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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길에서 보고 듣다, 완도수목원 숲길
- 봄꽃에 설레어 마음에도 꽃물 번진다. 처처에 흐드러진 벚꽃은 절정을 넘어섰다. 꽃잎마다 흩어져 비처럼 내린다. 만개보다 황홀하게 아롱지는, 저 눈부신 낙화! 남도의 끝자락 완도 땅으로 내려가는 내내 벚나무 꽃비에 가슴이 아렸다. 한나절을 달려 내려간 길 끝엔 완도수목원. 칠칠한 나무들, 울울한 숲이 여기에 있다. 사철 푸른 야생의 수해(樹海)다. 천연의 상록 난대림이 산자락을 뒤덮었다. 붉가시나무, 동백나무, 완도호랑가시나무, 구실잣밤나무, 황칠나무, 후박나무, 감탕나무, 녹나무 등 770여 종의 난대성 목·초본과 희귀식물이 자생한다. 환호할 만한 종 다양성과 놀랄 만한 광활한 규모를 과시하며 씨억씨억 거센 숨을 쉬는 삼림이다. 산길로 들어서 초록 숲에 풍덩 빠진다. 숲길을 노니는 발걸음은 노루처럼 가뿐하다. 잡다한 소음과 미세먼지가 들끓는 도시에서의 보행과는 다르다. 인위와 허영이 난무하는 도회의 거리는 개운한 활보를 허용하지 않는다. 고뇌에 사로잡힌 카프카처럼 도시에서 사람들은 흔히 소심한 행보를 하지 않던가. 숲에서는 다르다. 깊은 근원으로 침잠한 숲 사이로 뻗은 오솔길이 발길을 보듬어 유유한 지경으로 인도한다. 숲길을 걷기란 그래서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탈출처럼 자유롭다. 이럴 때 의식은 자명종처럼 깨어나고 오감이 열린다. 온몸으로 말을 걸어오는 숲의 언어에 귀가 민감해진다. 나무를 흔드는 바람소리와 숲속의 공인된 가수인 산새들의 악곡이 귓속으로 스민다. 이것들은 숲과의 협연의 산물이다. 유심히 귀를 기울이는 사람 역시 순간적으로 숲의 식솔이 된다. 물속 같은 적막이나 사무치는 고요마저 숲의 언어다. 이 묵묵한 숲의 좌정 앞에서 번잡한 혀처럼 날름거리던 욕망이 비로소 순해진다. 숲길을 가만히 걷는 일은 그래서 오롯한 순례다. 내밀하게 전개되는, 조촐하되 순수한 향연이다. 완도수목원의 무진장한 상록 숲은 한때 황무지에 가까웠다. 지난 1950년대까지만 해도 남벌과 도벌로 헐벗기어 황량했다. 재질이 조밀해 숯 재료로 널리 알려졌던 붉가시나무와 동백나무 군락은 한결 자심한 수난을 당했다. 수목원 곳곳에 발달한 ‘맹아림(萌芽林)’은 당시의 벌채가 남긴 상흔이자 재생의 현장이다. 맹아림? 밑동이 잘려나간 그루터기에서 새로 돋은 움싹들이 자라난, 여럿의 줄기로 이루어진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을 말한다. 생존의 고역은 사람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나무와 숲도 때로 부당하게 찢기고 스러진다만, 불굴의 인간처럼 용을 써 기어이 회생한다. 숲길에 상큼한 향이 감돈다. 나무들이 내뿜는 피톤치드 향기렷다. 피톤치드는 갖가지 균(菌)들의 내침으로 야기된 상처나 고난을 다스리기 위해 나무가 분비하는 휘발성 물질이다. 아픈 나무가 풍기는 향기, 우리는 그 피톤치드를 마시고 심신을 치유한다. 사람이 나무의 숨을 마시고, 나무가 사람의 숨을 마셔 서로 재미를 본다면 그건 공정거래이겠지.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주기만 하고 받는 게 없음에도 마냥 태연한 게 숲의 천성이다. 나무도 숲도, 사람과 멀면 멀수록 안전하고 온전하다. 사람의 속세는 아수라장. 나무들의 마을, 숲 안의 생명들만 격의 없이 어울려 자애롭다. 근원을 헤아리자면 나무와 사람은 다를 게 없다. 나무의 몸에 흐르는 수액과 사람의 혈관을 달리는 피가 서로 무엇으로 다르단 말인가. 나무를 남으로 알았던 시절엔 꽃이 피건, 무참히 낙엽 지건, 폭설에 가지가 우두둑 부러지건, 사시사철 보기에 좋았다. 나무가 남이 아님을 알고 난 뒤로는 꽃 피우는 진통에, 낙엽 떨구는 우수에, 겨울나기의 고역에 한결 마음이 쓰였다. 내 안의 나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나무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무들의 도가니를, 숲길을, 느릿느릿 천천히 걷는 행위란, 그렇기에 가상한 명상이자 성찰에 가깝다. 완도 앞바다를 건너온 바람일까. 하오의 숲은 세찬 바람을 품으며 한껏 부풀어 오른다. 등을 미는 바람 따라 들어선 ‘푸른 까끔길’은 어둑한 숲길이다. 기차게 무성한 동백나무 군락이 하늘을 가려서. 태초 이전처럼 심원한 적막에 휩싸인 동백 숲은 그러나 밝다. 순결한 몸을 붉게 연 동백꽃들이 초롱처럼 환해서다. 매달린 꽃도, 통째 떨어져 뒹구는 꽃도 성(聖)의 이미지로 다가와 내 안의 진흙탕을 헹군다. 향화(香火) 아니면 촛불 보살이다, 저 4월의 동백꽃! 탐방 Tip 완도수목원은 2000여 ha(약 600만 평)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난대림 자생지로 공립수목원이다. 숲길의 총길이는 약 94km. 한나절을 머물며 숲길 걷기와 삼림욕을 즐기기에 적격이다. 산림전시관, 아열대온실, 방향식물원, 수생식물원 탐방도 즐겁다. 개원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 2018-04-27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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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탠딩 뮤지컬 ‘1946 화순’, 화순 탄광촌 사건을 통해 4·3 사건을 기억하다
- 제주에서 4·3 사건이 발생한 지 올해로 70년이 됐다. 이를 맞아 제주시는 2018년을 제주 방문의 해로 지정하고 다양한 문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스탠딩뮤지컬 ‘1946 화순’(극단 경험과 상상/작·연출 류성)의 제주 초청 공연이다. 1946년 전라남도 화순 탄광촌에서 벌어진 사건을 재조명한 작품으로 4·3 사건과 흡사한 부분이 매우 많다. 광복 이후 미군정 치하에서 벌어진 양민 학살. 그로 인해 가족을 잃은 이들의 섬 제주. 공연장 객석에서 간간이 눈물 훔치는 소리가 들린다. 70년 세월이 지났어도 슬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한민국 건국 역사에서 잊어서는 안 될 상처 2월 말, 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 주최로 제주특별자치도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스탠딩뮤지컬 ‘1946 화순’이 공연됐다. 이는 해방 이후 우리나라 4대 탄광 중 한 곳이던 화순탄광에서 실제 있었던 일을 조명한 역사 팩션 드라마다. 탄광을 관리하던 일본군이 퇴각하고 탄광 노동자들은 자치위원회를 결성해 탄광을 운영하고 있었다. 일본 소유였던 탄광을 관리하기 위해 미군정에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들은 자치위원회를 불법으로 규정 해산시키기에 이른다. 미군정이 탄광을 관리하자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식량난에 시달린다. 미군정은 탄광 소장을 교체하고 노조를 위협해 노조 간부 3명과 100여 명의 노동자를 해고한다.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은 광주에서 개최된 8·15 1주기 기념식 참석차 길을 나선 화순탄광 노동자들을 탱크와 비행기를 동원해 진압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바로 ‘1946 화순’이다. 제주 4·3 사건의 축소판이자 1년 앞서 일어난 화순탄광 사건을 통해 제주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고 알리는 자리가 됐다. 가슴 뜨거웠던 100분, 감동으로 하나 되다 하루 2회 공연된 ‘1946 화순’은 말 그대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에서 나눠주는 배지와 공연 포스터를 받아가는 등 제주 시민들은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관객이 꽉 들어차고 공연이 시작되자 일제히 조용해진다. 노래 사이사이 박수가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눈물을 훔치는 소리도 새어나온다. 공연 내내 여전히 아픈 기억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잊을 수 없는 그때로 돌아가는 기분이지 않았을까. 무대 위에 선 모든 배우가 주인공 2015년 9월 초연된 ‘1946 화순’은 배우와 스태프의 재능 기부로 탄생해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무대에 코러스로 참여하고 있는 배우의 대부분이 대학로 연극계 주역들이다. 이들의 개런티만 따져도 금액이 상당하지만 좋은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뜻에서 큰 대가 없이 제주 공연에 참여했다고. ‘1946 화순’은 2016년 ‘화순탄광사건 70주년’을 맞이해 광주·전남 3000여 명의 노동자를 위한 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광화문 광장 대규모 공연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재조명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작품의 홍보는 화순을 본 관객들이 담당했다. 빠른 입소문으로 공연 초 ‘전 회, 전 석 초과 매진’을 기록했고 관객 요청으로 앙코르 공연을 이어나갔다. 창작 초연 최초로 ‘유료객석 점유율 120%’, 소극장 뮤지컬 사상 최대 규모인 60여 명의 배우 참여라는 경이로운 행보를 보여준 ‘1946 화순’은 연극인들의 순수가 살아있는 한 감동을 주며 오래가는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기억해야 한다 ‘제주 4·3 사건’ 제주라는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이 제주 4·3 사건이다. 이 사건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빨갱이 폭동으로 간주돼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됐다. 1947년에 발생해 1년여 동안 벌어진 제주 4·3 사건은 어떤 설명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최악의 양민학살 사건이다. 4·3 사건에 관한 자료를 보고 이해한 결론이 그렇다. 한 살 어린아이와 노인까지 잡아 죽였다는 증언도 있다. 당시 30만 명도 안 되는 제주 땅에서 3만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제주 사람들과 만나보면 어김없이 나오는 4·3 사건 이야기. 그들의 슬픔은 해가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가시지 않을 것 같다. 제주여행을 준비하는 독자가 있다면 4·3 평화공원에 가보기를 권한다. 올해 제주 방문의 해는 ‘4·3을 기억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따뜻하게 반기는 제주 사람들의 웃음 뒤에는 가족을 잃은 상처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 2018-04-03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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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도소에 가다
- 전남 장흥은 남쪽 끝머리쯤에 위치해 있어서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막상 떠나보니 일일생활권의 나라라는 것을 실감한다. 그렇지만 장흥은 당일로 다녀오기에는 너무나도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넘치는 곳이었다. 그 땅에 남아있는 예술혼과 사람들의 진득한 인정이 더 머물고 싶게 하던 곳이었다. 가끔 막연히 생각만 하던 곳을 가게 되면 더 애착을 가지고 눈여겨보게 된다. 당연히 자기만의 여행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꼭 보고 싶었던 것과 궁금한 것, 그리고 먹고 싶은 것을 우연처럼 잘도 찾아낸다. 그렇게 기분 좋은 기대감을 갖고 길을 떠나게 된다. 장흥이 그랬다. 장흥 산하의 아름다운 풍경과 역사적인 옛이야기들이 잘 알려진 곳들은 인터넷 검색만 해도 누구나 쉽게 여러 군데를 찾아서 갈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엔 아직 덜 알려지고 조금은 독특한 이곳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묘한 두려움과 설렘으로 들어가 본 는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장흥교도소가 용산면 어서리 마을 자울재 아래로 새롭게 건립되어 이전했다. 1975년부터 2015년까지 죄수들의 수감시설이었던 이전의 건물이 용도가 폐지된 것이다. 그래서 남겨진 텅 빈 교도소가 새롭게 재탄생되려는 계획 중에 있었다. 지금은 그곳이 국유재산으로 속해있는데 아직은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이곳에 전남소방본부 청사와 한약진흥재단 시설을 유치한다. 그리고 뉴콘텐츠 플랫폼 전시관, 세계 속 한류 문학관, 생활 속 갤러리 등의 복합 문화 예술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곧 개방되면 지역경제의 한 몫을 하게 될 것이다. 특히 근래엔 영화나 드라마 속의 장소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이전과 달리 최근엔 교도소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를 자주 볼 수 있다. 배우 지성이 열연했던 드라마 에 등장하던 교도소가 바로 이 곳이다. 재소자들이 살벌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머물던 방과 더 어두웠던 징벌방이 그대로 있다. 기술을 익히는 작업실과 바깥바람을 쐴 수 있는 운동장과 수용자들끼리 은밀한 거래를 하던 벤치와 계단에 앉아보기도 한다. 건물 높이 올라 감시탑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깥세상은 별 일 없다는 듯이 들판은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 학교도 보인다. 교도소 담 밖으로는 유명한 장흥 미나리 논이 있다. 드라마 피고인에서 지성이 분노의 탈출을 하던 들판이다. 외에도 , 한석규가 나오는 영화 , 최근의 까지 영화와 드라마 배경의 촬영 명소로 부각되었다. 촬영 기간 동안에 죄수복을 입은 많은 연기자들이 장흥 시내를 활보하는 진기한 모습을 보기도 했다고 한다. 긴장감이 동반되는 공간이 소위 깜드(깜방 드라마)로 먼저 이름을 알린 것이다. 이렇게 옛 장흥교도소가 문화와 예술로 탈바꿈하여 주민들은 물론이고 찾아오는 여행자들과 소통하는 공간이 된다. 어두웠던 분위기였던 장흥교도소가 사람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채워줄 멋진 공간으로 변신하는 중이다.
- 2018-02-26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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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트라 마라토너처럼 살고 싶다
-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한다. 육상 중에서 가장 긴 거리를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 인생의 굽이굽이 한평생과 같다는 말로 이해한다. 인생에 있어서 초년, 중년, 말년이 있다면 마라톤에도 초반전 중반전을 거쳐 마지막 골인지점의 최후의 승부처가 있다. 초반이나 중반에 선두에 서지 못해도 힘을 비축하였다가 마지막 승부처에서 다른 선수를 따돌리고 먼저 들어오는 선수가 우승자다. 인생에 있어서도 노년의 삶이 행복해야 ‘세상구경 잘하고 돌아간다’라고 말할 자격이 된다. 부모 잘 만나 잘 먹고 잘살았거나 중년에 떵떵거리며 거들먹거려도 노년에 아무도 찾지 않는 지하 단칸방에서 독거노인으로 지내다 세상을 하직한다면 인생을 잘 살았다고 말하지 못한다. 마라톤은 긴 거리지만 결국은 속도경기다. 누가 전체의 거리를 빠른 시간에 주파했느냐가 관건이다. 마라톤에서 우승을 하려면 옆 사람과 이야기 하고 주로의 꽃구경을 하다가는 좋은 성적을 낼 수가 없다. 입에서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며 1초를 아껴야 한다. 사람도 살면서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이 어느 길을 가야할지 목표 없이 방황하거나 엉뚱한 샛길로 빠지거나 어두운 길로 들어서면 노년의 종착지 부근의 삶은 당연히 비극이 기다린다. 그러나 이제는 100세 시대다. 혼자 만 잘 달려 60세에 일등을 하고 은퇴를 해도 후반전의 40년이 남아있다. 애시 당초부터 죽자 살자 그렇게 빨리 달릴 필요가 없었다. 100년의 거리를 알아차리고 천천히 즐겁게 좌우를 살피고 남을 도와주며 달렸으면 더 여유로운 삶을 보낼 수 있었다. 이제는 100세 시대에 혼자 빨리만 달려서는 외로운 인생이 된다. 마라톤보다 더 먼 거리를 달리는 경기가 울트라 마라톤이다. 마라톤이 속도경기라면 울트라마라톤은 완주경기다. 오직 정해진 거리의 완주에 목적이 있으니 시합이나 경기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올림픽 경기에도 없다. 우리나라 울트라 마라톤 중 최장의 거리는 전라남도 해남의 땅 끝 마을에서 최북단인 강원도 고성까지 무려 622km를 달리는 종단코스가 있고 강화도에서 강원도 강릉까지 308km를 주파해야하는 횡단코스도 있다. 하지만 하루에 끝을 볼 수 있는 100km 울트라 마라톤이 일반적이다. 속도경기가 아닌 완주경기인 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다. 옆에서 함께 달리는 사람이 경쟁자가 아니고 동반자다. 옆 사람이 지치거나 다리에 쥐가 나면 부축해주고 마사지도 해주며 함께 달린다. 긴 시간 달리면서 세상사는 이야기도 함께 나눈다. 주로에서 함께 밥도 먹는다. 마라톤경기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휴먼 스토리가 펼쳐진다. 필자는 마라톤 경기에 100여회 출전했다. 멀리 제주도 마라톤 대회도 갔다. 100km 울트라 마라톤을 세 번이나 달렸다. “혼자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말의 실천 장이 바로 울트라 마라톤이다. 울트라 마라톤은 선수보호를 위해 차량통행이 뜸한 한밤에 열린다. 별이 총총한 밤에 소수의 마라토너가 배낭에 음료수와 약간의 먹을거리를 짊어지고 느리게 달리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삶이 보인다. 소년출세가 인생에서 경계해야할 일인 것처럼 빠른 주법은 울트라마라톤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느리게 그러나 쉼 없이 달려야 한다. 빠른 속도보다는 방향이 우선이다. 방향이 맞으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한다. 100세 시대에 가야 할 방향이 정해지면 더불어 사는 이웃과 친척친지들과 호흡을 맞춰야 인생이 즐겁다, 서로 도와가며 달리는 울트라 마라톤이야 말로 100세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야하는 삶의 방법이다.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숨어서 소고기 구어 먹는다고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함께 해야 행복이다.
- 2018-02-16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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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산골로 귀촌한 윤정현 신부, 욕심일랑 산 아래 내려놓고 검박하게 살리라
- 산중에 눈이 내린다. 폭설이다. 천지가 마주 붙어 눈보라에 휘감긴다. 어렵사리 차를 몰아 찾아든 산간 고샅엔 오두막 한 채. 대문도 울도 없다. 사람이 살 만한 최소치의 사이즈를 구현한 이 갸륵한 건물은 원시적이거나 전위적이다. 한눈에 집주인의 의도가 짚이는 집이다. 욕심일랑 산 아래 고이 내려놓고 검박하게 살리라, 그런 내심이 읽힌다. 대한성공회 윤정현 신부(64)의 집이다. 그가 이 산중으로 귀촌한 건 3년 전. 귀촌 초기, 윤 신부는 자그만 중고 컨테이너를 산기슭에 앉혀 거기에 살았다. 그러나 불편이 컸단다. 여름엔 찜통처럼 더웠고, 겨울엔 냉장고처럼 차가워서였다. 그래 용한 꾀를 냈다. 컨테이너 뒷면에 흙벽을 쌓고 지붕을 얹은 두 평 반짜리 골방 하나를 지어 붙였던 것. 말하자면 철제 건조물과 흙집이 한 몸으로 붙은 복합건축이다. 이 흔치 않은 오두막 한 채로 그의 주거는 완성에 도달했다. 더 이상 늘리거나 꾸밀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일종의 절경이 펼쳐진다. 컨테이너 공간은 서재로, 골방은 거실 겸 침실로 쓰는데, 그저 소소한 생활도구들이 놓여 있을 뿐이다. 책과 옷가지들, 다구와 식기, 전기장판과 이불 한 채. 이게 그가 깃들어 사는 집 내부를 이룬 사물의 거의 전부다. 그러니 절경!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한 사람의 지향과 실천이 완연히 비친다. 자칫 욕망 쪽으로 흘러가는 머리를 쓰는 대신 몸을 주로 써 수행을 닮은 생활을 하자는 게 그의 귀촌 푯대. 쾌활한 언사를 구사하는 이 단구(短軀)의 사제는 흙집을 혼자 지었다. 한 달 여에 걸친 신역으로. “주변에 널린 돌과 흙을 퍼 나르는 걸로 일에 착수했어요. 비용은 별로 들질 않습디다. 창문과 출입문을 가져오며 고물상에 치른 돈이 36만 원, 장작난로 구입에 30만 원, 시멘트나 각목, 연장, 못을 사는 데 들어간 얼마간의 비용 등, 총 80만 원을 들여 지었어요. 흙집의 탁월한 단열 효과, 그거 참 놀랍더라고요. 초기의 불편이 일거에 해결됐죠. 화장실은 없지만 삽 한 자루 들고 숲으로 들어가면 그만이에요.(웃음) 욕실도 없지만 가끔 읍내 목욕탕엘 가서 때를 벗기죠. 식수는 계곡물을 끌어다 탱크에 받아 쓰고.” 그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을 졸업 뒤 성공회대학교 사목신학연구원에서 사제 양성 과정을 밟아 1987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여러 곳의 교회에서 사목활동을 했으며, 영국 버밍엄대학교로 유학을 가 신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귀촌 직전까진 청주 수동교회 관할 사제직을 맡았다. 성공회 사제의 정년은 65세. 그는 정년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귀촌을 위한 휴직을 신청했으며, 이것으로 교회의 일은 사실상 마감되었다. 성공회 사제는 은퇴 뒤 자력으로 여생을 꾸려야 한다. 연금이라는 게 없으며, 거처도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예순 나이에 접어들 즈음 그의 마음은 자연으로 쏠렸다. 이미 손에 쥔 게 별로 없는 삶이었지만 더욱 소박한 쪽으로 생활을 바꾸고 싶었더란다. 해서, 득달같이 나서 귀촌을 단행했다.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면 행복하다 “평생 하느님을 섬기며 살고 있지만 제게는 정신의 스승이 한 분 계십니다. 다석(多夕) 류영모 선생(1981년 작고)이죠.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에 능통했던 다석 선생께선 기독교와 불교, 유교와 도교를 조화하고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웅대한 사상체계를 정립했어요. 저는 다석의 혜안을 빌려 서구 신학적 관점이 아닌 동양 신학적 관점으로 성서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종교와 종파와 교리를 뛰어넘어,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다석 사상을 공부하면서였죠.” “박사 논문 주제도 다석사상이죠? 다석은 정인보, 이광수와 함께 194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통했죠.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다 은퇴한 뒤에는 농사를 지으며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유 신부님의 귀촌은 다석의 행장에 영향을 받은 선택?” “삶을 돌아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저를 이끌었다는 걸 알겠습디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뭔가의 힘 말이죠. 순리나 무위자연의 흐름일 수도 있겠지. 다석 선생의 가르침 역시 길잡이였죠. 선생께선 농사를 자주 권장했어요. 농사짓는 사람이 예수라는 말도 늘 했어요.” “농사의 정신을, 땅에 땀을 쏟는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말한 거겠죠?” “그렇죠. 귀촌을 해 몸을 쓰는 노동을 하며 이거 참 좋구나, 하는 느낌을 자주 경험합니다. 우선은 몸이 건강해져요. 정신도 맑아지고, 영성에 대한 각성도 하게 돼요. 현재 닭과 산양을 치고, 소규모의 농사를 짓지만 향후 영성공동체랄까, 자율공동체로 가꿔나갈 참이에요. 이미 집 둘레의 임야 1만 평을 확보해뒀어요. 저의 뜻에 공감한 산주(山主)께서 좋은 가격에 땅을 넘겨준 덕분이죠.” “자율공동체엔 어떤 사람들이 모이죠?” “누구나 다! 내 안의 영성을 일깨울 실천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영성공동체의 뜻에 동감하는 사람이라면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든 함께 살아가야죠. 공동체 참여자는 이곳의 너른 산림 한 곳에 농막이나 움집을 짓고, 공동 생산을 해 함께 나누는 생활을 하게 될 겁니다.” 브래드 피트가 열연한 영화 ‘티벳에서의 7년’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극장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인부들이 지렁이가 나오자 공사를 즉각 중단하고 정성스레 지렁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준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감성이란 아마도 영성적 에너지일 게다. 생명 모두에 깃든 존귀함을 의식하는 자는 이미 자신 안의 영성을 일깨운 존재일 테지. 그러나 때 묻히지 않고 생존할 방법이 있던가. 살길을 찾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서야 안 되겠지만, 내 안의 영성을 유리그릇처럼 투명하게 닦는 일은 우리네의 관심사 자체가 못된다. 산야에서, 야생에서 담백한 생활을 지속할 경우엔 문제가 달라지나? “영성생활이란 피안의 세계로 가자는 게 아닙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사는 일에서 벗어나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자는 것, 상생하자는 것, 개인의 자족만이 아니라 사회변혁까지도 실천하며 살아가자는 것, 그런 걸 위해서는 영성 회복이 필요하다 보는 거예요. 모두들 물신주의에 사로잡혀 무한경쟁을 벌이는 세태에서 과연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빈부 양극화만 날로 심해지는 것을…. 저는 말이죠, 적게 가지고 적게 쓰는 쪽으로 마음을 두는 게 훨씬 현명하다고 봐요. 이기심에서 벗어나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키우는 게 행복과 만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봐요. 초목들의 동향과 동물들의 삶을 통해 세상에 적용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야생이란, 일테면 교실 같은 곳이죠.” 세상의 광기와 아귀다툼이 침범 못할 적막한 산중. 거기에 오두막을 짓고 홀로 들어앉았으니 완전한 고립 속에 있는 것 같지만 그의 희망과 실천은 사방으로 활달하게 열려 있다.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목적을 쾌락 추구에 두었다. 욕망을 채우는 쾌락이 아니라, 욕망을 비우는, 비워서 마음의 고통을 몰아내는, 마침내 평안과 안락의 상태에 접어들어 단순 담박한 생활을 하는 게 에피쿠로스의 ‘쾌락’이다. 윤 신부가 추진하는 공동체란 어쩌면 ‘에피쿠로스 스쿨’이겠지. 육체와 욕망,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서 벗어난 삶이 행복을 데려다준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인생은 한바탕의 ‘소풍’ 집 밖엔 한파가 맵차지만 골방은 훈훈하다. 난로 속에서 관솔 내음을 솔솔 풍기며 타는 소나무 장작불이 열을 뿜어서다. 창문가엔 벚꽃 잎처럼 분분히 내리는 눈 풍경. 집 뒤편 언덕배기 닭장에선 오골계들이 세찬 눈발을 피하고 있고, 산마루에선 산양들이 전설처럼 눈을 흠뻑 뒤집어쓴 채 양양하게 뛰논다. 윤 신부는 닭들에게서 계란을 얻는다. 산양의 젖을 짜 우유 대용으로 먹는다. 자급자족이 그의 목표다. 산 아래 농부들과 물물교환을 통해 부족한 양식은 보충해나갈 계획이다. “점차 농사 규모를 키우고, 작목 수효도 늘려나갈 작정이에요. 귀촌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그간에 터를 다듬고, 연못을 만들어 연(蓮)을 심거나 잉어를 넣어 길러왔어요. 이 산림엔 원래 공동묘지가 있었어요. 그걸 용케도 거의 다 이장시켰죠. 무덤이 많아 산 아래 토착민들조차 무섭다며 아예 접근하길 꺼린 땅이었는데, 보시다시피 이젠 달라졌죠. 수시로 드나들며 찬탄합니다.” “사제란 세상에 빛을 보태는 존재겠죠. 그런데 말이죠, 성직자들은 늘 옳은 얘기, 반듯한 말만 하지만 정작 실천과는 먼 경우가 많다는 게 중론이에요. 동화작가 고(故) 권정생 선생은 본인이 크리스천이었지만 차라리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나은 사회가 됐을 거라는 얘길 했죠.” “예수님이 가르친 핵심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을 네 몸처럼 섬겨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요약하면 그 두 가지예요. 그러나 종교인들의 노력이 부족해요. 수행을 일삼는 수도원에서조차 이기심의 충돌이 잦아요.” 성공회 사제에게 결혼은 금기가 아니다. 윤 신부의 처자는 먼 곳에 따로 산다. 아내는 김포에서 미혼모의 자녀들을 돌보는 쉼터를 운영한다. 아내가 곁에 없으니 주야간에 외기러기처럼 외로울 것 같지만, 서로 자유롭게 선택한 길을 존중하며 지내는 것으로 사랑을 확인한다. “인생이란 한바탕의 소풍이에요. 소풍을 잘 즐기는 나그네의 짐은 가벼워요. 이전의 편리를 다 버린 귀촌생활의 불편이 사실 한둘이 아니지만, 거꾸로 사는 인생 같지만, 자유로운 나그네로 살기 위해선 세태를 거스를 수밖에 없어요. 세태의 물살에 무기력하게 떠밀린 채 비문명적 야생생활을 누리거나 무소유를 실천하기란 불가능하니까.” “인생은 육십부터라고들 하죠. 이건 맞는 말일까?” “중생(重生), 즉 영적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계기나 동기부여가 되는 구호이니 썩 긍정적인 명제가 아닐까.” “돈이나 욕망을 앞세우지 않고서도 행복을 누릴 방도를 슬슬 찾기 시작하는 게 시니어죠. 무소유까지야 어렵겠고, 각자 주어진 현실 여건을 어떻게 활용하는 게 좋다고 보나요?” “돈·권력·명예를 나만을 위해 쓰지 않고 남도 덩달아 이로운 쪽으로 사용하는 게 좋겠죠. 돈이란 잘 쓰면 사랑이 되고,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나누면 평화의 초석이 되죠. 명예 역시 정의롭게 사용하면 상생의 힘이 될 테고.” “당신은 사제예요. 천국은 어떤 곳이죠? 사후엔 무엇이 오죠?” “마음을 비우고 애착과 집착을 다 놓을 수 있다면 죽음이 두려울 리 없겠죠. 모든 하루를 최고의 날로 산다면, 내일 죽어도 진정 여한이 없을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 천국을 사는 겁니다. 사후?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 누구도 다녀온 사람이 없으니.” 집착도 후회도 슬픔도 없는 인생이라면 이미 성자이겠지. 그에겐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과 같겠지. 그러나 과욕과 과속으로 어긋나기 쉬운 게 오늘 하루. 눈 쏟아지는 하오의 귀로에 어둠살이 내린다. 삶을 돌아보면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저를 이끌었다는 걸 알겠습디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뭔가의 힘 말이죠.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8-02-0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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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갈래 물결이 일렁이는 나루’ 삼랑진
- 세 개의 강이 만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삼랑진(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이다. 어린 시절 인근 지역에서 자랐어도 별생각 없이 다녔는데 삼랑진이라는 이름에 이런 아름다운 뜻이 있는 줄 몰랐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부산 구포역에서 대구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갈 때마다 삼랑진역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행정구역상 밀양 내에 있는 읍이지만 당시는 밀양역보다 더 크고 번성했던 곳이 삼랑진이었다. 삼랑진 옛이야기 일제강점기부터 경부고속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삼랑진은 매우 화려하고 번성한 곳이었다. 낙동강을 통해 일본 상선이 삼랑진 포구까지 왔다.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하다 보니, 삼랑진 지역 중심엔 일본인들 관사가 많이 지어져 현재에도 제법 남아 있다. 문화재보존정책 때문에 개·보수를 하지 못해 지금은 아주 초라하고 앙상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데 언젠가는 이 지역의 근대화 문물들은 보수·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삼랑진장에 가자! 삼랑진장은 4일과 9일에 들어선다. 삼랑진이 쇠퇴하면서 시장의 규모도 작아지고 사람 수도 줄었다. 최근엔 마트까지 생기면서 시골 장날의 분위기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삼랑진장은 인근의 김해시 생림면 사람들과 삼랑진 지역의 연세 많으신 분들이 주로 이용한다. 어릴 적부터 발길이 닿은 곳이라 마트를 이용하는 것보다 편해 장을 이용한단다. 어르신들은 마트의 물건보다 찬거리 등을 푼돈으로 흥정하며 살 수 있는 삼랑진장을 좋아한다. 가는 날이 장날 날씨가 매우 추웠다. 삼랑진에는 강바람과 산바람이 아주 매섭게 몰아친다. 도시처럼 바람을 막아줄 건물들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차에서 내려 삼랑진 장터를 두어 번 왔다 갔다 하면서 장날의 분위기를 느껴봤다. 큰 카메라를 들고 외지인이 이리저리 다니니, 상인들 모두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본다. 오방떡을 구우시는 할머니가 “오늘 방송국에서 촬영하러 왔능교?” 하면서 말을 걸어왔다. 반갑고 기뻐서 “네~” 하면서 이런저런 말을 더 붙였다. 잡지에 넣을 사진 촬영을 한다고 설명하며 할머니 모습을 찍었다. “찍지 마!” 하면서도 포즈를 잘 잡아주셨다. 추운 날 꽁꽁 얼은 생선을 파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찍으려 하니 할머니가 욕을 하신다. 그래도 상부상조하는 의미에서 4마리에 1만 원 하는 고등어를 사니까, 덤으로 작은 놈 한 마리를 끼워주신다. 고등어를 팔아주니 사진을 찍어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장터에서 파는 생선들은 냉장 시설이 없기 때문에 사계절 내내 냉동 생선을 녹여 손질해 판다. 이 추운 날 장갑도 안 끼고 맨손으로 손질을 하신다. “할머니 장갑 좀 끼시죠?” 하니 “장갑 끼면 잘 안 된다” 하신다. 조용한 시골 장터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있다면 음악 테이프와 CD를 판매하는 트럭이다. 하루 종일 상인들과 손님들에게 최신 트로트를 들려준다. 시대가 변하면서 트로트 노래들도 USB용으로 나온다. 뭔가 하고 둘러보는 사람은 있지만 구입하지는 않는다. 나중에 보니, 물건 파는 사람도 차 안에 들어가 있다. 날씨도 춥고 사람들도 많이 안 다니니 일찌감치 포기한 모양이다. 장터 사람들 삼랑진장에서 파는 물건들은 젊은 사람에게는 좀 생소한 것들이다. 주로 뜨거운 물에 우려먹는 뿌리 식품이나 보신용 식품이 많다. 우엉과 말린 연근, 둥굴레, 돼지감자 같은 뿌리 식품이 많다. 장날의 자리에는 권리금과 자릿세도 있다 한다. 보통 가게 앞에서 장사를 할 경우엔 상권의 성향과 위치에 따라 자릿세 차이가 있다. 삼랑진장에서 20년 동안 장사를 해온 한 분은 자릿세를 내기 싫어 장터 가장 끝 쪽에 자리를 펴고 물건을 판다. 추운 날이라 구멍 난 깡통 장작불에 손을 녹이며 요기를 하기 위해 고구마 몇 개를 넣어 굽고 있다. 그분에게 연근이랑 우엉, 돼지감자를 1만 원어치씩 구입하고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날씨도 춥고 심심했는데 20분 동안 말동무도 되어주셨다. 해는 점점 저물어가고, 오늘 펼친 물건들 재고가 많이 쌓였는지 상인들은 팔지 못한 물건들이 서로에게 필요하면 물물교환을 한다. 불과 몇십 분 전에 1만2000원에 팔던 김천촌닭을 5000원에 사가라고 한다. 삼랑진은 시내보다 더 빨리 어두워진다. 하루 동안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 사람들의 흔적이 아직도 잔영(殘影)첨럼 남아 있다.
- 2018-02-02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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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세에 두려운 것
- 노인이 돌아가시면 동네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처럼 지혜의 보고가 사라졌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살아있을 때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필자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먼저 살아 본 인생선배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반면교사로 삼는 것을 좋아한다. 올해 86세인 ‘이00’ 할아버지는 필자와 치매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함께 하시는 분이다. 치매환자가 대부분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어리다. 형님이 동생들을 케어 하는 형상이다. 이분은 6·25전쟁 때 함경남도에서 피난을 내려왔는데 그때 나이가 19세였다고 한다. 19세라는 한창 때에 피난을 오다보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산처럼 쌓여있다. 명함에 함경남도 중앙도민회 지문위원이라는 직함을 새겨서 다니신다. 치매봉사활동을 열심히 하시는 이유도 건강관리에 있다며 고향땅을 밟아 보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가 없다고 하신다. 고향 사랑이 워낙 크다보니 고향 사람이 큰일을 당하면 부조금이나 축의금으로 몇 십 만원씩을 낸다. 그 바람에 아내의 눈 밖에 나서 매월 600만 원씩 들어오는 건물 가게세의 처분권도 아내 손으로 넘어갔다. 올해를 마감하는 치매센터 월례회에 정신과의사인 센터장이 참석한 가운데 각자 한해를 보내는 소감 한마디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00’ 할아버지가 몸이 늙어감에 대해 안타까운 말씀을 하시는데 손자 손녀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 참 답답하다고 하신다. 손자 손녀를 보면 이름을 부르고 싶은데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아 ‘그래 너 왔구나!’라고만 말해야 할 때 아! 나도 늙어가는구나 혹 나도 치매가 아닌가하고 겁이 덜컥 난다고 말씀하신다.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가 자기 이름을 잊어버린데 대해 섭섭해 하는 눈치가 보일 때는 미안하다는 말씀도 하신다. 정신과 의사인 센터장이 대답으로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절대 치매가 아니며 그 연세에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고 위로의 말씀을 했다. 그리고 그럴 때를 대비해서 끊임없이 메모하고 적어야 하는 점을 강조 했다. 치매전문가이며 정신과 의사가 말씀 하시니 맞는 말이다. 노인의 필수품으로 메모장이 각광받아야 한다. 필자는 ‘이00’ 할아버지께 이렇게 말씀 드렸다. ‘제 어머니도 여럿 자식을 두었는데 급하게 부를 때는 자식들 이름을 바꾸어 부르고는 아차 하고 다시 고쳐 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손자 손녀에게 할아버지 상태를 미리 말씀해 두면 어떨까요. 즉 “할아버지가 이제 나이가 많아 깜빡 할 때가 있으니 앞으로는 할아버지를 보면 ’할아버지 저 00이가 왔어요’하고 미리 이름을 말하게 하면 해결될 것 같습니다” 하고 말씀 드렸다. 친자식의 이름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데 한 다리가 먼 손자손녀의 이름을 다 기억한다는 것은 노인으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노인과 대화를 나눌 때 어른을 공경한다고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지 말고 기억이 가물거리는 부분에서 추임새처럼 한마디씩 거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 2017-12-26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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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왜 자꾸 따라 하는가
- 일전에 평창 동계올림픽 기념 패딩 구매 파동이 일어났다. 일명 ‘평창 롱패딩’으로 불리기도 하는 물건인데 이를 사기 위해 전날부터 길바닥에서 자는 소동까지 벌어진 것이다. 물론 한정판이고 일종의 기념품에 해당하기 때문에 사고 싶은 심리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이다. 도시에 롱패딩이 넘쳐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평창 롱패딩이 새로운 유행을 선도한 셈이다. 우리는 유독 유행에 민감하고 명품에 약하다. 하긴 어느 나라나 시기별로 유행하는 패션이 있는데 그게 뭐 대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 정도가 심해 남의 눈치를 보는 수준까지 되었다. 자신의 입성에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남의 눈을 의식해 어느 정도 맞춰 입어야 하는 게 아닌지 걱정하는 것이다. 주말 가까운 근교 산 입구에 가면 거의 제복 수준으로 등산복을 차려입고 줄을 서 있다. 비단 입는 것만이 아니다. 많은 이가 주도적인 소비보다는 남들의 의견에 귀 기울인다. 대표적인 것이 ‘후기’에 집착하는 것이다. 요즘은 식당 하나를 찾아도 일단 그 집에 대한 후기를 찾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그 정도가 심해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하기보다 후기가 좋은 식당을 찾게 된다는 게 문제다. 그렇게 낚이고 낭패를 경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예로부터 우리가 소문에 민감했던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산악이 많은 지형의 나라에서 정착성이 강한 농업을 주업으로 하며 살다 보니 다른 지역과 교류가 적은 환경이 고립성을 강화하고 그 결과 공동체 안의 정보가 삶의 중요한 무기와 자산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환경적 유전인자가 최근의 IT 기술 발달에 힘입어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인터넷이나 SNS와 같은 소셜미디어는 이런 우리의 성향을 증폭시키는 데 엄청나게 기여한다. 소위 ‘인증샷’은 남들과 같아지려는 눈물겨운 몸짓이다. 남들이 다 하는데 나만 안 하면 소외되고 잊힐까 두려운 것이다. 이렇게 휩쓸리다 보면 어느새 패거리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비슷한 성향끼리 한데 모여 안도하고 그렇지 않은 다른 부류를 왕따시키고 나아가서 그들을 비난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패거리 정치도 따지고 보면 개성이나 주관 없이 한데 모인 부류끼리 진영을 형성하고 진실과 관계없이 무조건 한 목소리를 내는 나약한 존재들이 만들어 내는 것 아닌가. 선진 민주주의가 남들 눈치 안 보는 자유로운 개인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면 우리 사회가 갈수록 전체주의로 퇴행하는 것 같아 걱정이다. 남들 눈치 보는 문화의 이면에 남에게 강요하기가 있다. 이는 동전의 양면으로 소위 ‘정’이란 말로 포장된 우격다짐이다. 상대가 좋아하는지는 관계없이 내가 좋으면 강요한다. 외국인이 한국에 여행하는 TV 프로그램에 보면 수산시장 아주머니가 막무가내로 좋은 것이라며 여행객의 입에 산 낙지를 쑤셔 넣는다. 이런 문화적인 심리적 폭력은 '남도 나와 같을 것이며 우리는 하나'라는 착각의 산물이다. 끈끈한 정이야말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족성이라고 대부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어쩌면 이 ‘정’이 우리 사회 선진화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깊은 밤 스마트폰 단톡방에 왜 가족 행사 사진을 올리나요? “전 더 알고 싶은 사람이 없어요. 지금 아는 사람도 정리 중이라구요?”
- 2017-12-1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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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건축물 찾아 떠나는 공주 여행
- 우리에게 근대의 흔적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리 역사에서 근대는 일반적으로 개항의 기점이 된 강화도조약(1876년)에서 광복을 통해 주권을 회복한 1945년까지로 본다. 조용했던 나라 조선에 서양문물이 파도처럼 밀려와 변화와 갈등이 들끓었던 시기. 그 시기의 유산들은 한국전쟁과 경제개발을 거치며 사라졌다. 조용히 걸으며 당시의 건물들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에 공주시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백제문화의 중심지로만 알려진 공주의 숨겨진 근대 시대 모습은 어떨지 찾아가보았다. 사실 공주에게 근대 시기는 즐거운 추억이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철도 경부선이 공주를 비켜가면서 악몽이 시작됐다. 조선시대의 공주는 충주, 청주, 홍주와 함께 충청도의 4대 목(牧)이었고, 임진왜란 후에는 충청감영이 공주로 이전해왔다. 충청도의 제1도시였던 셈이다. 그러다 대전역이 생기면서 산업체와 인구는 대전으로 빠져나갔고, 전라선까지 대전을 거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근대화, 산업화와는 조금 비껴나게 되었지만 대신 공주를 위안한 것이 있었다. 종교였다. 근대화의 중심 ‘공주제일교회’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공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바로 공주제일교회의 존재 때문이다. 공주제일교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02년 김동현 전도사가 초가 1동을 구입한 것이 시초가 된다. 이후 교인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예배당이 절실해졌는데, 1909년 우산을 쓴 익명의 후원자가 나타난다. 그의 헌금으로 교회는 새로운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고, 교인들은 후원인을 기리는 마음에서 이곳을 협산자(挾傘者, 우산을 쓴 사람) 예배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협산자 예배당도 좁아지자, 교인들은 1931년 지금의 ‘문화재 예배당’을 건립한다. 장소는 협산자 예배당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다 문화재 예배당은 한국전쟁에 휘말린다. 폭격으로 일부 벽과 굴뚝만 남긴 채 파괴되었지만 교인들은 실의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중대한 결심을 한다. 새 예배당 건립을 위해 이웃해 있던 협산자 예배당을 자재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재건 과정에는 교인들만 참여했다. 1956년의 일이다. 1979년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교회 전면에 배치하는 등의 증축이 이뤄졌다. 역사 속에서 공주제일교회는 종교기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공주 지역의 학교, 유치원, 병원 등 주요 시설의 건립에 교회와 선교사들이 관여했다. 또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1919년 4월 1일 공주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이 독립운동의 한가운데에 공주제일교회의 현석칠 목사와 감리회 공동체가 있었다. 현재 교회 건물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공식 명칭도 ‘공주기독교박물관’이 됐다. 2층으로 구성된 박물관에는 공주 지역 기독교 역사와 성장 과정, 문화재 예배당 건축사, 독립을 위해 힘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각종 역사적 사료가 전시되어 있다. 역사를 체험하는 ‘공주역사영상관’ 공주제일교회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는 공주역사영상관이 있다. 공주의 역사적 배경이나 당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이곳이 제격이다. 이 건물은 1920년 충남금융조합연합회 회관으로 건립됐다. 그래서인지 건물 규모에 비해 입구가 웅장하고, 1층의 천장도 높다. 1930년부터 1985년까지는 공주읍사무소로 쓰이다 1986년 공주시로 승격되면서 건물도 ‘시청’으로 승진했다. 1989년 새 건물로 시청이 옮겨가면서 실직했다가, 2010년 공주시의 구도심 활용 계획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1층에는 학생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각종 영상 자료와 멀티미디어 장비가 갖춰져 있고, 2층은 역사 속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사진자료실로 꾸며져 있다. 공주역사영상관에서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방향으로 다시 20분 정도 걸어가면 천주교 중동성당이 나온다. 서양의 고딕양식을 따르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이다. 1898년 프랑스 출신 진 베드로 신부가 이곳에 교당을 세우고 교지 전파를 시작하면서 공주에 천주교가 자리 잡게 됐다. 본당과 사제관이 나란히 있는데, 사제관은 현재 교육관으로 사용된다. 1997년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성당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했고,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142호로 지정됐다. 숨겨진 근대 건축물 ‘풀꽃문학관’ 다시 남쪽으로 2km 정도 내려와 영명고등학교 뒤편 언덕 마을로 올라서면 선교사 가옥이 보인다. 3층짜리 건물이다. 미국 감리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머물던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공주 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영명학교의 활동이 시작된 장소로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도 영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다 이화학당으로 편입했다. 이곳은 관리가 잘되는 문화재는 아니지만, 산책 삼아 가볼 만하다. 공주고등학교 정문에서부터 이어진 언덕길 풍경은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선교사 가옥 옆으로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선교사 묘역을 만날 수 있다.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 선교사 자녀들의 작은 무덤들이 당시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 대변해주는 것 같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공주의 근대 건축물 중 하나는 바로 2014년 설립된 풀꽃문학관이다. 시집 로 잘 알려진 나태주(羅泰柱) 시인의 작업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이 과거 헌병대장의 관사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32년에 지어진 건물을 공주시가 사들여 문학관 측에 관리를 위탁했다. 지금은 공주 지역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 2017-12-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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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엽문학관, 그곳에 시인이 살고 있다
- 목적지는 충청남도 부여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묻힌 시인 신동엽을 만나기 위해서다. 서울남부터미널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여행의 설렘을 더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알록달록한 단풍잎은 가을을 보내기 싫다는 듯 나뭇가지 끝에 겨우 매달려 몸을 흔든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호젓한 부여에 도착했다. 부여시외터미널에서 신동엽문학관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다. 5분 정도 이정표를 따라 걷다 보면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의 한 구절을 써놓은 게스트하우스 담벼락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문학관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의미다. 100m도 채 지나지 않아 신동엽문학관과 신동엽 생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2013년 개관한 문학관과 복원된 생가는 서로 다른 매력을 보여주지만, 함께 어울려 신동엽 시인에 관해 이야기한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껍데기는 가라’는 1967년에 발표됐다. 이후 ‘참여시의 절정’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비로소 문단의 조명을 받았다. 같은 해에는 4800행에 달하는 장편서사시 ‘금강’을 팬클럽의 작가기금을 받아 발표한다. 깔끔한 외모의 젊은 국어선생님이었던 신동엽은 평소에도 인기가 높아 여학생들로부터 편지를 많이 받았다. 그런 그를 보고 아내인 인병선 여사가 화를 많이 냈다고 한다. 신동엽은 자신의 작품인 오페레타 ‘석가탑’을 무대에 올리고 다음 해인 1969년, 국민방위군(1951) 때 감염된 간디스토마가 간암으로 악화되어 만 3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신동엽문학관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이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낡아가는 자연스러운 문학관의 모습이 신동엽의 시를 닮았다. 마치 종이를 바른 듯한 느낌의 외벽에는 여백이 넘치고 내부는 외부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진보적인 시인이었던 신동엽. 이곳을 순례하는 자들의 발길은 여전히 잦다. 전시관에서는 시인의 육필 원고를 비롯해 인병선 시인과 주고받은 편지와 사진, 즐겨 읽던 책, 교무수첩, 신분증 등 다양한 유품을 관람할 수 있다. 그와 관련한 자료들은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유가족의 노력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전시관을 다 둘러봤다면 옥상정원으로 올라가봐야 한다. 푸른색 기와의 신동엽 생가를 한눈에 넣을 수 있다. 신동엽이 자라고 신혼생활을 했던 생가의 앞마당 웅덩이는 지금은 풍성하게 자란 잔디가 그 자리를 메꿨고 초가지붕은 기와로 바뀌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시인이 살던 집은 조금씩 모습을 바꿨지만, 생가 안의 물품은 그 시절 그대로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흰 고무신과 책상 위의 잘 익은 감을 보고 있으면 마치 시인이 살아 돌아올 것만 같다. 방문 위에 걸려 있는 목판에는 인병선 시인의 작품 ‘생가’가 새겨져 있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란 구절에서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버린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느껴진다.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 당신과 내가 처음 맺어진/ 이 자리를 새삼 꾸미는 뜻이라//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 ―인병선, ‘생가’ 관람 정보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신동엽길 12 전화 041-833-2725 관람시간 09:00~18:00 (11월~3월은 17:00까지) 휴관일 매주 월요일, 명절 입장료 무료
- 2017-11-29 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