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하루를 만들어 준 최악의 하루

기사입력 2016-09-06 10:43 기사수정 2016-09-06 10:43

▲'최악의 하루' 한 장면. (출처= '최악의 하루' 사이트) (박미령 동년기자)
▲'최악의 하루' 한 장면. (출처= '최악의 하루' 사이트) (박미령 동년기자)

간혹 무심한 상태에 빠져 모든 결정을 우연에 맡길 때가 있다. 관성에 젖어 끊임없이 계획을 세우며 사는 삶이 잠시 한걸음 멈춰서 바라보면 그 또한 스트레스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낄 때 더욱 그렇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치밀한 계획보다 우연이 훨씬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때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번에 선택한 영화 <최악의 하루>가 그런 경우이다.

평소 영화를 자주 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특이한 영화를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는다. 그저 영화평이 좋은 영화를 감상하는 편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를 보기로 한 것은 일탈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소위 작가주의 영화로 흔히 말하는 예술 영화로 분류되는 만큼 별로 재미가 없으리라는 선입견과 무엇보다도 제목이 마음에 안 들었다. 무슨 좀비 영화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그러나 화면의 미장센은 수채화를 닮은 듯이 밝다. 도대체 최악의 하루가 될 것 같지 않은 시작이다. 주인공인 연극배우 은희(한예리)는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를 서촌에서 ‘우연히’ 만난다. 그가 묻는 곳을 굳이 함께 찾아줄 필요는 없는 데도 그녀는 애써 그곳을 찾아준다. 서촌의 골목 구석구석이 관객들의 옛날을 연상시키는 순간이다. 서촌 부근이 고향인 나에게는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어린 시절이 아련히 떠오르는 뜻밖의 보너스다.

잔잔한 풍경은 청량한 공기로 가득 찬 남산으로 이어진다. 장소가 바뀌며 은희는 약속했던 곳에서 남자친구 현오(권율)를 만나며 최악의 하루 서막이 열린다. 현오는 무의식적으로 은희를 다른 여자 이름으로 부르는 실수를 범하며 갑자기 둘 사이는 금이 간다. 그런데 더 뜬금없는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현오와 은희 앞에 그녀의 전 남자 친구인 유부남 운철(이희준)이 나타나면서 갈등은 제곱으로 증폭된다.

얽히고설킨 관계는 거짓과 배신 그리고 애증의 드라마처럼 뒤범벅이 된다. 서로 내뱉는 변명의 말들로 상황은 더욱 지리멸렬해진다. 그 중 너무 상투적이어서 인상 깊은 대사는 운철의 뜬금없는 말이다. “나는 행복해지지 않기로 했어요.” 이혼한 전 부인과 재결합하기로 했다는 의미이다. 그럼 대체 무엇 때문에 그 자리에 나왔다는 말인가. 각자 모두 진실했다고 주장하지만, 인생은 이리도 지리멸렬하다.

인생은 그렇게 부질없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홍상수 감독이 떠오른다. 비록 지금 그 자신은 영화와 현실을 구별 못 해 그 틈새에 끼어 방황하고 있지만, 그의 영화는 우리 삶의 일상성 속에 내포된 우연과 모순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결국, 모든 게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우연’이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나침반인 것이다.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 김종관 감독은 은희의 대사를 통해 이렇게 부르짖는다. “진실이 뭘 까요? 사실 전 다 솔직했거든요.” 순간순간 진실했는데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이고 말았을까? 중간중간 했던 하얀 거짓말들은 모두 상대를 배려한 최선이었는데 말이다. 영화의 섬세한 터치와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리얼한 시도가 오히려 진실을 가리는 아이러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커피 잔의 모양이 달라지고 장면마다 은희의 머리 모양이 변하는 연출은 삶이 우리 생각처럼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하려는 듯하다. 우리가 때마다 자신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모든 모습도 결국 거짓 없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 순간순간 우리는 새로운 우연의 힘에 이끌리고 만다.

마지막으로 은희가 료헤이를 다시 만나 빛이 환한 숲길로 들어서는 것은 해피엔딩을 바라는 관객에 영합한 건지 아니면 감독의 낙관적 태도 때문인지 모르나 그 또한 새로운 우연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 같다. 최악의 하루가 지난 후 이 정도 꿈도 못 꾼다면 인생이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

우연한 만남이 빛과 같은 소통을 낳았다. 영화 투자받기도 어려운 시절 자신만의 색깔로 꿋꿋이 영화를 만들어가는 감독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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