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주는 존재, 자식은 받는 존재 김미나 동년기자
‘내 몫은 얼마나 될까’, ‘언제쯤 주실까?’
그러나 짜다는 소리 들으며 부를 축적하신 부모님께 성화를 부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투잡을 뛰고 하얀 밤 지새우며 일했지만, 누구는 연봉 3억이란 말에 손을 떨궜다. 언젠가는 주시겠지 하는 느긋한 마음도 아이들이 자라고 사교육에 등골이 휠 때마다 절심함으로 밀려왔다.
그렇게 기다림에 지쳐가던 사촌 언니의 넋두리에 드디어 종지부가 찍혔다. 부모 도움 없이 성공하는 일이 정말 힘든 세상이라며, 내 자식 뒤처질까 증여를 해주셨다는 것이다. 환한 목소리로 곧 이사를 해야 한다며 전화를 끊는 언니는, 가뿐하게 부모님이 만들어주신 꽃밭으로 들어갔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으로 아들 유학도 보냈다. 만만치 않은 등록금 폭탄에도 한숨이 터지지 않았다. 중년 이후에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 노후자금 끌어다 자녀 유학비 대는 것이라지만 언니 마음은 늘 아들에게로 향했다. 남편과 부딪혀도 위로를 해주는 건 아들이고, 엄마 스테이크를 한입 크기로 잘라서 먹기 좋은 쪽에 놓아주는 사람도 아들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다 가진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자녀들은 나만큼 살기 어려울 것이라는 현실에 직면하니 더 안쓰러웠다. 부모 잘 만나는 것도 능력이라는 자조가 씁쓸해도, 받은 것이 있으니 주기가 한결 수월했다. 인생에서 돈이 다는 아니지만 돈만 한 것이 없고 그 맛을 봤으니 어쩌랴.
유학을 마치고 모두들 어렵다는 취업 허들도 가뿐히 넘은 아들이 여자 친구를 데려왔다. 둘이 결혼 말이 오간 모양인데 외동딸인 여자 친구 앞으로 번듯한 아파트가 있다고 했다. 게다가 그 집에서 신혼살림을 하기로 했다니 돌아서 빙그레 웃었다. 그러던 중 문제가 생겼다. 신혼살림을 하려던 그 집이 살고 있는 세입자와 이사 날짜가 맞지 않아 입주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쌉싸래한 기분을 내색할 수도 없어 아들 가진 쪽에서 적잖은 전세금을 내줬다. 얼마 후 며느리의 임신 소식에 그간의 속상함은 어디론가 내빼고 애정이 솟았다.
연이은 한파가 휘몰아쳐 뼈마디가 시큰거리고 마음까지 곤두박질치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짧은 추위에도 내의를 챙겨주던 아들이 전화를 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장장한 대화 중에 엄마의 단락은 없었다. 장모님께서, 매서운 추위에 사위 감기라도 걸릴까 두툼한 패딩 사 입으라 50만 원을 보내셨다는 감동 소감만이 물결쳤다. 엄마도 거기에 공감하라는 메시지를 폭풍 전송하고 있는 남자가 아들이었다. 사돈댁 지원에 제스처를 취해야 할 것 같아 상응하는 임신 축하금을 보냈다. 아들은 오래된 집이라 아기 키우기에 춥고 불편해 이사를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흘렸다.
찌르르하면서 멍함이 파고들었다. 아들은 잊고 있나보다. 막대한 유학비와 조건 없는 억대의 전세자금이 흘러 들어간 벅찬 사정을. 그때 감사 표현을 지금 감동의 조각만큼이라도 했던가. 제 돈 가져가는 것처럼 당당했지. 크고 작은 결제를 할 때도 머뭇거림 없었지. 주저 없이 카드를 썼지. 손 벌려 받은 것이니 그렇게 써도 되는 돈이라 생각했겠지. 부모가 영원한 봉이냐고 말하려다 사촌 언니 스스로 말문을 닫았다. 마치 자기가 들어야 할 말처럼 뜨끔해했다. 애써 모은 내 돈 쓸 때는 가슴이 벌렁거리고, 부모님이 고생하며 번 돈 쓸 때는 아무렇지 않았다. 어느 날 뚝 떨어진 돈, 쓰는 재미가 쏠쏠했고 잘 먹고 잘 사니 어깨가 가벼웠다.
울적한 마음 달래보려 남편 앞세워 여행을 기획했다. 그런 사촌 언니에게 아들은 말했다. 3~4년 후에 아이 크면 그때 함께 가자고. “어이쿠, 이게 바로 친구들이 뜯어말렸던 ‘육아 도우미’ 패키지 여행이로구나.” 손주와 가는 여행에 따라나섰다가는, 독박 육아에 여행 경비 떠맡을 돈줄로 내몰려 여행은커녕 스트레스만 뒤집어쓰고 돌아오게 된다 하지 않았던가. 사촌 언니는 소리 소문 없이 빠르게 여행을 떠났다. 답 없는 질문을 변명으로 툭 던지면서.
애초에 부모는 주는 존재, 자식은 받는 존재로 태어난 것일까.
자연으로 돌려주고 싶은 유산 백외섭 동년기자
지난 여름휴가 때 지인으로부터 제주도 초대를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자산관리사인 내가 이번 그의 여행에 동행해 상속재산 ‘제주 땅’을 찾고 그 활용 방안 자문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휴가를 겸해서 떠난 상속재산 찾기 여행. 이른 아침 거북바위에서 바라보는 제주도의 풍광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는 자신이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에 그 땅이 있을 것이라 했다. 모친에게 상속등기를 해놓은 땅인데, 성산일출봉에서 가깝다는 ‘제주 땅’을 아직 본 일은 없다 했다. 아직 젊은 그는 재능기부 창업상담 활동을 하면서 나와 만났고 가끔 산행을 같이하면서 교류하는 사이다.
상속은 멀리 그의 외조부로부터 시작됐다. 옛날에는 상속지분이 지금처럼 ‘남녀평등’하지 않았다. 아들과 딸, 호주상속자 차별이 심했다. 제사를 모시는 장자에게는 듬뿍 주고, 출가한 딸의 몫은 거의 없었다.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도 오늘날처럼 상속분쟁으로 패가망신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의 외조부는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두었다. 집과 선산, 문전옥답은 아들 몫이 될 터였다. 외조부는 임종이 가까워지자 세 딸도 생각했다. 농토의 일부를 정리한 뒤 현금을 마련해 딸들에게도 재산을 똑같이 나눠줬다. 이는 상속과 구분하기 어려운 증여였다. 그의 어머니와 이모들은 생각지도 않은 돈을 받고 생활 여건에 따라 긴요하게 사용했다. 어렸을 때 그가 부모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큰 회사 제주지사에 근무했던 그의 부친은 장인에게서 받은 돈이므로 땅에 묻어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 장래에 집 지을 생각으로 적당한 곳의 임야를 샀다. 개발전망이나 투자가치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던 옛날이야기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서울로 발령이 났고, 그 후로는 제주도에서 살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그의 가족은 그 땅을 보지도 않았고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성산일출봉이 바라보이는 곳인데도 누구 하나 찾는 사람도 없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그 땅에 있었다. 우선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분석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는 창작예술 사업가였는데,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차를 운전하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뭔가 창작소재를 찾고 싶은 눈치였다.
얼마 후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던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주소대로 안내를 받은 곳은 해안의 반듯한 도로와는 전혀 다른 비포장도로였다. 한참 더 들어가서야 차가 멈췄다. 우리가 찾는 ‘임야’였다.
하지만 도로보다 조금 낮게 야트막한 늪이 펼쳐져 있었다. 물오리 몇 마리가 수영을 즐길 정도로 물이 있었다. 상당한 넓이의 임야 중 절반이 그랬다. 경사진 땅으로 가려면 늪에 배를 띄워야 할 형편이었다. 이른바 맹지였다.
“허허! 이게 뭐야?”
그의 헛웃음이 주변으로 메아리쳤다.
가까운 곳에 몇 가구가 사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마침 ‘토박이 부동산’ 어르신을 만났다. “옛날에는 모두 땅이었는데, 웬일인지 지반이 점점 내려앉아 물이 고였다”고 설명해줬다. 토지로 활용하려면 늪을 메워야 하는데 지반이 약한 제주에서는 장래를 기약하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일출봉 앞 백사장에서 우린 맥주를 들고 마주 앉았다. 낮에 봤던 물오리 몇 마리가 눈에 어른거렸다. 인공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 풍경, 물오리가 사는 늪이 좋았다. 그러니 그 ‘제주 땅’을 자연으로 돌려주자!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공평한 나눔에 대한 생각 박종섭 동년기자
공평한 나눔이란 어떤 것일까? 어느 집이든 이런 물음을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크든 작든 돈과 연관이 되면 하나의 답을 내기가 어렵다. 그리고 상속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이 걸려 있다. 핏줄을 나눈 형제도 있고 배우자도 있다. 아무리 우애가 좋은 형제라도 부모님이 물려주신 유산 때문에 사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겪지 않았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며 6남매를 키우신 우리 부모님은 부지런히 일해 돈이 생길 때마다 근처의 땅을 사들이셨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시골에서는 논마지기깨나 있는 집안이 된 것이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부모님이 땅을 살 때마다 명의를 자식들 앞으로 하나둘 해놓으셨다는 걸 알게 됐다. 집 앞 논은 큰아들, 고개 넘어 서 마지기는 작은아들, 그리고 주산골 밭 한 뙈기는 막내아들, 이런 식이었다. 그때는 그게 별거 아닌 것 같았고 큰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그 유산이 자식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게 됐다. 무엇보다 자식들이 서로 마음 상하지 않고 감사해하며 부모님 제사를 지낼 수 있어 좋았다.
나는 아들에게 부모님이 물려주신 땅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아빠가 이 땅은 팔지 않고 네게 물려줄 거다. 그러니 너도 팔지 말고 훗날 네 아들에게 물려줘라. 저 건너 밭은 네 사촌형 밭이니 사촌끼리도 잘 지내도록 하라.”
내 처가도 형제간 우애가 정말 좋다. 부모님이 아직 생존해 계셔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형제들은 시골에 자주 모여 즐겁게 지냈다. 가을이면 텃밭의 배추를 뽑아 온 가족들이 모여 김치를 담그고 맛있는 보쌈김치도 만들어 두툼한 돼지고기와 막걸리를 곁들이며 축제를 열었다. 남은 텃밭에는 형제들이 나눠 먹자고 건강에 좋다는 ‘아로니아’ 나무를 심었다. 형제들이 모여 거름 주고 김매고, 열매가 까맣게 익으면 함께 수확을 하곤 했다. 어느 가족 못지않게 형제들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작년에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다. 옛날 어른이라 그런지 덩치가 가장 큰 뒷산은 장남에게 벌써 명의이전을 해놓으셨다. 나머지 논밭 그리고 집이 있는 대지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있다. 분배 과정에서 서운함이 있었고 결국 형제들은 옛날 같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 물론 법이 있기는 하지만 형제간 문제는 법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살아 계실 때 어느 정도 정리하시고 가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특별수익’을 챙긴 손윗사람이 먼저 마음을 비우고 아랫사람을 품어야 한다.
공평한 나눔이란 어떤 것일까? 내가 나눠놓고 선택 우선권은 상대에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럴 경우 남의 떡이 커 보이는 상황은 거의 없다.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당연히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 규모도 매우 커졌다. 서울 대부분의 아파트 한 채 가격이 10억 원이 넘는 상황에서 과거 부자의 상징이었던 백만장자는 지금의 관점에서는 부자 축에도 들기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개인들의 재산 규모가 확대될수록 더욱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바로 상속과 증여의 문제다. 과연 자녀에게 어떻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좋을까? 일률적으로 그 해답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 국민들 상당수가 공통적으로 고민할 법한 사례들을 통해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재산의 대물림과 관련해 실제로 많은 사람이 고민하는 대표적인 사례 세 가지와 그에 대한 해법을 나름대로 제시해보고자 한다.
사례1. 상속이 좋을지, 증여가 좋을지
김갑동(가명) 씨는 상속을 해주는 것보다는 미리 증여를 하는 것이 세금 측면에서 이익이라는 말도 들었고, 아들이 원하기도 해서 아들에게 미리 증여를 해주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아직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별 문제가 없어서 앞으로도 꽤 오래 생존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재산을 증여한 이후 아들이 자신을 제대로 부양하지 않을까봐 걱정이다.
많은 부모가 자식들에게 미리 증여를 해준 후 생계가 곤란해지거나 자식들이 부모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무시할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에게 증여를 할 때 자식이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고 부양할 것을 약속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만약 자식이 그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모가 자식을 상대로 이미 증여한 재산의 반환을 청구하면 법원이 받아들여줄까? 이러한 증여는 법률상 ‘부담부증여’에 해당될 수 있다. 증여를 하되 증여받는 사람, 즉 수증자에게 일정한 법적 부담을 지우는 것이다.
부담부증여를 받은 수증자가 부담을 이행하지 않으면 증여자는 계약위반을 이유로 계약을 해제하고 원상회복을 요구할 수 있다(민법 제561조).
문제는 그러한 부담이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지의 여부다. 증여는 원래 부담 없이 하는 것이 원칙이어서 부담이 있었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 즉 부모가 부담의 존재(재산을 증여하는 대신 부양하기로 했다는 사실)를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보통 부모 자식 간에 계약서를 작성하고 증여를 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보니 부담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이런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이른바 ‘효도계약서’를 작성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증여를 하는 대신 부양의무를 이행해야 하고 만약 이를 어기면 증여한 재산을 다시 반환한다는 취지의 계약서인 것이다. 이런 계약서를 작성해두면 나중에 자식이 의무를 위반할 경우 부담부증여임을 주장, 입증하기가 매우 용이해진다. 즉 증여 재산을 다시 반환받기가 수월해지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 상당히 불편하고 꺼려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긴 하지만, 미래에 생길지도 모르는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증여하기 전에 꼭 효도계약서를 작성해둘 것을 권한다. 그리고 효도계약서의 내용은 가급적 구체적일수록 좋다.
사례2. 위대한 상속, 아름다운 증여
김을동(가명) 씨는 아들과 며느리가 자신에게 잘해주고 대를 이을 손자도 있어서 아들에게 재산을 모두 물려주고 싶다. 그래서 전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준다는 취지의 유언장을 작성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유언장을 작성하면 자신이 사망한 후 아들과 딸들 사이에 분란이 생길 것 같아 걱정이다.
남아선호 사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딸보다는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싶어 하는 부모가 많다. 특히 가업을 물려주고 싶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유류분제도라는 것이 있어 유언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유류분이란 상속 재산 중에서 피상속인(부모)이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하고 상속인(자녀)을 위해 법률상 반드시 남겨둬야 할 일정 부분을 말한다.
‘상속 재산 중 남겨둬야 하는 부분’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상속으로부터 배제된 상속인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다. 상속으로부터 배제된 배우자나 자녀들은 생전 증여나 유언이 없었다면 자신이 원래 받을 수 있었을 법정상속분의 2분의 1을 유류분으로 청구할 수 있다(민법 제1112조).
법정상속분 전체를 반환받지 못하고 2분의 1만 반환받도록 한 이유는, 피상속인의 이익과 상속인의 이익이라는 상반되는 두 개의 이익을 균형 있게 보호하기 위해서다. 즉 피상속인에게는 유언의 자유가 있고, 자기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자유가 있다. 그런데 유류분제도는 상속인이 상속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내지는 이들의 생계를 보호하기 위해서 유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따라서 피상속인과 상속인이 서로 2분의 1씩 양보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이러한 유류분제도가 있기 때문에 만약 사례2와 같이 김을동 씨가 아들에게만 전 재산을 준다는 유언장을 작성했을 경우 딸들은 아들을 상대로 유류분 반환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과거와 달리 딸들의 권리의식이 투철해진 요즘 이러한 유언장을 작성할 경우 김을동 씨의 우려대로 사후에 자식들 간에 치열한 소송전이 벌어질 것은 명약관화하다.
따라서 아무리 아들에게 전 재산을 주고 싶어도 그렇게 해서는 분쟁을 피할 수 없으므로, 딸들의 유류분에 해당하는 만큼의 재산은 딸들에게 주고 나머지는 아들에게 주는 것으로 유언장을 작성할 것을 권한다.
사례3. 성년후견인과 유언대용신탁
김병동(가명) 씨에게는 자식이 하나 있는데 정신지체자이고 결혼도 하지 못했다. 이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줘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모두 탕진해버리거나 사기를 당해 나중에 생계유지도 못할 것이 걱정이다.
김병동 씨의 경우처럼 자식에게 장애가 있거나 또는 나이가 너무 어려 재산을 물려주더라도 온전히 재산을 보존하지 못할 위험이 높아 걱정하는 이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생전에 증여를 해도 걱정이고 사후에 상속을 해줘도 걱정이다. 자녀가 정신지체자이거나 미성년자인 경우에는 자녀를 위한 성년후견인을 선임할 수 있다. 성년후견인은 자녀의 신상보호와 재산관리를 맡아서 처리하게 된다.
그러나 성년후견인은 일반적으로 재산관리의 전문가도 아니고 관리를 맡은 재산을 횡령할 위험도 있다. 우리보다 성년후견제도를 먼저 시행했던 일본의 경우에도 성년후견인이 피후견인의 재산을 횡령해 문제가 된 사건들이 있다. 이런 위험과 걱정을 떨쳐버릴 수 있는 아주 유용한 제도가 바로 유언대용신탁이다.
유언대용신탁은 자신이 사망한 후에도 재산이 자신의 뜻대로 처분되고 활용되기를 희망하는 재산승계 수단이다. ‘사후설계’에 관한 피상속인의 욕구를 해소시켜주기 위한 대안으로 2012년에 도입되었다(신탁법 제59조).
유언대용신탁은 말 그대로 유언을 대체하는 수단으로서 유언과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다. 유언대용신탁은 위탁자(피상속인)가 생전에 신탁계약으로 자신의 재산을 신탁에 맡기는 것으로서 위탁자의 생전에 이미 신탁이 효력을 발생한다.
그러나 유언은 유언자 사후에 비로소 효력이 발생한다. 그리고 유언대용신탁은 유언이 아니라 계약이기 때문에 엄격한 유언의 방식을 갖출 필요도 없고 유언법정주의(법에 정해진 사항에 대해서만 유언을 할 수 있다는 원칙)의 제한도 받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유언대용신탁이 유언에 비해 매우 편리하고 융통성 있는 제도임을 알 수 있다.
유언대용신탁의 전형적인 예를 들면, 위탁자 갑이 수탁자 을과 신탁계약을 체결하면서 신탁원본(처음에 신탁에 맡겼던 재산)으로부터 나오는 신탁수입을 갑의 생존 중에는 갑에게 지급하고 갑이 사망하면 신탁원본 및 신탁수입을 병(상속인)에게 지급하는 것으로 정하는 것이다.
이때 수탁자는 반드시 금융기관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일반 개인도 수탁자가 될 수 있지만, 자녀를 위해 안심하고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금융기관을 수탁자로 하는 것이 좋다.
정신지체 자녀를 위해 유언대용신탁을 설정한다면 다음과 같은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피상속인이 상가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고 치자. 그 건물을 신탁하면서 자신이 죽더라도 자녀에게 건물을 넘겨주지 않고 자녀가 사망할 때까지 건물에서 나오는 임대수익만을 지급함으로써 자녀가 안정적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자녀가 사망하면 그 자녀의 상속인에게 이전시키든지 아니면 기부를 통해 사회에 환원하도록 하는 것이다.
어린 자녀를 위해 유언대용신탁을 설정한다면 다음과 같은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앞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피상속인이 상가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고 치자. 그 건물을 신탁하면서 자신이 사망할 당시 자녀가 미성년자인 경우, 건물을 바로 자녀에게 넘겨주지 않고 자녀가 성년자가 될 때까지 건물에서 나오는 임대수익만을 지급하고, 자녀가 성년자가 되면 비로소 건물의 소유권을 넘겨주는 것이다.
유언대용신탁은 이처럼 기존 제도로는 커버할 수 없는 많은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새로운 재산승계 수단이다.
이런 제도를 잘 활용하면 평생 힘들게 모은 재산이 탕진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승계될 수 있다.
전어는 바닷물고기로 전어 과에 속한다. 몸은 옆이 납작하여 청어와 비슷하게 생겼다. 이 고기는 가을철 별미로 매년 이맘때쯤이면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입맛을 당겨준다. ‘가을 전어 머리에는 깨가 서 말’,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갔던 며느리가 돌아온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고소한 맛으로 잘 알려졌다.
전어에 대해 너무도 궁금하여, ‘임원경제지’(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의 저서)를 펼쳐보니 이런 내용이 적혀있다. ‘전어는 기름기 많고 맛이 좋아 상인들이 소금에 절여 서울에서 파는데, 양반이나 천민 모두 좋아해 돈을 생각하지 않고 산다고 해서 전어라고 부른다.‘
여기에 너무 웃기는 희한한 전어에 관한 내용이 있다. ‘며느리 친정 간 사이에 시부모가 문을 걸어 잠그고 먹는다.’ 전어는 그만큼 맛이 좋은 생선임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전어에는 우리 체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필수 아미노산이 8종류나 함유돼 있고, 영양가도 높다. 또 콜레스테롤과 체지방을 분해하고, 피부미용에 좋아 여자들이 선호하며, 타우린, 칼슘, 비타민, 미네랄이 많아 피로 해소에 좋은 식품에 속한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요리여왕 뚝딱이님’라고 소개한 바 있는 아내는 가을이면 전어를 사다 요리 솜씨를 자랑했다. 아내가 요리를 할 때면, 고소하게 풍기는 전어 냄새에 군침을 흘리며 기다리곤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요리여왕 뚝딱이님'은 어느새 전어 회를 썰어 초고추장과 막장을 쳐서 가져왔다. “상추쌈으로 아삭아삭~ 씹어 드세요”라고 말하며 빙그레 웃는다. 살아있는 전어를 잡자마자 회를 쳐야 맛이 있다고 요리여왕답게 솜씨 자랑을 한다. 그러더니 “전어구이는 크기가 한 뼘 되어야 맛이 있다” 하면서 나에게 한 입 건네준다.
찬바람이 불고 가을이 깊어질수록 전어는 맛이 차오른다고 한다. 아내에게 별명 하나를 잘 지어준 덕분에 놓칠 수 없는 가을 별미 전어 한 상으로 호강했다.
백십 년 만의 무더위라고 하는 폭염이 계속되는 요즘이다. 한여름이니 아이들도 방학을 맞았다. 유치원생인 손녀와 어린이집에 다니는 손자도 일주일간 집에서 쉬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 전업주부였던 며느리가 직장에 나가고 있다. 다행히 아침에 큰아이를 유치원 통원버스에 태우고 작은아이는 어린이집에 보낸 후 출근하고 아이들 끝나는 시간 전인 4시에 퇴근하는 직장이라 무리 없이 지내고 있었는데 이제 문제가 생겼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미술 하는 날과 발레 하는 날만 유치원에서 손녀를 픽업하여 학원에 보내는 임무를 갖고 있었는데 이제 방학을 맞아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안 가는 아이들을 며느리가 퇴근해 올 때까지 돌봐야만 하게 되었다.
물론 예쁜 손녀 손자를 매일 볼 수 있는 건 행복하지만, 시니어가 된 이후 내 일정도 만만치 않게 바빠서 걱정이었다. 그래도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 손녀 손자 봐주는 일이므로 다른 일정은 당분간 모두 보류되었다.
생각해 보니 여태까지 아이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제 어미가 알아서 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예뻐하기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 방학 일주일 동안 먹이고 씻기는 일이 다 내 차례가 되어서 난감했다. 아들이 어릴 땐 좋은 음식만 먹인다고 요리 연구도 꽤 했는데 너무 오랫동안 아기들을 위한 음식을 해보지 않아 서툴렀고 먹지 않으려는 작은아이 밥 먹이는 일도 큰 난관이었다.
두 아이 돌보기가 매우 힘들 거라는 며느리의 조언대로 아침 식사 후에 키즈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키즈카페의 실상을 알고 나는 좀 놀랐다. 우리 어릴 땐 방학이 되면 골목길에 친구들이 모여서 소꿉놀이도 하고 술래잡기 등을 하며 하루를 보냈는데 요즘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키즈카페는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모 백화점 키즈카페에 갔다. 요 녀석들은 이전에도 와봤는지 무척 신났고 즐거워했다. 먼저 입장료는 한 시간에 8.000원이고 십분 초과마다 1.000원씩 추가된다고 한다. 보통 아이들이 두세 시간은 뛰어노니 두 아이의 놀이 비용이 꽤 나갔다.
물론 쾌적한 환경에 퍼즐이나 블록 등 장난감도 구비되어있고 볼 풀이나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으므로 아이들도 좋아하고 엄마에게도 휴식을 줄 수 있다고 한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뛰어놀던 내 어릴 적과는 매우 다른 놀이문화다. 점심을 사 먹이고 아이스크림까지 먹은 후 집에 돌아오는 과정이 며칠 계속되었다.
온종일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도 힘에 부치니 역시 나이는 못 속인다는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래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 손자이니 기쁜 마음으로 돌보지만 이렇게 방학 동안 봐줄 사람 없는 맞벌이 부부의 경우 어찌하는지 걱정스러워 며느리에게 물었더니 다 방법은 있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방학이라도 선생님들이 순번을 정해 맞벌이 자녀를 위해 출근하는 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천만다행이라는 생각과 이런 복지제도를 정부 차원에서 잘 운영해서 걱정 없이 아기들을 낳아 기를 수 있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돌 봐줄 사람 없는 맞벌이 가정 아이들도 안심하고 유치원에서 보호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월요일부터 닷새 동안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이런 북새통을 며느리는 매일 겪고 있을 테니 참 대견하고 고맙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오롯이 내 것이었던 아이들과의 시간이 행복했다. 이제 방학이 끝나 아이들도 일상으로 돌아갔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반갑게 만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아기들을 생각하니 즐거워서 미소가 계속 피어난다.
우린 어린아이와의 약속을 쉽게 잊어버리고 지키지 않아도 될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퇴근길에 피자를 사줄게’라던가 ‘공부 열심히 해서 시험점수가 좋게 나오면 자전거나 휴대폰을 선물로 사 줄게’ 같은 약속이다. 아이들과의 약속을 별생각 없이 쉽게 하고 편리하게 잊어버리는 게 더 문제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의 이야기다. 증자의 아내가 시장에 가는데 아들이 따라오며 울었다. 아내가 아들에게 말했다. “집에 가 있어라 그러면 곧 돌아와 돼지를 잡아 줄게.” 이렇게 달래어 아이를 떼어놓고 시장에 다녀왔다. 아내가 집에 와보니 증자가 돼지를 잡으려고 했다. 아내가 정색을 하며 말렸다. “아이를 달래려고 농담을 했을 뿐입니다.” 증자가 대답하기를 “어린아이와 농담이라니요. 아이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부모를 통해 배웁니다. 만약 자식을 속이면 이는 자식에게 속임을 가르치게 됩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속이면 자식이 어머니를 믿지 않게 되고 이는 옳은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리고 증자는 돼지를 잡아 삶았다고 한다. 지금도 집에서 키우던 돼지를 잡는 일은 큰일 때나 가능하다. 당시로도 재산 목록 두세 번째인 돼지를 잡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자식의 옳은 교육을 위해 증자는 재산의 손실을 보면서도 단호하게 돼지를 잡았다.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두 가지 경험이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오래전 일로 당시는 어린이집이 별로 없을 때였다. 전봇대나 담벼락에 아이 봐줄 사람을 구한다는 전단이 붙었던 시절이다. 아래층에 50대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같은 동네 다섯 살짜리 아이를 돈을 받고 돌봐주기로 했다. 아이엄마가 출근하면서 아이를 할머니 집에 맡겼다. 아이는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울었다. 아이엄마가 “금방 올게”, “화장실 갔다 올게”라며 거짓말을 하고 도망치듯 달아났다. 아래층에서 아침마다 아이의 울음소리로 마치 전쟁터 같았다. 아이는 엄마와 떨어지면 당연히 우는지 알았고, 그런 아이가 불쌍하고 애처로웠다. 그 아이는 다음 해 유치원을 다녔다. 아이 엄마가 수업 참관을 하는 날. 다른 아이들은 엄마를 힐긋 쳐다보고 곧 엄마를 잊어버리고 아이들 틈에 섞여 잘 놀았다. 그러나 이 아이만은 엄마가 그냥 가버리지 않을까 온 정신을 집중하여 해바라기가 되어 엄마만 쳐다봤다. 아이엄마가 숨죽여 울고 있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우리 집 첫 손녀 이야기다. 직장에 다니는 며느리가 겨우 6~7개월 된 기어 다니는 손녀를 두고 직장에 복귀해야 했다. 며느리가 없는 낮 시간대는 할머니인 아내가 돌봐주기로 했다. 말을 못 알아듣는 손녀에게 며느리는 끊임없이 말을 했다. 직장에 나가야 하는 이유와 오후 몇 시경이면 돌아온다는 말을 한다. 아이는 말은 못 하지만 알아듣는 것 같았다. 엄마가 나가도 칭얼대지도 않았고 할머니의 보살핌을 잘 받아들였다. 신기한 일은 택배라던가 관리사무소 직원 방문 등 손님들이 와서 초인종을 눌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아이가 며느리가 돌아올 시간쯤에 며느리의 발소리가 나면 귀를 쫑긋 세우고 현관 쪽으로 기어간다는 것이다. 엄마의 발소리를 알아차리고 엄마의 귀가 시간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매 맞는 아이는 나중에 자라서 폭력적인 어른이 될 가능성이 높다. 거짓말을 들으며 자란 아이는 거짓말을 하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사회가 점점 혼탁해지는 이유 중의 하나가 부모에게 있다고 본다. 아이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거나 약속을 하고도 쉽게 잊어버리는 신뢰 하지 못하는 부모의 태도로부터 대물림하듯 배운 것이다. 아이에게 미안해하지도 않고 임시방편으로 또 다른 거짓말로 둘러대는 등 신뢰를 주지 못하는 부모의 행동부터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모를 것 같아도 다 안다. 부모를 믿지 못하고 자란 아이가 세상에 누굴 믿고 살겠는가!
시어머니는 처음 뵈었을 때부터 쪽진 머리였다. 동그스름하고 몽똑하게 붙은 뒷머리 가운데로 은빛 비녀가 반짝였다. 농사일로 두 손을 호미 삼아 거의 평생을 사신 어머니. 그 시절 부녀자들에게 달리 돈이 될 유일한 게 머리카락을 파는 거였다. 젊은 시절엔 당신의 삼단 같은 머리카락을 내주고 항아리나 그릇 등을 장만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만든 바늘꽂이를 받았다. “머리카락 바늘꽂이는 녹이 안 슬어. 큰 바늘은 이불 꿰맬 때 쓰거라.”나일론 자투리 헝겊에 특별할 것 없는 무늬. “이걸 언제 쓴대요?”라고 되물으며 나는 조금 웃었다. 생활에 쫓겨 허덕이는 내게 바늘꽂이는 영 동떨어진 분위기였다.
어머니 생전에 내가 들었던 ‘피 뽑는 선비 마누라’ 이야기가 있다. 결혼해서 이 얘기를 몇 번이나 들었던 걸까. 그 얘기를 당신만 알고 있는 비밀인 듯 나직하고 조심스럽게 했다. 나 또한 그 이야기가 생의 비밀을 품은 실타래처럼, 어머니를 통해 마치 주문을 외는 제사장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결혼하면서부터 어머니와 시동생들과 함께 살았다. 첫애를 낳고 얼마 후, 시동생 결혼으로 우리는 시댁 근처 동네로 분가했다. 다락이 있는 단칸방 월세를 거쳐 방 두 개가 딸린 전셋집을 얻었다. 다락의 책들이 내려와 방 한 칸을 차지했다. 책 사이로 겨우 바람이 통한다 싶을 때 아이는 둘로 늘었다. 아침에 눈을 떠 밤늦게까지 육아와 생계를 잇는 노동으로 여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생활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의 시선이 당신 아들의 책에 머물렀다. 필요한 살림보다 책이 주인인 것 같은 방. 공부하는 아들이 시간제로 강의를 한다는데 그럴듯한 밥벌이는 아닌 것 같았는지 어머니는 짐짓 내게 물었다.
“애비 공부는 언제까지 하는 거여?”
“언제까지란 게 있나요. 죽을 때까지 하는 게 공분데.”
“음, 그렇긴 허지.”
속 시원한 답을 기대한 건 아닐 터였다. 당신보다 한술 더 뜬다 싶은 며느리 말에 막연히 불안했을까. ‘피 뽑는 선비 마누라’ 이야기가 나오는 적절한 상황은 이때다.
어머니는 “서방이란 사람이 돈 될 일 하기는커녕,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책만 들여다보는 서방. 그렇게 가망 없겠다싶은 날들을 보내던 차에 쌀이 떨어졌다는구나. 논에서 피 뽑아 겨우 생계 유지하던 마누라가 부아가 나 그만 보따리를 쌌다지 뭐니” 하며 이야기를 늘어놓으신다. 이쯤에서 어머니의 의도는 알고도 남았다. 나도 찔리는 구석이 없진 않았다.
식구들이 잠든 어느 일요일 새벽, 집을 나왔다. 전날 술에 절어 들어온 남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남편 옆으로 여덟 살, 세 살, 두 아이들이 송이버섯처럼 나란히 자고 있었다. 집을 나선 건 계획된 게 아니었다. 식구들을 떠나 나를 돌아봐야 했다. 넘어질 것 같은 내 자신을 추스르려고 안간힘을 썼던 때였다.
얘기 속, 보따리를 싼 마누라는 공부만 하는 서방을 떠나 좀 편하게 살자 했으나 피를 뽑고 사는 궁핍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한다. 조금만 더 참았다면 영광이 있었을 텐데,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서방을 떠난 마누라를 어머니는 당신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머리카락이 들어간 바늘꽂이는 어머니의 체온인 양 은은하다. 평소에 바르시던 동백기름 향이 나는 것도 같다. 바늘꽂이를 보고 있으면 당신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머니는 백수를 한 해 앞두고 소천하셨다. 살아가는 동안 세상 욕심으로 힘들고 외로울 때, ‘비밀’처럼 들려주던 옛날이야기는 나를 부드럽게 꾸짖으며 따뜻하게 위로하는 메시지가 되었다. 바늘꽂이의 큰 바늘은 행여나 마음속 해지지 않게 한 땀, 한 땀 나를 꿰맨다.
볼만한 영화를 찾던 중 ‘B급 며느리’가 눈에 들어왔다. 요즘 가장 핫한 소재 중 하나인 고부간의 갈등을 다룬 영화다. 몇 해 전만 해도 며느리 입장에 걸쳐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 슬며시 시어머니 쪽으로 부등호가 입을 벌리려던 차라 구미가 당겼다.
마침 ‘인디서울 2018’ 독립영화공공상영회 프로그램 중 하나로 여러 곳에서 무료 상영 중이었다. 찾아간 곳은 서울 삼성동 강남시니어플라자. 지하에 마련된 상영관에 삼삼오오 모여든 30여 명의 관객이 영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며느리인 것 같은 사람들, 시어머니 포스 폴폴 풍기는 사람들, 누군가의 시아버지들도 자리를 잡았다.
영화의 도입부 “나는 이상한 여자와 결혼했다”라는 감독의 저음 내레이션이 경쾌한 음악과 대비를 이뤘다. “명절에 시댁에 안 갔어요. 그래서 완벽한 명절을 보냈죠.” 밝고 찰진 며느리의 목소리와 함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됐다. 이어 눈물을 찍어내는 시어머니의 등장. 뒤에 앉은 노신사의 “에이…” 하는 불평도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앞줄에 앉은 며느리 일행은 소리 없는 눈웃음을 교환했다.
“어머니는 내가 해준이 데리고 가면, ‘애 옷이 이게 뭐니?’ 하면서 내가 입혀놓은 옷을 바꿔 놓는다. 언제나 그래. 그래서 해준이가 할머니한테 갔다 오면 꼭 다른 옷 입고와. 내가 입혀준 옷 그대로 입고 오는 적이 없다고. 근데 이게 되게 신경전이 된 거야. 처음에는 그냥 넘어갔는데 이제는 나도 안 참겠다는 거지. 지기 싫다는 거야.” 외출하는 차 안에서 남편에게 고자질인지 험담인지를 하는 며느리의 기세가 등등하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만나는 장면. 소위 잘해보자는 취지로 입장을 조율하는 것이다. “너랑 나랑 안 섞여도 나는 해준이만 보면 돼.” “저는 그게 싫다고요. 제가 싫으면 제 아들도 못 본다고요.” “그래, 됐다. 너네 마음대로 해.” 시어머니가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참으로 녹록지 않은 일상다반사다. 자신은 두 고래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불쌍하고 괴로운 새우일 뿐, 직접적인 관계자 또는 당사자라고 느끼지 않는 남편의 답변은 구경꾼마냥 무기력했다. “원래 다 그런 거야. 그냥 그런 거라고. 이유 따윈 없어. 어른들은 다 그래. 바뀌지 않는다고.”
결국 시댁에 발길을 끊은 며느리의 마음은 무겁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나름의 정당성이 있고 남편도 강요하지 않으니 상쾌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한다. 남편은 혼자 본가에 간다. 틈틈이 촬영한 아이 영상을 어머니께 보여린다. 영상에 대고 손주와 인사하기 바쁜 어머니의 모습이 짠하기만 하다.
“진짜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는 거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며느리는 원통하다. 결혼 전까지 이름 부르던 남편 동생을 갑자기 ‘도련님’이라 부르라기에 “싫어요” 했을 뿐이고, “집안에 어른이 넷인데 밥 먹고 나면 왜 저만 설거지를 해야 해요?”라고 했을 뿐이다. 집안의 경조사를 챙겨야 한다는 강요된 책임감을 거부했고, 시부모님께 하는 형식적인 안부 전화를 안 했을 뿐이다. 그게 그렇게 잘못한 것일까?
그러나 한편으론 이웃에게 자녀들이 외국 나가서 못 온다고 말하는 시어머니도 속이 쓰리다. 남편 뒷자리가 자식이고 저 끄트머리 구석진 곳이 며느리 자리인 줄 알고 산 시어머니다. 결혼하면 여자는 시댁의 하인이라는 말에 인정할 수 없었음에도 표현하지 못한 시절, 존중해달라는 주장이 별스러운 일인 세월을 사셨다. 그런 시어머니 시대의 가부장적인 통념을 껴안기도 하고 살살 달래기도 하면서 조금씩 고쳐나가면 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본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 할 수 있을까? 영화는 한 줄로 정의되는 결론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일 테다. 시어머니와도 보편적인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관계를 맺고 싶었다는, 아직은 매우 보편적이지 않은 며느리는 영화 말미에 스스로 시댁에 들어선다. 그것도 매우 경쾌하게 말이다.
다시 한번 타협점을 찾기 위한 며느리의 노력 어린 발걸음일까? 언젠가 그 집에서 또 고함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어머니에게 “싫어요”라고 말하는 건, 더 나은 관계를 위한 자신만의 방식이고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며느리. 그녀에게 연한 격려를 보내본다.
외출하고 집에 들어오니 아내가 “당신 어제 혹 좋은 꿈을 꾸지 않았느냐”고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말한다.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 얼굴이다. “아니 아무 꿈도 꾸지 않았는데 무슨 좋은 일 있어?” 하고 물어보았다. 자꾸 말을 빙빙 돌리기만 하고 통 말할 생각을 안 한다. 표정으로 봐서는 좋은 일이 분명한데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말하라 독촉하면 재미있어서 더 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럴 때는 관심 없는 표정을 짓는 것이 특효약이다.
“알았어! 말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하면서 별 흥미 없어 했더니 그제야 아내가 정색을 하고 말한다. 시집간 딸이 전화가 왔는데 임신을 했다는 것이다. 첫 외손자가 지금 4세인데 둘째 소식이 없었다. 요즘 시대는 아이를 낳지 않는 분위기라 자신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 하고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딸의 임신이 신기한 일도 아니고 깜작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냥 무덤덤했다. 오히려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 할 딸이 걱정되었다.
요즘은 결혼이 늦어지다 보니 여지도 30세 넘어 결혼하는 추세다. 임신한 딸의 나이가 35세인 점도 마음이 쓰인다. 또 입덧을 심하게 하는 편이어서 첫아이를 낳을 때 고생을 심하게 했는데 잘 견뎌낼지도 걱정되었다. 더구나 큰애도 돌봐야 하는 부담도 있다. 천금 같은 내 딸이 고생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래서 딸이 말하기를, 입덧이 시작되면 엄마가 자기네 집에서 기거하면서 큰애도 봐주고 몇 달 고생을 해달라고 했단다. 친정엄마로서 입덧하는 딸을 돌봐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친정집에 와서 몸조리하면 좋을 텐데, 어린이집에 다니는 큰놈 때문에 아내가 딸네 집으로 출장을 가야 한다. 그래도 흔쾌히 승낙을 했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며느리가 내년에 복직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친손녀랑 그 밑에 두 살 터울의 동생들 둘을 우리가 또 돌봐줘야 한다. 아들네와 딸네 집은 수원과 일산이어서 먼 거리다. 이런 점을 감안해 양쪽 집을 다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우선은 며느리의 복직 전에 딸애의 입덧이 끝나야 한다. 그 후에는 아내가 일산 아들네로 가서 아이들을 돌봐주면 된다. 머리를 굴려가며 방법을 찾아보니 그럭저럭 굴러갈 수 있을 것 같다.
빈틈없는 계획이다 보니 누가 아프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난리가 난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어야 한다. 할아버지는 아이들 돌보는 일에 있어서는 예비군이다. 필자가 직접 아이 돌보는 일의 일선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할머니는 찾아도 할아버지는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아무리 인기가 없다 해도 감당할 수 없는 큰일이 생기면 5분대기조처럼 뛰어나가야 한다. 전에도 필자가 자주 아이들 돌보는 일에 나섰다. 운전하는 며느리가 교통사고를 내서 운전을 못하게 됐을 때도 대리운전을 해줬고 아이들 돌봐달라고 SOS를 보내오는데 아내가 마침 다른 일로 바쁠 때도 필자가 뛰어갔다.
그래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직은 신체건강하게 버티고 있어 친손자 외손자 양육에 개입하고 자식들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것이 다행이고 사는 보람이다. 큰손녀가 유아원에 다닐 때는 아기 같더니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부쩍 어른처럼 행동했다. 막내 놈들도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만 봐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럭무럭 빨리 잘 자라라. 한 다리 건넌 내 새끼들아!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든든하게 보살펴줄게!
큰손녀의 말이 귀에 쟁쟁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집에 왜 안 오세요? 오셔서 우리를 돌봐주셔야죠.” 그 말이 보약처럼 힘이 된다. “암 돌봐줘야지!” 이 맛에 산다.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부와 명예를 누려왔던 안조가(家)는 백작 지위는 물론, 빚에 몰려 저택마저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럼에도 파리 유학을 다녀온 화가 아버지 타다히코(타키자와 오사무), 이혼당해 집으로 온 맏딸 아키코(아이조메 유메코), 피아노나 두드리는 방관자 아들 마사히코(모리 마사유키) 모두 과거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보다 못한 차녀 아츠코(하라 세츠코)는 지난 시절과 결별하기 위한 마지막 무도회를 열자고 한다. 빚을 지게 획책했던 교활한 사업가 신카와 류자부로(시미즈 마사오)가 안조 집안을 삼키려는 걸 간파한 아츠코는 집안 운전사였던 건실한 사업가 토야마(간다 다카시)에게 도움을 청한다.
‘안조가의 무도회’(1947)는 몰락한 귀족 저택에서 열리는 마지막 무도회라는 연극적 설정 하에, 전후 일본 사회가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묻는 영화다. 신구세대를 대변하는 인물 간 갈등, 그리고 이들이 무너지고 반성하고 개안하는 과정을 통해 답을 구한다. 아츠코의 밝은 얼굴 위로 엔딩 자막을 흘리는 데서 답은 분명해지지만, 좋았던 시절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인물에게도 일말의 측은함을 싣는다.
아버지는 여전히 신카와를 믿으며, 그의 딸 요코(츠시마 케이코)와 아들이 결혼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하녀 치요(무라타 치에코)의 애정 어린 호소를 무시하던 아들은 신카와의 속내를 간파하고는 요코를 강간하려 든다. “마음은 아직 귀족”이라고 외치는 장녀는 자신을 사랑해온, 그리고 자신도 사랑하는 토야마를 차마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물의 성격과 내면은 그들 방에 걸린 서양화로도 읽을 수 있다. 아버지 방에는 조르주 루오 의 ‘늙은 왕’이, 하녀를 농락하는 아들 방에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벌거벗은 마야’ 그림이 걸려 있는 식이다.
안주, 패배 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아버지와 아들, 장녀. 군수 물자로 부를 축적한 기회주의 사업가 신카와와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으로 떠오른 건실한 토야마. 마지막까지 충심을 바치려는 집사장. 새로운 시대를 건강한 정신으로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는 유일한 인물 아츠코의 고군분투로 모든 인물과 관계가 바로 잡힌다. 심지어 아츠코는 홀아비인 아버지와 오래 정분을 나눠온 게이샤를 무도회에 초대해, 결혼 발표를 하게 만든다. 초대받은 이들 모두가 비아냥거리던 가운데 갈등이 봉합되는 대단원은 저택 입구를 지키던 사무라이 장수의 갑옷이 쓰러지는 것으로 상징된다.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에 영향 받은 신도 가네토의 오리지널 각본에 기초한 ‘안조가의 무도회’는 1947년 '키네마 준보 베스트 10' 1위 선정 작이자, '키네마 준보 올타임 베스트 일본영화 100'에 꼽힌 일본 흑백 고전이다. 이러한 평가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은 2015년 세상을 떠난 배우 하라 세츠코(原節子)다.
하라 세츠코는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등의 거장 영화에 출연하며 1940~50년대 일본 영화 황금기를 대표했던 전설적 여배우다. 26년간 107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하라 세츠코는 미모와 연기력이 여전했던 42세가 되던 해 돌연 은퇴한다. 그레타 가르보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쇠락해가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죄송합니다"라며 영화 산업, 언론, 팬으로부터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1963년, 자신의 영화 스승 오즈 야스지로 장례식장이 마지막 공식 석상이었다. 이후 카마쿠라시에서 친지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소식만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는데 2015년, 사망 뉴스가 뒤늦게 전해졌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고, 출연작 이미지와 완벽한 자기 관리 덕분에 하라 세츠코는 '영원한 성처녀'로 불리었다. 2000년 ‘키네마 순보’가 선정한 '20세기 영화 스타-일본 편'에서 여배우 부문 1위로 선정될 만큼, 현대에도 일본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사랑받았다. 자서전 ‘이대로의 삶의 방식으로’에서 밝혔듯, 나이 든 일본인에게 향수를 자아내는 전전(前戰)의 가치관, 즉 남편을 잃고도 홀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미망인의 의지가 읽혔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웃고 있어도 눈물을 머금고 있는 듯 아련한 분위기를 풍기는가 하면, 심신이 밝고 건강한 딸과 어머니를 모두 연기할 수 있었고, 기품 넘치는 기모노 차림과 단정한 신여성 차림도 잘 어울리는 정결한 미모로 인기를 얻었던 하라 세츠코. 그녀의 미모와 기품, 연기력을 꽃피운 감독은 오즈 야스지로다. ‘만춘‘과 ’맥추‘에서는 결혼을 마다하는 노처녀 마음을 섬세하게 연기했고, 오즈 야스지로의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동경이야기‘에서는 남편을 잃고도 시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젊고 아름다운 직장인 며느리로 분했다. 하라 세츠코의 이미지를 순종적이면서도 현명하고 건강하고 밝고 기품 있는 여성으로 그려낸 이 세 작품은 하라 세츠코의 극 중 이름을 딴 '노리코 삼부작'으로 불린다.
가족과 효, 결혼이 주제였던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서 하라 세츠코는 전통적 여성상으로 향수를 자극하는 한편 부드럽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은, 쾌활하면서도 의지 강한 여성상을 구축했다. ‘안조가의 무도회’ 역시 이러한 여성상을 십분 발휘한 초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염문설이 있기도 했던 오즈 야스지로 사망 이후 영화계에서 사라진 하라 세츠코. 1963년, 60세 생일에 암으로 사망한 오즈 야스지로 역시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이제야 비로소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다고 했다. 삐걱대던 시절을 지나 생각을 바꾸고 삶을 대했더니 희망이 찾아들었다. 나이 먹고 퇴역 군인처럼 산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이 사람. 건강관리를 열심히 하는 이유? 일이 더 하고 싶어서란다. 멋진 목소리의 DJ, 활기찬 시니어 기자 소리 듣는 게 좋다는 윤종국 동년기자를 만났다. 화창했던 어느 화요일 낮. 라디오 방송 대본을 들고 마주 앉았다.
“어젯밤에 대본 연습을 거의 새벽 2시까지 했어요. 녹음기를 놓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서울노인복지센터(서울시 종로구 경운동) ‘탑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만난 윤종국 동년기자는 살짝 긴장한 눈치였다. 매주 화요일 30분씩 ‘이야기가 있는 풍경’이라는 센터 내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는 윤종국 동년기자. 이날은 입이 타들어 가는지 물컵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마포FM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서울노인복지센터 방송국으로 스카우트(?)돼 온 지 3개월이라고 했다. 익숙할 만도 한데 무슨 일일까?
“제 인생에 인터뷰 기회가 항상 있는 일도 아니고 또 권 기자님이 초대 손님으로 출연하니 제가 잘해야죠.”
인터뷰 전에 제안을 하나 했다. 윤종국 동년기자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초대 손님으로 출연하게 해달라고 말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함께 동년기자단에 대해 복지센터에 모인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었다. 대신 라디오 방송 대본을 제대로 써드렸다. 두 번 정도 대본을 맞춰보고 진행된 생방송은 주거니 받거니 뚝딱 하고 흘러갔다. 방송을 마치자 한결 여유로워진 모습. 안도 섞인 웃음이 윤종국 동년기자 얼굴에 번진다. 라디오 스튜디오 안에 혼자 앉아 콘솔 조절하고, 얘기하고, 음악 트는 것과는 또 다른 경험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윤종국 동년기자는 작년 2기로 동년기자단에 합류했다. 첫인상부터 남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시 마포구 지역 방송인 마포FM에서 DJ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저는 한국 시니어 블로그 협회 회원입니다. ‘내 고장 마포’라고 마포구청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객원기자로 일한 지도 10년이고요. ‘우리마포복지관’ 산하 ‘우리복지신문’에서 봉사기자단으로도 활동하고 있고요. 우리마포시니어클럽 커뮤니티 맵핑(지도제작)팀에서 매퍼(지도 만드는 사람)로서 장벽 없는 동네지도를 만드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요새는 마포구의 작은 도서관 지도를 만들고 있어요. 작다고 하니 어린이 도서관으로 생각하는데 남녀노소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거든요. 그리고 이 라디오 DJ는 재능봉사입니다. 힐링되고 마음부자가 되는 것 같아 가능하다면 계속하고 싶어요.”
시니어 세대를 위한 정보라면 뭐든 관심 있게 보던 차에 동년기자단 모집 공고를 접하게 됐다. 47년생, 빡빡머리, 돼지띠 윤종국 동년기자는 오늘도 내일도 미래를 준비하고 성장해나가는 청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친구들은 벌써 은퇴해서 퇴직 연금으로 생활한다는데 정작 본인은 나이 의식해 뒷선으로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렇게 저에게 기회를 준 탑 방송국과 다른 매체에 다 고마워요. 늦게나마 인정받는 게 참 좋습니다. 뭔가 인생에 큰 힘이 되고 용기도 나고 말이죠. 요즘 나 자신을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술로 버텼던 시간을 지워가다
“젊었을 때 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방송 관련 직업에 관심이 많았어요. 울진에서 살다 고등학교 때 서울로 유학 와서 교내 방송도 하고, 대학교 때는 학보사에도 몸담았습니다. 그런데 일이 좀 복잡하게 꼬이더군요.”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국가가 제동을 걸었다. 사회에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줄줄이 부정당했다. 이데올로기 전쟁이 낳은 연좌제 피해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때 처음 느꼈습니다. 학군단(ROTC) 신청 때 신원조회에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방송사 성우 시험, 국가공무원으로 있을 때도 어려움을 겪었어요. 사실 나이가 드니까 이 말 꺼내는 게 싫고 쑥스러워요. 변명처럼 느껴지고 내 자신을 모독하는 것 같고 말이죠. 얘기 안 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그냥 제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안 된 거겠죠. 가령 ‘키가 남보다 작아서 학군단 입단이 안 됐다’라든지 말이죠.(웃음)”
지금은 웃으며 옛일을 말하지만 그때는 매번 닥치는 고통을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폭음으로 이어졌다. 관계에도 서서히 금이 갔다. 젊은 시절 고무신 거꾸로 안 신고 고집 피워 결혼해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들, 오랜 시절 아끼던 친구들이 견디지 못하고 등을 돌려버렸다.
“아주 심했던 것 같아요. 이제야 이야기를 꺼냅니다. 고통 때문에 술을 엄청 마셨습니다. 좋아서, 억지로, 서러워서, 분노를 참지 못해서요. 거리, 안주, 주량 불문하고 술자리가 있다는 연락이 오면 정신없이 달려갔습니다. 혼자 저를 키우신 어머니도 돌아가시면서까지 제 걱정을 하셨다더군요. 아내는 이종사촌 동생 친구로 만나 6년 연애하고 결혼했습니다. 뭐 하나 제대로 안 되는데 술까지 마셔서 저 때문에 고생 많았어요.”
급기야 몸에 이상 신호가 오고 말았다. 6년 전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대장 파열이었다. 아들 결혼식을 앞두고 응급수술을 받았다. 의사에게 각서까지 쓰고 휠체어에 몸을 실어 아들 결혼식에 참석했던 일화는 작년 ‘브라보 마이 라이프’ 9월호 동년기자 페이지에 게재됐다. 이 일이 있은 후 마음속부터 몸 끝까지 전부 다 바꾸겠다고 다짐했다.
“제2 또는 제3의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각오로 머리부터 밀었습니다. 술도 완전히 끊었습니다. 하루도 안 빠지고 마시던 그 술을 말이죠. 끊고 한 3년 힘들었어요. 지금은 잘 극복했죠.”
가끔 딸아이가 빡빡 밀어버린 머리를 쓱 만지고 가면서 “우리 아빠 사람 됐네”, “복권 당첨 확률보다 아빠 술 끊는 게 더 어려웠잖아” 라며 아버지 자리로 돌아온 윤종국 동년기자에게 칭찬 섞인 말을 건네기도 한다. 아들과는 손주가 둘쯤 생기고 나서야 부자지간이라는 게 뭔지를 좀 알게 됐다. 특히나 고마운 것은 자신이 못다 이룬 방송인의 꿈을 아들이 대신 이뤘다는 점이다. 아들은 모 방송사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한번은 아들이 저한테 게스트로 방송에 좀 나오면 안 되겠냐고 물었어요. 내가 뭘 그런 걸 하냐며 안 한다고는 했지만 한편으로 너무 행복했습니다. 아빠의 모습으로 나타나줘서 고맙다고 아들이 표현해준 것이죠. 정말 아빠로서, 남자로서, 가장으로서, 사회인으로서, 국가의 일원으로서 내 위치로 돌아가는 것만이 살길이었습니다. 그렇게 먹고 싶은 술을 6년 동안 입에도 안 댔습니다. 제사 지내고 음복은 입에만 댔고요. 제가 왜 이걸 강조하냐면 저도 제 자신이 굉장히 예뻐 죽겠으니까요.(웃음)”
‘이야기가 있는 풍경’ DJ 윤종국입니다
술을 끊으니 얼굴색도 표정도 달라졌다. 생각이 달라지니 보이는 것도 많았다. 마포FM을 통해 시작한 DJ 활동도 술을 끊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객원기자로 활동하는 신문에 쓴 제 글을 보고 마포FM 대표가 연락을 했더라고요. ‘나의 삶, 나의 길’ 라디오 초대 손님으로 말이죠. 그때 출연하고 나서 목소리가 좋은 거 같다며 DJ 제안을 받았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중장년층을 위한 프로그램 방송이 있더라고요. 제가 왜 마다하겠습니까? 덥석 시작했습니다.”
1년 정도 마포FM 라디오 스튜디오 안을 누볐다. 화요일 녹음하고 그다음 주 월요일 아침 8시부터 9시까지 마포구 내 집과 상점 등으로 전파를 타고 흘러나갔다.
“생각 같아서는 좀 오래하고 싶었는데 젊은 세대와 함께 호흡을 맞추다 보니 엇박자가 나는 듯했습니다. 나이 먹은 사람은 몇 안 됐어요. 적응할 만하면 스태프가 바뀌고 말이죠. 1년 동안 열심히 했는데 다른 데가 없겠나 싶었습니다. 마침 예전에 알고 지내던 분이 네이버 밴드로 연락을 해왔습니다. 서울노인복지센터에 DJ 자리가 있으니 생각이 있으면 한번 검토해보라고요.”
서울노인복지센터 탑 방송국은 윤종국 동년기자의 친구이자 동년기자 1기 출신인 장혜섭 씨가 적극 추천했다.
“담당 직원이 DJ 의사를 물어보며 전화 연락을 해왔을 때 제가 건 계약조건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한 달 해보고 마음에 안 들면 ‘방송에 지장이 되니까 나가달라’고 미련 없이 말하라고 했어요. 서운해하거나 오해하지 않겠다면서요. 아직 제가 미약한데도 존중을 많이 해줍니다. 전파 방송과 구내 방송이라는 방송 도달 거리 차가 있지만 라디오라는 성격은 같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좋은 점이라면 청취자들의 취향이나 피드백을 바로바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죠. 하루 평균 2000명은 된다고 합니다. 아직까지 나쁜 소리는 안 들었으니 잘하고 있다는 거겠죠?”
라디오 DJ 활동을 통해 세상과 교류한다면 손자와는 태어나기 전부터 소통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윤종국 동년기자. 어떤 방법을 사용했다는 뜻일까?
“손자는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태명 ‘둥이’라는 카카오톡 계정을 만들어 소통했습니다. 물론 실제 대화 상대는 며느리였지만 손자인 척 며느리가 대답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동네 DIY 제작소에서 버린 자투리 나무토막으로 도미노 게임을 해주면 손자가 아주 좋아해요. 제 인생을 정리해서 말해드리자면, 젊었을 때는 말 그대로 ‘고난’이었어요.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 살았어요. 답답해서 이민 생각도 해봤지만 스물일곱에 혼자되신 어머니를 두고 해서는 안 될 불효라 포기했습니다. 술에 빠져 살아보니 이러다가는 내가 가족도 잃고 남는 게 없겠다, 반성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손글씨로 스스로를 치유하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치유의 한 방법이 펜을 들고 글을 쓰는 것이라고 했다. 함께하는 라디오를 앞두고 컴퓨터로 작업해서 보내드린 대본도 굳이 손글씨로 써서 볼 정도이니 손글씨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보인다.
“매일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한 주제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쓸 때가 있고, 때로는 그냥 악에 받쳐 쓸 때도 있고 말이죠. 서술적으로 쓰다가도 누가 싫으면 최대한 아주 싫다는 걸 표현합니다. 지금까지 모아놓은 일기장이 너무 많아서 아내는 좀 정리하라고 하는데 잘 안 됩니다. 그래도 딸아이는 아빠의 유물(?)을 인정해줘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앞으로 더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역시나 손글씨 이야기가 나온다.
“시니어만을 위한 옛 추억을 담은 손편지가 오고 가게 할 수 있는 길을 만들고 동아리도 만들고 싶어요. 정착이 되면 이메일이 아닌 손편지로 마음이 오고 가는 운동도 하고 싶고 말이죠.”
많은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지만 시니어의 감성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줄 아는 세상이기를 윤종국 씨는 바라기 때문이다.
“글씨를 좀 삐뚤삐뚤 쓰면 어때요. 잘못 쓰면 어떠냐고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지고 손주나 며느리나 딸한테 편지를 쓸 수 있는 게 얼마나 멋집니까. 50대 이상 모든 시니어 세대를 버무려서 손편지를 주고받는 세상을 한 번 만들고 싶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했던 것처럼 편지로 정보를 나누기도 하고요. 쓴 편지는 우체통에 넣으면 좋고요. 누군가는 편지를 기다리는 맛도 있겠죠? 어떻게 하면 아날로그 감성이 제대로 살아날까 생각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이루지 못했던 윤종국 동년기자의 도전은 지금부터 제대로 시작이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