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인가 초등학교 다니던 아들이 한국전쟁 기념일이 다가오자 ‘6·25글짓기 대회’가 있으니 소재가 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던 적이 있다. 국군장병 위문편지 쓰기와 위문품 전달, 한국전쟁 글짓기 대회, 반공 웅변대회가 연례행사처럼 열렸던 30여 년 전 이야기다.
그런 부탁에 필자는 불편했다. 왜냐하면 첫돌이 되기 전 한국전쟁이 터져 언제 시작해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잘 아는 일인 양 떠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다. 그렇더라도 그놈의 아들 부탁인데 어쩌겠는가. 용기 100%, 아니 1000%를 총동원해 기억에도 없는 ‘내 이름의 변경사’를 술회할 수밖에. 아버님과 어머님께 들은 이야기와 문중 족보, 호적등본(현 가족관계증명원) 등까지 모두 활용해서 말이다.
필자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집성촌 친가에서 아버님, 어머님 등에 업혀 30여 리 떨어져 있던 외가로 피란을 갔다. 외가가 있는 동네는 주민들이 차를 본 일도, 타 본 일도 없었고 해방 소식도 다음 해에야 알았다는 첩첩산중에 있어 난을 피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정전 후 세월이 흘러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학교와 가까운 마을로 이사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신원 정리나 부동산공부 정리가 매우 미진했던 시절 ‘호적’이 필요하게 됐다.
면사무소가 상당히 멀고 농사에도 바쁜 주민들은 가끔 면으로 출장 가는 이장에게 ‘민원 심부름’을 부탁하곤 했다. 아버님께서도 출생 신고를 부탁했으나 막걸리 좋아하였던 그분은 제때 심부름을 이행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고 재촉하지 않으면 해 넘기기 일쑤였다.
한참 세월이 지난 후 이장이 내미는 호적등본에는 족보에 기록된 내 이름 ‘백형섭’이 아닌 ‘백외섭’이 올라 있었고 나이는 두 살 어리게 기록돼 있었다. 피란 중 외가에서 태어난 동생 이름에도 ‘외’ 자가 잘못 들어가 있었다. 틀리지 않으냐는 추궁에 항렬 이름을 무시하고서도 “외가에서 자라면 외가 항렬대로 ‘외’ 자를 붙여야 하지 않느냐”고 오히려 반문했다고 한다.
‘외’자 들어간 이름 때문에 학창 시절에는 가끔 놀림거리가 됐고,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 황당하고 어려운 이름이 고맙다. 당시 외할아버님, 외할머님과 깊은 정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과일나무 가득했던 오솔길을 손잡고 걸어주셨던 외할아버님과 굽은 등에 필자를 업고 재롱을 받아주셨던 외할머님의 모습이 뇌리에 생생하다. 이름에 있는 ‘외’ 자와 함께 두 분이 더욱 그리워진다.
다른 사람이 잘 기억해주는 것도 고맙다. 자원봉사를 자주 나가는 필자는 현장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저는 ‘백-외-섭’입니다. 대한민국에서 하나뿐인 이름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런 소개를 받고 나면 100의 90은 바로 내 이름을 머리에 기억하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