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딸의 치매 할머니 간병기, “증상 완화보다 ‘존중’이 먼저”

기사입력 2024-12-24 09:09 기사수정 2024-12-24 09:09

[명사와 함께하는 북인북] 롱롱TV, 김영롱 작가

북인북은 브라보 독자들께 영감이 될 만한 도서를 매달 한 권씩 선별해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해당 작가가 추천하는 책들도 함께 즐겨보세요.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도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는 할머니의 모습에 자신감이 붙어서 다시 한번 카메라를 켜봤다.

“할머니! 비디오 보는 사람들한테 ‘또 만나!’ 하고 인사해볼까?”

할머니는 앞니 빠진 틀니가 훤히 보이도록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또 만나!”

나는 카메라 뒤편에 서서 함께 웃었다.

내가 사랑하는 노병래 할머니는 아직 거기에 있었다.

-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 119p


치매 중기 진단을 받은 94세 노병래 할머니와의 일상을 전하는 유튜브 ‘롱롱TV’. 손녀이자 채널 관리자 김영롱 작가는 영상을 보는 이들의 마음 한켠에 따스한 씨앗이 움트게 했다. 신간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는 그간 활동에 대한 사정과 쉽지 않은 진심을 빼곡히 담았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는 할머니 노병래, 엄마 구숙희, 손녀 김영롱으로 이루어진 삼대 가족의 일상과 그 이면을 풀어낸 에세이다. 할머니의 치매 판정, 유튜브 채널 ‘롱롱TV’ 활동을 기점으로 변화한 과정을 손녀의 눈높이로 전한다.

채널에는 간간이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사람들 같다’는 댓글이 달린다. 하지만 그들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와 다짐이 필요했다. 김 작가는 텅 비어가는 할머니와 돌봄에 지쳐가는 어머니의 갈등을 바라보며 뒤엉킨 원망을 품거나 질책하기도 했다.

문득 ‘서로 의미 없는 생채기를 내며 지내기보다, 남은 시간 동안 재밌는 걸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담 없이 시작한 유튜브를 계기로 서먹했던 사이가 옛날처럼 가까워졌다. 흐릿해지던 할머니의 세상이 확장되고, 14만 구독자의 응원으로 매주 웃을 일이 생겼다. 영상을 여러 번 돌려 보며 몰랐던 표정을 알아차리게 되고, 제 상처만 들여다보던 시선이 상대의 상처로 향했기 때문일 테다. ‘저 사람도 얼마나 아팠을까?’를 헤아리다 보니 지금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이 책은 치매 앓는 할머니를 돌보는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사랑하는 방법을 잊은 이들에게, 그 감정 자체가 낯선 이들에게 그저 한 사람을 찬찬히 바라보기만 해도 진심이 전해질 수 있음을 말한다. 너무나 익숙해서 외면했던 소중한 얼굴을 오래 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

▲김영롱 작가의 저서와 사인(브라보 마이 라이프)
▲김영롱 작가의 저서와 사인(브라보 마이 라이프)

우주에서 작은 섬 되기까지

“우리 영롱이 울리는 놈들은 망태 할아버지한테 던져버릴 거니께 그런 줄 알어!”

친구들과 놀다 울기라도 하면, 어디선가 할머니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며 등장했다. 동네에서도 유별나기로 자자했다. 그 탓(?)에 김 작가는 삶의 대부분을 할머니 곁에서 보냈다. 할머니가 차려준 밥, 고아준 사골국을 먹고, 다려준 교복을 입었다. 하지만 머리가 커지며 집 바깥에서 벌어지는 시끌벅적한 일, 색다른 구경거리에 호기심이 생겼다. 집은 그저 의식주를 해결하는 일차원적인 공간, 할머니는 늘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당연한 존재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의 알 수 없는 행동과 말이 반복됐다. 돈을 훔쳐갔다는 의심, 과도한 귀가 단속. 할머니가 이상해졌다는 생각은 했지만 ‘나이 들면 아이가 된다’며 불안을 잠재웠다. 치매를 알리는 서막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할머니와 엄마의 말다툼이 점점 ‘그러려니’ 할 수준을 벗어났어요. ‘미치겠다’, ‘지겹다’ 말하는 엄마와 ‘내가 죽어야지’로 상황을 끝내는 할머니. 나름 조정한답시고 끼어들었다가 본전도 못 찾고 찌부러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증상이 대수롭지 않은 에피소드로 여겨질 즈음, 매일 소파에 앉아 바깥 구경을 하던 할머니가 갑자기 30년 가까이 산 동네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여기서 얼마나 살았냐’며 낯설어했다. 다음 날 바로 진료실을 찾은 결과는 알츠하이머성 치매 중기.


할머니의 세계는 점점 좁아지더니 어느새 작은 섬과 같아졌다.

특별한 날에만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축제를 벌이는 섬,

사람들이 지친 얼굴로 떠나고 나면 그전보다 더 적막해지고 마는 외딴섬이 되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할머니의 치매는 세상과의 소통이 멈춰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던

뇌가 웅크리면서 시작된 병이자 지독한 외로움에서 시작된 병이라는 걸.

-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 69p


유튜브? 못 먹어도 고!

치매는 서서히 그 영역을 넓혀가며 웃음을 앗아갔다. 약 먹기, 목욕하기 등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도 할머니에게 그렇지 않은 일이 됐다. 기저귀 실수, 폭언 증상이 나타날 때면 가족의 신경이 곤두섰다. 김 작가는 ‘할머니를 다 돌보고 나면 엄마를 돌봐야 할 때가 찾아올 텐데, 결국 어른들만 돌보다가 끝날 내 인생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하는 억울함이 들었다. 엄마와 서로의 스트레스를 저울질하고 소리치며 무려 4년을 보냈다.

“이대로는 안 되겠더라고요. 이제까지의 세월과 추억, 사랑이 변질되지 않기 위해 뭔가가 필요하다 느낄 때 문득 유튜브가 떠올랐어요. 한 달을 망설이다 쿠팡에서 9790원짜리 삼각대를 주문했죠. 할머니가 화투판에서 하던 말을 떠올리면서요. ‘에라이, 못 먹어도 고다!’”

고민 끝에 돌입한 첫 촬영.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다 ‘어떤 말이든 하고픈 말을 해보라’는 주문에 할머니는 물 흐르듯 술술 입을 움직였다. 귀가 어두워서, 좀 전에 들은 말을 잊어서 자꾸 되묻는 통에 대화다운 대화가 줄어든 지 오래라 사라진 줄 알았던 ‘우리 할머니’는 여전했다.

“이상행동과 실수에만 집중하고, 자주적인 행동을 기대하진 않았어요. 병은 할머니의 일부일 뿐인데 말이에요. 정체성과 감정은 언제든 발견할 수 있었어요. 우리 가족이 겪은 힘듦의 해결책은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 게 아니라, 관점을 바꾸면 되는 간단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싶었어요.”

기억이 사라져도 지킬 것

하나둘 촬영한 결과물을 보다 보니 금방 깨달았다. 무채색이 된 줄 알았던 그 내면은 생각보다 훨씬 더 생동감 넘치는 색을 품고 있었다. 김 작가는 방긋방긋 웃는 할머니에게 예쁘다는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인상 쓰고 집안일만 하다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여니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기뻐했어요. 묵혀왔던 갈증이 해소되는 기분이 들어 카메라도 게을러질 수가 없었죠. 할머니는 원래 말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고 외향적이라 유튜브 활동이 긍정적인 작용을 한 것 같아요. 실제로 기저귀 실수도 줄었거든요. 의사 선생님 말에 의하면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살아갈 이유가 생기는 것이 인지능력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고요.”

할머니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엄성과 개별성을 지켜주려 노력하면서 변화는 시작됐다. 김 작가는 어쩌면 삼대가 지나는 터널의 끝이 아름답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여정이 절망스럽지만은 않다는 것, 중간에 해가 들어오는 공간도 있다는 걸 알게 돼 이제는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당사자를 배제하지 않고, ‘만약 나라면 어떨까’ 곱씹어보려 해요. 할머니의 마지막을 겁내면서 손 놓고 있기보다는 찰나를 아끼며 웃는 게 좋고요. 유튜브를 통해 할머니는 세상과 연결된 기분을 느꼈던 것 같아요. ‘영롱이는 모든 걸 일러주고 가르쳐주는 내 눈’이라 말하지만, 어쩌면 서로가 눈이 돼줬을지도 몰라요. 저에게 영상 제작, 책 집필, 강연 등 뜻밖의 순간을 만나게 해줬거든요. 글을 쓰면서 힘들기도 했지만, 엉킨 기억과 얼룩진 감정을 털어내고 씻어내며 한층 더 성숙할 기회가 됐어요. 언젠가 겪어야 할 그날이 오면, 밝고 행복하게 할머니를 보낼 수 있길 바랍니다.”

김 작가가 ‘우리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썼다’ 하니, 할머니는 어제도 그제도 했던 말을 하며 활짝 웃었다고 한다.

“영롱이 덕에 내가 떴구먼!”

(브라보 마이 라이프)
(브라보 마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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