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십 년 함께 살아온 부부라도 자녀와의 동행이 사라지고 사회적 역할이 줄어드는 순간, 낯설게 마주하게 되는 상대가 있다. 바로 배우자다. 시니어의 여행이 특별해야 하는 이유는, 이 시기에 비로소 ‘진짜 둘만의 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김숙기 가족 상담 전문가는 “부부 여행은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자, 관계를 다시 시작하는 마중물”이라고 말했다.
관계의 ‘민낯’을 마주하는 시간
가족 상담 및 노년 심리 분야 전문가인 김숙기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 원장은 시니어 부부 여행이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자 관계를 비추는 거울”이라며 “시니어 부부가 함께 떠나는 여행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오롯이 ‘둘만의 시간’에 집중할 수 있는 드문 기회”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전환이 언제나 긍정적일 수만은 없다.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라도 자녀와 일이라는 완충재 없이 ‘둘만의 시간’을 마주한 순간, 오히려 갈등과 실망이 폭발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통계청의 2023년 자료에 따르면, 황혼이혼(결혼생활 20년 이상 부부의 이혼)은 전체 이혼 중 33.4%에 달했다. 그 원인 중 하나로 소통의 부재와 감정적 거리를 지목한다. 이렇듯 관계가 무너질 위험이 높아진 이 시기에, 여행은 두 사람의 문제를 풀어가는 ‘즉각적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여행을 통해 어떻게 이 간극을 좁힐 수 있을까?’ 혹은 ‘관계 악화를 막고, 더 나아가 회복의 계기로 삼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관계가 회복되는 여행
시니어 부부가 함께 떠나는 여행의 핵심은 ‘무엇을 보느냐’보다 ‘어떻게 함께하느냐’에 있다. 지나치게 빠듯한 일정의 패키지여행보다는 느리고 여유로운 여행이 좋다. 예를 들어 바닷가 근처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준비하고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식이다. 그렇게 일상과는 다른 공간에서 소소한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 생각보다 강력한 회복의 힘을 가진다.
김숙기 원장은 “누구의 부모도 자식도 아닌 오롯한 ‘동반자’로서의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며 한 달 살기 같은 장기 체류형 여행을 추천했다. 그는 “공유한 추억이 많은 부부는 헤어지기 어렵지만, 추억이 없는 부부는 그만큼 빠르게 멀어지기 마련”이라면서 여행이 ‘공유한 추억’을 새롭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덧붙였다.
그뿐 아니라 여행의 계획을 함께 세우는 것 자체도 관계의 연습이 된다. 어디로 갈지, 얼마나 머물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등 여행 전의 대화가 ‘소통 회복’의 단계가 될 수 있다.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고 양보하며, 때로는 의견을 조율하는 그 모든 과정이 연결을 회복하는 밑거름이 된다.
해외 연구도 이를 뒷받침한다. 미국 국립보건원 국립의학도서관(PMC) 저널에 게재된 논문에 따르면, 부부가 휴가를 공동으로 계획하고 결정할 때 정서적 안녕과 부부 만족도가 유의미하게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정서적 안정이 만족도를 매개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밝혔다. 이는 여행이 단순한 기분 전환이 아닌 정서적 회복의 플랫폼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물론 여행이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다. 김 원장은 여행 중 대화를 나누다 감정이 격해지는 상황을 대비해 ‘타임아웃’을 제안한다. 타임아웃은 ‘당황하거나 상처를 줄 수 있는 순간, 잠시 멈춰 각자 휴식을 갖고 감정을 정돈한 후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이다. 이는 ‘갈등을 예방하는 안전 틀’을 만드는 지혜다.
이와 더불어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공감적 경청’이 중요하다. “말하는 사람은 비난하지 않고, 듣는 사람은 당황하지 않게”라는 김 원장의 조언은 그 자체로 관계 회복의 기술이다.

심리적 고립을 메우는 시간
여행이 부부 관계에 주는 의미는 즐거움만이 아니다. 심리적 거리감을 좁히고, 인생 2막의 동반자로서 서로를 다시 발견하는 시간이다. 우리나라의 60~70대는 자녀를 다 키워낸 후 경제적·시간적 여유를 갖게 된 ‘액티브 시니어’다. 하지만 동시에 관계의 상실과 심리적 고립감도 경험한다. 가족 내에서의 역할이 사라지고, 부부 사이의 연결고리가 느슨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부 관계의 회복은 ‘관계 유지’를 넘어 ‘삶의 재설계’로 이어질 수 있다.
서울시복지재단의 2020년 ‘서울시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은퇴 후 고립감을 느끼는 60대 남성은 62.3%, 여성은 49.7%에 달한다. 그만큼 ‘정서적 동반자’로서의 관계 회복이 중요해지고 있다. 자녀를 다 키우고 사회적 역할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이 시기에 부부는 결국 서로의 정서적 동반자로서 삶을 다시 설계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있다. 일본 캐비넷 오피스(Cabinet Office)의 2022년 보고에 따르면, 60세 이상 노인 중 53.7%가 “배우자와의 관계가 나이 들수록 더 중요해졌다”고 응답했으며, 은퇴 이후 부부만의 활동을 통해 삶의 만족도가 상승했다는 결과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고령사회에서 부부 관계의 재정립이 심리적 웰빙과 직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이 함께 걷기 좋은 시간
많은 시니어들이 여행을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건강’과 ‘비용’, ‘계획의 어려움’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지자체나 민간 기업이 의료 인프라와 여행 프로그램을 결합한 ‘시니어 친화형 체류 여행’을 잇달아 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교원라이프의 해외 한 달 살기 상품은 현지 병원 연계와 한국어 지원 가이드가 포함돼 있으며, 국내의 경우도 창원, 제주 등에서 의료 및 치유 프로그램이 포함된 한 달 살기를 저비용으로 제공한다. 일부 지역은 숙박비나 체험비를 지자체가 지원하기도 하며, 참가자 선정 시 건강상태나 경제 여건 등을 고려한 맞춤형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즉 부담은 낮추고 만족은 높이는 구조다.
김숙기 원장은 “지금부터가 진짜 인생이다. 역할자가 아닌 동반자로서의 배우자와 어떻게 살아갈지 새롭게 그려야 한다. 여행은 그 설계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며 “나중은 없다. 지금이 관계 중심으로 돌아가기 좋은 때”라고 조언했다.
여행은 단지 떠나는 일이 아니라, 관계를 돌아보고 새로 정립하는 ‘의식’일 수 있다. 지금, 둘만의 속도로 떠나보자. 지금이 가장 좋은 시작일 수 있다.
시니어 부부에게 추천하는 ‘한 달 살기’ 여행지
단기 여행이 주는 활력도 좋지만, 시니어 부부에게는 오히려 느린 여행이 관계를 회복하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데 더 효과적이다. 자연에서 함께 쉬고 지역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는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은 부부가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정서적 여백을 마련해주는 여행법이다.

도움말 김숙기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 원장김숙기 원장은 부부 갈등 솔루션 전문가다. 현재 숭실대학교 외래교수로 재직 중이며,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 원장으로 각종 강연과 교육 등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사례를 기반으로 부부의 문제를 조정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