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4

[현장에서] 500조 쌓인 퇴직연금, 왜 내 노후에는 부족할까

입력 2026-09-04 13:36

자본시장연구원 ‘초고령사회 다층노후소득을 위한 퇴직연금제도 개편’ 이슈브리핑

퇴직연금 적립금이 500조 원을 넘어섰지만 정작 노후소득을 보장하는 ‘연금’으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적립금의 상당 부분이 원리금보장형상품에 머물러 장기 수익률이 낮은 데다 퇴직급여를 연금으로 받는 퇴직자도 1명 중 2명에 미치지 못해서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4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KCMI 이슈브리핑’에서 “노후자산이 아니라 노후소득을 만들어야 한다”며 “퇴직연금이 은퇴 후 다달이 들어오는 돈이 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4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초고령사회 다층노후소득을 위한 퇴직연금제도 개편'을 주제로 발표를 하고 있다.(박지수 기자 jsp@)
▲4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초고령사회 다층노후소득을 위한 퇴직연금제도 개편'을 주제로 발표를 하고 있다.(박지수 기자 jsp@)

500조 원의 이면 “가입자가 낸 돈으로 늘었다”

2025년 말 퇴직연금 적립금은 501조4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2020년 말 255조5000억 원에서 5년 만에 96.2% 증가한 규모다.

그러나 남 선임연구위원은 적립금 증가가 높은 운용수익률에 따른 결과만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퇴직연금은 도입된 지 약 20년으로, 아직 퇴직급여를 받는 사람보다 내는 근로자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는 “퇴직연금 적립금이 500조 원 이상으로 늘어난 것은 수익률이 높아서라기보다 제도로 들어오는 돈이 나가는 돈보다 많기 때문”이라며 “지금까지는 거의 가입자가 낸 돈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체 적립금 가운데 원리금보장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75.4%다. 최근 10년간 연평균 수익률도 2.64%에 머물렀다. 전체 퇴직자 중 퇴직급여를 연금으로 받는 비중은 16.5%에 불과하다. 대부분 퇴직 시점에 일시금으로 찾아간다는 의미다.

남 선임연구위원은 “현재 퇴직연금으로 노후소득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비중은 굉장히 작다”며 “일시금이 아닌 종신연금으로 받아가는 사례도 많지 않다”고 말했다.

현재 퇴직연금의 실질적인 소득대체율은 5%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됐다. 현행 운용과 수령 구조가 유지될 경우 장기적으로도 소득대체율은 13.2%를 넘기 어려울 것으로 추정했다. 반면 중도인출 등 적립금 누수를 막고 운용수익률을 높이면 20%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분석한다.

“10년 끈 기금형, 이번에는 도입될 것”

고용노동부는 올해 4분기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포함한 제도 개편 방향을 발표할 예정이다. 공론화와 간담회를 거쳐 올해 안에 관련 법안을 입법하고 내년부터 시행하는 것이 목표다.

남 선임연구위원은 “기금형 제도 도입 논의가 10년 가까이 이어졌지만, 이번에는 법이 통과될 것 같다”며 “노동계까지 참여한 노사정 합의를 기반으로 추진되고 있어 공동선언에 충실하게 법안이 만들어지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통과도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DC형 적립금을 모아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제도다. 노사정 공동선언에는 비영리 연합형과 금융기관 개방형, 공공형 등 세 가지 유형이 담겼다.

남 선임연구위원은 세 유형을 서로 경쟁해 하나만 살아남는 구조로 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금융기관 개방형은 수익률 제고, 공공형은 중소·영세 사업장의 사각지대 해소, 비영리 연합형은 기업과 근로자 간 연대와 위험 공유라는 서로 다른 목적에 맞춰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연금공단의 퇴직연금 운용 참여에는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국민연금은 운용 성과와 가입자가 받을 급여가 직접 연동되지 않는 DB형인 반면, DC형 퇴직연금은 운용 성과가 근로자의 급여에 곧바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남 선임연구위원은 “국민연금공단이 퇴직연금을 운용하면 국민연금과 유사한 수익률과 낮은 비용을 낼 수 있다는 주장은 논리적이지 않다”며 “기대 효과는 불확실하지만, 공공기관이 민간시장을 구축할 우려는 확실한 시도”라고 지적했다.

▲4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초고령사회 다층노후소득을 위한 퇴직연금제도 개편'을 주제로 발표를 하고 있다.(박지수 기자 jsp@)
▲4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초고령사회 다층노후소득을 위한 퇴직연금제도 개편'을 주제로 발표를 하고 있다.(박지수 기자 jsp@)

기금형으로 갈 돈 20~30%…계약형도 손질해야

기금형이 도입되더라도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 가운데 이동할 수 있는 자금은 20~30% 수준으로 전망됐다. 기금형 도입 대상이 DC형에 한정된 데다, 직접 운용하려는 DC형 가입자는 기존 계약형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나머지 70% 이상은 현재와 같은 계약형으로 남을 수 있다.

남 선임연구위원은 “기금형 도입만으로 퇴직연금 전체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며 “70% 이상의 자금이 계약형으로 운용될 가능성이 있어 계약형 제도 개편도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개편 대상으로는 DC형의 사전지정운용제도인 ‘디폴트옵션’을 꼽았다. 가입자가 운용 지시를 하지 않았을 때 자동으로 적용하기 위한 제도지만, 실제로는 원리금보장상품에 자금이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원리금보장상품 비중을 낮추려고 만든 디폴트옵션에서 오히려 원리금보장 비중이 90%를 넘는다”며 “100% 원리금보장 상품을 적격 상품에서 배제하고 가입자가 해야 하는 선택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융회사의 역할도 상품 판매자에서 운용 책임자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험 유형별로 여러 상품을 나열해 가입자에게 선택하도록 하기보다 퇴직연금사업자가 하나의 대표 상품을 제시하고 그 성과를 책임져야 한다는 설명이다.

남 선임연구위원은 “지금까지 금융기관은 상품을 제공하는 판매사 역할을 했을 뿐 제도가 성공적으로 운용되는지에는 책임을 지지 않았다”며 “앞으로는 판매사에서 운용자로 전환해 퇴직연금의 성과를 실질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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