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딸에게 보내는 백 년의 편지

입력 2025-11-20 06:00

김진애 도시건축가·국가건축정책위원장

북인북은 브라보 독자들께 영감이 될 만한 도서를 매달 한 권씩 선별해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해당 작가가 추천하는 책들도 함께 즐겨보세요.

너희 세대는 재앙의 가능성을 모두 알고 사는 시대에 사는 거야. 너희 세대의 운명이야. 생존 자체가 번영 이상으로 중요해. 부디 생존해. 생존 기술을 만들고 실현하는 미래 세대가 되기를 바라. (…) 부디 안전하게 22세기까지 살아남기를 진정으로 바라.

- ‘딸들에 관하여’, 32p

대통령소속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 취임 무렵, 김진애 작가가 낸 책이 ‘딸들에 관하여’다. 공공의 언어로 세상을 설계하던 그가 이제는 마음의 지형을 탐색한다. 여기에서 ‘딸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여성을 뜻한다. 22세기를 살아갈 딸들을 향한 메시지는 따뜻하면서도 단단하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MIT에서 도시계획 박사학위를 받은 김진애 작가는 도시건축가이자 정치인이다. ‘타임’이 선정한 ‘21세기 리더 100인’ 중 유일한 한국인이며, tvN 교양 예능 ‘알쓸신잡’에 출연한 첫 여성 박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멋진 여성’, 그리고 수많은 여성의 ‘롤 모델’로 불리는 그가 ‘딸들에 관하여’를 통해 후대 여성들에게 메시지를 건넨다. 김 작가는 “모든 여성은 딸이다. 딸에 관해 쓴다는 것은 모든 여성에 관해 쓰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 역시 누군가의 딸이고, 딸을 둔 엄마이며, 이제는 손녀를 사랑하는 할머니이기도 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 여름이와 다니를 보며 그는 22세기까지 살아갈 딸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책은 12가지 ‘삶의 힘’을 제시한다. 외로움과 두려움을 견디는 힘, 실패를 웃으며 이야기하는 힘, 스스로를 칭찬하는 힘, 변화 속에서도 희망을 붙드는 힘 등이다. 특히 김 작가는 여성이 반드시 해봐야 할 세 가지로 ‘창업·출마·낙선’을 꼽으며, 도전과 실패를 통해 성장하는 삶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는 남편과 함께 자신의 묘비명을 이미 써두었다고 한다. ‘인생은 의외로 멋지다’라고. 인생은 힘들고 고달프나, 삶은 뜻밖의 순간마다 빛을 낸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찬란히 살아남아! 이토록 위태롭고, 의외로 멋진 세계에서.”

▲김진애 작가의 저서와 사인(브라보 마이 라이프)
▲김진애 작가의 저서와 사인(브라보 마이 라이프)

‘딸들에 관하여’를 집필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2년 전 반려견 임당이가 세상을 떠났어요. 그때 정말 힘들었고, 치유의 방법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죠. 이후에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꺼내 써 내려갔고, 그렇게 2년 동안 이 책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탈고를 마친 게 작년 11월 말인데, 사흘 뒤 비상계엄이 선포됐어요. 빛의 혁명에서 수많은 여성이 거리에서 목소리 내는 모습을 보며 미래의 희망을 봤습니다. 그래서 권력과 정치에 관한 장을 완전히 다시 썼어요. 처음엔 걱정과 잔소리의 어조였는데, 결국 ‘너희는 날아오를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바뀌었습니다.

이 책의 필수 독자를 꼽는다면 누구일까요?

제 손녀 여름이와 다니, 그리고 그들이 살아갈 22세기 딸들에게 전하는 책이에요. 동시에 딸을 키우는 엄마와 아빠에게 드리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요즘 부모들은 딸이 씩씩하고 강하게 자라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정된 삶을 살길 바라죠. 그 두 마음이 늘 충돌해요. 저는 그런 부모들에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딸은 완전한 독립체’라고요.

책에서 제시한 12가지 ‘삶의 힘’ 중 가장 핵심이 되는 힘은 무엇인가요?

마지막 장의 ‘첫 경험의 기쁨을 유지하는 힘’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요. 나이가 들수록 일상이 무뎌지지만, 호기심이야말로 인생의 에너지예요. 시니어 세대도 여전히 새로운 첫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키오스크로 주문하기, 스마트폰으로 택시 부르기, 인터넷 뱅킹도 그렇죠. 잘 몰라도 괜찮아요. 해보면 됩니다. 시니어 세대에게 필요한 건 완벽함이 아니라 호기심이에요. 다음으로 중요한 건 ‘외로움과 두려움을 견디는 힘’이고요. 백세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내면의 근육이죠.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인생 자체가 여행이야. 소풍 같은 짧은 여행일지도 몰라. 우리는 기껏 백 년을 살고 기억을 쌓지만, 유전자를 공유하는 온 지구 사람의 기억을 우리는 공유할 수 있어. 나는 잠깐 있다가 가지만 인류가 쌓아가는 기억은 미래의 시간을 살아갈 후손에게 아주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거야. 나는 하나의 딸이지만, 이 세상의 수많은 딸과 앞으로 올 수많은 딸과 함께 기억을 공유할 수 있어.

- ‘딸들에 관하여’, 314p

시니어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삶의 태도가 있다면요?

오늘의 첫 경험을 마음속에만 묻어두지 말고, 기록하고 나누라고 말하고 싶어요. 스마트폰 메모도 좋고, 일기도 좋습니다. 내가 겪은 일을 객관화하고, 개인의 경험을 사회와 공유하는 것, 사회는 그렇게 발전합니다. 결국 중요한 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죠.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할 일이 참 많습니다.

건축가이자 정치인, 작가로 살아오면서 여성으로서 제약이 있었나요?

오히려 여성이라는 이유로 신뢰를 얻은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거칠고 경쟁이 치열한 건축의 세계에서 여성에게는 ‘성실하고 깨끗할 것’이라는 기대가 작용하죠.

물론 사회는 여전히 여성에게 개인적인 역할을 먼저 요구합니다. 아무리 성공해도 ‘엄마로서, 딸로서 먼저 생각하라’는 시선이 있죠. 40대 초반 ‘타임’이 선정한 ‘21세기 리더 100인’에 이름을 올렸을 당시 사회의 갑작스러운 기대가 어깨를 무겁게 했지만 동시에 저를 더 노력하게, 성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여성에게 기회의 문은 남성보다 좁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스스로 증명하며, 그 문을 조금이라도 더 넓히고 싶습니다.

딸, 엄마, 할머니 가운데 가장 어려웠던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죽을 때까지 아마도 ‘엄마’일 겁니다. 책에도 썼지만, 모녀 관계는 서로에게 기대가 많기 때문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엄마도, 완벽한 딸도 없지요.

저는 할머니 대신 ‘함니’라는 표현을 씁니다. 딸이 딸을 낳으면서 자연스럽게 함니가 되었죠. 함니에게는 정해진 역할이 없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될 때 봐주고, 잠깐 놀아주고, 함께 웃는 시간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육아는 엄마 아빠의 몫이고, 함니는 그저 옆에서 그들의 삶을 살짝 반짝이게 해주는 존재죠.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할머니가 된 후 처음 ‘귀엽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셨죠.

신기했어요. 60대에 들어서 처음 그런 말을 들었거든요. 국회의원 시절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제 표정과 말투를 보고 ‘귀엽다’고 하더라고요. 이 시대에는 ‘귀엽다’는 표현이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다’, ‘당신에게 호기심이 있다’는 뜻이더군요. 손녀를 보면서는 무게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니 아이의 귀여움이 더 잘 보였어요. 그러다 보니 저도 자연스럽게 귀여워진 것 같습니다.

국가건축정책위원장으로서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제 목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공간 민주주의’를 널리 알리는 일입니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주인의식이에요. 내가 사는 도시와 건물을 우리의 공간으로 인식할 때 진정한 공간 민주주의가 실현됩니다.

둘째, 건축산업의 중간 생태계를 복원하는 일입니다. 양극화 등의 문제로 건축산업이 늙어가고 있죠. 청년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주거, 일자리, 창업까지 이어지는 선순환이 가능합니다. 결국 제가 하고 싶은 일은 하나입니다. 모두가 주인으로서 함께 숨 쉬는 공간을 만드는 것.

22세기를 살아갈 딸들에게 메시지 부탁드립니다.

찬란히 살아남으세요. 기후 위기, 전쟁의 불안, 사회적 갈등이 끊이지 않는 시대에 살아남는다는 건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유혹과 욕망은 넘쳐나지만 실패의 위험은 더 커졌죠. 그래서 ‘살아남는다’는 건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의지를 잃지 않고 자존감을 지켜내는 일입니다. 하루하루를 버티며 작은 기쁨을 발견하는 것, 그렇게 살아남는 것이 사실상 기적이에요. 그러니 그 기적을 이루세요. 그것이 바로 찬란한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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