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Retro)는 이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패션, 음악, 미술, 영화, TV 프로그램,
마케팅은 물론, 하다못해 전단지 디자인에까지 레트로가 등장한다. 열풍이다. 과거의 낡은 것을
현시대에 불러들여 감성적 만족을 구가하는 이 흥미로운 사조는 자동차 분야에도 당도했다.
올드카 또는 클래식카 마니아가 늘어나고 있는 것.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에 있는
‘더원 클래식카 카페’는 클래식카 마니아들의 관심을 사고 있는 클래식카 전시장이자 찻집이다.
‘더원 클래식카 카페’가 문을 연 건 1년여 전. 고즈넉한 시골 도로변에 있다. 특별할 것 없는 2층 건물이다. 언뜻 그렇고 그런 테마 카페로 보인다. 처음엔 우연히 스쳐가다 호기심으로 들어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일단 찾아온 이들은 찬탄하더란다. 알고 보면 특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카페의 너른 뜰과 건물 내부에 진열된 30여 대의 클래식카들이 발산하는 멋과 위용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어디서도 보기 힘든 올드카를 여기서 흔하게 볼 수 있어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다. 그런 연유로 어느덧 찾아오는 발길이 늘었으며, 마니아들에게 입소문 나면서 주목받게 되었다. “햐, 놀랍다!” 흔히들 터뜨리는 감탄사가 그렇다.
국내에는 몇몇 곳에 자동차 박물관이 있다. 클래식카 전문 박물관도 있다. 모두 자동차 회사나 단체가 운영하는 곳들이다. 더원 클래식카 카페는 이들 박물관에 비하면 규모나 시스템에선 한참 급이 낮다. 그러나 보유 차량의 퀄리티 면에서는 뒤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능가한다. 박물관들에 전시된 차들이 운행 불가능한, 말 그대로 전시 목적의 ‘죽은 차’인 반면, 이곳의 클래식카들은 두세 대만 빼고 모두 멀쩡한 내연기관을 갖춘 ‘살아 있는 차’다. 공도를 주행할 수 있는 인증을 받은 차, 즉 번호판 달린 차들이다. 고유한 히스토리로 이름을 날린 차도 많다. 다시 말해 이 카페는 국내에서 가장 독특한 고품격 클래식카 전시 공간이다. 개인이 운영하는 클래식카 전시장으로는 유일하다.
카페 대표는 이제 인생의 하오에 접어든 김성환(68) 씨. 유아교육을 전공한 그는 반평생 교육 사업에 전념했으며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그러다 은퇴를 계기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땀 흘려 가장의 책임을 다했으니 이젠 종래의 궤도에서 내려와 자신만의 삶을 즐길 자격이 충분하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말하자면 지도 위에서 전에 가보지 않은 길을 찾아 새로운 여정에 나선 거다. 인생 2막을, 유한한 시간을 오직 자신을 위해,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선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뛰어든 게 클래식카 카페 운영이다. 이건 사실 완전한 미지의 길은 아니다. 클래식카 마니아로 지낸 세월이 10여 년이니까.
“20년 전쯤의 어느 날, 우연히 도로 위에서 쌍용 칼리스타가 달리는 걸 보고 한눈에 반했다. 나도 모르게 뒤를 쫓아가게 되더라고. 용인에서부터 영등포까지. 갖고 싶은 차였던 거다. 그러나 당시엔 형편이 안 돼 포기했다. 이후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칼리스타를 사들였다. 그게 클래식카에 입문한 계기였다.”
칼리스타는 국내 최초의 로드스터로 쌍용이 수작업을 통해 생산했다. 정통 클래식카의 DNA를 계승한 이 멋들어진 차의 출현에 시장은 경악했다. 그러나 1992년부터 2년간 단 69대만 생산한 뒤 단종됐다. 당시 국산 스포츠카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데다 사치품을 배척하는 사회 분위기를 넘어서지 못해서였다. 이 카페에서 칼리스타는 특히 인기를 끄는 차종이다.
클래식카는 하나의 종합예술
칼리스타를 손에 넣은 후 김성환 대표는 본격적으로 클래식카에 관심과 애착을 갖기 시작했다. 조예를 키웠고, 차들을 사들였다, 그러면서 흥미와 만족의 농도가 점점 깊어졌던 모양이다. 돈이 모이는 대로 아낌없이 털어 컬렉션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차 숫자가 늘어나면서 보관 문제가 불거지더라. 그래서 지은 게 이 카페 건물이다. 애초 카페를 겸할 계획은 없었다. 차만 안전하게 보관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투박한 건물을 지었으니까.”
계획에 없었던 카페 영업을 병행한 이유는?
“사람들이 편하게 찾아와 차를 마시며 클래식카를 즐길 수 있으면 좋을 거라는 착상이 떠올라서다. 나는 종종 딸이 사는 미국을 드나든다. 그런데 미국에선 노인들이 클래식카 동아리를 만들어 노년을 즐기는 문화가 정착돼 있더라. 그게 아주 부러웠다. 그때 한국에도 클래식카 문화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막연했던 희망이 카페를 겸한 전시장을 꾸린 단초가 된 셈이다.”
클래식카란 어떤 차를 말하나? 일정한 기준이 있을 텐데.
“기본적으로 최소 30년 이상의 차령을 가진 차여야 한다. 더 중요한 건 희소성이다. 생산 개체 수가 적을수록 가치가 높아진다. 디자인의 우수성, 외관과 엔진의 상태, 실내 인테리어의 유지 상황 등도 따진다. 히스토리도 본다.”
클래식카에 어떤 매력을 느꼈기에 그토록 빠져들었나?
“미감을 즐기기에 적격인 게 클래식카다. 아름다운 선과 색, 세련된 디자인을 보라. 당대의 첨단 기술력과 감수성이 집약된 클래식카를 나는 하나의 종합예술로 본다. 기능과 편의 위주로 만드는 요즘의 차들이 감히 따라갈 수도, 흉내 낼 수도 없는 특유의 예술적 경지가 있다.”
보유한 차들 가운데 가장 진귀한 모델은?
“이곳을 찾은 마니아들이 하나같이 놀라는 게 대부분의 차가 고품질 클래식카이기 때문이다.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는 퀄리티에 반색하는데, 사실 어떤 차를 특정해서 뛰어나다고 평가하기 곤란한 면이 있다. 그럼에도 하나를 꼽자면 ‘BMW Z8’이다.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클래식카에 속하는 차종이다. 제임스 본드의 007 영화에 나온 ‘본드 카’로도 유명하다.”
‘BMW Z8’은 BMW 최고 기술자들이 팀을 구성, 수작업으로 생산한 차다. 소량 생산해 1년에 2000여 대만 나온 모델로, 풍만하면서도 민첩한 디자인이 압권이다. 가장 아름다운 차의 하나로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가뭄에 콩 나듯이 어쩌다 국내 중고차 시장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가격은 3억여 원에 달한다고.
“클래식카의 성지로 발돋움하겠다”
나는 문외한이라서 클래식카에 큰 관심도 지식도 없다. 자동차란 그저 잘 굴러가면 고맙지, 그쯤의 생각을 한다. 클래식카가 기차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을 지닌 걸 알아 감탄하지만, 일부러 돌아다니며 구경할 정도는 아닌 거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보니 흥미진진하다. 클래식카들의 극적으로 세련된 디자인에 예술품을 바라보는 기분이 든다. 아마도 로맨티시즘이 반영되었을 감미로운 선과 곡면은 섹시하고 평화롭다. 허무하게 사라진 시간의 잔영이 비치는 낡고 쓸쓸한 어떤 차들의 형상에서는 인생을 닮은 우수가 느껴진다.
레트로에 감흥을 받는 사람들과 못 말릴 클래식카 마니아들은 몹시 설렐 테다. 명차와 희귀차를 숨이 차게 잔뜩 만끽할 수 있으니까. 몇몇 차를 볼까? 1959년산 ‘캐딜락 엘도라도.’ 이 차는 제너럴모터스의 고품격 브랜드로 크고 화려하며, 보디 후면의 번쩍 치솟은 테일 핀으로 디자인 혁명을 가져온 모델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애마로도 유명하다. 외국에서도 흔히 볼 수 없다는 ‘포르쉐356A’도 눈길을 끈다. 제임스 딘이 즐겨 탔다는 히스토리도 돋보이는 차종이다.
외부 주차장에 전시된 ‘포드T’는 더원 클래식카가 보유한 가장 오래된 모델로 차령 110년이다. 자동차의 원초적 형태를 지닌 이 차의 휠은 심지어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생산 당시에는 첨단 테크놀로지의 총화였다. 미국의 자동차 역사는 물론, 미국 자체를 혁신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 희귀한 차를 김 대표는 어디서 구했을까.
“미국에서 구입해 배로 들여왔다. 클래식카 애호가가 많은 미국에선 매매 시장도 활성화돼 차 구입이 어렵진 않다. 관건은 수준 있는 차, 가치 높은 차를 고르는 안목이다.”
영국엔 와인과 주화에 이어 클래식카를 투자 가치 3위로 꼽은 조사가 있더라. 국내에서도 클래식카 시장이 움직이고 있나?
“미국, 유럽, 일본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클래식카를 찾는 사람들이 최근 급작스럽게 늘어났다. 깜짝 놀랄 정도다. 마니아들이 급격히 늘었고 커뮤니티 활동도 왕성하다. 이미 클래식카가 생활 속으로 파고들었음을 실감한다.”
한두 대면 모를까, 수십 대의 올드카를 사들이는 모습에 놀라 당신을 거의 미친 사람 취급한 이들이 있었다지?(웃음)
“과연 내가 그 정도로 깊이 심취했나? 그런 자문도 해보지만, 남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웃음) 그런데 나에겐 확고한 방향이 있다. 클래식카와 예술적 이벤트를 접목한 문화 공간, 소통과 사교의 장으로 카페의 성격을 강화할 참이다. 장기적으로는 주행 가능한 고품격 클래식카를 더 확보해 소(小)박물관으로, 또는 클래식카의 성지로 키울 계획이다.”
내친김에 한 걸음 더 들어가겠다는 얘기다. 늘 재즈 음악이 흐르는 이 카페엔 예술적 분위기가 감돈다. 그림과 사진과 음악으로 자기 세계를 구축한 전방위 예술가 문순우가 조력자로 나서 콘셉트를 제공하고 있다. 클래식카의 문화적 가치를 잘 알아서다. 문순우의 절친인 원로 재즈피아니스트 신관웅도 나섰다. 그는 토요일마다 재즈를 연주해 분위기를 달군다. 이쯤이면 다이내믹한 항진이다.
<이 기사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BRAVO My Life) 2021년 9월호(VOL.81)에 게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