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차이가 얼마 없는 진짜 남매를 알아채는 방법 한 가지가 있다. 원활한 관계를 위한 친절한 안부는 없고 퉁명스럽게 다짜고짜 본론부터 들어간다면 100%다. 멋진 추억여행이 있다기에 만난 김미혜(42)씨와 김대흥(40)씨는 완벽한 남매 자체였다. 화창한 봄, 꽃향기 살짝 풍기던 어느 날. 인사인 듯 인사 아닌 인사 같은(?) 직설 화법 쏘며 대화를 이어가
과거를 회상해보자. 잠깐 집을 비운 사이 유치원 딸아이가 엄마의 하이힐을 신고 있는 모습을 본 적 있지 않은가? 혹은 말도 안 되는 치장과 메이크업을 하고 빤히 서로를 바라봤던 일 없는가? 그래서 준비했다. 오래전 당신의 옷장과 화장대가 딸에게 점령당했다면 이번에는 반대다. 대신 딸이 아닌 에디터의 옷장 문을 열었다. 봄바람 살살 부는 3월, 한흥옥(66)
새봄 냄새가 짙게 풍기는 휴일, 친구들과 을미사변 때 희생된 항일 인물들을 배향하는 장충단에 모였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에서 성곽길을 따라 남산에 올랐다. 차를 타거나 아스팔트를 걷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맛을 느꼈다.
남산에 오르면 고층 빌딩이 가득한 시가지 모습에 감격한다. 높은 건물 몇 개뿐이고 삼일고가도가 웬만한 건물보다 높았던 시절, 반듯한
뭐든지 척척, 생각하고 말하는 대로 잘되는 사람을 보면 ‘도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뭘 해도 저렇게 운이 잘 따르나’ 싶다. 부럽다가도 얄밉고, 성공 비법이 뭘까 궁금할 때도 있다. 막걸리 전문 주점 ‘가제트 술집’은 8년 전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변두리 골목에 7평 남짓한 좁디좁은 공간에 문을 열었다. 개업 첫날부터 문전성시를 이루더니 맛집으로 널리 알려지면
1957년생 장은숙은 1977년에 데뷔해 199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자기애로 똘똘 뭉친 장은숙은 고독한 생활을 즐겼다. 고독했기에 행복했고 그래서 늙지 않는 것일까. 무엇보다 그녀의 가수 인생은 파란만장했지만 고독했기에 노래에 집중할 수 있었고 성공과 행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것. 시집 한 번 안 간 그녀는 요즘도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
이재준 미술품 수집가
장리석(張利錫, 1916~ ) 화백은 2016년 4월 백세(百歲)를 넘긴, 그러나 아직 화필을 잡는 당당한 현역이다. 평양에서 출생하여 상수보통학교 졸업, 1937~1939년 일본 다마가와(多摩川) 제국미술학교 수학, 귀국해 1940~1945년 평양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 미술부장, 이때 조수로 있다 숨진 화가 최지원(崔志元, ?~
며칠 지나면 크리스마스이고 다음 날은 아버님 기일이다. 형제자매와 조카들에게 "아버님 기일 오후 4시에 메모리얼 파크에서 모이자“고 ‘가족밴드’에 올렸다. 형제자매들은 가족들의 소통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가족밴드를 이용한다.
의사소통의 변천사
통신수단이 발달하기 전에는 직접 대면하여 소통하였다. 어른이나 상사를 찾아뵙고 말씀을 나누고 지인을 직접 만나서
18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옥임씨(鄭玉任·56)는 6년 전에 이혼하고 황홀한 돌싱(돌아온 싱글) 생활에 푹 빠져 있다. 데이트를 질리도록 하고 난 후 밤에 떨어지기 싫을 정도로 사랑하는 남자가 생겨도 앞으로 다시는 결혼 안 한다고 잘라 말한다. 지금처럼 뭇 남성들의 사랑고백을 받으면서 연애만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녀의 속내를 들춰보자.
이봉규 시사평론가
얼마 전 유치원에 다녀오는 외손자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 “훌륭한 아빠·엄마가 사랑해 주시니 좋겠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아빠·엄마가 무엇을 하는지 줄줄 말하면서 기분 좋아하였다. “그럼, 할아버지 할머니도 훌륭하지?”라고 너무 앞서고 말았다. “응, 그런데 할아버지는 무엇을 하시는 줄 모르겠어!” 뭔가 궁금한 것이 폭발하였다. 행동으로 대답하여야 할
1950~60년대 어두웠던 우리 사회상을 되돌아보면 볼수록 우리 사회가 ‘현기증’을 느낄 만큼 변했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필자도 분명 그들 중 하나이다.
이와 관련해 특파원으로 10년 넘게 우리나라에서 지내며 활동한 한 영국 언론인의 글이 생각난다. 그는 1990년대 한국 경제의 위상을 보고 1960년대의 한국을 생각하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