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된 어른은 없다. 오직 끊임없이 배우는 어른만이 있을 뿐이다. 어린 시절 공부는 정해진 답을 찾는 것이었다면, 어른의 공부는 다르다. 현장에서 부딪히는 실패 속에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책장 너머의 지혜 속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것들이 있다. 이것이 어른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배움이다. 지식을 채우는 것을 넘어 삶의 태도를 가다듬는 과정. 머리가 아닌 손과 발과 가슴으로 배우는 일. 알았다는 것이 곧 살았다는 뜻이 되는 순간. 이 연재는 그 순간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당신의 일상이 비로소 깊어지는 그곳까지 함께 걷고자 한다.

20세기 최고의 역사가라 불리는 아널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역경의 효능에 관해 말했다. “인류는 시련, 결핍, 천적이라는 도전에 응전하는 과정에서 문명을 꽃피워왔다. 반면에 찬란했던 시절의 기억에 머물러 있을 때 실패는 시작됐다.”
아홉 살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세상이 무서워졌다. 내 잘못도 아닌데 세상이 끝나는 경험을 한 나는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어머니의 빈자리는 내 결핍으로 남았다. 남 앞에 나서기 힘들었고, 남의 눈에 띄는 것이 어려웠다. 원하던 고등학교에 떨어지면서 나는 또다시 실패를 맛봤다. 당시 내가 살던 지역에선 ‘어느 학교를 다니는가’가 무척 중요했기에 어깨 한 번 펴지 못하고 학교를 다녔다.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에서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바라던 대학에 입학했으나 ‘남부러울 게 없는’ 학생들이 가득해 행복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실패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방송에 출연하고 무대에 서며, 강연도 하는 등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산다. 아홉 살 때의 나는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다. 여전히 떨리고 두렵지만 그것을 숨기기보다 그 떨림과 두려움을 설렘으로 안고 간다.
이제 비로소 나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것은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남의 눈에 띄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서, 자신이 진짜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경험 앞에서 사라지는 상상력
우리는 기억과 상상으로 산다. 기억은 과거이고 상상은 미래다. 우리 머릿속에 지식이나 경험은 기억의 형태로 있다. 상상은 내가 겪어보지 않은 일이고 살아보지 않은 미래다. 기억으로 말할 때 성공 확률이 높다. 세월의 검증을 거쳤기 때문이다. 반면에 상상은 해보지 않은 것이라 실패 확률이 높다. 상상으로 말하면 기억으로 말하는 사람이 “그게 될 것 같냐”, “헛꿈 꾸지 마”라고 대꾸한다.
직장에서는 기억이 권력이다. 윗사람은 기억의 힘이 세다. 아는 것도 많고 경험도 많다. 아랫사람은 상상력이 있는 대신 기억은 약하다. 아는 것도 적고 경험도 부족하다. 이러한 힘의 불균형 상태에서 아랫사람은 새로운 기획을 하거나 도전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런 거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하고 시도하다가 몇 번 쓴맛을 보면 기억에 길든다. 결국 시키는 것이나 하자고 마음먹는다.
“실패하지 마” 때문에 빼앗긴 용기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실패하지 마”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시험에 떨어질까 봐, 경쟁에서 밀릴까 봐, 누군가의 질시를 받을까 봐 두려워 몸을 사렸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진짜 배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가 배운 것은 기술이나 지식이 아니라 두려움이었을지 모른다. 실패에 대한 공포는 우리의 행동반경을 좁혔고, 새로운 것을 시도할 용기를 빼앗아 갔다.
상상하지 않는 사람은 시도하거나 도전하지 않는다. 당연히 성공도 없다. 어찌 보면 실패하지 않았다는 건 상상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성공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나답게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남이 원하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나 역시 상상 대신 시키는 일만 열심히 했다. 그건 자신 있었다. 시키는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읽기와 듣기를 잘해야 하는데, 읽기와 듣기는 어릴 때부터 나의 주무대였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말을 잘 듣고 그들의 생각과 심정을 잘 읽었다. 살아남기 위해 그래야 했을 것이다.
쉰 살 넘어 소속 있는 삶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더 이상 시키는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당시 나는 더 잃을 것도, 더 내려갈 데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본색을 감출 필요도 없어졌다. 내 정체가 탄로 날까봐 전전긍긍하며 남의 기대에 맞춰 살지 않아도 됐다. 내 모습 그대로 나답게 살기 시작했다.
책을 써야 했을 때 모든 게 낯설고 두려웠다. 남 앞에 나서기 힘들었던 사람이, 어깨도 펴지 못했던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내가 쓴 말들은 거창하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그렇게 쓸 재주도 없었기에 그저 정직하게 쓰려고 노력했다. 내 말은 세상이 무섭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목소리이자 상처 입어본 사람의 진심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사람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여줬다. 아마 그들도 나처럼 실패했기 때문일 테고, 어깨를 펴지 못한 누군가였을 것이다. 그리고 내 글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함께라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실패로 키워지는 힘
아이들이 걸음마를 배울 때 수백 번 넘어지는 것을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당연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틀렸으면 고치면 된다. 그런데 왜 성인이 된 우리의 시도에는 성공 아니면 실패라는 가혹한 이분법만 존재하는 걸까? 실패는 마침표가 아니라, 문장을 이어가기 위한 쉼표에 가까운데 말이다.
실패가 내게 가르쳐준 것은 말로 다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실패는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깨우쳐줬다. 무너지고 쓰러져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성공은 우리를 고취시키지만, 때로는 눈을 멀게 한다. 모든 것이 잘 풀릴 때 우리는 실력으로 착각하며 오만에 빠지기 쉽다. 성공의 도취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과신하게 되고, 그 과신은 다음 실패의 씨앗이 된다.
그러나 실패는 우리를 강제로 멈춰 세우고 밑바닥을 보게 한다. 성공할 땐 몰랐던 약점과 부족한 점을 모두 드러낸다. 내가 몰랐던 블라인드 스폿(Blind Spot, 사각지대)을 보여줌으로써 마음과 행동을 겸양하고 자중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실패는 자신을 아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다.
실패는 견디는 힘도 길러줬다. 나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내가 지금 찾지 못할 뿐 이를 타개하고 극복할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들어가고자 하는 문이 닫혀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한쪽 문이 닫히면 반드시 다른 쪽이 열린다고 믿는다. 이런 확신과 믿음은 실패 경험에서 생겨났다.
나는 단박에 성공한 일이 거의 없다. 학교 진학은 물론이고 취업할 때도 그랬으며, 방송 일도 처음에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심지어 첫사랑도 그랬다. 하지만 그 시기를 견뎌내고 나면 더 나은 미래가 열렸다. 그래서 나는 힘들 때마다 더 좋은 일을 맞이하기 위한 진통이라 믿고 어떻게든 버틴다. 청와대에서 일한 8년 동안에도 내가 모시는 두 분의 마음에 드는 글을 한 번도 써내지 못했다. 하루하루가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이 시기를 견뎌내면 분명 좋은 날이 올 거라는 믿음으로 버텼다. 그렇게 견뎌낸 경험이 나를 작가로 만들었다.
실패로 인해 공감력도 커졌다. 실패를 경험하면 비로소 다른 사람의 실패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실패하지 않은 사람은 남의 실수를 비난하고, 그들의 능력을 의심한다. 하지만 실패해본 사람은 그 사람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어떤 순간에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 그리고 그 후에 얼마나 용감해야 다시 일어나는지를 안다. 실패는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든다. 더 따뜻하고 더 사려 깊은 사람으로 만든다.
실패는 다시 일어서는 힘도 길러줬다. 한 번도 넘어져 보지 않은 사람이 일어나는 법을 알 리 없다. 오직 넘어져 본 사람만이 땅을 딛고 일어서는 방법을 안다. 백 번 들었던 충고보다 한 번의 고통스러운 실패를 통해 재기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실패에서 배우는 공부의 핵심은 ‘얼마나 빨리 일어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일어나느냐’에 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고 부른다. 단순히 빠르게 일어나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 빠르게 일어나는 것은 악순환일 뿐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회복탄력성은 넘어지면서 배우고, 일어날 때 더 강해지는 것이다. 회복탄력성이란 근육은 오직 실패라는 저항을 통해서만 단련된다. 마치 근력운동이 무거운 무게에 저항하면서 발달하는 것처럼 말이다. 넘어져도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지 아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공부다.
실패가 키운 힘은 또 있다. 바로 유연성이다. 계획은 현실 앞에서 언제든 수정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많은 이들이 실패를 겪으면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한다. ‘사업에 실패했다’를 ‘나는 실패한 사람’으로 낙인찍는 오류를 범한다. 그것은 한 번 넘어졌다고 자신을 영영 걸을 수 없는 사람으로 정의하는 것과 같다. 공부의 관점에서 실패는 ‘현재의 방식으로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아주 명확한 데이터일 뿐이다.
실패를 통해 키운 능력
➊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깨우치는 능력
➋ 힘들어도 견디는 힘
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공감하는 능력
➍ 다시 일어서는 회복탄력성
➎ 계획은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다고 믿는 유연성
실패가 있어야 성공도 있어
중요한 것은 새로운 정보에 맞춰 궤도를 수정하는 것이다. 지도에 따라 나아가다 길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다른 길을 찾는 게 마땅하다. 가고자 했던 길이 맞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이 없겠지만, 아니라면 적어도 그 길은 아니라는 사실 하나는 확인한 셈이니 그리 밑지기만 한 장사는 아니다. 바뀐 길로 다시 도전하면 애초에 길을 떠났을 때보다 성공 가능성이 높아지는 건 자명한 사실 아닌가.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실패란 더 지혜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단순한 자기 위안이 아니다. 실패를 사건이 아닌 정보로 받아들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통찰이다.
물론 실패가 항상 쓸모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무능이다. 실패는 한 번의 시도가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고, 무능은 그 결과로부터 배우지 않으면서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패를 정직하게 마주하고, 거기서 배움을 추출하고, 다르게 시도하는 용기를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어른이 하는 공부다.
화살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시위를 뒤로 힘껏 당겨야 한다. 활을 당기는 그 고통스러운 시간이 없다면 화살은 어디로도 날아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실패와 상처는 낭비가 아니다. 무언가를 시도했다는 기록이고, 꿈이 있었다는 징표이며,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지금 겪는 멈춤과 후퇴도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더 멀리 날아가기 위한, 인생 2막을 향한 팽팽한 재장전의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