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수록 삶의 경험과 지혜는 깊어진다. 오랜 세월 살아온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국내외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한 노년을 살아가는 일곱 명의 삶을 들여다봤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행복하게 나이 드는 데 필요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 “은퇴는 또 다른 시작” 철학자 김형석

백세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김형석(106)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를 빼놓을 수 없다. 65세에 대학 강단을 떠났지만, 그는 지금도 강연과 집필 활동을 이어가는 현역 철학자다. 지난해 서대문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은퇴 후 더 넓은 사회에서 꿈을 펼칠 수 있어 오히려 행복하다고 말했다. 은퇴가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 된 셈이다.
그의 일상은 규칙적이다.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가볍게 몸을 움직이고, 기도와 사색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50대에 시작한 수영도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 그는 무리하지 않는 생활을 강조한다. 저서 ‘인생문답’에서는 “나는 100을 할 수 있다 해도 90에서 멈춥니다”라며 오래 건강하게 살아가는 비결을 전했다.
그렇다면 100년 넘게 살아온 그가 생각하는 행복은 무엇일까. 김 교수는 2021년 인터뷰에서 “사랑이 있는 고생을 했던 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돌아봤다. 그에게 행복은 고생이 없는 삶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수고하는 삶에 있다. 지난해 서대문구 신년 인사회에서도 사랑의 나무를 키워 행복의 열매를 맺고 이를 나누자는 메시지를 전한 바 있다.
나이가 들어도 꿈을 잃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 그것이 백세 철학자가 전하는 행복이다.
◇ “행복은 사랑이다” 하버드 행복 연구자 조지 베일런트

미국 정신과 의사 조지 베일런트(92)는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연구하며 행복의 조건을 탐구했다. 하버드대 의대 교수로 재직한 그는 1966년 하버드 성인 발달연구에 참여했으며, 1972년부터 2004년까지 연구 책임자를 맡았다. 그 성과를 담은 책이 ‘행복의 조건’이다.
1938년 시작된 이 연구는 참가자들의 건강과 직업, 결혼 생활, 인간관계 등을 수십 년간 추적했다. 하버드대 남학생 268명을 대상으로 시작했으며, 이후 보스턴의 저소득층 남성 456명의 연구 자료도 통합했다. 베일런트는 이를 통해 행복한 노년이 타고난 조건이나 사회적 성공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운동과 금연, 절주 같은 생활 습관은 물론 어려움에 대처하는 성숙한 태도와 안정적인 인간관계가 중요한 요인으로 나타났다. 사람은 나이 들어서도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점 역시 그의 연구에서 주목할 대목이다.
베일런트는 2001년 ‘하버드 가제트’와의 인터뷰에서 “단순히 삶에 세월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에 삶을 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래 사는 것 자체보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유머 감각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며, 새로운 것을 배우고 즐기는 태도도 강조했다.
그렇다면 오랜 연구 끝에 발견한 행복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는 2013년 ‘그레이터 굿’ 기고문에서 행복을 마차에, 사랑을 그 마차를 끄는 말에 비유했다. 사랑이 있어야 행복도 뒤따른다는 의미다. 결론은 명료했다. “행복은 사랑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도전에는 나이가 없다” 보디빌더 어니스틴 셰퍼드

세계 최고령 여성 보디빌더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이름을 올린 미국의 어니스틴 셰퍼드(90). 놀랍게도 그가 운동을 시작한 것은 56세 때였다. 언니와 함께 수영복을 입어보다 달라진 몸매를 실감한 것이 계기였다. 운동에 재미를 붙인 자매는 보디빌더가 되겠다는 목표까지 세웠다. 하지만 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셰퍼드도 한동안 운동을 중단했다. 다시 운동을 시작한 것은 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셰퍼드는 71세에 보디빌딩 대회에 출전했고, 이후 다른 사람들에게 운동을 가르치며 도전할 용기를 전했다. 운동은 그에게 건강뿐 아니라 행복도 가져다줬다. 그는 2016년 미국 ‘타임’에 소개된 인터뷰에서 “운동은 나를 행복하게 하고, 살아 있게 한다”고 말했다. 또한 2013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는 나이가 많거나 시작하기 늦었다는 말에 귀 기울이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에게 나이는 새로운 도전을 가로막는 이유가 되지 못했다.
◇ “기쁨은 그곳에 있는 것” 극지 탐험가 윌 스테거

올해 4월, 미국의 극지 탐험가 윌 스테거(82)는 다시 북극으로 향했다. 캐나다 북극권에서 69일 동안 홀로 1127㎞를 이동했다. 식량과 장비를 실은 썰매를 끌며 눈 덮인 산과 강을 건넜고, 거센 눈보라 속에서 열흘을 텐트에 머물기도 했다. 목적지를 얼마 남기지 않고 여정을 마쳐야 했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기록이나 정복이 아니었다.
스테거는 1986년 외부 보급 없이 개썰매로 북극점에 도달한 탐험대를 이끌었고, 1989~1990년에는 남극 대륙 횡단 탐험을 이끌었다. 이러한 공로로 내셔널지오그래픽 탐험 공로 메달도 받았다. 평생 극지를 누빈 그가 여든을 넘어 홀로 길을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올해 탐험을 마친 뒤 사회의 혼란에서 벗어나 마음의 고요를 찾고 싶었다고 밝혔다.
2023년 ‘미네소타 스타트리뷴’과의 인터뷰에서 스테거는 “기쁨은 그곳에 있는 것 자체에 있다”고 말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성취보다 대자연 속에 머무는 시간 자체가 행복이라는 뜻이다. 또한 “나는 내 나이가 정말 자랑스럽다”며 나이 듦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드러냈다.
◇ “행복은 마음의 평온” 불교 승려 마티외 리카르

프랑스 출신의 불교 승려 마티외 리카르(80)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과학자였던 그는 파스퇴르연구소에서 세포유전학을 연구하다 1972년 박사학위를 받은 뒤 히말라야로 향해 승려의 삶을 선택했다. 이후 수십 년간 명상과 이타심을 탐구했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계기는 뇌과학 연구였다. 미국 위스콘신대학교의 연구에서 그가 명상하는 동안 강한 감마파 활동이 관찰됐다. 정작 리카르는 행복을 과학적으로 순위 매길 수 없다며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별명에 선을 그었다.
리카르가 강조하는 행복은 특별한 뇌 활동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2023년 미국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삶의 모든 순간을 즐긴다”고 얘기했다. 그에게 행복은 언제나 기분 좋은 상태가 아니라, 삶의 굴곡 속에서도 유지하는 내면의 평온에 가깝다. 자신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느끼기에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에게 행복은 평생 가꾸어야 할 마음의 태도다.
◇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풀꽃 시인 나태주

나태주(81) 시인은 평범한 일상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과 사랑을 오랫동안 노래해왔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 ‘풀꽃’의 한 구절에도 이러한 그의 시선이 담겨 있다.
나 시인은 여든을 넘긴 지금도 작품을 발표하고 강연하며 독자들을 만난다. 올해 출간한 시집 ‘이쁘다고 말하니 더욱 예쁘다’에는 삶의 본질과 사랑,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시들이 담겼다. 나이 들수록 삶의 연륜은 깊어지지만, 그가 시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한결같다. 자신을 아끼고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행복은 그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이야기다.
◇ “소녀 같은 호기심” 동화작가 가도노 에이코

애니메이션 ‘마녀 배달부 키키’의 원작자로 유명한 일본 동화작가 가도노 에이코(91)는 약 14만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를 보유하고 있다. 알록달록한 옷과 개성 있는 안경으로 눈길을 끌며, 자신만의 색깔이 담긴 일상을 공유한다.
가도노는 사소한 것에서도 즐거움을 발견하는 현역 작가다. 산책할 때는 수첩을 챙긴다. 마음에 드는 풍경을 그리거나 길가의 꽃을 관찰하기 위해서다. 아흔이 넘어서도 소녀 같은 호기심을 잃지 않는 그의 일상에서 행복한 노년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 일곱 가지 삶, 일곱 가지 행복
일곱 명이 보여주는 행복의 모습은 하나로 정의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사랑과 관계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누군가는 도전이나 창작에서 기쁨을 얻는다. 평범한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마음의 평온을 가꾸는 것도 행복에 이르는 방법이다.
이들의 삶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놓지 않는 태도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으며, 행복을 느끼는 방식도 저마다 다르다. 행복한 노년은 특별한 성취보다, 오늘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가꾸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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