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식민지 시절을 살아낸 김용환은 모든 재산을 평생 노름판에 탕진한 파락호다. 주위 사람들의 질시를 받고 가족까지 고개를 돌리게 한 사람. 그는 매일 밤 도박으로 밤을 새웠고 잃은 날은 새벽녘 ‘새벽 몽둥이야!’를 외쳐 미리 잠복해 두었던 방망이 든 무리를 시켜 투전판을 싹쓸이하기도 했던 부도덕한 인물이었다.
그가 더욱 멸시를 받았던 것은 번듯한 가문의 종갓집 자식이라는 점이다. 바로 학봉 김성일 선생의 13대손이다. 학봉은 퇴계 이황을 승계한 영남학파의 거두였다. 가만히 있어도 명문가의 자제로서 평탄한 삶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는 왜 노름꾼의 삶을 살았을까? 그것이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안전하게 보내려는 방편이었음이 알려진 것은 그가 죽은 뒤다.
아무리 독립이란 높은 뜻이 있더라도 이렇게 치명적인 삶을 택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처음 일본에 대해 반감을 품은 것은 어린 시절의 충격적인 경험 때문이다. 할아버지 김흥락이 죄 없이 왜경에게 무릎을 꿇는 모습을 코앞에서 본 것이다. 그것은 김흥락이 사촌인 의병대장 김희락을 숨겨준 것에 대한 대가였다. 어린 그에게 이 기억은 어른이 되어서도 아픈 상처로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이 진창 같은 현실을 보고 그는 항일을 결심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독립운동 가담 때문에 죄 없는 가족이 해를 당하게 하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결심으로 그는 가족까지도 감쪽같이 속이며 만신창이의 삶을 산 것이다. 김용환은 많은 평범한 이들이 ‘비루한 뜻’을 감추기 위해 ‘위선’의 삶을 사는 것과는 반대로 ‘위악’의 삶을 통해 고매한 뜻을 성취하려 한 것이다.
해방 이듬해 죽음의 순간에 독립군에 군자금 전달을 맡았던 친구가 진실을 밝힐 것을 권하자 이런 말을 남겼다. “선비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이런 담담한 모습은 어디에서 나오는 힘일까. 그는 뜻을 위해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현실과 뒤엉켜 싸우기보다 현실을 뛰어넘는 ‘초월’을 택한 것은 아닐까?
그는 뜻을 다 이루었으니 자신의 삶이 어떻게 평가되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진정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미루어 짐작건대 삶을 제물로 바쳐 광복을 얻은 그는 마지막 순간 어느 누구보다 행복하지 않았을까? 용기없어 지리멸렬한 삶을 살아가는 필자에게 ‘반영웅’ 김용환은 색다른 위안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