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귀농한 지 어언 15년이 지났지만, 처음이나 지금이나 농장의 모습은 변한 게 없단다. 처음부터 그냥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농사를 지었는데, 지금도 그냥 그렇게 자연의 생리를 좇아 일을 지속하고 있다는 거다. 한 가지 변한 건 있다. 처음 몇 가지 소소하게 길렀던 채소, 과일, 화초의 수가 자그마치 300여 종으로 늘었다. 그 많은 식물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지? 그다지 넓지 않은 농장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려도 단박에 알아보기는 불가능하다. 비정형적으로 또는 제멋대로 작물이 산재하고 있거니와, 그마저도 수북이 자란 풀들과 동거하기 때문이다. 얼추 야생의 풀밭을 연상시키는 농장이다. 그렇다면 이건 지리멸렬한 농사의 산물? 아니다. 농장주 한은영(59, 아르아르농장 대표)은 옥천군에서 알아주는 이가 많은 선진농업 경영인이다. 매우 독특한 농법으로 순풍을 돛에 매단 배처럼 질주하고 있다.
서울에서 살았던 한은영이 이곳 옥천군 외진 시골로 내려와 관심을 가진 건 양봉이었다. 과천시 변두리에서 양봉을 했던 부모님의 어깨너머로 좀 익힌 양봉 기술이 있어서였다. 그래 벌통 몇 개를 놓고 소규모 양봉 농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진정한 관심사는 자급자족에 있었다. 이왕 시골살이를 할 거라면 내가 먹을 건 내 손으로 길러 취하자는 생각으로 텃밭 농사 스타일의 농장을 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겐 수칙 하나가 있었다. 농약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농법을 시종일관 유지하겠다는 기본 방향을 설정한 것이다. 농장은 한적하고 조용한 야산 아래에 있다. 저 멀리 사방에도 나지막한 산들이 펼쳐져 싱그럽다.
“이곳에 터를 잡은 건 아늑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아, 좋다! 우연히 지나가다 만난 곳이지만 첫눈에 호감을 갖고 탄성을 터뜨렸다. 양봉을 할 만한 밀원(蜜源)도 있어 적격이었다. 무엇보다 먹거리를 자급하며 재미있게 살 수 있는 산골이라는 생각에 즐거웠다.”
여기에서 산 15년 가운데 절반의 세월이 흐르기까지는 자급자족을 위한 작은 농사를 했을 뿐, 계획적인 생산이나 판매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지?
“그렇다. 애초 무슨 구상을 가지고 귀농을 한 게 아니었다. 그저 농약 치지 않은 깨끗한 먹거리를 길러 건강한 밥상을 차리고, 거둔 것들을 친지나 이웃들과 나누자는 데 가치를 두었다. 따라서 비닐하우스 두 동 외에 농업 시설이나 장비를 마련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시작한 귀농의 나날은 정신적으로 여유로웠다. 살고 싶은 방식대로 살아 유쾌했다. 작물을 가꾸고 꽃을 키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농사 초심자였던 만큼 유기농에 필요한 기술 습득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초기엔 씨앗이 싹을 틔우고 싱싱하게 잘 자라는 재미에 빠져 무엇이든 갖다가 잔뜩 심었다. 한 평 땅에 20여 가지 채소류를 가꾸기도 했다. 서툰 재배 기술은 마을 어르신들에게 여쭈어 보완했다. 그런데 농업기관에서 나온 이들이 작물마다 특화된 농약과 비료가 있다며 만류하더라. 자칫 다 죽을 수 있다면서. 하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는 얘기였다. 있는 그대로 자연조건을 고려해 심은 식물들이 잘 자라는 걸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수확량은 관행 농사보다 적을망정 생태농업을 통해 깨끗한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게 너무도 좋았다.”
이곳에서처럼 무농약농업, 생태농업을 하는 농가가 드물지 않다. 그러나 수익성이 낮아 흔히 고전한다.
“무농약농업은 제초 작업부터 버거운 게 사실이다. 나는 풀을 베어 거름을 만들거나, 발로 밟아 쓰러뜨려놓거나, 그냥 그대로 놔둔다. 농토를 최대한 자연 상태 그대로 두고 식물을 기르는 게 사리에 맞다는 생각에서다. 한때는 소 한 마리를 기를 생각도 했다. 기계장비로 밭을 가는 것보다 소 쟁기질로 일을 처리하는 게 땅이라는 자연을 존중하는 길이라고 봤는데, 소 한 마리 사육을 위한 축사 허가가 불가능한 걸 알고 포기했다.”
생계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나? 먹거리 자급자족만으로는 생활 유지에 한계가 있었을 텐데.
“소득원이 있었다. 서울에서 해왔던 직업 활동의 일부를 이곳에서도 틈틈이 계속해 문제를 해결했다. 경제적 불확실성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판매 목적의 농사 방식을 선택했을 것 같다. 농사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고 살지는 않았다.”
긍정적인 신호로 가득한 나날들
한은영에겐 서울에 근거를 두고 활동했던 직업이 있었다. 그는 국악을 전공했다. 비파라는 전통 현악기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활동했다. 한동안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비파를 복원한 유공자이기도 한 그는 강의를 했고, 제자를 양성했다. 이와 같은 경륜과 재능 일부를 시골 생활에 접목했다. 이를테면 원데이 클래스 같은 걸로 일정한 수입을 얻으며 긍정적인 신호로 가득한 나날을 꾸려왔던 것이다.
이채로운 건 또 있다. 그는 여동생 한은미(57)와 이곳에서 함께 산다. 즉 이 농장은 자매가 지향점을 공유하며 공동으로 일군 노력의 소산이다. 한은미도 예술을 전공했다. 금속공예로 기량을 발휘했다. 이런 한은미 역시 텃밭 농사를 즐기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지역에서 공예 관련 일을 함으로써 수입원으로 삼았다. 언니와 마찬가지로 인근 학교 아이들에게, 또는 농장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재능을 나누며 생활에 지장 없는 수준의 소득을 올렸다. 농장에선 자매의 컬래버레이션으로 기획된 예술적 프로그램이 자주 펼쳐졌던 것 같다. 어쩌면 농장이 통째 두 사람의 예술적 감수성과 상상력이 날갯짓하는 오픈 스튜디오, 혹은 꿈의 공간일지도. 한은미는 요즘 인근 학교의 도서관 사서로 일한다. 이날도 출근해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삶이란 묘한 것이다. 사람을 미처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데려가기도 하니까. 변신이랄까, 한은영은 귀농 중기에 이르러 완전한 농부가 됐다. 직업으로 농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먹거리를 스스로 해결하는 한편 이웃들과 결실을 나누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나, 시나브로 농장 상황에 한결 긍정적인 변화가 오면서 판매 활동에 나서게 됐다.
10년 후에도 지금처럼 풀들과 함께
본격적인 농사, 그러니까 남들에게 생산물을 팔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나?
“7~8년 전부터다. 당초 농작물 판매는 계획에도 없었고 예감하지도 못했다. 일찍부터 우리 농장엔 방문객이 많았다. 구경 삼아, 체험 삼아 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풀밭에서 자라나는 온갖 식물들을 신기해했다. 단장을 하지 않아 농장은 어수선했지만, 말 그대로 ‘자연이 준 선물’에 가까운 친환경 생산물을 거둔다는 데 관심을 갖고 지지해줬다. ‘정신 나간 농사’라는 말도 들었지만 말이다.(웃음) 그러나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조차 우리가 나누어준 먹거리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구매를 원했고, 그 수가 날로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 부응해 상업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저절로 고객층이 형성되다니. 이는 흔히 보기 어려운 신개념 판매 루트에 가까울 것 같다. 농민들에게 가장 어려운 판로 문제가 선행적으로 자동 해소된 ‘넘사벽’ 마케팅이다.
“구매를 원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입소문도 덩달아 나서 주문이 잦았다. 그런 상황 변화에 따라 농장 일이 한결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택배 꾸러미를 만들어 배송을 하거나 로컬푸드 마켓을 통한 판매 활동 같은 게 일상화된 지 이미 오래됐다. 소규모 농장이라 생산 물량은 많지 않다. 매출도 크진 않지만 일찌감치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했다. 읍내 재래시장 안에 작은 가게도 차렸다.”
가게까지? 어떤 물건을 판매하나?
“식당 겸 농산물 매장을 겸한 공간이다. 먹을 수 있는 약용 꽃들을 콩처럼 넣어서 지은 밥으로 만든 ‘꽃김밥’이 주력 상품이다. 모든 상품이 자연농법으로 거둔 청결한 것들이라 인기가 있다.”
농장 연매출액은 얼마나 될까?
“농산물 판매와 체험 교육으로 얻는 수입, 그리고 식당에서 나오는 매출 등을 합해 1억 원 이상이다.”
적지 않은 매출이다. 한은영은 애초 생태농업에 관한 인식조차 없이 그저 당연지사처럼 자연환경에 순응하는 농사를 시작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풀들과 공생하는 농사를 지속하고 있다. 이런 생활이 그는 즐겁다. 소농이지만 상당한 수준의 이득을 내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어쩌면 불안하거나 순진한 농사라 할 수 있는 생태농업의 가치와 지속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얻는 자신감과 보람 역시 크기만 하다. 그의 농사를 두고 ‘이상적인 미래 농업의 모델’이라 하는 평하는 사람도 있다. 한은영의 농사법엔 인상적인 게 더 있다. 주변 농가들과 협업하는 방식이 그렇다.
“농사에 욕심부릴 것 없다는 생각이다. 가령 토마토 3개를 수확했다고 가정할 경우, 그중 하나는 내가 먹고, 하나는 이웃과 나누고, 나머지 하나는 자연에 돌려주는 게 옳다는 생각으로 농사를 지어왔다. 특히 나의 농장 일이 이웃 농민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마음을 썼다. 예컨대 마을 분들을 나의 고객들과 연결시켜 농산물 판매를 적극 거들곤 했다. 이렇게 하면 그들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 농장 일을 돕는다.”
농사는 물론 식당 일까지 하느라 일상이 매우 분주할 것 같다. 한 이틀쯤 완전한 자유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나?
“이걸 어쩌나? 난 자유에 갈증을 느낀 적이 없다.(웃음) 내 딴엔 즐거운 일상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식당 일도 어렵지 않다. 시장 할머니들과 사이가 좋아 사나흘 가게에 못 나가도 그분들이 알아서 척척 장사를 대신 해주신다. 행운처럼 난 귀농 이후 많은 주민들과 좋은 인연을 맺었다. 이 역시 즐거운 생활의 원천이다.”
10년 후 당신의 농장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10년 전 과거의 모습과 현재가 다르지 않듯이, 10년 뒤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풀들은 여전히 가득하고, 새들과 곤충들이 지천이고, 그냥 지금처럼 그렇게.”
현실에 만족이 커서 미래에도 별다른 기대가 없다는 얘기다. 현재 그가 지닌 고민은 딱 한 가지. 어떤 방법으로 지역 친환경 농가들의 이익 창출에 이바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자신의 농사는 이미 자리를 잡았으니, 이젠 남들을 도울 차례라는 것이다.
한은영이 주는 귀농 Tip
•시골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귀농 생활로 만족을 누리려면 우선 소박한 삶의 방식을 기획하자.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감성을 끌어내 마음을 돌보는 일도 중요하다. 그게 ‘소확행’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농사로 성공하기 쉽지 않다. 치밀한 준비 없이 귀농해 큰돈을 벌 욕심에 사로잡힐 경우 실족할 가능성이 높다. 생계유지조차 버거울 수 있는 게 농사라는 걸 유념하자. 큰돈을 벌고 싶다면 차라리 도시에서 사업을 하는 게 낫다.
•과도한 투자를 하지 마라. 농토도 가급적 작게 확보해 농사를 시작하는 게 안전하다.
•그림 같은 집보다 편안한 집을 지어라.
•좋은 풍경만 보고 산속 외진 곳에 터를 잡는 건 좋지 않다. 밤마다 으스스한 분위기에 질려 떠날 수밖에 없는 불운을 초래할 수 있다.
‘지역 문화유산 순례기’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다양한 지역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지역N문화는 한국문화원연합회와 지역문화원이 함께 발굴한 다양한 지역 이야기를 서비스하는 지역문화포털입니다. 기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역N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보성 사람이 잘라 말한다. “보성군이야말로 남도 여행 1번지이지!” 볼 것도 즐길 것도 먹을 것도 기억에 남을 것도 숱하다는 얘기다. 자세한 내용이야 캐묻지 않아도 알겠다. 주마간산식으로나마 예전에 보성 땅을 훑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풍경도 풍물도 역사도 문화도 개성이 있어 오래가는 여운을 남겨준 게 아닌가. 하오의 해변에 앉아 멍 때리며 바라본 바다에 일렁이던 붉은 윤슬을 잊을 수 없다. 찰나의 잔물결에 불과한 삶의 눈부신 슬픔을 환기시켜 죽비처럼 가슴을 쳤으니. 해서 내겐 그날의 윤슬이 보성 최고의 명장면으로 새겨졌지만, 여행자의 눈과 감성을 일깨우는 이 고장의 명소는 손가락으로 일일이 꼽기가 부족할 지경으로 즐비하다. 오늘은 건축문화유산을 답사할 참이다.
보성여관을 찾아간다. 벌교읍 다운타운 중심지에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5년에 한국인 강활암(姜活岩)이 지은 일본식 목조건물이다. 그 시절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대형 여관이었다. 건물 7채에 방이 13개나 됐다. 요즘으로 치면 5성급 호텔? 이렇게 화려한 여관이 어떤 연유로 남도 끝자락 포구 벌교에 들어서게 됐을까?
당시 벌교는 상업과 교통의 요충이었다. 전남의 4대 도시에 들었다고 하니 기세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벌교의 번성은 일본인들의 거주와 왕래가 잦은 데에서 비롯됐다. 그들은 육상교통과 해상교통의 접점인 벌교의 지리적 이점을 영리하게 간파했다. 전남 내륙의 곡창에서 긁어모은 양곡을 벌교항을 통해 일본으로 운송했다. 즉 식민지 수탈기지의 한 전형이었다. 하루 20여 차례 화물선이 드나들 정도였으니 가혹한 정황이 훤히 비친다. 여하튼 벌교는 인파가 북적이는 도시였다. ‘본정통’이라 부른 신시가지가 형성됐다. 보성여관이 들어선 시대적 배경이 완연하다.
소설 ‘태백산맥’의 남도여관 그곳
보성여관은 건축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2004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이후 2012년 복원작업을 통해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일본식 건물의 특징인가? 전체적으로 개방적인 느낌을 준다. 건물 전면을 가득 채운 유리문들과, 2층에 줄느런한 창문들이 외부의 햇빛과 거리 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인다. 덕분에 오밀조밀해서 갑갑해 보일 수 있는 내부 구조에 생기가 돋는다. 주로 직선과 사각의 연쇄로 이어진 공간이라는 점도 우리의 전통 건축과 다른 걸 알 만하다. 가늘고 날렵하게 깎아 세운 사각기둥, 널빤지로 마무리한 벽면과 천장, 다다미방, 중정에 조성한 작은 정원…. 곳곳에서 일본식 작풍이 느껴진다. 독특하기론 원래의 용도대로 지금도 여전히 여관과 찻집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공연장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기도 하다. 단순히 관람만 할 수 있는 여느 근대 건축유산과 달리 보성여관은 실제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보성여관은 조정래의 밀리언셀러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남도여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조정래는 성장기 한때를 벌교에서 살았다. 벌교의 변천사와 벌교 사람의 희로애락에 밝다. 그래 ‘태백산맥’에 벌교의 지형지물과 풍속과 인물을 끌어들여 리얼하게 묘사하곤 했는데, 보성여관은 그중 한 곳이다. 거장의 소설에 출연한 보성여관의 운세는 별안간 환하게 열려 드라마틱한 상승을 하기에 이르렀다. ‘글 감옥에 갇혀 살면서도 황홀하다’는 조정래의 치열한 문학정신까지 더듬어보게 하는 명소로 부상했으니까. 보성여관만이 아니다. 벌교읍이 통째 ‘태백산맥’의 아우라에 힘입어 활기를 띠게 됐다. 답사객들이 밀려들면서였다. 조정래의 문학 장정과 작품세계를 알아볼 수 있는 ‘태백산맥문학관’이 건립되고, 덩달아 ‘태백산맥 문학기행 코스’도 마련되면서 문예적 공기마저 감도는 곳으로 변했다. 소설 한 편이, 잘 보존된 근대 건축물이, 고즈넉했던 지방 소읍을 생동감 넘치는 문화지구로 바꿔놓은 셈이다.
참 아름다운 숲속의 정자, 열화정
이제 조선 고택을 만나기 위해 강골마을로 접어든다.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에 있다. 강골마을은 원래 바닷가 마을이었다. 마을 뒤편으로는 야트막한 산들이 펼쳐지고, 자연이 연주하는 원초적 선율에 다름 아닌 파도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던 곳이었다. 그러다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저 멀리로 밀려났다. 하지만 강골마을은 여전히 수려하다. 풍수지리상 길지라고 한다. 그러니 눈 밝은 옛사람들의 정주가 필연이었겠지. 이곳엔 ‘이진래 고택’과 ‘이정래 고택’이 있다. ‘이준회 고택’도 있다. 보성 지역 사대부 가문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구현한 셋 모두 국가지정문화재다.
마을 뒷산 초록 풀숲엔 살포시 감춰진 듯 조붓한 길이 하나 있다. 섬려한 발길을 기다리는 오솔길인가? 바닥에 희고 미끈한 박석들이 깔려 있다. 이윽고 길 끝에서 열화정(悅話亭)이 모습을 드러낸다. 숲속에 묻혀 사는 은자처럼 평온한 정자다. 아름다워 첫눈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작은 집이다. 협착한 산골짝에 걸맞은 크기라서 조화롭다. 조선 후기 문신 이진만이 지은 정자로 앞면 4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자연석을 쌓아 올린 기단 위에 사뿐히 올라앉은 정자다. 덤벙 주춧돌 위에 세운 둥근기둥, 누마루와 쪽마루와 툇마루, 기능성을 고려해 배치한 방들, 방과 아궁이를 연결하는 작은 쪽문 등 고수의 배합 솜씨가 능란하다.
숲은 초록 일색이다. 여름으로 가는 나무들이 토하는 저 초록빛 아우성이라니. 실바람 한 뭉텅이에도 서슴없이 설레어 몸을 흔드는 꽃들, 잎사귀들. 식물들의 희열과 자유를 이해할 만하다. 열화정 주인은 이 청산에 묻혀 나무처럼 살고 싶었나? 속세의 탐욕과 광기를 밀어내며? 세상과 절연하고 싶은 심정일 때 의지할 곳은 자연이다.
김현진 보성문화원 원장
‘막걸리 페스티벌’로 한국을 쩡쩡 울려보겠다!
보성은 예로부터 산·바다·호수를 일컫는 3경(三景)과 의향·예향·다향을 뜻하는 3보향(三寶鄕)의 고장이라 불렸다. 김현진 보성문화원 원장에게 보성의 문화에 관해 이모저모 얘기를 청해 들었다.
“먼저 바로잡고 싶은 것이 있다. ‘벌교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마라’는 말에 관해서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인데, 보성 땅 벌교가 마치 주먹으로 위세를 떨치는 이들이 많은 고장인 양 엉뚱한 오해를 초래했다. 팩트는 그게 아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순사가 벌교장에서 아낙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안규홍 의병장이 일본 순사를 한주먹으로 때려눕힌 사건에서 유래한 말이니까.”
보성은 항일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펼친 고장이다. 보성군은 의병장 안규홍의 동상과 ‘황금주먹’ 조형물을 만들어 설치했다. 사실관계를 외부에 알려야 할 필요를 느껴서인 것 같다.
흔히 가치 있는 근대 건축유산들이 속절없이 사라지거나 망가졌다. 반면 보성여관은 원형 훼손 없이 잘 보존됐다. 그 배경이 있다면?
“보성 사람들은 일찍부터 보성여관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인식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심지어 개발 바람이 거셌던 새마을운동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2008년 문화재청이 매입해 관리에 나섬으로써 안전한 보존 조건을 확보하게 되었다.”
지자체마다 문화원의 역할도 그만큼 커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문화원의 존재감을 실감하지 못한다. 왜 그렇다고 보나?
“아쉬운 대목이다. 문화원은 역사와 전통을 지닌 단체지만 혁신에 소홀하다. 침체를 털어내고 이미지를 제고해야 하는데 잘 구현되지 않고 있다. 문화원은 지역의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그렇다면 콘텐츠 개발을 통해 그릇을 채워야 하는데 여전히 구습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7년째 보성문화원 원장직을 맡고 있다. 그간 거둔 성과를 소개한다면?
“새로운 문화 콘텐츠를 개발하고 프로그램을 새롭게 디자인하고자 노력했다. 내심 전국 최고의 문화원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뛰었다. 그러자 성과가 나오더라. 다양한 문화 테마를 설정, 내실 있는 운영을 하자 주민들이 뜨거운 호응을 보내줬다. 보성문화원은 이미 주민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 셈이다. 보성문화원을 통해 문화를 일상적으로 향유하는 주민들이 늘어났다. 청년층의 동참도 적극적이다.”
보성군은 ‘서편제보성소리축제’로 2022년부터 2년 연속 ‘대한민국축제콘텐츠대상’을 받았다. 김 원장은 내년에 흥미로운 축제 하나를 개최할 계획이다. 전국의 모든 막걸리와 국악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막걸리 페스티벌’을 열어 ‘한국을 쩡쩡 울려보겠다’는 것.
●Exhibition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전 : 결정적 순간
일정 10월 2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0세기 사진 미학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1908∼2004)의 사진집 ‘결정적 순간’ 발행 7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다. 카르티에 브레송 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결정적 순간’에 수록된 오리지널 프린트, 1952년 프랑스어 및 영어 초판본, 출판 당시 편집자 및 예술가들과 카르티에 브레송이 주고받은 서신을 비롯해 작가의 생전 인터뷰, 라이카 카메라를 포함하는 컬렉션을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사진집 ‘결정적 순간’은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앙리 마티스가 직접 쓰고 그려준 제목과 커버로 장식됐다. 책에는 카르티에 브레송이 1932년부터 1952년까지 미국, 인도, 중국,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촬영한 경이로운 삶의 순간들이 담겼다. 마하트마 간디 장례식, 영국 조지 6세의 대관식, 독일 데사우 나치 강제수용소 등 역사적 순간과 현장도 생생하게 녹아 있다. 무엇보다 자신의 사진에 담백한 시선을 담은 카르티에 브레송의 글이 포인트다.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가 ‘사진작가들의 바이블’이라고 일컬을 만큼, ‘결정적 순간’은 당대뿐 아니라 후대의 사진작가들에게 큰 파급력을 불러온 책이다. 이번 전시는 책에 대한 수많은 오해와 찬사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카르티에 브레송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명인 명창의 부채-바람에 바람을 싣다
일정 9월 25일까지 장소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
전통예술에서 부채는 판소리뿐 아니라 한량춤, 부채산조, 부채춤 등의 전통춤과 줄타기, 탈춤, 굿 등 연희에서도 필수적으로 활용하는 소품이다. 국립국악원은 전통예술 명인·명창 58명의 부채 80여 점을 수집해 기획전을 열었다. 명인·명창의 부채를 통해 그들의 삶과
열정 또한 엿볼 수 있다. 남해안별신굿보존회의 100년 넘은 부채, 신영희 명창이 소리 인생 70년간 사용한 부채 중 닳아 사용할 수 없는 부채 24점을 모아 만든 8폭 병풍 등이 전시돼 눈길을 끈다. 전시명의 붓글씨는 한글 서예가로도 유명한 소리꾼 장사익이 직접 썼다.
●Book
◇여성 50대를 위한 100세 시대 인간관계(오노데라 아쓰코·문학사상)
“중년 여성이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기 자신답게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는 것은 남성보다 훨씬 더 복잡하며, 부모나 남편, 자녀 등 가족과의 관계가 그 선택을 좌우한다.”
책 ‘여성 50대를 위한 100세 시대 인간관계’는 50대를 중심으로 중년이라 일컬어지는 그 전후의 40대, 60대 여성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여성 심리학자인 저자는 중년 여성의 인간관계와 앞으로의 삶의 방식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책의 부제는 ‘인간관계는 왜 이 나이가 되어서도 힘들기만 할까?’이다. 50대가 되면 인간관계로 고민할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골치 아픈 일이 많다. 중년 여성은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틈바구니에서 다양한 문제를 떠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는 부모와의 관계, 남편과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형제자매와의 관계, 직장 내 인간관계, 친구 관계 등에서 다양한 문제가 존재한다.
저자는 인간관계 문제를 겪고 있는 중년 여성들에게 명쾌한 해결법을 제시한다. 더불어 인생 후반부를 지금보다 더 풍요롭게,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도 얘기한다.
저자 오노데라 아쓰코는 현재 메지로대학 인간학부 심리카운슬링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은 발달심리학, 인격심리학이다. 저서로는 ‘비기너 심리학’, ‘아동발달과 아버지의 역할’ 등이 있다.
◇부자의 서재에는 반드시 심리학 책이 놓여 있다(정인호·센시오)-
저자는 “부자가 되려면 금리, 환율보다 사람들의 행동 심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부자는 어떤 심리를 가졌는지, 어떻게 사람들의 심리를 읽고 행동으로 옮기는지 소개한다.
◇아주 정상적인 아픈 사람들(폴 김, 김인종·마름모)
25년간 정신질환자 가족을 돌보고 있는 폴 김과 저널리스트 김인종이 함께 썼다. 책은 정신질환을 의학적·사회적인 관점과 영적·심리적인 관점에서 균형 있게 들여다본다. 정신질환자와 그 가족들뿐만 아니라 마음이 아픈 이에게 도움을 준다.
◇고양이의 매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강은영·좋은생각)
인스타그램 팔로워 10만 명에 달하는 ‘모리’ 강은영의 첫 번째 그림 에세이다. 저자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업무 시간이 줄어 ‘1일 1고양이’ 그리기를 시작했고,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그 과정을 그림과 글에 고스란히 담아 행복 에너지를 전한다.
●Stage
◇아트(ART)
일정 9월 17일 ~ 12월 11일
장소 예스24스테이지 1관
연출 성종완
출연 이순재, 노주현, 백일섭, 박은석, 조풍래, 최재웅, 최영준, 김도빈, 박영수, 박정복 등
블랙 코미디 연극 ‘아트’는 프랑스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대표작이다. 세 남자의 오랜 우정이 그림 한 점을 계기로 드러난 허영과 오만에 의해 얼마나 쉽게 깨지고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지를 일상의 대화를 통해 보여준다. 현재까지 15개 언어로 번역돼 35개국에서 공연했고, 몰리에르 어워드, 로렌스 올리비에 어워드, 토니 어워드 등 유수의 상을 휩쓸었다.
이번 공연에서는 ‘시니어 버전’을 처음으로 선보인다. 원로배우 이순재, 노주현, 백일섭이 새롭게 캐스팅됐으며, 최정상 배우들이 총출동해 기대를 모은다. 이순재, 박은석, 조풍래는 지적이며 고전을 좋아하는 항공 엔지니어 ‘마크’ 역을 연기한다. 예술에 관심 많은 피부과 의사 ‘세르주’ 역은 노주현, 최재웅, 최영준, 김도빈이 맡는다. 우유부단한 사고방식의 문구 영업사원 ‘이반’ 역에는 백일섭, 박영수, 박정복이 캐스팅됐다.
◇삼총사
일정 9월 16일 ~ 11월 6일
장소 유니버설아트센터
연출 유병은
출연 신성우, 이건명, 김형균, 김준현, 김신의, 김현수, 김법래, 장대웅, 정욱진, 최민우, 렌, 라키, 경윤, 민규 등
뮤지컬 ‘삼총사’가 2018년 10주년 공연 이후 4년 만에 돌아온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삼총사’는 17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다. 왕실 총사가 되기를 꿈꾸는 청년 달타냥과 삼총사 아토스, 아라미스, 포르토스가 루이 13세를 둘러싼 음모를 밝혀내는 과정을 그린다.
국내 초연부터 출연한 배우 신성우와 함께 이건명, 김형균은 삼총사의 리더 아토스 역을 연기한다. 김준현, 김신의, 김현수는 로맨티스트 아라미스로 무대에 오르고, 김법래와 장대웅은 화끈한 바다 사나이 포르토스 역을 연기한다. 정욱진, 최민우, 렌, 라키, 경윤, 민규 등은 돈키호테 같은 성격의 쾌남 달타냥 역을 맡았다.
◇미세스 다웃파이어
일정 8월 30일 ~ 11월 6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김동연
출연 임창정, 정성화, 양준모, 신영숙, 박혜나, 김다현, 김산호, 하은섬, 박준면, 임기홍 등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코믹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번 국내 초연은 전 세계 최초 라이선스 공연이다. 이혼으로 양육권을 잃은 다니엘이 백발의 가정부 할머니 다웃파이어로 변장해 아이들을 돌보는 도우미로 취직하는 내용을 담았다. 故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다웃파이어 역에는 임창정, 정성화, 양준모가 캐스팅됐다. 특히 이 작품으로 10년 만에 뮤지컬에 복귀하는 임창정은 “다섯 아이의 아빠로서 가족의 정과 사랑을 듬뿍 담은 다웃파이어를 보여주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지난 2년간 우리나라 시니어들이 보이스피싱·스미싱으로 피해를 본 금액은 7000억 원. 매해 사라지는 은행 점포는 300여 개. 스마트폰 보급률은 95%에 이르지만 60세 이상의 모바일뱅킹 사용률은 25%에 불과하다. 오영환 시니어금융교육협의회 사무총장(62)은 디지털 시대의 정보 격차가 금융 소외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문맹은 생활을 불편하게 하지만, 금융문맹은 생존을 불가능하게 한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미연방준비제도 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의 말이다. 대한노인회에서 정책이사로 오랜 시간 활동하며 정부·국회와 함께 노인 빈곤 문제 등 노인 정책을 다뤘던 오영환 사무총장은 이 문장에 깊이 공감했다. 금융을 잘 모르는 시니어가 많기 때문. 시니어들이 노후 빈곤을 겪지 않으려면 금융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시니어금융교육협의회를 설립하고, 연간 2만여 명의 시니어를 만나고 있다.
Q 대한노인회에서 노인 정책 관련 일을 꽤 오래 하셨는데 어떻게 시니어 금융 교육을 시작하시게 됐나요?
대한노인회에서 노인정책 이사로 있으면서 노인 빈곤, 노인 소외, 노인 복지 등에 대한 정책들을 보건복지부, 국회와 함께 협의하는 일을 했습니다. 서울시 일자리위원회 위원, 웰다잉 시민운동 이사로도 활동했는데요. 노인에게 필요한 정책 중에서도 노인 빈곤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중 1위입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이유 외에 금융도 원인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요즘은 은행 점포도 없어지는 추세인데, 디지털 금융을 모르면 노후가 빈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참 빠르게 변하는데 나이 들면 그 속도를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시니어들의 스마트폰 활용도가 무척 낮아 디지털 정보 격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어요. 한국은행 조사에 따르면 모바일뱅킹만 보더라도 2030 세대는 약 80%가 사용하는데, 50대는 51% 수준이에요. 60대는 18.7%, 70대 이상은 6%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모바일로 금융 서비스를 이용하면 금리 우대도 해주고, 계좌이체 수수료도 면제되고요. 대출받을 때 금리 우대도 받습니다. 이런 돈을 연간으로 계산하면 50만 원 정도 차이가 납니다. 디지털 정보 격차가 금융 격차로 이어지는 셈이죠.
시니어의 경우 의도하지 않은 정보 차단도 많이 겪습니다. 요즘은 시니어도 유튜브를 많이 보는데요. 예를 들어 태극기 부대가 뭔지 궁금해 눌러봤는데, 알고리즘으로 인해서 계속 태극기 부대 관련 영상이 올라오는 거예요. 하나를 보면 그것에 관련된 내용만 계속 나오니 일방적인 정보 전달이 되는 거죠. 그래서 시니어들에게 디지털 시대의 금융 교육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2017년에 금융위원회의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시니어금융교육협의회를 설립하게 되었죠.
Q 시니어금융교육협의회는 어떤 일을 하나요?
많은 시니어가 금융사기로 피해를 보고 있고, 금융 소외를 겪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노인 착취 문제도 수면으로 올라오고 있죠. 노후 빈곤을 예방하려면 생애 주기에 맞춰 은퇴 준비도 해야 합니다.
곧 다가올 초고령사회에서 시니어들이 빈곤에 시달리지 않고 행복한 노후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금융사기예방교육, 디지털금융교육, 은퇴교육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교육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생활 팁이라고 생각하시면 좋아요. 요즘은 기차표를 사는 것도, 호텔 예약도, 쇼핑도 다 스마트폰으로 하잖아요. 실제 교육을 받은 분들이 “자식들에게도 물어보기 어려웠는데, 배우고 나니 너무 편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동네에서도 이런 교육을 쉽게 배우실 수 있도록 노인종합복지관, 도서관, 대한노인회가 운영하는 경로당, 노인대학 등 여러 기관과 함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 시니어뿐 아니라 금융 소비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금융소비자보호정책을 목적사업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Q 시니어 금융 소비자 보호를 강조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금융이 디지털화되면서 정보 격차가 벌어지고 금융사기를 당하는 시니어가 많아졌습니다. 지난 2년간 우리나라 시니어들이 보이스피싱과 스미싱으로 잃은 금액이 7000억 원 정도 됩니다. 역대 최고 금액이에요. 예상외로 50대가 굉장히 많습니다. 피해 건수로는 70~80대가 많은데, 피해 금액은 오히려 50대가 훨씬 많아요.
고전적인 수법은 전화로 “당신의 자녀, 손주를 납치했다”고 하는 건데요. ‘나는 안 속는다’고 하지만 막상 당하면 머리가 하얘진다고 해요. 요즘은 또 보이스피싱 하는 사람들이 피싱 전화를 걸면서 동시에 실제로 자녀를 만나고 있어요. 휴대폰을 빌려달라거나 해서 자녀에게 확인하려고 거는 전화를 가로챕니다. 납치되었다는데 전화를 해도 안 받으니까 속는 경우가 많죠. 또 문자를 이용한 스미싱 방법도 다양해지고 있어요. “아빠 휴대폰 고장 났어요. 돈 좀 보내주세요”라는 문자, 해외 구매한 상품이 세관에 있으니 확인해보라는 문자 등이 있어요. 젊은 분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경고를 받는데, 시니어들에게는 그런 경로가 많지 않아요.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가 850만 명 정도 됩니다. 50세 이상 시니어까지 포함하면 2000만 명이에요. 우리나라는 이미 고령사회에 들어섰고 2026년 초고령사회로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고령화 속도가 너무 빨라 1년 앞당겨졌어요. 초고령사회가 다가오니 노인 착취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요양원 원장에게 통장을 맡겼다가 치매가 와서 그 사실을 잊어버리자 원장이 그 돈을 써버린 사례도 있고요. 간병인이나 지인이 그러기도 합니다. 부모의 연금을 자식이 가져가는 경우도 굉장히 많고요. 치매기가 있는 노인에게 케이블TV 하나 두라며 대충 사인을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일을 방지하려고 법적으로는 ‘후견인 제도’라는 걸 운영하는데요. 간단히 말하면 누군가 내 통장에서 돈을 인출하려고 할 때 후견인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제도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데다 그 과정도 굉장히 복잡합니다. 법원에 신청하면 판사가 판결을 통해 후견인을 지정해줘야 하고 변호사도 있어야 하는데, 70세 넘어 이 과정을 할 수 있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그래서 대안으로 주민센터 공무원이나 노인종합복지관 사회복지사가 후견인이 되는 ‘공공 후견인 제도’가 있어요. 노인 착취 문제는 주로 70세 이상 노인들에게서 많이 발생하는 만큼 그전에 이런 방법들을 알아둬야 합니다.
2025년이면 인구의 20%가 노인입니다. 노인 인구가 많아지니 그 피해도 늘어나겠죠. 디지털에 익숙하지 않은 시니어 금융 소비자를 보호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시기에는 자신의 재산을 잘 지키는 게 중요하거든요.
Q 금융 교육은 어떤 내용인가요?
금융 관련 교육은 크게 디지털금융교육과 금융사기예방교육이 있습니다. 금융사기예방교육은 연극과 뮤지컬로 만들어서 진행했어요. 처음에는 강사가 앞에 나가 PPT를 띄우고 교육을 했는데 지루해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극단과 함께 금융사기 내용을 연극으로 만들었더니 굉장히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다음 더 재미있게 해보려고 트로트 뮤지컬을 만들었어요. 트로트가 나오니 함께 따라 부르고 춤도 추면서 좋아하시더라고요. 연극과 뮤지컬을 합해서 약 2년 동안 100회 가까이 공연했는데요. 코로나19로 인해 지난 2년 동안은 공연을 못 했어요. 아쉽지만 이번에는 국악으로 흥부놀부 이야기를 통해 금융사기를 알리는 영상을 만들어 올렸습니다.
디지털금융교육은 먼저 스마트폰 이용과 같은 디지털 교육을 하고, 잘 따라오시면 금융 교육으로 넘어가는데요. 시니어들은 교육을 할 때 직접 해봐야 해서 1:1 대면 교육이 무척 중요합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해 대면할 수가 없게 되었죠. 고민을 하다 행사로 기획했던 ‘시니어 골든벨’을 비대면으로 시도해봤습니다. 먼저 지원자들에게 골든벨 교재를 보내드리는데요. 예상 문제집인 셈인데 거기에 생활에 꼭 필요한 금융 꿀팁을 담았습니다. 금융사기, 투자, 보험, 주택연금 등 금융 상식도 넣고, 유튜브로도 영상을 볼 수 있도록 했어요. ‘시니어 골든벨’은 화상 채팅으로 진행하고요. 250명이 정원인데, 참여율은 70~80% 정도 됩니다. 혼자서 화상 프로그램 접속을 못 하시거나, PC가 없어서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런데 유튜브 완주율은 100%입니다. 골든벨 대회도 좋지만, 저희 목표는 대회 준비 과정을 통해 금융 교육이 이뤄지도록 하는 거였거든요. 꽤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Q 금융 교육도 하지만 은퇴 교육도 하신다고요. 은퇴 교육이라니 조금 생소합니다.
은퇴 교육도 결국은 금융 교육이에요. 생애 주기별 금융 교육이 필요한 것이죠. 우리에게는 세 가지 수명이 있습니다. 평균수명, 건강수명, 경제수명인데요.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84세입니다. 건강수명은 평균 74세, 경제수명은 평균 70세예요. 평균 10년을 노인성 질환을 앓고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다가 돌아가신다는 뜻이죠. 은퇴 교육은 경제수명을 늘려서 시니어들이 노후를 조금 더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사실 은퇴 교육은 40대에게 가장 필요합니다. 은퇴 이후의 삶을 미리 설계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직 젊다고 생각해서 교육을 많이 안 받아요. 그래서 일단은 은퇴했거나 은퇴를 6개월 앞둔 분들에게 하고 있어요. 교육청, 사학연금, 공무원 연금공단 등과 연계해서 교사, 교직원,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은퇴를 하면 신체적 변화뿐 아니라 수입과 지출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수입은 절반으로 줄어드는데, 노인성 질환으로 인한 병원비 지출은 많아지죠. 재무적으로 그 균형을 잘 맞출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합니다. 또 비재무적으로는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준비해야 하죠. 요즘은 우스갯소리로 ‘재수 없으면 100세까지 산다’고 그래요. 50세에 은퇴하고도 50년을 더 살아야 하는 거죠. 인생 이모작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소상공인, 자영업자 시니어분들이 많은데, 은퇴 후 삶에 대한 교육을 받을 기회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분들을 위한 금융 교육과 은퇴 교육도 중요합니다.
Q 시니어금융소비자보호정책 포럼을 열어 시니어 디지털 금융 격차 해소 방안에 대한 논의도 하셨는데요. 고령 친화적인 정책들이 생겨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난해에 은행 지점 311개가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점포가 없어지는 곳은 첫째 낙후된 지역, 둘째 고령화된 지역입니다. 많은 분들이 은행을 공공기관으로 생각하지만, 은행은 민간 기업입니다. 점포 하나를 유지하는 데 월 2억~3억 원이 필요하다고 해요. 그러니 점포를 닫을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동네 은행이 문을 닫으면 시니어들은 차를 타고 멀리 나가야 해요. 금융 접근성에 제한이 생기죠. 그래서 대안을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건 디지털 금융 교육입니다. 점포를 없애기 전 디지털 금융 교육을 진행하자고 제안했고, 이런 내용을 담은 ‘점포 폐쇄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었어요. 지역 주민들에게 설문조사도 하게 되어 있고, 점포를 닫는 대신 적절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또 지난해 3월부터 금융소비자보호법이 시작됐는데요. 그 하위법으로 노인과 관련된 법을 만들고 있습니다. 저희가 시니어 금융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야기했던 내용이 많이 반영되고 있는데요. 올해 안으로는 완성될 것 같습니다.
판소리계에는 유명한 왕가네가 있다. 그 중심에는 왕기철(59) 명창이 있다. 왕기철 명창의 동생 왕기석 명창뿐만 아니라 딸 왕윤정도 소리꾼의 길을 걷고 있다. 현재 왕기철은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교장으로서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다. 판소리꾼이자 위대한 아버지, 그리고 스승인 왕기철 명창. 이 찬란한 5월에 그를 특히 만나고 싶었다.
서울특별시 금천구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안에는 ‘왕 카페’가 있다. 그곳이 어디인가 하면 다름 아닌 교장실이다. 바리스타는 왕기철 교장이다. 왕 명창은 교장실을 찾는 선생님들, 손님들에게 직접 커피를 내려서 대접한다.
“요즘 시대에 교장이라 권위를 세운다고 세워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상대방이 인정해줄 때 나의 권위가 서는 거죠. 저는 우리 선생님들하고도 수평적인 관계라고 생각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먼저 인사 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도 하면서 다가서려고 하죠. 그렇다고 해서 약하기만 한 교장은 아니랍니다. 하하.”
왕기철 명창은 1985년 제1회 동아국악콩쿠르 일반부 판소리 부문에서 금상 없는 은상을 받은 이후 전주대사습놀이, KBS국악대상을 휩쓴 ‘당대의 명창’이다. 소리꾼이라는 삶을 이어온 지 50여 년인데, 예술가의 까탈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다. 그에게서 넘쳐흐르는 것은 행복한 기운이었다.
“소리계에서 그래도 이름 좀 있는 사람이 교장으로 있으니까 학생들이 좋아하더라고요. 제가 공연 단체에도 오래 있었잖아요. 멘토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거죠. ‘너희 세대는 나보다 훨씬 더 길이 열려 있다’고 응원해주고, 좋은 기운을 심어주려고 합니다. 교장으로서 제 목표는 다른 것이 없어요. 우리 학생들이 꿈을 꾸고 이루고 행복해하는 학교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스승 박귀희 명창 만나 소리꾼 돼
왕기철 명창의 판소리 오디션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졌다. 왕 명창의 형인 故왕기창은 서울에서 판소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왕기창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인 향사 박귀희 명창이 남자 제자를 뽑으려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8남매 중 일곱째인 동생 왕기철 명창에게 전갈을 보냈다.
당시 왕기철 명창은 전라북도 정읍의 시골에 사는 열여섯 살의 소년이었다. 그는 그저 형의 부름에 서울 구경을 할 수 있어 신이 났다. 박귀희 명창은 왕 명창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고, 그는 ‘진도아리랑’을 불렀다.
“형님이 잠깐 가르쳐준 대로 소리를 했는데, 뭐 잘했겠어요? 그런데 향사 박귀희 선생님께서 제 목소리를 듣고 마음에 든다고 바로 제자로 받아주셨어요. 아마 저의 여러 가지를 살펴보셨겠죠. 시골 촌놈에 옷도 남루하고 뭐 볼 것도 없는 저였는데, 선생님은 정말 제 인생의 은인이시죠.”
그렇게 왕기철 명창은 국악인의 길을 걷게 됐다. 박귀희 명창은 현재 왕기철 명창이 교장으로 있는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의 설립자다. 왕 명창은 국립전통예술고에 다니는 한편, 박귀희 선생의 학원에서 가야금 병창과 소리를 배웠다. 멀고도 어려운 소리꾼의 길, 왕기철 명창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가야금과 소리를 함께 한다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가야금이 되면 소리가 안 되고, 소리가 되면 가야금이 안 되어 고생을 많이 했죠. 그때 학원은 종로 3가와 창덕궁 사이에 있었는데 그 길을 다니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내가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죠. 소리를 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속상해서… 노력해도 잘 안 되니까 속상해서 울었던 것 같아요.”
왕기철 명창은 고등학교 졸업 후 한양대학교 국악과로 진학했다. 당시 한양대학교에서 판소리 전공자를 뽑은 것은 처음이지만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왕 명창은 ‘판소리 학사 1호’라는 영예로운 타이틀도 얻었다. 그는 “옛날에는 소리 하시는 분들은 배움이 많지 않았다”면서 “지금은 석사, 박사까지 하는 분들도 많다. 소리꾼들이 학문을 통해서 자신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왕기철 명창은 소리꾼으로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2001년도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던 때라고 밝혔다. 판소리 전공자들은 대통령상을 받아야 명창의 반열에 올라선다고 생각한다. 왕 명창은 1999년, 2000년, 2001년까지 3수 만에 장원을 받은 터라 값진 노력의 결실이라고 느꼈다. 더불어 동생 왕기석 명창도 2005년에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왕기철 명창은 “형제 명창은 우리가 1호”라고 자랑하며 웃었다.
교육자 그리고 무대
왕기철 명창은 대학교 졸업 후 1985년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교사가 됐다. 선생으로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은 좋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응어리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하지 못한 것. 국립창극단은 국립극장 전속단체로서 판소리를 바탕으로 만든 ‘창극’을 통해 우리 문화를 알리는 곳이다.
더욱이 동생인 왕기석 명창은 국립창극단 소속으로 활약을 펼쳤다. 현재 그는 국립민속국악원의 원장이다. 무대에서 소리를 하는 아우가 형은 부럽기만 했다. 왕기철 명창은 무대에 대해 타는 목마름을 느꼈지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이 깊었다.
“동생의 무대를 보고 나면 그날 밤 내내 무대 생각이 맴도는 거예요. 무대에 너무 서고 싶은 거죠. 무대에 서야 살아 있다고 느끼니까요. 교직에 있으면 안정적으로 평생 일할 수 있어요. 내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고 하니까 아내도 아이들도 반대를 하더라고요. 동생도 ‘형은 교육계에 계시는 게 어때’ 그랬는데, 저는 무대에 서겠다는 생각으로 학교를 과감히 그만뒀죠.”
결국 왕기철 명창은 13년 2개월 만에 교단을 떠났다. 39세로 늦은 나이였다. 그러나 그의 열정을 아무도 막지 못했다. 왕 명창의 실력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단원 시험을 보고 1999년 국립창극단 단원에 합격했다.
왕기철 명창은 당시를 회상하며 “소리는 괜찮게 내는 것 같은데, 창극은 안 해봤기 때문에 연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동생 왕기석 원장이 롤모델이었다고 밝혔다. 왕 원장은 17세 최연소 나이에 단원이 되어 약 40년 동안 몸담았다.
“국립창극단에 들어가서 동생과 같이 캐스팅되면 동생이 발은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몸을 움직이는지 이런 것을 계속 보고 배웠어요. 특히 1999년 완판 창극 ‘심청전’을 했는데, 저도 왕기석 원장도 심봉사 역을 연기했죠. 그리고 우리 딸 윤정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 어린 심청 역에 오디션을 보고 붙어서 저와 같이 연기했어요.”
왕기철 명창은 14년 8개월 동안 국립창극단에 있다가 2013년 다시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교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2017년에 16대 교장이 됐다. 임기가 끝난 후 재임용에 도전해 지난해 17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임기는 2025년까지다. 박귀희 명창이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이었는데, 그 길을 이어가는 왕 명창은 “개인적으로 의미가 남다르다”고 소감을 전했다.
딸과 함께 걷는 국악의 길
왕기철 명창의 딸 왕윤정(32)은 앞서 말했듯이 아빠를 따라 소리꾼의 길을 걷고 있다. 지난해에는 15대1의 경쟁률을 뚫고 국립창극단 정단원이 됐다. 왕 명창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는데 왕윤정이 특히 노래를 잘 부르고 끼가 있었다고. 다른 자녀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고 있다.
왕윤정은 왕기철의 딸이기 때문에 편견 어린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잘해도 본전’이었다는 그녀는 실력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남들이 인정할 수 있도록, 내가 잘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어요. 그래서 사춘기 때도 치열하게 열심히 했죠.”
왕윤정은 왕기철 명창에 대해 “아빠와는 친구 같은 사이이긴 한데, 선생님으로서는 엄격하셨다”고 말했다. 왕 명창은 “딸에게 기대도 컸고, 조심스럽기도 했다”면서 “딸이 아버지의 그늘 아래 있으면서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딸의 마음을 헤아리는 위로의 말이었다.
“딸이 저보다 더 실력이 나은 예술가가 됐으면 좋겠어요. 딸이 국립창극단에 들어가고 공연하는 걸 봤는데 소리의 추임새나 테크닉적인 부분도 괜찮고 이제 들을 만한 실력을 갖춘 것 같아요.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고쳐주기도 하고요. 최근에 딸이 ‘리어’라는 작품을 했어요. 무용학원에 보냈어서 그런지 춤도 잘 추고, 무대에서 잘 보이는 예술 소리꾼이 됐더라고요. 그리고 딸이 저보다 성격도 좋답니다.”
지난 3월, 왕기철 명창은 20년 만에 국립극장에서 흥부가 완창 무대를 선보였다. 표가 보름 전에 매진될 정도로 기대감이 높았기에 그의 부담감 또한 컸다. 왕 명창은 최선을 다해서 연습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아쉬운 무대를 남기고 말았다.
“공연날 아침에 일어나니 목소리가 확 바뀌었더라고요. 진단 키트 검사를 해보니 음성이어서 공연을 했죠. 그런데 갈수록 컨디션이 최악이었어요. 내 목소리가 이런 소리가 아니었는데 너무 속상했죠. 다음 날 다시 검사를 했더니 양성이었어요. 얼마나 속상하고 아쉬웠는지 몰라요.”
왕기철 명창은 인생의 마지막 완창이 흥부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쉬움이 너무 크게 남아 다시 한번 무대에 서고 싶단다. 딸 왕윤정은 “저는 아빠가 건강만 하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시고 잘하시는 소리를 오랫동안 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완창 무대를 한다는 것은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에요. 두 시간 이상 대사도 다 외워야 하고, 연습도 많이 해야 하고, 목 관리도 해야 하죠. 이제 완창 무대는 안 하려고 했지만 한 번 더 도전해보고 싶어요. 무엇보다 정말 해보고 싶은 것은 우리 가족이 함께 예술 무대를 꾸미는 거예요. 왕기석 원장과 그의 딸 왕시연도 소리를 하거든요. 넷이 ‘왕가네 소리판’, ‘왕가네 소리 이야기’라고 해서 무대를 꾸미고 싶어요.”
왕기철 명창은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는 소리를 계속할 것 같다”면서 삶을 즐기면서 살 것이라고 했다. 왕 명창은 이전에 성대결절로 수술을 한 적이 있고 현재 98% 회복했다고 한다. 아직 2%는 회복하지 못했지만 “거의 다 되찾았으니 행복하다”면서 웃었다. 그의 긍정적인 생각이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틀림없다.
“나이가 지긋하게 드는 것은 인생에서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60세에 은퇴했다고 해서 다 내려놓을 것이 아니라 그동안 하고 싶었던 취미도 하면서 인생을 즐기면서 사셨으면 좋겠어요. 그동안은 가족들 생각하면서 열심히 사셨잖아요. 저도 그러려고 하거든요. 저는 무엇이든지 즐기려는 마음이 중요한 것 같아요. 긍정적인 생각으로 내가 소리를 하면 행복한 무대를 만드는 거고, 그럼으로써 내 소리를 듣는 관객들도 인생의 희로애락을 느끼고 에너지를 얻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시가 5월 한 달간 덕수궁 돌담길, 청계광장, 반포한강공원 등 서울의 야외 명소 12곳에서 ‘국악버스킹’을 진행한다.
국악버스킹은 코로나19로 인해 지난 2년간 비대면·온라인 공연으로 진행됐으나, 이달부터는 방역 지침 완화에 따라 전면 대면 공연으로 열린다. 지난 4일 덕수궁 돌담길에서 펼쳐진 여완밴드의 공연을 시작으로 총 12개 장소에서 국악 아티스트의 버스킹 공연이 30회 진행된다.
이번 국악버스킹에는 박자희(청계광장), 서일도와아이들(별빛내린천), 전영랑&보울(덕수궁돌담), 정초롱(효자동), 윤예원(이태원), 윤대만(덕수궁돌담), 김란이(효자동), 월드뮤직밴드 도시(세운상가), 김하은(효자동), 소리맵시(신촌), B.O.B.(오징어게임 체험관), 잔향(DDP어울림마당), 퀸(반포한강공원), 조주한(인사동) 등이 참여한다.
공연은 많은 시민이 일상에서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점심시간과 저녁 퇴근 시간을 활용해 열린다. 서울시 문화본부 유튜브 채널 ‘문화로 토닥토닥’에서도 회차별 현장 공연 영상을 볼 수 있다. 국악버스킹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운영단체(정아트앤컴퍼니)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하면 된다.
주용태 서울시 문화본부장은 “거리두기가 해제되어 다시 서울 곳곳에서 많은 시민 여러분께 우리의 소중한 국악 공연을 선보일 수 있게 되어 기쁘다”며 “다시 시작된 ‘국악버스킹’ 무대로 국악 예술인들과 시민 모두 활기를 되찾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어버이날을 맞아 서울시, 서울노인복지센터, 동대문노인종합복지관 등 각 기관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서울시는 4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제50회 어버이날 기념식’을 열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모범적으로 효행을 실천한 효행자,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녀를 키워낸 장한 어버이, 어르신 인권 및 인식 개선에 기여한 단체 등 시민 표창 수상자들에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어 오 시장은 최고령 어르신(27년생, 29년생)에게 직접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어린이들과 함께 ‘어버이 은혜’를 합창했다.
종로구에 위치한 서울노인복지센터는 ‘다시 만나 기뻐 孝(효)’ 행사를 4일 개최한다. 코로나19의 확산 이후 첫 대면 행사인 ‘다시 만나 기뻐 孝’는 센터를 다시 찾은 어르신들을 위한 카네이션 달기, 포토존, 원데이클래스 대왕 카네이션 만들기, 축하 공연으로 구성돼 있다.
센터 2층에는 카네이션 꽃길로 꾸며진 포토존이 마련돼 있으며, 기념사진 촬영 후 어르신들에게 사진을 인화해 제공한다. 로비에서는 대왕 카네이션을 만들어보는 원데이클래스가 열린다. 이는 어르신뿐만 아니라 지역주민도 함께 참여하는 열린 강좌로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다.
3층 야외 게이트볼장에서는 무대공연이 진행된다. ‘숙명국악앙상블’이라는 숙명여자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전통음악전공에 재학생들이 가야금, 해금을 통해 전통 문화예술공연을 열 예정이다. 틈틈이 진행될 추첨과 기념품 제공 코너도 준비돼 있다. 자세한 사항은 서울노인복지센터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대문노인종합복지관은 ‘오랜만이에孝(효), 반가워孝, 사랑해孝’를 6일 진행한다. 이번 어버이날 특별행사는 2일 운영을 재개한 기념으로 떡, 음료를 제공한다. 더불어 오랜만에 복지관을 찾은 어르신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카네이션을 전달한다. 이 외에도 전문자원봉사 단체인 캐.조.사(캐릭터를 좋아하는 사람들)와 연계한 캐리커처 그리기, SBS아카데미뷰티스쿨 동대문 캠퍼스와 연계한 네일아트, 화목한 가족과의 기억을 추억할 수 있도록 사진을 인화해주는 가족사진 인화 서비스 등 부대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다.오후에는 3세대 원아들이 직접 어르신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는 기념식이 진행되고 코로나 19 기간 동안 단절된 문화 체험 기회를 제공하는 영화 상영이 이뤄질 계획이다.
'국민 MC' 송해가 자신의 인생을 담은 트로트 뮤지컬을 통해 대한민국 산역사의 증인임을 입증했다.
지난달 31일 KBS 2TV에서는 설 기획 프로그램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가 방송됐다. 송해의 95년 인생을 트로트 뮤지컬 형식으로 꾸민 헌정 공연으로 웃음과 감동을 전해줬다.
시청률 조사 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이날 방송은 시청률 12.7%를 기록했다. 이는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29%)보다 낮지만, 지난해 추석 특집 '피어나라 대한민국, 심수봉'(11.9%)보다는 높은 수치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는 트로트 가수 정동원, 이찬원, 영탁, 신유 등이 송해를 각 나이별로 연기하면서 송해의 인생사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악인 박애리가 송해 어머니 역할을 맡았고 국악인 송소희, 박서진, 김태연, 홍잠언 등도 출연했다. 이들은 모두 KBS 1TV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송해와 인연을 맺은 바 있다.
극의 1막은 청년 송해의 유년기와 그가 실향민이 된 과정을 담았다. 송해는 1927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이름은 송복희였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아들이었다.
그리고 1951년 1월, 송해가 사는 마을에는 6·25 전쟁의 여진이 지속됐다. 전세에서 밀린 인민군 3000여 명이 산에 숨어들었고, 먹을 것이 떨어지면 사흘에 한 번 꼴로 마을로 내려와 식량 등을 빼앗아갔다. 그때마다 청년들은 집을 떠나야 했다.
인민군에 발각되면 징집됐고 반항하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인민군을 피해 연평도로 몸을 숨긴 송해는 영영 가족과 생이별을 했다. 송해는 극에서 어머니를 보지 못한 채 6·25 전쟁 피난길에 오른 청년 송해(이찬원 역)의 연기를 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송해는 무대에 올라 "제 가슴에는 언제나 어머님이 계신다. 어머니에게 바치는 노래를 한 곡조 부르려 한다"며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불렀다. 송해의 어머니를 향한 애절한 목소리에 관객들 또한 눈물을 닦았다.
2막에서는 송해가 1955년 '창공악극단'으로 데뷔하며 꿈을 찾아가는 내용을 담았다. 3막에서는 송해가 1988년부터 35년째 진행하고 있는 '전국노래자랑'의 이야기를 다뤘다.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며 매년 최소 관객 5000명에서 최대 1만 명까지 만났다. 34년 간 만난 관객수만 1000만 명에 달했다. 이들 중 전국 각지에서 200여 명을 관객으로 초대했다.
마지막으로 송해는 "땡과 딩동댕 중 뭐가 더 소중하냐고 하는데, 땡을 받아보지 못하면 딩동댕의 정의를 모른다. 나 역시 '전국노래자랑'에서 내 인생을 딩동댕으로 남기고 싶었던 사람"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노래 '내 인생 딩동댕'을 불렀다. 특히 모든 출연진이 노래를 함께 불러 감동을 더했다.
송해의 회고록과도 같은 뮤지컬을 통해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속에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녹아있었다. 더불어 방송을 본 시청자들은 송해의 건강한 모습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 지난 1월 22일 송해가 '전국노래자랑' 녹화에 참여하지 못한 소식이 알려지면서 걱정 어린 반응이 더해졌다.
한편, KBS는 최근 송해를 '최고령 TV 음악 탤런트 쇼 진행자'(Oldest TV music talent show host)로 올리기 위해 기네스 협회에 신청했다고 밝혔다. 기네스 협회의 기초적인 검토를 마치고 도전 신청이 공식 확정됐다. 현재는 영국 기네스협회가 제공한 심사 지침에 따라 관련 자료를 수집 중이다.
개항 이후 인천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문화와 유행을 선도했던 신포동. 지금은 구도심이 된 이곳 신포동에 30여 년간 자리를 지키며 인천시민의 지친 하루를 위로해주는 LP 카페 ‘흐르는 물’이 있다. 따뜻한 LP 음악 사이로 손님 한명 한명과 담백하면서도 다정한 인사를 나누는 안원섭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LP 음반과 통기타, 오래된 시집들과 빛바랜 사진들. 가게 내부엔 주인장의 취향과 그가 살아온 삶의 자취가 잔뜩 묻어난다. 안원섭 대표는 유랑극단 단원이셨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음악을 접하고 즐겼다. 대학에서는 건축을 전공한 그가 29세의 나이에 LP 카페를 차리게 된 이유다.
예술하는 청년들의 사랑방
음악만큼이나 ‘시’를 좋아했던 안 대표는 학창 시절부터 백일장이나 창작문예대회에서 자주 입상할 정도로 예술에 대한 관심과 재능이 남달랐다. 청년이 되어서는 직접 쓴 시에 통기타로 음을 입혀 노래를 부르고 작은 공연도 열곤 했다.
시공간의 제약 없이 음악과 시를 향유하면서 마음 통하는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은 마음에 1989년 1월, 테이블 여섯 개 들어가는 13평 남짓의 첫 번째 가게를 이곳 신포동에 오픈했다. “지금은 신포동이 구도심이 됐지만, 개항 직후에는 서울보다 신문물이 빨리 들어오고 관공서도 전부 위치했던 핫한 도심이었다”라며 “민감한 시기인 청소년·청년기를 이곳에서 보내면서 음악·패션 등 다양한 문화를 접했다”라고 설명했다.
상호인 ‘흐르는 물’은 정희성 시인의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흐르는 것이 어찌 물뿐이랴’라는 구절은 왠지 모르게 그의 마음을 울렸다. “뒹구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듯이 흐르는 물은 썩지 않거든요. 세상은 흐르는 물과 같아요. 그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게 법이에요. 노자의 사상 중 ‘상선약수’도 있잖아요. 이게 진리거든요.”
시적인 이름만큼이나 낭만적인 공간이다. 가게 오픈 초기, 음악과 시를 사랑하는 젊은 사장이 운영하는 이 가게에 예술을 사랑하는 인천 지역 청년들이 자주 찾아왔다. 화가, 작가, 음악가, 시인 등 다양한 예술가들의 교류와 활동의 전당이었다. 손님들과 밤새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날도 많았고, 술 한잔에 예술과 삶에 대한 허심탄회한 이야기도 나누며 청춘을 함께했다. 돈 없는 예술가들에게는 외상도 망설임 없이 해줬다. 시인에게는 커피값 대신 시집을, 화가에게는 술값 대신 그림을 받기도 했다. “그때는 그냥 가게에 돈통 하나 놓고 알아서 넣고 가시라고 했어요. 물감 살 돈도 없던 전업 화가 손님한테 어떻게 돈을 받아요. 그냥 ‘나중에 많이 벌면 주세요’ 했죠. 다 내 선배고 후배인데 술 한잔 베푸는 거 어려운 일도 아니에요.” 지금도 예술가들은 이곳을 찾는다. 공짜로 음악과 술을 즐긴 손님들은 이내 미술 작품이나 시집을 들고 다시 찾아온다.
규모가 큰 가게는 아니었지만 예술가들이 찾았던 낭만적인 공간이었던 만큼 차츰 이름을 알렸고, ‘타악기의 대가’ 김대환, ‘들국화’의 조덕환, ‘포크의 전설’ 양병집 등 7080 가요계의 전설적인 음악인들의 공연이 펼쳐지기도 했다. 안 대표는 “이 작은 가게에서 한국 가요계에 한 획을 그은 이들의 공연을 진행할 수 있어 매우 영광스러웠다”며 “특히 존경했던 故 김대환 선생님의 연주를 ‘흐르는 물’에서 들을 수 있었던 건 정말 감사하고 명예로운 일이었다”라고 설명했다.
LP 음반의 따뜻한 감성을 느끼는 곳
‘흐르는 물’에는 외국 팝송, 포크, 블루스, 재즈, 국악 등 다양한 장르의 LP 음악이 흐른다. 매일매일 그날의 분위기, 날씨 등에 따라 어울리는 음악을 재생하고, 손님들의 신청곡에 따라 음악이 바뀌기도 한다. 5000장이 넘는 LP 음반을 보유하고 있는 안 대표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내 소원은 만 장을 모으는 거였는데 어렵게 됐죠. 원체 생산되지 않으니까 구매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재생 목록을 만들어놓으면 연이어 노래가 나오는 음원과 달리 LP 음반은 계속해서 디스크를 갈아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실제로 안 대표는 인터뷰 중에도 흐르는 음악에서 관심을 뗄 수 없었다. 노래가 끊임없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음악이 끝나기 전에 다음 디스크로 바로 바꿔줘야 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편안하고 깔끔하게 즐길 수 있는 기술이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지만 안 대표는 LP 음반을 고집하며 LP 카페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안 대표는 다양한 비유를 통해 LP 음반만의 매력을 설명했다. “요즘 우리는 정화된 생수를 많이 마시지만, 옛날에는 정수기가 없어서 누룽지 먹을 때 나오는 숭늉을 많이 먹었거든요. 그 후에는 보리차를 끓여 먹었고요. CD나 MR은 정화된 생수예요. 그저 깔끔하죠. 하지만 숭늉이나 보리차를 생각해보세요. 가끔 건더기도 나오고 구수하잖아요, 고향 집의 엄마 품처럼. LP는 깔끔한 소리를 내지는 않아도 마음에 따뜻한 울림을 줘요.”
그 따뜻한 울림을 직접 느껴본 시니어 세대는 물론, 최근 ‘뉴트로’의 영향을 받은 젊은 세대도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어 이곳을 찾는다. “한번은 20대 청년이 산울림 레코드판을 들고 왔어요. 이 음악 듣고 싶다고. 그래서 내가 ‘예쁘다’라고 했어요. 그 사람의 청춘도 예쁘지만 제대로 경험해보지도 못한 LP 음악을 듣고 싶다고 이곳을 찾아온 행위 자체가요.”
‘백년가게’로 지정된 최초의 카페
전국에 현존하는 LP 카페는 다수 있지만, 한 주인이 30년 넘게 운영한 카페는 ‘흐르는 물’뿐이다. 신포동에서 30년 넘게 자리를 지킨 동네의 터줏대감이지만, 신포동 내에서 자리를 네 번이나 옮겼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동안 색을 잃지 않고 가게를 일궈오니, 젊음을 함께한 단골손님들이 이제는 자식 혹은 제자들을 데리고 찾아온다.
이곳은 음악과 커피·술을 즐길 수 있는 음악 카페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다양한 공연과 행사가 진행되는 복합문화공간이기도 하다. 공연은 물론 출판기념회, 그림 및 사진 전시회 등이 소소하게 열린다. 오랜 역사와 함께 풍부한 문화를 담고 있는 이 공간은 카페로서 전국 최초로 지정된 ‘백년가게’가 되었다. 백년가게는 중소벤처기업부가 100년 이상 존속을 돕고자 지정한 30년 이상 업력의 가게를 말한다.
안 대표는 30년 넘는 긴 시간 동안 가게에서 겪은 수많은 에피소드 중 ‘30주년 기념 콘서트’를 가장 기억에 남는 이벤트로 꼽았다. “30주년 된 해에 8일 동안 릴레이 공연을 했어요. 8일째 되는 공연 마지막 날, 인천시립합창단의 소프라노 백혜숙 선생 팀이 와서 공연을 했는데, 그들이 손님들과 함께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짠 거예요. 30명의 손님이 장미꽃 한 송이씩 저랑 제 아내한테 나눠줘서 30주년 기념 30송이의 장미꽃을 선물받았어요. 너무 감사했죠. 감정이 벅차올라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우리 손님들한테 큰절도 했어요.”
손님들의 공간을 지켜주는 ‘소사’
주인장에게 이 공간은 어떤 의미냐는 질문에 안 대표는 “이 가게가 내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며 “찾아주시는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과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게를 30년 넘게 운영할 수 있었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저 이곳을 관리하고 지키는 ‘소사’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난 그냥 소사예요. 학교에 상주하면서 잡일을 도맡아 하는 관리자를 소사라고 부르잖아요.”
이곳을 찾아주는 이들에게 보답하는 일은 지친 하루 일과를 끝내고 온 손님들이 편히 쉬다 갈 수 있도록 원하는 음악을 틀어주고 음식을 내어드리는 것뿐이다. 실제로 안 대표는 단골손님들의 18번 곡을 알아서 틀어주곤 했다.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온전하고 사지가 멀쩡하면 언제까지라도 우리 손님들을 위해 음악을 틀고 싶어요.”
인륜의 중대사로 여겨지는 결혼. 결혼하게 되면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데, 동종 업계 선배가 가족이 될 가능성도 있다. 연예인도 흔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경우가 성립될 때가 있다. 특히 최근 결혼으로 맺어진 스타 가족들이 눈에 띈다.
이처럼 스타 가족이 대대로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스타의 자녀는 부모를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연예계라는 곳이 친근하고, 직업 특성에 대한 이해도 또한 높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그렇다 보니 연인 간의 대화가 잘 통하고 결혼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어떠한 경우들이 있는지 더 자세한 이야기들을 담아봤다.
김수미 - 며느리 서효림
배우 김수미와 서효림은 연예계를 대표하는 고부 사이로 통하고 있다. 두 사람은 지난 2017년 MBC 드라마 '밥상 차리는 남자'에서 모녀 연기 호흡을 맞추며 인연을 맺었다. 이후 김수미와 서효림은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친구처럼 특별한 사이로 지내왔다고 한다.
그러한 가운데, 2019년 서효림은 김수미의 아들 정명호 나팔꽃 F&B 대표와의 연애 사실을 밝혀 세간을 놀라게 했다. 당시 서효림은 정명호 대표와 이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로, 김수미가 소개해준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이후 결혼과 출산 소식도 빠르게 전해졌다. 서효림은 정 대표와 2019년 12월 결혼했고, 이듬해 6월 딸 조이를 출산했다. 그 과정에서 서효림과 김수미는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 등을 비롯해 다수의 방송에 함께 출연하면서 훈훈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함께 서효림의 배우로서의 복귀 또한 빠르게 이어졌다. 그는 오는 11월 방송 예정인 MBC '옷소매 붉은 끝동'에 출연하는데, 이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배려와 지원 덕분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상해 김영임 - 며느리 김윤지
가수 겸 배우 김윤지(NS윤지)가 결혼 소식으로 뜨거운 화제를 모으고 있다. 김윤지는 지난 9월 26일 5살 연상의 사업가 남편과 결혼했다. 특히 화제가 된 이유는 김윤지의 남편이 개그맨 이상해와 국악인 김영임 부부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
김윤지와 남편의 러브스토리는 독특했다. 김윤지는 SBS '동상이몽2-너는 내 운명'에서 "아버지와 시아버지 이상해가 의형제 사이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30년이 훌쩍 넘은 인연이 있다"면서 가족끼리 친한 사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현재의 남편을 알게 됐다는 김윤지는 그를 15년간 짝사랑했던 사연도 털어놓아 눈길을 끌었다.
이영하 선우은숙 - 며느리 최선정
지난 2018년 이영하와 선우은숙이 아들 이상원의 결혼식에 나란히 참석해 화제를 모았다. 연예계를 대표하는 스타 부부였던 이영하와 선우은숙은 지난 2007년 이혼했기 때문. 그런 두 사람이 공식 석상에 같이 나왔기에 관심을 이끈 것. (TV조선 '우리 이혼했어요' 출연은 2020년이다.)
더욱이 며느리 또한 연예계 종사자로 더욱 화제가 됐다. 이상원도 현재는 사업가이지만, 과거에는 배우로 활동했고 이름도 꽤 알렸다. 이상원의 아내 최선정은 '전국춘향선발대회' 출신으로 배우로 활동한 바 있다. 스타 가족이 된 최선정은 2019년 스타 3세 출산과 함께, 럭셔리 라이프를 SNS를 통해 공개해 많은 관심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