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익숙한 사람과 가장 어려운 대화

입력 2025-11-24 06:00

[강원국의 어른 소통법]

“요즘 남편과 자주 대화하세요? 주로 무슨 얘기 하세요?” 강연장에서 이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은 십중팔구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이내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그러면서 “별 얘기 안 해요”, “할 말이 없어요”, “말 안 한 지 오래됐어요”라고 대답은 늘 비슷하다. 그 대답 속에는 체념과 함께 왠지 모를 쓸쓸함이 배어 있다.


(일러스트 윤민철)
(일러스트 윤민철)


사람들은 하루에 배우자와 몇 마디나 대화를 나눌까. 그 대화는 서로를 더 가깝게 할까, 아니면 점점 더 멀리할까. 내가 아내와 함께한 세월도 어느덧 36년이 넘었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서로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 정도다. 그런데 묘하다.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내인데도, 정작 대화가 가장 어려운 사람도 역시 배우자이니 말이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이유

저녁 8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우리 집 풍경은 같은 장면의 반복이다.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한 사람은 TV를 보고, 또 한 사람은 휴대전화를 들여다본다. 특히 아내는 요즘 인공지능과의 대화에 푹 빠져 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무엇을 얻는가. 위로를 받거나 용기를 얻기도 하고,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인다. 닥친 문제와 갈등의 해결책을 찾기도 하고, 그저 심심함을 달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걸 인공지능이 충족해준다. 남편인 나보다 나은 셈이다.

그러다 보면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침묵의 시간이 흐른다. 그 시간이 수십 분을 넘기도 한다. 그때 어느 한 사람이 “오늘 어땠어? 재밌는 일 없었어?”라고 물으며 그 정적을 깨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냥 그랬어” 혹은 “별일 없었어”로 늘 똑같다. 대화는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그렇게 끝난다.

사랑해서 결혼했고 수십 년을 함께 살았는데, 왜 우리는 대화에 목마를까? 상담실을 찾는 수많은 부부가 토로하는 고민은 “대화가 안 돼요”, “할 말이 없어요” 등 한결같다.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살았으니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믿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가장 많이 오해하고, 가장 쉽게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가 바로 부부다.


대화도 기술이 필요해

중년에 접어들면 자녀 독립, 직장 은퇴 등으로 부부는 다시 둘만의 시간을 마주한다. 따라서 오랜 기간 각자의 삶에 몰두하느라 소원해졌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때 대화가 단절되면 부부 사이의 정서적 거리가 멀어지고, 고독감이나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

중년 부부에게는 젊은 시절과는 다른 얘깃거리가 필요하다. 첫째, 신체 변화와 건강에 관한 이야기다. “요즘 몸이 예전 같지 않아”라는 말을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보자. 갱년기 증상, 건강검진 결과, 운동 계획 등을 함께 논의하며 서로를 챙기는 마음을 표현하다 보면 자연스레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둘째, 경제적 계획과 노후 준비 등 현실적인 얘기도 필요하다. 은퇴 후 생활비나 보험·연금 등 현실적인 문제들을 대화의 주제로 삼되, 불안감보다는 함께 계획해나가는 즐거움에 초점을 맞춘다.

셋째, 부모 부양 등 가족관계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양가 부모님의 건강과 돌봄 문제는 중년 부부에게 민감하지만 피할 수 없는 주제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아가는 대화가 필요하다.

넷째, 자녀 독립 후의 삶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빈둥지증후군’을 함께 극복하고, 이제 다시 부부 둘만의 시간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낼지 계획해본다.

부부관계를 해치는 대화 습관도 피해야 한다. 비난, 침묵, 설교, 과거 들추기는 대화를 단절시키는 치명적인 습관이다. 이 네 가지만 피해도 부부 싸움을 절반 정도 줄일 수 있다. 우선 상대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말은 대화를 단절시키는 가장 위험한 방법이다. “당신은 왜 정리를 안 해?” 대신 “우리 함께 정리하면 좋겠어”와 같이 협력적인 태도로 바꾸어 말한다. “당신은 항상 그래!”, “당신 때문에 내가 못 살아” 등 상대를 몰아세우며 힐난하거나 “이기적이다”, “게으르다”처럼 인신공격적인 말을 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인신공격은 칼날이 되어 상대의 마음을 후벼 판다.

둘째, 침묵하거나 대화를 회피하는 태도도 문제를 키울 수 있다. 갈등 상황에서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대화를 회피하는 것은 갈등을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상대방은 무시당했다고 느끼거나 혼자 고민을 떠안게 돼 관계가 더욱 악화될 수 있다. 당장 감정을 표현하기 어렵다면 “지금은 화가 나서 말하기 어려우니 조금 있다 얘기하자”고 솔직히 말하는 편이 낫다.

셋째, 상대를 가르치려 들거나 설교하는 말도 피해야 한다. 배우자는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때 기분이 어땠어?”처럼 감정을 묻고 공감하며 존중해야 한다. 존중 없는 가르침은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관계를 수평이 아닌 수직적으로 만든다. 부부는 동등한 관계임을 인정하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며 함께 해결책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 과거의 잘못을 계속해서 들춰내는 말도 삼가야 한다. 현재의 갈등 상황에서 과거의 잘못을 반복적으로 들추는 것은 문제 해결보다 감정의 골만 깊게 한다. 한번 사과하고 용서한 일이라면 다시 꺼내지 않는 것이 좋다. 과거를 무기 삼지 않는 것이 지혜다.


부부의 대화가 어려운 이유

첫째, 의미 있는 대화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다. 좋은 대화는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둘째, 익숙함이라는 착각 때문이다.

호기심이 없으면 질문이 사라지고, 대화는 단절된다. 세상에 상대의 마음을 100% 아는 사람은 없다. 배우자도 마찬가지다.

셋째, 상처에 대한 두려움도 대화를 가로막는 주요 원인이다.

하지만 대화는 상처를 피해서가 아니라, 상처를 감당하며 더욱 깊어진다.


(일러스트 윤민철)
(일러스트 윤민철)


함께할 수 있는 시간 만들기

그나마 우리 부부가 대화의 명맥을 이어올 수 있는 데는 몇 가지 비결이 있다. 우선 대화를 할 수밖에 없는 둘만의 시간을 갖는다. 바로 함께하는 산책, 그리고 협업이다. 내가 하는 강의와 글쓰기에 아내가 동참한다. 강의 가는 길에 동행하고, 내가 쓴 글을 읽어준다. 그뿐 아니라 정치적 지향이 비슷하고, 즐겨 보는 유튜브 채널도 같다. 대화의 소재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이 밖에도 암묵적으로 상대 말을 건성으로 듣지 않고 새겨듣고, 말하지 않는다 해서 토라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다시 말해 침묵할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이다. 상대가 거절한다고 상처받지 않고, 언제든 마음껏 거절할 수 있음을 안다. ‘절대’, ‘늘’과 같은 단정적 표현은 삼간다. 상대가 불편해하는 집안 얘기는 들추지 않는다. 상대를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이것 해줄 수 있어?”, “이것 해도 돼?”처럼 부탁한다. “그걸 꼭 말해줘야 알아?” 같은 말로 상대를 공격하지 않는다. 말해주지 않으면 몰라도 된다. 말을 끊지 않는다. 말하는 ‘사실’보다 그 안에 담긴 ‘느낌’을 들으려 노력한다. “그것도 못 해?”, “당신은 몰라도 돼”와 같이 상대를 무시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성별이 다른 상대방이 나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상대가 하는 사회관계통신망(SNS)에 수시로 들어가 ‘좋아요’와 ‘공감’을 표시한다. 카카오톡이나 문자와 같은 메신저 소통을 자주 한다.

무엇보다 아이 앞에선 싸우지 않고, 싸움은 하루를 넘기지 않는다.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에는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 “여기까지만 얘기하자”고 할 때 더 이상 꼬치꼬치 따지지 않는다. 감정 표출을 용인한다. 얼마든지 화낼 수 있으니 흥분하진 말자. 솔직한 게 능사는 아니다. 무책임하게 솔직하기보다는 상대를 배려하는 거짓말이 나을 수도 있다. 작은 일은 아내 말을 따르되 큰일은 서로의 의견을 충분히 개진한다. 아내는 공감과 감정 공유를 중시하고, 나는 문제 해결에 관심이 많다는 걸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타협하고 절충하고 합의한다. 결과가 안 좋을 때 남을 탓하거나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다. 상대가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은 묻지 않고 비밀을 지켜준다. 대외적으로 상대방의 변호인이 되어준다.


대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대화가 끊긴 부부는 낯선 침묵 속에 놓이게 된다. 사라진 대화를 다시 시작하려면 작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나 전달법(I-message)’이다. 상대를 탓하거나 비난하는 대신,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중심으로 표현하며 의사소통하는 것을 말한다. “항상 왜 이렇게 늦어. 좀 일찍 올 수 없어?”보다 “당신이 늦으면 너무 걱정되니 조금 일찍 와줘”처럼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다.

미국 심리학자 존 가트맨 박사는 부부 다툼을 일으키는 주요 요소로 비난, 방어, 경멸, 담 쌓기를 들었다. 이와 함께 행복한 부부는 ‘고마워’, ‘수고했어’, ‘잘했어’와 같은 긍정적인 말을 부정적 말보다 5배 이상 많이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행복한 결혼생활의 핵심으로 ‘서로를 향한 관심의 제스처’를 꼽았다.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사랑을 표현하는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며, 배우자의 손을 잡거나 어깨를 토닥이는 등의 작은 몸짓 하나가 대화의 출발점이 된다고 말한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몸에 익힌 대화법이 있다. 남의 말을 들을 때는 가급적 상대를 이해하며 들으려 했고, 동시에 핵심을 요약했다. 그리고 말하지 않은 내용을 유추하며 들은 후, 그 내용에 공감을 표했다. 다시 말해 남의 말을 이해, 요약, 유추, 공감하며 들었다. 말할 때도 의문, 의심, 반박, 거절을 염두에 두었다. 내 말의 뜻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상대가 의문을 갖지 않도록 말하려 했고, 의심하는 대목이 없도록 했다. 내 말에 대해 상대가 반박과 반론을 펼칠 대목은 없는지, 그리고 내 제안과 건의에 대해 거부할 상황을 가정해보고, 이를 무마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고민하며 말했다. 이는 아내와의 대화에서도 변함없이 적용됐다.

36년간의 결혼 생활을 돌아보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좋은 부부관계는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정원을 가꾸듯 꾸준한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의 핵심에는 바로 ‘대화’가 있다. 대화는 단순히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며, 함께 미래를 그려가는 과정이다. 때로는 상처를 주고받을 수도 있지만, 그 상처마저 함께 치유해나갈 때 진정한 부부가 된다.

중년 부부에게 대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남은 인생을 함께 걸어가야 할 동반자와의 소통이 단절된다면, 그보다 외로운 일이 어디 있을까. 오늘부터라도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하자. 작은 대화 하나하나가 모여 큰 사랑을 만든다. 그 사랑이야말로 중년을 넘어 노년까지 함께할 우리 부부의 가장 든든한 자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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