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벌려면 ‘젊음을 주는 사업’을 하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젊음을 유지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자연스러운 화장법을 배우고 싶어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내친김에 천연 화장품 만드는 교육도 받았다. 화장품 회사의 상술에 관한 내용도 있어 고개가 끄덕여졌다. 몇 가지 소개해본다.
상술 1
청결에 가장 기본이 되는 세안을 강조한다. 세안의 실패는 잡티와 뾰루지, 주름을 유발한다며 강력한 클린징 크림을 써야 한다고 권유한다. 눈 화장용, 얼굴용, 딥클린징용, 각질제거용 등이 있다.
상술 2
얼굴 세안제를 사용하면 피부에 필요한 기름기까지 제거되어 피부가 건조해진다. 그냥 내버려두면 주름이 생긴다며 걱정한다. 피부 건조를 막으려면 수분과 유분을 공급해야 하는데 그것도 부위에 따라 바르는 화장품을 만들어 판다. 그러나 성분은 거의 비슷하다. 눈가 전용 아이크림, 입술 전용 크림, 화장수와 로션, 영양크림. 또 주름이 생기는 것을 막는 기능성 크림만 해도 그 종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상술 3
기능성 화장품은 고가의 원액을 조금(10% 미만) 넣고 대단한 상품으로 광고한다. 또 부위별로 얼마든지 많은 종류를 만들어 팔 수 있다. 계절에 따라, 사용 편이도에 따라 화장품을 나눠 판다. 보습용, 주름방지용, 눈가용, 얼굴용, 입술용, 탄력용, 미백용, 광택용 등이 있다.
강의를 듣고 실습을 반복했다. 단순해도 성능이 우수한 화장품을 원료가격에 구애 없이 만들고 싶었다. 필자에게 맞는 화장품이 있는지 체질을 연구하는 한의사에게 상담을 해봤다. 오이와 알로에가 적합하다고 해서 청주에 숙성시킨 알로에를 섞어 화장수를 만들어 사용한 지가 10년이 넘는다. ‘신비의 물질’, ‘하늘의 축복’이라 불리는 알로에는 인류 최초의 약초라고 한다. 여드름과 기미 등을 잡아주고 피부미백 효과도 있다. 또 상한 피부조직을 복원시키고 피지분비를 정상화해 피부를 건강하게 만들어준다.
청주를 게르마늄 항아리에 넣고 싱싱한 알로에를 준비해 껍질을 벗겨낸 뒤 깍두기처럼 썰어 넣고 두 달 정도 한지로 밀봉해 그늘에서 숙성시킨다. 알로에 즙이 충분히 우러나오면 채로 거른 뒤 보습을 위한 글리세린과 부패방지를 위한 비타민 E를 넣어 마무리한다. 화장수 거르는 날은 용기를 소독하고 저울에 달아 첨가물을 넣고 주위 사람들에게 화장수를 나눠주느라 분주하다.
세안을 위한 비누와 보습용 수분크림도 직접 만들어 쓴다. 화장을 할 때는 여러 종류를 바르지 않고 성분이 충실한 화장품으로 간단하게 끝낸다. 천연 화장품을 사용하면 피부조직이 건강해지고 트러블도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화려한 용기도, 매력적인 향취도 없다. 색깔도 우중충하다. 멋 내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연의 것을 그대로 바른다.
가격이 저렴한 화장품에 비하면 비용이 더 들 수도 있지만, 최상의 재료에 어떤 방부제도 안 써서 건강하다. 그래서 그런지 피부 좋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또 화장수 뜨는 날을 기다려주는 지인들이 있어서 좋다. 지인들이 기본 화장품을 만들어 팔라고 성화를 부린 적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냥 나누어 쓰는 게 즐겁다.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인 것 같다.
‘글을 잘 쓰는 패션 디자이너’
필자의 후반생 꿈이다.
2012년 퇴직한 후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봤다. 패션 디자인, 패션 모델, 발레와 왈츠 그리고 탱고 배우기, 영어회화, 서유럽 여행하기, 좋은 수필 쓰기, 오페라와 발레 감상하기, 인문학 공부하기 등 많기도 했다. 사람이 살아갈 때 무엇이 중요할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필자는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선생님이 되어 30여 년을 정말 즐겁고 행복하게 일했다. 퇴직을 했어도 공무원 연금이 나와 최소한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우리나라 노인들의 빈곤은 정말 심각하단다. 절반이 빈곤층이라고 한다. 그래도 필자는 평생 원하던 일을 하고 퇴직 후에는 최소한의 생활까지 보장이 되니 이처럼 다행스런 일이 없다. 지금부터는 필자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인문학 공부는 주로 집에서 한국방송 통신대 강의를 통해 충족한다. 요일별로 국문학과 철학, 역사와 서유럽 문화기행, 패션 일러스트레이션 등의 강의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창 자랄 때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교육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 의지만 있다면 TV와 인터넷 그리고 서울 각 구의 문화원에서 무료로 혹은 가성비 높은 비용으로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 TV를 바보상자라면서 멀리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필자는 제자들에게 ‘정보의 바다’라고 표현했다. 인터넷에서 전복을 구하느냐 미역을 건져 올리느냐는 매체를 이용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요즘엔 방송대 강의도 그렇고 교양 프로그램과 양질의 다큐멘터리 등 좋은 콘텐츠가 넘쳐난다. 방송대 강의가 너무 재밌어서 외출을 못할 때도 있을 정도다.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의욕에는 세월도 못 당한다. 필자는 퇴직 후 제일 먼저 강남 라사라 학원에 등록했다. 패션디자인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어릴 때 선생님 다음으로 하고 싶었던 것이 패션디자인이었다. 이곳에서 패션디자인 과정 초급 3개월, 중급 3개월을 마치고 서울시 창업스쿨에서 2개월간의 패션디자인 과정을 수료했다. 패션에 대한 열정은 아마 평생 가지고 가게 될 것 같다. 발레는 어려서부터 필자의 로망이었기에 패션디자인 과정을 마친 후 바로 시작했다.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 발레를 할 때마다 얼마나 큰 행복을 느끼는지 모른다. 발레가 어린 시절의 로망을 실현시켜주는 취미 정도라면 왈츠와 탱고는 능숙하게 아주 멋들어지게 추고 싶다. 운동할 때는 인내심을 요구하지만 왈츠와 탱고를 출 때는 어느새 끝나는 시간이 되곤 한다. 건강을 위해, 바른 자세를 위해, 힐링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춤이라고 생각한다. 스웨덴에서는 팔십이 넘은 노인들도 발레를 한다. 노인분들의 표정이 참 행복해 보인다.
서초문화원에서는 수필을 잘 쓰기 위한 수업을 받고 있으며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서 기자단으로 활동하며 쓴 글이 96편이 될 정도로 글쓰기가 생활화되어 있다. 틈틈이 압구정역에 있는 무지크 바움에 가는 것도 잊지 않는다. 몇 해 전에는 강남시니어플라자의 모델워킹반에도 등록했다. 주 1회 모델워킹을 연습하고 있다. 2년 동안 패션쇼도 다섯 번 했다. 개성 강한 동료들의 기상천외한 옷차림을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옷차림은 전략이고, 옷 입는 것도 일종의 예술 행위’다. 기왕이면 예쁘게 입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장 훌륭한 액세서리는 젊음이다. 젊은이들을 값싼 옷을 입어도 예쁘지만 나이 들면 옷차림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물기 빠진 피부에 옷차림까지 추레하면 볼품이 없기 때문이다.
녹화가 있는 토요일은 될 수 있으면 여의도로 간다. 서포터즈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5포세대, 혼밥, 실업문제, 4차 산업혁명 등 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다루며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프로그램이다. 메인 브로드캐스터가 강연한 후 미래참여단 서포터즈들이 질문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현장에서 녹화에 참여하면 더 생생한 공부가 된다. 20대 젊은이에서 70대 시니어까지 다양한 세대와의 만남도 즐거움 중 하나다. 주 2회는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서 주관하는 서울 둘레길 걷기에 참여한다. 둘레길 걷기는 주 3회 30분 이상 운동을 해야 하는 시니어들에게 유익한 프로그램이다.
‘배움이 이어지면 기회가 이어진다’고들 한다. 지금 같아서는 지구촌에서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배움에 대한 열정이 식을 것 같지 않다.
이래도 되는 거야?
삶이 이렇게 재밌어도 되는 거냐고요!
어제는 너무 좋아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올해 4월부터 활동하게 된 온․오프라인 잡지 에 필자 글이 실렸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온라인에만 꾸준히 실렸는데 잡지사에서 정해준 주제 ‘으이구! 주책이야!’에 맞춰 쓴 글 ‘교재를 망가트려 죄송합니다’가 7월호에 실린 것이다. 제시한 주제에 맞춰 처음 써낸 글이었다.
'사람을 사귐에 있어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한다.‘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필자가 가지고 있는 철학이다. 에서 주관한 시니어 헬스 콘서트에 필자와 함께 온 사람들은 대부분 필자 스타일을 좋아하는 여성과 남성들이다. 모두들 성격이 활발하고 적극적인 분들이다. 하는 일도 인터넷 기자, 사회복지사, 공예가, 모델, 시인, 수필가, 교수 등 다양하다. 서초문화원 문화기행 프로그램에서 만난 분도 있고 동대문 제일평화시장 구두매장에서 필자 스타일에 필이 꽂혀 인연을 맺게 된 분도 있다.
평택여고에 재직할 때 필자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사람을 대할 때는 정성껏 대하라. 그 사람이 나와 어떤 인연으로 맺어질지 모른다.” 서둔야학 단톡방, 서민동 단톡방, 서울시 낭송회 시음 단톡방, 왈츠 단톡방, 명견만리 서포터즈 단톡방, 꿈방송 단톡방, 뉴시니어 리더스포럼21 단톡방, 강남시니어프라자 해피미디어단 단톡방, 모델워킹 단톡방, 서리풀 문학회 단톡방, 오페라 동호회 모임,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 친구들 등 단체회원 단톡방만 해도 만만치 않은 인적 네트워크다. 살아보니 사람이 가장 큰 재산이다. 2년 전 메르스 사태로 KBS 시사교양 프로그램 에서 녹화에 참여할 사람을 모집하느라 고심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필자가 강남시니어플라자에서 모델워킹하는 동료들과 해피미디어단 회원들을 왕창 모시고 갔다. 담당 PD가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른다.
필자는 바람잡이 역할을 즐긴다.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서 행사를 할 때는 담당 PD를 초대해 분위기를 조성했다. 필자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 각자의 재능을 활용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한다. 시니어 헬스 콘서트에 참석한 분들도 너무 재밌었다고 상기된 표정으로 필자에게 말했다. 다음 행사에도 초대해주기를 바란다면서. 아자아자! 이런 것이 바로 윈윈이다.
날개를 달아준 에 감사해하며 오늘도 필자는 저 푸른 하늘을 향해서 힘차게 날갯짓을 한다. 지금 필자의 삶은 글자 그대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다. 이런 삶이 수어지교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한 기쁨!
따봉, 원더풀!
직박구리 한 쌍의 순애보가 느껴지는 보기 드문 모습이 촬영됐다.
동영상은 21일 오전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인근에서 촬영된 것으로, 영상에는 쓰러져 있는 직박구리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또 한 마리의 직박구리 모습이 담겨 있다. 마치 자기 짝을 보호하듯 옆에 자리를 잡고서, 사람들이 접근해도 꼼짝하지 않았다. 제보자에 따르면, 죽은 새를 지키고 있던 새는 사람들이 가져다준 물에 입도 대지 않고 한 시간이 넘도록 곁을 지켰다.
한국교원대학교 황새생태연구원 윤종민 박사는 “직박구리는 번식기마다 짝을 바꾸는 연속 단혼하는 종”이라면서, “이런 장면은 보기 드물며 과학적으로도 설명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직박구리는 한반도의 중부 이남 지역에서 흔히 번식하는 텃새로, 요즘 시기인 5∼6월에 한배에 4∼5개의 알을 낳는다.
동영상을 제보한 젊음교회 박선욱 목사는 “죽은 새를 그대로 놔둘 수 없어 인근 빌딩 관리자들과 잔디밭에 묻어줬고, 옆에 있던 직박구리는 그 과정을 지켜봤다”며 “마치 인간처럼 가족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사랑을 표현하는 것 같아 안타깝고 신비했다”고 말했다.
풍경소리도 잠이 덜 깬 조용한 아침.
바늘 끝 하나 박을 수 없을 것 같이 꽉 찬 세상을 뚫고 넓은 대웅전을 빠져나온 독경소리처럼 일주일에 두 번 거실에 울려 퍼지는 인터넷 영어방송.
기저귀 차고 출발해 수의라는 마지막 패션 쑈로 끝내는 게 인생인데, 젊음, 결혼, 고생자체가 마냥 즐거움이었고 재미였던 아이 키우기도 끝내고 이제 단 두 식구만 남았다.
우리는 장수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누구나 안다.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도 누구나 안다.
해야 할 일이 많으니 공부도 많이 해야 한다는 것도 누구나 안다
단지 무엇을 할지 모를 뿐인 때 둘만이 남겨진 지금도 뭔가 또 해 보겠다며 뛰고 또 뛰는 일상에서 찾은 게 외국어 배우기라는 아내.
차를 타고 어딘가를 갈 때면 네비게이션이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새로운 경로를 탐색합니다.
5km 이상 직진하십시오. 800m 앞에서 유턴하십시오.
누군가 우리네 인생길도 이렇게 알려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은 내가 가고자 한 길인지, 다시 돌아가야 하는 길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네비게이션 같은 인연이 우연이란 이름으로 알려주는 내 인생이 마무리 될 때 장식할 것 중 하나가 무엇인가 배우는 것이라면 그 중 하나를 영어라 생각하고 싶다는 아내.
피터팬의 작가 제임스 벨은 행복이란 내가 좋아서하는 일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나 내가 해야 하는 일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라고 했다.
아마도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란 내 한 사람의 생각의 한계가 있으니 행복의 양이 적을 것이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나 해야 할 일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찾는 것은 누군가 자신의 일에서 신나고 재미있게 일을 하면 곁에서 보는 사람도 흥미와 호기심이 생겨 그 일에 관심을 갖게 되어 가까이 오게 될 것이다. 그때 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은 무엇이든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갖고 있을 것이니 그런 사람들이 모이면 시너지 효과가 생겨 행복의 양은 무한대가 될 것이라고 해석해본다.
그러나 나이 먹고 세월이 흐르면 젊은이와 달리 확률적으로 남은 시간이 적으니 얼마 남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먼저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나는 나를 위해 영어 공부 하겠다는 아내.
그렇다 보니 가장 행복한 사람은 모든 것 훌훌 털고 내가 행복이라 생각한 길을 가는 사람이란 생각이 점점 설득력이 생기는 것 같다.
군대에 있을 때 적을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방법 중 하나는 내가 적군의 입장에서 나를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총 동원하여 나를 공격해 보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적의 취약점과 나의 허점을 찾아 내 허점은 보강하고 적군의 취약점을 나도 수단과 방법을 총 동원해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얼마 남았는지 모르는 인생이지만 삶의 끝에서 후회하지 않는 방법 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고 잘 하는 것을 찾아 효과적으로 공격해 보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정작 영어공부하는 당사자보다 곁에서 침묵하고 도와주는 자의 고통도 만만치 않게 크다는 것을 과연 본인은 알까.
요즘처럼 청개구리 동화가 실감나는 때도 없었던 것 같다.
단체사진을 찍으면 그 사진 속에서 제일 주름이 많고 나이든 사람을 고르면 그게 바로 필자다. 나이가 제일 많아 그러려니 하면서도 왠지 모를 억울함이 있다. 거울에 비췬 모습보다 사진에서만 더 늙게 나오는 것 같아 속상한다. 예전에 나이든 사람들을 사진 찍으려하면 ‘늙은이 뭘 자꾸 찍으려 해’ 하고 손사래 치는 이유를 이제 알겠다.
한번은 동료들에게 ‘진짜 사진의 모습과 내 모습이 맞나? 사진 빨 잘 받는 사람이 있다는데 사진만 찍으면 이렇게 늙수그레하게 나오지’ 하고 푸념 반 억울함 반을 호소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웃으면서 ‘ 카메라가 왜 거짓말 합니까 보이는 그대로 찍히는 게 카메라죠.’ 요런 얌통머리 없고 앞뒤 꽉 막힌 말을 하는 밥 맛 없는 놈의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눈치 빠른 놈은 내 기분을 알고 ‘사진을 자주 안 찍어서 그래요. 사진을 자주 찍으면 포즈도 제대로 잡아서 젊게 나오는데 어쩌다 한번 찍으면 나이든 사람은 실물보다 더 늙게 나와요.’ 어리벙벙하게 위로 같은 이유를 곁들여 설명해주는 고마운 놈도 있다.
예쁘게 나오는 것은 고사하고 두 눈의 크기가 같고 눈 밑에 지방덩어리라도 보기 싫지 않게 나왔으면 좋겠다. 주름살이라도 덜 깊게 파였으면 좋겠다. 더구나 술을 먹고 사진을 찍으면 더 나이 들어 보인다. 정신이 몽롱해지면 사진에 그대로 투영되어 영락없는 상늙은이다.
사진을 찍어보면 실물보다 더 예쁘게 나오는 사람이 있고 실물보다 잘 안 나오는 사람이 분명 있다. 얼굴이 작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람이 예쁘게 나온다, 찍는 각도에 따라 예쁜 얼굴도 되고 못생긴 얼굴도 된다. 요즘 사진은 포토샵 기술이 발달되어 얼굴 교정도 가능하고 늙은이를 젊은이로 만들 수도 있다. 주름살도 다리미질하듯 펴준다.
전문 사진사가 찍은 사진은 역시 다르다. 웃을 때 입의 크기도 적당할 때 셔터를 누른다. 여러 장의 사진을 다각도로 찍어서 그중 나은 것을 선택하니 좋은 사진이 나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구도와 배경을 잘 맞춘다. 그래서 사진을 종합 예술이라 한다. 여러 종류의 사진들을 보면서 필자가 사진에서만 더 늙게 나오는 것은 내 얼굴 탓이 아니라 완전히 사진사들의 얕은 사진 실력을 탓한다. 그러면 정신적으로 좀 위안이 된다.
나이 들어 생기는 얼굴주름을 없애려고 보톡스 주사를 맞거나 얼굴 속에 실을 넣어 잡아당겨 걸어두는 리프팅 성형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마음에 아직 젊음의 열정이 있고 신체적으로 건강하기 때문이다. 웃으며 찍은 사진은 주름이 많이 잡힌 모습이지만 웃어서 생긴 주름은 보기에도 좋다.
사진 속의 주름살은 안타깝지만 세월의 훈장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겠다. 그래도 주름진 얼굴을 감추려 선 그라스를 쓰고 싶다. 내면의 이중성이 사진 찍을 때마다 꿈틀거린다.
사람이 서로 알아갈 때 인사라는 과정을 통한다. 잠깐 동안의 첫인상. 목소리에서 기운을 느낀다. 표정을 읽는다. 차차 친해진다. 이 모든 과정이 있었나 싶다. 마음은 허락한 적 없는데 친숙하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없다. 반칙처럼 이름도 모르고 “나, 이 사람 알아!”를 외친 사람 손들어보시라. 이제 알 때도 됐다. 그의 이름 석 자 김유석(金有碩), 배우 김유석. 안방극장 터줏대감으로 익숙한 그가 은막(銀幕)에 모습을 드러냈다. 7년 만에… 돌아왔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 같은 배우다
친해질 기회를 언제 줬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너무 친숙하다. 이름 대면 알만 한 배우만큼 참 가깝다. 주위 사람에게도 물어봤다. “배우 김유석을 알아요?” 고개를 갸우뚱함과 동시에 사진을 보여준다. 그러면 안다고 백이면 백 대답한다. 사극에서 봤다던가, 찌질(?)한 연기가 좋았다던가. 연기 경력 20년이 훌쩍 넘은 배우 김유석은 이름보다는 얼굴 자체가 이름이고 또 얼굴인 셈. 사람들 대부분이 “어!” 하며 연예인으로 알아차리지만 세 단계쯤은 거쳐야 저 배우가 누군지 감을 잡는다. “제가 나온 작품을 재밌게 보신 분이 길을 지나다가 어디서 봤죠? 초등학교? 우리 동네? 아! 대학교? 연예인 누구 닮았는데? 그러면 제가 ‘그게 저인데요(웃음)’ 그래요. 이런 경우가 종종 있어요. 특별하게 눈에 확 띄지는 않는데 뭔가는 있었고. 그렇게 기억해주시는 것 같아요. 물론 좋죠. 제가 누군지 그 사람이 알고 나면 ‘정말 그 연기 좋았어요’, ‘팬이에요’라고 말씀해주세요.” 배우란 인기를 먹고 사는 직업이다. 대중 앞에 선 그들은 사랑받기 시작하면 자리 유지를 위해 안간힘을 쓴다. 배우 김유석도 같은 과정을 밟으며 살아왔겠지만 집중해보거나 느낀 적이 없다. 그저 어느 샌가 스며서 젖어버렸다. 어디에도 흔치 않다. 안정적이고 기복 없이 늘 있는 배우 말이다. “등산 같아요. 내가 나를 돌이켜보면. 저 위까지 가려면 어떤 방법으로든 밟아서 올라야 하잖아요? 단 한 번도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쑥 하고 올라간 적 없어요. 그냥 한 발짝, 한 발짝. 그렇게 걷다가 ‘어, 좀 올라왔네’ 그래요. 한참 아래 있던 친구가 갑자기 올라가는 것도 보고 말이죠.” 고등학교 때까지 아무런 꿈이 없던 김유석은 우연히 본 연극 한 편으로 배우가 됐다. 대단한 성공 스토리는 없지만 행복한 삶의 형태 속에서 다른 것 안 하고 원하는 연기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제가 배우를 하면서 한 가지 색깔만 사용하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일반적으로 배우를 하면 비슷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잖아요. 제가 안정적으로 보인다고 하셨는데 꽤 독특한 연기도 했어요. 대박 난 작품이 없는 게 아쉬운 거죠(웃음)”
영화 , 스크린으로 돌아오다
김유석을 처음 만난 장소는 4월 말 전주국제영화제 현장이었다. 그가 출연한 영화 (허철 감독)가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관객과 첫 상견례를 가졌다. 김유석은 TV 탤런트로서 인상이 깊지만 데뷔 초 김기덕과 홍상수의 대표 영화에 출연해 주목 받았다. 2000년대 후반까지 틈틈이 독립영화에 출연하다 한동안 TV 드라마에만 몰두했다. 마지막 영화 이후 7년 만에 선택한, 아니 선택받은(?) 작품이 바로 이다. “이 영화를 감독한 허철이와는 사회 친구예요. 지금은 정치를 하지만 민변이던 송호창, 진선미 의원, 한지승 영화 감독 등이랑 어울려 친한데 지승이가 철이를 데리고 왔어요. 10년 전쯤 만나서 친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극영화를 하겠다는 겁니다. 다큐멘터리를 하던 친구가요. 어떤 연극을 봤는데 5000만원으로 영화를 만들 생각이라더군요.” 허철 감독의 말에 김유석은 그저 친구가 잘되기만을 바랐다. 미국에서 잘나가던 교수 허철이 한국에 와서 갖은 상황 속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성 있고 뚝심 있게 영화 만드는 허철 감독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네가 영화를 만들면 내가 뭐든지 할게. 필요한 거 있으면 묻지도 말고 시키기만 해. 네가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지 할게. 그냥 써. 그랬더니 ‘네가 그냥 그걸 해야겠다’ 그러더군요.” 허철 감독은 김유석에게 의 주인공인 변사장 역을 줬다. 이미 감독에게 선택당했던 것이다.
예술은 ‘얘’랑 ‘술’ 먹는 거
사실 김유석에게는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었다. “예술영화는 이제 그만. 데뷔 초에 예술영화로 시작했더니 정말 대안영화나 독립영화 아이콘처럼 제가 그렇게 돼 있더라고요. 예술은 ‘얘’와 ‘술’ 먹는 거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좀 더 다양하고 보편적이고 편한 영화, 한마디로 흥행이 되는 영화를 하고 싶었어요. 일단은 시나리오나 좀 보자고 말했어요.”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진정하고 읽고 또 읽다가 세 번이나 눈물이 터졌다. 순간적인 감정일지 몰라서 다음 날 또 읽었는데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관객들도 같은 감정을 느끼면 영화가 잘될 거란 확신이 생겼다. 개런티에 대한 생각은 애초에 접고 시작했다. “몇천만원으로 영화를 만드는데요, 무슨. 당연히 그래야 했어요. 영화를 만드는 것만도 고마운 거잖아요. 작년 3월에 만나 미팅하고 6월에 촬영 들어갔습니다. 영화 찍는 내내 정말…정말 행복했습니다.” 최근 방송 드라마 시스템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사전 제작을 도입했지만 모든 제작 환경이 바뀐 것은 아니다. 대본을 받아 외우기가 바쁘게 빨리 찍어 내보내는 속도전의 연속이다. 줄곧 브라운관에서만 활동했던 김유석은 영화 촬영 하는 동안 기운을 얻고 더욱 특별한 경험도 했다. “매번 영화를 할 때마다 느끼긴 했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습니다. 제 나름 영화에 대한 갈증도 있었고, 영화 팀이 주는 에너지가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영화 찍는 내내 허철 감독을 다시 알게 됐어요. 영화 현장에서 철이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정석대로 잘 배운 감독님이었습니다. 흔히 보지 않았던 노하우를 쏟아내는 그런 감독이었죠.” 함께 영화에
출연했던 연기 후배들은 김유석이 팀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했다며 입을 모았다. 이에 손사래를 치며 함께한 후배들에게 고마움을 돌렸다. 이 영화는 연극 를 영화화한 것으로 연극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대부분 주역을 맡았다.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허철 감독이 연극을 보고 그 배우들과 작품 만들겠다고 시작한 영화잖아요. 내가 아니고 연극배우들이 중심이죠. 연극에도 출연했던 리우진, 정연심, 이황의, 김곽경희, 강유미 같은 배우가 탄탄하게 잡고 있었어요. 내 나이가 조금 많은 관계로…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하겠어요? 같이 술 한잔 마시고 그러는 거죠. 제가 슬쩍 낀 건데 이질감 안 느끼고 받아줘서 고맙죠.”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영화 는 전회 매진을 기록했고, 영화계와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오랜만에 출연한 영화를 가지고 영화제 레드카펫에 오른 것도 뜻깊었다. “영화에 대한 마음이 절실했어요. 어느 순간 드라마 방송만 하다 보니 영화가 굉장한 동경의 대상이 돼 있더라고요. 심지어 영화하는 친한 친구도 저를 방송 연기자로만 생각해서 당황한 적이 있어요.” 애써 외면했다. 영화제나 시상식이 TV에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좋은 한국 영화가 개봉돼도 찾아보지 않았다. 영화제에도 가지 않았다. 이번 영화를 찍고 나서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을 TV로 챙겨봤다. “무명배우 33명의 축하공연이 인상적이었어요. 시상식에 앉아 있는 배우들이 모두 울더라고요. 배우 심정이 다 그런 거 같아요. 충분히 재능 있는 연극배우나, 안정적이지만 뜨지 못한 배우나, 연기를 막 시작한 배우나 각자 위치는 다르지만 말입니다.”
오빠냐, 아저씨냐 그것이 문제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특히 한국사람) 상대방 이름을 알게 되면 자연스레 나이에 대해 궁금해한다. 새파랗게 어려보이는 김유석이지만 사실 반백(?)을 넘긴 중년의 남자.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외국인과 함께한 자리에서 그가 영어로 “My first son is twenty years old(내 큰아들은 스무 살입니다)”라고 했을 때 ‘twenty(스무 살)’란 단어 자체가 해석이 안 됐다. 너무나 젊어 보이는 외모 때문이었다. 오빠로 느껴야 할지, 아저씨라 해야 할지 그것이 문제였다. “오십? 네? 물리적인 나이는 그렇지만 나의 생각과 신체적인 나이는 아닌 거 같아요. 가끔 제 친구들을 보면 놀라요(웃음). 언제부터 그랬냐면 스물일곱 살 때 러시아에 유학 가서 서른두 살에 왔어요. 그리고 서른세 살에 데뷔를 했는데 지금도 그때랑 마음이 똑같아요. 냉정하게 생각해봐도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어요. 7년 만에 영화를 했는데 이렇게 세월이 금방 갔나. 큰아들 키가 제 키를 훌쩍 넘었는데 이렇게 애가 컸나 싶죠.” 데뷔 초와 비교했을 때 달라진 것이 사실 별로 없다. 신체 중 노화가 빠른 것 중에 목소리가 있다는데 예전 그대로다. 달라진 게 있다면 젊은 외모에 중년의 멋이 가미된 정도.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냐고 물었더니 한참을 생각한다. “젊음을 유지하기보다 잘 늙고 싶은 게 맞을 것 같아요. 그런 노력 중 하나가 불편한 것은 안 해요. 불편한 사람과 술 안 마셔요. 제가 술을 좋아하지만 그런 사람들이랑 술을 먹으면 한두 잔에 취하다 체해요. 물론 피할 수 없을 때는 버텨보지만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고, 하고 싶지 않아요.” 김유석은 어느 순간 살아온 모습이 고스란히 얼굴에 담기길 바란다고 했다. 여태까지 믿고 살아왔던 삶이나 연기가 퇴색, 변색, 탈색되지 않으면 좋겠단다. “그렇다고 어떻게 늙고 싶은지가 지금 당장의 고민은 아닙니다. 할 게 많아서 그런 고민할 여지가 없거든요. 사람들이 나이 먹다 보면 자기가 바뀌는 모습을 못 느끼더라고요. 나도 저럴까 걱정은 하죠. 편안해지고 옛것 얘기하고 남에게 가르치려 하는 거 말입니다.”
중년의 배우, 나이 앞에 유연해지다
언제쯤 자신의 실제 나이와 비슷한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가 만들어내는 극 중 배역에 녹을 수 있는 여유가 중요하다고 했다. “배우는 자기 나이를 중심으로 위아래 열 살 정도는 연기할 수 있어야 해요. 나이를 유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 또한 이번 영화처럼 나이 많은 연기도 가능하고 또 젊은 역할도 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웃음)” 혹시 인생에서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가 있을까 싶어 물어봤다. 지금까지 못해본 캐릭터를 연기해보는 것 말고는 별로 없단다. 마흔을 넘겨보니 대충이라도 알 수 있었다. 무엇인가를 해서 이루고 채우는 것만큼 비워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느낀다. “연기하는 것도 힘들어요. 그냥 소소하게 놀고 술 마시고 힐링하고 비우는 시간이 필요해요. 비워야 또 무엇이 들어올 수 있어요. 가끔씩 작품이 끝나면 일주일이건 한 달이건 절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오거든요.” 김유석은 배우로서 일상에 대한 호기심,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식지 않길 바란다. “제가 맡는 캐릭터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요.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이 하루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잘 보내고 싶습니다.”
지난 4월의 첫 번째 금요일은 아내와 오랜만에 저녁 데이트 하는 날이었다.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창극 흥보씨( Mr. Heungbo)를 함께 보러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녹색의 푸름과 꽃들로 봄이 무르익어가는 아름다운 장충단 공원길을 걸었다. 장충단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씨가 영면한지 5년 후 고종은 장충단을 꾸며 을미사변 때 순직한 장졸들의 영혼을 배향하여 매년 봄 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던 곳이었다고 한다. 우리의 단골식당이 된 ‘다담에뜰’에서 식사와 차를 한잔하고 손을 잡고 걸어서 달오름에 올랐다. 다담이란 불가에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내어놓는 다과라는 뜻이다.
서양에 오페라가 있다면 우리에게 창극이 있다. 판소리가 한 명의 소리꾼이 북장단에 맞추어 노래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극음악이라면 창극은 여러 명의 소리꾼들이 역할을 나누어 노래하고 연기하면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극음악이다. 지난해 해오름에서 창극 향연을 처음 함께 본 후 아내와 나는 창극을 좋아하게 됐다.
창극 흥보씨는 한 마디로 우리의 전통 흥부전(흥부가)을 집으로 치면 대들보와 기둥만 남기고 완전히 현대판 흥부전으로 바꾼 새로운 창작이었다. 우리 내외가 창극에 대해서는 문외한 이었지만 아내도 아주 재미있게 잘 봤다고 만족할 정도로 좋았다. 흥보씨의 새로운 버전으로 창작 스토리를 소개하면 대략 아래와 같은 것들이 예상을 불허하는 것들이었다.
첫째 흥보와 놀보의 아버지 연생원은 아이를 갖지 못해 흥보는 길에서 주워와 길렀다. 가문이 흥하라고 흥보, 아내가 바람을 피워 뒤늦게 출산한 놀보는 귀한 자식이라 놀랍다는 의미로 놀보라 이름 지었다. 이런 출생의 비밀로 시작된 이야기는 관객들의 흥미를 돋우기 시작 하였다. 흥보가 형, 놀보가 아우였으나 착한 흥보는 아우를 위해 계약서 작성을 통해 형과 아우를 바꾸어 생활하는 부분도 연출가의 기획이다.
둘째 강남의 제비는 오늘날 바람둥이 제비로 묘사하고 제비가 갖다 준 씨앗은 박 씨보다 찬란한 구슬 같은 씨앗이었다. 호랑이가 말을 하고, 우주인이 나타나고 흥보의 처로 등장하는 이소연의 가난타령, 제비 유태평양의 제비 노정기, 무대장치, 보리수 나무의 등장이 특이하였다. 그럼에도 무대장치의 핵심은 칼, 몽둥이, 톱의 기능을 한 부채였다. 그 씨앗이 물질적인 부를 갖다 주는 것이 아닌 정신적인 안정을 갖다 주는 것으로 묘사되는 점이 오늘날 물질보다 정신문명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 같았다.
셋째 창극을 관통하는 줄거리는 통상 전래 판소리와 같이 권선징악이다. 그래서 현대적인 노래와 춤을 삽입하여도 관객들에게 친근미를 안겨준다. 그리고 극 전체를 흐르는 비움의 철학은 물질적인 풍요보다 가난하더라도 바른 생활을 하는 흥보가 원래 형의 위치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스토리다.
마지막으로 창극 흥보씨가 재미있는 창작극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점은 흥보와 놀보 역을 맡은 두 주인공의 뛰어난 연기, 예측을 불허하는 극본 과 연출, 캐릭터에 맞게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연기해준 전 단원들, 그리고 우주의 신비스러움과 판소리의 맛을 살리면서도 젊음과 경쾌함을 선물한 음악 감독의 합작의 결과라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서양음악과 춤을 차용하여 창극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극이었다.
이런 훌륭한 창극단이 있는 한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 창극이 서양의 오페라처럼 세계화로 되는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았다.
(흥부를 흥보로 놀부를 놀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정확한 정설은 아직 없는 것 같아 기획자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미래 학자 한 분이 2045년쯤이면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예측을 하였으나,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늙기 마련이고 궁극에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젊음을 유지하면서 건강하고 즐거운 인생이 되기를 갈망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불로장생을 추구해왔으며 근래에도 그러한 노력은 계속되고 미래에도 이어질 것이다. 인간의 로망이기 때문이다. 구글 창시자 한 분은 거대 자금을 투자하여 죽음을 극복하겠다는 공언까지 했다. 역사적으로는 진시황이 그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바, 먹으면 늙지 않는 불로초를 찾는데 온갖 힘을 쏟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하들을 조선 땅에 보내 불로초를 찾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도 진시황은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늙지 않을 수야 없지만, 더디게 늙는 방법은 있지 않을까?
필자의 유소년 시절엔 나이가 환갑에 가까우면 남자는 사랑채에 나앉아 노인 행세를 하였다. 오늘날은 노인으로 불리는 자체도 싫어하지만, 예전엔 그 반대였다. 늙은이 행세가 수명을 단축하였는지 모른다. 장수의 기준점이 60살이었기에 회갑잔치를 성대히 치렀다. 지리산 산골 마을이었던 고향에서는 논밭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부모의 나이가 환갑에 가까워져 오면 일을 그만 두게 하여 편히 쉬게 했다. 그것을 효도로 여겼고 필자의 삼 형제도 환갑 잔치를 치른 아버지가 더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였다. 옆집에는 아버지와 동년배였던 두 아들을 둔 어른 한 분이 살았다. 부지런한 둘째는 결혼과 함께 신접살림을 차려 따로 살게 되었고 게으른 큰아들과 함께 농사일하며 지냈다. 그 어른은 큰아들이 게으른 탓에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집안 일을 도맡아 했다. 뒷산에서 무거운 땔감을 하여 지게에 지고 오기도 하고 논밭 농사를 직접 지었다. 그분은 동갑내기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10년을 더 사셨다. 타고난 운명도 있겠지만, 계속하여 몸을 움직였기 때문에 오래도록 건강을 유지하였지 싶다. 부모님을 편하게 모시려 일을 그만 두게 한 일이 효도가 아니라 더 빨리 늙게 한 불효를 저지른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농사일에 손을 놓은 아버지는 집안 일이나 농사일 외에는 한가한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소일거리가 없었던 시절이라 나날이 무료(無聊)했음이 틀림없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무료한 날을 보내게 되어 마음과 몸이 함께 쉬이 늙어 간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필자의 경험을 예로 주변의 아는 사람들에게 부모님이 집안일을 거들려 할 때는 말리지 말라고 일러 준다. 오히려 간단한 일거리를 만들어 주고 뒷방 늙은이 취급을 하지 않기를 권유한다. 이제는 부모 세대를 이어 우리 스스로가 같은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인생 2막을 활기차게 살려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으나 전체에 차지하는 비율은 낮은 편이다. 뒷방 늙은이가 되어 자식에게 짐이 되는 삶이 아니라 당당하게 살아가려는 자세가 절실하다. 취미가 없다면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취미를 만들 필요가 있다.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좋아하는 소일거리나 취미활동으로 몸과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더디게 늙는 비결이다.
시대를 상징하는 목소리가 있다. 포크음악의 전설 세시봉의 막내인 김세환의 목소리가 바로 그렇다. 1970년대를 수놓았던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노랫말과 귀공자 같은 외모와 함께 어우러져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화려하게 부활한 세시봉의 멤버로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이어가고 있는 그는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변치 않는 사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모습 그대로 천진난만한 긍정의 에너지로 가득했던 그와의 인터뷰.
관과 공연장에서 보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전혀 그 나이로 보이지 않는 놀랄 만한 동안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듣기도 싫어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내 마음, 내 현재가 중요하지.”
나이라는 숫자에 뭔가를 맞춰야 한다는 강박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 70대를 맞이하는 김세환의 철학이었다. 같은 70세라도 생각하는 게 다 다르잖냐는 그의 반문은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바꿀 수 없지만 속은 바꿀 수 있잖아요? 칠십이 되면 그 나이에 맞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 그건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애들한테도 물어봐요. ‘나 이러는 거 이상하냐?’ 그러면 ‘아니, 아빠는 어울려’라는 대답이 돌아와요. 그럼 오케이죠.”
내 마음, 내 현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김세환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이런 삶도 있구나 싶었다. 그 이미지를 총체적으로 정의하자면 긍정과 해맑음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며 “감사하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저는 지금 꿈이 없어요. 하루하루가 즐거우니까요. 범사에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그리고 저는 정말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고민? 지금은 없어요. 굳이 찾자면 아이들인데, 아이들이 아직 직업이 없으니까. 하지만 푸시 안 해요. 다 지 팔자니까요. 제 아버지도 그랬거든요. 아버지도 저에게 큰소리 한 번 친 적 없어요. 그래야 내가 편하죠. 내가 편해야 애들도 편하고. 렛 잇 비.”
“노래도 마이너는 싫다. 밝고 즐거운 노래가 좋다”고 말하는 그의 지론은 흡사 그의 노래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같은 삶의 태도다.
“글쎄요. 난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자랐으니까. 가요계에 나같이 고생 안 하고 가수 된 사람 없어요. 신인상 받고 그다음에 대상 받고. 그때가 총각이었을 땐데 집도 사고. 얼마나 감사해.”
물론 그도 사람이다. 인생에서 무조건 즐겁고 좋은 일만 있을 리 없다.
“저도 희로애락이 다 있죠. 그런데 슬프고 아픈 걸 굳이 계속 삭히는 건 싫어요. 빨리 잊어버려야지. 예를 들어 부부싸움 안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런데 부부싸움을 하면 내가 답답해. 그래서 내가 먼저 풀려고 해요. 난 비자금도 없어요. 비자금이 있다는 건 ‘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잖아요.”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르쳐주신 부모님
그는 자신이 긍정적인 성격이 된 것이 가족의 영향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100세까지 사셨던 어머니께 감사해요. 어렸을 때는 돈을 더 타내려고 어머니에게 거짓말도 하고 그러잖아요? 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예를 들어 어머니에게 ‘5000원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어머니는 옷장에 있는 가방에서 꺼내 가져가라고 해요. 그런데 애들 욕심에 6000원 가져가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하지만 어머니는 나중에 내가 더 달라고 하면 또 주실 거라는 확신을 주셨어요. 그래서 그런 욕심을 내본 적이 없어요.”
“나도 널 믿을 테니 너도 양심의 가책 없게 행동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은 바른 삶에 대한 지침과도 같았다. 그의 어머니는 얼마 전 10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한복만 입는 분이셨죠. 그래서 저는 학교 다닐 때 스타킹만 봐도 이상했어요. 집에 여자 스타킹은 아예 없고 남자 형제 셋이니 남자 신발만 잔뜩 있었어요. 아내와의 관계요? 며느리 눈치 보셨었지(웃음). ‘딸 같다 얘’ 이러고.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시집살이 절대 시키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본인이 많이 고생하셨으니.”
그의 어머니는 피아노, 아버지는 성악을 했다. 그가 노래를 하게 된 데에도 두 사람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그의 아버지 김동원은 당대의 모든 상을 휩쓸었던 대배우였다. 그러나 집에 들어오면 그런 간판에 매달리는 일 없이 아들에게 “나 팝송 하나 가르쳐줘라” 하며 함께 어울리는 아버지였다. 김세환의 긍정적이고 해맑은 자유분방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를 보며 우는 남자
“우리 마누라 끝내주지.”
아내와는 어떻게 만났느냐고 묻자 나온 대답이다. 거두절미하고 아내를 ‘끝내준다’고 표현하다니 팔불출도 이런 팔불출이 없다.
“아내와는 조병화 시인 딸의 결혼식 사회를 보게 되면서 만났어요. 한눈에 반했죠. ‘띠옹’ 하더라고. 첫사랑이었어요. 그래서 아내에게 말했죠. ‘나를 일단 사귀어보고 네가 선택해라. 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할게.’ 그리고 아직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고 있어요(웃음).”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첫사랑마저도 성공한 셈이다.
“그러게. 그래서 막장 드라마가 싫어요. 누군가는 재밌다고 열심히 보는데 난 싫어요. 피하고 싶고. 그래도 감정이 많아 영화 보면 막 울기도 해요. 에서 우승하는 거 보고 울기도 하고. 그러면 애들이 ‘아빠 왜 그래?’ 묻고. 막 소리 내서 우니까(웃음).”
그는 매사 긍정적이고 해맑은 사람이지만 싫은 것은 절대 못 참는 사람이기도 하다. “싫은 사람과는 같이 숨쉬기도 싫다”는 그는 사람의 성장 과정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했다.
“똑같은 나무라도 자라는 모습이 다 달라요. 사람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배우고 느끼는 게 중요합니다. 그게 안 되면 통제가 안 되니까요.”
그는 긍정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려면 상대를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는 간단하게 말했다.
“바꿔서 생각하면 편해요. 난 애들에게 ‘공부해’라고 말 못했어요. ‘만약 내가 자식이라면?’ 하는 생각을 하니까요. 제가 고3 때 텔레비전에 조영남이 나오면, 어머니는 나를 불러 ‘세환아, 조영남 나왔다. 이거 보고 공부해’라고 말씀하시곤 했죠. 나로선 참 고마웠지. 그렇게 느낀 고마움들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틈만 나면 자전거 탈 생각
김세환은 소문난 자전거광이다. 1986년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MTB를 타기 시작해서 벌써 30년 넘게 자전거를 타고 있다. 아니, 자전거에 대한 애착은 더 강해져서 요즘은 그가 속해 있는 자전거 클럽인 ‘한시반클럽’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자전거는 어느 면에서는 편해요. 헬멧 쓰고 안경 끼면 내가 김세환인 줄 아무도 모르니까요. 더구나 서 있을 일도 없으니. 그러니 나에게 딱 맞아요. 그리고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지. 땀은 나를 배신하지 않아요.”
그와 함께 자전거를 타던 사람들이 주말 오전에 볼일을 보고 한강에서 모이면 오후 한 시 반 정도가 되곤 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바로 한시반클럽이다. 1990년대 초부터 시작한 한시반클럽에는 40~60대에 속하는 스물다섯 명 정도가 모인다고 한다. 연령대로 보면 김세환이 가장 고참이다. “구멍이 나는 자전거가 있으면 주인보다 내가 고치는 게 더 빠르고 낫다”고 말하는 그를 중심으로 ‘형제보다도 더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다. 이 모임을 오랫동안 해올 수 있었던 것은 확고하게 짜인 규칙들 덕분이다.
“아, 운동만 잘해선 안 되겠구나 싶을 때가 있었어요. 사람이 삐딱해질 수가 있거든요. 한시반클럽만 봐도 강북 팀과 강남 팀이 생각하는 게 달라요. ‘그럼 오늘은 총무가 정한 대로 가자’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멤버의 관혼상제 때는 반드시 100% 참석하게끔 하고 있어요. 그러니 든든하죠. 또 사람마다 속도가 다르잖아요. 우리 모임에는 죽음조와 보험조가 있어요. 죽음조는 엄청 달려요. 그 대신 일찍 가서 보험조가 올 때까지 기다리죠. 느림과 빠름이 있듯이 비우는 사람, 채우는 사람,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삶을 존중해주는 우리끼리의 규칙들이 생성되었어요. 이렇게 가다 보니 모임이 오래갈 수 있었다고 봐요.”
세시봉 멤버로서 받은 사랑 보답하고 싶어
김세환은 한시반클럽 외에도 해동방모임이라는 모임에도 참석하고 있다. 배우이자 연출가인 이해랑 가족들과 김세환의 아버지인 김동원 가족들, 그리고 연출가 윤방일의 가족들이 함께 만나는 모임이다.
연극계 거물들의 모임이 그들의 후손들 모임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참 드물다. 어쩌면 오랫동안 깊이 있게 모이는 사람들과의 꾸준한 관계가 김세환의 인간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 아닐까.
“인생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라면 아버지와 형을 꼽을 수 있겠어요. 아버지는 땅, 형은 기둥이었죠. 음악을 알려준 게 형이었으니. 가수를 안 했으면? 제가 신방과를 졸업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세시봉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나밖에 없어(웃음). 아마 방송국 피디가 됐겠죠.”
세시봉 멤버로서 그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많은 사람이 궁금해할 것이다. 그는 그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그 사랑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조만간 시청 앞 광장에서 무료로 공연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MC 없이 우리만의 공연으로. 이 얘기를 하니 다들 좋다고 했어요. 송창식에게만 말하면 돼요.”
후회되는 일은 없다, 오직 감사할 뿐
그는 매일 열한 시 전에 잠든다고 한다. 그리고 새벽 세 시나 네 시께 일어난다.
“그 새벽이 내 시간이에요. 인터넷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죠. 최고야 최고. 사진, 의상, 스키, 운동, 신문, 유튜브… 다 있어요. 그것만 해도 하루가 바빠요.”
단순히 그가 가수라서가 아니라, 그는 현재의 트렌드와 함께 숨 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가 나이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은 그러한 본능에 가까운 동시대성 덕분일 것이다.
“나를 의식하면 불편해집니다.”
김세환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일관된 지론을 듣다 보니, 그가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는 ‘늙어가는 자신’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 것 아닐까.
“후회되는 거요? 하나도 없어요, 그저 감사할 뿐이지. 편한 대로 가는 게 삶이에요.”
바둑판에 반집은 없지만 반집승, 반집패는 있다. 바둑은 흑이 먼저 둔다. 먼저 두면 유리하다. 흑의 유리함을 상쇄시켜주고 승부의 공정성을 위해 백에게 6.5집을 더해준다. 여기서 0.5집은 무승부를 방지 하기위해 만들어낸 실체가 없는 가공의 집이다. 반상에 없는 반집이 반집승과 반집패의 근거가 된다. 6.5집으로 하는 근거는 이미 두어진 수많은 바둑판을 면밀히 검토해 보니 먼저 두는 흑의 기득권이 6.5집에 해당한다는 통계에서 산출됐다. 백이 이기려면 반상에서 7집은 남겨야 반집승이 되고 흑은 6집이 부족해도 반집승이 된다.
아마추어로서 실력 차가 나는 경우에는 하수에게 흑을 잡게 하고 실력 차 만큼 흑 돌을 몇 개 먼저 놓고 시작한다. 장기판에는 고수가 차(車)나 포(包)를 없앤 상태에서 시작한다. 즉 바둑은 하수가 자기의 군사를 늘린 상태에서 전쟁을 시작하고 장기는 상수가 자기의 군사를 줄인 상태에서 불리함을 안고 시합에 등장한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단수가 달라도 대등하게 시합을 한다. 일류대학을 나온 사람과 삼류대학을 나온 사람이 같은 시험지로 입사시험을 치는 것과 같다.
방송프로에“미생”이라는 연속극이 있었다. 미생은 바둑용어다. 바둑의 돌이 두 집을 완전히 내지 않고 있으면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미생 상태다. 이것을 빗대어 직장인의 애환을 그린 연속극인데 시청자들로부터 아주 호평을 받았다. 바둑돌을 죽이는 수도 많고 살리는 수도 많다. 직장의 다양한 변수들을 바둑용어 미생과 결부시켜 재미를 더했다. 바둑이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말도 인생이란 원래 파란만장하듯 바둑 한판도 변화무쌍하다. 빈곤한 가정에 태어난 사람이 나중에 부자가 된 사람이 있듯이 바둑도 초반 불리함을 딛고 승리한 바득 시합도 무수히 많다. 그래서 바둑격언도 세상 이치와 많이 닮아있다. 예를 들면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의미가 비슷한 아생(芽生)후 살타(殺他)라는 격언이 있다.
바둑을 반상에 없는 반집으로 지면 허망하다. 반대로 반집을 이기면 기쁨이 배가되어 콧노래가 나온다. 인생에 있어서도 아슬아슬하게 차석을 하거나 종이 한 장 차이로 승리를 거머쥐면 슬픔이나 기쁨이 배가 된다. 바둑을 둘 때는 끊임없이 계가를 해야 한다. 지고 있다면 패를 써서라도 뒤집기를 시도해봐야 하고 이기고 있으면 부자 몸조심으로 싸움을 피해야 한다. 인생에 있어서도 불리할 때는 뒤집기나 잡치기 수단으로 용이라도 써봐야 하고 여론이 유리하면 고개를 더 숙이고 말조심 하며 혹 모를 입방아에 조심해야 한다.
바둑판에서 반집을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는 확실히 알기 어렵다. 인생에 있어서도 최종 승자는 안개 속에 가려 있을 때가 많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승자와 패자가 나누어져도 이긴 자와 진자의 대우는 엄청나다. 수 십 수백 수를 두어 결국 반집을 지고나면 나에게 충성한 수많은 바둑돌들은 이제 의미가 없어진다. 국지적으로 여러 전투에 이겨도 최종적으로 전쟁에 지면 진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도 노후가 불행하면 젊어서 영화도 모두 허사로 불행한 인생으로 자리매김 한다.
하수들일수록 반집의 승부는 아주 드물고 고수가 될수록 반집 승패는 많다. 고수는 그만큼 계가가 정확하고 바둑을 치열하게 둔다는 의미다. 인생에 있어서도 정상의 언저리에 포진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관리에 철저하고 매일을 열정적으로 산 사람이다. 비록 정상에 서지는 못했지만 박수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인생은 노후가 행복한 사람이 최종 승리자다. 살아온 하루하루가 모여 노년을 만들어 낸다. 젊음을 낭비하고 노년 성공을 기대하면 안 된다. 바둑 또한 초반 포석과 중반의 세력 싸움을 거쳐 종반의 전투와 집짓기에 이겨야 승자가 된다. 노년이 행복하면 초년고생은 무용담으로 들리고 성공한 사람은 과거가 아무리 비참하였어도 아름답고 자랑스럽게 보인다.
인생과 바둑은 과거를 회상해 보는 복기가 있다. 반집 패배 앞에서 왜 패했는지를 몰라 어리둥절하지만 다시 한 수 한 수 복기해보면 분명 잘못이 있다. 노년이 불행한 사람도 과거를 회상하면 크고 작은 후회할 잘못이 분명 있다. 바둑은 다음 판이 기다리지만 인생은 다음 판이 없다. 두 번 다시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므로 인생한판은 바둑한판보다 너무 가혹하다.
바둑이나 인생에서 언제나 지금이 중요하다. 이미 착수해버린 바둑돌은 이미 지난 과거다. 지금 놓아야 할 바둑돌이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인생 또한 과거는 추억일 뿐이다. 인생에 있어서도 과거는 역사일 뿐이고 언제나 지금이 중요하다. 오늘을 진실 되게 열심히 살아야 면 훗날 반집승에 더 가까워진다는 믿음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