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봐도 흔쾌히 축하하지 못하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아 이런저런 말을 걸어보다가 한 가지 단서가 감지되었다. 그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아마도 상실감이 아닌가 추측되었다. 어쩌면 그동안 B에게는 A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을 확인하게 해주는 수단이었다는 의미다. 그동안 누려왔던 심리적 우월감이 사라지니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던 것일까?
사실 B가 평소 심성이 나쁜 친구가 아니었으니 한순간 동요했다고 해서 그 친구를 매도할 이유는 없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그런 심리를 조금씩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팍팍한 삶 속에서 절대적인 행복을 얻기가 쉽지 않으니 타인의 불행에 나를 비교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삼는 상대적 행복감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그 행복감을 빼앗겼으니 내심 억울(?)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자살률은 높고 행복 순위는 낮은 나라로 유명하다. 자살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행복량이 제로일 때 오는 충동일 텐데 도대체 우리가 이렇게 행복에 쪼들리며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 하는 말로 가난했던 나라가 급격한 경제발전으로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물질만능에 빠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치열한 사회적 경쟁 때문일까?
어쩌면 우리가 행복을 제로섬 게임으로 보기 때문은 아닐까? 이를테면 ‘행복 총량의 법칙’ 같은 것이 있어 남이 행복하면 내 행복이 줄어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까 물질만능적 사고가 행복을 물질로 측정하게 만들어 행복의 속성을 왜곡해버린 셈이다. 물질은 나눌수록 줄어들지만, 행복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이치를 우리가 망각한 것이다.
사실 쪼들린 생활을 하면서 물질을 나누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션, 정혜영 부부 같은 이는 정말 특별한 사람들이다. 물질을 나누며 살기 어렵다면 까짓것 돈 안 드는 무형의 행복이라도 나누는 것이 현명한 삶 아니겠는가. 정치의 세계에서 권력은 가까운 가족과도 나누지 못한다지만, 권력을 얻는 데 아무 소용도 없는 행복을 나누지 못할 일이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이든 나누는 데 인색한 것은 가혹한 가난 속에서 나온 생존본능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나누라는 말을 들으면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 식으로 말하면 행복을 존재가 아닌 소유로 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발상을 전환해 나누지 말고 합하면 어떨까.
‘우분투’라는 말이 있다. 아프리카어로 ‘우리가 함께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뜻인데 보통은 ‘우리의 성공이 나의 성공, 모두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여성 선교사 한 분이 선교지 부족 어린이들에게 달리기 시합을 제안하고 큰 과일 바구니를 1등 상으로 내걸었더니 모든 아이가 손잡고 들어왔단다. 그 이유를 물으니 “우분투!”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아마도 부탄이 행복한 나라 1위인 것도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우분투’를 실천하는 까닭일 터이다. 행복은 나눌수록 커진다. 그러나 합할 때 더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