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가 발명되고 나서 상업적 사진과 예술 사진의 경계에서 사진을 활성화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단연 보도사진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로버트 카파 등이 시작한 보도사진작가 그룹 매그넘이 초기 사진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저명한 언론인 조셉 퓰리처의 유산으로 만들어진 퓰리처상으로 보도사진이 주목받았다. 각 지역의 문화와 자연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촬영해온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의 자연과학 사진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모든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장르를 묶을 수 있으며, 이들이 20세기 사진을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이 주목받는 것은 사진의 정체성이 사실성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진의 전부는 아니다. 예술의 덕목에 다양성이 있는 것처럼, 사진 역시 다양성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진의 사실성과 함께 추상도 생각했다. 이는 사진도 예외가 아닌 예술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중요한 길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사실 전통적인 시각예술이 모두 그렇게 폭을 넓히고 생각을 키워 왔다.
그 일환으로 나는 종종 다중 노출 작업을 진행한다. 다중 노출 사진은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겹쳐지는 대상이 원래의 피사체와 같거나 연결되는 외형을 갖고 있는 경우에는 되풀이되는 패턴이 생긴다. 패턴이 서로 겹쳐지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예측하지 못했던 끊어짐과 이어짐이 되풀이되는 리듬과 끊어지면서도 부드러운 선이 생긴다. 그렇게 만들어진 무늬가 서로 잘 어울리기도 한다. 음악이 갖고 있는 박자와 멜로디 그리고 어울림의 화음이 만들어지면서 없던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생겨난다.
아무 관계도 없었던 바람들이 한 장의 필름에서 만나 꽃을 흔들어 무늬를 이루었다.
자연에는 의외로 많은 패턴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두 번 겹쳐 촬영한 한 장의 이미지에서 만들어지는 패턴은 우연일까? 거기에도 자연스러움이 있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두 장의 사진을 한 장의 필름 위에 덧씌운 이중노출 기법이지만 그것 또한 우연히 만들어진 자연의 한 모습인 것이다. 우연히 만난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가족을 이루어 자식을 낳고 살 듯이 말이다.
제시한 사진은 바람과 물이 만나는 장면을 다중노출 기법으로 연출한 사진 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사진 속의 사물들을 따로 따로 바라보았다.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그렇게 무심히 바라보다 서로간의 연관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먼저 바람 스스로 낸 물길에 따라 흔들리며 흐른다. 꽃과 바람이 실제로 만나는 장면이 포착되었지만, 무작정 기다릴 수 없기에, 나는 우연을 적극적으로 기대하며 두 이미지를 한 장의 프레임에 담기를 되풀이하며 지켜보았다. 꽃뿐 아니라 그 배경으로도 이야기는 진행되며 퍼져 나간다. 물을 만난 바람이 물 위에 일정한 시간을 두고 연속적으로 흔적을 남긴다. 그 사이 꽃은 다시 바람에 의해 누웠다 서기를 되풀이한다. 뿌리가 물밑 바닥 땅에 박힌 풀의 제한이 일정한 박자를 만든다. 조금 더 길게 보면 모인 풀들은 흩어지는 시간의 여정을 각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꽃은 시들 것이고 먼지가 되어 바람을 타다가 끝내 바람이 될 것이다. 바람은 다시 꽃의 색을 모으면서 순환하며, 이따금 여기에 물이 겹친다. 바람과 꽃과 물이 함께 만난 자리에 나도 참석하여 우연에 필연을 섞어 작업한 작품이다.
샌프란시스코 근처 1번 국도 남쪽의 배면도로를 달리다 보면 만나게 되는 하프 문 베이에서 작업했다.
의도를 넘어 우연(偶然)이 아름다움을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도 내가 열과 성을 다해 노력한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면,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 과정을 되풀이할 필요가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있게 기다려야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가능하면 아주 오래 오래 살아서 우선 꿀벌처럼 꿀과 의미를 모아 들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최후에는 아마 10행쯤 되는 좋은 시를 쓸 수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닌 것이다. (중략) 사실은 시는 경험인 것이다”라고 했듯이 말이다.
장소가 어디든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내용의 핵심과 구조를 보기 위해서는 겉모양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 겉을 싸고 있는 껍데기가 얇고 가볍게 보일지라도 가장 무겁게 사물의 내부를 누르고 있는 것은 그래도 외모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존재들은 온힘을 쏟아 붓는다.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 보이는 것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그것이 모든 것이 아님을 살면서 차츰 알게 된다. 통찰(洞察)이나 식견(識見)이란 뜻이 그렇고, 비슷한 뜻으로 쓰이고 있는 인사이트(insight)라는 영어 단어 또한 같은 얘기다.
사진을 잘 찍으려면 대상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좋은 사진을 만들기 위해서는 렌즈의 각도를 달리하며 오래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빛이 뻗어가고 확장해서 그 속에 숨겨져 있던 핵심과 구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맨눈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었던 포장지 안의 속살이 뷰파인더를 통해 드러난다. 포장지 그 밑에 쌓여 있는 거품이 진짜 내가 보고 싶었던 속살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다. 어떤 때는 벗겨도 벗겨도 또 나오는 껍질에 속지 않고 내용을 보기 위해 이어지는 껍질을 까다 본질이 바로 껍질인 경우도 있다.
사진으로 형성되는 인상은 다중 노출의 형태처럼 다양하고 복잡하다. 수많은 시간과 공간의 조합이 다시 되풀이될 수 없을 만큼 경우가 많다. 매번 선택하는 셔터 스피드와 조리개뿐 아니라 그 사이의 시간적 공간적 간격에 따라 모두 다른 결과가 나온다. 기대는 할 수 있지만, 예측은 할 수 없다. 그래서 본질을 볼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을 갖고 있는 사진은 역시 기대할 만한 예술의 한 장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