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잘 쓴 글은 없다. 잘 고쳐 쓴 글만 있을 뿐이다.” 이 말은 글 쓰는 사람에게 희망을 준다. 잘 고치기만 하면 잘 쓸 수 있다니. 잘 쓰기는 어렵지만, 고치는 것은 시간과 정성만 기울이면 누구나 잘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없는 걸 만드는 게 어렵지 있는 걸 고치는 것이야 쉬운 일 아닌가 말이다. 맞다. 고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 글에서 제안하는 작업만 충실히 하면 누구나 잘 고칠 수 있고, 결국 잘 쓸 수 있다.
글을 고치는 핵심은 세 가지다. 빼야 할 것은 빼야 하고, 빠진 것은 채워 넣어야 하며, 바꿀 것을 바꿔야 한다. 바꾸는 대상은 제목이나 어휘, 문장일 수도 있고, 문장이나 문단의 순서일 수도 있다. 이를 통해 글을 간결하고 정확하게 만들면 된다.
우선 자신이 쓴 어휘와 문장을 고쳐보자. 글의 가장 기본 단위는 어휘, 즉 낱말이다. 한 편의 글이 건축물이라면, 기초 자재인 낱말의 품질이 좋아야 튼튼하고 근사한 집을 지을 수 있다. 낱말은 무수히 많다. 그 가운데 그 자리에 딱 맞는 낱말이 있다. 문맥에 부합하는, 다시 말해 질이 좋은 그 낱말을 찾아 써야 한다.
어떻게 찾아 쓸 것인가. 포털사이트 국어사전을 활용하면 된다. 네이버 국어사전도 좋고, 다음 국어사전도 좋다. 글을 쓰면서 떠오르는 단어를 곧장 쓰지 말고, 포털사이트 국어사전에 쳐보자. 그러면 유의어들을 보여준다. 초등학교 시절에 배웠던 비슷한 말들 말이다. 예를 들어 ‘공부’를 치면 연구, 연마, 수업, 수학, 학문, 학습, 학업 등이 나온다. 그 가운데 문맥에 더 맞는 낱말을 골라, 그것을 쓰면 된다. 물론 모든 경우에 더 나은 낱말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대부분의 경우 애초 내가 떠올렸던 낱말이 문맥에 가장 잘 어울린다. 그래도 헛고생은 아니다. 내가 떠올린 낱말이 맞았다는, 더 나은 선택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자신 있게 그 낱말을 쓸 수 있다. 아울러 유의어들을 보면서 글을 쓰는 데 필요한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 횡재를 경험하기도 한다.
나는 두 가지 방식으로 포털사이트를 활용한다. 한 가지는 앞서 소개했듯이 글을 쓰면서 낱말 하나하나를 쳐보는 식이다. 통상 A4 용지 한 장 분량 글을 쓰면 10~20개 단어를 쳐본다. 그거 쳐보는 재미로 글을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시로 국어사전을 들락거린다. 딱 맞는 단어를 발견했을 때, ‘맞아, 이런 단어가 있었지. 안 쳐봤으면 어쩔 뻔했어. 역시 쳐보길 잘했어’ 하면서 스스로 힘을 내도록 북돋운다. 이 순간 내 어휘력이 일취월장하는 건 물론이다. 또 다른 방식은 생각나는 대로 다 쓴 후, 내가 쓴 어휘를 하나씩 국어사전에 쳐보는 방법이다. 처음엔 주로 이 방식을 사용했지만, 이제는 남의 글을 고쳐줄 때만 쓰고 있다. 내 글을 쓸 때는 더 나은 낱말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안달을 부려 첫 번째 방식으로 그때그때 찾아보면서 한땀 한땀 바느질하듯 쓰고 있다.
다음은 문장을 고칠 차례다. 써놓은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표현하고 싶은 내용이 머릿속에 뭉글뭉글 맴돌 뿐 문장으로 만들어지지 않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문장을 잘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세 가지가 아닐까 싶다. 첫째는 문장의 형식, 즉 문형에 대한 학습이 미진한 탓이다.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영어를 배울 때 문장의 5형식부터 익혔다. 국어 시간에도 제1유형:주어 + 서술어, 제2유형:주어 + 보어 + 서술어, 제3유형:주어 + 부사어 + 서술어, 제4유형:주어 + 목적어 + 서술어, 제5유형:주어 + 목적어 + 부사어 + 서술어에 관해 배웠다. 그런데 보어와 부사어의 차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영어의 문장 5형식은 지금도 줄줄 외우면서 말이다. 문형은 또한 주어 + 서술어의 개수에 따라 단문과 복문으로 나뉘고, 복문에는 중문(이어진 문장)과 포유문(안은 문장)이 있다.
나는 가급적 단문 쓰기를 권한다. 주어 + 서술어가 두 개 이상인 복문은 쓰기도 어렵고, 잘못 쓸 가능성도 높으며, 읽기도 편치 않기 때문이다. 문장을 잘 만들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문법 공부의 부족이다. 문법을 잘 알지 못하면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 즉 비문(非文)을 남발하게 된다. 문장의 구성 요소인 주어, 목적어(보어), 서술어가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문장을 잘 만들지 못하는 세 번째는 이유는 수사법 활용에 익숙하지 못해서다. 국어에는 무려 쉰 개가 넘는 수사법이 있고, 이를 잘 활용하면 문장이 쉽고 유려해진다.
문형, 문법, 수사법의 학습 부진에서 오는 세 가지 애로를 단박에 해결하는 길 또한 포털사이트 국어사전에 있다.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의 키워드를 포털사이트 국어사전에 쳐보면 ‘예문’이 뜬다. 그 낱말을 넣어 쓸 수 있는 문장을 다양한 예시로 보여준다. 어떤 낱말을 쳐도 예외 없이 예문이 뜨고, 다양한 문형과 수사법이 적용된 문법에 맞는 예시들을 볼 수 있으니 문장을 못 만들 이유가 없다. 써놓은 문장도, 문장에 쓰인 핵심 낱말을 쳐보면 얼마든지 더 낫게 고칠 수 있다. 그 낱말을 어떤 단어로 수식했는지, 주어와 서술어는 무얼 썼는지, 문장의 구성 성분 순서를 달리할 수는 없는지, 평서문으로 쓰인 문장을 의문문이나 감탄문, 명령문, 청유문 등으로 바꿀 순 없는지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어휘력과 문장력이 부족해서 잘못 쓴 글을 고치는 방법에 관해 알아봤다. 이제는 어휘와 문장을 포함해 총체적으로 고쳐볼 차례다. 나는 글을 쓰고 나면 대략 25가지를 체크해본다. 다음은 그 체크리스트다.
1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히 드러나는가.
2 재밌는가.
3 빼도 되는 내용은 없는가.
4 글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알맞은가.
5 오탈자는 없는가.
6 육하원칙에 충실한가.
7 문단 구분은 적절한가.
8 비슷한 내용의 중복은 없는가.
9 표절의 위험은 없는가.
10 근거를 대지 않고 주장한 부분은 없는가.
11 좀 더 구체적으로 써야 할 대목은 없는가.
12 빠트린 내용은 없는가.
13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은 없는가.
14 불필요한 부사나 형용사를 사용하진 않았는가.
15 전개 순서를 바꿀 필요는 없는가.
16 더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는 대목은 없는가.
17 상호 모순되는 부분은 없는가.
18 한 번만 읽고도 이해가 되는가.
19 비문은 없는가.
20 제목은 적합한가.
21 글이 독자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가.
22 독자에게 지적을 당한다면 어떤 내용 때문일까.
23 통계 수치 등 사실의 오류는 없는가.
24 다른 단어로 대체해야 하는 부분은 없는가.
25 지금까지 체크한 것 말고 놓친 부분은 없는가.
글을 고치는 방법은 다양하다. 자기 글을 자신이 고칠 수도 있고, 남에게 고쳐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고, 여럿이 모여 서로서로 고쳐줄 수도 있다. 자기 글을 자신이 고칠 때 중요한 것은 세 가지다. 첫째, 쓰고 난 뒤 잠시라도 묵혀뒀다가 고쳐야 한다. 쓰자마자 고치면 고칠 게 잘 보이지 않는다. 글을 쓴 필자에서 글을 읽는 독자로 변신할 시간이 필요하다. 독자의 눈으로 봐야 고칠 게 보인다. 나는 적어도 하루 정도 묵힌다. 시간이 허락하면 더 놔뒀다 고친다. ‘유혹하는 글쓰기’를 쓴 스티븐 킹은 6주 정도 묵혀놨다가 고친다고 한다.
둘째, 고칠 때는 오래 보는 것보다 여러 번 보는 게 중요하다. 잠깐씩 여러 번 봐야 한다. 여러 번 볼 때도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며 보면 더 좋다. 화장실에서도 보고, 카페에서도 보고, 사무실에서도 보자. 점심시간이나 출퇴근 시간에 볼 수도 있고, 새벽이나 늦은 밤에 볼 수도 있다. 컴퓨터 화면이나 휴대전화에서도 보고, 출력해서 종이로도 읽어보자. 눈으로만 보기도 하고, 소리 내 읽어도 보자. 술술 읽히면 잘 쓴 글이다.
셋째, 한 번에 하나씩 목적의식을 갖고 보자. 바꿔야 할 단어가 있는지 어휘에 주목하여 보고, 손 볼 문장은 없는지 문장을 눈여겨보고, 문단 단위로 떼어서 하나의 문단이 하나의 완결된 글인지 점검해보자. 나무가 아닌 숲의 모양을 보듯 전체 문맥을 살펴볼 필요도 있다. 위의 체크리스트에 있는 내용을 하나씩 점검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남의 힘을 빌려 글을 고칠 수 있다. 나는 글을 쓰고 나면 아내에게 소리 내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내 글을 읽는 아내의 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 부분이 어색한지, 어떤 부분을 고쳐야 할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무엇보다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이 곁에 대기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글 쓰는 두려움이 덜하다. 직장 생활 하는 사람은 상사가 이 역할을 대신해준다. 어떤 이는 총평으로 피드백을 해주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일일이 수정해주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아예 모범 답안을 써서 보여주는 방식으로 고쳐주기도 한다. 글 쓰는 사람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이렇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글동무가 있는 게 바람직하다. 또한 글동무의 지적을 고깝게 여기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힘든 글쓰기 여정을 견뎌낼 수 있고, 글의 수준을 높여갈 수 있다.
끝으로, 함께 모여 글을 고칠 수 있다. 문예창작과나 국문과에서 신춘문예를 준비하거나 습작 활동을 하는 학생들은 합평하는 시간을 갖는다. 서로의 작품을 호되게, 가차 없이 비판한다. 어쉴러 K. 르 귄은 ‘글쓰기의 항해술’이란 책에서 망망대해를 떠도는 작가들에게 함께 쓰기를 권한다. 합평하면 상호적 격려, 우호적 경쟁, 고무적 토론, 비평을 통한 훈련, 시련을 이겨낼 버팀목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나도 대통령 연설비서관 시절 ‘독회’라는 제도를 운영했다. 모여서 읽는다는 뜻의 독회 제도는 각자 글을 쓴 후, 글 하나가 나오면 구성원이 모여 앉는다. 글 쓴 사람이 한 문단씩 읽으면 다른 사람이 고쳐준다. 그렇게 한 문단씩 고쳐서 글을 완성한다. 독회를 통해 우리가 쓸 수 있는 최상의 글을 써낼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많이 배웠다. 일정 기간 이 작업을 하니 모두의 실력이 상향 평준화됐다. 글쓰기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글을 고쳐보는 것이다.
이제는 인공지능의 도움까지 받아 고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잘 쓰고 싶은 마음과 고치는 열정만 있으면 얼마든지 잘 쓸 수 있다. 일필휘지할 필요 없다. 꿰맨 흔적이 없는 글을 쓸 필요도 없다. 누덕누덕 기운 누더기면 어떤가. 나답게 쓰면 된다. 일단 쓰고 꼼꼼하게 고치면 된다.
그렇다면 글을 어느 수준까지 고쳐야 하는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랬다. “나는 아무리 퇴고를 많이 해도 목적지에 이르지 못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글을 썼는데 여전히 그렇다.” 내가 모신 분들도 적당히 이 정도면 됐다는 것은 없었다. 구역질이 나고 신물이 넘어올 때까지 고쳤다. 그렇게 고치면 누구나 잘 쓸 수 있다.
나는 1962년생이다. 197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생 이후 글 쓸 일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일주일에 한 시간 ‘작문’ 수업이 있었지만, 그 시간조차 읽었다. 우리 세대는 읽기와 듣기에 능하다. 참으로 많이 읽고 많이 들었다. 전 세계에서 수업 시간이 가장 길었다. 8교시, 9교시 수업을 하며 선생님 말씀을 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야간 자습까지 하며 읽었다.
많이 읽고 들으면 다섯 가지 특성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한다. 당시 우리 사회는 이 다섯 가지 특징을 지닌 사람을 필요로 했으며, 이런 사람이 직장 생활을 잘하고 인정도 받았다. 이들에게는 ‘공부를 잘한’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당시 공부는 읽기·듣기가 전부였다. 읽기·듣기를 열심히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공부를 잘했다는 건 읽기·듣기를 많이 하고 잘했다는 의미다.
다섯 가지에서 더 나아가기
첫째, 많이 읽고 들은 사람은 아는 게 많다는 특징을 띤다. 선생님 말과 책에 있는 글을 많이 읽고 들으면 아는 게 많아진다. 나는 1990년부터 직장 생활을 했는데 10년 가까이 인터넷도 컴퓨터도 없는 세상을 살았다. 자기가 모르면 알 수 없었다. 요즘같이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아는 게 힘이었다. 각자의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걸 갖고 있느냐가 중요했다. 그렇다 보니 많이 읽고 들은 사람이 아는 게 많았고, 사회는 그들을 대우해줄 수밖에 없었으리라.
지금은 어떤가. 읽기·듣기를 많이 하지 않은 사람도 인터넷이나 유튜브, 심지어 인공지능의 힘을 빌리면 얼마든지 잘 알 수 있다. 물론 많이 아는 사람이 인터넷이나 인공지능 활용도 더 잘하긴 하지만, 읽기·듣기를 하지 않았다고 무지의 암흑 상태에 처해 있을 수밖에 없는 시대는 아니다. 학창 시절 읽기·듣기를 게을리했다고 평생 모르는 사람 취급받으며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둘째, 많이 읽고 들은 사람은 모방 능력이 우수하다. 읽고 듣는 것의 본질은 이미 있는 걸 닮아가고 흉내 내는 데 있다. 읽고 듣는 행위는 새로운 걸 만드는 일이 아니다. 있는 걸 이해하고 분석하는 일이고, 그 끝은 기존에 있는 것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나은 걸 만드는 일이다. 예를 들어 선생님의 말을 듣거나 교과서를 읽고, 아는 것에서 선생님과 교과서 수준에 근접해가는 게 읽고 듣는 공부다.
우리 시대는 모방 능력이 필요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우리는 만들 수 있는 게 없었다. TV나 자동차는 물론이고 라디오조차 만들 기술이 없었다. 베껴야 했다. 읽기·듣기를 많이 한 사람들이 잘 베꼈다. 처음엔 신발, 의류를 베끼다가 TV, 자동차, 선박, 반도체, 휴대폰 등으로 대상을 넓혀갔다. 급기야 그걸 처음 개발한 나라의 제품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세계 최빈국에서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이 모두가 읽기·듣기를 많이 시킨 학교와 부모의 교육열, 읽기·듣기를 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한 덕분이다.
문제는 앞으로다. 더 이상 베낄 데가 없다. 우리 기업은 이미 세계 최선두가 됐다. 뒤에서는 중국이 추격해오고 있다. 지금 우리가 잘하는 건 중국이 금세 베낄 수 있다.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고 살아남으려면 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걸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한다. 새로운 걸 만들려면 각자가 자기만의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고, 그걸 글이나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개개인의 서로 다른 것들이 밖으로 나와 연결되고 결합되어 새로운 게 만들어진다. 남의 것을 읽고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것을 말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진 것이다.
셋째, 많이 읽고 들은 사람은 그걸 열심히 하는 과정에서 참을성, 끈기, 집중력 등을 키웠다. 읽고 듣는 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 사람도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읽고 듣는 것보다 노는 걸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이나 하고 싶은 걸 참고 남들이 하라고 하는 읽기·듣기를 잘했다는 건 태어날 때부터 그런 기질을 갖고 있었거나, 자신의 의지로 마음 근력을 키운 덕분이다.
그런 마음 근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시키는 일을 잘한다. 야근도 잘하고 힘든 일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근면 성실하다. 이런 특성은 사람을 부리는 조직에서 가장 긴요한 것이다. 회사 조직이든 공무원 조직이든 말이다. 일을 시키면 군말이나 불만 없이 잘한다.
근면 성실은 여전히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필요로 하는 게 창의성이다. 우리 세대는 열심히 하면 됐다. 남들이 8시간 일할 때 10시간 일하고, 남들이 두 개 만들 때 세 개, 네 개 만들면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세상을 이끌어가는 기업은 근면 성실성으로 승부하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충분히 쉬고 놀아도 좋으니 성과를 내놓으라고 한다.
읽기와 듣기는 과정이고, 말하기와 쓰기는 결과다. 읽고 들은 결과로 우리는 말하고 쓴다. 읽기·듣기만 하면 과정만 있고 결과는 없는 셈이다. 우리 세대는 읽고 듣는 과정을 참고 집중해서 끈기 있게 해내면 됐지만, 이젠 참고 집중하지 않아도 되니 결과로 보여달라고 한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한 사람이 열심히 일하는 수백·수천 명의 몫을 하는 시대다. 자기 시간을 최대한 쏟아부어 그것으로 자신의 희생정신과 애사심을 보여주면서 근면 성실로 승부하는 사람은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넷째, 많이 읽고 들은 사람은 승부욕이 있고 경쟁심이 강하다. 학교 다닐 적을 생각해보라. 앞서 말했듯이 공부를 잘했다는 건 많이 읽고 들었다는 것이고, 많이 읽고 들은 결과로 석차가 높았다는 것이다. 학교 공부는 자기 반 친구를 이기기 위해, 등수를 높이기 위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승부욕과 경쟁심이 전혀 없는 학생이 공부를 잘하긴 쉽지 않다. 승부욕은 또한 인정욕구의 다른 이름이다. 승부욕이 센 사람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 또한 강하다. 부모님과 친구들, 선생님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열심히 공부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직장에 가서도 열성적으로 잘한다. 열심히 해서 동기들보다 인사고과도 잘 받고 승진도 빨리 하려고 한다. 남들이 어려워하는 일도 자기가 한번 해보겠다고 나서서 기필코 해낸다. 그럼으로써 인정받고자 한다. 성적이 안 나오는 과목을 열심히 해서 올려본 경험, 반에서 1등을 해본 경험과 그때 느껴본 성취감을 아는 사람은 어려운 과제를 줘도 그 희열을 다시 맛보기 위해 시도하고 도전한다. 지고는 못 배기는 성질이 강해서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자존심이 상해 밤잠을 설치고, 다른 조직이나 다른 회사보다 앞서가려고 안달한다. 어떻게든 남보다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회사나 상사 입장에서 이런 사람이 어찌 기특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이런 승부욕과 경쟁심이 필요할까. 그렇다.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이제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때로는 남과 겨루어 이기거나 앞서려는 욕심이 독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지금은 개방과 공유, 융합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가진 것을 내어놓고, 그것들을 섞고 융합해야 한다. 경쟁을 잘해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라, 협력하고 연대해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시대다. 남을 이기려면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잘해야 하는 것이다.
끝으로, 많이 읽고 들은 사람은 어디 출신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그리고 사회는 어디 출신이라는 간판을 중시했다. 실제로 그 간판을 가진 사람은 아는 게 많았고, 모방 능력도 있었고, 근면 성실했으며, 경쟁심과 승부욕도 강했다. 그래서 그 간판이 통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간판을 가진 사람끼리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간판의 효험을 극대화했다. 역량이 부족한 사람도 간판이 좋으면 상부 조직과 선을 대는 데 쓸모가 있기에, 조직은 그런 사람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특정 간판을 가진 사람은 일을 잘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어 중요한 일을 할 기회를 많이 주고, 그런 일을 경험하면서 실제로 일을 잘하게 됐다. 그럼으로써 특정 간판을 가진 사람은 유능하다는 일반화와 과대 해석의 오류를 범해왔다. 일이라는 건 하면 할수록 요령을 터득해 잘하게 되는 건데 말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어디 나왔느냐고 묻지 않는다. 내가 직장 다닐 적만 해도 ‘어디’가 중요했다. 어디 들어갔는지, 어디 나왔는지, 어디 다니는지, 어디까지 올라갔는지가 중요했다. 좀 더 나은 어디, 좀 더 높은 어디에 이르고자 아등바등했다. 하지만 그건 오프라인만 있을 적 얘기다. 온라인 세상이 활짝 열린 지금, 이제는 굳이 어딜 나오지 않아도 되고 어디에 다니지 않아도 된다. 젊은이들은 어디까지 올라가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를 언제 그만둘지 고민한다. 대신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궁리한다. ‘어디’로 살아가지 않고 ‘무엇’으로 살고자 한다.
역전의 기회될 글쓰기
이제는 오래 산다. 나 같은 1960년대 생도 살 날이 많이 남아 있다. 그게 50년이 넘을 수도 있다. 아니 지금까지 살아온 기간보다 더 길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세상은 읽기·듣기를 많이 하지 못했어도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모방 능력이 별로 필요하지 않게 됐고, 참을성과 끈기가 부족해도 상관없어졌다. 경쟁심과 승부욕, 간판도 의미가 없어졌다. 나같이 직장을 다니지 않는 사람은 더욱 그러하다.
나는 쉰 살까지 반사체로 살았다. 나에게 일을 시킨 사람의 말과 글을 읽고 들어서 그 사람이 원하는 말과 글을 만들어주는 일을 했다. 말과 글을 받아서 말과 글로 되쏴주는 일로 월급을 받았다. 나뿐 아니라 직장 다니는 사람은 대부분 이와 유사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직장을 그만둔다. 더 이상 반사체로 살 수 없는 때가 온다. 그땐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로 살아야 한다.
읽기·듣기 삶에서 뒤처지고 낙오했다는 사람,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패자부활과 역전의 기회가 있다. 바로 글쓰기다. 글쓰기를 돌파구로, 읽는 소비자에서 쓰는 생산자로 거듭나야 한다. 미국의 과학자이자 정치가인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이 그랬다. “죽어서 육신이 썩자마자 사람들에게 잊히고 싶지 않다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을 쓰든지 글로 남길 만한 가치 있는 일을 하라.”
매일 조금씩 쓰면 된다. 한 문장으로 시작하면 된다. 때로는 쓰기 싫어도 계속 써야 한다. 포기하지 않고 쓰기만 하면 된다. 글쓰기를 통해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는지 찾아내자. 글을 쓰고 책을 써서 내가 가진 그 ‘무엇’을 세상에 보여주자. 그 무엇으로 세상에 보탬이 되자. 그런 당신의 앞길을 그 누구도 막아설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글쓰기’에 관해 말하고 글을 쓴다. 이 일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고 싶다. 어떻게 해야 잘 쓸 수 있는지 알려주기는 어렵다. 나도 잘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자신감을 키움으로써 글을 써왔다. 나처럼 타고난 기질이나 환경이 아닌 순수한 노력으로 자신감을 키운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감을 키워 글을 쓰는 방법에 관해서는 말할 수 있다.
글쓰기는 자전거 타기와 같다. 자전거 타는 법을 말과 글로 가르칠 수 없지 않은가.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해서 썼다’, ‘이렇게 하면 써지는데 왜 못 쓴다고 하는가’ 일깨우는 데 있다. 그리하여 ‘나도 쓸 수 있겠네’라는 반응을 얻어내기 위함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은 “두려움은 두려워하는 것을 현실로 만든다”고 했다. 글을 쓰는 일은 뇌의 입장에서 두려운 일이다. 그런 일에 자신감조차 없으면 안 쓰게 되고 안 쓰면 못 쓰게 된다. 그리고 못 쓰면 더 두렵다. 글을 쓰려면 자신감이 필요하다. 글 위에서 호령해야 한다. ‘네 이놈’ 하면서 글을 한 손에 쥐고, ‘남들 다 쓰는데 나라고 못 쓸라고’ 하는 마음으로 주도해야 한다.
글쓰기에 자신 없는 이유
글쓰기에 자신이 없는 이유는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자신보다 나은 글을 쓰려 하기 때문이다. 본시 글이란 쓴 사람 자신보다 낫다. 그래서 자신보다 나은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린다. 자신만큼 써도 된다면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자신보다 나은 글을 쓰지 못해 본색이 탄로 날까 두려운 것이다. 자신감을 갖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남이 쓴 글 때문이다. 남이 쓴 글은 잘 쓴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글은 숱한 퇴고 과정을 거쳐 나온 글이다. 우리는 이런 글을 보고 자신의 수준과 비교하면서 자신 없어 한다. 그 글도 초고는 엉망이었을 텐데 말이다. 더욱이 우리는 학창 시절 내내 국어 교과서에서 범접하기 어려운 글만 봐오지 않았던가.
나는 글쓰기에 자신 없어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주문한다. △그냥 쓰지 말고 말해보고 쓰세요.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한 번에 다 쓰려고 하지 말고 나눠서 여러 번에 걸쳐 쓰세요. 일필휘지는 나도 못 해요. △정답을 쓰려고 하지 말고 오답을 쓰지 마세요. 잘 쓰려고 하지 말고 잘못 쓰는 걸 줄이세요. 정답은 누구도 몰라요. 하지만 어떻게 쓰면 안 되는지는 알잖아요. △모르는 것 말고 잘 아는 걸 쓰세요. 굳이 남의 구장에 가서 어웨이 게임 하지 말고 홈그라운드에서 경기하세요. △써야 하는 것 말고 쓰고 싶은 걸 쓰세요. 평소에 쓰고 싶은 걸 써놨다가 써먹으면 되잖아요. △정리해서 쓰지 말고 쓰면서 정리하세요. 쓰기 시작하면 생각도 나고 쓰다 보면 정리가 되잖아요. 다 쓰고 나서 정리해도 되고요. △특별한 것 말고 평범한 걸 쓰세요. 특출 난 것 말고 나만의 특별한 것, 정상(頂上)이 아닌 정상(正常)을 추구하세요. △길게 쓰기 어려우면 짧게 여러 개를 써서 연결하세요. 문단의 개수를 늘리면 긴 글도 써지잖아요. △창조하지 말고 모방하세요. 맨땅에 헤딩하면 머리만 아파요. 다른 사람이 써놓은 글을 많이 읽고 참조하세요. 다른 사람의 글 속에 내가 쓸 수 있는 길이 반드시 있어요. △장문 말고 단문으로 쓰세요. 문장을 길게 쓰긴 어렵잖아요. △화려하게 말고 담백하게 쓰세요. 수식어를 넣고 수사법을 구사하면서 쓰려면 힘들잖아요. 담담하게 쓰세요. △첫 문장부터 쓰려고 하지 말고 생각나는 것으로 아무 데서나 시작하세요. 첫 문장을 못 쓰면 글을 한 줄도 못 쓰게 되잖아요. 쓸 수 있는 것부터 써서 다 쓰고 난 후 그 안에서 첫 문장을 찾으세요. △분량을 딱 맞춰 쓰려 하지 말고 많이 써서 줄이세요. 인터넷의 도움을 받으면 분량 늘리는 건 어렵지 않잖아요. 요약하는 것도 많이 해보셨고요. △잘 쓰려 하지말고 대충 쓴 후 잘 고치세요. 방송도 생방송은 어려워요. 녹화방송하듯 일단 써놓고 편집하세요. △혼자 쓰지 말고 함께 쓰세요. 쓰기 전에 주변 사람에게 물어 아이디어도 얻고 의견도 받아 수정하세요.
사실 글쓰기를 자신 없어 할 이유가 없다. 외국어로 써야 하는가, 아니면 한글을 모르는가. 또는 논술 시험 보듯 아무 자료도 찾아볼 수 없거나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태인가. 혹은 컴퓨터로 고칠 수 없이 원고지에 일필휘지해야 하는 상황인가. 잘못 쓰면 신변이 위태로워지거나, 천하의 명문을 써야 하는가. 이런 상황만 아니면 글 앞에 쫄 필요가 없다.
직장 생활하며 글을 써야 할 때 나는 늘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글쓰기에 최대한의 시간을 확보하고, 찾아볼 수 있는 자료는 다 찾아보며, 더 이상 고칠 게 없을 때까지 고친다는 생각으로 썼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감은 떨어졌다. 자신감이 떨어지면 잘하는 일만 하려고 하고, 새로운 일은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하며, 남의 도움도 기피한다. 남에게 내 실력을 들킬까 봐 걱정되고, 남이 도와줘서 해냈다는 말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공부하고 노력해서 내 수준과 실력을 높이거나, ‘이게 내 수준인데 어쩔 거야’ 하면서 나답게 써야 하는데, 나는 둘 다 못하고 어정쩡하게 직장 생활을 했다.
쓸 힘을 얻을 방법
직장을 나와서는 그런 상태로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감을 북돋기 위해 이런 노력을 한다.
첫째, 일단 쓰고, 자주 쓴다. 글은 막상 쓰기 시작하면 그 전보다 몇 배는 자신 있어진다. 뿐만 아니라 쓸거리도 생기고 쓰고 싶은 마음도 든다. 자주 쓰지 않으면서 자신감을 키울 길은 없다. 자주 쓰면 익숙해지고, 익숙하면 자신감이 붙는다. 반복이 자신감을 키운다. 반복하다 보면 미세한 차이만큼 점차 나아지고, 거기서 자신감이 샘솟는다.
둘째, 남들의 평가에 대한 기대 수준을 낮춘다. 평가에 연연하지 않을 순 없다. 연연하되 기대치를 낮추자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나이 먹어가며 몸도 쇠약하고 집중력과 기억력도 떨어지는데, 여전히 젊었을 때 기대치로 평가받고자 하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에게서 좋은 평가를 끌어내는 건 내 뜻대로 되지 않지만, 스스로 기대 수준을 낮추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기대 수준을 낮추면 좀 더 쉽게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있고, 그만큼 자신감도 생긴다.
가능하다면 남들의 평가에 둔감해질 필요가 있다. 사실 남들은 내게 그다지 관심 없다. 어떤 평가는 깊은 생각 없이 무심코 던지는 경우도 있고, 평가를 했다가도 곧 잊어버린다. 그러므로 남들의 평가가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갖는 게 좋다. 근본적으로 남들의 평가에 의존해 나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면 남들의 평가에 우쭐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을 수 있다.
셋째, 모든 걸 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 내가 가진 실력, 내가 들인 노력 이상으로 평가받으며 살아왔다. 그것에 만족하고 감사한다. 이제는 힘을 빼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자. 이렇게 마음먹으니 두려울 일도, 자신 없어 할 일도 없다.
넷째, 단점을 보완하지 않고 장점을 살리고자 한다. 학교 다닐 적부터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모르는 걸 알아야 성장한다고 배웠다. 이제부턴 잘하는 걸 더 잘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 장점을 키우자고 생각하면 자신 없을 이유가 없다.
다섯째, 하나에 집중한다. 재능 있는 사람은 여러 개를 섭렵해도 두루 잘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대신 하나에만 힘을 모은다. 글의 주제와 장르도 자신 있는 것에 집중한다. 이를 통해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고 나다운 스타일을 구축한다.
여섯째, 완벽주의에서 벗어난다. 가진 역량에 비해 완벽주의를 추구하면 필요 이상으로 노력하게 되고, 일의 진척도 느리다.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할 뿐 아니라, 완벽하게 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한다. 방법은 완벽 대신 완료를 추구하는 것이다. 조금 허술하더라도 끝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임한다.
일곱째,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남과 비교하면 자기비하나 시기, 질투에 빠지거나 허황된 꿈을 꾸면서 자신감이 훼손된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과거와 비교해본다. 나의 과거와 비교해보면 현재는 과거보다 훨씬 낫다. 그러면 됐다.
여덟째, 성공을 경험하고 칭찬을 듣는다. 글쓰기의 성공 경험은 끝까지 쓰는 것이다. 잘 쓰든 못 쓰든 끝까지 쓰고 나면 뿌듯함과 함께 자신감이 차오른다. 끝까지 가보는 경험이 중요하다. 직접 성공 경험을 못 하더라도 칭찬을 자주 들으면 자신감이 생긴다. 칭찬을 자주 들으려면 칭찬해주는 사람을 곁에 둬야 한다. 나는 아내가 그 역할을 해준다.
아홉째,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축적해야 한다. 글을 쓰다 보면 반드시 벽에 부닥친다. 이때 굴복하면 자신감을 잃을 수밖에 없다. 길을 잃었을 때는 멈춰서 원인과 이유를 찾아보거나, 오던 길을 되돌아 초심을 되살려야 한다. 리셋해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위기를 당했을 때 그것이 주는 의미는 무엇이고,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들 순 없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위기가 끝났을 때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위기가 더 큰 위험을 초래하지 않도록 깊이 생각한다. 위기 국면이 끝난 후에는 위기에서 교훈을 얻어 같은 위기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한다.
열째, 말로 자기암시를 한다. 스스로 자신감을 북돋우기 위해 되뇌는 말들이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어딘가에 답이 있다. 아직 못 찾았을 뿐이다. △한 번에 풀리는 일은 없다. 여러 번 해서 안 되는 일은 없다. △시작이 어렵지 뒤로 갈수록 쉬워진다. △언제 끝날까 싶은 일도 반드시 끝이 온다. △모두에게 잘 보일 필요 없다. △최선이 아닌 차선도 괜찮다. △언제든 그만두면 된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힘든 일은 지나간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누가 알겠는가. 나이 먹어 최고의 작품을 쓸 수 있을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을 생각하면 두려울 게 없다. △나는 나를 믿는다.
자신을 믿는 사람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자신 안에 쓸거리가 있고,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자신 안에서 쓸거리를 잘 길어 올린다. 그렇게 길어 올린 내용을 이 눈치 저 눈치 안 보고 쓴다. 나아가 세상에 그렇게 잘난 사람도 별로 없다고 믿는다. 자기 얘기는 자기가 가장 잘 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여유가 있다. 가진 것을 다 보여주려고 조바심 내지 않는다. 가진 것의 일부만 보여줘도 된다고 생각한다. 힘줄 때 주고 뺄 때 빼면서 강약 조절도 잘한다. 끝으로 잘 버틴다. 처음에는 어렵지만 한줄 한줄 써나가다 보면 써지는 순간이 올 거라고 믿는다. 기본적으로 괴로움을 견디는 역치가 높다. 그래서 칭얼대거나 죽는 소리 하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하나를 꼽으라면 자신감이다. 하지만 자신감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글을 쓰면 생기는 게 자신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감은 일상을 사는 힘이 된다. 나는 글을 쓰면 힘이 난다.
학창 시절 내내 읽고 들으면서 살았다. 직장 생활 할 때도 그랬다. 지금은 듣거나 읽은 걸 말하고 쓰면서 산다. 읽고 듣는 만큼 말하고 쓴다. 말하기와 쓰기가 내 삶에 비중 있게 자리 잡았다. 또한 말하고 쓰려니 읽고 듣지 않을 수 없다. 읽고 듣기만 하면서 살 때보다 읽기와 듣기가 더 소중해졌고, 더 많이 읽고 듣는다. 이로써 읽기, 듣기와 말하기, 쓰기가 서로 통한다.
듣는 것은 어릴 적부터 잘했다. 어른들 말씀을 잘 들었다. 선생님 말씀, 직장 상사 말을 잘 듣는 것으로 인정받고자 했다.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을 싫어할 리가 있겠는가. 잘 들어주면 자기를 배려하고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잘 들어준다는 것은 듣는 사람이 잠시 판단을 유보하고 열린 자세로 자기와 다른 생각,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대부분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자기 말만 하기 바쁘다. 남이 말하는 사이 할 말이 생각나거나 그 말이 자기 생각과 다르면 말을 자르고 끼어든다. 생각의 속도는 말의 속도보다 빨라서 남의 말을 들으면서 자기 생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나는 진득하게 듣는다. 별로 할 말도 없거니와, 내겐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게 수지맞는 일이다. 그들의 말에서 뭐 하나라도 알고 배우는 게 좋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는 경우에도 혹시 몰라 끝까지 들어본다. 그러니 듣는 태도가 나쁠 턱이 있겠는가. 그 덕에 기업 회장과 대통령의 말을 듣는 자리에서 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남의 말을 잘 들으면 얻는 게 많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내게 무엇을 원하고 기대하는지 알 수 있다. 그걸 알아야 그들이 내게서 듣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다. 나는 대통령이나 회장의 글을 쓸 때 네 사람에게 듣고 썼다. 가장 중요한 건 대통령이나 회장 본인의 말을 듣는 것이다. 그분들의 말을 전해 듣기도 하고 배석해서 듣기도 하지만, 직접 만나 궁금한 건 물어보면서 듣는 게 바람직하다. 물론 기본적인 사항을 숙지하고 관련 내용을 충분히 공부한 후 만나야 한다. 두 번째로 듣는 대상은 대통령이나 회장의 말과 글을 듣거나 읽을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무엇이 궁금한지,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물어야 한다. 세 번째는 전문가다. 대통령이나 회장이 하고 싶은 말과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쓰려면 이걸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들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론이나 제3자의 객관적인 의견을 듣는다. 이렇게 네 사람에게 잘 듣기만 해도 크게 엇나가지 않는 글을 쓸 수 있었다.
잘 듣는다는 의미는 일곱 가지를 잘하는 것이다. 첫째는 ‘이해’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먹어야 한다. 이를 위해 듣는 내용에 대한 배경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 둘째는 ‘요약’이다. 들은 내용을 압축하고 핵심을 추려낼 수 있어야 한다. 사실 듣기는 요점을 간추리는 행위와 다름없다. 셋째는 ‘유추’다. 말하는 사람은 다 말하지 않는다. 건너뛰는 게 많고 표정과 감정으로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듣는 사람은 눈치로 말하지 않는 빈칸을 채우고 비언어적 표현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런 눈치가 유추 능력이다. 넷째는 ‘질문’이다. 들으면서 물어봐야 상대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알고 싶은 걸 알 수 있다. 질문을 통해 대화가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공감’이다. 얘기를 듣고 간추리고 궁금한 걸 물어 대답을 들었으면 그 말에 동의하고 동감을 표해야 한다. 그래야 말하는 사람이 신이 난다. 여섯째는 ‘비판’이다. 상대 말을 듣기만 하고 공감만 해서는 안 된다. 자기 말도 추가해야 한다. 상대 말에 반발하고 반대하고 이의를 제기하라는 게 아니다. 상대 생각을 보완해주고 도움으로써 더 나은 대안이나 제3의 의견을 찾아가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건설적인 비판이 필요하다. 일곱째는 ‘실행’이다. 들은 내용을 적용하고 활용하고 응용해서 글을 쓰거나 일을 하거나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들은 다음은 말할 차례다. 들은 내용은 남의 것이다. 내 말이 내 것이다. 듣기만 하며 살다가 내 삶을 끝낼 순 없는 것 아닌가. 말해야 한다. 말을 하면 또한 얻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말을 하면서 할 말이 생각난다. 무슨 조화인지, 말하기 전에는 없던 생각이 말하면서 떠오른다. 그럴 때 알 수 없는 희열을 맛본다. 뿐만 아니다. 말을 하면 생각이 정리된다. 자기 생각이 일목요연하게 머릿속에 그려지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 나 자신이 참으로 기특하다는 효능감을 느낀다. 나아가 말을 하면 반응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어떤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어떤 말에 시큰둥한지 알 수 있다. 말을 하면서 반응 좋은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을 취사선택할 수 있다.
나는 주로 말해본 걸 글로 쓴다. 말할 수 있으면 쓰지 못할 이유가 없다. 말이 거듭되면서 작은 차이를 만들어내고, 그 차이가 내 말을 더 재밌게 진전시킨다. 또한 말은 하면 할수록 말하는 내용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이것을 글로 쓰는 걸 촉진한다. 말한 내용을 글로 쓰면 구어체로 쓰여 읽기도 편하다. 그래서 나는 써야 할 글이 있으면 먼저 말해본다. 아니 말해보지 않은 내용은 쓰지 않을 정도로 내가 쓰는 모든 건 말해본 것들이다. 말해보면 쓸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말해보면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무얼 더 공부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말하다 보면 읽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왜 읽어야 하는지 이유가 분명해지고, 읽고 싶은 욕구가 커진다.
읽기는 크게 세 방향으로 해왔다. 첫째는 내 문체를 만드는 읽기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롤모델인, 그처럼 쓰고 싶은 작가가 있을 것이다. 그가 쓴 글의 내용이나 세계관과 상관없이 그의 문장과 표현, 문체가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다. 나 역시 이병주, 김훈, 이문열 선생 등이 본받고 싶은 모델이었다. 그런 사람의 글을 읽고 또 읽으면 자기도 모르게 그의 글을 흉내 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의 글을 쓰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내가 쓸 글감을 얻기 위한 읽기다. 나는 쓰기 위해 읽는다. 그러므로 읽으면서 쓸거리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눈을 부릅뜨고 쓸거리를 찾으며 읽는다. 한 꼭지 글을 읽었는데 쓸거리를 얻지 못하면 다시 읽는다. 찾을 때까지 읽는다. 그러면 반드시 찾게 된다. 찾은 건 누군가에게 말해보고 내 글에 써먹는다. 어느덧 내 뇌는 쓰기 위해 읽고, 읽으면 무언가를 기필코 찾아내고야 마는 습성을 갖게 됐다.
세 번째는 벌이를 위한 읽기다. 나는 강의가 주 수입원이다. 강의를 잘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콘텐츠가 필요하다. 그런 콘텐츠를 구축하는 유일무이한 길이 독서다. 적어도 내가 강의하는 분야인 글쓰기, 말하기, 소통 등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많이 읽고, 읽어보지 않은 책이 없다고 자신할 정도의 독서를 하려고 힘을 쏟는다.
듣고, 말하고, 읽었으면 다음은 쓰기다. 나는 들은 내용을 쓰고, 말하기 위해 쓰고, 읽은 후 무언가를 쓴다. 그 무언가가 바로 메모다. 내게 메모는 일상적인 습작 활동이고, 언젠가 써야 할 글쓰기의 재료를 장만하는 일이다. 읽고 들은 내용을 그대로 메모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 받아쓰기는 내 글쓰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용하기 위해 메모한 건 나중에 찾아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자주 사용할 수도 없다. 내 글에서 남의 글 인용 비중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읽고 들은 것 중에 내 것을 찾거나 내 것으로 만들어 그것을 메모한다. 그건 메모하는 과정에서 이미 내 것으로 체화된 것이다. 굳이 나중에 찾아볼 필요도 없고 내 글에 내 것으로 써먹을 수 있다.
나는 메모할 요량으로 글을 읽고 남의 말을 들으므로, 메모는 글을 읽고 말을 듣는 목적이 된다. 만약 메모하지 않고 읽고 들으라고 하면, 나는 읽기와 듣기를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메모는 읽기와 듣기를 이끄는 견인차다. 메모가 늘어날수록 나는 더 읽고 더 듣고 싶다. 그럴수록 메모를 더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메모해둔 분량이 늘어나면 메모 덩어리 표면적이 넓어져 메모에 와서 붙는 메모거리가 많아지고, 메모끼리 연결되고 결합해 새로운 메모거리를 던져준다. 메모가 메모를 낳는 선순환의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밖에도 메모는 감정을 정리하고 스스로 성찰하는 도구가 된다. 나는 내가 느끼는 부정적 감정들을 메모하면서 그 감정에서 벗어난다. 느끼기만 하는 감정은 왜곡되고 증폭되기 쉽지만, 글로 썼을 때 객관화되고 정화된다. 내가 한 일과 앞으로 할 일도 메모하면 이미 한 일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할 일을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다.
‘동의보감’에 ‘불통(不通) 즉 통(痛)이요, 통(通) 즉 불통(不痛)이다’란 말이 나온다. 서로 통하면 아프지 아니하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는 뜻이다. 들숨이 있으면 날숨이 있어야 하고, 날숨이 있기 위해선 들숨이 있어야 하는 게 세상 이치이고, 이런 이치에 순응할 때 우리는 건강하다.
듣기, 읽기, 말하기, 쓰기는 순서가 없다. 들은 걸 쓰기도 하고, 쓴 것을 말하고, 말하기 위해 읽는다. 읽기와 듣기만 있고 말하기와 쓰기가 빈약한 때는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지 않는 불통이 내 안에 있었다. 그래서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말하기와 쓰기가 없는 읽기, 듣기는 허망했다. 말하기와 쓰기를 잘할 수도 없었다. 지금은 읽기와 듣기가 말하기와 쓰기로 확장한 삶을 산다.
말하기와 쓰기도 연결됐다. 많은 사람이 말하기와 쓰기 가운데 어느 한쪽에 과도한 무게중심을 두고 산다. 주로 말만 하고 살거나 쓰기만 하면서 사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 말하기와 쓰기의 불통을 낳는다. 나는 말한 건 쓰고, 쓴 건 말한다. 말하기 위해 쓰고, 쓰기 위해 말한다. 말하기와 쓰기가 상부상조하고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일상을 산다. 결과는 대만족이다. 하루하루가 활기차고 의욕에 넘친다. 읽고 듣기만 하며 살 때보다 벌이도 낫다. 독자 여러분도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가 순환하는 삶, 말과 글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글쓰기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는 분량의 문제다. 쓸 수 있는 만큼, 쓰고 싶은 만큼 쓰면 못 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문제는 정해진 분량만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원고지 10매 분량을 써야 한다고 가정하면, 어떤 이는 원고지 10매가 너무 많아 부담스러울 수 있고, 또 어떤 이는 하고 싶은 말에 비해 분량이 너무 적어 글을 쓰기 어려울 수 있다. 주제에 따라 어떤 내용은 길게 쓰는 게 쉬울 수 있고, 또 어떤 내용은 짧게 쓰고 싶으나 분량에 맞춰 써야 한다.
분량과 관련하여 글 쓰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많이 쓰고 줄이는 것이다. 쓰고 싶은 만큼 몽땅 쓰고 정해진 분량이 될 때까지 줄인다. 다른 하나는 쓸 수 있을 만큼 쓰고 조금씩 늘리는 것이다.
요약으로 쓰기
우선 많이 쓰고 줄이는 방법부터 알아보자. 많이 쓰고 줄이는 걸 ‘요약’이라고 한다. 요약으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쓸거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글쓰기 강의를 하며 만나본 사람 중에는 ‘내가 안 써서 그렇지 쓰기로 마음만 먹으면 책 열 권 분량도 쓸 수 있다’고 자신하는 분들이 있다. 이건 빈말이 아니다. 실제로 그런 분은 막상 쓰기 시작하면 거미가 엉덩이에서 실을 뽑아 그물을 치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글을 써 내려간다. 하지만 이렇게 쓸거리가 풍부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할 필요 없다. 자기 안에 쓸거리가 없는 사람은 밖에서 찾으면 된다. 자료 검색을 통해 쓸거리를 끌어모으면 되는 것이다. 자기 안에 쓸거리가 있든, 검색으로 그러모았든, 다음 할 일은 요약이다. 그러니까 쓸거리 아니면 검색 능력, 그리고 요약하는 역량만 있으면 줄이기로 글을 쓸 수 있다.
요약하는 게 뭐 대수냐고 큰소리치는 분들이 간혹 있다. 학교 다닐 적 선생님 말씀 받아 적고, 교과서나 참고서의 중요한 곳에 밑줄 긋는 등 늘 하던 게 요약 아니냐고 말이다. 맞다. 요약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많이 한 작업 중 하나다. 가장 단순한 요약은 발췌다. 바로 밑줄 긋기와 별표 치기. 다음은 불필요한 걸 버리는 요약이 있다. 중복되거나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걸 버리고 남는 것으로 요약하는 방식이다. 버리는 요약 방식과 반대로 중요한 걸 뽑아내는 요약도 있다. 글을 읽을 때도 어떤 사람은 불필요한 걸 삭제하며 읽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중요한 걸 추출하면서 읽는다. 가장 어려운 요약은 주제를 파악하는 것이다. 주제를 파악한다는 건 글의 배경과 맥락을 통해 글쓴이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를 찾아내는 일이다. 이처럼 요약에도 발췌하기, 버리기, 뽑아내기, 주제 찾기 등의 방식이 있다.
손쉬운 요약 요령
청와대에 들어간 2000년, 상사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글쓰기는 요약의 역순이다. 요약이 줄이기라면 글쓰기는 늘리기다. 잘 줄이는 사람이 잘 늘릴 수 있다. 군대에서 총기 분해를 잘하는 사람이 조립도 잘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글을 잘 쓰려면 요약 능력부터 키워라.” 그러면서 칼럼을 서른 개 뽑아오라고 한 후 다섯 가지 숙제를 주었다. 첫째, 각 칼럼의 가장 중요한 한 문장에 밑줄을 그어라. 둘째, 각 칼럼을 세 문장 이내로 압축해라. 셋째, 각 칼럼에 중간 제목을 달아라. 넷째, 각 칼럼의 주제문을 파악해라. 다섯째, 파악한 주제문으로 글을 써라. 이렇게 다섯 단계의 요약 훈련을 한 후 글쓰기 실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자, 이렇게 요약 능력을 키웠다면 이제 실전 요약 글쓰기를 할 차례다. 요약 글쓰기 1단계는 쓸 수 있는 만큼 쓰는 것이다. 2단계는 써둔 것과 관련 있는 내용을 이곳저곳에서 찾아 붙인다. 이때 최대한 양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글쓰기는 ‘생각하기’가 아니라 ‘행동하기’다. 행동으로 양을 늘려라. 양을 늘리는 데는 재능이 필요 없다. 늘어난 양이 재능으로 둔갑하도록 하라. 양은 많을수록, 주제와 관련성이 높을수록, 흔하지 않은 최신 것일수록, 무엇보다 정확하고 믿을 만한 것일수록 바람직하다. 3단계는 요약하는 것이다. 4단계는 요약한 것을 비슷한 내용끼리 분류한다. 5단계는 분류한 덩어리 하나하나를 갖고 글을 쓴다. 6단계는 덩어리를 배열한다.
첫 문장으로 쓰기
많이 써서 줄이는 글쓰기가 있다면, 적게 써서 늘리는 방식도 있다. 이렇게 늘려서 쓰는 방식은 다시 세 가지로 나뉜다. 우선 첫 문장부터 쓰기다. 첫 문장을 쓴 후 계속 이어나가는 글쓰기다. 글을 써본 사람은 알듯이, 좋은 첫 문장이 떠오르면 그 문장이 다음 문장을 물고 오고, 그다음 문장은 또 다른 문장을 낳으면서 줄줄이 글이 써진다. 문제는 첫 문장을 떠올리는 일이다. 글에서 첫 번째 문장을 찾는 일은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실타래에서 실마리를 찾는 일과 같다.
내가 처음 글을 쓸 때 하던 방식이 있다. 신문 칼럼 100개에서 첫 문장만 긁어다 빈 문서에 붙인 후, 유형별로 분류하는 작업을 했다. 그랬더니 첫 문장으로 쓰인 내용이 10여 개 남짓으로 정리됐다. 질문으로 시작한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글을 인용한다, 최근에 일어난 사건 사고나 최신 트렌드 등을 소개한다, 무언가의 정의를 내린다, 필자가 겪은 일화나 경험을 언급한다, 글의 주제를 밝힌다 등등. 첫 문장은 짧으면서도 전체 내용을 암시하거나 함축해야 한다. 또 그러면서도 글의 내용에 관해 궁금증을 자아내야 한다. 글쓰기는 이런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연결하는 일이다. 좋은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생각나면 글을 상당 부분 완성한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 작가 조앤 디디온이 그랬다. “첫 문장은 대단한 문장일 필요가 없다. 조잡한 문장이어도 좋다. 일단 첫 문장을 써라. 그 문장의 마침표를 찍기 무섭게 다음 문장을 써라. 그러면 된다.” 나는 여기에 한마디를 보태고 싶다. 글을 다 쓴 후엔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 반드시 첫 문장을 손봐라. 그만큼 첫 문장은 중요하다.
보태기로 쓰기
적게 써서 늘리는 두 번째 방법은 야금야금 보태기다. 눈덩이 굴리듯 조금씩 살을 붙여나가는 식이다. 이 방식은 처음엔 진도가 잘 나가지 않으나, 계속 해나가면 속도가 붙는다는 장점이 있다. 나는 이 방식으로 글을 쓸 때는 노트북 화면 정중앙에 내가 써야 할 문서를 갖다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린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침에 들어갔을 땐 아무 생각도 안 나다가 오후에 들어가면 불현듯 떠오른다. 길을 걷다가, 차를 마시다가도 보탤 말이 떠오른다. 이렇게 보태기로 글을 쓸 때 중요한 건 몰입이다. 써야 할 주제에 몰입해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 주제에 관한 책을 읽고, 유튜브 영상을 보고, 누군가를 만났을 때도 이 주제에 관해 말해본다. 그러다 보면 불쑥불쑥 보탤 내용이 추가된다.
먼저 아무거나 생각나는 것으로 글쓰기에 착수한다. 이렇게 시동을 걸어놓으면 우리 뇌는 여기에 살을 붙이고 여백을 채우려고 힘을 쓴다. 이를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한다. 러시아 심리학자 블루마 자이가르닉이 동네 식당에 갔는데, 종업원들이 계산이 끝난 주문 내용은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아직 서빙하지 않은 주문 내용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처럼 우리 뇌는 끝나지 않거나 진행하고 있는 임무는 그것이 끝날 때까지 잊지 않고 기억한다. 보태 쓰기는 이런 뇌의 특징을 활용하는 글쓰기인 셈이다.
정리하면 보태기로 쓰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글을 쓰는 시간과 시간 사이에 인터벌을 두어 머릿속에 고여 있던 추가할 내용이 그 시간 동안 숙성 발효되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읽기와 듣기 등으로 외부에서 자극을 줌으로써 보탤 내용을 떠올리는 것이다.
문단으로 쓰기
적게 써서 늘리는 세 번째 방법은 문단 쓰기다. 문단은 하나의 짧은 글이다. 글쓰기는 어휘에서 시작해 문장으로, 문장이 모여 문단으로, 문단이 쌓여서 완성된다. 긴 글을 쓰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문단 수준의 짧은 글을 쓰는 건 상대적으로 쉽다. 한 쪽짜리 글을 쓰려면 네댓 개의 문단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한 쪽을 쓴다고 생각하지 말고 각각의 짧은 글, 문단 네댓 개를 쓴 후, 이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자는 얘기다. 네댓 개의 글을 생각나는 대로 쓴 후 순서를 부여하면 된다. 통상 우리는 글을 쓸 때 다음에 나올 내용까지 염두에 둔다. 그래서 글쓰기가 힘들다. 그러니 짧은 글 하나만 완성하자는 생각으로 문단을 만들자.
단 문단은 갖춰야 할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문단은 하나의 완성된 글이어야 한다. 그 문단만 따로 떼어냈을 때 홀로서기가 가능한 글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를 ‘문단의 완결성’이라고 한다. 둘째, 문단은 하나의 메시지를 갖고 있어, 제목을 붙일 수 있어야 한다. 그 하나의 메시지와 관련 없는 내용은 모두 빼야 하며, 한 문단에 메시지가 두 개면 두 문단으로 쪼개야 한다. 그러니까 한 문단은 하나의 주제를 향해야 하고, 모든 문장이 그 주제와 일맥상통해야 한다. 이를 ‘문단의 통일성’이라고 한다. 셋째, 문단 안에 있는 문장들의 관계가 자연스러워야 한다. 이를 ‘문단의 연결성’이라고 한다. 나는 주로 주제 문장을 문단의 맨 앞에 배치한다. 결론부터 내놓고 다음 문장을 쓴다. 두괄식으로 쓰는 것이다. 그게 쓰기도 쉽고, 읽기도 편하다.
개별 문단을 다 쓰고 나면 문단과 문단을 연결해야 하는데 시간 순이나 공간 순으로 할 수도 있고, 인과관계 순으로 할 수도 있다. 개연성 있게, 논리적으로 연결하면 된다. 다만 비슷한 내용의 문단이 중복되거나, 문단과 문단 사이에 내용 비약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람마다 짧게 쓰기가 편한 사람이 있고, 길게 쓰는 게 쉬운 사람이 있다. 나는 길게 쓰기가 어렵다. 아마도 머릿속에 쓸 말이 많지 않고 자료를 찾는 데도 서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경우엔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짧게 쓰기가 어려운 사람은 요약 훈련을 열심히 해야 한다. 그와 함께 시나 광고 카피 등 함축적 문장과 친해지길 권한다.
아무튼 글을 쓰려는 사람은 반드시 두 가지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많이 써서 줄이거나, 조금 써서 늘리거나. 이 두 가지만 할 수 있다면 못 쓸 글은 없다.
우리가 만난 은퇴자들을 공통적으로 말한다. 은퇴하고 나면 보이는 것이 있다고…! 쉰한 살에 홀로서기를 시작한 강원국 작가는 세 가지가 절실하다고 했다. 명함도 계급장도 없이 온전히 존재 자체로 가치를 증명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1. 콘텐츠
“우선 ‘누구’ 하면 떠오르는 콘텐츠가 필요하다. 나는 그걸 ‘글쓰기’로 잡았다. 나의 정체성은 ‘글쓰기에 관해 말하고 쓰는 사람’이다. 이 테마가 지루해지고 할 말이 소진될 즈음 ‘말하기’란 주제를 집어 들었고, 지금은 ‘공부’를 주요 테마로 삼고 있다. 앞으로 ‘인간관계’도 다뤄볼 계획이다.”
2. 스토리
“콘텐츠만으로는 돈이 되지 않는다. 공짜 콘텐츠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매우 깊이 있는 콘텐츠가 아니면 재미있기 어렵다. 그래서 스토리가 필요하다. 스토리가 들어가야 재밌어진다. 더욱이 콘텐츠에 자기 스토리를 입혀야 자기만의 콘텐츠가 되고, 그런 콘텐츠여야 사람들이 돈을 지불하고 산다.”
3. 캐릭터
“팬덤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과거 연예인의 전유물이던 팬클럽이 정치인을 넘어 일반인으로까지 전이되고 있다. 팬덤을 거느리는 이들은 더 이상 콘텐츠나 스토리를 파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캐릭터를 팔고 있다.”
“결국은 글쓰기다. 자신에게 콘텐츠와 스토리가 있고, 자기가 어떤 캐릭터인지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바로 글이다. 글을 써야 한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만약 직장으로 돌아간다면 콘텐츠와 스토리, 캐릭터를 장착하는 준비와 노력을 충실히 할 것이다. 그러면 직장 생활도 더 활기차고 열성적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콘텐츠, 스토리, 캐릭터. 결국은 글쓰기다. 글을 써야 한다.”
에디터 조형애 출처 강원국의 글발 만들기 디자인 유영현
글쓰기가 힘들다는 분들을 자주 만난다. 내 대답은 간명하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도, 30년 넘게 글 쓰고 책 써서 먹고산 내게도 글쓰기는 힘든 일이다.
글쓰기가 힘든 이유는 여럿이다. 우선, 글쓰기는 나의 민낯을 드러내는 일이다. 글은 내가 아는 지식과 정보의 수준, 내 생각의 깊이와 감정의 변화, 내가 살아온 여정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벌거벗고 남들 앞에 서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더욱이 글은 누군가의 평가가 따른다. 말처럼 흩어지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기록으로 남아 있다. 글쓰기는 또한 이런저런 역량을 요구한다. 어휘력, 문장력, 논리력 등등. 집중력과 끈기도 필요하다.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지적인 부하가 걸리는 작업이다.
욕심을 내려놓고 쓰자
글쓰기처럼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는 첫 번째 길은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글쓰기가 두렵고 힘든 이유는 잘 써야 한다는 부담이 커서다. 기대 수준을 낮추고 어깨의 힘을 빼면 누구나 쓸 수 있다. 누가 당신에게 천하의 명문을 쓰라 했는가. 글을 못 쓰면 패가망신당할 일이라도 있는가. 왜 못 쓰는가. 한글을 모르는가? 쓸 수 있는 종이와 펜이 없는가? 못 쓰는 이유는 단 하나, 잘 쓰려는 욕심 때문이다.
욕심을 내려놓는 방법이 있다. 자주 쓰면 된다. 곧바로 또 쓸 것이므로 지금 쓰는 글에 목숨 걸지 않는다. 지금 못 보여준 것이 있으면 다음 글에서 보여주면 된다. 지금 못 써도 다음에 만회할 기회가 있기에 그냥 쓴다. 하지만 가끔 쓰면 그냥 쓰기 어렵다. 모처럼 주어진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기 마련이다. 물론 글을 자주 쓰다 보면 또 다른 욕심이 생기기도 한다. 작가들은 이런 욕심 앞에서 낙심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쓰면 쓸수록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욕심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차후 문제다. 우선은 자주 쓰는 것으로 욕심을 잠재워보자.
독자에게 주눅 들지 않는 방법
욕심과 쌍을 이루는 글쓰기 장애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주눅이다. 글은 독자가 있고, 독자는 내 글에 감 놔라 대추 놔라 상관할 권한을 갖고 있다. 이에 시비를 걸어서는 안 된다. 다행히 대다수 글 쓰는 사람은 그럴 생각이 없다. 오히려 여기에 손뼉을 맞추기라도 하듯, 독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안달이다. 이런 조바심이 글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독자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한다. 문제는 주눅 들면 글을 잘 쓸 수 없다는 점이다. 잔뜩 얼어붙은 손으로는 자판을 두드릴 수 없다.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머릿속으로만 썼다 지웠다 반복한다.
겁이 많고 남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나는 늘 독자 앞에 서면 오금이 저린다. 그런 내가 글쓰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두 가지 시도를 하면서다. 하나는 아내를 글동무로 두는 것이다. 직장에 다닐 적에는 아내가 내 글을 보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어디 나가지 않으면서부터 쓴 모든 글의 첫 번째 독자는 아내가 됐다. 아내는 내 글을 늘 좋다고 칭찬한다. 물론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으면 기탄없이 지적도 하지만, 대부분 괜찮다며 격려한다. 나는 이 말에 기대어 글을 쓴다. 아내에게 보여줄 요량으로 후다닥 글을 쓴다.
독자에게 주눅 들지 않기 위해 활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독자를 특정하는 것이다. 불특정 다수의 독자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내가 잘 알고 내게 우호적인 한 사람을 정해서 내 머릿속에 앉혀놓고 쓰면, 그 독자는 무섭지 않다. 그 독자를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 대상을 주로 직장 생활할 때 알고 지내던 사람 중에서 고른다. 써야 할 글에 따라 그에 맞는 독자를 선택한다. 보고서 관련 글이면 내가 아는 30대 여성 김 모 씨를 소환하고, 지금 쓰는 이런 글은 입사 동기이자 오랜 친구인 박 모 씨를 불러다 내 앞에 앉힌다. 그리고 이들에게 얘기한다 생각하고 조곤조곤 쓴다. 이렇게 쓰면 독자가 두렵기는커녕 그들이 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가려운 곳이 어디인지 훤히 알 수 있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간절함까지 더해져 좀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다.
나는 루틴으로 쓴다
욕심과 두려움을 어느 정도 잠재우고 나면, 그다음 할 일은 습관 들이기다. 글은 쓰고야 말겠다는 의지로는 쓰기 어렵다. 일상적으로 의욕을 불태우기가 어디 쉬운가. 이런 의지와 의욕은 오래가기 어렵다. 우리 뇌는 이런 일에 쉬 지친다. 아니, 자기를 옭아매려는 이런 시도 자체를 싫어한다. 글쓰기를 루틴화해야 한다. 나는 하고 싶은 일 사이에 글쓰기를 끼워 넣는다. 하고 싶은 일을 한 후 글을 쓰고, 하고 싶은 일로 보상하는 것이다.
첫 책 ‘대통령의 글쓰기’를 쓸 때 다니던 출판사에서 두 달간의 유급 휴직을 받았다. 집에 들어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20여 일간 거의 글을 쓰지 못했다. 매일 의지를 다지며 글쓰기를 시도했지만 써지지 않았다. 글을 쓰진 못했어도 그 기간에 매일 하던 일이 있었다. 산책과 커피 테이크아웃, 샤워가 그것이다. 그렇게 20여 일이 되던 어느 날, 그날도 여느 때처럼 산책을 마친 후 커피숍에 들러 커피를 주문한 후 집에 돌아가 글을 쓰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조금 달랐다. 주문한 커피를 받아 들자마자 빨리 집에 가서 글을 쓰고 싶었다. 집에 와서 샤워를 하니 쓸거리가 막 떠올랐다. 그것들을 잊을까 봐 몸을 씻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바로 그날부터 봇물이 터지듯, 봉인이 해제되듯, 산책을 나가면 내 뇌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쓸거리가 떠올랐다. 그렇게 글을 쓴 후에는 막걸리 한 병씩 마시며 나 자신을 칭찬했다. 이런 소소한 보상은 상승효과를 가져와 내 뇌는 막걸리 먹고 싶은 마음에 쓰기를 재촉했다.
습관은 글쓰기 제조 라인이다. 정해진 루틴 위에 나를 올려놓으면 뇌는 써야 할 시간임을 인지하고 글을 쓴다. 이쯤 되면 안 쓰고 버티는 것보다 쓰는 게 더 편하고 익숙해진다. 나만의 얘기가 아니다. ‘강원국의 지금 이 사람’이란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만난 시인•소설가 모두 글쓰기 전후에 자신만의 루틴을 갖고 있었다. 어떤 이는 글을 쓰기 전에 연필을 깎고, 어떤 이는 음악을 들었으며, 또 다른 이는 카페에 갔다. 이런 루틴이 없는 작가는 없었다. 그들의 글은 루틴의 산물이었다.
시간만 들이면 누구나 쓸 수 있다
마음의 준비가 되고 습관이 몸에 배었으면 이제 남은 건 시간을 들이는 일이다. 글쓰기에서 가장 필요한 것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시간을 꼽는다.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자신감의 원천은 시간이다. 나는 시간에 의지해 글을 쓴다. 내게 시간이 있다는 건 늘 희망이었다. 시간만 들이면 글은 언제든 쓸 수 있다. 써질 때까지 쓰면 써지는 게 글이니까. 아는 게 부족하다고? 글쓰기 실력이 없다고? 시간은 이 모든 걸 채워주고 키워준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가.
내가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은 다섯 가지다. 첫째, 글 쓰는 시간을 낸다. 당신은 글을 쓰는 데 시간을 얼마나 할애하는가? 하루에 몇 시간씩 글을 쓰라는 게 아니다. 나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다만 나는 하루에 몇 줄이라도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블로그나 SNS에, 메모장에 한 줄이라도 쓴다. 글을 전혀 쓰지 않는 날은 없다. 이것이 중요하다. 누가 작가인가. 오늘 글을 쓴 사람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작가는 오늘 하루 잠시라도 글을 쓰는 데 시간을 낸 사람이다.
둘째, 자투리 시간을 활용한다. 나는 짬짬이 글을 쓴다. 글을 써야겠다고 정색을 하고 쓰면 잘 안 써진다.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때처럼 굳이 글을 쓰지 않아도 되는 시간에 오히려 글이 잘 써진다. 학교 다닐 적에도 시험 기간에는 공부하기 싫다가 시험이 끝나고 놀아도 되는 시간에 하는 공부는 꿀맛이었다. 누구에게나 짬이 난다. 그 시간에 글을 써보라. 쓰고 있는 자신이 대견하고 쓰는 행위에서 뿌듯함을 느낄 것이다.
셋째, 사람마다 글이 잘 써지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을 찾아서 공략하자. 새벽녘일 수도, 심야일 수도 있다. 우울하거나 심심할 때일 수도 있고, 텐션이 올라 의욕 충만한 시간일 수도 있다. 나는 도서관에 앉아 있을 때가 그 시간인 적도 있고, 카페에서 그런 시간을 만난 적도 있었다. 무언가를 읽거나 들은 직후에 그런 시간이 온다는 걸 안 후부터는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는다.
넷째, 마감 시한을 정해놓고 쓴다. 글은 완성하는 버릇이 필요하다. 쓰다가 마는 게 아니라 끝까지 써보는 습성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데드라인을 두고 써야 한다. 언제까지 글을 완성한다는 마음으로 쓰고, 실제로 그것을 지켜야 한다. 블로그에 사흘에 하나씩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으면 그렇게 하고, 브런치에 한 달에 한 편씩 글을 올리겠다고 약속했으면 그것을 지키는 것이다. 직장 다닐 때는 보고서이든 기획서이든 늘 마감이 주어졌다. 소심한 나는 늘 마감을 지켰다. 혼나는 게 무섭고 잔소리 듣는 게 싫어서 마감 시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다. 직장을 나온 후 지난 10년간은 스스로를 구속하기 위해 신문이나 잡지의 연재를 마다하지 않았다. 마감 지키는 글쓰기를 지속해왔다.
다섯째, 오래 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오래 살아야 한다. 오래 쓰면 잘 쓸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순 넘어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고, 칠순을 넘겨 빛을 본 작가들이 부지기수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쓴 유일한 장편소설이자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닥터 지바고’는 그의 나이 63세에 완성됐다. ‘로빈슨 크루소’를 쓴 대니얼 디포는 예순이 다 되어 글을 쓰기 시작했고,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58세에 썼다. 박완서 선생도 전업주부로 살다가 마흔 살에 등단했다. 작가의 세계만큼 ‘늦깎이’, ‘대기만성형’이 통용되는 분야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래 쓰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한다. 나는 매일 걸으면서 쓸 수 있는 날을 늘린다. 당장은 잘 쓰지 못해도 오래 살기만 하면 언젠가는 글을 잘 쓰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오늘도 쓴다. 자, 이제 쓸 시간이다.
올해에는 글을 써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일까. 바로 글감이다. 무엇에 관해 쓸지가 문제다. 사실 글쓰기는 ‘어떻게’보다 ‘무엇’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이 내게 묻는다. “글을 ‘어떻게’ 해야 잘 쓰나요?” 질문의 순서가 잘못됐다. “‘무엇’에 관해 글을 쓸까요?” 이 물음이 먼저여야 한다.
무엇에 관해 쓸지 고민하는 이에게 나는 자신 있게 권한다. “자신에 관해 쓰세요. 자신에 관해 쓸거리는 세 가지가 있어요. 자신의 생각, 자신의 느낌, 자신의 경험이죠. 이 중 가장 쓰기 쉬운 게 자신의 경험입니다.”
누구나 쓰기 쉬운 ‘경험’
생각과 느낌을 쓰기는 어렵다. 하지만 경험을 쓰는 건 어렵지 않다.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나이만큼 있다. 내 경험은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다. 경험은 또한 차등이 없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돈이 많은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가방끈이 길든 짧든 경험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어렵고 힘든 사람이 경험은 더 풍부하다. 또 그렇게 아프고 슬픈 경험, 굽이굽이 험난한 경험이 탄탄대로를 걸은 경험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가르쳐주는 것도 많다.
레프 톨스토이는 ‘어떻게 살 것인가’란 책에서 세 가지 방법으로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명상과 모방과 경험이 그것이다. 그리고 톨스토이는 이 세 가지 가운데 경험이 가장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글을 쓰는 데는 명상이나 모방이 더 어렵다. 있는 그대로를 서술하는 경험이 더 쉽다.
인생은 경험의 모음이다. 산다는 건 경험하는 것이다. 경험이 모여 삶을 이룬다. 첫사랑, 첫 출근, 첫 등교 등과 같은 첫 경험을 비롯해 숱한 만남과 선택의 경험 등 우리는 무수히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걸 글로 써보자.
경험을 쓰는 일곱 가지 방법
첫째, 기억을 떠올려보자. 어린 시절, 학창 시절 경험을 회상해보라. 떠오르는 기억이 없으면 그 시절 유행했던 노래도 들어보고, 빛바랜 사진첩과 일기장도 들춰보자. 당시 기사를 찾아보는 것도 좋다.
둘째, 스스로에게 질문해본다. ‘가장 기뻤던 순간, 슬펐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은 무엇인가요?’, ‘그 당시로 돌아가면 어떻게 했을 것 같나요?’, ‘반대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만났던 사람 중에 가장 고마웠던 사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누구이며, 그 이유는요?’,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되었던 사건이 있다면요?’, ‘가장 충격적이었던 경험은 무엇인가요?’ 등등.
셋째, 탐문한다. 자신의 기억에만 의존하지 말고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수집해보는 것이다. 부모님이 살아 계시면 그분들에게 여쭤보고, 형제자매, 과거 직장 동료, 어렸을 적 친구들을 만나 그 시절 아련한 추억에 잠겨도 보자. 스스로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혹은 자신도 모르고 있던 내용을 건져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또 자신의 경험만 글감이 되는 건 아니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의 이야기도 내 글을 풍성하게 만드는 좋은 재료가 된다. 무엇보다 이런 기억 여행은 그 자체로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다.
넷째, 새로운 경험을 한다. 과거 기억만 쓰면 소재의 한계에 부닥친다. 밑천이 금세 드러날 수밖에 없다. 살고 있는 현재를 써야 한다. 현재를 쓰기 위해선 시도하고 도전해야 한다. 나는 매일 한 일을 기록한다. 기록이 없는 날은 허전하다. 기록이 빼곡한 날은 왠지 뿌듯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혼자서 흐뭇하다. 마치 고기 잡는 어부가 만선을 이룬 기분이랄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록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 경험하면서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경험이 내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많다. 현업을 떠난 사람은 더욱 그렇다. 뿐만 아니라 그 나이까지 해온 경험이 있어 보다 원숙하게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직장에 다닐 때까지는 경험이 제약된다. 맡겨진 일, 시키는 일에 한정된다. 나를 위한 경험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경험이다. 내 말을 하고 내 글을 쓰는 경험이 아니라, 남의 말을 듣고 남의 생각을 읽는 경험이다. 나이 들어 하는 경험은 잘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다. 어차피 덤이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상황에서의 시도는 하는 만큼 남는 장사다.
다섯째, 미래도 괜찮다. 앞으로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는 일, 바라고 소망하는 일도 훌륭한 글감이 된다. 10년 후, 20년 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고, 꿈과 목표를 이뤘을 때의 상황을 그려보자. 미래는 상상의 결과물이고,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하니까 말이다.
여섯째, 하지 못한 경험도 글의 재료가 된다. 나는 할 수는 있었으나 하지 않은 일이 있다. 정치인의 일이다. 아마 했으면 잘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하고 싶었으나 못 한 일이 있다. 언론인이 되는 것이다. 아마 했으면 잘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런 내용을 글로 쓰면 된다. 이처럼 한 일만 경험이 아니다. 하지 못한 일, 하고 싶었던 일, 안 한 일 모두 경험이다. 미련의 경험, 희망의 경험이다.
일곱째, 독서다. 경험에는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이 있다. 내 몸으로 한 경험이 직접경험이요, 다른 사람의 경험은 간접경험이다. 간접경험은 책에 널려 있다. 이런 간접경험을 글에서는 사례라고 한다. 사례가 풍부할수록 글은 더 풍부해진다. 책을 읽고 사례를 찾아보자.
경험을 쓰는 방법
이렇게 쓸거리가 마련되면 ‘무엇’이라는 걸림돌은 사라진다. 다음은 ‘어떻게’ 쓸 것인지, 그 문제에 봉착한다.
먼저, 솔직하게 써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첫 관문은 솔직함이다.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경험을 말하는 용기로 그 문을 활짝 열어젖혀야 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써야 한다. 오감을 모두 동원하고 육하원칙을 다 집어넣어 써라.
이야기 순서와 비중도 중요하다. 과거, 현재, 미래를 평면적으로 나열하기보다는 과거에서 미래로 비약하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고, 지금 이야기를 하다가 과거를 회상하는 식으로 어제와 오늘, 내일을 넘나들면 좋다. 시간뿐 아니라 좋은 일과 궂은일, 도와준 사람과 해코지한 사람, 친구와 천적이 번갈아 등장해야 한다. 또 어떤 이야기는 비중 있게 다루고, 어떤 이야기는 살짝 맛만 보여주는 식으로 무게를 달리해야 글에서 입체감이 느껴진다.
경험을 얘기한 후에는 그걸 겪으면서 느끼고 깨달은 바를 써야 한다. 독자들은 글을 재미있게 읽고도, 그것에서 얻는 게 없으면 실망한다. 다행히 모든 경험에는 시사점이 있다. 자신이 겪은 일에 관해 충분히 숙고해서 숙성시키면 깨달음과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바로 그 경험의 의미를 담으면 된다. 같은 경험도 각자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다음으로, 경험의 배경과 맥락을 추가한다. 그 경험이 어떤 배경에서 왜 일어났는지, 무엇이 그런 경험을 가능하게 했는지, 경험이 일어난 사회적·경제적 맥락과 상황은 무엇이었는지 설명해준다. 예를 들어 돈이 없어 학교에 진학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면 당시 사회의 경제적 조건은 어떠했는지 알려줄 필요가 있다.
끝으로, 경험을 일반화해줘야 한다. 자신의 경험만 쓰고 말면 독자들이 “왜 당신 얘기를 내게 하는 거야?”라고 물을 수 있다. 그때 일반화를 통해 “이건 나만의 얘기가 아니고, 당신에게도 해당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화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유사한 경험을 한 유명한 사람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경험이 자신만의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의 것으로 보편화된다.
경험이 주는 혜택
경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선사한다. 그 하나는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쉰 살 전까지 말하는 게 가장 두려웠다. 어떻게든 말하는 자리를 피했다. 말 안 해서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쉰 살 넘어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고, 말을 해보니 내가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다. 아니, 말하는 게 즐거운 사람이었다. 만약 쉰 살 넘어서도 직장에 계속 다녔으면 말없이 살았을 것이고, 죽을 때까지 내가 말할 수 있는 사람이란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강의나 방송 일을 경험하면서 내가 말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경험은 나조차 몰랐던 나를 아는 기회가 된다.
경험은 또한 보다 넓은 시야를 갖게 해준다. 나의 마지막 직장은 출판사였다. 거기서 불과 일 년 좀 넘게 일했지만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출판업계를 알게 됐고, 내 책을 쓰게 됐다. 당시 나는 새로운 우주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우주가 있을까. 정유소, 편의점, 마트, 음식점 등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들 하나하나가 그 안에 우주를 품고 있을 것이다. 그 세계에 들어가 경험해보면 밖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내가 모르던 신천지가 펼쳐진다.
경험은 치유의 메시지도 준다. 지난 기억을 곱씹어보면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다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서럽고 안타깝고 후회스러운 기억 모두 의미가 있다. 그런 기억을 더듬다 보면 아픈 상처가 아물고 치유된다.
경험은 다음 세대에게 본보기도 된다. 이 땅에 와서 살았으면 뭐라도 남기고 가야 할 것 아닌가. 경험이 개인에 머물면 기억에 불과하지만 이걸 글로 쓰면 다른 이에게 영감을 주고, 누군가의 멘토가 될 수 있으며, 다음 세대에까지 전승된다.
모든 사람은 한 권의 책이다. 그것도 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책이다. 나만의 경험을 기록하자. 기자같이 오늘의 나를 쓰고, 사관처럼 자신의 역사를 써 내려가자.
글쓰기는 중장년이 늘 품고 사는 꿈입니다. 지나온 삶을 정리하거나 인생의 새로운 도전을 위해 글쓰기를 꿈꾸지만, 늘 어렵기만 합니다. 그래서 독자 여러분을 위해 새로운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글라잡이’ 강원국 작가와 함께 다시 펜을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편집자 주-
내 나이 쉰한 살에 직장을 나왔다. 건강 문제도 있었기에 쉴 요량이었다. 아내가 월 200만 원은 벌어와야 한다고 했다. 그깟 200만 원쯤이야. 그런데 막상 할 일이 마땅치 않았다. 내겐 세 가지가 없었다. 우선 운전면허 말고는 어떤 자격증도 없었다. 아, 2급 정교사 자격증이 있지만 무용지물. 뭘 고치거나 만들 수 있는 기술도, 손재주도 없었다. 여기에다 무슨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농사를 짓거나 장사할 수 있는 깜냥도 못 됐다. 그야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의 일상 루틴 7단계
지금 내 나이 예순한 살. 그새 10년이 훌쩍 지났다. 나는 글 쓰고 말하는 일로 먹고살았다. 나의 일상은 단순하다. 1단계로 지식이나 정보, 경험, 관계를 ‘수집’한다. 그러기 위해 책을 읽고, 온라인 강의를 듣고, 사람들을 만난다. 강의하고 글 쓰는 것도 내겐 일인 동시에 무언가를 수집하는 행위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또 글을 쓰면서 새로운 게 입력된다. 그래서인지 나는 강의하러 집을 나설 때 직장 다닐 때처럼 발걸음이 무겁지 않다. 외려 약간의 설렘마저 느껴진다. 오늘은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얻게 될지, 또 어떤 자극을 받고 무슨 경험을 할지 기대된다.
2단계는 모은 것들을 재료로 하는 ‘숙고’다. 하루 세 번, 그러니까 아침에 반신욕할 때, 저녁 먹고 산책하면서, 그리고 잠들기 전에 생각한다. 읽은 것을 복기해보기도 하고, 들은 내용을 곱씹어보기도 한다. 내일 할 일을 떠올려보며 강의는 어떤 내용으로 할지, 써야 할 글은 무슨 내용으로 채울지, 사람을 만나서는 무슨 얘기를 할지 궁리해본다. 나는 평화롭고 안온한 이 시간이 좋다. 무엇보다 이 시간은 수집한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다. 책에서 읽거나 강의에서 들은 내용은 온전한 내 것이 아니다. 아직 요리하지 않은 날것의 재료일 뿐이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거쳐야만 비로소 내 것이 된다.
3단계는 ‘메모’다. 메모는 ‘수집’ 과정에서 이뤄지기도 하고, ‘숙고’를 통해서도 나온다. 책에서 한 꼭지 글을 읽으면 다음 꼭지로 넘어가기 전에 반드시 메모할 거리를 챙긴다. 다른 사람의 블로그나 페이스북에서 글을 읽어도, 포털사이트에서 칼럼을 접해도, 유튜브에서 짧은 강의를 들어도 기어이 메모거리를 찾아내고야 만다. 낚지 못하면 재차 읽거나 다시 돌려본다. 나의 뇌는 메모거리 찾기에 혈안이 돼 있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누군가와 대화할 때 호시탐탐 찾는다. 메모거리가 잡혔을 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가끔은 메모가 메모를 낳고 메모가 메모를 불러온다. 수지맞는 기분이다.
4단계는 ‘스몰토킹’이다. 메모한 것을 누군가에게 써먹는다. 나는 주로 아내에게 말해본다. 책에서 읽거나 강의에서 들은 내용, 혼자 생각하다 떠오른 기억, 특정 주제나 사안에 대한 내 생각과 느낌 등을 말해본다. 이렇게 말해보는 것은 중요하다. 말해봐야 내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고, 또 말하면서 그것들에 살이 붙고 정리가 된다. 무엇보다 말해보면 반응을 알 수 있다. 상대방이 어떤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어떤 말은 시원찮아 하는지 말하면서 알 수 있다. 직장에 다니지 않으면서 만들어진 아내라는 말동무는 천군만마 같은 존재다.
5단계는 ‘짧은 글쓰기’다. 말해봐서 반응이 괜찮은 것, 내가 봐도 말이 될 성싶은 것은 내 홈페이지, 네이버 블로그,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트위터, 티스토리, 카카오톡채널, 스레드 등에 짧게 쓴다. 나는 그런 글을 지난 10년 동안 2만 개 가까이 써왔다.
6단계는 ‘말하기’다. 나는 이렇게 만들어진 짧은 글들을 연결하고 조합해 강의하고 방송을 한다. 돈 받는 말하기를 하는 것이다. 2만 개 가까운 말 조각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않고 말할 수 있다. 또 그렇게 말하는 시간이 긴장감 있고 재미도 있다.
마지막 7단계는 바로 ‘글쓰기’다. 앞서 말했듯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말할 수 있으므로 이걸 가지고 글을 쓸 수도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아무것도 찾아보지 않는다. 말할 수 있으면 쓸 수 있다. 한글을 모르지 않고서야 쓰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글을 쓰는 데는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 시간만 들이면 된다. 나는 쉰한 살 이후 시간이 많다. 직장 다닐 적에는 말을 잘 들으면 월급이 나왔다. 시키는 일을 잘 듣고 처리하면 됐다. 하지만 직장을 떠나고 보니 시키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잘 듣는다고 돈을 주지도 않는다. 듣기가 아니라 말하고 써야 돈을 준다.
누구나 언젠가는 직장을 떠난다. 직장을 나와서도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에게 글쓰기는 직장 다닐 때보다 더 절실한 과업이다. 글쓰기는 정신 건강을 지키는 데도 도움이 된다. 앞으로 대다수가 백세 장수를 누리게 될 것이다. 문제는 나이와 함께 필연적으로 찾아올 수밖에 없는 뇌의 손상이다. 이를 예방하고 늦추는 데도 글쓰기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인생 2막에 필요한 세 가지
직장을 나와보니 세 가지가 절실하다. 그것은 바로 콘텐츠와 스토리, 그리고 캐릭터다. 직장에 다닐 적엔 소속과 직함으로 모든 게 해결됐다. 그래서 보다 나은 ‘어디’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했고, 들어간 ‘어디’에서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소속과 직함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줄 뿐 아니라, 인정과 대접도 부여해줬다. 하지만 직장을 나오면 명함도, 계급장도 없다. 온전히 나란 존재 자체로 내 가치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누구’ 하면 떠오르는 콘텐츠가 필요하다. 나는 그걸 ‘글쓰기’로 잡았다. 나의 정체성은 ‘글쓰기에 관해 말하고 쓰는 사람’이다. 이를 위해 관련된 대부분의 책을 찾아 읽고, 유튜브 강의를 들었다. 이런 생활을 시작하고 5년 동안은 글쓰기만 생각하고 글쓰기에 꽂혀 살았다. 또한 글쓰기에 관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등에 무수히 많은 글을 썼다. 이 테마가 지루해지고 할 말이 소진될 즈음 ‘말하기’란 주제를 집어 들었고, 지금은 ‘공부’를 주요 테마로 삼고 있다. 앞으로 ‘인간관계’도 다뤄볼 계획이다.
하지만 콘텐츠만으로는 돈이 되지 않는다. 인터넷 공간에 공짜 콘텐츠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매우 깊이 있는 콘텐츠가 아니면 재미있기가 어렵다. 그래서 스토리가 필요하다. 스토리가 들어가야 콘텐츠가 재밌어진다. 더욱이 콘텐츠에 자기 스토리를 입혀야 자기만의 콘텐츠가 되고, 그런 콘텐츠여야 사람들이 돈을 지불하고 산다. 그 사람의 스토리가 입혀진 콘텐츠는 그 사람에게서만 들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스토리텔링이 한때 유행을 타고 스토리텔러가 각광받았다.
사람들은 이제 점점 더 감성을 추구하고 있다. 카페를 고를 때 커피 맛과 가격, 위치 등을 따지던 시절을 지나,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어느 카페에 누가 다녀갔대’, ‘누가 하는 카페래’ 하며 이야기를 좇아 카페를 찾았고, 이제는 이야기는 물론 ‘감성’을 자극하는 카페에 사람들이 몰린다. 마음에 들면 아무리 먼 데 있어도 가격 불문하고 찾아간다. 그저 예쁘고 좋다는 게 찾는 이유의 전부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특정 인물을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팬덤 문화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과거 연예인의 전유물이던 팬클럽이 정치인을 넘어 일반인으로까지 전이되고 있다. 출판 시장만 보더라도 저자를 보고 책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다. 이전에는 내용에 끌리거나 자신이 그런 부류를 좋아해서 책을 구매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면, 이젠 특정 저자의 책은 무조건 구매한다는 사람들에 의해 출판 시장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팬덤을 거느리는 저자들은 더 이상 콘텐츠나 스토리를 파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캐릭터를 팔고 있다.
‘메신저가 되라’, ‘백만장자 메신저’의 저자 브렌든 버처드는 말과 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눴다. 자신이 공부한 결과를 팔고 사는 ‘학습기반형 메신저’, 자기 경험과 이야기를 파는 ‘성과기반형 메신저’, 자신의 삶 자체가 메시지인 ‘롤모델형 메신저’가 그것이다. 바로 ‘롤모델형 메신저’가 자기 캐릭터를 파는 사람이다.
결국은 글쓰기다. 자신에게 콘텐츠와 스토리가 있고, 자기가 어떤 캐릭터인지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는가? 바로 글이다. 글을 써야 한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만약 직장생활로 돌아간다면 콘텐츠와 스토리, 캐릭터를 장착하는 준비와 노력을 충실히 할 것이다. 그러면 직장생활도 더 활기차고 열성적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노년의 목표는 유유자적
노년의 목표는 여유로운 삶이다.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여유 있는 일상을 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지속적으로 글을 써야 한다. 글쓰기로 크든 작든 돈을 벌어야 한다. 글쓰기는 또한 나를 정신적으로 강건하게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은 나를 치유해줄 뿐 아니라 매일매일 심기일전하게 한다. 글을 쓰면서 나는 감정의 찌꺼기를 걷어내고 새로운 각오와 희망의 불을 지핀다. 나아가 글쓰기는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공유하는 일이다. 남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고 내어주는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
10년 전, 지금 하는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선배에게 ‘지식자작농’으로 사는 게 어떠냐는 얘기를 들었다. 지식 농사지으면서 살라는 얘기였다. 선배는 그러기 위해 우선 책부터 쓰고 온라인 공간에서 자기 영토를 넓혀가라고 주문했다. 10년간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내 땅을 일구고 넓혀왔다. 그리고 2만 개 가까운 글로 그 땅을 가꿔왔고, 10권의 책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이제 수확하는 기쁨을 넘어, 거둔 과실을 나누는 즐거움을 맛보고 싶다. 그게 바로 노년의 여유 있는 삶이 아닐까 싶다.
말하듯 쓰고, 쓰듯 말하기는 늘 어렵다. 강원국 작가는 그 어려운 걸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설 비서관실 행정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설 비서관, 대우 김우중 전 회장과 효성 조석래 회장의 스피치라이터로 일하며 글쟁이로 꽤 굵직한 경력을 쌓았다. 이후 집필, 강연, 방송 활동을 하며 ‘말발’, ‘글발’ 세우는 사람으로 정평이 난 그가 새 책을 냈다. ‘강원국의 진짜 공부’는 도약을 앞둔 이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전한다.
8년간 두 대통령의 말과 글을 다듬었던 경험과 내공을 담은 ‘대통령의 글쓰기’를 비롯해 ‘회장님의 글쓰기’, ‘강원국의 글쓰기’, ‘강원국의 어른답게 말합니다’, ‘강원국의 결국은 말입니다’ 등 글과 말에 관한 책으로 불황의 늪에 빠져 있는 출판 시장에서 50만 부 넘는 판매량을 올렸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모임에서 매일 말하고 써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길잡이가 됐다. 전국 방방곡곡으로 강연을 다니고, KBS 라디오 프로그램 ‘강원국의 지금 이 사람’을 진행하며, 방송이나 유튜브에도 출연한다. 인터뷰를 진행하기 바로 전날 오전에도 신간 ‘강원국의 진짜 공부’ 홍보차 모 뉴스에 출연해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공휴일이라 시청률이 많이 나왔나 보다’라는 겸손한 한마디에 묘한 기쁨이 묻어났다. 글쓰기와 말하기 전도사 강원국 작가가 갑자기 공부 이야기라니, 그 까닭은 무엇일까?
“원래 글쓰기 젬병이었어요. 신입사원 시절 얼떨결에 맡아 쓴 대우증권 창립 20주년 사사(社史, 회사의 역사 또는 그 기록)도 괴발개발이었습니다. 기한을 맞춰야 해서 겉만 그럴싸하게 만들었는데 단숨에 글 잘 쓰는 사람이 됐죠. 그 계기로 사보와 사내 방송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됐어요. 일은 하다 보니 늘더군요. 인정받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했어요.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 ‘적자생존’이다, 생각하며 임했습니다. 일반 기업에서든, 청와대에서든, 하루하루 해내지 못하면 끝장이라는 압박이 심했어요. 치열한 시간 속에서 살길은 공부뿐이라 여겼습니다. ‘강원국의 진짜 공부’에는 직장 생활 25년을 포함해 퇴직 후 현재까지 말, 글, 사람 공부로 깨우친 바를 모두 담았습니다.”
인생에 한 번은 해야 할 공부
올해로 강의 10년 차를 맞은 그는 가는 곳마다 공부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어떻게 하면 집중력을 높일 수 있나요?’, ‘도대체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등 다양하다. 공부에 대한 그의 사유와 결론을 책에 꾹꾹 눌러 썼다. △말하기, 쓰기 중심의 공부 △혼자 하거나 경쟁하기보다 함께 하고 협력하는 공부 △소유보다 공유를 넓히는 공부 △주도적인 공부 △가슴과 손발로 하는 공부 △학교 공부에서 그치지 않는 평생 공부로 총 여섯 가지다. 기존에 저술한 말과 글 관련 책들이 ‘출력’을 위한 조언이라면, 이번에는 ‘입력’을 위한 방향을 제시한다.
“나이가 드니 공부가 참 재밌더라고요. 학교 다닐 적에는 오직 시험을 잘 보려 공부했지만, 지금은 필요와 기호에 따라 여러 곳에 실제로 써먹을 수 있는 공부를 해요. 현역 시절보다 물질적·정신적으로 많은 투자가 가능하기도 하죠. 살아오면서 쌓은 경험이 공부의 요령을 알려줘 성취감도 더욱 크고요. 많은 사람이 그렇듯 저도 이제껏 공부라는 행위를 가장 많이 했어요. 요즘은 강의하기 위해 또 공부하죠. 평생 배우고 그걸 나누는 게 우리 삶인 것 같네요. 제가 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진짜 공부의 의미를 깨닫고 성장하는 방법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표의 초과 달성, 그리고
강 작가는 공부할 때 ‘사사구통’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사구통’은 고스톱 용어인데 멍따 4장, 띠 4장, 피 9장으로 모아놓은 패는 많지만, 딱 하나씩 패가 모자라서 결국 점수를 하나도 못 내는 경우를 뜻한다. 타인의 기준에만 맞추며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 놓이기보다, 자신 있거나 하고 싶은 공부를 해서 만족을 얻어야 삶이 행복하다. 그 덕에 ‘대통령을 모시던’ 그는 이제 숱한 일정을 소화한다. 강원국 이름 석 자를 내걸고 본인의 경험, 지식, 생각을 나눈다. 강 작가는 비로소 ‘진짜 나’를 찾은 것 같단다.
“잘하는 걸 더 잘하는 게 중요합니다.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 있는 분야만 남기고 잘 알지 못하는 분야는 과감히 가지치기한 거예요. 이제 조직의 인정과 평가, 공동의 이익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나는 쉰 살이 되기까지 세상에 삿대질하고, 세상과 불화하며 살았어요. 공황장애나 과민대장증후군도 겪었죠.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까지 큰일 날 것처럼 굴었나 싶기도 해요. 지금은 아주 편안한 상태입니다. 그저 나만의 소소한 계획을 세우며 지내요. 책 10권 출간이 일생의 목표였는데, 2023년이 가기 전에 딱 열 권을 채우게 돼요. 사실 올해 두 권이 더 나오거든요. 조기 달성이자 초과 달성이 유력하네요. 또 나름의 꿈을 꾸겠지만, 누군가 채근하고 확인하려 덤비지 않으니까 부담은 없어요. 나다운 속도로, 내 길을 가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