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은 밥은 먹기 싫고 가볍게 한 끼 때우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한 끼 주식이 되기도 하면서 끼니 사이 출출함을 달래줄 간편한 간식이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1인당 라면 소비량이 세계 1위라고 하니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국민이 사랑하는 식품임엔 분명하다.
필자 또한 새로운 라면이 출시되면 꼭 맛을 보는 라면 마니아다. 캠핑 할 때 야외에서 먹는 라면 맛과, 해외 여행할 때 외국 음식에 질리고 집밥 생각날 즈음 끓여 먹는 라면 맛이란 가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다. 다이어트를 할 때도 항상 시험에 빠뜨리고 결국 의지를 꺾게 만드는 원흉이 가족들이 야식으로 끓이는 라면 냄새와 딱 야식시간에 맞춰 방영되어 침샘을 자극하는 라면 광고 이다.
이런 라면을 많은 사람이 건강을 이유로 피해야 할 음식으로 꼽곤 한다. 나트륨 함량이 높고 면을 기름에 튀겨 지방 함량 또한 높으니 특히 우리 시니어가 살짝 멀리해야 하는 음식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너무 자주 먹지만 않는다면 영화 제목처럼 ‘파 송송, 달걀 탁’ 넣고 5분이면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라면을 한 번쯤 끓여 먹는 것도 건강에 크게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신경이 쓰인다면 면을 한번 삶아내고 건져서 다시 끓인다든지, 스프의 양을 줄이는 방법. 그 외 몸에 좋은 채소 나 우유 등을 첨가하여 끓여 먹는다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걱정을 조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라면의 매력 중 으뜸은 다른 음식 또는 식재료와의 조화다. 라면에 콩나물을 넣고 청양고추만 넣어도 시원한 해장라면이 되고, 된장만 살짝 풀고 파, 마늘, 채소를 첨하가면 구수한 장국라면이 되기도 한다. 그뿐인가? 천원 남짓의 인스턴트 음식 라면이 때론 그 비싼 식재료 문어와 만나서 문어라면이 되기도 하고, 때론 대게를 넣어 대게 라면을 끓여 내기도 한다. 오징어, 꽃게 어떤 해물을 넣어도 해물탕 과 같은 시원한 라면을 만들 수 있으니 그 응용력이 참으로 다양하다.
더 화려한 변신으로는 라면에 버섯(과하게는 송이버섯) 들을 넣고 끓인 버섯라면 전골, 소고기와 갖은 채소를 넣으면 쇠고기라면 전골 이 소박한 라면의 변신은 무한하다.
이 때 그 어떤 화려한 식재료를 넣어도 라면이 다른 음식이 되지 않고 앞에 첨가된 재료 이름이 수식어가 되는 그저 문어라면, 대게라면 인 것이다. 모든 재료를 어우르지만 절대로 라면이 아닌 다른 음식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라면이 엑스트라로 들어가는 음식을 보자. 그 대표적인 음식이 부대찌개. 라면이 들어가지 않은 부대찌개를 상상할 수 있을까? 떡 볶이, 김치찌개 그 외 많은 음식에 사리로 들어가기도 한다. 이 때의 라면 역시 본래의 음식에 들어가 어우러지며 맛을 배가 시키지만 라면 본연 성질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음식에 어떤 역할로 들어가든 어우러지되 같아지지 않는 진정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음식인 것이다.
요즘은 젊은이들이 친구나 연인을 집에 들일 때 예전의 ‘커피 한잔 하고 갈래’라는 말 대신 ‘라면 먹고 갈래?’ 로 바뀌었다. 넌지시 그렇지만 강렬한 유혹의 뜻으로 쓰는 말이다.
날씨가 많이 더우니 뜨거운 라면 대신 나만의 레시피로 시원한 냉 라면을 만들어 가볍게 한끼 해결해 보자.
“냉라면 드시고 가실래요?”
피부로 느끼는 여행의 설렘은 비행기 바퀴가 이륙하는 그 순간부터다. 요행히 공항에 일찍 도착한 덕에 차지한 비상구 자리는 이코노믹 증후군에 안전한 편이었다. 하긴 5시간 10분 정도면 비행기 여행치고 그리 먼 곳은 아니다. 어쩌다 까다로운 티케팅 직원을 만나면 필자 같은 쉰 세대에게 그 자리는 어림도 없다. 정말 위급한 상황이 일어나면 승객 대피에 도움은커녕 민폐만 끼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영화 2편과 식사 1번으로 가볍게 도착한 방콕이 딴 나라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은 여권 검사자의 느려터진 동작에서부터다. 외국인에게도 허락된다면 인천공항처럼 자동 검색기에 등록하고 싶을 지경이다. 참으로 느긋하다. 이 또한 느림의 미학이라 해야 할지. 그들은 말씨마저 ‘~카아’ 하며 친절하게 쭈욱 뽑아대니 영화 의 나무늘보가 생각날 지경이다.
그런데 방콕에서 신기하게도 빠른 것이 있다. 물론 사람은 아니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다. 마치 놀이동산에 온 것 같아 신이 나기도 하지만, 서울에서 온 우리는 적응이 안 된다. 이렇게 빠르면 고령자들은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 느린 사람들이 씽씽 오르는 에스컬레이터를 멀쩡하게 타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가 아이러니다.
느린 그들은 인내심도 대단하다. 서울을 능가하는 방콕의 교통 체증에도 모든 차는 조용히 기다린다. 도심 골목골목도 다 차들로 가득한데 불행히도 주차된 차가 아니고 시동 걸린 차다. 필자가 볼 때 그들은 거의 득도의 경지다. 일 년 내내 더위를 견디다 보니 그런 인내심이 생긴 건지 불교 신앙의 탓인지 그것이 알고 싶다. 도심 곳곳은 물론 심지어 쇼핑센터 앞에도 불상, 향 피우는 곳과 간단한 제물들이 놓여 있으니 종교 덕분도 있는 듯하다.
방콕에서 여행자가 이용하기 손쉬운 교통수단은 택시와 지하철이다. 택시를 이용할 때에는 합법적인 ‘우버 택시’가 좋다. 우선 우버 앱을 스마트폰에 깔고 서울에서 카카오택시 부르듯이 전화만 하면 된다. 택시를 부르는 순간부터 그 차가 진행하는 것이 휴대전화 지도상에 뜬다. 요금도 정확히 찍혀 나오니 흥정하거나 싸울 일도 없다. 한 가지 중요한 팁은 우버 택시를 처음 이용할 때에는 약 9천 원 정도를 깎아준다. 두 사람이 가면 두 번을 아주 싼 값에 이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우리도 공항을 오갈 때 사용해 택시비를 한 번에 3천 원 정도로 해결했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순간이다.
지하철의 시설은 우리나라보다 못하지만, 요금은 더 합리적인 편이다. 정거장 수에 따라 대여섯 가지로 차등을 두었다. 정기권이 아닌 경우 매표기에서 사야 하는데 반드시 동전으로만 살 수 있는 것은 불편했다. 지폐밖에 없을 때는 일일이 창구에 가서 동전으로 바꾸자니 번거로웠다. 왜 지폐도 되는 매표기를 놓지 않는 걸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정류장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이 같은 곳에 선다는 점이다. ‘~행’이라고 쓴 것이 우리나라처럼 조금 더 가거나 덜 가는 거려니 하고 무심코 탔다가는 엉뚱한 곳으로 마냥 갈 수도 있다. 외국어라 발음이 낯설어 언젠가는 방송이 나오려니 하다가는 국제 미아가 되기 십상이다.
여행자가 많은 방콕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이 다 모이지만, 중국 사람은 매번 싸우듯이 떠드니 어디서나 튀어 실제보다 더 많아 보인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도 만만치 않다. 매일 한국말이 어디선가 들린다. 요즘은 대개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부르거나 채근하는 소리다. 그것도 주로 빨리하라는 얘기다. 오늘도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뭐든 빨리 못해 애가 탄다.
젊은 필자의 머리속에서 미국은 선망의 대상 국가였고 영화와 잡지 속에서 가장 친숙한 외국이었고 꿈이 실현되l는 머나먼 곳이었다. 그런데 필자가 1978년도에 유학생의 아내가 되어 머나먼 그곳에 가게 된다. 밤에 도착해서 꿈의 아침을 맞이하여 막상 거리를 내다보니 자동차의 왕래만 보였고 나름데로 친숙하다고 느꼈던 미국 사람들은 평일 아침 시간 다들 어떻게 살고 있는지 길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같은 땅을 밟고 있으면서도 미국 사람 그들은 철저히 그들의 문화에 속해서 살고 있고 필자는 필자의 문화에 속해 있는 이방인의 서늘함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한것은 이때부터였던것 같았고 한국에서 일방적으로 친하다고 생각했던 동경속의 세계 미국은 미국에 도착한 시간부터 점점 필자에게서 멀어져 갔다.
당시 한국은 까마득한 후진국이었지만 필자는 대학을 졸업한 성인이었고 대한민국 서울의 거리를 활보하고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시민이었지만 모든게 서툴고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회에 들어오면서 필자를 초등학생 수준의 문맹에 가까운 성인으로 만들어버린 이 사회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하나? 뭔지 모를 소외감과 막막함이 밀려왔다.
이렇게 필자를 퇴보 시켜버린 사회에서 하루하루를 서투르게 살고 있을때 맥도날드 햄버거의 만남은 필자에게 단순히 햄버거 가게가 아닌 문화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만남은 훗날 필자에게 미국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게 해주었다. 그당시 한국에서는 패스트 푸드를 접해본 경험이 없는 필자로써 맥도날드 햄버거 이집을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1달러도 채 안되는 가격으로 빅맥과 콜라를 살수 있었던걸로 어렴풋이 기억이 된다. 보기 편리하게 위치한 세련되게 정돈된 메뉴 사인의 그림을 가리키기만 하면 뜻이 통하고 돈 받는 기계에 찍힌 숫자대로 돈을 내고 나는 혼자 그것을 가지고 자리로 가서 먹고 혼자 쓰레기를 버리고 나오면 되었다. 필자는 1달러도 채 안되는 돈으로 미국에서 미국사람이 되는 연습을 했고 영어 벙어리인 나는 그들이 누리는 것을 나도 누릴수 있는 작은 자유(?)를 살수 있었다.
미국은 어떤 영어 벙어라도 이렇게 돈만 가지고 오면 혼자 살수 있는 방법과 미국사람이 되는 연습을 쉽게 시켜주는 뼈속 깊이 자본주의 체제의 친절한(?) 나라라는걸 나중에 알게 된다. 필자는 처음 반년 즈음엔 일주일에 몇번은 일부러라도 거기에 갔었다. 유학생인 남편도 학교 적응이 몹시 어려웠던 초기 시절이라 밤낮없이 실험실을 지켜야만 했다. 미국안에서 미국과 단절되고 그리운 한국은 아득히 멀리 있고 내 정체성 조차도 잃어 버릴것 같은 외로운 시절이었다. 자동차의 시동을 걸때마다 ‘내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수 있을까’를 걱정해야 하는 운전 실력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외출을 하지 않으면 사회가 필자로부터 무한히 멀어져가는 강박과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1달러를 가지고 그곳에 가서 누릴수 있는것들, 산뜻하고 청결한 실내 디자인, 세련되고 어필하는 색체, 나름데로 친절하고 산뜻하고 세련된 사람들의 태도, 무엇보다 영어를 잘 못하는 필자가 독립적으로 음식을 살수있는 판매 구조. 어느것 하나 새롭지 않은게 없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것이 없었다. 햄버거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세련 됐을까마는 당시 필자의 눈에 그렇게 보였던 그곳은 새로운 천지였고 미국 삶에 서투른 필자에게는 맥도날드 햄버거집 그집이 바로 미국이었다.
필자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가지고 있는 미국의 많은 얼굴을 나중에 맥도날드 햄버거가게를 통하여 읽을수 있게 된다. 돈을 쓸 수 있고 벌 수 있는 모든 것이 최적화 되어있는 합리성에 대해서도.
푸드, 인테리어 등등의 콘텐츠를 넘어서 그곳에는 그들의 문화가 집약되어 있음을 볼수 있을 만큼 필자는 미국 사회에 익숙해져갔다.
수많은 인종이 모여살고 있는 미국에서 그들은 그들의 문화를 여러 나라에 팔수 있는 연습과 자동검증 그리고 실현 되었고 그로부터 멀지 않은날에 많은 지구인들은 그 질서와 문화에 길들여져 간다.
미국의 얼굴은 이제 지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맥도날드 햄버거의 로고 사인 속에 각인 되어 있다. 제품, 포장, 판매구조를 완성시키는 실내 디자인, 이런것들이 포함되어 있는 문화를 필자는 지금 이곳 한국 스타벅스에서도 만나면서 그때 그생각을 다시 확인해 본다.
다 나쁘고 다 좋다고 한마디로 말할수 없지만 그들 문화의 아이콘이라고 말할수 있는 것중 합리성이라는 것은 탐나고 흉내내고 싶다.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1987년 부산에서 쌍둥이로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각각 미국과 프랑스로 입양된 사만다 푸티먼과 아나이스 보르디에가 4년 전 SNS를 통해 극적으로 재회한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를 보면서, 그리고 “저 역시 입양아로서 살아온 삶에 대해 긍정적이었고, 아나이스 역시 입양의 어두운 면이나 슬픈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저희는 대부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사만다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의 입양 현실에 시선이 향한다.
보건복지부가 최근 발표한 입양 현황 통계에 따르면 2015년 한 해 국내 법원에서 국내외 입양을 허가받은 아이는 1057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국내 입양은 683명으로 2014년의 637명보다 약간 늘어났지만, 국외 입양은 374명으로 2014년의 535명에 비해 줄었다. 국외 입양아 현황을 보면 미국이 전체의 74.3%로 가장 많고 이어 스웨덴(9.6%), 캐나다(5.9%), 노르웨이(2.7%) 순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01년 4206명이던 입양 아동은 2003년 3851명, 2006년 3231명을 거쳐 2013년 2652명으로 크게 줄었다. 그리고 2014년 1172명, 2015년 1057명으로 감소하는 등 입양이 활발하지 못한 상황이다. 입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역시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아이들을 입양해 행복한 가정을 꾸려 입양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며 국내 입양을 활성화하는 데 일조하는 연예인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차인표-신애라 부부, 중견 연기자 송옥숙, 탤런트 이아현, 개그맨 엄용수, 연극배우 윤석화, 가수 조영남, 개그우먼 이옥주 등이 자녀를 입양해 키우는 대표적인 연예인들이다.
여러 아이를 입양해 건강하고 행복하게 키우고 있는 브래드 피트-안젤리나 졸리 부부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일반인의 입양에 대한 인식 전환에 크게 기여한 것처럼 입양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엄존하는 한국에서도 차인표-신애라, 이아현 같은 대중의 시선을 받는 연예인 스타들이 입양 문화 활성화에 일조하고 있다.
자녀를 가슴으로 낳아 키우는 연예인들은 입양은 특별하거나 칭찬받을 일이 아니며 입양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과 다른 가족이 더 행복해졌다고 입을 모은다.
“정민이(큰아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부모로 선택하게 했듯 둘째 예은이, 셋째 예진이는 우리가 입양한 것이 아니라 정민이와 다른 방법으로 이 아이들이 우리를 부모로 선택했습니다. 입양은 가정이 절실하게 필요한 아이에게 울타리를 쳐주는 것이며 새 가족과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새 가족이 생기면서 아이가 사랑을 알게 되고 다른 가족들도 입양한 아이로 인해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입양한 예은, 예진으로 인해 가족들이 더 행복해졌어요.” 두 아이를 입양한 차인표-신애라 부부의 말이다.
“결혼 전 입양을 해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가슴으로 낳은 아이도 배 아파 낳은 아이와 똑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둘째를 입양하고 키우면서 정말 좋았어요. 그래서 셋째도 입양을 하게 됐지요.”신애라의 말이다. 신애라의 적극적인 입양 의사에 남편 차인표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입양단체 관계자들은 스타 부부 차인표-신애라의 두 아이 입양은 많은 사람들에게 입양에 대해 관심을 끌게 하고 국내 입양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한다.
“입양했다고 하면 왜 칭찬받는지 솔직히 저는 반감이 듭니다. 내 딸들은 나를 있게 해준, 살게 해준 사람들입니다. 딸들이 아니었으면 너무 힘들어서 내가 지금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2007년 첫째 딸 유주(9)를, 2010년 둘째 딸 유라(6)를 입양한 탤런트 이아현이다. 이아현은 입양은 특별한 일이거나 찬사를 받을 일이 전혀 아니라고 했다.
혈연에 대한 집착, 법과 제도 문제 등 한국에서 입양이 활성화하지 못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자녀들을 입양한 연예인들은 강연과 홍보대사, 그리고 방송 등을 통해 입양에 대한 인식 전환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도 한다.
입양한 아이를 잘 키워 결혼까지 시킨 코미디언 엄용수는 방송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녀 셋 중 둘이 ‘가슴으로 낳은 애들’이다. 피 한 방울 섞이고 안 섞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랑으로 가족을 이루면 되는 것이다”라며 입양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설파한다.
입양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연극인 윤석화는 방송 등 대중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유교적인 사상이 많고, 국내 입양에 대한 편견이 아직도 많은 것 같아요. 외국의 사례나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면, 정말 아이들이, 생명이 크는 것은 사랑이 가장 우선이고, 오히려 DNA(혈연)보다 더 중요한 게 사랑이고,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아직도 많은 아이가 해외로 입양 가고 국내 입양이 잘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안타깝죠”라며 국내 입양이 활성화했으면 하는 바람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입양 문화가 이전보다 개선됐다고 하지만 장애아나 혼혈아 입양을 꺼리는 인식은 여전하다. 2015년 한 해 장애나 건강에 이상이 있는 아동 중 국내 입양은 24명이었지만, 해외 입양은 99명이나 됐다. 정부가 해외 입양을 통제하지 않았던 시기인 2002년에는 해외로 입양 간 장애아가 827명에 달했고 국내 가정에 입양된 장애아는 16명에 불과했다.
필리핀계 혼혈아를 2007년 입양해 가정을 이룬 중견 연기자 송옥숙은 “입양한 아이가 혼혈이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혼혈아에 대한 사회의 시선에 개의치 않았다.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는 것만이 중요했다”고 말하며 장애아나 혼혈아에 대한 입양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입양아 가정에서 고민이 많은 입양 공개 여부에 대해서도 연예인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자녀를 입양한 연예인들 대부분은 외국처럼 입양 공개에 대해 찬성하고 있다. 가수 조영남은 “아이를 입양한 것은 세상의 빚을 갚는 심정이었어요. 아이를 공개 입양한 것은 입양 문화에 대한 인식을 바꿔보려고 한 거예요. 결과적으로 입양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아이를 밝게 키운 것 같아요”라고 했다. 차인표-신애라 부부는 “저희가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기 때문에 비밀 입양이라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비밀 입양은 아이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부모야 본인이 선택한 거지만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들은 비밀 입양을 할 경우 숨겨야만 하는 음지가 생기는 것이지요”라며 입양 공개 찬성 이유를 밝혔다.
개그맨 엄용수는 여섯 살 때 입양해 2007년 결혼해 가정을 꾸린 딸 엄현아(35)씨가 아이를 낳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입양은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다시 한 번 깨달았다며 더 많은 사람이 입양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입양은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 키우는 게 아니라 소중하게 태어난 생명을 하나의 인격체로 키워내는 것이다. 모든 아이들은 따뜻한 가정 안에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할 권리가 있고, 어린아이들을 사회적 인재로 키워내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입양은 내 삶에 가장 잘한 일이다.” 2003년 공개 입양으로 아들 매튜를 가족으로 맞은 영화배우 故 김진아가 생전에 나와 인터뷰하면서 한 말이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 하는 사람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리움이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어렸을 때의 일을 글로 한번 꼭 표현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항상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만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돌아가 볼 수 없는 정말 그리운 그 시절의 추억을 끄집어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정말 기쁜 마음이다.
유년시절
필자는 살아오면서 자신을 서울 토박이라고 생각해 왔다. 60년 인생에서 50년이 넘는 시간을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당연히 서울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는데 실은 고향은 대전이다.
필자 머리가 특별히 좋은 건 아니지만 유년 시절의 많은 일을 기억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마 서너 살 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와 유성온천 만년장호텔의 개울 위 다리에서 벚나무에 기대어 사진을 찍었던 일도 기억나고, 만년장 객실의 커다란 전면 유리창 밖으로 봄날의 벚꽃이 하나 가득 흩날려 쏟아지던 것도 생생하다.
필자는 1952년 아름다운 계절 6월의 첫날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전 근교에서 큰 포도밭을 하시는 할아버지의 장남으로 많은 동생을 보살펴야 했으므로 피아노를 좋아하셨지만 예술가의 길로 가지 못하고 초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셨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평양이 고향인 이북 사람이셨다. 할아버지는 경성제대를 졸업하시고 충남대학교에서 사학과 교수로 평생 후학을 길러내셨으며 명망이 두텁고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아주 인자하고 훌륭한 분이였다.
아버지는 대전 사람이지만 어머니는 서울 옥인동이 고향이고 진명여고를 다니다 대전으로 피난 가서 대전여고를 졸업했다 어머니도 역시 피아노를 전공해서 초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었는데 거기서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집엔 피아노가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는 건 참 즐거운 일이었다. 전쟁도 있었고 다들 어려운 형편이었을 텐데 두 시림은 어떻게 피아노를 그렇게 잘 쳤는지 존경스럽다.
필자가 태어난 동네는 대전역 건너편 골목의 정동이라는 동네였다. 아주 어릴 때의 일인데도 그때 있었던 일들이 기억이 나니 필자 머리가 보통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한다. (크면서 공부는 잘 못 했지만….
부모는 딸 셋을 낳고 더는 아이를 갖지 않으셔서 필자 집은 세 자매가 되었다.
필자 집은 대전역 건너편의 중심가에 있었고 친가는 조금 떨어진 가양동, 외가는 10km쯤 떨어진 문창동에 있었는데 아주 어릴 때부터 외가를 좋아해서 거기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곳이 그렇게 좋았던 이유는 바로 꿈과도 같은 집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제 나라로 돌아간 일본 사람의 적산가옥이라 불리던 집을 외할아버지가 장만하셨는데 그 집은 정말 꿈의 동산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집 건물이 있고 왼쪽으로는 커다란 팽나무에 할아버지께서 필자를 위해 매어주신 기다란 그네가 보였다. 필자는 언젠가는 꼭 이 집에 대해서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필력이 모자라 표현을 어찌해야 할지 항상 머릿속에 담아 두고만 있었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는 마음만 갖고 있었다.
마당에는 일본 사람 특유의 정원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수 있을 정도의 동산과 돌다리가 걸쳐진 연못이 있었다. 연못 속에 돌로 만든 거북도 멋있었고 연못 속에서 피어난 늘씬하게 쭉쭉 뻗은 수선화의 초록 이파리와 꽃도 아름다웠다.
대문에서부터 집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까지 놓인 발 디딤돌 외의 공간에는 빼곡히 알록달록 키 작은 채송화가 융단처럼 깔렸기도 했는데 외할머니께서 가꾸신 것이다. 오른쪽으로 가장 끝에 부엌이 있고 그 옆에 칸 칸으로 나누어진 커다란 미닫이 유리창이 안방 문이었다.
부엌 앞에는 아래위로 손잡이를 움직이면 언제나 콸콸 시원한 물이 쏟아지는 펌프가 있었고 안방을 지나 돌출된 현관을 가진 작은방 옆에는 석류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새빨간 석류가 딱 벌어져서 그 안에 보석 같은 알맹이가 가득 들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 외가에 들어와 본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필자는 덕분에 동네의 헤로인이 될 수 있었다. 놀이할 때에도 필자는 우선권을 가질 수 있었으며 동네의 또래 아이들은 모두 필자를 떠받쳐주었기 때문에 그곳이 그렇게 좋았을 수도 있겠다.
필자는 항상 집이 부자인 줄 알고 살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당시 처절하게 돈을 모으셨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부족함 없이 딸 셋에게 풍족하게 해 주려고 부모가 많이 노력하셨다는 걸 알았다.
필자는 어릴 땐 숫기 충만하고 남 앞에 서는 걸 좋아했었던 것 같다. 대흥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책 읽기를 잘해서 4학년 때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교장 훈화하는 단상에 올라 동화구연을 하기도 했다. 욕심 많은 어부의 아내 이야기로 어부가 잡아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부리다 망한다는 교훈적 이야기였던 것도 생각난다.
동화구연이 끝나고 과자를 사 먹으려고 교문 밖 문방구에 갔더니 주인아줌마가 “너 참 잘하더라” 라고 말씀을 해서 군것질을 못 사고 공연히 연필 한 자루만 사 들고 오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공인이 되면 그렇게 체면치레도 해야 하는가 보다.
필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유행가도 잘 불렀다. 또 어머니와 영화를 보고 온 날은 아이들 앞에서 어찌나 실감 나게 연기를 해 보였던지 극장에 갔다 온 것보다 더 재미있다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어릴 때 그런 재주가 있었다.
이렇게 신나게 살던 필자 맘에 꼭 드는 도시인 대전을 떠날 일이 생겼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서울로 이사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전이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필자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필자는 식구들이 필자만 외가에 두고 떠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지만 며칠 후 초등학교 6학년이 시작되던 해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의 첫 집은 아현동에 있었고 아현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아현동 집은 대문 앞에 대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어서 대추나무 집이라고 불렸으며 아주 예쁘고 깔끔한 한옥이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 다녔던 아현초등학교를 한 학기만 마치고 전학을 간 곳은 돈암초등학교였다. 집이 돈암동으로 이사했기 때문이었다. 돈암동 집 역시 한옥이었다. 그때로써는 더 좋은 동네로 옮긴 거지만 요즘으로 따져보면 아현동은 지금 너무나 발전한 고층빌딩 숲으로 시내 중심가가 되었으니 이사하지 않고 그냥 그 대추나무집에 살았다면 어머니, 아버지는 재테크를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후 돈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필자는 동대문 밖 창신동에 있는 동덕여중에 들어갔다. 동덕여중은 일제 강점기에 여성교육에 큰 뜻을 품으신 조동식 박사가 설립한 민족 학교라 할 수 있는데 교정이 아름답고 건물이 너무나 멋졌다. 본관 건물의 빨간 벽돌담을 초록 담쟁이가 가득 뒤덮어 고풍스러운 모습은 그림 동화책을 보는 듯 마음을 설레게 했다.
등교하던 모습도 생생하다. 허리를 졸라매는 하얀 블라우스와 군청색 스커트의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고 등교했다. 등굣길의 버스 안이 얼마나 만원이었는지 그때 학교에 다녔던 학생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터질 듯한 버스 속으로 안내양이 등으로 밀며 필자를 구겨 넣었다. 그러면 운전기사 아저씨는 일부러 차체를 흔들어 뭉쳐 있는 사람들을 고루 뒤섞어 놓았다. 버스에서 내리면 반듯하게 다림질하고 주름 잡아 허리를 매어 입은 교복이 구겨지고 삐뚤어져서 한동안은 동소문동 집에서부터 보문동, 신설동을 돌아 창신동 학교까지 걸어 다니기도 했다.
혜경, 대학생이 되다
그리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고3 때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꼭 가고 싶었던 이화여대는 아니어도 청파동 언덕의 아름다운 숙명여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과도 영문과나 불문과 아니면 국문과가 좋았지만 예비고사 성적에 맞추어 무난하게 경제학과를 지망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최고의 학과이지만 그 당시 필자가 경제학과 학생이 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뭐 어쨌든 이렇게 청춘 시대가 활짝 열렸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공부보다는 노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은 듯하다. 수많은 미팅도 있었고 친구들과 명동이나 종로 등 좋아하는 거리를 섭렵하며 다녔다. 이렇게 미팅 전성시대를 누렸지만 정작 결혼은 매우 철저한 중매로 했으니 아이러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었으나 그런 추억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 아닐까?
필자는 학교 다니는 동안 교직과목을 듣고 교생실습을 거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땄다. 친구들은 취직한다고 동분서주했지만 필자는 그때도 놀기만 했다. 교사자격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근무지였다. 서울에서는 임용고시가 너무나 어려워 통과하기 어렵다고들 했다. 그래서 많은 친구가 경기나 지방으로 교사가 되어 떠났다. 지방은 서울보다는 선생님 되기가 쉬웠다고 한다. 그러나 딸만 셋인 아버지는 필자를 지방에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결국 필자는 본의 아니게 빈둥빈둥 노는 신세가 되었다. 끔찍하게 딸들을 사랑한 아버지 덕분에….
20대 후반이 됐는데도 시집을 못 가
나이가 27세가 되자 어머니는 매일 한숨을 내 쉬며 걱정했다. 대학 시절 그렇게 연애를 많이 했는데 정작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시집을 못 간 것이다.
그래서 선을 보기 시작했다. 무척 많이 보았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필자가 자타공인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많은 선을 보았는데 어느 날 부모님이 강력히 추천하는 사람을 만났다. 약대를 나왔고 시아버지는 변호사라고 했다. 어머니는 첫딸이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야 동생들도 그렇게 될 거라며 이 사람을 만나보라고 했다. 선을 봤는데 남자가 너무 못 생겨 보였다. 못 생겨서 싫다고 했더니 제 복을 제가 찬다면서 야단치셨다. 그런데 이야기해 보니 마음이 참 착해 보였다. 그래서 이 사람으로 결정해 버리고 말았다.
부잣집 맏며느리?
이 남자를 만나보니 인물보다는 마음이 참 착해 보였다. 더구나 어느 날 자기 집 얘기를 하는데 집에 수영장이 있다는 게 아닌가. 필자는 거짓말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 외국 영화에서 본 것처럼 넓고 푸른 잔디밭에 파란 물이 출렁이는 예쁜 풀장을 생각한 것이다.
실제 가서 보니 뭐, 거짓말은 아니고 정말 집안에 수영장이 있긴 했다. 집은 장충동 고급 주택가인데 어머니가 손수 지휘하셔서 아주 공들여 지은 집이었다. 필자가 상상한 그런 수영장이 있는 집은 아니었지만 멋지고 좋은 집이었다.
전면으로 볼 때 3층이었고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오른쪽으로는 분수가 나오는 정원이 있고 왼쪽으로 반지하인 1층이 있는데 그 층에 운전기사 방과 제사나 명절 때만 사용한다는 넓은 부엌이 있고 그 구석에 어린 시동생과 시누이를 위해 네모난 풀장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 수영장을 보고 필자가 엉뚱하게 상상했던 게 생각나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결국 결혼했다. 처음엔 결혼하고 바로 분가하기로 했었는데 사정이 있었다. 시아버지가 첩이 있어 따로 살고 있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집이 너무 큰 데 식구가 없으니 몇 년 만 같이 살자고 제의했다.
이혼의 위기에서
그런데 그렇게 시댁은 빌딩도 여러 채 갖고 있고 분당이 개발되기 전에 서현동이라는 곳에 정원이 아름다운 크고 근사한 별장도 있었으며 시아버지가 아직 현역 변호사로 활동하는 등 굉장한 부자이긴 했지만 첩과 나가 계셨기 때문에 좀 복잡했다.
그렇게 멋진 집에서 5년을 살고 분가했다. 분가는 친정 옆 동네로 했다. 시댁의 가정사가 복잡한 것과 대조해서 친정은 너무나 인자하신 아버지가 있어 언제나 평화로웠다. 특히 아버지는 손자를 목숨처럼 사랑했다.
이혼의 위기
부잣집 맏며느리라고 부러움을 받고 살던 필자에게 큰일이 일어났다. 상속받은 소공동 프라자호텔 뒤편 북창동에 있던 5층 건물이 넘어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 건물은 시아버지가 죽기 직전까지 변호사 사무실로 쓰고 있었던 알토란같은 건물이었다. 위치가 좋아 건물세도 잘 나오고 필자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다고 표현하며 좋아했었는데 마음만 착한 남편이 사기에 걸려 보증을 서는 바람에 날려 버렸다.
그런 상황에 놓이자 이혼도 고려하게 되고 심각해졌는데 필자는 이혼하지 않았다. 아들을 생각해서 온전한 가정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주변에선 필자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가끔 남편을 구박하기도 하고 화풀이도 하지만 이혼 안 한 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큰 재산을 잃었지만 든든한 시댁과 친정아버지 덕분에 그리 힘들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다. 아들이 잘 자라주었고 키우는 동안 너무나도 기쁘거나 즐거운 일이 많았기 때문에 없어진 큰 재산이 아깝긴 해도 무난하게 살아왔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아주 예쁜 손녀와 돌 지난 손자, 아들, 며느리를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 행복한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큰 불행이 닥쳤다. 남편이 큰 병에 걸렸다. 정말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이다. 투병 중인 남편을 보며 한때 재산을 없앴다고 못되게 굴었던 일도 후회돼 마음이 아팠다. 이런 상황이 되어 보니 유행가 가사가 다 진리로 다가온다. 있을 때 잘하라는 유치한 말이 정말 가슴에 와 닿고 누구에게나 해 주고 싶은 말이다.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소풍 나온 이 한 세상 잘 살았으며 이별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을 갖자고 다짐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시니어를 대상으로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의할 때마다 제주에서 살고 싶은 사람을 조사해 본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제주에서 살고 싶다고 선뜻 대답하는 사람이 뜻밖에 적은데 놀란다. 그때마다 왜 제주에 가서 살기를 꺼리는지 그 이유를 물어본다.
맛난 음식도 매일 먹으면 물리는 것처럼 제주도 그곳에 살면 감동이 반감할 거라는 논리가 그 하나다. 그래서 가끔 여행하는 건 좋지만 가서 살기는 싫다는 것인데 충분히 이유가 되는 것 같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제주의 기후를 들었다. 겨울에 육지보다 따뜻한 건 좋은데 비와 바람이 많고 태풍이 올라오는 길목이라서 특히 서쪽과 남쪽은 살기 좋지 않다는 것이다.
제주가 중국 사람들의 세상으로 변해 가는 것 같고 외국인들의 범죄도 잦아 무서워서 가기 싫다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제주는 오래전부터 중국인들의 투자지로 주목받고 있다. 그들만의 거대한 게스트 하우스가 곳곳에 건설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최근 뉴스를 보니 지난해 제주에 무비자로 입국한 외국인이 60만 명을 넘었고 불법 체류자도 4,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 부작용으로 외국인들의 범죄도 상당히 잦다고 하니 이런 이유도 수긍이 간다. 그 외에 육지로 왕래하기 불편하다든가 의료시설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를 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조금 다른 이유로 제주에서 사는 것을 꺼린다. 우선 그동안 서울에 살면서 형성해 놓은 인간관계를 오프라인으로 계속 유지하고 싶다. SNS가 일반화되었다고 하나 서로 대면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대학교와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모임은 예외로 하더라도 몇 군데 활동하는 포럼의 정기모임, 걷기 행사, 당구 모임, 저자 강연 등에서 만나는 시니어들과 막걸리 나누면서 사는 이야기 하는 것이 좋다. 갑자기 모이는 번개팅도 무료한 일상에서 특별한 활력을 준다. 지하철이 편리한 교대 앞 곱창집이나 사당동 보쌈집이 번개팅 장소로 좋다.
강의 요청을 받을 때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설렘으로 기다려진다. 강의 후에 몇몇 분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교류한다. 때로는 그들로부터 새로운 강의 요청을 받기도 한다.
그림이 보고 싶으면 지하철 타고 인사동으로 간다. 갤러리를 돌고 나서 북촌에서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서 소주 한잔한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영화를 골라 볼 수 있고, 공연티켓을 가끔 선물 받을 때는 정장을 입고 아내와 예술의전당을 찾는다.
봄에는 어린이대공원 벚꽃 비를 맞는다. 여름에는 도봉산 계곡에 앉아 작은 물고기들을 보면서 새소리, 바람소리를 듣는다. 가을에는 낙엽이 흩날리는 창덕궁을 걷는다.
서울에서 이런 일상의 재미를 누리고 살다가 성산포의 일출과 외돌개 쪽빛 파도에 반사되던 보석 같은 햇살, 용눈이 오름을 뒤덮은 억새와 바람, 곶자왈의 검은 바위와 원시림의 습한 향기, 김대건순례길에서의 묵상 등이 지독히 그리운 어느 날 제주행 항공기에 몸을 싣고 싶다. 그 가슴 벅찬 설렘을 위해 제주는 마음 속에 남겨두고 싶다.
사주나 점을 믿지는 않지만, 매번 '무난’, ‘평탄’ 같은 단어가 튀어 나온다. 전반적으로 필자 삶을 돌아 볼 때 과연 맞는 말인 것 같다.
인생 전반의 삶
인생의 여러 중대사가 결정되는 1970년대가 필자 20대 나이였다. 그 시기 대학교에 입학하고 군대에 갔다 오고 취직해서 결혼했으니 말이다. 아들딸까지 낳았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운이 좋았는지 대학교도 단번에 합격하고 군대도 카투사로 갔다 왔다. 취업도 서로 오라는 데가 많아서 골라서 들어갔으니 요즘 청년들에 비하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 직장에서 아내를 만나고 건설회사인 둘째 직장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근무를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스포츠 장갑을 만들어 수출하는 중소기업에 스카우트 되어 임원으로서 12년간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혀 연고도 없던 회사에 기존 임원들보다 10세 연하인데도 젊은 패기로 승승장구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입사 6년 만에 단일 바이어에게 거의 의존하던 매출구조를 미국, 유럽, 내수시장으로 확장해 건전한 포트폴리오대로 만들면서 세계 스포츠장갑 1위 업체로 부상시켰다.
1997년 IMF 금융위기는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스포츠 브랜드 UMBRO 사업에도 직격탄이었다. 미화로 지급해야 하는 로열티와 수입대금도 막대했지만 국내 시장이 초토화되어 더 이상 사업을 끌고 나갈 수 없었다. 결국 경영책임을 지고 퇴사한 것이 21세기를 두 달 앞둔 1999년 10월이었다. 직장 생활 23년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나이 49세였다.
묘하게 퇴직 1주일 후 섬유의날 시상식에서모범경영인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재직 중이었더라면 큰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자리였으나 찜찜하게 퇴직하고 난 처지라서 가족들과 단출하게 자축할 수밖에 없었다. 퇴직했으니 앞으로가 막막했으나 대통령 표창은 큰 용기를 주었다. 뭔가 큰 힘이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표창은 위력을 발휘했다.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KAPPA의 한국 런칭도 그 덕분에 이뤄졌다. KAPPA의 성공 덕분에 JAKO 등 다른 스포츠 브랜드 도입도 수월했다. 비즈니스뿐 만 아니라 각종 서류 심사 때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밀레니엄 시대라는 2000년부터 퇴직 이후의 새 삶이 시작되었다. UMBRO 대표 시절에 여러모로 도와줬던 업자가 동대문 사무실에 나와 소일하라며 권유했다. 그의 사업도 도울 겸 필자 사업으로 스포츠 장갑을 수출하던 시절에 가까웠던 바이어들과 연락하며 지냈다. 주문량이 적은 바이어들은 본사에서도 귀찮아하던 것을 필자가 주문을 대신 처리해줬다. 한 바이어는 당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공식 스폰서가 되면서 대량주문을 해 와서 그때 꽤 짭짤한 수익을 건졌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 미국 경기가 급속하게 하락하면서 이 비즈니스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중국의 저임금을 활용하여 그나마 주문을 소화했었는데 중국의 인건비가 급속하게 올라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여기서 더 비즈니스를 이어가려면 중국보다 임금이 더 저렴한 나라를 찾아다니며 바이어들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했으나 비즈니스는 이쯤에서 접자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인생도 50 줄인데 돈을 더 벌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필자랑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퇴직 대열에 합류하면서 실패하는 사람도 봤고 건강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이 많았다.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인데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뜻 든 것이다. 그래서 자전거, 등산을 비롯하여 건강을 위한 삶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여러 가지 시도해본 결과 댄스스포츠가 가장 잘 맞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댄스 이야기
93년 한국에 댄스스포츠가 체계를 갖춰 상륙하자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했었다. 당시만 해도 댄스스포츠를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곳도 드물던 시절이었다. 독일에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어느 와인 촌 홀에서 백발의 할아버지와 고등학생은 되어 보이는 소녀가 같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완전히 매료된 충격적인 일이 기억났다. 그 춤을 제대로 배워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몇 몇 선생을 거치도 갈증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고는 10년 만에 다시 댄스스포츠에 빠져 들었다. 집 근처 올림픽공원 스포츠교실에서 라틴댄스를 가르치는 데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한번은 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댄스 경연대회를 했는데 하루 종일 예선부터 뛰어 최종 챔피언으로 등극하는 일이 생겼다. 춤에 대한 재능을 처음으로 확인한 일이다. 다음 해에도 챔피언 자리를 유지했다.
이 정도 했으면 필자도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기대학교 사회교육원의 ‘댄스스포츠 코치아카데미 코스’에 도전했다. 1년 만에 1, 2급 자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때 올림픽공원에서 가르치던 선생이 영국 유학을 권했다. 댄스스포츠의 본고장은 영국이며 거기 가서 공부하고 국제지도자 자격증을 따가지고 오면 우리나라 댄스 역사에 드문 일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영국에 유학할 준비로 개인 레슨을 받으며 국제지도자 자격증 코스를 공부했다. 6개월 공부 후에 영국 런던의 유서 깊은 ‘쌤리댄스스쿨’에 갔다. 지도교사로 'Technique of Latin Dancing' 이라는 책을 낸 라틴댄스 계의 전설 월터 레어드의 비서였으며 현존 최고의 지도자 준 먹머르도 여사를 만났다. 2개월간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집중적인 댄스 공부와 연습을 하며 결국 ‘국제지도자 자격증(IDTA:International Dancesport Teachers Association)’을 따 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영국에 가서 이 자격증을 따 온 사람은 몇 몇 댄스 계 원로에 불과했는데 동호인에 불과한 필자가 이 자격증을 들고 들어온 것이다.
개선장군처럼 귀국한 필자 주변에 댄스동호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해서 ‘댄스엔조이’라는 댄스 동호회를 만들었다. 무려 5년 동안 회장을 맡으며 댄스스포츠 동호회를 키웠다. 당시에는 1주일의 거의 절반을 댄스 강습으로 보냈다. 그 과정에 샤리권(권금순)이라는 학원 원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영국에서 귀국 직후 ‘댄스엔조이-라틴댄스’라는 책을 내려고 ‘댄스스포츠코리아’라는 잡지사에 찾아 갔다가 그 자리에서 편집 기자 자리를 제의받았다. 책도 나왔고 3년 후에는 ‘댄스엔조이-
라틴댄스 실전과 이론’, ‘댄스엔조이 – 모던댄스’, ’댄스엔조이 - 즐거운 댄스 라이프‘ 3권을 동시에 냈다. 그리고 10년 후 낸 ’캉캉의 댄스이야기‘까지 내면서 댄스 칼럼니스트로서 자리를 굳건히 했다. 특히 ‘댄스스포츠코리아' 잡지사의 기자 자리는 필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댄스 잡지는 드물지만 국내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댄스 잡지라서 권위가 있었다. 국내 댄스 경기 대회나 행사에는 언론사 자격으로 VIP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국내 댄스 계 중요 인사들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세계적인 챔피언들을 인터뷰하여 기사화할 수 있었다.
댄스 인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얘기하자면 장애인들과의 만남을 빼 놓을 수 없다. 원래 장애인들과의 만남은 94년 ‘댄스 동호회’에 나온 시각장애인들을 통해서였다. 몇 사람을 가르치고 있는데 혼자는 힘들다며 도와달라고 하여 갔던 것이다. 자이브를 중심으로 가르쳤는데 시각장애인들도 곧잘 했다. 처음에는 물론 막막했으나 그들도 노력했고 필자도 가르치는 노하우가 생겼다. 그들과 함께 여성의날 행사에 오프닝 무대에서 춤췄는데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였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도 함께 오프닝 무대를 자이브로 장식했는데 그때는 당시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참석했었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 객석을 보니 대부분 시각장애인이라 보이지도 않는데 춤을 춰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시큰둥했던 필자가 부끄러웠다. 보이지도 않고 댄스화 갈아 신기도 귀찮으니 운동화 신고 그냥 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 파트너는 진지하게 임했다. 끝나고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사진을 찍어 봐야 볼 수가 없는데 왜 찍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이들은 정상적인 시력을 가졌다고 했다. 이들과의 만남은 여기까지였다. 그 당시만 해도 장애인댄스대회가 없어 더 이상 끌고 나가기 어려웠던 탓이다.
또 다시 10년만인 2013년 서울시장애인댄스연맹에 코치 겸 선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장애인댄스스포츠연맹이 정식으로 발족하여 전국적으로 경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너무 나약해서 안마사 시험에도 떨어졌다는 40대 할머니를 파트너로 하여 선수로 출전했다. 처음엔 왈츠 단일 종목으로 동메달을 겨우 땄는데 스탠더드 5종목을 다 연습하고 나니 금메달까지 딸 수 있었다. 한 대회에 3개 부문까지 출전할 수 있으니 출전만 하면 메달을 수확했다. 이 할머니 파트너가 은퇴하고 나서 만난 파트너 중 최고였다. 나이도 40대라 젊고 체형이 날씬했다. 국내 ‘스타킹’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로 플라멩코 춤에서는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이 파트너 덕분에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장애인 문화예술 대상’에서 대중무용 댄스스포츠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장애인 댄스경기 대회는 대개 오전 중에 끝나지만 이 파트너와는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댄스경기대회에도 출전했다. 2014년 여수에서 벌어진 ‘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는 오전에 장애인 부문에서 3경기를 뛰고 오후에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장년부, 일반부, 아마추어부까지 결승에 올라 나란히 우승, 우승, 준우승하는 쾌거도 이뤘다. 스탠더드 5종목을 뛰려면 대단한 체력이 요구돼 세 부분을 연속해서 출전하는 선수도 처음이라며 화제가 되었다. 이 파트너도 건강상 그만두게 되어 아쉬웠다.
2015년에는 새 파트너를 만나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뤘다. 비록 동메달이나 덕분에 서울연맹이 ‘댄스스포츠 전국대항전’에서 간발의 차이로 우승할 수 있었고 전체 장애인종목에서도 만년 단골 우승인 경기 다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글쓰기
필자에게 글재주가 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국어시간에 다음 배울 것을 짧게 축약해 오는 ‘짧은 글짓기’에서 늘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받아쓰기는 늘 만점이었고 국어 성적도 거의 만점을 받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 그래서 글쓰기가 좋아졌다. 그 당시만 해도 책은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를 많이 본 것이 어휘 구사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는 전국적으로 글쓰기 열풍이 불어 학교 내에서는 물론 서울 단위에서도 ‘어린이글짓기대회’가 열렸다. 당시 대회에서 필자는 후배 여학생과 단 둘이 입상하고 돌아와 교내 스피커를 통해 방송도 하고 전체 조회 시간에 교단에 서서 수상작 낭독도 했다. 그 인기 덕분에 전교어린이회장까지 했다.
중학교 때는 문예반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당시 ‘학원’이라는 학생 잡지에서 하는 ‘학원문학상’에 응모했더니 수상했다. 당시 학교 정문에 플래카드가 붙기도 했다. 당시 그림도 좋아해서 미술반에 들어갔으나 저녁 식사도 못 한 채 매일 밤 10시까지 버티기가 힘들어 그만 두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중학교 때 못한 그림 공부에 미련이 남아 사진반에 들어갔다. 그림은 한 장 그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사진은 셔터만 누르면 되니 적성에 맞았다. 예술사진이니 작품성도 있어야 하고 설명과 제목도 멋지게 달아야 하는데 그림과 글쓰기에 대한 갈증을 한꺼번에 충족시켜주는 것 같아 한동안 사진에 빠져 들었다.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도 구성해서 활동했다.
사진에 꽂혀 있떤 필작 다시 글에 손을 댄 것은 40대 초반으로 직장에서 자리가 잡혔을 때였다. 젊었을 때부터 외국을 자주 다니면서 느낀 점들을 신문에 독자 투고했는데 인정받았다. 1000여 편의 독자투고 내용을 책으로 3권 냈고 서울 서초구청장으로부터 기록인증서도 받았다.
독자투고는 글이 짧아 하고 싶은 말을 간단명료하게 담아내야 했다. 그러나 글이 길지 않아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댄스 동아리를 만들면서 이 갈증을 충족할 수 있었다. 당시 인터넷에 댄스 칼럼을 길게 올린 것이다. 이 칼럼은 인기도 높었다. 그 글들을 모아 2004년 영국 유학 후 ‘댄스엔조이’라는 책을 4권 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유어스테이지’에 시니어 리더로 합격하면서부터였다. 블로거를 모집했는데 당시 필자는 블로그가 뭔지도 몰랐으나 그간 인터넷에 올린 글들 덕분에 합격한 것이다. 그때부터 ‘캉캉의 글모음’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었다. 이 블로그로 2012년에는 ‘대한민국 100대 블로거상’도 받았다. 필자 블로그는 하루 방문객 1500명 내외이더니 2016년 5월 드디어 누적 방문객 300만 명을 돌파했다.
2010년에는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한 ‘액티브 시니어 자서전 공모전’에서 우수상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1등상을 수상한 사람은 필자보다 10세 이상 연배로 전쟁도 직접 겪었고 인생을 모범되게 살아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방송, 잡지 등에서는 필자에게 출연 교섭을 많이 해왔다. 춤이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블로그의 힘은 대단했다. 필자 블로그를 검색한 방송, 잡지 등에서 섭외가 많이 들어 왔다. ‘시니어 파트너즈’에서 지원해준 덕도 많이 봤다. 한국의 모든 공중파에 나갔고 케이블 TV까지 합하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출연했다. 한 방송국에서는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며 무려 10일간을 매일 녹화하기도 했다.
블로그는 현재 중요한 일과 중 하나이다. 하루에 글 하나는 꼭 올린다. 글을 쓸 때 가장 마음이 편하고 생각이 정리되어 힐링되는 것 같다. 자꾸 희미해지는 기억력을 붙잡으려면 일상이든 독후감이든 영화 감상문이든 바로 써둬야 한다.
사회 활동
초등학교 때 어린이회장을 한 이래로 감투 복은 있는 모양이다. 대학 시절에 4학년이 관례로 맡던 사진반 회장을 2학년 올라가자마자 맡더니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를 결성하여 회장단을 꾸리기도 했다. 군 생활 때도 동기들과 선배들이 즐비한데도 중대 전체의 선임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참여하는 곳마다 크고 작은 모임에서 회장을 많이 했다. 리더십도 있는 편이지만 말이 많지 않아 카리스마가 있다고 한다. 틀이 좋다거나 돈이 많거나 말을 잘하는 일반적인 요소는 없으나 중심을 잘 잡고 전체와 미래를 보는 시각이 있다는 평이다.
퇴직 후 삶은 IMF 외환위기로 고통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직장 생활 때 인적 관계는 퇴직 이후 거짓말처럼 멀어져 갔다. 새로 새로운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댄스스포츠에 집중한 덕분에 ‘댄스엔조이’라는 동호회를 만들었고 5년간 회장을 맡았다. 동호회를 운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유어스테이지’에서 공모한 시니어 리더들의 모임에서도 5년째 회장을 하고 있다. 회장 맡은 것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회장을 맡은 덕분에 책임감을 가지고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는 것이 좋다. 그런 면에서 ‘브라보 마이라이프’ 기자 활동과 새로 맡은 운영위원회장 자리도 기대가 크다.
요즘은 유난히 발이 넓은 동네 친구 덕분에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그 덕분에 ‘KDB 시니어 브리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동문회 등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협회 자체의 행사나 프로그램도 많다.
강의도 자주 나간다. 퇴직을 앞둔 우리은행 지점장급 직원들을 대상으로 생산성본부에서 해마다 인생 이모작 강의를 했었다. 200명을 대상으로 하루 8시간 하는 강의이다. 퇴직 후 16년차에 들어섰으니 인생 이모작 선배로서 그간 경험한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한 경험을 전해주는 강의이다. 노사발전위원회에서도 공모전 입상을 한 덕분에 비슷한 내용으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도심권 이모작 센터’’, ‘사회연대은행’ 등에서도 강의를 해오고 있다. 댄스스포츠 강의도 하지만 홀로 살기, 파워 블로거 되기 등 테마도 다양화하고 있다.
필자 스케줄 표를 보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꽉 차 있다. 동호인들끼리 댄스하는 날, 노래배우러 가는 날, 책 만들러 가는 날, 댄스 동아리 강의 하는 날, 장애인 댄스 교습 및 댄스 선수 연습하는 날이 고정되어 있다. 일요일만 비워두고 있다. 그렇다고 전혀 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그런 스케줄은 대부분 저녁 모임이거나 한 나절 정도 걸리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다. 특히 남는 시간은 집 근처에 공유사무실이 있어 글쓰는 데 활용한다.
어떤 면으로 보면 너무 바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매력 없는 남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여유 있게 차 한 잔 하면서 같이 대화라도 나누고 싶은데 필자처럼 바쁜 사람에게 전화했다가는 바쁘다며 거절당할 게 빤하다는 것이다.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가까운 사람들 인터뷰가 있었다. 필자도 동석한 자리이므로 좋은 대답을 기대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절대 바쁜 척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전에는 댄스 하러 가는 날이면 다른 스케줄은 아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댄스는 어차피 여기저기서 하고 있고 한두 번 쯤 빠져도 큰 문제 아니니 결석을 택한다. 다른 고정 스케줄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가 60대 중반에서 70대 중반이라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런 것 같다. 아직 건강하고 활동력도 있다. 노후 대비 경제력을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도 다행이다. 사주에서 보듯 무난하고 평탄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인생의 정점에서 ‘브라보 액티브 시니어 인생’을 사고 있는 셈이다.
밥만 해 먹는 여자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폐업 하고나서 꼭, 10년! 집에서 밥만 해먹고 사회활동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밥만 해 먹으면서 가정 살림만 한다고 하면 누구든지 한심하게 본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사회활동을 해야만 훌륭하고 대단하게 여겨 주는 것이 요즘 사회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집에만 있다. 그렇다고 살림살이를 반짝반짝하게 닦아 빛이 나게 하며 살아가는 주부도 아니고, 요리솜씨가 뛰어나 특별하게 내세울 나만의 ‘필살기 메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살림도 대충하고, 청소도 대충하면서도, 남들처럼 취미하나도 계발하지 못하고 무취미로 살아가는 ‘게으른 은둔자’다.
게으른 은둔자
사람들은 동호회다, 친목계다, 동창회다 해서, 갖가지 모임을 만들어 가며 사람들을 사귀고, 만난다. 그러나 필자는 집에만 있어도 세상 편하고 좋다. 밖에 나가는 일은 꼭 필요 할 때만 나간다. 병원갈 때, 은행이나 관공서에 볼 일이 있을 때, 가끔 언니들이나 지인을 만날 때, 교회에 갈 때, 그리고 대부분 반찬거리 사러 대형마트에 갈 때뿐이다. 집에 화수분이라도 하나 있어서 반찬거리가 저절로 생겨난다면 외출 할일도 없을 터이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화수분이 내게는 없다. 그래서 주 1회 정도, 반찬거리 사러 할 수 없이, 사람이 북적거리는 대형마트엘 간다. 사람 많은 곳에서 휘둘리다가 오면, 너무 피곤해 초주검이 되곤 한다.
집에만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필자에게 묻는 말은 하나같이 ‘심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천만의 말씀! 그것은 사람들이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이렇게 살아도 하루 24시간이 항상 모자란다. 재미있는 영화보기, 다양한 프로의 TV시청, 그리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책들을 읽기에 하루는 너무나 짧다. 그러니 살림을 대충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필자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것보다 책이 더 좋고, 영화나 TV가 더 재미있다. 이렇게 은둔자가 된 것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답답해하는데, 이런 은둔을 반기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다. 필자에게 마음 놓고 밥을 시켜 먹으려는 사람, 바로 남편이다.
구석기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하루는, 오전에 야쿠르트 영업사원이 우리 집의 벨을 눌렀다. 문을 열고 나가니 깜짝 놀란다. 벨을 눌렀기에 나간 것뿐인데 왜 필자를 보고 놀라는 것인지 물어 보았다. “이 시간에 집에 계시네요?” 마치 신기한 뭔가를 보듯 한다. 내가 물었다. “이 시간에 우리 집에 내가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해요?” 야쿠르트 판매사원이 대답했다. “아니요, 요즘은 이 시간엔 집집마다 주부들이 나가고 집에 없거든요. 돈을 벌기 위해 나가든지, 취미활동을 하러 나가든지, 다들 나가고 없는데, 그런데 집에 계신 분도 있네요” 그녀는 집에 있는 필자가 마냥 신기한가보다. 마치 구석기사람이라도 본 듯이 그런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렇게 이상한가?’ 하긴 요즘은 모두들 바쁘게 살아가는데, 혼자서만 한없이 늘어져 있다는 생각도 가끔 하긴 했으니까, 야쿠르트 판매사원의 말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서 밥을 열심히 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것 까지는 아니라도, 당당한 일임엔 틀림이 없다. 그런데도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야쿠르트 판매사원의 말에 필자는 은근히 민망하고 부끄러운 생각까지 든다.
경제활동을 꿈꾸며
며칠을 두고 은둔생활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나이가 더 많아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오기 전에, 어서 털고 일어나 경제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인들은 취득하기 어려운 자격증을 묵혀 두는 것이 너무 아깝다고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다시 개설하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건 부동산 중개업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많이 걸어 다녀야 하고, 누군가 에게는 전 재산일 수도 있는, 고객의 큰 재산이 오가는 일을 해야 하므로 순발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직업이지, 시니어들이 할 수 있는 직업은 절대 아니다. 또, 멀지 않아 대기업과 외국기업들이 부동산 법인을 만들어서 부동산 중개업시장에 진입하는 날이 다가 올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부동산중개업의 경기가 좋지 않을 때이고 보니, 더더욱 사무소 개업은 할 수가 없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인터넷에 들어가 ‘서울시일자리플러스센터’에 구직 신청을 했다.
취업교육을 받다
하루는 ‘서울시어르신취업훈련센터’에서 취업교육을 받으라는 문자가 왔다.
취업교육을 받으러 가보니까, 여러 가지 교육이 다양하게 있어서 그때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들꽃 가드닝 교육, 동년배 상담가 교육, 도슨트 교육, 취업설계아카데미 교육등 그 외에도 다수의 교육을 더 받았다. 교육을 받고나서 그걸로 취업을 해보려고, 내게 맞을 것 같은 교육만 골라서 받았다. 그러다보니, 1년이 어느새 꿈결같이 흘러갔다.
취업을 못해 크게 실망
교육을 받고나면, 처음에 내가 그 교육을 선택 했을 때와는 결과가 달랐다. 필자가 직업으로 가지기에는 힘들고, 자신도 없고, 취업할 분야를 선택할 수가 없었다. 실망도 많이 되고,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교육 받을 때, 강사들이, 정말로 재미있고, 취미로 즐길 수 있는 분야를 직업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이 재미있어야 싫증 내지 않고 오랫동안 할 수 있을 테니까, 뭘 잘 할 수 있을지 꼭 취미부터 찾으라는 것이다. 나는 맞는 취미를 못 찾아서 지금까지도 취미생활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취업도 어려운가보다. 취업을 포기할까? 아니면 진로를 바꿔 볼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 결과, 진로를 ‘상담’ 쪽으로 바꾸어 보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적성 진로검사를 받다
센터에는 그만 다니려고 상담분야의 교육기관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였는데, 센터 강사님이 ‘취업설계아카데미교육’을 받아 볼 것을 적극 권유 하셨다. 뿌리칠 수가 없어서 이번 교육만 한 번 더 받아보고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하고, 교육을 받았다. ‘취업설계아카데미교육’은 직업상담 분야의 프로그램이 들어 있어서 ‘진로검사’도 받게 되었다. 이때는 이미 상담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울어 있어서 결과가 상담관련분야로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술적, 진취적, 탐구적’ 뭐 이런 단어만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상담분야로 전환 하려던 계획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갑자기 앞이 캄캄하고 막막해졌다. 지금 까지는 예술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 온 사람인데, 예술이 왜 별안간 튀어 나오느냐 말이다. 상실감에 허탈해하는 이 모습을 본 담당 복지사가 ‘본인이 좋아하는 교육만 받지 말고, 관심 없는 분야도 골고루 받아 보면, 의외로, 관심 없던 분야에서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을 수도 있다’고,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었다. 생각해보니 복지사의 조언이 정말 맞는 말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교육을 골고루 다 받아 보기로 결심 했다.
방송인 교육을 받으며
‘취업설계아카데미교육’을 마치고 났을 때, 마침 ‘방송인교육’의 교육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복지사의 조언대로 평소엔 전혀 관심조차 없었던 ‘방송인교육’을 신청했다. 방송인 교육은 시니어 연기자, 모델, 리포터와 같은 방송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전문직 교육이다. 연기엔 관심 없지만, 커리큘럼을 살펴보니 방송기사작성과 리포터교육은 글쓰기가 있어서 받아보면 좋을 것 같았다. 리포터교육을 받으면서, 자기 소개하는 글을 발표했을 때와 리포터 기사작성을 했을 때 두 번 모두 강사에게 칭찬을 들었다. 고칠 것이 하나도 없고, 지금 바로 현장에 가서 리포터를 해도 되겠다고 했다. 큰 박수도 두 번이나 받았다. 도슨트 교육과 시니어 기자교육을 받을 때도 같은 칭찬을 받았다. 이렇게 여러 번 강사들에게 칭찬을 듣고 보니, 교육생들 사이엔 필자가 글을 잘 쓴다고 소문이 났다.
시니어 잡지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기자가 되다
시니어기자교육이 끝날 무렵에, 마침 경제신문 ‘이투데이’에서 만들고 있는 시니어잡지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서 시니어기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그 모집광고를 보고, 필자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바로 이거다. 여기서부터 시니어의 새 삶을 시작해야지!” 필자는 그 길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시니어기자 지원서를 냈다. 운이 좋게도 합격되어서, ‘기자’가 되는 어릴 적 꿈은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시니어기자인 ‘동년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글쓰기로 삶을 꽃 피우리라!
글을 잘 쓴다고 소문이 나고 보니, 소문 난대로 정말 글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글쓰기를 해볼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가 하나 또 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문예반은 아니지만, 방과 후에 집에서 원고지를 묶어놓고, 혼자서 취미로 틈틈이 시를 썼다. 그 덕분에 중학교 3학년 때는 학교 대표로 뽑혀서 대학교 백일장에 나가 장려상도 탔다. 상을 타고 보니, 시인이 되어서 기자를 해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건 언니들이 보던 여성월간지를 보고서 부터였다. 시인인데, 유명 인사를 인터뷰하러 다니는 걸 읽어본 후로는 필자도 ‘시인이면서, 기자가 되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생각했다. 그 티끌만한 작은 경험을 움켜지고, 지금부터라도 ‘글쓰기’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시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또, 시인이 되지 못하면 어떤가! 글쓰기를 하는 순간들이 행복한 날들이 될 것이고, 필자의 남은 삶을 아름답게 꽃피워 낼 것이다. 이 화려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삶의 노을이 지기 전에, 서둘러야겠다.
소녀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은 대구시 삼덕동이었다. 그곳 삼덕동의 중앙초등학교에서 4학년까지 다니다가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와서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교동초등학교로 전학하던 그때가 소녀에게는 서울 사람의 시작이었다.
어린 시절 삼덕동 소녀의 집에는 동네에서 제일 큰 마당이 있었고 여름에는 그 마당 한가득 형형색색의 이름 모를 꽃이 피고 졌던 기억들이 어렴풋하다. 밤중에 화장실 가는 일이 큰일 중 큰일이었던 기억, 화장실에 가기 위해 누군가를 깨워서 같이 대청마루를 지나칠 때 발바닥에 닿았던 얼음장 같았던 마루 촉감의 기억도 아직 남아 있다.
또 겨울 어느 날 밤 소녀의 집에서 그리 가깝지 않다고 생각했던 성당의 뾰족지붕이 겨울밤 투명한 마루 유리창을 통해 한눈에 들어왔던 기억도 뚜렸하다. 뾰족지붕에 돌려져 있는 색등 때문에 선명한 삼각형이 된 성당 지붕은 심지어 반짝이기까지 하면서 어린 소녀의 눈에 요지경처럼 들어왔다. 소녀의 집과 성당 사이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던 시절 반짝이는 삼각형 지붕은 소녀에게는 까만 밤하늘의 디즈니월드 이상이었다. 발이 시린 줄도 모르고 오래오래 서서 바라본 반짝이던 성당 지붕 크리스마스 불빛의 황홀했던 환상도 뇌리에 깊이 박힌 추억이다. 싸인지라고 불렀던 파스텔톤 빛의 색 도화지를 두 살 위 언니를 졸라 겨우 얻어냈을 때의 기억. 아마 소녀는 죽을 때까지 이 보잘 것없는 기억들의 불씨를 마음속 깊이 살려 둘 예정이다.
소녀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하시던 일을 서울로 옮기면서 소녀의 어머니, 아버지는 1년 이상의 원조 주말 부부를 하시다가 아버지의 인솔 하에 대식구 모두가 소녀가 4학년이 되던 해 서울로 이사 왔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하여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기를 원하신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을 소녀는 나중에야 해본다.
아버지가 서울에 가셨던 어느 여름날 삼덕동 시절. 소녀는 할머니, 고모, 어머니가 대청마루에서 대수롭지 않게 하는 지나간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소녀가 우연히 들은 그 얘기는 이랬다. 엄마가 소녀의 언니를 막 뱃속에 가질 때 한국전쟁이라는 것이 일어났다. 당시 군대 사정은 잘 모르지만 소녀의 아버지는 3대 독자여서 전쟁터로 나가는데 면제를 받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1.4후퇴 이후 인민군이 부산까지 내려오면서 전황이 매우 급해졌다. 장소 불문하고 아무 준비 안 된 사람이라도 눈에 띄는 민간인 남자는 군복도 없이 삼엄한 감시하에 무조건 전쟁터로 차출됐다는 것. 그런데 그즈음 외출 중이던 소녀의 아버지도 영문을 모르는 채 그 대열에 끼게 된다.
군인도 아닌 오합지졸 민간인 행렬은 전쟁터로 향하는 첫발을 떼면서 삼덕동 집 앞을 지나가게 된다. 그곳을 지나가다 소녀의 아버지는 윗옷 호주머니에 단단히 꽂아뒀던 ‘보물 1호’ 파카 만년필을 집 담장 안으로 던져 넣었다. 담장 밑에 던져진 소녀 아버지의 만년필을 발견하고 사태를 짐작한 남은 식구들은 모두 패닉에 빠진다.
낮에 붙들려 걷기 시작한 행렬은 만 하루 이상을 걷다가 자정이 되어갈 무렵 이름 모를 곳에서 잠시 쉬게 된다. 잠시 후 곧장 전쟁터로 가서 군복도 없이 인민군의 총알받이가 되든, 잘못되면 국군에게 총살당하더라도 이 대열에서 빠져나와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 선택이 둘뿐인 찰나의 순간 수많은 생각을 했을 소녀의 아버지는 후자를 선택한다. 칠흑 같던 밤 행군을 잠시 멈춘 사이 아버지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다 다음날 밤 마침내 불빛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퉁이마다 총을 들고 보초 서고 있는 군인을 만나게 된다. 아무 결정권이 없는 처음 만난 군인은 소녀의 아버지를 미군에게 데리고 간다. 모든 각오를 하고 있던 아버지는 있는 그대로 얘기하게 된다. 당시 영어가 신통치 않았을 아버지와 미국 사람이 어떻게 대화가 통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버지는 자신의 민간인 신분과 산달이 가까운 아내 얘기를 미군에게 하였다. 아버지와 뜻이 통한 미군은 아버지를 통과 시키고 집으로 돌아가는 곳곳에서 만나게 될 보초를 통과할 수 있는 메모까지 써준다.
군인이 아니었던 아버지는 난생처음 만난 외국 군인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소녀의 가족은 건재할 수 있었으며, 소녀도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갓 여고를 졸업했던 20세 남짓 된 소녀의 고모는 어느 날 외출에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뜬금없이 붉은 완장을 두르고 집으로 들어와 식구들을 기겁시켰던 얘기도 소녀는 곁들여 듣게 된다.
생각해보면 당시 사람들은 모두 2년 전에 상영했던 영화 ‘국제극장’의 주인공인 것만 같다. 이데올로기가 뭔지도 몰랐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몰랐을 시대의 사람들이 겪었던 역사의 환란.
초등학교 시절 ‘상기하자 한국전쟁'의 달을 맞아 글짓기, 포스트 그리기 시간이 돌아오면 호국 영웅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듣는다. 그러나 겪어보지도 못한 소녀 가족 환란의 이야기는 소녀에게 혼자만의 비밀이 되어 시시때때로 그 비밀과 싸워야 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사회의 규칙에 조금씩 눈 떠가며 민간인이었던 아버지의 상황이 이해된 소녀는 비로소 혼자의 비밀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이제 할머니가 된 그때 그 소녀는 지금 루마니아 작가 콘스탄틴 게오르규가 쓴 장편 소설 ‘25시’를 생각해낸다. 소녀는 중학생 어린 나이에 명동성당 앞 중앙극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이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었을 때 읽어본 소설 ‘25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었다.
게르만도, 유대인도 아니고 아무런 이데올로기도 가지지 않은 루마니아 시골의 순박한 농부 요한 모리츠와 그의 가족이 역사 속의 희생물로 바쳐져 버린 슬픈 비극의 운명이 떠오른다. 요한 모리츠는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유대인, 연합군, 다시 미ㆍ소의 소용돌이 속에 끝없이 갇혀버린 어이없이 허무한 인생의 이야기지만 요한 모리츠, 그의 이름은 온갖 강대국 사이에 끼어 고난의 운명에 처하는 약소민족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지금 할머니가 된 그때 그 소녀는 또다시 돌아온 6월에 이제 모두 돌아가시고 안 계신 소녀의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 철없이 붉은 완장을 차고 들어와 식구를 놀래게 했던 고모, 그들이 60년도 훨씬 전에 걸어왔던 그 길과 혼자 간직했던 비밀들이 아주 오랜만에 생각이 나 아무도 몰래 그 시절 그 소녀의 해맑은 웃음을 다시 한 번 만들어 본다.
23년 전 필자 가족은 가까운 친지들과 사이판, 괌으로 3박 4일 휴가를 갔다. 모처럼의 해외여행이라 세 가족은 모두 웃고 떠들며 매 순간을 만끽했다. 그렇게 꿈 같은 3박 4일이 끝나고 마지막 날 비행기를 타기 위해 시간에 맞춰 괌 국제공항으로 나갔다.
그런데 즐겁던 여행은 그때부터 배배 꼬이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연발한 것이다. 두 집 아빠들은 직장 때문에 반드시 한국으로 가야 했다. 다행히 다른 비행기 편이 있어 두 아빠와 한 가족은 먼저 떠났다. 그러나 필자 가족 모두와 다른 한 가족 일부는 덩그러니 남게 됐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필자 일행은 괌에서 하루를 더 자게 됐다.
다행히 항공사가 호텔 방을 제공했다. 그래서 필자 일행은 별 불만 없이 호텔로 들어가 각자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필자도 샤워기를 틀어 공항에서 대기로 생긴 피로를 풀었다. 그런데 한참 샤워하고 있던 그때였다. 갑자기 샤워기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몸도 기우뚱거렸다. ‘쾅’하는 기분 나쁜 소리도 들렸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밖으로 나가려는데 몸이 휘청거려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남편이 소리 질렀다. “다들 엎드려! 바닥에! 책상 밑으로 들어가! 지진이다. 지진!” 머리털 나고 처음 겪는 지진이었다. 알몸으로 후다닥 바닥에 엎드렸다. 엎드리자마자 TV가 ‘탕’하며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벽에 붙은 액자도 납량영화의 한 장면처럼 혼자서 ‘부르릉’ 소리를 냈다. 엎드렸는데도 몸은 계속 이리저리 굴렀다.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며 눈을 감은 채 작은 아이만 찾아댔다. 지진으로 정전이 됐는지 호텔 방은 전기가 다 나가 완전히 암흑천지로 변해 버렸다. 그렇게 공포의 시간이 1~2분가량 지났을까? 남편은 다시 소리쳤다. “다들 밖으로 나가!”
헐레벌떡 일어나 공포심에 계속 떨리는 손으로 옷을 대강 걸치고 작은아이 손을 꽉 붙잡고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작동이 멈췄다. 다시 비상구 계단을 찾은 뒤 계단을 통해 단숨에 1층 로비로 내달렸다. 9층에서 1층까지 1분이나 걸렸을까? 말 그대로 초특급 스피드였다. 삶을 향한 투쟁으로 상기된 얼굴과 헐떡거리는 숨소리였지만 모두가 살아서 다시 상봉했다.
이미 로비는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알몸인 채 아랫도리만 손으로 가리고 있는 구레나룻이 수북한 중동계 사람, 젖을 물리다 내려왔는지 앞가슴을 풀어헤친 채 아기를 안고 있는 백인 아낙네 등 그야말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다. 지진이 지나간 후 곧 커다란 해일이 닥칠 거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일념에 남편은 전화로 택시를 찾았다. 다행히 한 택시기사가 연결돼 공항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공항 가는 길은 난장판이었다. 배가 뒤집혀 육지로 올라와 있었고 땅이 갈라져 차량이 처박혀 있었다. 필자 가족은 이런 아비규환 속을 뚫고 공항에 도착했지만 헛수고였다. 이미 공항도 닫혀 있었다.
필자 가족은 할 수 없이 공항 문 앞 처마가 있는 쪽에 구해 온 비닐을 깔고 앉았다. 공항이 다시 정상화되면 언제라도 떠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들이 죄다 살아남기 위해 자기 나라말로 지껄여대는 바람에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여기선 못 있겠다 싶어 남편을 호텔 찾으러 보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다시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았다.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낡디낡은 숙소였으나 가장 안전하다는 내륙에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론 이곳에서도 한숨도 못 잤다. 지진 공포 때문에.
다음 날 괌 당국은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공지했다. “하루 더 묵어야 한다”는 것. 당국은 대신 고급 일본호텔로 필자 가족을 안내했다. 그곳은 모든 물품이 지진을 대비해 붙박이로 튼튼하게 붙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하고 안전한 호텔이라도 몸이 둥둥 떠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느낌은 떨칠 수가 없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사고가 가져다준 트라우마였다.
그렇게 삶과 죽음의 갈림길 속에서 이틀 밤을 새운 뒤 다음 날 드디어 고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필자 가족은 기내에서도 속이 울렁거렸다. 죽음의 문턱이 그렇게 후유증을 남겨 줬으나 공항에서 마중 나온 다른 가족들과 만나선 오열이 아닌, 한 줄기 눈물만 흘렸다. 기다린 그들의 아픔도 알기 때문이다. 5박 6일 유난히 길었던 ‘죽음 체험 여행’. 다시는 외국여행 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머리 숙여 신에게 깊이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