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다 보니 죽는 것에 관심이 많아진다. 이미 주변에서 또래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많이 보았다. 젊었을 때는 교통사고 같은 사고사가 많았지만, 이제는 질병으로 죽는 사람이 많다. 부모님들도 연로하셔서 작고하시는 분이 많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래서 이 나이쯤 되면 죽음에 대비하게 된다. 죽어서 매장을 원하는 사람도 많지만, 요즘은 화장이 대세라고 한다. 그다음은 묻힐 장소로 선산, 공원묘지, 납골당, 삼림욕장 등이 거론된다.
어디서 죽느냐도 중요하다. 그전에는 집에서 임종해야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집이 아닌 곳에서 죽으면 객사라고 하여 불쌍하게 봤다. 그러나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최근에는 병원에서 죽는 경우가 무려 73%라고 한다. 병원도 집이 아니므로 객사에 속한다. 그러나 이 비율은 점점 높아질 수밖에 없다. 고령이 되면 병원에 자주 가야 하고 그다음에는 아예 병원 신세를 지다가 죽는 것이다. 집에는 오지도 못하고 바로 병원 장례식장에서 장지로 향한다.
어떻게 죽느냐도 중요하다. 암 같은 질병이 생겨 고통을 받다가 죽는 경우가 가장 불행해 보인다. 돈은 돈대로 까먹고 그 힘들다는 항암치료와 통증,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뜨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졸지에 객사하는 경우가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져 죽으면 고통은 순간적이다. 고혈압, 고지혈증을 ‘소리 없는 살인자’라 표현하며 무서워하지만, 죽음의 방법에서는 반드시 회피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고통만큼은 순간적이다. 고혈압이나 고지혈증을 앓고 있으면 기름진 음식, 술 등을 못 먹게 한다.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다가 죽는 사람에 비하면 불행이다. 차라리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다가 심근경색이나 뇌경색으로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지 않고 후유증이 남아 고생하다가 죽을까봐 관리를 하는 것이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또는 졸지에 죽음을 맞이했을 때 팬티가 깨끗한지 걱정이 된다는 사람도 있다. 죽으면서도 남들 눈을 의식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죽고 나면 그만이다. 본인을 중심으로 보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죽을 때도 남을 의식하는 병폐다.
요즘 나는 여행을 자주 다닌다. 고산병 위험을 무릅쓰고 히말라야에도 가고 각종 전염병이 있다는 아프리카에도 갈 예정이다. 교통수단도 위험하고 여행지에서도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위험하다며 말리는 지인이 많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 하다가 죽는 것도 행복이라고 본다. 위험하다고 집에서만 있다가 죽을 수는 없다. 사고로 죽을 수는 있지만, 확률적으로 사고 없이 잘 다녀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히말라야 고봉을 등정하다가 사고로 죽은 등산가도 많다. 그 사람들은 객사를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슬람교에서 해마다 성지순례를 하다가 죽는 사람도 많다.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냐고 물으니 성지순례 하다가 죽으면 천당에 간다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객사(客死)이자 내가 만들어낸 말이지만, 도사(道死))인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온몸이 아팠다. 전날 낮술부터 시작해 하루 종일 술을 마셔서 숙취 때문인 줄 알았다. 종종 그런 적이 있었기 때문에 술 마신 다음 날의 당연한 후유증으로 알았다. 그런데 너무 힘들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더 아팠다. 알고 보니 근육통이었다.
일주일 전에 맞은 황열병 예방 주사가 원인이었다. 아프리카나 남미를 여행할 때는 이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사람에 따라 감기 몸살, 근육통 등의 부작용이 있다고 한다. 황열병 주사를 맞고 여행 떠나기 전에 너무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는 사람도 있다. 주사를 맞을 때 3일간 금주해야 한다는 주의를 들었다. 그래서 4일째부터는 음주를 해도 된다고 해석했다. 술 좋아하는 사람이 3일이나 금주를 했으니 4일째부터 평소보다 더 마셨다. 그래서 탈이 난 것이다. 예방 주사 약효가 나타나려면 10일이 지나야 하는데 약효가 나타나기도 전에 술을 마셔 몸에 무리가 된 것이다. 백신 주사를 맞을 때 3일간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한 이유는 간에 부담을 주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술을 마셔 간을 힘들게 한 것이다.
근육통은 그동안 무리하게 사용한 부위에 여지없이 나타났다. 히말라야 트레킹 때 고생한 다리와 엉덩이, 그리고 당구 칠 때 자주 쓰는 오른쪽 팔과 어깨 근육이 중점적으로 아팠다. 무릎 관절과 허리 통증도 심했다.
나는 아파서 병원에 가본 적이 없을 만큼 건강 체질이다. 이렇게 아파본 것은 처음이지만 이번에도 병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집에 있던 파스를 닥치는 대로 붙였을 뿐이다. 황열병 백신 주사의 부작용이 나타나면 타이레놀을 먹으라는 주의사항을 듣기는 했지만, 주사 맞고 3일이 지나면 부작용 없이 그냥 지나가는 것으로 잘못 알았다. 누워 있는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몸을 일으킬 수 없을 정도여서 밥해 먹을 엄두가 안 났다.
그래도 하루 만에 일어나 평소 어울리던 사람들을 만났다. 핼쑥해진 내 얼굴을 보고 다들 큰일날 뻔했다며 자녀들에게라도 연락하지 그랬느냐며 위로했다. 그러나 직장에 다니는 자녀들을 부른다는 게 내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녀들이 온다고 해도 누워 있는 나를 위해 해줄 일이 없다. 그러면 우리라도 부르라며 아플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람 손길이라고 했다. 아플 때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서러운 일은 없다고도 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은 종종 생길 것이다. 그때는 정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간병인을 부를 수도 있다. 얼마 전 연락을 준 노인복지회 독거노인 담당자에게 전화를 할 수도 있다.
독거노인은 더 건강해야 한다는 교훈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아프면 나도 힘들고 누굴 불러도 폐가 된다. 급한 상황을 대비해 타이레놀 정도는 상비약으로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누구 도움을 받지 않고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 수 있다. 몸을 추슬러 밖으로 나간 김에 당장 한 통을 사다놓았다.
송파 노인복지관에서 독거노인 현황을 조사한다며 문자가 왔다. 문자 메시지를 보면 바로 전화해 달라고 했다. 3년 전에도 같은 내용의 전화가 왔다. 65세부터는 노인복지관에서 주기적으로 현황을 조사 관리한다는 내용이었다. 혼자 사는 노인들은 죽거나 중증으로 거동을 못할 경우 남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내가 벌써 요주의 대상이 되었나 하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지만, 내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그때 건강 상태를 묻는 질문에 서울시 장애인댄스스포츠 대표 선수라고 하자 더 이상 걱정할 것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번에는 담당자가 바뀐 모양이다.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하고 안부전화도 하겠다 한다. 그럴 필요 없다고 했더니 질병 유무, 건강을 위해 하는 운동 등을 물었다. 얼마 전에 히말라야에 갔다 왔다고 하니까 건강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주소지 확인과 거주하는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 이사 갈 계획에 대해서도 물었다. 여차하면 달려가야 해서 거주지가 확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거 가족이 있는지, 독거노인이 맞는지도 확인했다. 동거가족이 있으면 관리 대상에서 빼도 되지만, 독거일 경우에는 노인복지관에서 반드시 관리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자녀들과의 연락주기도 물었다. 독거노인은 누군가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연락을 해야 한다고 했다. 서로 바쁘고 무소식이 희소식인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답하면서 생일, 어버이날, 설, 추석 명절 등 1년에 네 번 만난다고 했다. 그 사이에 같은 동네에 사는 동생, 형수님과도 연락을 한다고 했다.
사회관계에 대해서도 물었다. 문화센터나 친목 모임 등에 자주 나가느냐는 질문이었다. 동호회와 인터넷 카페 활동을 하면서 함께 식사하고, 당구 치고, 영화 보고, 걷기 운동도 한다고 했다. 동문회, 동창회, 협동조합 일에도 관여해서 일상이 꽤 바쁘다고 했다. 그렇다면 관리 대상이나 요주의 인물에서 빼도 되겠다면서 나에 대한 현황 조사는 1년에 한 번만 하기로 했다.
평상시에는 상황 체크에 문제가 없다. 그러나 장기 여행을 떠날 경우에는 휴대폰을 꺼두기 때문에 걱정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럴 때는 가족 밴드에 여행 일정을 미리 올리면 된다. 일간 신문도 휴독 신청을 해서 문 앞에 쌓이는 일이 없도록 한다. 만약 변고가 생겨서 거동을 못하게 되면 신문이 쌓이므로 누군가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동호회 인터넷 카페 출석표에 매일 체크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앞날에 대해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언제까지나 건강하게 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그때 가서 고민할 일이다.
대법원이 일할 수 있는 나이를 60세에서 65세로 연장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늘어난 것 등이 이유라고 했다. 일할 수 있는 나이 60세 기준은 평균수명이 남성 67세, 여성 75.3세였던 30년 전 판결이므로 지금은 수정되어야 하는 게 맞다고 본다. 이제 평균수명은 남성 79.7세, 여성 85.7세로 당시보다 10년 이상 더 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할 수 있는 나이와 일해야 하는 나이는 구별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더 벌어야 하거나 봉사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더 일해도 된다. 그러나 일만 하다가 죽을 수는 없다. 일을 하면 수입이 생겨 경제적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개인의 삶에서는 그만큼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다.
나는 50세에 퇴직한 뒤 60세까지 개인 사업을 했다. 60세에 일을 접은 것은 성과도 없는데 살아남기 위해 더 투자를 하고 혹독한 고생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해외 박람회에도 열심히 쫓아 다니면서 바이어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생산기지였던 중국의 최저 임금이 너무 급격히 올라 베트남,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을 새로 개척해야 했는데 엄두가 안 났다. 그래서 사업을 과감히 접었다.
개인 사업을 할 때는 지인이 많아 큰 도움을 받았지만 협의를 하기 위해 실무자들을 만나면 내가 직책도 높고 나이가 많아 대하기 어렵다면서 젊은 직원을 보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실적이 불규칙해서 사람을 고용할 수도 없는 1인 기업이라서 젊은 직원을 따로 둘 수가 없었다. 몇 달간 얼굴도 모르고 메일만 주고받았던 해외의 한 바이어는 막상 내 얼굴을 보자 나이 때문인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중에 그 바이어에게 경쟁사의 젊은 여성이 드나드는 것을 알고 일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갑질하는 젊은 바이어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것도 힘들었다. 영업을 하면서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의 나이가 젊어서 내가 활동하던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60세 이후부터는 인생 2막의 삶을 시작하며 생활 방식을 바꿨다. 취미 활동과 사회봉사 활동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지인들 중에는 그 시기에 고인이 된 사람도 많아 인생이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00세 시대라지만, 지금 시니어 중 100세까지 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의 건강수명은 남성 64.7세, 여성 65.2세다. 그 이후는 삶의 질이 떨어져 인생을 제대로 즐기기 어렵다.
얼마 전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오면서 느낀 점은 힘든 여행은 이제 다니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여행길에 동행할 사람을 찾아봤지만 모두 손사래를 쳤다. 나는 그나마 잘 다져놓은 체력 덕분에 무사히 다녀왔으나 지인들은 내 걱정을 많이 한 모양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더 늦기 전에 여행길에 부지런히 나설 것을 권하고 싶다. 70대 중반만 되어도 여행사에서 꺼려한다는 얘기도 있다. 아직 체력이 받쳐주므로 먼 곳부터 먼저 다녀오고 더 나이 들면 가까운 곳을 여행할 작정이다.
1월에 히말라야에 다녀왔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가 4130m이니 태어나서 가장 높은 곳에 갔다 온 셈이다. 고생길이었으나 여행의 맛을 제대로 알게 됐다. 또 가고 싶으냐는 질문에는 “노!”라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히말라야에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을 만큼 매력적이다.
그 뒤 엉덩이가 자꾸 들썩이는데 이번에는 아프리카 여행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빅토리아 폭포를 보는 것이 하이라이트이고 보츠와나, 남아공, 잠비아, 에티오피아 5개국을 10일 동안 다녀오는 여정이다. 기본 경비는 480만 원. 생각한 것보다 싼 편이다. 추가 경비로 가이드 기사 팁 120달러, 비자 비용 100달러, 빅토리아 폭포 헬기 투어 165달러, 크루거 국립공원 야간 게임 드라이브 80달러를 준비하면 되고 생수를 사거나 팁을 줄 때도 약간의 돈이 필요하다. 이참에 집에서 가장 먼 아프리카에 가보자는 결심이 섰다.
이번에도 같이 갈 사람을 섭외해봤는데 실패했다. 비용도 부담되고 장시간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그렇게 고생하면서까지 굳이 아프리카 여행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돈이면 유럽 등 편한 여행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갈 기회가 자주 생기는 것은 아니다. 유럽 여행은 이미 여러 번 가봤고 앞으로도 갈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쉽게 가기 어려운 지역이다. 또 대자연을 감상하며 여행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황열병 예방주사를 맞아야 하는 일은 물론 부담스럽다. 부작용으로 고생한 사람들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앞으로 남미 지역 여행을 하려면 어차피 황열병 예방주사는 맞아야 하므로 맞기로 했다. 예방 백신 접종 증명이 없으면 아예 입국이 안 되는 나라가 몇 개국 있다. 황열병은 모기로 인해 감염되고 사망률이 25~50%에 이른다 한다. 말라리아, 뎅기열도 모기가 일으키는 질환이다. 말라리아는 예방 백신이 없고 단기 여행자는 여행 2일 전부터 귀국 7일 후까지 매일 말라톤이라는 약을 복용해야 한다. 뎅기열도 백신이 없다.
국립중앙의료원에서 황열병 예방 백신을 맞으려면 일주일 전에 예약해야 한다. 생백신이라 보관 유효기간이 짧기 때문이다. 일주일 전에 예약하고 가야 해서 번거로웠다. 또 행정수수료로 3만2460원을 내고 전자 수입인지를 사야 한다. 인지는 국립중앙의료원 내에 있는 신한은행에서 취급한다. 신한은행에서 줄을 서 기다리는 게 싫으면 다른 은행에서도 발급받을 수 있다. 다만, 취급을 안 하는 은행 지점이 많아 하나은행 을지로 6가점, 신한은행 국립중앙의료원에 문의해봐야 한다.
국립중앙의료원 로비에 가면 8번 창구에 황열병 전용 창구가 있다. 고객대기표를 뽑고 기다리지 말고 바로 8번 출구로 가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여기서 접수 및 기본 문진표를 작성하고 2층 감염병 센터로 가면 된다. 체온을 재고 진찰실에서 담당의사가 다른 병력에 대해 질문한다. 모두 통과하면 주사실에서 예방주사를 맞는다. 진료비는 1만8880원. 다시 1층 접수창구로 가서 황열병 예방 접종 증명서를 발급받아 여권에 붙이면 끝난다. 단, 주사 쇼크 반응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20분 정도 근처에서 더 시간을 보내라고 권장한다. 이 접종은 10일 후부터 효과가 있으며 평생 유효하다. 그러나 여권을 갱신할 경우 기재사항이 달라지므로 다시 접종해야 한다. 접종 후 부작용은 10~25%로 높은 편이다. 두통, 근육통 등 경미한 증상이 나타나지만, 사람에 따라 다르다. 심하게 고생했다는 사람도 많다. 드물게 뇌염, 신장염, 간염 등 심각한 합병증이 올 수도 있다고 한다. 샤워는 접종 후 12시간 후에 할 수 있지만, 3일간은 음주, 목욕, 격렬한 운동을 피해야 한다.
이외에도 해외 여행자를 위한 예방 접종으로 파상풍, 장티푸스, A, B형 간염, 일본 뇌염 등을 권하는데 나는 일단 황열병 백신만 맞았다.
이 책은 요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는 내 삶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서 다시 일어본 책이다. 여류 작가 정희재 씨가 쓴 책인데 내가 얼마 전 다녀온 안나푸르나 트레킹 얘기도 나온다. 책 제목에는 ‘피곤한 세상에서 벗어나 잠시 쉬어갈 용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멈춰서도 괜찮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라는 부제도 있다.
평생을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잠시 멈춤’이란 단어는 생소하기만 하다. 멈추지 말고 앞만 보고 부지런히 가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달랐다. 고산병을 예방하려면 절대 가이드보다 앞서지 말라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가이드가 답답했는지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가이드를 앞서려고 했다. 그래서 가이드보다 앞서가는 사람은 벌칙으로 1만 원씩 내기로 했다.
저자는 티베트에 가기 전에 유서를 써놓고 갔다고 했다. 심장도 약한 편인 데다 고산병으로 멀쩡한 사람도 목숨을 잃는 사고가 종종 발생하는 곳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장례를 치르는 방법을 일러두고 유품정리는 어떻게 하라는 둥 유서를 쓰고 나니 마음이 달라지더란다. 무사히 티베트를 갔다 온 뒤 써두었던 유서를 읽어봤을 때는 다시 태어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나는 저자처럼 유서를 쓰지는 않았지만 주변 정리 및 마음의 준비를 했다. 고산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나버린 사람들이 꿈에 나타나기도 했다.
저자는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할 때 여러 명이 같이 갔다고 했다. 인적도 드물고 지형도 험한 곳이라서 서로 의지하며 지냈는데 트래킹 마지막 날 저자는 혼자 자겠다고 했다. 대단한 선언이자 용기였다. 일행들을 의식했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같이 간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날 밤 저자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혼자 여유를 즐긴 시간은 별로 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일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도 일행과 떨어져 혼자 잔 날이 있었다. 최연장자라는 이유로 독방을 배정받은 것이다. 전날 같이 자던 사람이 코를 너무 골아 잠을 설쳤다고 불평을 한 이유도 있었다. 그날 밤 마음이 차분히 정리되면서 꿀 같은 잠을 잤다. 마치 태고의 자연 속에 혼자 누워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자는 다른 사람들 시선을 너무 의식하면 그들이 만들어놓은 룰대로 살게 된다고 했다. 내가 중심이 되어야 행복하다는 조언이다. 한창 일해야 할 직장인이라면 남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 그러나 퇴직한 시니어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행동에 옮겨도 된다. 그래야 자기 성찰의 시간도 가질 수 있고 힐링도 할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태해지거나 퇴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얻는 게 더 많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조건을 갖춘 곳에서 살다가 그만큼 불편한 환경을 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 밖에서의 고생은 값진 경험과 감미로운 추억이 되어 현재의 안락함에 새삼 고마움을 느끼게 해준다.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숙식이었다. 입에 맞지 않는 현지 음식, 난방 시설이 전혀 안 되어 있는 숙소, 코 고는 사람과의 동침, 너무 추워 손이 곱은 상태에서의 짐 싸기, 일행 30명이 하나의 변기를 번갈아 사용해야 하는 불편함 등이 나를 괴롭혔다. 우리가 자주 먹는 김치 한 조각, 고추장 한 숟가락, 라면 국물 등이 얼마나 맛있고 입맛을 돋우는 음식인지 새삼 느꼈다. 간천엽, 갈매기살, 막걸리 같은 좋아하는 메뉴는 포기하더라도 한국인은 한국 음식을 먹어야 산다. 오죽하면 ‘한국인 고문하기’에 ‘라면 먹을 때 김치 안 주기’가 들어 있을까. 한국은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천국이다.
내 집은 그야말로 보금자리다.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이다. 날씨가 추울 때 히터 스위치만 올리면 방이 금세 따뜻해진다. 사계절에 맞는 이불을 덮으면 쾌적한 잠을 잘 수 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냉장고 문만 열면 된다. 화장실도 깨끗하고 샤워까지 하고 나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TV만 켜면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즐비하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난다. 집을 떠날 때는 이런 안락함과 일시적인 이별을 해야 한다. 히말라야 트레킹하면서 TV도 못 보고, 고산병 때문에 씻지도 못하고, 당구도 못 치고, 술도 못 마시고, 휴대폰은 아예 꺼두었다. 물론 그 덕분에 건강에는 도움이 됐다.
히말라야에서는 아침 먹고 걷고, 점심 먹고 걸었다. 하루 8시간을 걷는 8박 9일간의 트레킹이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총 23만 보, 거리로는 100km, 해발 4130m까지 오르는 힘든 여정이었다. 체중이 3kg이나 줄었다. 마라톤이나 댄스 대회에 나가면 3kg 정도는 금세 줄지만 다시 원래 몸무게로 돌아온다. 그런데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고 돌아온 후에는 매일 고기를 먹고 포식하는데도 체중이 늘지 않는다. 트레킹하기 전 볼록했던 아랫배가 홀쭉해졌다. 이제는 정시에 식사를 안 하면 뱃가죽이 등에 붙는 느낌이다. 허벅지 뒤쪽에도 근육이 생겼다. 엉덩이도 탄탄해졌다. 그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붙지 않던 근육이 생긴 것이다. 이 근육은 계단을 오를 때 큰 도움이 된다. 오르막에도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발걸음이 가볍다. 앞으로 10년쯤 내 체력이나 건강 유지에 확실히 도움이 될 것 같다.
얼마나 버틸지 모르지만, 다시 몸이 근질근질하면 어딘가로 또 떠날 것이다. 이번 트레킹에서 말썽이 될 뻔했던 낡은 등산화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도 몰래 꿈틀거리는 새로운 여정에 대한 준비로 보인다. ‘히말라야에 갔다 온 사람’이라는 호칭이 따라 붙으며 마음도 겸손해졌다. 그곳에서 태고의 대자연을 접하고 돌아오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다. 높은 준령의 설산은 수억 년을 그대로 버티고 있는데 인간은 100년도 살지 못한다.
‘차마고도’에 대해서는 자주 들었지만 그동안 관심이 없었다.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먼 나라 얘기로만 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말라야 트레킹을 같이 다녀온 일행들이 랑탕, 무스탕에 이어 차마고도 얘기를 자주 꺼냈다. 히말라야의 엄청난 대자연 속에서 느낀 감동이 아직 지워지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러던 차에 오래전 KBS TV에서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 ‘차마고도-마지막 마방’ 편과 ‘순례의 길’ 편을 감명 깊게 감상했다. ‘차마고도’는 말 그대로 ‘Tea-Road’, ‘茶馬古道’라 하여 중국의 차(茶)와 티베트의 말(馬)을 교환하기 위해 개통된 교역로다. 중국과 티베트, 네팔, 인도를 잇는 산악 무역로다. 실크로드보다 200여 년이나 앞선 기원전 2세기 이전부터 존재해 있던 길이었는데 이후 도로가 확장되고 차가 다니는 시대가 되자 ‘마지막 마방’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다. 해발 4000m가 넘는 험준한 길과 5000m 이상 되는 눈 덮인 설산의 아찔한 협곡을 잇는 길이다. 이 험준한 산길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냈다. 교역품은 주로 차와 말이었지만 중간 마을과 종착지인 윈난성의 여정에서는 소금, 약재, 곡식 등의 다양한 물품의 교역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마지막 마방’에서는 티베트의 송이버섯을 염장해 보관하고 있다가 중국 윈난성에 갖다 파는 여정을 그렸다. 말에 짐을 잔뜩 싣고 산 넘고 물 건너 고생을 한 대가가 1인당 100만 원 정도. 그 정도면 좋은 가격이란다. 말을 운송 수단으로 쓰는 것은 히말라야에서도 자주 보던 광경이다. 트레킹 도중 말이 나타나면 몸을 산 쪽으로 붙이라는 안전수칙을 가이드로부터 귀가 따갑게 들었다. 절벽 쪽으로 비켜서다가 자칫 말에 밀리기라도 하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시체도 못 찾는다고 했다. 차마고도에서도 이런 상황이 가장 위험하다고 했다. 또 말에 실린 짐이 잘못되어 풀어지거나 말이 발을 헛딛어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 줄지어 오던 다음 행렬에도 타격을 준단다. 차마고도를 오가는 사람들은 아내와 형제가 같이 살거나 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맞는다고 했다. 형제 중 한 사람이 먼 길을 떠나야 하고 남아 있는 형제는 농사를 지어 그동안의 생계를 유지해야 하니 형제공처의 풍습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어 보였다.
두 번째 테마는 ‘순례의 길’. 쓰촨성에서 티베트의 수도인 라싸까지 2400km를 이마, 두 팔, 양 무릎을 땅에 대며 ‘오체투지’로 6개월간을 가는 순례를 소개했다. 3명의 오체투지 순례자와 이들의 짐을 실은 리어카를 끄는 사람 2명이 일행이다. 하루 6km 씩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순례의 길을 이어갔다. 가다가 죽으면 오히려 영광이라며 시체를 토막 내어 독수리 밥으로 내어 놓는다. 종교의 힘은 무섭다.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그런 고통을 감수하는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들은 이마에 멍이 들고 무릎 관절이 퉁퉁 부어도 길을 간다. 육포나 옥수수 말린 약간의 곡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잠은 노지에서 간단한 이불과 비닐포대를 덮고 잔다. 이 고통스런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다. 최종 목적지인 라싸의 조캉 사원에서는 10만 배 절을 한다. 우리나라보다 행복지수가 월등히 높은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4박 5일 정도의 일정으로 떠나는 차마고도 트레킹 관광 여정을 요즘 자꾸 들여다보고 있다. 비용도 130만 원대로 욕심내볼 만하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할 때 너무 힘들어 다시는 오지에는 가지 않겠다던 결심이 벌써 흔들린다. “히말라야에 와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 알겠다.
1월 초 히말라야 트레킹을 할 때 가장 걱정했던 일은 고산병이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4130m. 내 생애 가장 높은 곳에 도전하는 등산이라서 고산병에 대해 미리 알아봤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전문 산악인과 젊은 의사가 고산병으로 죽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히말라야에 간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말렸다. 고산병으로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가지 않겠다고 통보를 했는데 더 늦으면 정말 못 갈 것 같아 결국에는 다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트레킹을 하고 저녁에 롯지에 도착하면 할 일이 없었다. 저녁식사 후 8시에 취침을 해서 다음 날 오전 6시에 기상했다. 무려 10시간이나 잤다. 한국에서는 평소 6시간 정도 자는데 그 시간에 비하면 긴 잠이다. 그러나 트레킹이 워낙 힘들다 보니 잠자리에 들면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첫날 밤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큰형님 꿈을 꿨다. 죽은 큰동서도 꿈에 나타났다. 세 사람 모두 저 세상으로 간 사람들이라서 기분이 찝찝했다. 죽을 때가 되면 저승으로 먼저 간 사람들이 부른다는 얘기가 생각 나 잠을 떨쳐내고 일어나 앉기도 했다. 최종 목적지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가 가까워오자 기대감과 두려움이 앞섰다. 처음 가는 곳이라 설렘도 있었지만 고산병 걱정도 돼서 신경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현지 가이드는 고산병에 걸릴지는 미리 알 수 없고 끝까지 올라가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다만 고산병 예방을 위해 샤워는 물론 머리도 감지 말라고 조언했다. 잘 때도 털모자를 쓰고 머리를 따뜻하게 하라고 했다. 트레킹할 때마다 땀을 비 오듯 흘렸지만 일주일 동안 씻지 못했다. 몸이 근질거리고 답답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물티슈로 간편 세수를 하고 면도는 아예 포기하니 편하기도 했다. 물을 많이 마시라고 해서 하루에 2ℓ짜리 병에 든 물을 다 마셨다. 막걸리나 맥주를 마시면 간단히 해결될 일을 다음 날 행보를 위해 그럴 수 없으니 아쉬웠다.
최종 목적지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찍고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서 자던 날이 최악이었다. 사람들 얼굴이 풍선처럼 부었고 가져간 커피믹스 봉지도 부풀었다. 저기압 탓이었다. 머리가 아프다는 사람, 어지럽다는 사람, 입맛이 없다는 사람, 똑바로 걷지 못하겠다는 사람, 소화가 안 된다며 체면 불구하고 방귀를 뀌는 사람 등 다양한 증세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고산병은 보통 해발 2400m 이상의 높이에서 발생한다는데 트레킹 3일 차에 3000m급 푼힐 전망대에 올랐을 때도 괜찮았다. 높은 곳에서는 산소가 부족해 호흡수가 늘어나고 혈액의 점성도 떨어져 혈액이 산소를 신체 곳곳에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남성 발기 부전 치료약을 먹는 사람도 있었다. 나이가 들면 뇌와 뇌를 둘러싼 뼈 사이에 공간이 생긴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나이 때문에 제일 걱정했던 최고령자가 가장 팔팔했다.
히말라야 트레킹 때문에 네팔이라는 나라에 처음 갔다. 네팔은 한반도의 약 70% 정도 면적이며 인구는 대략 3000만 명이다. 인도, 중국, 부탄, 방글라데시에 둘러싸여 있는 내륙 국가다. 1인당 GDP가 2011년 기준으로 835달러에 불과한 빈국이기도 하다. 한국에 약 5만 명의 네팔 근로자가 와 있으며 한 해에 1만여 명이 입국을 대기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경쟁률이 8대 1이나 되어 한국행도 쉽지 않다고 했다. 전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한다. 종교는 대부분 힌두교를 믿는다. 세계 10대 고봉 가운데 8개를 보유한 산악 국가라 등산을 좋아하는 한국인이 2017년 기준 약 5000명이나 다녀갔다고 한다. 트레킹 비수기인 지금도 오가는 사람들이 온통 한국 사람이다.
이번 히말라야 트레킹 프로그램에는 네팔 시내 관광도 있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찍고 3일간 하산한 후에 포카라 시와 수도 카트만두 시내를 관광했다. 포카라 시는 그나마 좀 나았으나 카트만두 시내는 그야말로 먼지구덩이 속 같았다. 1월이 건기라서 더 그랬겠지만 마치 밀가루 같은 흙이 비산하며 먼지를 일으켰다. 서울도 미세먼지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카트만두는 마스크 없이는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였다. 서울은 먼지를 쓸어내는 살수차가 다녀서 깨끗한 편이다. 그러나 카트만두는 엉망이다. 2015년 7.8도의 강진이 지나간 후 도시도 많이 파손되어 있었다. 세계문화유산들도 거의 절반이 이때 파괴되어 복구 중이다.
네팔이 행복지수 세계 3위 국가라는 사실이 내 관심을 끌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현지 가이드는 한국에서 10년간 일하면서 한국과 네팔을 비교해봤다고 했다. 네팔 사람들은 욕심이 없다고 했다. 너무 열심히 일하는 한국 사람들에 비해 네팔 사람들은 얘기하는 것을 좋아해서 일의 능률이 안 오른다고 덧붙였다. 우리 일행은 산촌의 한 학교에 컴퓨터 12대를 기증했다. 50년 역사에 컴퓨터 구경은 처음이라고 했다. 시장과 내외빈이 많이 참석했다. 그런데 공연을 포함한 축사가 무려 3시간 동안 이어졌다. 현지 가이드는 5분이면 충분할 축사를 각자 20~30분씩이나 하는 현장 사례를 들어 네팔인을 설명했다. 네팔 사람들은 순박한 편이다. 한국에 5만 명이나 와 있는데도 큰 문제 없이 조용히 일하고 있어서 우리가 잘 몰랐던 것이다.
카트만두에서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박타푸르를 방문했다. 사원 및 여러 유적들이 있는데 이곳도 지진으로 파손되어 복구 중이었다. 좁은 골목에는 오토바이와 트랙터가 복잡하게 오가서 정신이 없었다. 시내 몇 곳을 더 다녔는데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것이 모두 사원이었다. 네팔인들이 이마 한가운데 그리는 빨간 점은 ‘제3의 눈’이라 한다. 부처님이 보고 있다는 의미라 했다. 누구나 그렇게 신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티베트 난민촌을 돌아보고 중국이 무자비하게 티베트를 공격한 역사로 볼 때 네팔도 중국의 눈치를 많이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네팔도 중국이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인도도 이웃 대국이라 눈치를 본단다. 오일 등의 공산품을 인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르카’라는 네팔 용병은 용감하기로 유명하다. 시내에서 구르카 용병들이 사용하는 칼을 파는 가게가 많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르카다’라는 서양 작가의 소개 글과 함께 구르카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이들 용병들이 해외에서 번 돈으로 히말라야의 계곡에 여러 개의 다리를 만들어 기증했다는 표석도 붙어 있다.
네팔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왕정국가였다. 지금은 민주공화국이다. 반군이 10년간 산에 숨어 살며 내전을 일으키기도 했다. 워낙 고산이 많아 호랑이, 곰 등 맹수가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산속에 숨어 살던 반군들 덕분에 맹수가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히말라야 눈이 녹은 물은 당연히 1급수라 생각하고 마시고 싶었으나 풍토병이 우려되니 마시지 말라고 했다. 수력발전으로 전기를 만들고 있지만 전력 사정이 열악하다. 숙박업소인 롯지에서 휴대폰 충전료로 2000원 정도를 받고 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