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직후이니까 한 해를 보태면 70년 전 일입니다. 그해 겨울을 간신히 지내고 이듬해 이른 여름에 저는 ‘길에서 주워온 아이들’을 돌보는 ‘시설’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저는 6세에서 12세까지 아이들 여섯 명이 기거하는 방에 배정을 받았습니다. 기묘한 구조의 커다란 한옥 구석방이었는데 햇빛이 들지 않았습니다. 저까지 모두 일곱 명이 나란히 누울 수도 없는 크기여서 다른 아이의 배나 등에 발을 얹거나 팔을 감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벽에는 사방에 횃대가 있어 거기 옷을 걸었고, 작은 판지(板紙) 상자 세 개가 있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책을 거기 넣어두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방을 열었던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작은 쪽문을 열자 아이들은 일제히 13세인 저를 바라보았는데 제가 압도된 것은 그 눈망울들이 아니라 그 방의 냄새였습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저는 그 냄새를 묘사할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악취였습니다. 그것도 역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습니다. 코가 막힐, 그래서 숨이 막힐, 그런 냄새였습니다. 가장 가깝게는 시궁창 냄새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그것으로는 모자랍니다.
이윽고 그 냄새가 역하지 않게 되고, 그 냄새가 내 냄새라고 여기게 되었을 즈음에, 저는 비록 그 냄새를 묘사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명명할 수는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곳에 살지 않는 밖의 사람들이 ‘우리’를 묘사하는 언어였는데 그것은 ‘거지새끼들 냄새’였습니다.
그 명명은 옳았습니다. 듣는 우리의 자존을 마치 발꿈치로 싹싹 비비는 것 같은 ‘독한’ 발언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래도 그 표현에는 ‘사람’이 들어 있어 다행이기조차 했습니다. 그때 제가 지금 표현하듯 그렇게 다듬어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시궁창 냄새’로 몰아 치워버리는 것보다 ‘거지새끼들 냄새’는 냄새의 주체가 사람인 것만은 인정하고 있는 반응이라는 어떤 느낌이 제게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랬습니다. 씻지도 않고, 빨래도 잦지 않고, 대소변 가리지 못하는 어린아이도 있고, 남몰래 먹을 것 감춰둔 것이 상하기도 하고, 비를 맞은 담요가 곰팡이가 나도 바꿔 덮을 것이 없는 터에 시궁창이 바로 그 방인데, 그 냄새가 극한 악취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살고 있는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냄새에는 웃음도 시샘도 다툼도 살핌도 섞여 있었습니다. 거창한 개념어를 사용한다면 그 냄새에는 꿈도 절망도, 희망도 자학도 섞여 있었습니다. 그리움도 있었고 회상도 있었습니다. 울부짖는 잠꼬대 끝에 깨어난 아이에게 웬 악몽이냐고 물었을 적에 “엄마를 만났어!” 하는 대답마저 섞인 냄새였습니다.
저는 악취가 싫습니다. 당연합니다. 누구나 그러합니다. 그런데 저는 향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좋아하면 안 된다는 이상한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집안에 제사가 있는 날이면 제게 주어진 일은 향로를 닦고 모사(茅沙)를 담아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제사 때 피어나는 향이 참 그윽했습니다. 그 향의 맑은 기운이 돌아가신 조상의 혼령을 모셔올 만큼 지금 이곳을 정화(淨化)해준다는 어른들의 설명이 감동스러웠습니다. 인간의 아픔이 가장 순수하고 오롯하게 다듬어지는 종교의례의 차례가 분향(焚香)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은 지나칠 수 없는 귀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종교사를 공부하던 어느 계기에 저는 난데없는 ‘고약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에게, 또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에게, 자기의 ‘아픔’을 아뢰어야 한다면 자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다 드러내야지 왜 아름다운 냄새로 자기를 치장하면서 “잘 봐주십사” 하고 아뢰나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정성이고 예의이지 하는 설명이 없는 것은 아니고, 또 그러한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왠지 ‘분향’은 ‘외식(外飾)’의 극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니 제단에서 나는 향기가, 그곳이 어떤 종교의 제장(祭場)이든, 점점 불편해집니다. 향이 저어해지는 것입니다. 향기로운 냄새를 풍겨 추한 곳을 가리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몸에 향수를 뿌리는 일조차 조심스러워집니다. 늙은이 냄새는 목욕을 아무리 해도 가시지 않으니 향수를 뿌려 견딜 수밖에 없다면서 귀한 프랑스제 향수를 선물로 준 친구가 있습니다. ‘나한테서 그리도 역한 냄새가 나느냐’면서 고맙게 받긴 했지만 아직도 그 향수를 사용하지 못해 못내 미안할 따름입니다.
삶은 냄새를 지닙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맛도 없고, 만질 수 없어도 냄새는 어디에나 언제나 어떤 것에나 있습니다. 삶은 이런저런 냄새를 지니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혹 내게 마땅치 않은 냄새라도 ‘잘 맡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나도 냄새를 지닌 주체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맑고 따뜻하고 그윽한 냄새를 풍겨야 합니다. 하지만 ‘모자란 냄새’를 지우거나 더 좋은 냄새를 내려, 냄새에 냄새를 더하는 억지를 부려 자칫 악취만을 낼 수도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는 까마득한 ‘거지새끼 냄새’가 새삼 그리워집니다. 삐뚤어진 생각 고치고 늙은이 냄새를 향수로 조금은 가려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이나저나 제가 사람 노릇을 하면 사람 냄새를 지니고 고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하여 아예 냄새에 대한 ‘긴장’을 털어내는 일이 우선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