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편의 공연을 보고 난 후 머릿속에 자꾸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배우의 연기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 수도 있고, 캐릭터의 상황 또는 대사에 공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창 공연 중인 뮤지컬 ‘베르테르’에서 배우 이영미는 관객에게 그러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베테랑 배우인 그는 오르카 역을 맡아 또 한 번 연기 변신에 성공했다.
“오르카의 대사에 녹아 있는 가치관, 철학, 고민 등이 요즘의 제가 하는 생각과 정말 비슷해요. 연기하면서 공감이 많이 되었어요.”
‘베르테르’는 괴테의 명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원작으로 하며, 한 남자의 순수한 사랑과 그로 인한 고통이 한 편의 서정시처럼 펼쳐지는 작품이다. 이영미가 연기하는 오르카는 마을의 펍 주인으로 베르테르 옆에서 그를 위로하고 조언하는 역할이다.
뮤지컬 ‘서편제’를 함께했던 조광화 연출가로부터 러브콜을 받아 출연을 결정한 이영미는 대본 속 오르카를 꼼꼼히 분석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현재의 자신과 오르카가 너무나도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답게 오르카를 잘 연기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오르카의 넘버(노래) 중에 ‘왕년의 사랑’이라는 곡이 있어요. ‘지나 보면 별거 아냐. 나중엔 우스워. 추억을 까먹으면서 사는 게 인생’이란 가사가 있는데, 공감이 많이 되더라고요. 저도 사랑이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고, 뜨겁게 사랑한 적도 있었죠. 그런데 나이를 먹고, 이제는 사랑보다 더 소중한 가치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만약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도 지금 이 시기의 저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 같아요.”
베르테르와 사랑
이영미는 ‘베르테르’를 한마디로 ‘젊음’이라고 정의했다. 누군가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오직 젊을 때만 가능한 사랑이 표현됐다고 생각한다. 또한 ‘베르테르’는 피아노 1대와 현악기 10대로 구성된 11인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작품이다. 이영미는 “아름다운 선율 덕에 베르테르와 롯데의 사랑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표현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원작이 워낙 고전 작품이잖아요. 약혼자가 있는 롯데와 베르테르의 짝사랑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데, 문학적인 관점에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원체 사랑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으니, 이런 사랑도 있을 수 있겠죠. 저는 베르테르의 순애보적인 사랑이 어릴 때 할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이라고 생각해 젊음이라고 표현한 거예요. 더 나아가 젊음에 관해 드는 생각이 있어요. 젊음과 사랑, 그리고 꽃은 한때 찬란하기에 더욱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삶 또한 유한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라고 생각하고요.”
20년 전 ‘베르테르’를 관객으로 본 적 있다는 이영미는 이번에 오르카 역을 맡아 연기하면서 캐릭터의 깊이감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특히 마을 사람들에게 따뜻한 엄마 같은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그는 대본에 없는 대사를 추가하며 캐릭터의 완성도를 높였다.
“오르카는 실연의 상처로 아파하는 베르테르를 위로해주는 한편, 사랑에 빠져 범죄를 저지른 카인즈도 품어주는 인물이죠. 저는 외롭게 자란 카인즈에게 오르카는 엄마 같은 존재라고 해석했어요. 그래서 대본에는 ‘카인즈를 숨겨준다’라는 지문만 있는 대목에서 저는 화를 내고 소리 지르는 대사를 추가했죠. 또한 법관 알베르트가 찾아왔을 때, 오르카가 카인즈를 ‘용서해달라’가 아닌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얘기해요. 여기서도 부모의 마음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제 생각을 전달하자 연출진들이 허락해주셔서 실제 무대에서도 연기할 수 있었죠.”

더 깊어지는 소명 의식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작품을 대하는 진심과 삶의 철학이 느껴지는 이영미는 “나이 들면서 이렇게 된 것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어 “30대까지 내게 연기란 플레잉이었고, 무대는 놀이터였다”면서,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서 인생의 변곡점을 맞았다고 밝혔다.
“출산 후 아이 엄마라는 새로운 직업이 생겼어요. 이제 작품 활동은 본연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아이 돌봄을 내려놓고 일하는 것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가 필요했어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 또는 재밌으니까 같은 이유로 일한다고 하면 스스로 납득되지 않더라고요. 더 충분한 의미가 있어야 할 것 같았죠. 그러다 보니 작품을 대하는 마음이 더욱 진지해졌어요. 연기가 즐겁다는 것은 지금도 변함없지만, 생각의 깊이가 달라졌다는 거죠.”
이화여대 재학 시절 대학가요제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1998년 가수로 데뷔한 이영미는 2000년 뮤지컬 배우로 전향했다. 2002년 ‘록키호러쇼’를 기점으로 비중 있는 배역을 맡으며 무섭게 성장한 그는 무대에서 연기하는 즐거움에 빠져 쉼 없이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만삭의 몸으로도 무대에 올랐을 정도다.
“임신 7~8개월까지는 무대에 섰어요. 아이를 낳은 뒤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지 가늠이 안 됐거든요. 출산을 앞둔 시기에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막달라 마리아로 출연 제안이 들어왔어요. 무조건 한다고 했죠. 그런데 아들을 낳고 한 달도 안 되어 프로필 촬영을 하게 된 거죠.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라 너무 춥고 힘들더라고요. 복귀가 너무 빨랐다고 그제야 느꼈죠. 그 작품 이후 ‘벽을 뚫는 남자’, ‘마리아 마리아’를 연달아 했어요. ‘마리아 마리아’를 할 때는 아이가 돌쯤 됐는데, 연습하다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집에 있는 아이가 너무 그립고, 엄마로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아이 곁에 있고 싶어 자발적 공백기를 가졌지만, 1년이 지나자 다시 무대가 그리워졌다. 그는 “어느 날 남편이 제가 표정도 잃고 변해간다면서 제발 나가라고 하더라”며 “마침 남편이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내가 작품에 출연해도 될까’라고 물었다”라고 말했다. 이영미의 남편은 김태형 연출가다. 이영미는 그렇게 2017년 뮤지컬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로 무대에 복귀했다. 정해진 대본 없이 배우와 관객이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독특한 작품이다. 이영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인 여성 1인 뮤지컬 ‘Mee on the Song’(2017년)의 연출 또한 남편이 맡았다.
“남편하고는 뮤지컬 ‘브루클린’을 하면서 만났어요. 처음 만날 때부터 나와 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살아온 인생이 비슷했고, 서로 말하지 않아도 어떤 고민과 고난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죠. 그리고 인연이 될 거란 것도 느꼈던 것 같아요. 제가 당시 30대 중반이었는데 앨범이 나와서 지인들에게 들어보라고 돌렸어요. 다들 형식적인 화답을 했지만, 남편은 달랐어요. 노래를 다 들어본 것은 물론이고 저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고, 따뜻함을 주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남편은 이 세상에서 저를 가장 명확히,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에요.”

무대를 즐기고, 사랑하라
2000년 데뷔한 이영미는 ‘베르테르’와 같이 25주년을 맞았다. ‘베르테르’ 출연은 이번이 처음이며, 이처럼 그는 매번 끊임없는 도전으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2023년에는 뮤지컬 ‘데스노트’에 출연, 여자 사신 ‘렘’ 역에 도전해 많은 호평을 이끌었다. 이영미는 “캐릭터가 끌려야 작품에 출연하는 것 같다”면서 “기본적으로 상처가 있고, 그 상처를 승화하는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밝혔다.
“렘이 대사가 많지는 않지만, 그 캐릭터가 갖고 있는 깊이감이 좋았어요. 죽지 않고 사는 사신인데 인간을 사랑하게 되어 죽음을 맞이하죠. 그런 마음을 연기로 표현할 수 있어서 재밌었어요. 지금까지 제일 많이 한 캐릭터는 ‘헤드윅’의 이츠학이에요. 애정이 있을 수밖에 없죠.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지킬 앤 하이드’의 루시, ‘맨 오브 라만차’의 알돈자,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막달라 마리아를 좋아합니다.”
이영미는 뮤지컬 ‘렌트’의 대사 ‘No Day, But Today(우리에게 내일은 없어, 오늘 오직뿐)’를 언급하며, 현재 삶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즐기면서 무대에 오를 계획이다. 연기하는 자신이 즐겁고 행복해야 관객이 느낀다고 생각한다. 무대 위에서 그가 반짝이는 이유는 이런 신념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난해 동생을 먼저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냈어요. 그러다 보니 인생, 삶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죠. 제가 내린 결론은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하고 싶은 거 하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고…. 뮤지컬도 마찬가지 같아요. 즐기면서 연기하고 싶어요. 그리고 관객들이 무대에서의 저를 다양하게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떤 사람은 ‘그 배우 너무 귀엽던데’라고 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노래를 되게 잘하던데’라고 할 수도 있죠. 그런 다양한 이야기가 하나로 뭉쳐졌을 때 비로소 배우 이영미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