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역의 변화, 그리고 추억

기사입력 2018-03-08 14:57 기사수정 2018-03-08 14:57

▲ 현대식 건물로 바뀐 서부역(박혜경 동년기자)
▲ 현대식 건물로 바뀐 서부역(박혜경 동년기자)
예전 서부역은 서울역 쪽에서는 직접 연결되지 않아 염천교 구두 거리를 지나 코너를 돌아야만 갈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서부역은 일영 등 교외 방면으로 가는 열차를 타는 곳이었다.

대학교 때 일영의 딸기밭이나 교외로 놀러갈 때 서부역 앞에서 모였다. 당시의 기억으로 서부역은 앞쪽의 서울역에 비해 좀 초라하고 우중충한 느낌이었다. 우리 학교가 청파동이어서 돈암동에 살던 필자는 당시 미도파 앞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통학했는데 염천교를 지나 서부역 앞을 지나가는 코스였다. 그래서 눈에 익었지만, 항상 환한 서울역에 비해 서부역은 어둡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들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라는 중림동 약현 성당에 갈 일이 생겼다. 약속 장소가 서부역 앞이었다. 필자는 “아휴, 염천교 쪽으로 좀 많이 걸어가야겠네” 하고 걱정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친구가 서울역 옆쪽으로 걸으면 서부역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해줬다. 알려준 대로 가 보니 정말 염천교를 돌아가지 않아도 편하게 서부역에 갈 수 있었다. 눈앞의 서부역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우선 그 위용에 놀랐다. 지난날의 초라함은 없고 멋진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초라하긴 했지만 예전의 서부역은 필자에게 애틋한 추억이 있는 곳이었다.

필자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동안 놀고 지냈다. 27세가 되자 딸만 셋을 둔 어머니는 시집 못 가는 딸에 대해 노심초사 걱정이 많았다. 요즘 세상에야 딸이 서른이 넘어도 걱정하는 부모가 별로 없다. 그러나 필자 때만 해도 27세이면 노처녀였고 그런 딸을 바라보는 부모님은 불안하고 걱정이 많았다. 급기야 필자는 어머니의 성화로 수많은 선 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그때 필자 눈에 콩깍지를 씌운 한 남자가 다가왔다. 공교롭게 같은 시기에 선본 다른 남자는 부모님이 마음에 쏙 들어 하셨다. 필자가 고집을 부리자 어머니는 필자가 좋아한 남자를 집으로 데려오라 하시더니 모욕적인 질문을 마구 하셨다. 주로 돈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남자를 실망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어깨를 떨구며 집을 나가는 그를 따라 울면서 무작정 따라나섰다. 모욕적인 말에도 그는 아마 어머님이 자기가 맘에 안 들어서 일부러 그러셨을 거라며 오히려 필자를 위로했다. 그날 같이 간 곳이 서부역이었다. 그 사람은 필자를 데리고 서부역에서 교외선을 탔다. 목적지도 없이 한 바퀴 돌아 다시 서부역으로 오는 동안 그의 어깨에 기대 울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그렇게 서부역은 슬프고 애틋한 기억이 남아 있는 장소다.

결국, 필자는 부모님이 좋다는 사람과 결혼해 무난히 살아왔다. 생각해 보면 필자에게 서부역은 젊은 날의 상처와 사랑이 깃든 추억의 장소다. 그런데 지금은 서부역 근처를 지나도 아무 감흥이 없다. 한동안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울컥하고 아렸던 필자의 감성은 과연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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