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철의 스포츠 인물 열전]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하면 떠오르는 스포츠는?

기사입력 2016-09-01 08:35:30기사수정 2016-09-01 08:35

‘萬技(만기)’ 이만기(李萬基)를 아십니까?

두 질문의 답은 우리 민족 고유의 운동인 씨름과 씨름 선수다.

최근 급격하게 인기가 떨어졌지만 1980~90년대, 장충체육관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있는 체육관은 연중 열리는 민속 씨름 경기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짧은 시간에 불꽃같이 피어오른 민속 씨름 인기의 중심에 ‘만 가지 기술’을 구사한다는 이만기가 있었다.

민속 씨름이라는 이름은 1983년 씨름이 프로화되면서 기존의 아마추어 씨름과 구분하기 위해 만든 명칭이다. 씨름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이 즐긴 전통의 스포츠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몽골 스페인 스위스 일본 등지에 씨름과 비슷한 운동이 있고 민속 씨름 전성기에는 몽골 스페인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김해시청)
(김해시청)

근대적 스포츠로서 씨름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에 나타난다. 이 무렵 단성사의 소유주 박승필(朴承弼, 1875~1932)이 조직한 ‘유각권투구락부’에서 회원들에게 씨름과 유도, 복싱을 익히도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12년 10월 7일 단성사에서 씨름과 유도, 복싱 3개 종목 경기가 열려 점수제에 의해 우열을 가리고 상품을 줬다는 기록도 있다.

야구 농구 배구 등을 보급하며 한국 근대 스포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서울YMCA는 민족 스포츠인 씨름을 장려하기 위해 1928년부터 1936년까지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의 스타는 김윤근(金潤根)이었다. 1930년대의 이만기인 셈이다. 김윤근은 이 대회를 비롯해 선수 시절 200여 차례 씨름대회에서 황소 200여 마리, 우승기 88개를 차지한 스타플레이어였다. 김윤근은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에는 대한씨름협회 회장을 지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맡았으나 방위군 비리와 관련해 사형됐다. 씨름계로서는 큰 인물이었지만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1927년 12월 27일 창립한 조선씨름협회는 농구 축구와 함께 일제 강점기에 우리 힘으로 만든 몇 안 되는 경기 단체 가운데 하나다. 그 시기 거의 모든 종목은 조선체육회가 대회를 주관하고 주최했다. 서울YMCA가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한 1년 뒤인 1929년 9월 28일 조선체육회는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조선씨름협회와 공동 주최로 제 1회 전조선씨름대회를 열었다. 경신학교와 휘문고보, 중동학교, 양정고보, 중앙고보, 협성실업, 보성고보, 숭인상업 등 8개 팀이 출전한 단체전 결승에서 경신학교는 보성고보를 접전 끝에 7-6으로 누르고 첫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개인전 결승에서는 이도남이 최재빈을 물리치고 첫 패권을 차지했다.

조선체육회는 제 16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를 1935년 10월 22일부터 나흘 동안 경성운동장을 중심으로 열었다. 이 대회는 지난 대회의 육상과 축구, 농구, 야구, 정구 등 5개 종목에 씨름, 유도, 역기(역도), 검도 등 4개 종목을 추가했다. 씨름이 오늘날 전국체육대회의 정식 종목이 된 것이다.

이런 역사 속에 씨름은 우리 민족의 혼을 이어 주는 운동으로 꾸준히 발전했고 프로화된 민속 씨름 직전의 스타플레이어로는 이만기의 직계 선배라고 할 수 있는 김성률 장사를 꼽을 수 있다. 김성률 장사는 1970년대 최고의 씨름 선수였고 운동 능력이 뛰어나 레슬링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74년 제 55회 대회부터 1976년 제 57회 대회까지 전국체육대회 레슬링 슈퍼헤비급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 2관왕을 3년 연속 차지한 것을 비롯해 1983년 제 63회 대회까지 전국체육대회에서 금메달 12개와 은메달 2개, 동메달 3개를 목에 걸었다. 쉽게 믿기 어려운 성적이다. 하형주가 씨름 기술을 응용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95kg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것은 씨름과 레슬링, 유도로 이어지는 연계성 그리고 씨름 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한다.

1983년 4월 17일 장충체육관, 약관의 이만기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고 장소다. 초등학교 때 씨름을 배운 지 10년 만에 이룬 첫 개인전 우승이자 프로화된 씨름 사상 첫 천하장사 타이틀을 딴 날이고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후 1990년 27세의 나이로 은퇴하기 전까지 천하장사 10번, 한라장사 7번, 백두장사 19번 그리고 11차례의 번외 경기까지 이만기는 길지 않은 선수 생활 동안 47차례 우승의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상금이 아니고 예전처럼 황소를 줬으면 큰 농장을 차려도 됐을 것이다.

초대 천하장사 이만기의 빛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스포츠팬들이 잊고 있지만 1980년대 초반 씨름판에는 내로라하는 장사들이 군웅할거했다.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 ‘인간 기중기’ 이봉걸, ‘털보' 이승삼 그리고 홍현욱, 최욱진 등이 유력한 초대 천하장사 후보들이었다. 지방대회든 전국대회든 우승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이만기는 경력도 그렇고 나이도 어려 우승 후보군에 들 수가 없었다. 그때 이만기는 지방에 있는 대학(경남대학교 2학년)에서 씨름을 하는 무명의 선수였을 뿐이다.

천하장사 경기가 열리기 하루 전인 4월 16일 펼쳐진 한라장사 결승전은 약관의 천하장사 탄생 예고편이었다. 그 무렵 최고 수준의 기술 씨름을 자랑하던 최욱진(경상대학교 3학년)은 이만기를 3-2로 누르고 한라장사 꽃가마에 올랐다. “나는 우승과는 인연이 없는가 보다.” 이만기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게다가 체격이 이만기보다 작은 최욱진이 자세를 낮추며 파고드는 바람에 가슴에 약간의 부상까지 있었다.

민속 씨름의 성공적인 출발을 알리는 초대 천하장사 결승전 카드는 절묘하게 이뤄졌다. 키 172cm의 최욱진이 준결승에서 182cm의 홍현욱을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한라장사와 천하장사 두 개의 타이틀이 눈앞에 다가왔다. 8강을 목표로 했던 이만기(182cm)는 준결승에서 ‘한 번만 이겨 봤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생각했던 이준희(195cm)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몸무게에 관계없이 겨루는 천하장사 경기에서 기술 씨름의 두 달인이 한 체급 위인 백두급 장사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결승전 모래판에서 마주 서게 된 것이다.

기술 씨름 달인들의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는 동안 장충체육관의 열기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지 2년여가 지난 그때 전국 방방곡곡의 가정에서는 총천연색으로 중계되는 씨름 경기를 보는 이들이 넘쳐 났다. 요즘처럼 시청률 자료가 나왔다면 ‘국민 드라마’의 수치를 가볍게 넘어섰을 것이다.

2-2로 맞선 가운데 이룰 만큼 이룬 이만기로서는 심적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최욱진은 한 판만 잡으면 한라장사에 이어 천하장사까지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상대적으로 심적 부담이 더했을 것이다. 이때 이만기는 평소 연습을 거의 해 보지 않았던 호미걸이를 승부수로 던졌다. 씨름계에서 쓰는 표현인, ‘뽑아 드는’ 들배지기가 이만기의 상징적인 기술이고 이외 밭다리, 잡채기, 뒤집기 등 다양한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이후 7년여 동안 모래판을 평정하게 되는 이만기지만 이날 구사한 호미걸이 기술은 이제 와 생각해도 ‘왜 그때 그 기술을 썼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유도 기술과 비슷한 호미걸이 기술로 이만기는 자신의 선수 생활 첫 개인전 우승이자 천하장사 우승을 이뤘다.

천하장사 이만기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가 모래판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모래를 흩뿌리며 포효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찍은 수많은 사진에는 비밀이 숨어 있다. 이만기는 1980년대 스포츠 전문 사진기자로 활동한 R씨와 매우 친했다. 이만기는 승리 세리머니를 할 때마다 R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봇물처럼 터진 프로화의 물결

8월을 스포츠 열기로 뜨겁게 달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 가운데에는 적지 않은 프로 선수들이 있었다. 24세 이상 와일드카드 3명의 선수를 포함한 18명의 남자 축구 대표팀과 여자 배구 대표팀은 전원이 프로 선수였다. 축구는 잉글랜드 독일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중국 일본 등 외국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가 7명이나 됐다.

한국 스포츠로서는 1982년을 아마추어와 프로 양대 축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원년으로 기록할 만하다. 물론 이때 이전에도 프로 종목은 있었다.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 김기수가 대표하는 프로 복싱과 1960~70년대 최고 선수였던 한장상으로 대표되는 골프가 1980년대 이전의 몇 안 되는 프로 종목이었다. 그러나 이들 종목은 개인 종목으로 시장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1982년 단체 종목인 야구가 프로화하면서 국내 스포츠계는 본격적인 프로화 시대를 맞게 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3년 아마추어 팀을 포함한 축구 프로 리그인 슈퍼리그(K리그의 전신)가 출범했다. 민속 경기인 씨름도 같은 해 프로화가 돼 이만기 등 신예의 등장과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굳이 순서를 따지면 1982년 3월 프로 야구, 1983년 4월 민속 씨름, 1983년 5월 프로 축구다. 이들 종목은 앞서기니 뒤서거니 프로화 물결에 합류했다.

잠시 끊겼던 프로화 물결은 1990년대 중반 농구대잔치를 무대로 펼쳐진 대학 농구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1997년 남자 농구가 프로화되고 이어 여자 농구,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 남녀 배구가 프로화가 되면서 국내 인기 종목 대부분이 프로로 재탄생했다.

프로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또 프로화가 되면서 해당 종목의 경기력이 크게 향상돼 축구는 숙원이었던 월드컵 본선 진출을 1986년 멕시코 대회에서 이룰 수 있었고 이후 201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회까지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나서는 기록을 세웠다. 올림픽에서도 자동 출전한 1988년 서울 대회를 시작으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8회 연속 본선에 올랐다. 이 사이 2012년 런던 대회에서는 동메달을 차지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 뒤늦게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야구는 프로화를 기반으로 끌어올린 경기력으로 2000년 시드니 대회 동메달, 2008년 베이징 대회 금메달의 성과를 이뤘다. 한국 야구는 정식 종목 재진입이 확실시되는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메달에 도전할 만한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다.

1980년대 프로화 3총사 가운데 씨름은 2000년대 들어 급격한 인기 하락과 함께 프로 종목으로서 내세울 만한 콘텐츠 없이 암흑기를 겪고 있어 스포츠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글 신명철 <스포티비뉴스> 편집위원,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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