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우 서영주, “오직 뮤지컬만” 우직함으로 채운 33년

기사입력 2024-12-31 08:24 기사수정 2024-12-31 08:24

‘명성황후’ 30주년, 고종서 흥선대원군으로 변신… “역사극 통해 현재에 감사”

(오병돈 프리랜서)
(오병돈 프리랜서)

뮤지컬 ‘명성황후’가 2025년 1월 서울에서 30주년 기념 공연을 펼친다. 작품에 참여하는 배우 서영주에게 ‘명성황후’ 30주년이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1995년 초연부터 시작해 여러 시즌에 출연한 그는 “저의 20~30대 시절의 피땀과 열정이 녹아 있는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서영주와 ‘명성황후’는 동반 성장을 이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연부터 2012년 공연까지는 대부분의 시즌에 참여했다. 고종 역을 맡아 호소력 짙은 연기를 보여줬고, 아직도 그의 대표 캐릭터 중 하나로 고종이 언급된다. 그런 그가 관객의 오랜 기다림에 응답하듯 ‘명성황후’로 돌아온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 이번에는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연기하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다.

“초연부터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30주년 기념 공연에도 함께하게 되어 매우 뿌듯하고 감사합니다. 한편으로는 30주년이라는 말이 무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더욱 열과 성을 다해 연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뮤지컬 연습이 한창인데, 고향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에요. 연습실에 있다 보면 과거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죠.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과거 연습실의 땀 냄새, 습도, 분위기 등이 다 떠오르더라고요.”

나이 들어 만난 흥선대원군

“정말 흥선대원군 연기가 처음이에요?”

‘명성황후’를 연습하던 서영주는 한 후배에게 이런 질문을 들었다. 10여 년 만에 출연하는 작품이고 역할이 바뀌었지만, 그는 뮤지컬 넘버(음악)와 동선 등을 거의 다 기억하고 있었던 것. 연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스스로를 보면서 그 역시 ‘명성황후’에 대한 애정이 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부분의 배우는 공연을 마치고도 자신이 맡았던 작품과 역할에 대해 계속 생각해요. 10년이 지났든, 20년이 지났든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때 그 연기가 아쉬웠던 이유는 무엇일까’, ‘목소리를 다르게 냈으면 좋았을까’ 하는 거죠. 끈을 계속 놓지 않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흥선대원군 연기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익숙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고종에서 흥선대원군이 된 건 나이 듦에 따른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생각하고, 아쉬움은 없어요. 어떻게 해야 주어진 역할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연습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으로서 ‘명성황후’ 공연의 관전 포인트를 묻자, “흥선대원군, 고종, 명성황후 세 사람의 갈등과 관계에 주목해달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작품을 맡으면 역할을 좀 더 잘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 배경지식 공부를 철저히 한다. 원작을 찾아보는 것은 물론이고, 관련 논문, 도서, 영화, 다큐멘터리 등을 다 찾아본다. 그러다 보니 현재는 ‘명성황후’의 배경인 조선 말기 역사만큼은 빠삭하게 알고 있다.

“과거 제가 ‘명성황후’에 출연할 당시에는 대사가 없고 노래로만 하는 ‘성스루’(Sung-through) 뮤지컬이었어요. 2021년 공연부터 대사가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대사가 있으니 이야기가 더 풍부해졌고 이해하기 쉽게 전달된다고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는 역사가 있잖아요. 흥선대원군이 우유부단한 성격의 고종을 허수아비로 삼았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죠. 왕은 고종이지만 실권자로서 섭정을 했고, 며느리 명성황후도 그가 간택했을 정도죠. 그런데 며느리가 예상치 못하게 외척 세력을 조정에 들여와 흥선대원군과 세력 싸움을 벌인 겁니다. 고종은 아내의 말에 꼼짝 못 하면서 살게 되고요. 나중에는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죠. 역사를 공부하고 연기하다 보니 매우 흥미로워요.”

(오병돈 프리랜서)
(오병돈 프리랜서)

애국심과 카타르시스

서영주는 2022년부터 올해 여름까지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그린 뮤지컬 ‘영웅’으로 무대에 올랐다. 제국주의적 욕망을 드러내는 이토 히로부미 역을 실감 나는 연기로 소화해 관객의 호평을 받았다. ‘영주 이토’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문득 ‘영웅’에 이어 ‘명성황후’까지 역사극에 출연하는 배우의 심경은 어떠할지 궁금했다. 애국심이 고양되고 책임감이 뒤따르지 않을까.

“이토를 연기하면서 화도 나고 울분이 차오르기도 했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일제강점기 시대를 연기하는데 당연한 감정이 아닐까 싶어요. 역사극을 하면 역사 공부도 하고 과거의 상황을 더 알게 되면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더라고요. 선조들이 남겨주신 땅에서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의 또 다른 대표 캐릭터로는 ‘스위니 토드’의 터핀 판사가 거론된다. 주인공을 불행으로 몰아넣는 인물로, 수많은 뮤지컬 캐릭터 가운데에서도 극악무도한 악역으로 꼽힌다. ‘캐릭터는 싫지만 연기는 좋다’는 관객의 반응을 많이 받았다는 그는 “악역 연기를 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고 재밌다”면서도 “관객들의 생각과 달리 나는 악역이 아닌 멜로 전문 배우”라고 말했다.

“20대의 대표작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어요. ‘명성황후’의 고종도 로맨스 연기가 있었고요. 그러다 보니 당시에는 멜로 전문 배우로 통했습니다. 사실 지금은 주변에서 모두 아니라고 하지만, 저는 멜로 전문이라고 주장해요. 개인적으로 멜로 감성도 풍부하다고 생각하고요.(웃음) 남녀노소 불문, 그리고 연출진에게 가장 많은 호평을 받은 것은 ‘둘리’에서 고길동 연기를 했을 때 같아요. 2001년이었는데, 그땐 ‘고길동 그 자체 같다’는 말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중년의 나이가 되고 보니 고길동의 행동이 이해되고, 그 인물에 공감이 되더라고요. 기회가 된다면 고길동 연기를 다시 해보고 싶어요. 그때와는 또 다른 고길동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뮤지컬 배우로 외길을 걷고 있지만, 서영주는 서울예술대학교 영화과 출신이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예체능 계열로 진학할 생각이 없었다는 그는 재수하면서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한편,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연기를 배워본 적도 없지만 배우가 자신의 길이라는 일종의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제가 굉장히 외향적이었어요. 앨범 속 사진을 보면 유독 저만 포즈가 다르고 표정이 다양하더라고요. 그리고 운동도 잘했고, 악기도 잘 다뤘고요.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쌓아왔던 것들을 생각하니까 예체능계로 진출하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제가 영화도 좋아했거든요. TV에서 하는 ‘주말의 명화’도 다 챙겨봤고, ‘007’ 시리즈, ‘나폴레옹 솔로’ 등의 영화를 특히 좋아했죠. 영화 속 주인공들의 모습이 멋있어 보여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영화과에 진학한 거죠.”

(오병돈 프리랜서)
(오병돈 프리랜서)

33년 차 배우의 희로애락

대학 졸업 후 서영주는 연기를 배워보고자 1991년 연극 ‘아워 타운’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러다 선배들의 추천을 받아 1990년대 초 뮤지컬 무대로 발을 옮겼다. 첫 작품은 에이콤에서 제작한 ‘아가씨와 건달들’이다. 에이콤은 ‘명성황후’, ‘영웅’ 등의 제작사로 서영주와 오랜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활동을 시작한 그는 뮤지컬 1세대 배우 남경주, 최정원을 잇는 2세대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황무지 시절부터 공연계 부흥기까지 꿋꿋하게 무대를 지킨 그는 작품의 질도, 공연 문화도 점점 좋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2002년 당시 뜨거웠던 열기를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월드컵이 한창인 가운데 7개월 동안 ‘오페라의 유령’을 공연했어요. 월드컵 기간과 겹쳤는데도 전회 매진을 기록했죠. 그 시기에만 할 수 있는 재밌는 일도 있었어요. 공연 끝나고 커튼콜 할 때 관객들에게 그날의 경기 결과를 알려드리곤 했어요. 4강 진출 소식을 전했을 때 관객들의 반응은 가히 역대급이었습니다. 그런 귀한 경험을 언제 또 해보겠어요? 인파로 인해 집에 돌아가기 힘들기도 했지만 그저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간이 찬란하고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슬럼프와 고독의 시간도 있었다. 배우에게는 작품이 없을 때 오는 무기력과 조바심이 상당하다. 주인공을 도맡아 했던 그는 중년이 되면서 역할이 제한됨을 느꼈고 과도기를 겪었다. 코로나19 때도 어쩔 수 없이 2년간의 공백기를 보냈다. 너무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 덕에 그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저는 작품이 없을 때가 슬럼프라고 생각해요. 30대에 한 번, 40대에 한 번 그런 시기가 있었죠. 그때는 정말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영화만 계속 봤어요. 이미 본 영화를 보고 또 봤죠. 영화를 몇 번씩 보면 숨어 있는 감독의 연출 의도, 배우들의 디테일 등이 다 보여요. 그런 과정을 통해 연기 공부를 하고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었죠. 코로나19로 인한 휴식기 때는 운동을 많이 했어요. 몸도 건강해지고 생각 정리도 많이 됐죠. 무대에 다시 설 날을 기다리며 스스로를 다잡았어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는 30년 넘게 한길을 걷고 있다. 오랜 시간 뮤지컬 배우로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는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가는 단순한 성향 때문에 지금까지 왔다고 생각한다”면서 재수생 시절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 평생 연기하는 것이 결정됐다고 덧붙였다. 오늘도 뮤지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배우 서영주. 무대 위에서 빛나는 그의 모습 뒤에는 긴 시간의 노력과 열정이 담겨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중간중간 위기도 있었지만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운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요. 저는 단순한 사람이라 앞으로 꼭 이뤄야겠다고 생각하는 특별한 목표는 없어요. 그저 매 공연 무탈하게 잘 끝내는 것이 목표라고 하면 목표 같아요. 좀 더 욕심내어 바람을 말해보자면, 서영주라는 이름만으로 관객들이 공연을 찾는 배우가 되는 것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무대에서 열심히 연기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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