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자기 사유와 질문으로 다가가는 ‘이상적인 삶’

기사입력 2017-04-28 12:58 기사수정 2017-04-28 12:58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그해, 역사가 바뀌다

사회가 각박하고 어려울수록 우리는 토머스 모어가 제시한 ‘유토피아(이상 사회)’를 떠올려 본다. ‘어떻게 하면 유토피아로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지만, 누구도 그에 대한 정답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주경철(朱京哲·57)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어떻게 하면 올바르고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는지 스스로 문제를 내고 답을 찾아 나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아울러 “인류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고, 어디로 가며, 어느 방향으로 휘고 있는가를 의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보다 폭넓은 시각으로 역사의 큰 그림을 보고자 하는 그의 바람을 <그해, 역사가 바뀌다>에 담았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이혁 forrein@naver.com)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이혁 forrein@naver.com)

<그해, 역사가 바뀌다>는 주경철 교수가 문화·예술 분야의 인재 육성을 위한 기관인 ‘건명원’에서 강의한 내용을 엮은 책이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내용이기에, 같은 내용을 중장년 독자가 읽었을 때는 조금 다른 시선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이에 주 교수는 다른 시선이 아닌, 오히려 더 나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대답했다.

“이 책은 우리 인간사를 큰 차원에서 이해하자는 뜻에서 펴내게 됐어요.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가 사는 사회, 자연환경, 국제관계 등은 어때야 하는지 등을 성찰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당하는 이야기죠. 오히려 중장년이 본다면 훨씬 잘 이해하고, 나름의 경험을 통해 더 섬세하고 풍요롭게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여가,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찾는 시간

주 교수는 책에서 1492년, 1820년, 1914년, 1945년 등 세계사에 새겨진 인류의 변곡점으로 작용한 네 해[年]를 언급한다. 그중에서도 유럽의 패권 장악과 산업혁명이 일어났던 1820년의 상황이 현재 우리 중장년의 모습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근면혁명은 산업혁명 직전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근면’이라는 말이 좋은 뜻으로 보이지만, 그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모든 사람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는 최대한 일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 중장년은 전후(戰後)에 굶주리지 않기 위해, 또 경제성장을 위해 노력했던 세대잖아요. 문제는 이미 그다음 단계로 넘어와 이젠 무조건 열심히 일하는 게 무의미해졌죠. 이런 상황에서 과거 경제성장의 주역이었던 이들이 어떤 대접을 받고 어떻게 살아야 좋은가.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는 일을 하더라도 과거처럼 단순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닌,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찾아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일만 하다가 죽는 건 동물이나 노예처럼 사는 거잖아요. 노동도 중요하지만, 인간답게 사는 그 외의 것, 문화·예술·교양 또는 종교적인 사람이라면 신성함이라든가, 그런 소중한 가치를 누리면서 살아야죠. 그러려면 일로부터 해방돼야 하고요.”

‘일의 해방’ 그것은 곧 은퇴라 말할 수 있다. 언젠가는 오고야 말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자유에 막연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주 교수는 늘어난 여가를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중장년들은 그동안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썼는데, 그러다 보니 정작 인간답게 사는 중요한 가치를 놓치게 된 것 같아요. 평생 일만 하다가 갑자기 시간이 주어지면, 돈이 좀 있는 분들도 괴로워하더라고요. 앞으로 어떻게 사나? 매일 등산을 할 수도 없고. 그저 한가한 사치가 아닌, 이제야말로 제대로 인간답게 사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인 거죠. 저는 중요하게 고려해볼 만한 것으로 예술과 스포츠를 꼽아요. 삶을 풍요롭게 하고, 육체적 즐거움과 정신적 즐거움을 동시에 주는 활동이죠.”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배우기만 하고 사색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사색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논어).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배우기만 하고 사색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사색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논어).

감정의 공유를 통해 얻는 고급 경험

그는 아무런 준비 없이 자유를 맞이했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쉽게 찾는 것이 ‘술’이라고 말했다. 단시간에 스트레스를 풀고, 여럿이 즐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선호하겠지만, 그보다는 문화적 측면으로 다가가길 바랐다. 그중 한 예로 ‘독서’를 꼽았다.

“책을 읽는 건 간접 경험이죠. 예를 들어 소설은 남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는 지난 시대의 이야기를 통해, 철학은 남다른 사유를 통해 경험의 폭을 넓힐 수 있어요. 그렇게 당장 얽매인 것 이상의 정신적 경험을 하는 거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아 인간이 이런 문제로 고통을 받는구나’ 하고 공감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차원이 다르죠. 그런 감성을 공유하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도 천지 차이고요.”

이런 의미에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겠지만, 무작정 강요하기는 어렵다. 주 교수는 독서 외에도 감정을 느끼고 사유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즐길 것을 권했다.

“은퇴 후 여유가 생겨서 그 전에는 못 봤던 대하소설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읽는 이들을 봤어요. 역사책도 젊을 때보다 오히려 나이 들어서 눈이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독서의 매력을 느끼는 분들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있잖아요. 그러면 영화나 연극, 만화 등을 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에게 짧게 연극을 만들어 직접 연기해보도록 하는데, 이 과정에서 강렬한 감정을 느끼고, 감수성이 파워풀해지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어떤 매체를 통해서든 고급 경험을 할 기회를 갖는 게 중요하죠.”

작품을 통한 간접 경험도 중요하지만, 자기 경험을 통한 사유도 필요하다. 우리 베이비붐 세대가 목격한 산업화의 물결 속, 자연환경의 변화는 이례적인 경험을 선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물’이다. ‘물 쓰듯 쓴다’는 말을 해오던 이들은 어느새 ‘물도 사 먹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 변화를 몸소 느꼈기에, 그에 대한 의식도 남다르게 발휘될 수 있다는 게 주 교수의 설명이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냇가에서 맑은 물을 마시고 깨끗한 고드름도 따먹었잖아요. 그러다 1960~1970년대에 서울 주변에 직물·염색업 때문에 개천이 죽는 것도 봤고, 과학이 발전해 다시 그 물을 살려내는 과정도 봤죠. 한평생에 거의 태고의 자연, 산업화 시대의 자연, 회복하는 자연을 다 경험한 사례는 거의 없을 거예요. 그 덕분에 현재 처한 환경 문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죠. 그때의 자연이 얼마나 좋았고, 고귀한 가치였는지. 왜 되살려야 하는지 훨씬 잘 알 테니까요.”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이혁 forrein@naver.com)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이혁 forrein@naver.com)

스스로 人問하는 어른의 人文

주 교수는 기술의 발전과 환경 문제 등이 얽히고설킨 현대사회에서는 ‘과연 이 시대는 야만화되고 있는가, 문명화되고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질문은 개인의 삶과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 거리를 두자는 겁니다. 거리라고 하는 게 무책임하고 손을 놓자는 게 아니라, 그 현상에 대해 한 걸음 뒤에서 크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곧바로 해결하려 드는 건 배고프면 밥 먹는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맨눈으로 보는 것, 지금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잖아요. 현재 문제가 어떤 큰 맥락 속에 위치해 있는가, 그것을 파악하려면 조금 떨어져서 바라볼 필요가 있죠.”

아울러 유토피아를 향한 자기 질문, 행복한 사회를 위한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좀 더 나은 세상에 다가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유토피아는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사회인데, 누가 답을 가르쳐주면 좀 좋아요? 토머스 모어는 자기가 유토피아를 제시해놓고 여러 문제와 모순을 드러내요. 진짜 제시한 게 아니라, 나에게 속지 말라고 경계하는 거죠. 내가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질문을 하는 거고, 어떻게 이상사회가 될 수 있는지 스스로 생각하라고 권유하는 겁니다. 그게 올바른 생각이라고 봐요. 섣부른 청사진을 제시했다면 벌써 잊혔을 거예요. 그게 답이 아닐 테니까요. 저는 바로 나오는 답은 답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더 깊은 성찰 속에서 다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대조하면서 조금씩 찾아가는 거죠.”

그래서일까? 나이가 들어 인문학이나 철학과 관련한 책들을 읽는 사람이 많다. 주 교수에게 그들이 성찰하고 사유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구했다. 그러자 “그들 스스로 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학생이라면 가르치겠지만, 중장년은 이미 살면서 자기 생각이 정립된 상태잖아요. 다양한 사회 경험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러면서 ‘아, 내가 이게 더 필요하구나’라고 느끼는 것, 그게 인문학이라 생각해요. 바쁘게 살다가 여유가 생겼을 때 느끼는 공복감이랄까? 일종의 배고픔이죠. 배고프면 무언가를 찾게 되잖아요. 돌연, ‘정말 잘사는 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곤 해요. 자기 필요에 의해 책을 읽고, 그것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 즐거워지고, 그다음 단계로 옮겨가기도 하면서 자기 세계를 만들죠. 그런 과정에 있는 중장년이라면 특별한 조언은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스스로 찾을 수 있거든요. 말하자면, 그게 어른인 셈이죠.”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가 추천하는 '스스로 역사를 사유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서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가 추천하는 '스스로 역사를 사유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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