥으로 맛있게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지금도 그때 그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내 도시락엔 쌀보다 보리가 더 많아 색도 거무튀튀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때 그 학생이 기어이 먹지 않고 걷어낸 완두콩이 그렇게 맛있어 보였습니다. 난 지금도 콩밥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 때 그 학생이 버렸던 완두콩이 어찌나 맛있게 보이던지 그때부터 콩밥을 좋아하게 된 것이죠.
세월이 흘렀습니다. 사는 것이 힘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먹거리만큼은 흔하디흔한 세상이 됐습니다. 노령인구의 20% 이상이 당뇨에 걸리는 세상으로 변했습니다. 흰쌀은 피하고 현미나 잡곡을 많이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사람들은 당지수가 높다는 음식을 피하고 그렇지 않은 음식을 골라서 먹곤 합니다.
당지수가 높은 음식을 먹으면 혈당을 분해하는 인슐린이 너무 분비되어 저혈당을 일으키고 다시 허기를 느껴 또 다시 당지수가 높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장이 나빠져 혹독한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인가 오랜만에 당뇨를 앓던 친구를 만났는데 특별한 치료도 없이 건강이 회복되어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교도소 때문입니다. 교도소에 있는 이들은 국가에서 지급하는 건강식인 콩밥을 정해진 시간에 먹고 술이나 담배 같은 불필요한 음식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당뇨병도 나을 수 있었던 것이죠. 참 아이러니 합니다.
몽둥이로 맞는 것이 무서워 혼식을 해야 했던 세상이 당뇨의 갖은 후유증이 무서워 혼식을 해야만 하는 세상으로 변했습니다. 사실 지금에야 당뇨병도 좋은 약이 많이 나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으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만 역시 우리 몸이 원하는 것은 이밥에 고깃국보다 더 많은 운동이나 움직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오죽하면 복날에 보신탕이니 삼계탕이니 하는 것 좀 그만 먹으라고 강권하는 세상이 되었을까요. 아무튼 세상과 세상 사이에서 콩과 보리의 역할이 거어 참 제대로 바뀌었습니다.
“요즘 동료 의사들이 임플란트 환자가 늘었다는 말을 많이 해요. 보험적용이 되어 비용 부담이 줄어들었고 날이 따뜻한 봄에 치료를 시작하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몇십 년 전에는 틀니가 엄청 비쌌는데 이제는 임플란트를 어버이날 선물로 선택할 정도로 대중화됐다.예전에 비해 시술 비용이 많이 저렴해졌고 재료의 국산화, 수면시술 등 기술도 발전했기 때문이다. 건강한 치아는 오복(五福) 중 하나라고 한다. 강남 신사동에 위치한 더페이스치과 이중규 원장에게 치아를 제대로 관리하는 방법과 임플란트 시술에 대해 들어봤다.
65세 이상 시술, 관리가 더 중요하다
40~50대 이후부터 치과 치료를 받는 사람이 많습니다. 치아도 피부나 몸처럼 한꺼번에 노화되는 건가요?
많은 사람이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다가 병원에 옵니다. 치료시기를 놓치면 치료비도 많이 들고 치료도 더 힘들어지죠. 다른 선진국의 경우 대부분 패밀리닥터의 조언으로 정기검진처럼 6개월에 한 번씩 검사하고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치료를 받습니다. 치아 건강에 엄청 신경을 써요.
얼마 전, 치과 임플란트 부작용 분쟁으로 10건 중 4건은 시술이 중단됐다는 기사가 났어요. 이 기사를 접하고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요?
임플란트는 기본적으로 잇몸 절개를 하고 턱뼈에 구멍을 뚫어야 하는 외과적인 진료이기 때문에 부작용이나 후유증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사전에 환자의 상태를 체크해서 생길 수 있는 문제를 환자에게 고지해야 하는데 간혹 설명을 안 하는 경우도 있어요. 임플란트는 치료가 간단하게 끝날 수도 있지만 환자 상태에 따라 광범위한 뼈 이식 등 추가 시술을 할 수도 있어서 시술보다 시술 후 관리가 더 중요합니다. 이 점에 대해 환자의 이해를 이끌어내야 좋은 진료가 될 수 있어요.
임플란트 부작용 환자가 특히 60대 이상에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이 많은 분들 중에는 골다공증과 당뇨, 심장질환과 같은 전신 질환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높고 임플란트를 지지하는 치조골이 줄어든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당뇨나 심장질환은 대개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체크하고 약을 복용하기 때문에 대부분 관리가 잘되고 있습니다. 반면 골다공증은 치료제를 먹으면 뼈가 단단해지면서 내부 혈관이 줄어들고 턱뼈가 녹고 썩는 괴사 증상이 올 수 있어서 임플란트 치료에도 영향을 미쳐요. 치과 치료를 해야 하는 사람이 골다공증 약을 먹는다면 반드시 의사에게 알려야 해요.
간혹 ‘임플란트 전문의’라는 광고를 봅니다. 임플란트 전문의가 따로 있나요?
현행법상 임플란트 전문의는 없어요. 임플란트는 치아가 없는 턱뼈에 인공치근을 심고 그 위에 치아의 머리를 제작해서 끼우는 시술입니다. 굳이 나누자면 인공치근을 심는 것은 구강외과나 치주과에서 할 수 있고 머리를 만드는 것은 보철과에서 할 수 있습니다. 즉 전반적인 치과 개념이 종합되어야 하나의 진료를 할 수 있어요.
임플란트보다 틀니가 나은 환자도 있어
임플란트 비용이 70만원대에서 200만원대로 다양합니다. 왜 이렇게 비용이 다른가요?
과거에는 수입 제품으로만 치료를 했기 때문에 비용이 높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모든 부품이 국산화됐고 국산 업체가 더 잘 만드는 것 같아요. 또 재료가 다양해지고 임플란트 시술을 할 수 있는 치과의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비용이 전반적으로 낮아지고 있어요. 하지만 치료의 수가는 환자에 따라 난이도가 다르고 의료진의 지식과 노력, 경력이 포함된 것이기 때문에 비용 편차는 있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틀니를 더 많이 했는데, 요즘엔 임플란트 시술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유가뭘까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현재 국산 임플란트 시스템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볼 수 있어요. 또 65세 이상 환자에 대해 건강보험 적용이 되면서 좀 더 대중적인 치료로 자리 잡았어요.
이전에는 만 70세 이상의 어르신들에게 적용되던 치과 임플란트 건강보험이 2016년 7월부터 그 범위가 확대되어 만 65세 이상 부분 무치악(이가 다 빠진 이틀) 환자에게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50%는 본인 부담, 50%는 국가 부담으로 치료받을 수 있어요. 보험적용을 하면 보통 60만원 정도 들고 총 2개까지 가능합니다. 나이가 들면 피부 탄력이 줄어들듯 뼈의 볼륨도 줄어드는 퇴축 현상이 생기는데, 임플란트를 심으면 치조골 퇴축이 안 됩니다. 그것이 틀니와 다른 임플란트의 큰 장점이죠.
임플란트 시술을 받기 어렵거나 임플란트보다 틀니가 나은 환자도 있나요?
임플란트가 좋은 치료이긴 하나 만능은 아닙니다. 아주 드물지만 임플란트가 불가능할 정도로 치조골의 상태가 안 좋은 사람도 있어요. 환자 중 70대 어르신이 있었는데, 이분은 40대부터 틀니를 꼈어요. 치아 없이 30년 정도 틀니를 끼면 치조골이 자연스럽게 퇴축해요. 임플란트는 뼈에다 심어야 합니다. 이런 분들은 모든 치아의 뼈를 다시 만들어야 해서 오히려 부담스러울 수 있어요. 그래서 차선책으로 틀니를 사용하기도 해요. 임플란트의 개수를 줄이기 위해 임플란트에 의해 지지되는 복합형 틀니도 있습니다. 그런데 틀니를 하면 치조골이 줄어들며 헐렁해져 다시 만들어야 하는 경우도 생겨요.
전체 임플란트 식립은 무엇인가요?
임플란트는 힘을 받는 구조가 틀니와는 다르기 때문에 자연치와 아주 가깝죠. 그래서 임플란트가 가능한 환자는 임플란트를 하는 게 나은데, 임플란트 식립은 쓸 수 없는 치아가 전혀 없거나 이미 치아를 모두 상실한 경우 모든 치아의 기능을 임플란트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여러 개의 치아 이식과 광범위한 골 이식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에 전신마취나 수면마취를 통해 편안하게 진료받을 수 있습니다.
노인들의 치아 관리, 이것만큼은 꼭 신경 써야 한다면 뭐가 있을까요?
치아는 오복 중 하나입니다. 건강하게 잘 먹는 것에 대한 즐거움은 평균수명의 증가와 함께 사회적 이슈가 됐습니다. 건강한 치아를 원하신다면 위생관리를 철저히 하고 정기적으로 치과를 방문해 검사를 받는 게 좋습니다.
또 치과 치료에 대한 공포도 줄여야 합니다. 치과에 가면 돈이 많이 든다고 안 가시는 분도 계신데 보건소로 가면 비용 부담을 조금 줄일 수 있습니다. 예방적 차원에서 자주 치과에 가고 위생관리를 잘하는 분은 치과 치료 비용을 많이 절약할 수 있어요.
큰딸의 결혼을 앞두고 있는 A씨는 요즘 거울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딸아이와 버진로드에 설 때 멋진 아빠이고 싶은데, 새삼 거울을 보니 기대와 달리 영락없는 노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주름이야 세월이 만들어낸 흔적이고 훈장이라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군데군데 피어난 저승꽃은 정말 보기 싫다. 시니어들은 이런 고민을 자주 하게 된다. 특히 화장을 거의 하지 않는 남성들은 깨끗한 피부에 대한 동경만 있지 어떻게 관리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잘 모른다.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한미용성형레이저의학회 윤정현 회장(尹晸鉉·47)(연세팜스클리닉)과 함께 시니어를 위협하는 피부질환에 대해 알아봤다.
나이가 들면서 겪는 피부 변화는 크게 두 가지다. 의료계에서는 내인성 요인에 의한 변화와 외인성 요인에 의한 노화로 구분한다. 내인성 요인은 말 그대로 타고난 유전적인 피부 노화를 말하는 것이고 외인성 요인에 의한 것은 자외선에 의한 광노화가 대표적이다. 몸의 대사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활성산소라디칼은 체내에 누적되면서 피부에 악영향을 끼친다. 노화로 인한 가장 큰 변화는 피부가 얇아지고 탄력이 떨어지는 것이고 이로 인해 주름도 생기고, 피부 처짐도 생기고, 상처도 쉽게 입는다. 색소를 담당하는 멜라닌 세포가 줄면서 자외선에 대한 보호기능도 떨어진다. 진피의 두께도 20% 정도 줄어들어 피부가 얇아지고 혈류량도 줄어 창백해보이게 된다. 탄력섬유 성분이 감소되어 조직의 탄성이 떨어지고 이로 인해 외부 충격에 견디는 힘이 약해져 멍도 잘 든다.
얇아지는 피부, 피부가 늙는다는 신호
피부에 원치 않는 외적인 변화, 특히 점처럼 보이는 잡티가 보인다면 광노화로 인한 질환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의학계에서는 대부분의 피부노화로 발생하는 심미적 혹은 의학적 질환의 원인으로 자외선을 꼽는다. 광노화의 원인은 간단하다. 피부가 자외선에 많이 노출될수록 노화가 빨리 일어난다. 자외선은 파장에 따라 UVA, UVB, UVC로 구분하는데 광노화는 UVA, UVB 두 가지 자외선의 영향을 모두 받는다. 결국 햇볕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시니어 입장에선 억울할 수 있다. 검게 그을린 피부는 가족을 위해, 회사와 나라를 위해 땀 흘려 일하던 시절의 훈장 같은 것이었다. 피부관리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일에만 전념했다는 증표이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되레 피부가 늙는 원인이었다니 답답할 노릇이다.
광노화를 통해 나타나는 가장 대표적인 질환은 잡티(흑자증)와 검버섯이다. 그저 검은 얼룩처럼 보이지만 생성되는 과정은 완전히 다르다고 윤 회장은 설명한다.
“우리가 잡티라고 부르는 흑자와 검버섯은 완전히 달라요. 잡티는 피부의 색소세포가 색소를 과다하게 만들어 표피에 색소가 침착된 것이에요. 쉽게 말하면 피부 표면에 갈색 물감이 자리 잡은 셈이죠. 이에 반해 검버섯은 일종의 양성 종양이에요. 그냥 놔두면 점점 두꺼워지고 자라는 특징이 있어요. 손으로 만져진다면 검버섯으로 생각해도 돼요.”
물론 이외에도 피부에 흔적을 남기는 질환은 셀 수없이 많다. 따라서 피부과 전문의에게 진단을 받는 것이 제일 정확하다. 경험 많은 전문의는 육안으로만 확인해도 대부분 그 자리에서 진단을 할 수 있다.
“피부과 의사들끼리는 딱 봐서 모르면 모르는 것이라고 농담하듯 말해요. 아무리 비슷해 보여도 그만큼 잘 구분해낼 수 있다는 의미이겠지요. 의사가 구분 못하는 것은 희귀한 질환이라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어 흑색종 같은 피부암은 검은 점과 비슷해 보여도 경계가 지저분하고 불규칙한 특징이 있습니다. 일반인 눈에는 그게 그거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말이죠.”
태양을 피해야 하는 이유
원인과 예방법에도 두 가지 질환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검버섯은 광노화와 관련이 있다는 의심이 있지만 정확히 밝혀진 원인은 없다. 또 가족력이 있거나 우성유전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표피성장인자와 관련이 있다는 이론도 있다. 이렇게 정확한 원인을 밝힐 수 없다 보니 예방법도 확실치 않다.
이에 반해 잡티(일광 흑자)는 확실한 예방법이 있다. 잡티의 상당수는 일광 흑자가 차지하는데 자외선 차단으로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다.
“광노화를 예방하려면 태양을 피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햇볕을 안 보고 살 순 없으니까 차선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선크림과 보습제를 권합니다. 나이가 들면 피부가 얇아져 햇볕에 더욱 약해지기 때문에 자외선 차단제와 보습제는 반드시 발라줘야 합니다.”
특히 중년 남성들은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면 피부가 하얗게 되거나 특유의 끈적임이 싫어 사용을 꺼리는 경우가 많은데, 옛날 얘기다. 대부분의 화장품 브랜드에선 대표적인 남성용 자외선 차단제를 한두 가지 정도는 출시하고 있다. 기능적으로도 개선돼 끈적임도 없고 피부에 잘 스며든다. 예전 제품들처럼 마구 얼굴을 비비며 귀찮아할 필요도 없다.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저가 브랜드에서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어 금전적인 부담도 적다.
노화 막으려면 항산화 식품 먹자
치료는 잡티와 검버섯 모두 레이저를 이용하는 치료가 일반적이다. 검버섯은 냉동치료나 화학박피술이 사용되기도 하고, 잡티는 박피술로 치료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피부용 레이저가 다양하게 개발돼 치료에 널리 쓰인다. 검버섯은 치료하면 재발이 거의 없지만, 잡티는 재발이 일어나는 경우가 잦다. 근래에는 잡티 제거시 회복 기간을 단축시키고 재발 방지를 위해 색소를 깨뜨려 체내에서 흡수시키는 토닝 치료 기법이 같이 사용되는데 그중 가장 최근에 개발되어 상용화되기 시작한 피코(pico) 레이저를 이용한 치료가 부각되고 있다.
환자가 치료에 대해 주의해야 할 부분은 치료 방법보다는 치료 시기라고 윤 회장은 조언한다.
“의료 현장에서 만나는 환자 중 상당수는 너무 많이 진행된 상태에서 찾아옵니다. 아무래도 피부가 직접적인 고통을 유발하진 않으니까요. 그러다 외적으로 도저히 못 견디는 상황이 되면 찾아와서 큰 것만이라도 없애달라 하십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많이 안타까워요. 좀 더 일찍 심하지 않을 때 치료를 한다면 치료 과정도 더 간단하고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적거든요.”
윤 원장은 간혹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시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병을 되레 키우는 길이라고 경고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빙초산을 이용한 치료 시도다. 빙초산을 밀가루에 넣고 개어 환부에 붙여 조직을 괴사시키는 방법인데, 농도와 접촉시간이 문제가 돼 대부분 흉터나 색소침착과 같은 후유증을 남긴다. 얼굴을 걸고 하는 도박인 셈이다. 또 미백크림과 특수 마스크팩 같은 기능성 화장품도 잘못 썼다가는 화를 부른다고 윤 회장은 경고한다.
“대부분 피부 상태를 고려하여 사용해야 하고 사용 방법과 기간도 제품에 따라 차이가 있어요. 그런데 좋다고 무조건 쓰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다 문제를 일으키는 거죠. 피부 상태를 살피지 않고 사용하면 피부자극이 일어나기도 하고 자극을 받은 피부는 햇빛에 반응해 갈색증 같은 합병증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기능성 화장품을 쓸 때는 사용법을 반드시 읽어보고, 전문의와 상담한 후에 사용하시는 것이 좋아요.”
자외선차단제 외에 피부노화를 늦춰주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윤 회장은 채소나 과일을 많이 먹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앞서 언급한 피부노화의 원인 물질인 활성산소라디칼 분해에 항산화물질이 도움이 되는데 석류, 구기자 같은 열매에 많이 들어 있다. 또 칡에도 많이 포함돼 있다고 알려져 있다. 콩이나 토마토, 각종 베리류 등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윤 회장은 시중 약국에서 건강보조제로 대중화된 항산화 영양제를 사 먹어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달력에 빨간 글자로 적힌 쉬는 날들이 많으면 사람들이 모두 좋아합니다. 놀 수 있으니까요. 자칫 질식할 것 같았는데 ‘숨통이 트인다’는 사람도 있으니 그 좋음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저는 가끔 정말 누구나 그렇게 좋아할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사사로운 것이긴 합니다만 저는 젊었을 때부터 명절을 포함한 쉬는 날이 두려웠습니다. 현실적으로 잘 감당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돈도, 시간도,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의 긴장도 그랬습니다. 게다가 후유증마저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쳇바퀴 돌듯하는 일상이 오히려 편했습니다.
다시 5월입니다. 5월에는 ‘날’이 많습니다. 모두가 반드시 쉬는 날은 아니어도 마음 쓰게 하는 날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한번 제가 아는 대로 짚어보겠습니다. 1일은 근로자의 날입니다. 음력 4월 8일인 3일은 석가탄신일이고, 5일은 어린이날입니다. 8일은 어버이날, 14일은 입양의 날입니다. 15일은 스승의 날인데 그날이 5월 셋째 월요일이어서 성년의 날과 겹칩니다. 18일은 민주화운동의 날, 다음 날인 19일은 발명의 날, 20일은 세계인의 날, 21일은 부부의 날, 25일은 방재의 날이면서 실종아동의 날이기도 합니다. 30일은 음력 5월 5일이니까 단오절이고, 31일은 바다의 날이자 금연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올해에만 끼어든, 그런데 어느 날보다 중요한 날이 있습니다. 9일인 대통령 선거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유권자의 날인 10일을 앞에서 빠트렸군요.
살면서 자칫 놓치거나 잊기 쉬운 귀한 가치를 ‘날로 정해’ 새삼 간직하려는 노력은 어색한 표현이지만 ‘기특한 문화’라고 일컫고 싶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사람답기를 기하는 모습이 참 대견스럽습니다. 새삼 사람다움의 긍지를 확인하게 해주니까요.
그런데 그렇다 할지라도 5월은 날이 너무 많습니다. 예부터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過猶不及] 했는데 이 또한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한 지혜라 생각하면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로 5월은 그 말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5월의 날들은 대체로 봄의 상징성과 이어져 있습니다. 겨울에 수박을 먹으면서도 계절의 흐름을 못내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단순화해보면 ‘어린이로부터 어른에 이르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이 다 날로 정해져 있는 것이 5월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그 여러 날들을 하나하나 떼어 지내기보다 이를 한 다발로 묶어 ‘5월을 한번 5월답게’ 보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연세 지긋한 분들이 이 달을 어떻게 지내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우리는 모두 어른인데 참으로 어른일까?’ 하는 물음을 묻는 달, 그러니까 5월을 ‘어른임을 반추하는 달’로 삼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까닭인즉 분명합니다. 어른이 젊은이보다 많아진 이른바 고령사회가 되었는데도 ‘나이 많은 어른’은 넘쳐도 ‘나이 든’ 어른들은 그리 많지 않아 우리의 가정이, 사회가, 국가가 온통 유치한 모습만을 부끄러움도 없이 다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제가 공부하는 종교학에서는 종교문화의 특징을 기술하면서 이른바 성년식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줄여 말하면 종교란 모름지기 ‘어른 만들기의 문화’라고 해도 좋을 거라고 할 만큼의 비중을 가집니다.
문제는 이른바 ‘어른다움’이란 어떻게 기술될 수 있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교 전통의례인 관례(冠禮)나 계례(笄禮)를 들어 설명해도 좋겠습니다만 두루 성년의례의 보편적인 특성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서술해보겠습니다.
우선 어른은 자기의 정체성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 여러 문화권에서는 그 공동체의 전래 신화를 읊곤 합니다. 어리지 않다는 것은 내가 누군지, 내가 왜 사는지, 내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를 자신 있게 천명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이름과 직업과 누구의 자식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한참 모자랍니다.
다음으로 어른이란 삶이 물 흐르듯 그렇게 졸졸거리는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을 뜻합니다. 곤경, 좌절, 절망 등의 구비들을 한없이 거쳐야 하는 그런 것이 삶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회피하려는 것은 아직 어른의 삶의 태도는 아닙니다. 그 모든 부정적인 삶의 정황과 당당하게 직면하면서 마침내 ‘고통에 의미 있다’고 선언할 수 있어야 그가 비로소 유치하지 않은 어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른은 생명의 어버이가 된다는 것과 대체로 함께합니다. 생명을 낳는 존재가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생명의 신비에 대해 언제나 외경의 염(念)을 지니고 사는 사람,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 그가 곧 어른입니다.
만약 어른 됨의 이러한 서술에 우리가 동의할 수 있다면 5월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어린이날이면, 아이들을 즐겁게 하고 좋은 선물을 사주는 것도 좋지만, 아이들을 내가 어떻게 키우고 있는지, ‘어른이 되도록’ 키우고 있는지 아니면 ‘어린이로 머물게’ 키우고 있지는 않은지를 되살펴야 합니다. 스승의 날이면 내가 어떤 스승의 모습으로 학생들에게 어떤 가치를 가르치면서 그들을 어른으로 키우고 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스스로 설 수 있는 어떤 기회도 주지 않으면서 순응만을 강요하지는 않는지, 나 자신의 어른 모습을 단단히 해체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부의 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따로 함께’ 살고 있는지, 아니면 ‘함께의 구실’로 상대방을 자신의 영토 안에 철저하게 예속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의 어른 됨을 분석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그런 자식들로 이루어진 가정은 희망이 없습니다. 편하게, 쉬운 일만 찾아 살다 조금만 어려워도 주저앉고, 그러다 나이를 먹어 아비 어미가 되긴 하지만 아이가 아이를 낳은 ‘아이의 연쇄’만이 이어질 것이 빤한데, 그 가정이 제대로 된 가정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유치함의 지속일 뿐입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없는 시민들로만 우리의 공동체가 이루어질 때, 그 모습이 어떠할지도 그대로 보입니다. 공직에 들어서면 그것을 곧 내 사적 공간의 확장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유치하고 철딱서니 없는 공인들을 보면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공직 아닌 자리가 삶의 자리에서 있기나 한 것인지요. 나이 먹어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래서 어른이 되어 산다는 것은,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해 내 삶의 사적 영역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이를 모르는, 아예 알고 싶지도 않은, 그런 물음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어른들이 이른바 온갖 ‘책임 있는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을 때, 그 공동체의 내일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예견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진정한 문제가 아닐는지요.
5월에는 새삼 ‘어른 부재의 문화’에 대한 감각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네처럼 나이 들 만큼 든 사람들이 조용히 내 안에서부터 이런 감각을 싹트게 하여 내가 있는 자리에서부터 새로운 5월의 색깔이 채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칠인들 어떻습니까?
너무 구태의연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만 5월. 참 싱그러운 달입니다. 날에 맞추어, 누구나 즐겁고 환하게 행복하게, 그리고 유치하지 않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렇게 노력하겠습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젊은 시절부터 문학적 사유를 함께했던 오랜 벗을 그리워하며 서종택 고려대 명예교수이자 소설가께서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서종택 소설가ㆍ고려대 명예교수
한형,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써보려니 자네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줄을 서누만. 나의 기억력은 참으로 한심한 편인데도 신기하게도 나에게는 60여 년 전의 자네 주소가 그대로 떠올랐네.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본정리 산 12번지. 내가 자네에게 처음 쓴 편지의 지번이지. 우린 그때 중2였고 당시의 학생잡지 지에 다투어가며 소설(콩트)들을 발표했지. 그때 나는 자네의 인가 하는 작품을 읽고 긴 편지를 보냈고. 자네는 그보다 더 긴 장문의 답장을 보내왔고. 우리는 그때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거나 무엇을 그리거나 끄적거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외롭고 허기에 찬 소년 시절을 보내고 있었지.
한형,
나는 지금도 자네가 나에게 처음 소개해주었던 모차르트를 잊을 수 없네. 우리가 처음 만난 겨울이었지 아마. 나는 천안에서 내려오는 자네를 마중하기 위해 옆구리에 이보 안드리치의 (아마 그즈음 노벨상 수상작이었을 거야)를 끼고 광주역 플랫폼에 서 있었지. 최인훈의 에 흥분하고 방 한 칸을 찾아 밤길 헤매는 마렉 플라스코의 의 젊은 애인들을 가슴 아파하고, 그러나 이제는 이 아닌 이나 을 옆구리에 낀 채 담배를 넣고 다니던 오만방자한 고2의 겨울이었지. 진눈깨비 어지럽게 흩날리던 그해 겨울 역 광장에서 우리는 처음 수줍게 악수했고 악수가 끝나자마자 자네는 굵은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광주엔 클래식 감상실이 있느냐고 물었어. 그리고 충장로의 그 지하다방에서 자네가 리퀘스트 곡으로 써낸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5번’을 그때 처음 알았지. 대학생이 되어 종로의 ‘르네상스’를 들락거리면서부터 나도 덩달아 고전음악을 듣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문득 모차르트와 하이든이 대책 없이 감미롭고 경쾌해지기 시작했고 베토벤이나 브람스가 대책 없이 무겁고 둔중하게 가슴을 울리기 시작했다네. 평생 이어폰을 끼고 지낸 나의 음악 사부인 한형의 후광이었지.
한형,
그리고 그즈음 나와 함께 아파준 한형께 감사하네. 청파동의 어느 대학에 우리들의 ‘그녀’들이 있기도 했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다른 누구와도 함께 기숙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하숙집을 함께 옮겨 다녔지. 한쪽이 각혈을 시작하자 의사의 휴학과 별거 권유를 무시한 채 우리는 국 따로 반찬 따로 먹기를 맹세했지만 이내 3개월 간격으로 결핵 감염을 확인했고 주사와 투약으로 병원을 함께 들락거렸지. 떨어져 지내는 것보다는 함께 지내는 게 편했노라고 자네는 훗날 그때를 회고했고, 문단 데뷔도 못한 주제에 식민지 시대 작가의 폐결핵 동기들 흉내만 냈노라고 우리는 함께 웃었지. 우리가 앓았던 결핵은 그대로 60년대의 절망과 우울의 상징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어. 억압과 감시, 수배와 투옥, 휴교와 계엄령으로 이어진 이 시기의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혼란의 시기를 지나는 동안 문과대학의 실속 없는 문학청년의 꿈은 서서히 마모되고 스러지기 시작했지. 문청 시절의 자존심이 대학에서 구겨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비로소 문학은 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고 문학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차리고 말았지.
한형,
창작을 접어두고 대학의 연구실이나 강단에서 우리가 보낸 세월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1970년을 전후해서 문단에 함께 데뷔했고 1980년을 전후해 함께 대학의 교수 자리는 얻을 수 있었지만, 그리고 논문에 각주를 달고 이론서를 꾸려내고 학생들에게 문학론을 강의했지만, 막을 수 없는 허허로움을 어떻게 삭이고 있었는지는 서로가 다 짐작하는 비밀이었지. 화려한 문청 시절은 추억으로 끝나고 동년배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들이 서점가의 중심 코너를 차지하고 있을 때 우리는 다만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고 그 안타까움은 엉뚱하게도 강의실에서의 폭언으로 표출되기도 했어. 사실 어느 해 자네가 대학원 강의실에서 퍼부었다는 당시의 어떤 대하소설에 대한 폄하는 좀 심했었네. 자네는 그때 그 소설을 김승옥의 에 빗대면서 그 작품의 반만큼의 감동도 없는 지루한 다큐멘터리에 불과하다고 당시의 소설을 비난했다지.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열등감을 학생들에게 들키고 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네. 가령 어느 소설에 대한 평가를 질문받고는 나는 짐짓 ‘너무 길어서’ 읽지 못했노라고, 한 권으로 마칠 이야기를 열 권으로 써내는 일은 창작가들이 저주를 퍼부어야 마땅하다고, 언어의 감각이나 경제성이야말로 서사미학의 종점이라고 갈파(!)했지. 창작보다는 비평에 몰두해버린 우리들의 파행(?)은 그러나 상실감이나 공허감으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었네. 자네가 펴낸 은 서사학계의 쾌거이자 성과였어. 이 책은 서사에 관련한 용어를 풀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개념이 형성된 배경과 이론의 전개 과정을 소논문 형식으로 서술함으로써 서사의 개념들과 그 쟁점들을 아울러 익히게 한 획기적인 책이었지. 이혼하지 못한 부부처럼 창작과 비평의 어색한 동거를 계속하면서 우리는 정년을 맞았고, 문학은 써내는 즐거움 못지않게 향유하는 즐거움도 있다고 우리는 서로를 위로했었지.
한형,
자네가 보여준 그동안의 편식과 편애와 편파를 나는 존중하네. 그리고 자네의 폭력마저도. 그것은 자네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자 이념이었어. 도선불여악(徒善不如惡), 어쭙잖은 선은 차라리 악함만도 못하다 했던가. 자네는 기름기 있는 음식을 기피했고 과시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으며 위선을 경멸했었지. 호불호가 분명했고 어떤 제자에 대한 편파적인 애정은 징그러웠고 그 반대 또한 무서울 정도였다니. 그래서 사람들은 자네를 성질 더러운 인간이라 했고 60년 지기인 또 하나의 우리의 친구 오탁번은 그러한 자네를 대책 없는 놈이라 말하곤 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단연코 ‘개성’으로 결론지었다네. 이 편파적인 판정을 비난할 사람은 없을 거네. 왜냐면 우리보다 자네를 더 잘 아는 친구들은 없다고 자부하기 때문이지. 자네는 편식했지만 그 음식은 순정했고 편견은 심했지만 결백했으며 사람을 편애했지만 그들을 감식하지는 않았지. 폭력 교수로 몰아세우는 학생 대표를 폭력으로 제압했던 자네의 80년대식 무용담은 지금 들으면 자네는 운도 많이 따랐었지.
한형,
자네가 중환자실로 옮겨가기 하루 전, 자네는 나에게 “당분간은 죽을 기미가 안 보인다”고 껄껄 웃었고 나는 “그래, 우린 아직 갚아야 할 것이 있다” 어쩌고 지껄였지. 그것이 자네와 주고받은 마지막 대화였네. 자네는 그날 담당 간호사에게 생뚱맞게도 멘델스존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지. 잠깐 당황하던 간호사가 이내 그의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봄노래를 좋아하노라고 대답해 자네를 감동시켰고, 자네는 이런 병원이라면 편하게 입원할 수 있겠노라고 기뻐했다지.
한형,
아버지께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의 후유증만을 허락해달라는 아들 근이 녀석의 기도도 헛되이 자네는 의식을 잃은 지 2주일 만에 먼 길 떠나고 말았지. 삼우제를 준비하면서 근이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어. 짧은 묘비명이 필요하다고 했네. 나는 주저 없이 자네의 짧은 소설의 긴 제목을 그대로 옮겨 보냈네.
“이다음 우리는 누구의 가슴에 따뜻한 별빛으로 남을 수 있으랴.”
>>서종택
1944년 전남 강진 출생, 광주 사레지오고를 거쳐 고려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 1969년 , 에 첫 소설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 , , , , 등의 창작집과 , , 등의 논저가 있다.
반려견, 반려묘와 살다 보면 서서히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빠지거나 점점 길어져 눈을 덮는 털도 그렇고 발바닥에는 종종 상처도 생긴다. 낑낑대며 걸어서 어디라도 다쳤나 살펴보려고 하면 소리를 지르면서 아픔을 호소한다. 반려견과 반려묘를 키울 때 간단하게나마 필요한 미용 도구와 발바닥 및 털 관리법에 대해 알아봤다.
자료제공 웹진
반려견 털 관리할 때 필요한 도구
슬리커 브러시 슬리커 브러시는 중·장모 견종의 죽은 털을 제거할 때 사용한다. 죽은 털만 제거해도 털에 윤기가 돌고, 환기가 어려운 겨울철 반려견의 털 걱정도 덜 수 있다. 슬리커 브러시로 빗질을 할 때는 털이 자란 방향으로 가볍게 빗어줘야 한다. 반려견이 시원해할 것이다. 피모를 강하게 자극하면 찰과상이 생길 수도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고무빗 고무빗은 단모 견종의 먼지와 털을 제거할 때 쓰인다. 중·장모 견종들과 달리 털이 짧아 고무빗으로만 빗어줘도 털에 윤기가 돈다. 고무빗은 슬리커 브러시처럼 피모에 찰과상이 생길 염려는 안 해도 된다. 단, 예민한 피모를 가진 반려견의 경우 마찬가지로 털이 자란 방향으로 가볍게 빗어줘야 한다.
가위 가위는 중·장모 견종의 엉킨 털을 자르는 데 이용한다. 안전을 위해 반드시 빗을 털 뭉치 아래에 넣고, 빗 위에서 가위질을 해야 한다.
클리퍼 클리퍼는 어떤 견종이든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다. 가위보다는 빠른 시간 안에 미용을 끝낼 수 있다. 그러나 과열되기 쉬워 화상을 입거나 모터가 타버릴 수 있다. 중간중간 클리퍼 날 부분의 열을 확인하면서 쉬엄쉬엄 미용을 해주는 것이 올바른 사용법이다. 세척 후에는 날을 잘 닦은 뒤 냉각, 소독해 보관한다.
피모 관리 유의 사항
☞반려견
포메라니안, 스피츠와 같은 이중모 견종은 모근에 가깝게 클리퍼를 사용하면 털이 다시 안자라는 경우가 있다. 털의 특성을 잘 파악해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사료와 간식을 고를 때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원료가 불분명한 제품은 반려견의 털과 피부를 망가뜨릴 수 있다. 원료를 꼼꼼하게 체크해 건강한 사료와 간식을 먹이도록 한다. 목욕 뒤에는 드라이어의 미풍이나 냉풍으로 털을 말려야 한다. 반려견들은 체온이 높아 고온으로 말릴 경우 고체온증에 걸리기 쉽다. 물은 깨끗하고 신선한 것으로 줘야 한다. 특히 물을 잘 먹지 않는 강아지의 경우 수분 부족이 지속되면 피부에 문제가 생기기 쉽고 시간이 지나면 신부전으로 발전할 위험성이 있다.
☞반려묘
고양이의 경우는 스스로 털을 핥아 몸을 단장하는 ‘그루밍’을 한다. 또 ‘그루밍’을 통해 ‘헤어볼(털 뭉치)’을 토해내는 행동을 한다. 따라서 아침, 저녁으로 가볍게 빗질로 죽은 털을 제거해주는 것이 좋다. 단모종의 경우는 촘촘한 빗으로 빗기고, 장모종의 경우는 조금 성긴 빗으로 빗겨주면 좋다. 털을 들어 속 털까지 빗어줘야 엉키지 않는다. 고양이는 털이 엉키면 불편해하고 가려워하기 때문에 방치하면 안 된다. 빗질을 싫어하는 고양이라면 고무장갑을 끼고 물을 묻혀 고양이의 몸을 쓸어주면 된다. 목욕을 시키거나 털을 미는 방법도 있다. 미용 전문가에게 맡겨도 좋지만 후유증이 생기는 경우가 많아 집에서 미용을 하는 고양이가 많다. 만약 헤어볼을 계속해서 토해내면 헤어볼 제거에 도움 되는 사료, 간식, 보조제를 먹이거나 식이섬유가 풍부한 식품을 먹인다. 식이섬유는 헤어볼을 장까지 운반해 배출할 수 있게 도와준다.
건조한 겨울철, 반려견·반려묘의 발바닥 건강 관리
☞반려견
반려견의 발바닥은 두꺼운 편이라서 한 번 갈라지거나 상처를 입으면 회복하는 속도가 매우 느리다. 건조함으로 갈라진 상황이라면 그로 인해 발바닥에 상처를 입는 일이 더 잦아질 수 있다. 이미 갈라졌거나 상처를 입은 상태라면 2차 감염까지 가지 않도록 빠르게 치료해주는 게 좋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발바닥이 건조해지지 않도록 미리 관리를 해 예방하는 것이다.
첫 번째, 산책을 다녀온 후 반드시 미지근한 물로 발바닥을 깨끗하게 닦아준다. 발바닥 사이에 이물질이 끼어 있을 경우 그것들로 인해 작은 상처가 생겨 갈라질 수도 있다.
두 번째, 발바닥 털을 손질한다. 발바닥 털이 많이 엉켜 있으면 산책할 때 많은 이물질이 발바닥 사이에 낄 수 있다. 발바닥 털은 반려견 보행 시 미끄러움을 유발해 슬개골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세 번째, 발톱이 너무 길지 않게 잘라준다. 제때 잘라주지 않으면 발톱이 발바닥으로 파고들어가 상처를 낼 수 있다.
네 번째, 반려견 전용 발바닥 보습제를 수시로 발라준다. 마사지하듯이 가볍게 눌러주면서 발라주면 좋다.
다섯 번째, 발바닥 마사지를 해준다. 사람의 발바닥처럼 반려견도 경락이 발바닥에 집중되어 있어 마사지를 해주면 건강에도 좋고 피로도 풀어줄 수 있다.
맨발로 보행하는 반려견들에게는 여름철의 뜨거운 길 혹은 겨울철의 차가운 길은 독이 될 수 있다. 발바닥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신발이나 패드 등을 신겨보는 것은 어떨까?
☞반려묘
반려묘들의 발바닥 건조는 영양 불균형 또는 모래의 영향도 있겠지만 요즘 같은 건조한 날씨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작은 상처의 경우 보통 ‘그루밍’을 통해 저절로 낫기도 하지만 가능하면 발견 즉시 2차 감염 예방을 위해 치료하는 게 좋다. 반려견과 마찬가지로 발바닥이 건조해지지 않도록 유의한다. 가장 간편한 예방법은 반려묘 전용 발바닥 보습제를 사용해 수시로 발라주는 것이다. 예민한 고양이의 경우 발바닥을 못 만지게 할 수도 있지만, 잠이 들었을 때 조금이라도 발라주기를 권장한다. 만약 건조함 때문이 아니라면 현재 먹고 있는 사료 및 간식의 영양성분과 모래가 청결히 유지되고 있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충분한 물 섭취도 필요하다. 체내 수분이 부족해지면 고양이 피부 또한 건조해지기 때문이다. 수분 공급을 충분히 해주고, 물을 잘 먹지 않는 고양이의 경우 습식사료를 주는 것이 좋다. 실내 습도 유지도 중요하다. 겨울철은 실내가 건조하므로, 가습기를 이용하거나 젖은 수건 등을 걸어놓고 습도 유지를 해준다.
오늘 전철을 타고 가면서 바로 옆의 승객이 책을 읽는 것을 보게 되었다. 제목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평소 행복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은지라 슬쩍 어깨 너머로 보았다. 그런데 그 분이 한 페이지를 30분 이상 정독을 하고 있어 나도 함께 읽을 수 있었다.
요약하면 이런 이야기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찾기 위해 시골길을 걷다가 행복에 겨워 노래를 부르는 농부를 발견하여 물어보았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하고 묻자 농부는 “저는 항상 행복합니다.” 라고 대답을 하여 얼마나 행복한지 계속 묻게 되었는데 그 답변을 듣고 나서 그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결론을 지었다는 내용이었다.
농부는 한 때 가난하여 신발이 없어 불행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발이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된 순간 자신은 아주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이웃에서 직장생활 하시는 분이 정리해고를 당해 실직하여 불행하게 지내는데 자신은 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덧 붙여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하여 누리고 있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불행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로 스토리가 되어있었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이 생각났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목적을 가졌는데,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덕을 쌓아야 하는데 이성에 알맞은 덕스러운 활동을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덕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습관을 통해 몸에 배이도록 해야 한다. 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中庸)의 생활 자세를 강조하였다.
공자도 중용을 아는 자는 많아도 실천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위 이야기에 나오는 시골 농부는 이미 생활 속에서 중용의 의미를 터득했기에 항상 늘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필자도 아침에 일어나면 늘 행복함을 느끼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시골 농부처럼 필자도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체적으로 만족하는 편이다. 왼쪽 다리로 걸을 때 골수염을 앓은 후 다 낳았으나 후유증으로 걸음걸이가 불편하지만 그래도 행복함을 느낀다. 아마 어쩌면 필자가 아프지 않고 정상적이었다면 더 행복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필자는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기에 행복을 느낄 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대학시절 윤리학 교수의 ‘취약점 보완의 원리’가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준 것 같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취약점이 있다. 그러나 그 취약점을 보완하는 방법을 찾는 다면 그 취약점이 장점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비록 걸음 거리가 좀 불편하지만 필자는 운전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가끔 불편함을 더 편함으로 전환시키는 삶을 살고 있다. 만일 필자가 비행기를 운전한다면 이 지구상에 누구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 3대 행복론으로 유명한 러셀이나, 칼 힐티 그리고 알랭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필자는 삶속에서 나름대로 행복의 비결을 찾아가고 있다.
행복이란 부에서 찾을 수만도 없고 도덕적으로 선한 생활을 하고 건강하게 열심히 일하고 배우면서 그리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경제적으로 크게 부족함이 없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사는 습관을 기른다면 매일 같이 자신에게 찾아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이를 기억하기 쉽게 WHERES( Work, Health, Economy, Relation & Study)의 삶이라 정의해 본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바로 이를 실천하고 느끼면서 사는 그 농부와 같은 사람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