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살던 정릉의 마당 넓은 집 사랑방에는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책장이 있었다.
부모님이 책을 좋아하셔서 많은 책을 채워 놓으셨다.
엄마 아버지가 책을 많이 읽으시니 우리 세 딸도 책을 손쉽게 접할 수 있었다.
필자가 오늘날 요만큼이라도 지식과 감성이 있는 건 아마 이때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일 것이어서 감사하다.
많은 장르의 책이 있었고 그중 근대문학과 현대소설 작품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책장 한편에는 러시아 문학작품이 꽂혀 있었는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 건 러시아문학 작품은 어렵다는 편견의 느낌이다.
대부분 러시아 문학책은 다른 책에 비해 크기가 컸고 두꺼웠으며 표지는 금장을 두른 단단한 재질로 되어 있어 쉽게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죄와 벌, 전쟁과 평화, 부활 등 세계적인 명작도 지금은 흥미로운데 그땐 왜 그리 어려웠는지 한 장 읽으면 두 장은 뒤로 다시 돌아가서 읽어야 할 만큼 힘들었다.
그래서 러시아 문학은 어렵고 지루한 책이라는 고정관념이 생겼었다.
이번에 어떤 이벤트에 당첨되어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게 되었는데 어릴 적 어렵게 느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다.
복선이 깔린 긴 내용을 어떻게 연출했을지 궁금하고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되었다.
아직 겨울이 다 지나간 건 아닌 듯 뺨에 닿는 바람이 차갑지만 상쾌한 기분으로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을 찾았다.
그런데 이 연극은 평상시 생각했던 연출이 아니었다. 보통 연극은 길어도 두 시간 반을 넘기는 작품이 드문데 오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생각지 못하게 1부와 2부의 각각 독립적인 작품으로 만들어졌고 두 작품 모두 3시간 30분의 무대가 펼쳐진다고 한다.
1부 2부를 계속해서 본다면 7시간의 공연이니 관객이나 배우의 입장에서도 좀 힘들지 않나 걱정되었다.
평일에는 1부나 2부만 공연한다고 한다. 그러니 1부만 보고 끝내기도 그렇고 새롭지만 좀 어려운 관람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내용은 방대하고 섬세한 복선이 깔린 대작이어서 그만큼 연극 한 편으로 함축하기엔 어려웠을 것이다.
필자는 이날 1부만 관람하기로 했다. 주연인 탤런트 정동환 씨는 필자가 좋아하는 배우라 기분 좋은 설렘이 있었다.
막이 오르자 어두운 무대 한 편에서 작가로 분한 정동환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와 등장인물을 소개하면서 연극이 시작되었다.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형수로 12년을 복역하다가 감형을 받고 풀려난 후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알게 된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들어온 한 죄수의 이야기를 했는데 눈빛을 보니 그 죄수는 아버지를 죽일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독백한다.
잡혀 온 사람은 누명을 쓴 첫째아들 ‘드미트리’였다.
너무나 유명한 소설로 내용은 다들 아실 것이다. 간단히 말한다면 아버지를 누가 죽였을까? 네 아들의 이야기이다.
첫 부인이 낳은 방탕한 호색한인 장남 ‘드미트리’는 유산과 여자 문제로 아버지 ‘표도르’와 다투며 공공연히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떠들고 다닌다.
둘째 부인의 소생인 둘째 아들 ‘이반’은 무신론자에 자존심이 강한 냉소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이반’의 동생인 셋째아들 ‘알료샤’는 성직자로 종교적 사랑의 실천자로 등장하며 복잡하게 얽힌 아버지와 형들과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애쓰는 인물이다.
그리고 순진하고 바보스러운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넷째아들 ‘스메르자코프’가 하인으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살해되었는데 누가 진범일까? 다들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각자 죄책감을 느낀다.
그 와중의 복잡한 이야기가 너무나 길어서 연극도 한 번에 끝낼 순 없었나 보다.
세 시간 반 동안의 1부 공연방식이 필자에겐 좀 어렵게 다가왔지만, 연극을 좋아하는 분들에겐 새로운 시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각 인물의 삶의 가치와 방식을 드러내는 내면의 심리상태를 공간적 이미지로 표현한 연출도 돋보이는 부분의 하나였다.
긴 시간 열정적으로 멋진 연기를 보여 준 배우들이 얼마나 노력하며 연습을 했을지 찬사와 감사를 함께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