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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근두근, 리마인드 웨딩 어떠세요?
- 어쩌다 수십 년 전 결혼식 사진을 볼 때면 풋풋하고 아름다웠던 부부의 모습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행복한 미래를 약속했던 그날의 설렘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다시 그날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때의 두근거림은 재현할 수 있다. 바로 리마인드 웨딩(Remind Wedding)이다. 요즘은 30·40주년 결혼기념일을 기념하거나, 환갑·칠순잔치를 대신해 리마인드 웨딩을 하는 부부가 늘고 있다. 소박하게 부부 기념사진을 찍는 것부터 지인들과 함께 즐기는 소규모 웨딩 파티까지. 빛바랜 사진 속 신랑·신부를 핑크빛으로 다시 태어나게 할 리마인드 웨딩의 이모저모에 대해 알아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도움말 우아한웨딩(wooawedding.com) 장지현 이사 사진 우아한웨딩, 모노페이퍼, 포마이시스, 모먼츠 마켓, 한복 짓는 복나비 제공 메인사진 오철환·권경희 부부(결혼 30주년 기념 리마인드 웨딩 촬영 사진) 리마인드 웨딩을 위한 ‘스·드·메’ 가이드 요즘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들 사이에서는 ‘스·드·메’라는 용어가 자주 쓰인다. ‘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의 줄임말로, 웨딩 준비에 필요한 필수 요소 3가지를 뜻한다. 많은 웨딩 업체에서도 ‘스·드·메 패키지’, ‘스·드·메 할인’ 등의 상품을 내놓고 있다. 리마인드 웨딩 역시 바로 이 ‘스·드·메’가 중요하다. 웨딩 디렉터와의 미팅 전 살펴보면 도움이 될 만한 ‘스·드·메’ 팁을 살펴보자. △ 스튜디오&스폿(Studio & Spot) 웨딩 사진만 찍을 때나 웨딩 파티를 겸하는 경우나 장소 선정은 중요하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콘셉트를 가장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 사진 촬영만 하는 부부라면 리마인드 웨딩의 의미를 살려 과거 결혼식을 올렸던 예식장이나 신혼여행을 갔던 곳, 프로포즈했던 장소 등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을 선택하는 것도 방법이다. 특별한 파티를 기획하고 있다면 골프장, 리조트, 호텔, 펜션 등과 연계해 1박 2일로 즐겨보는 것도 괜찮다. △ 웨딩드레스 또는 웨딩한복 & 턱시도 웨딩드레스는 몸매가 드러나는 슬림한 라인보다는 에이(A)라인으로 퍼지는 모양의 드레스가 부담스럽지 않다. 대부분 중·장년 여성은 어깨를 드러내는 탑 드레스는 꺼리는 편이고, 어깨선을 감싸주거나 얇은 천이 덧대어진 스타일을 선호한다. 한복스타일의 웨딩한복도 체형을 보완해주면서 우아한 분위기를 낼 수 있어 찾는 이가 늘고 있다. 턱시도는 딱딱한 느낌보다는 꼬리가 달린 연미복을 입는 것이 중후하면서도 무난하게 잘 어울린다. 화려한 색의 행거칩과 보타이를 매치하면 위트 있고 발랄하게 연출할 수 있다. 웨딩 파티의 경우, 자녀들도 파티 드레스를 함께 입으면 멋진 파티 스타일 컷을 찍을 수 있다. △ 메이크업&헤어 스타일 촬영장에서는 여러 각도에서 조명이 비추기 때문에 되도록 반짝이는 펄이나 물광 연출은 피해야 한다. 번들거려 보이지 않도록 매트하게 피부톤을 맞추고, 하얀 드레스에 맞게 밝은 핑크톤으로 메이크업하는 것이 좋다. 평소 어두운 계열의 눈 화장으로 눈매를 강조하는 편이라면, 은은한 골드와 브라운 톤으로 자연스럽게 마무리할 것을 권한다. 중년 여성의 경우 단발머리가 많기 때문에 굵은 웨이브를 약간 주거나 깔끔한 올림머리 스타일로 연출하는 게 잘 어울린다. 티아라와 베일 등을 곁들여 연출하면 탈모나 흰머리 등 결점을 보완할 수 있다.
- 2016-05-23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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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철의 스포츠 인물 열전] 다이아몬드의 살아 있는 전설 김영덕
- 1982년 출범한 국내 프로 야구 KBO 리그 35번째 시즌이 지난 4월 1일 시작했다. MBC 청룡과 삼미 슈퍼스타즈 같은,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구단을 비롯해 6개 팀으로 닻을 올린 KBO 리그는 올 시즌 10개 구단으로 두 번째 페넌트레이스를 펼친다.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와 고척스카이돔이 새롭게 문을 열면서 올해 프로 야구 관중은 800만 명을 바라본다. KBO 리그는 머지않은 장래에 1000만 관중 시대가 열릴 수도 있는 가파른 인기 상승세를 타고 있다. 1군 진입 4년째인 NC 다이노스가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힐 만큼 KBO 리그는 변화무쌍한 판도를 보이고 있다. 야구 팬들로서는 흥미진진한 판세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이다. 팀당 144경기, 리그 720경기의 장기 레이스에서는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누구도 자신 있게 내다볼 수 없다. 1982년 프로 야구 원년, 대부분의 야구 전문가들은 삼성라이온즈를 우승 후보로 꼽았다. 황규봉과 이선희, 이만수 등 가장 많은 아마추어 국가 대표 출신 선수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런 이유로 1982년 3월 27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프로 야구 개막전에서 MBC 청룡과 겨룰 수 있었다. 그런데 원년 우승은 많은 전문가들이 중하위권 즉 4위 정도로 예상한 OB 베어스가 차지했다. 미국 프로 야구 마이너리그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박철순의 투구력을 간과한 측면도 있지만 프로 야구 시즌 예상은 많은 변수를 안고 있기에 족집게 같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프로 야구 원년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OB 베어스를 초대 챔피언으로 이끈 김영덕이 이번 호의 주인공이다. 김영덕은 1982년부터 1993년까지 OB 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 빙그레 이글스에서 감독으로 활동했기에 어지간한 야구 팬이라면, 나이가 그리 많지 않아도 알 만한 인물이다. 그런데 선수로서의 활약상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듯하다. 필자는 최근 경기도 분당에서 여든을 막 넘긴 나이로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노(老) 감독을 만났다. “교토에 있는 부모님에게 1, 2년만 (한국에서 야구를)하고 돌아오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떠난 게 반세기가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노 감독의 얼굴에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인연을 맺은 70여 년의 야구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사이 그의 이름은 가네히코 나가노리(金彦永德)에서 김영덕(金永德)으로 바뀌었다. 가네히코는 본관인 경남 언양(彦陽)에서 따온 성이고 그의 부모는 경남 합천이 고향이다. 한국에 오기 전에 그가 듣고 배운 우리말은 경상도 사투리였다. 28살의 적지 않은 나이에 한국에 왔을 때 땅 설고 물 설은 환경은 둘째 치고 서울 말씨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큰 어려움 가운데 하나였다. 1940년대 거의 모든 일본의 야구 소년들이 그랬듯이 김영덕도 초등학교 때까지는 동네 야구 를 하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체격도 좋았고 형이 유도 선수로 명문 메이지대학교에 입학할 정도였으니 집안 내력으로 운동신경도 좋았던 김영덕은 나라현(奈良縣)에 있는 즈시가이세이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6년 난카이(南海) 호크스(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전신)에 입단했다.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고졸 신인의 길을 택했다. 그 무렵 일본에서도 맏아들은 어떻게 해서든 대학에 보냈다. 3년간의 2군 생활 끝에 1959년 1군에 올라간 투수 김영덕은 그해 6승6패 평균자책점 3.09의 수준급 성적을 올렸다. 이후 한국행을 결정하기 직전인 1963년까지 4시즌 동안 7승9패 평균자책점 3.57의 기록을 남겼다. 청·장년 야구 팬들과 달리 글쓴이에게 김영덕은 감독보다는 선수로 더 익숙하다. 까까머리 청소년 때,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본 키 큰 투수 김영덕의 기억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이다. 1959년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모국 방문 경기를 한 뒤 1960년 귀국해 성공적으로 한국 실업 야구(교통부→기업은행)에 적응한 김성근을 보고 김영덕은 큰 용기를 얻었다. 한국 진출을 결심할 무렵 도에이(東映) 플라이어즈에서 활약하고 있던 백인천이 대한해운공사를 소개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인이 제일은행도 소개했다. 이런저런 사연 끝에 대한해운공사에 입단한 김영덕은 말 그대로 펄펄 날았다. 야구 올드 팬들은 스리쿼터 투구 폼에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슬라이더로 타자들을 손쉽게 처리하는 김영덕을 기억할 것이다. 1964년 시즌 실업 야구는 13개 팀이나 됐다. 전해까지 있었던 춘·추계 리그를 없애고 1~4차 리그로 시즌을 운용해 팀당 48경기, 전체 312경기였으니 1982년 팀당 80경기, 전체 240경기를 치른 프로 야구 원년 시즌보다 전체 경기 수가 많았다. 서울운동장과 육군 야구장(용산), 상업은행 야구장(수유리), 인천 야구장, 대구 야구장 등 전국 5군데 구장에서 5월 11일 개막해 10월 18일까지 107일 동안 경기가 열렸으니 사실상 프로 리그였다. 김영덕은 그해 33경기에 등판해 255이닝을 던져 9자책점만으로 0.32라는 믿을 수 없는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이 부문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렇게 잘 던졌는데도 그해 다승왕은 김영덕이 아니었다. 24승5패의 신용균이 1위에 올랐고 20승4패의 백수웅, 20승5패의 김성근에 이어 김영덕은 18승5패로 다승 4위였다. 백수웅을 빼고 모두 재일동포였다. 재일동포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외국인인 이들이 국내 야구 마운드를 장악한 것이다. 이들은 1980년대 초, 중반 ‘빨간 여권’(일본 여권의 표지가 빨간색이어서 나온 말)을 들고 활약한 김일융, 송일수(이상 삼성라이온즈), 장명부, 이영구(삼미슈퍼스타즈), 주동식, 김무종(이상 해태타이거즈) 등 재일동포 2세대의 선배 격이다. 그런데 1964년 실업 야구에서 더 놀라운 기록이 있다. 재일동포인 배수찬이 타율 3할3푼6리로 이 부문 1위를 차지한 가운데 김영덕은 3할로 6위에 올랐고 진원주가 6개로 1위를 차지한 홈런 부문에서는 4개로 재일동포인 김금현과 공동 2위를 기록했다. 1950~60년대 홈런왕 박현식은 3개로 4위였다. 출루율은 4할7푼6리로 3위에 랭크됐다. 김영덕은 요즘 일본 리그 닛폰햄 파이터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오타니 쇼헤이를 뛰어넘는 투타 겸업 선수였다. 그해 한국 야구사에 길이 남을 두 차례 퍼펙트게임이 펼쳐지는데 9월 23일 고순선이 철도청과의 경기에서, 9월 25일 김영덕이 조흥은행과의 경기에서 각각 대기록을 세웠다. 김영덕은 이후 크라운맥주, 한일은행에서 1969년까지 화려한 선수 생활을 이어 간다. 1967년 시즌에는 팀이 치른 32경기 가운데 무려 25경기에 등판해 17승1패, 승률 9할9푼4리의 놀라운 기록을 수립했다. 그해 54이닝 연속 무실점에 10연승 기록도 세웠고 평균자책점은 0.49였다. 한국 프로 야구에서 0점대 평균자책점은 선동열이 3차례(1986년 0.99, 1987년 0.89, 1993년 0.79) 기록했는데 앞으로 0점대 평균자책점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1970년 시즌 실업 야구 2차 리그가 끝나고 강대중 감독의 뒤를 이어 한일은행 사령탑에 오른 김영덕은 곧바로 그해 우승 감독이 됐다. 1971년 제9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1차 리그에서 5개국 가운데 4위로 밀린 한국을 2차 리그부터 감독 대행을 맡아 역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때 받은 체육훈장 청룡장은 인생 최고의 영광으로 간직하고 있다. 1971년 김응룡에게 감독 자리를 넘겨 주고 창구 업무를 보게 된 김영덕은 어려운 한글 받침 때문에 고국에 온 이후 두 번째로 마음고생을 하게 된다. 1977년 장충고등학교 감독으로 야구계로 돌아온 김영덕은 이후 천안 북일고등학교 감독(1977~1981년)을 거쳐 1982년 프로 야구 OB베어스 초대 사령탑을 맡아 한국시리즈 1호 우승 감독의 영예를 누렸다. 그리고 삼성라이온즈 감독(1984~1986년)과 빙그레이글스 감독(1988~1993년)을 지낸 뒤 LG트윈스 2군 감독(1997~1998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그의 나이 환갑을 조금 넘어서였다. 지난날을 돌아보는 노 감독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얼마 전 건강검진을 하면서 재 보았더니 키가 3cm 줄었다”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최근 건강이 조금 좋지 않지만 매일 50분 정도 걷기를 하면서 많이 회복됐다고 했다. 고국이긴 하지만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이 땅에서 반세기를 넘게 살아오는 동안 그의 곁에는 해운공사 시절 팀 동료 성기영 전 롯데자이언츠 감독의 소개로 백년가약을 맺은 아내 김해영이 늘 함께했고 이제는 성규 성연 성란 1남 2녀가 낳은 친손주 2명과 외손주 2명이 그의 곁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 한국 야구의 ‘경계인’ 재일동포선수들 재일동포. 일본에 살고 있는 우리 핏줄을 일컫는, 흔히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등에서 듣거나 보게 되면 왠지 가슴이 저리다. 직접 경험은 하지 못했지만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말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쓴이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1983년 프로 야구 개인상 시상대에 선 장명부(2005년 작고)와 김무종이 떠오르곤 한다. 그해 10월 21일 잠실구장에서 벌어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해태 타이거즈는 MBC 청룡을 8-1로 꺾고 시리즈 전적 4승1무로 V10의 첫발을 내디뎠다. 장명부는 시즌 30승으로 다승 1위와 함께 투수 부문 베스트 10으로 뽑혀 포수 부문 베스트 10으로 선발된 김무종과 나란히 시상대에 섰다. 당시 기준으로 볼 때 현역 선수로는 적지 않은 나이인 33살과 29살이었던 두 선수는 시상대 위에서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조센진’, 한국에서는 ‘반(半) 쪽발이’로 불리며 경계인으로 살아야 하는 재일동포 두 선수는 그 자리에서 복잡다단한 감정이 복받쳤을 것이다. 그때부터 24년 전인 1959년 8월, 까까머리 고교생이 제4회 재일동포학생선수단의 일원으로 서울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 학생은 오직 야구 하나만을 생각하며 이듬해 귀국해 교통부, 기업은행 등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은퇴한 뒤에는 충암고와 신일고 감독을 맡아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다. 1982년에는 OB베어스 코치로 프로 야구 출범과 함께했다. 그리고 2007년 6월 28일 SK와이번스 감독으로 문학구장에서 롯데자이언츠를 10-2로 물리치고 국내 프로 야구 두 번째로 900승 사령탑이 됐다. 그해와 2008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50여 년 동안 야구 외길 인생을 걸어온 그는 한화이글스 김성근 감독이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 2016-05-19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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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문화]청년들과 이렇게 소통하라...영화 ‘인턴’
- 최근 우리나라에 상영된 영화 ‘인턴’은 40여 년 사회생활에서 은퇴하고 중년을 넘어 노년을 살아가고 있는 한 70대 남자 벤(로버트 드니로 분)과 쇼핑몰을 창업하고 빠른 기간 내에 열정적으로 회사를 성장시켜 궤도에 올려놓은 여성 CEO 줄스(앤 해서웨이 분)가 서로 소통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임에도 놀랍게도 최근 우리 사회의 세 가지 화두라 할 수 있는 일과 가정(육아)의 사이에 놓인 워킹맘의 고충, 일하고 싶어 하는 중ㆍ장년의 경제활동 문제. 그리고 이들 청년과 장년의 소통에 관한 내용을 잔잔하게 끌어내고 있다. 노년의 벤은 부인과 사별해 혼자 살고 있지만 혼자서도 완벽함에 가깝게 집을 꾸미고, 해외여행을 다니며 취미생활을 하고, 적당한 운동ㆍ봉사까지 하는 등 어찌 보면 굳이 일이 필요 없을 것 같은 부러운 시니어다. 그런데도 그가 주변 사람들의 걱정 어린 시선을 뒤로하고 인턴으로 일을 시작하며 설레는 모습으로 출근하는 것은 돈을 넘어서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임을 느끼기 위함이다. 꼭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행복한 노년을 위해 그 어떤 것보다 필요한 것이 ‘일’이라는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70세가 넘은 나이에 인턴 생활을 시작한 벤은 40년 사회생활의 노하우를 살려서 회사에 엄청난 도움이 된다거나, 나이만큼 풍부한 경험을 살려 멋진 아이디어를 내지도 않는다. 자신을 부담스러워 하며 때론 귀찮아하기까지 하며 바쁘게 돌아가는 사무실에서 성급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주 서서히 따뜻하게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그동안의 사회경력에 비하면 자존심이 상할 수 있는 사소한 일도 즐겁게 성심껏 해내면서 차츰 그들만의 젊은 세상에 든든한 동료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간다.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하다 그동안 그토록 사랑했던 일을 포기하려는 줄스에게도 ‘인생이란’ 따위의 거창한 충고를 한다거나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최고야” “너는 잘해왔고 너만큼 그 일을 가장 잘할 사람은 없어”라고 자부심을 심어 줘 스스로 현명한 선택을 하도록 도와줬다. 여기서 한국 시니어들이 청년과의 소통에서 흔히 범하는 오류, 청년들이 ‘꼰데’ 운운하며 냉소적인 자세를 취하게 하는 행동이나 ‘내가 네 나이 때는 말이야’, ‘요즘 젊은 애들은’ 따위의 말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 시니어도 이 영화의 주인공 벤처럼 울고 있는 청년들에 어설프게 충고하기보다는 ‘손수건은 나를 위해 소지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빌려주기 위한 것이다’라며 손수건을 건네주는 따뜻한 시선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 2016-05-17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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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우리 마음에 다시 심는 못 다 핀 소녀들의 ‘꽃’ - 권비영 작가
- 1992년 1월 8일 시작한 수요집회(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정기 시위)는 2011년 12월 14일 1000회를 맞았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다 할 해결책이 나오지 않아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이 여전한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최근 일제강점기 세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를 펴낸 권비영(權丕映·61) 작가는 “위안부 문제는 냄비 물 끓듯 일시적으로 분개할 일이 아닌, 가마솥에 불을 때듯 서서히 고아가며 해결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권 작가는 우리 문학이 그런 가마솥을 데우는 작은 불씨 역할을 하길 바란다. 그녀가 를 쓴 이유, 그리고 을 추천하는 까닭 또한 그러하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은 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한 소설가 윤정모가 쓴 역사 동화책이다. 권 작가는 을 처음 접했을 때, 그 제목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면, “봉선화가 필 때쯤이면 돌아올 끼다”라는 순이의 말이 맴돌아 더욱 가슴 아픈 제목이기도 하다. 책에는 강덕경, 강일출, 김복동, 김순덕 등 위안부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삽화가 담겨 있어 애잔함을 더한다. “윤정모 소설가는 우리 사회 문제에 대해 강성이 센 작가고, 특히 위안부 문제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 분 같아요. 를 시작으로 그동안 일제강점기와 위안부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꽤 나왔어요.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해 계속 묻혀왔죠. 수십 년 동안 끌고 온 민족의 문제인데, 주목받지 못한 게 항상 안타까웠어요. 그렇다고 덮어두고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저도 를 썼지만, 이러한 작품이 계속 나와 지속적인 관심을 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라나는 키만큼 생각도 쑥쑥 크는 우리 아이들 권 작가의 말처럼 위안부 문제에 대해 다룬 책은 여러 권 있다. 그중에서도 을 꼽은 것은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어린이도 함께 볼 수 있는 책’을 추천해달라는 기자의 제안 때문이었다. 동화라는 장르는 부담 없었지만, 위안부가 주제라는 점에서 몇 가지 고민이 생겼다. 책은 일본군이 한국 소녀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못된 짓을 하려 한다’, ‘피에 젖은 옷자락’ 등 간접적으로 표현했는데, 이러한 상황을 아이들이 잘 이해할 수 있을지, 또 어른들은 어떻게 설명을 해줄 수 있는지 등이었다. 이에 그녀는 “대답을 피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요즘 아이들은 신체 성장뿐만 아니라 사고와 의식도 우리 때보다 더 성숙해요. 일단 아이들이 어떤 점에서 의문을 품었다면, 그만큼 그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질문할 생각조차 못 하고 넘어갔을 테니까요. 아이들에게 적나라하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상징적인 표현이나 이미지를 빌려 충분히 설명해주면 웬만큼 다 이해할 수 있어요. 아이들은 생각이 쑥쑥 자라는데 어른들이 민망하다고 해서 ‘그건 몰라도 돼’ 하는 식으로 넘겨버리면 우리 역사를 정확히 아는 기회를 빼앗는 셈이죠.” 그녀가 중학생 시절 배운 인수분해를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배운다. 체계적인 성교육을 받는 시기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그렇게 아이들의 의식은 앞서가는데 중·장년의 어린 시절 수준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는 게 권 작가의 생각이다. “언젠가 사인회에 초등학교 2학년, 5학년 자매가 온 적이 있어요. 는 어린이가 보는 만화도 있고, 청소년 소설로도 냈는데 그 아이들은 어른이 보는 책을 들고 왔더라고요. 그래서 너희는 왜 그런 걸 안 보고 소설로 읽었느냐고 했더니, ‘그건 너무 재미없다’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내용은 알면서 읽었는지 물으니까 다 이해했다 하더라고요. 물론 어른처럼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만큼 아이들이 빨리 큰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언제까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고 끝나는 동화 이야기만 하면 안 된다고 느꼈죠.” 한 방울 한 방울 모여 거대한 강을 이룰 때까지 어른·아이 모두에게 사랑받으며 100만 부 돌파라는 기록을 세운 다. 역사 교과서 속 몇 줄에 지나지 않는 덕혜옹주의 삶을 재조명한 소설로, 현재까지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역시 우리나라 역사에 등장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로, 시대적 아픔을 이야기한다. 의 소설가 윤정모는 ‘아픔이 피의 강물처럼 흘렀을 우리 여성들의 참극을 중편이라는 어중간한 그릇, 아니 그저 바가지 하나로 강물을 떠내서 핏빛만 보여 주고 만 꼴이 되었다. (중략) 좋은 작품은 후배들에게 기대해 본다’라고 썼다. 도 그런 기대에 부응하는 작품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윤정모 작가가 그랬고, 권비영 작가가 그렇듯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머리가 아닌 가슴 언저리에 박히게 하는 살아 있는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권 작가는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가 큰 사랑을 받고 나니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내가 하는 게 잘하는 건가? 내 꿈에 취해 잘난척하는 건 아닌가? 그러다 보니 작가라는 자리가 얼마나 무겁고 영향력 있는 존재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죠. 저는 나서서 강하게 행동하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문학은 한 발짝 뒤에 서서도 얼마든지 내 주장을 펼칠 수 있잖아요. 그렇게 우리 사회가 꼭 짚고 넘어갈 문제에 대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이후로 더 뚜렷해졌죠. 는 그런 작가로서의 책임감과 소명의식이 깃든 작품입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자신의 소설로 단기간에 사회적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뜨거운 자극에 의한 일시적 행동보다는 지속적인 관심으로 뭉근하게 데워가다 보면 더 합리적인 방법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 를 읽어보면 그런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드러내고 주장하는 인물이 아닌, 다소 평범하고도 침묵하는 소녀들을 통해 객관적 시선으로 더 큰 아픔을 발견하게 한다. “제 소설을 읽고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독자를 한 방울의 물에 비유하자면,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웅덩이가 되고 내[川]를 이룰 수 있겠죠. 내가 되면 졸졸졸 소리를 낼 수 있고, 그 내가 모이면 커다란 강을 이루고요. 그렇게 생긴 강은 누가 갑자기 없앨 수도 없을 뿐더러, 없앤다 한들 그 물줄기가 흐른 자리를 부정할 수 없을 거 아녜요.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이야기하다 보면 오히려 무기나 거친 표현을 하지 않고도 평화로운 방안이 도출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우리 중·장년들도 아이들과 이런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끊임없이 관심의 영역 안에 있을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야 합니다.”
- 2016-05-16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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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공연] 아내, 엄마가 아닌 여자로서의 삶을 노래하다 <맘마미아>의 이재은 국내 협력 연출
- 세계적인 팝 그룹 아바(ABBA)의 히트곡 22곡을 엮어 만든 뮤지컬 . 1999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첫 무대를 올린 후 미국, 독일, 프랑스 등 49개 프로덕션, 440개 주요 도시에서 60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만났다. 한국에서는 2004년 초연 이후 1200회 공연, 150만 관객을 돌파하며 중년 여성들의 호응을 얻은 작품이다. 2004년 조연출을 시작으로 12년 동안 해오며, 이번 공연의 국내 협력 연출을 맡은 이재은 연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맘마미아 연출을 맡게 된 계기 2004년부터 조연출을 시작으로 12년 동안 해온 작품이에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엔 연출을 맡게 됐죠. 즐겁고 신나는 무대 연출로 주목받아온 뮤지컬이지만, 이번에는 드라마적인 요소를 더 살리려고 노력했어요. 지금까지의 공연과 비교한다면? 국내 뮤지컬 중에 중·장년 배우들이 주인공을 맡고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작품이 드물죠. 배우 최정원(도나 역)·이경미(로지 역)·성기윤(샘 역)씨 같은 경우에는 2004년 공연에는 30대였지만, 이번 공연에는 실제 맡은 배역과 가까운 연령대가 됐어요. 그러면서 역할에 대한 이해도도 더 높아지고 풍부한 감정을 연기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탄탄하게 작품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배우들과 12년 동안 함께 해온 제작팀의 내공이 더해졌으니 가장 완성도 높은 공연이 되지 않을까요? 그게 이번 공연의 강점이라 생각해요. 중년 배우들의 열정을 확인하는 순간 연륜이 있는 배우일수록 열정이 훨씬 높다고 생각해요. 다른 뮤지컬에 비해 중·장년 배우가 많은 편인데, 젊은 친구들과는 다른 열의를 느낄 수 있어요. 단순히 열심히 하는 젊은이들의 패기 이런 것과는 다른 노련미가 느껴지죠. 실제로도 공연을 위해 준비도 많이 하고요. 중·장년 관객이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장면 1막에 타냐와 로지가 도나의 침실에 마주앉아 “우리도 젊었었지. 그때는 그랬었지”하며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어요. 주인공들의 대화처럼 중·장년 관객도 저마다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이 많잖아요. 함께 끄덕끄덕하며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2막에는 엄마가 시집가는 딸을 위해 드레스를 입혀주는 장면이 있는데 그 부분도 엄마와 딸들에겐 인상 깊죠. 그 외에도 도나(엄마)와 소피(딸)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모녀가 함께 보면 가슴 뭉클한 장면이 많아요. 아바(ABBA)의 음악으로 채우는 작품, 가장 반응이 뜨거운 노래는? 단연 ‘The winner takes it all’이 아닐까 생각해요. 20년 만에 첫사랑을 만난 도나가 “너를 보고 엄청나게 설레었지만, 그동안 난 정말 괜찮았어. 괜찮았어. 괜찮았어…”라고 해가며 참고 참다가 결국 “그런데 있잖아. 나 너무 힘들었어”라며 솔직하게 감정을 털어놓는 장면에서 나오는 노래죠. 애써 감정을 숨기는 도나의 모습이 안타깝고 슬퍼요. 그런 감정선을 따라가다가 도나의 노래를 들으면 감동은 배가되죠. 실제로도 많은 관객이 꼽는 명장면이기도 하고요. 어떤 이들에게 추천하는지 모녀가 와도 좋고, 친구끼리 와도 좋지만 특히 갱년기를 겪는 어머니들이 오셨으면 해요. 도나가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지금도 늦지 않았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나이야. 나도 이렇게 나이 들었지만 좀 더 젊게 살아볼까? 새로운 것을 시작할까?”하는 자신감을 얻어갈 수 있을 거예요. 어쩌면 첫사랑이 생각날지도 모르겠어요. 공연 뮤지컬 일정 6월 4일까지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폴 게링턴/국내 협력 연출 이재은 출연 최정원, 신영숙, 전수경, 이경미, 홍지민 등
- 2016-05-07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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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의 맛] 향긋한 커리의 맛있는 유혹
- 갖가지 향신료를 넣어 만든 인도 요리를 통틀어 커리(curry)라 한다. 인도는 치매 발생률이 낮은 국가로 잘 알려졌는데, 그 일등 공신으로 커리의 주성분인 강황을 꼽는다. 강황에 들어 있는 커큐민이 뇌 속에 쌓여 있는 단백질을 제거하는 효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두뇌를 건강하게 하는 향긋한 커리 맛집 ‘나마스테’를 소개한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5월 가족 외식엔 영양 만점 인도 커리 인도에서 시작된 커리는 영국과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카레’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해진 음식이다. 채소와 고기를 넣고 뭉근하게 끓여 밥에 얹어 먹는 한국식 카레라이스도 맛있지만, 다양한 재료와 향, 색깔로 입맛을 사로잡는 인도식 커리 맛집을 찾는 이도 늘고 있다. 특히, 중·장년의 치매 예방은 물론 성장기 아이들의 두뇌 발달에도 좋아 가족 외식 메뉴로 즐기기에 알맞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인도 커리 전문점 ‘나마스테(NAMASTE, 인도 인사말이기도 함)’는 30여 가지 커리(1만4000원~1만6500원 선)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채소, 닭고기, 양고기, 소고기, 해산물 등 (돼지고기는 들어가지 않는다) 주재료와 향신료 배합에 따라 어른들이 좋아하는 매콤한 커리부터 아이들이 먹기에 부담 없는 달콤한 커리까지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나마스테에는 커리 외에도 인도 셰프들이 엄선한 현지 식재료로 만드는 애피타이저와 탄두리(tandoori: 화덕에서 구워낸 요리), 디저트 메뉴 등이 있다. 메뉴 고르기가 어렵다면 런치세트나 디너세트를 추천한다. 런치 코스A(1인 1만3200원)는 그린샐러드, 커리(치킨 마크니와 믹스 베지터블 중 택1), 난 또는 밥, 후르츠 라이타(과일 수제 요거트)로 구성된다. 런치 코스B(1인 1만9800원)는 그린 샐러드, 탄두리치킨, 커리(프론 마크니와 팔락 파니르 중 택1), 난(플레인, 갈릭, 버터 중 택1), 밥, 차 또는 커피를 제공한다. 디너에는 애피타이저나 탄두리, 케밥 등이 어우러진 코스(1인 A-2만8000원, B-3만5000원, C-4만5000원)로 더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 인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인테리어가 눈에 띈다. 빨간 벽에 아기자기한 타일 문양이 어우러진 홀(hall)과 짙은 푸른빛 벽지에 금색 무늬가 돋보이는 룸(room)이 대조를 이룬다. 곳곳에 인도의 상징인 코끼리 장식이 놓여 있다. 조명이 살짝 어둡지만 매장 가운데 놓인 촛불이 은은한 분위기를 더한다. 초 밑에는 초 4~5배 정도 길이의 촛농이 쌓여 마치 얼음기둥처럼 보인다. 보통 여러 명이 주문을 하면 다양한 커리를 시켜 나누어 먹는데, 조금씩 덜어서 맛볼 수 있도록 커리 그릇에 숟가락을 꽂아 낸다. 밥 위에 한꺼번에 부어 먹는 카레라이스와는 다르게 여러 가지 커리를 즐길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커리와 함께 먹는 밥은 3종류가 있다. 한국 쌀로 만든 플레인 라이스(2000원), 인도 쌀로 만든 바스마티 라이스(3500원), 그리고 사프란(saffron)을 넣어 만든 사프란 라이스(5500원)이다. 꽃잎을 말려 만든 고급 향신료인 사프란을 넣은 밥은 노란빛을 띠는데 별미로 즐길 만하다. 한국인은 밥이 익숙하지만, 인도에서는 주로 화덕에 구운 부드럽고 납작한 빵인 ‘난(nan)’을 곁들여 먹는다. 커리에 찍어 먹거나, 탄두리 치킨 등을 싸서 먹기도 한다. 나마스테에는 기본 난(2500원)을 비롯해 버터 난(3000원), 갈릭 난(3500원), 치즈 난(6500원), 나마스테 스페셜 난(5500원, 견과류를 넣어 만든 난)을 판매한다. 밥과 난에 잘 어울리는 인기 커리 메뉴는 신선한 토마토, 크림 허브로 만든 치킨 마크니(1만5500원), 매콤한 맛이 일품인 비프 빈달루(1만6500원), 시금치와 쿼티지 치즈가 들어간 팔락 파니르(1만4500원) 등이다. 식후에는 디저트로 인도식 수제 요거트로 만든 라씨(5500원, 플레인·망고·딸기·키위)나 마살라 차이티(5000원, 시나몬·카더멈·우유를 넣고 끓인 차) 등을 즐기면 이색적인 맛을 느낄 수 있다. 주소 서울시 강남구 선릉로152길 5 지하1층 (압구정 로데오역 4번 출구·학동사거리 일지아트홀 근처) 문의 02-549-4667 영업시간 11:00~22:00 (연중무휴)
- 2016-05-05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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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공연]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 뮤지컬 <심청>의 이수인 연출
- 언젠가 찾아오는 죽음에 대한 절박함과 진솔한 사색이 담긴 작품이다. 효(孝)를 주제로 하는 ‘심청가’를 죽음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심청처럼 제물로 팔려온 간난의 삶을 매개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자신의 최후를 맞이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이수인 연출의 이야기를 통해 작품이 담고 있는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짚어봤다. Interview>> 뮤지컬 의 이수인 연출 연출을 맡게 된 계기 이강백 작가는 오랫동안 설화 ‘심청’이 가진 철학적 이면을 고찰해왔다고 합니다. 고귀하고 당당하며 인간적인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에 대한 작가 자신의 존재적 고민을 심청의 이야기에 담아내고 싶었나 봅니다. 자칫 무겁게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를 보다 풍성하고 음악적으로 풀어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저와 제 극단에 작품 제작을 제안했고 그 취지에 공감해 제작과 연출을 맡게 되었습니다. 동명의 작품들과 다른 점 이야기는 숱한 ‘심청’들을 물속에 밀어 넣은 선단의 선주와 아마도 마지막 ‘심청’이라고 할 수 있는 ‘간난’의 이야깁니다. 심청의 이야기와 맥락은 잇고 있지만 심청 이야기 자체는 아니지요. 작품이 담고 있는 ‘삶과 죽음’이라는 메시지에 대해 선주는 아주 부유하고 노회하지만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전전긍긍합니다. 반면에 억지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간난은 처음엔 크게 저항하고 거부하지만, 점차 스스로의 사색과 결단을 통해 당당하고 가치 있는 죽음의 길로 나아갑니다. 어떻게 죽느냐가 결국 삶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늘 옆에 있는 게 죽음이지만 우린 늘 죽음을 배제하고 삽니다.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머지않아 다가올 마지막을 아름답게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저 역시 아직은 선주의 마음처럼 두렵고 황망합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중·장년 관객이 가장 공감할 만한 장면 제가 보기엔 모든 장면이 재미있고 공감할 만합니다. 굳이 콕 집어 하나만 선택한다면, 간난이 마지막 작별을 하면서 선주에게 ‘부디 건강하시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전 연습 중에도, 공연 중에도 그 대목을 볼 때마다 울컥 눈시울이 붉어지곤 합니다.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 자칫 무겁고 단조로울 수 있는 이야기를 풍성하고 리드미컬하게 보여주기 위해 애썼습니다. 라이브 연주와 구음, 아름다운 마임 등을 통해 시청각적 입체화를 꾀한 점도 주목해주시길 바랍니다. 어떤 이들에게 추천하는지 굳이 특정 부류의 관객을 겨냥한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중·장년 이상의 관객이라면 더욱 공감할 대목이 많을 것입니다. 삶과 죽음의 화두로 번민하는 분들이라면 더더욱. △이수인 연출 현) 극단 떼아뜨르 봄날 대표 겸 서울예술대학 극작과 겸임교수. , , , , 등 연출. △뮤지컬 일정 5월 22일까지 장소 대학로 나온씨어터 연출 이수인 출연 송흥진, 박인지, 이두성, 신안진, 김승언 등
- 2016-05-02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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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철의 스포츠 인물 열전] 한국 농구 ‘슈터의 전설’ 신동파
- 믿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글쓴이는 초등학교 시절, 두 가지 결심을 했다. 하나는 스포츠 기자가 되는 것, 다른 하나는 특정 대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10살을 갓 넘긴 어린아이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물론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시골 중에 서도 시골인 강원도 신철원군 갈말면 지포리에 있는 신철원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는 라디오 중계로 1964년 도쿄 올림픽 복싱 경기 정신조와 사쿠라이(뒷날 스포츠 기자가 된 뒤 당시 자료를 살펴보고 사쿠라이 다카오라는 ‘풀 네임’을 확인했다)의 밴텀급 결승전, 그리고 1964년과 1965년 캐시어스 클레이(뒷날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와 소니 리스턴의 프로 복싱 세계 헤비급 타이틀매치 등을 들었다. 박정희장군배 동남아여자농구대회는 해마다 단골로 듣는 대회였다. 그 무렵 일본의 릿쿄대학교와 야하다제철, 미국의 빅토리농구단 등이 한국에 와 친선경기를 가졌는데 특정 대학교는 연전연승이었다. 일본팀들을 물리칠 때 시골 아이의 가슴은 벅차 올랐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신동파(申東坡)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기억하게 됐고 10여년 뒤 특정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봄에 열린 농구 OB전에서 신동파가 뛰는 경기를 라디오 중계가 아닌, 실제 경기로 보게 된다. 일본팀은 물론 국내 실업팀들을 손쉽게 물리친, 특정 대학교는 연세대이며 당시 멤버는 김영일 방열 김인건 하의건 신동파 등이었다. 1990년대 중반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면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서장훈 이상민 우지원 문경은 김훈이 2세대 ‘독수리 오형제’라면 이들은 1세대 ‘독수리 오형제’라고 할 수 있고 중심 인물이 신동파였다. 1974년 테헤란 대회 때 중국이 아시안게임에 데뷔하기 전까지 아시아 남자 농구의 절대 강자는 필리핀이었다. 1951년 제1회 뉴델리 대회부터 1962년 자카르타 대회까지 아시안게임에서 4연속 금메달을 차지했고, 1960년 마닐라에서 제1회 대회를 연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1973년 마닐라 대회까지 7차례 대회에서 4차례나 정상에 올랐다. 이 사이 아시안게임에서는 1966년 방콕 대회에서 이스라엘에,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1969년 방콕 대회에서 한국에 밀려 우승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1980년대 초반 아시아 지역 스포츠 단체인 AGF(아시아경기연맹)가 쿠웨이트 등 서아시아 나라들이 주도한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밀려나 이제는 EOC(유럽올림픽위원회)와 UEFA(유럽축구연맹)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아시아 최강의 실력을 자랑하던 필리핀이었기에 1967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도 홈 코트의 한국을 83-80으로 꺾는 등 9전 전승으로 우승했다. 절대 강자 필리핀이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에 86-95로 지고, 일본에도 77-78로 져 3위에 그친 건 필리핀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동아시아의 중국과 서아시아의 이란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최근 아시아 남자 농구 판도에서 그나마 명함을 내밀고 있는 1950~60년대 강자는 필리핀뿐이다. 필리핀은 2013년 마닐라 대회와 2015년 중국 창사(長沙) 대회에서 잇따라 준우승했다. 한국은 두 대회에서 3위와 6위에 머물렀다. 한국은 2002년 부산 대회와 2014년 인천 대회 우승, 2010년 광저우(廣州) 대회 준우승 등 아시안게임에서는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의 경우 중국은 아시아 챔피언 자격으로 출전하고 2015년 아시아선수권대회 2위 필리핀은 6월에 열리는 세계 예선에 참가한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필리핀이 농구에서 아시아 절대 강자로 군림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필리핀이 1969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에 진 건 충격을 넘어 ‘사건’이었다. 1969년 11월 29일 밤 TV 앞에 모여 있던 필리핀 농구 팬들은 던지는 대로 쏙쏙 들어가는 한국의 한 슈터를 보며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일부 매체에는 한국-필리핀의 이 경기가 결승전으로 소개돼 있는데 이 대회는 9개 나라가 돌려 붙기를 했기 때문에 결승전이 없고 대회 마지막 날 7승의 한국과 6승1패의 필리핀이 맞붙은 경기여서 결승전이나 다름없었다. 장년 팬들은 아마도 이날 신동파의 슛이 100%의 성공률을 보인 것으로 기억할지 모르겠다. 개인 득점 50점, 한국이 기록한 95점의 절반 이상이 신동파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신동파는 슛 거리가 꽤 길었기 때문에 그때 3점슛 제도가 있었다면 그의 득점은 70점대 이상이었을 것이고 한국의 팀 득점은 세 자릿수였을 수 있다. 이 경기가 결정적인 계기가 돼 신동파는 1970년대 필리핀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필리핀에서는 어떤 일이 잘되면 ‘sindongpa’, 잘 안되면 ‘no sindongpa’란 말이 있었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신동파의 신들린 듯한 슛을 막기 위해 악착같이 수비하던 필리핀 선수 3명이 5반칙으로 물러났다. 경기 막판에는 포워드인 신동파를 센터가 수비하는 진기한 장면이 펼쳐지기도 했다. 골 밑에 있어야 할 센터가 외곽으로 나오니 한국의 공격은 그만큼 수월해질 수밖에. 1960년대 초반 장충체육관을 지을 때 기술 지원을 했을 정도로 당시에는 필리핀이 한국보다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앞서 있었다. 한국은 이 경기를 라디오로 중계했지만 필리핀에서는 TV로 생중계됐다. 대회가 끝난 뒤 필리핀에서는 한국-필리핀 경기가 수십 번이나 재방송됐고 신동파는 필리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스타가 됐다. 신동파의 이름을 상호로 내건 가게들이 줄을 지어 생겼다는, 조금 믿기 어려운 일들이 실제로 벌어졌다. 1970년대 필리핀에서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들의 인기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신동파는 1972년 뮌헨 올림픽 수영 7관왕 마크 스피츠와 프로 복싱 헤비급 세계 챔피언 조지 포먼 등에 압도적인 차이로 1위를 차지했다. 신동파의 소속 팀인 기업은행은 1970년부터 그가 은퇴할 때까지 해마다 필리핀 초청 대회에 출전했다. 그는 8차례의 경기에서 경기당 평균 40점이 넘게 넣었고 최고 54점까지 기록했다. 필리핀 관중은 자국 선수의 파울로 신동파가 쓰러지면 필리핀 벤치를 향해 종이 뭉치와 부채 등을 던졌다. 필리핀에서 신동파의 인기는 절대적이었고 지금까지도 변함없다. 신동파가 PBA(필리핀농구리그) 챔피언 결정전을 관전하러 가면 하프타임에 장내 아나운서가 “우리의 전설이 왔다”라고 소개하고 1만 여 관중은 기립 박수를 친다고 한다. 신동파는 이후 한국 남자 농구 역사에 새로운 일들을 계속 남기게 된다. 한국은 1970년 5월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 아시아 챔피언 자격으로 출전해 13개국 가운데 11위를 기록했다. 2016년 현재 한국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거둔 최고 성적이다. 한국보다 키가 훨씬 큰 캐나다를 조별 리그에서 97-88로 잡았고 순위 결정전에서는 호주를 92-79로 꺾는 등 대회 전체 성적이 4승4패였다. 준우승국인 브라질과 조별 리그에서 겨뤄 77-82로 선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대회 부문별 기록을 보면 눈길을 사로잡는 대목이 있다. 득점자 순위다. 신동파는 8경기에서 평균 32.6점을 넣어 파나마의 데이비스 페랄타(20.0점),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리 지데크(19.3점) 등을 압도적인 차이로 제치고 득점왕에 올랐다. 이 대회에서 슈팅 성공률이 80.4%였다. 이 정도 성공률이면 ‘던지는 대로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같은 해 12월 방콕에서 벌어진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신동파를 앞세워 조별 리그에서 필리핀을 77-75로 다시 한 번 잡았다. 결승 리그에서 필리핀에 65-70으로 졌으나 전 대회 우승국인 이스라엘을 81-67로 제치고 축구와 함께 동반 금메달을 획득하는 ‘역사’를 완성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과 1승1패를 기록한 필리핀은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에 64-75로 지는 등 2승3패로 부진해 5위에 그쳤다. 신동파는 김영기로부터 시작해 이충희 문경은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남자 농구 슈터 계보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도 ‘독수리 5형제’가 있었다? 제국주의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탄한 뒤 한반도에서 체육활동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 이뤄졌다. 조선총독부는 우리 민족에게 인기가 많은 축구의 대회 개최를 통제하려 하기도 했고 제 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된 1940년대 초반에는 조선체육회를 일본인들의 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 흡수 통합해 스포츠 주권마저 빼앗았다. 또 하나 일제는 조선인 선수들의 국제 대회 출전을 최대한 억제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경우 마라톤의 손기정과 남승룡은 워낙 선발전 성적이 좋아 뽑지 않을 수 없었지만 축구의 경우 경성축구단이 1935년 6월 열린 베를린 올림픽 파견 선수 선발전을 겸한 제1회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그해 10월 벌어진 제8회 메이지신궁경기대회(우리나라의 전국체육대회쯤 되는 대회) 축구 종목 일반부에서도 정상에 올랐지만 정작 올림픽 대표팀에는 한반도에서 김용식 선생, 단 한 명만 뽑았다. 단체 경기의 경우 우승팀을 중심으로 다른 팀의 우수 선수를 보강하는 것이 기본인데도 이런 원칙은 철저히 무시됐다. 김용식 선생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3-2로 이긴 스웨덴과의 1회전, 0-8로 크게 진 이탈리아와의 8강전 등 일본이 치른 두 차례 경기에 모두 선발로 출전, 풀타임을 뛰었다. 일본 축구 관계자들도 김용식 선생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농구는 좀 달랐다. 베를린 올림픽 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우승한 연희전문학교(오늘날의 연세대학교)에서 이성구와 장이진, 염은현 등 3명을 선발했다. 농구 엔트리 12명 중 4분의 1이 조선인이었다. 베를린 올림픽 이후 1938년 1월 열린 전일본종합농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는 보성전문학교(오늘날의 고려대학교)가 연희전문을 43-41로 누르고 우승했다. 일본 농구 관계자들에게는 속이 쓰린 일이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보성전문은 그해 9월 일본 국내 사정으로 일정을 앞당겨 치른 1939년 대회 결승에서 교토제대를 연장 접전 끝에 64-50으로 누르고 2연속 우승한 데 이어 1940년 1월 대회에서 도쿄 문리대에 58-37 대승을 거두고 전일본종합선수권대회 3연속 우승의 위업을 이뤘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종목은 마라톤과 축구만이 아니었다. 농구도 있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 2016-04-1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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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공연] '60년 전 부산발 환도열차가 서울에 나타났다' 연극 <환도열차>의 장우재 연출
- 1953년 부산에서 떠난 환도열차가 6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2014년 서울에 도착했다. 과거에서 현재로 시점은 바뀌지만 주인공 이지순은 20대 모습 그대로 남편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남편은 이미 90세 노인이 되어버린 것. 낯선 남편과 변해버린 서울의 모습에 혼돈을 느낀 주인공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연극의 연출과 극본을 맡은 장우재 연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작품 탄생 배경 몇 해 전 아는 선생님과 낙산에 올라가 대학로를 내려다보면서 옛날 개천이 흘렀을 때와 현재를 비교하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6·25 때 환도열차라는 게 있었고, 휴전이 되어 그 열차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는데 길이 안 좋으니 열차가 중간에 가다 서다 했다고 해요. 다들 서울로 돌아가면 뭘 해야겠다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솥 걸고 밥도 해먹으며 소풍처럼 보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문득 ‘6·25 때 열차를 타고 올라온 사람들이 만들고 싶었던 서울이 현재 우리가 사는 서울의 모습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모티브가 되었죠. 2014년 초연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야기가 간결해졌다’와 ‘훨씬 더 다이내믹해졌다’입니다. 덕분에 마치 열차를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더 살아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제이슨의 캐릭터가 초연과 달라졌는데요. 이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 저 역시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1953년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설정을 하게 된 이유 작품을 쓰기 전 중국 단둥(丹東)에 가서 북한 식당에 들른 적이 있는데 거기서 일하는 안내원들을 보면서 말씨나 몸을 쓰는 태가 참 곱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말의 내용은 첨단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였죠. 그 이질감이 흥미로웠습니다. 마치 ‘우리 어머니 세대가 나이를 먹지 않고 고스란히 처녀로 남아 현재에 나타난다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한 경험이 작품 구성에 투영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각본과 연출을 동시에 맡으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점 볼거리보다 이야기에 더 중점을 두는 것 같습니다. 연극의 힘이 본래 그것이라 생각하고요. 이야기들이 연쇄적으로 작동하면서 관객이 어디까지가 이야기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분간 못 할 정도로 빠져들다가 문득 다시 우리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그런 지점들을 고민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언제 동화시키고 언제 이화시킬 것인지 매번 찾고 있죠. 중·장년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 과거 인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아, 우리 저랬지’하는 공감과 함께 문득 ‘그것은 낡고 신파였지’라고 생각하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과거는 그렇게 오래된 것일까요? 우리는 정말 저 멀리 나간 것일까요? 나이를 먹으면 시간과 인생을 통으로 보는 맛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신비롭습니다. 공연 연극 일정 3월 22일~4월 17일 장소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연출 장우재 출연 김정민, 윤상화, 이주원, 김용준, 안병식, 강선애 등
- 2016-04-12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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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가는 사람들] Part 4. 우아한 인생 2학기, 교양학점 올리기 ③백화점 문화센터
- 나이 들수록 지식을 뽐내기보다는 지혜(智慧)를 나누고 덕(德)을 베풀었을 때 자연스레 교양이 묻어난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지혜와 덕은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교과서나 시험도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생의 큰 숙제와 같다. 해결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동안의 소양과 더불어 끊임없이 공부하며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체력(體力)이다. 몸이 건강해야 정신과 마음이 건강한 상태로 오랫동안 인생 공부를 해나갈 수 있겠다. 교양 있는 중·장년의 삶을 위해 ‘지덕체(智德體)’를 향상할 수 있는 배움의 장을 살펴봤다. ◇ Chapter 3.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體 학점 올리기 백화점 문화센터는 주부들이 애용하는 배움의 장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은퇴 이후 배움에 목말라하는 중·장년 남성들이 늘어나면서 ‘Only for Mens, 요섹남 쿠킹 클래스(현대백화점 목동점)’와 같은 강좌가 생겨났고 점차 남자 수강생의 비율도 증가하게 됐다. 나이가 들면서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다 보면 오히려 함께 하는 것들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모든 것을 같이 할 수는 없더라도, 한 가지 정도는 아내와 또는 남편과 배우고 즐겨보는 것 어떨까? 함께 익히며 쌓이는 교양만큼이나 부부 사이의 애정도 차곡차곡 쌓이게 될 것이다. 댄스스포츠를 함께 하는 남편 문숭철(文崇喆· 65)·아내 김영희(金英姬·61)씨 “동아리 활동처럼 즐거운 문화센터는 내 삶의 활력소” 올해로 5년째 빠짐없이 ‘부부 크루즈&파티 댄스’를 수강하고 있는 문숭철·김영희 부부. 분기마다 개설되는 강좌를 모두 들었으니 대학으로 따져도 4년 개근상은 받고도 남는다. 이토록 두 사람이 오랜 시간 한 가지에 전념할 수 있었던 까닭은 ‘함께라서’이다. 부부가 함께해야 하는 수업인 만큼 짝꿍처럼 서로 돕고 이끌어주며 지낸 덕에 배움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을 수 있었다. 김씨는 “남편이 해외지사에서 근무하면서 10여 년을 독일, 러시아 등에서 지냈어요. 외국 생활을 하면서 가장 애로사항을 느낀 것은 언어가 아닌 ‘춤’이었죠.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학부모 모임 등을 하면 꼭 댄스파티 시간이 있었어요. 그 순간만 오면 우리는 어쩔 줄 몰라 했죠. 그래서 춤을 배워보자고 각오를 했는데, 아무래도 남편이 현역에 있을 때는 출장도 잦고 함께 연습할 시간이 부족했어요. 저 역시 아이들 교육에 힘쓰던 시기라 춤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죠”라고 회상했다. 그렇게 늘 마음에만 간직하고 있던 배움에 대한 욕구를 한국에 들어와서야 채워나갈 수 있었다. 해외 생활을 하며 아킬레스건처럼 느꼈던 춤을 극복하고 자연스럽게 즐기기 것이 목표였다. 단기적으로 계획하기보다는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문씨는 “춤이 생활화가 안 돼 있었기 때문에 모임이나 파티에 가면 우리는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죠. 그 우아한 세계에 들어설 수 없다는 생각에 자존심도 상했어요. 그런데 춤을 배우고 돌이켜보니 막상 그때 그들이 추던 춤이 별 게 아니더라고요. 거리낌이 없었을 뿐이지, 아주 테크니컬하게 추는 것은 아니었죠. 최근 크루즈 여행을 갔을 때 댄스 콘테스트를 했는데, 우리 부부가 속한 모임에서 우승부터 여러 상을 휩쓸었어요. 자신감이 생겼죠. 하지만 욕심내지는 않아요. 지금 하는 것에서 조금씩 더 배운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수준을 올려갈 생각입니다. 급할 필요 없어요. 이게 내 직업은 아니니까요”라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그는 “부부가 배움을 함께 한다는 것은, 핸들이 두 개 달린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남편이 아내에게 운전을 가르치며 다툼이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배움의 과정에서 서로가 융합하고 화합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방법대로 익혀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부부가 함께 춤을 추려면 서로의 스텝을 살피고 배려해야 하나의 동작을 완성할 수 있어 이는 함께 핸들을 잡는 것과 같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움직임이나 표현 등을 서로가 완벽히 공유하고 익혀야만 한 바퀴라도 돌 수 있어요. 한 배를 탔는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노를 저으면 안 되잖아요. 손을 맞잡고 우회전, 좌회전은 물론 그 이상의 동작까지 함께 해내려면 운전보다 더 힘들 수도 있어요. 마음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는 더욱 힘들죠. 서로를 담금질해가며 하나둘씩 극복해나가면 부부관계도 아주 단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그들은 함께 댄스를 하며 몸 건강은 물론 마음까지 건강해졌다고 이야기했다. 동작에 음악이 흐르면 댄스가 되고, 거기에 표현이 어우러지면 하나의 예술이 된다. 이러한 예술적 활동을 한다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도 대단하지만, 단순히 운동하는 것 그 이상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김씨는 “우리도 함께 골프를 치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운동은 같이 가더라도 각자 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하면 몸은 건강해지겠지만, 서로 교감하는 부분이 없어 마음이 건강해진다는 느낌은 안 들죠. 손을 잡고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함께 호흡하는 것이 정서적으로도 참 좋다고 생각해요. 또, 스텝을 외우고 익히다 보면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되고요”라며 50대 이후 부부들에게 ‘부부 댄스’를 꼭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은퇴하고 갑자기 부부가 무언가를 한다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무엇이든 꼭 해보세요. 언어를 배우거나 하는 것도 좋지만 몸으로 부딪히면서 교감하면 더 좋겠고요. 또 이렇게 문화센터를 다니면 지역 주민들이 동기가 되니까 마치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처럼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요. 오히려 친구들은 자주 보기 힘든데, 우리는 매주 만나니까 더 친근하죠. 그런 기분 좋은 관계가 현재의 삶에는 가장 큰 활력입니다.”
- 2016-03-30 1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