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간 얼음에 깡통 단팥과 연유를 뿌려 만든 옛날식 팥빙수는 최고의 여름 간식이었다.
근래엔 망고나 멜론, 딸기 등을 넣은 과일빙수도 인기지만, 단팥이 주는 담백한 달달함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요즘은 공산품이 아닌, 매장에서 직접 삶은 팥을 사용하는 곳이 빙수 맛집으로 뜨고 있다.
◇ 장꼬방: 달지 않고 부드러운 가마솥 단팥빙수
전라도 사투리로 ‘장독’을 뜻하는 ‘장꼬방’은 팥빙수(7000원), 단팥죽(7000원), 찹쌀떡(1500원)만을 판매하고 있다. 팥을 이용한 세 가지 메뉴에만 집중해 단순하지만 깊은 맛을 낸다는 점에서 장꼬방을 찾는 손님들은 ‘믿음직스럽다’는 반응을 보인다. 국내산 팥(강원도 홍천), 밤(충남 공주), 찹쌀(경기도)을 사용하고, 방부제나 첨가물을 일절 넣지 않는다. 매장 한쪽에서는 팥을 삶는 가마솥 두 개와 주재료로 쓰이는 팥과 찹쌀이 놓여 있어 먹는 음식의 재료와 조리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팥빙수에 들어가는 팥은 매장에서 직접 정성껏 삶는데 단맛이 덜하고 부드럽다. 우유 얼음을 사용하고 고명은 팥과 채를 썬 생밤을 올린다. 투박하게 맛을 낸 팥빙수는 놋그릇에 담겨 놋수저와 함께 나온다.
주소 서울특별시 서초구 강남대로61길 27
영업시간 09:00~22:00 연중무휴
문의 02-597-5511
◇ 소적두(小赤豆): 건강한 팥 디저트를 다양하게 즐기다
‘작은 빨간 콩’이라는 뜻의 소적두(小赤豆)는 팥을 이르는 옛말이다. 가게 이름처럼 팥을 주재료로 내세운 곳이기 때문에 팥빙수(소 7000원/대 1만3000원)를 비롯한 단팥죽(7000원), 수수부꾸미(2500원), 단팥묵(2500원) 등 다양한 팥 디저트를 맛볼 수 있다. 기본 팥빙수에는 팥과 떡 외에는 다른 고명을 얹지 않아 팥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고명 재료에 따라 유자팥빙수, 흑임자팥빙수, 홍삼팥빙수 등이 있고, 단팥죽은 옹심이를 넣거나(1000원 추가) 무가당(無加糖)으로 즐길 수 있다. 강원도산 팥을 열이 골고루 전달되는 가마솥에 천천히 삶고, 보온·냉 효과가 좋은 방짜유기에 담아 제공한다.
주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로46길 5-2
영업시간 11:00~23:00
문의 02-3443-4433
◇ 통의동단팥: 정성 가득한 손길로 만든 깊고 진한 팥 맛이 일품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통의동단팥’은 매일 매장에서 삶아낸 국산 팥을 맛볼 수 있다. 주인장이 일일이 손으로 정성껏 선별한 달달한 팥과 물을 전혀 섞지 않은 고소한 우유 얼음이 어우러져 만든 진한 팥빙수(6000원) 맛이 일품이다. 곁들여 먹는 찹쌀떡(1200원) 역시 국산 찹쌀가루로 직접 빚어 만들고, 단팥죽(6000원)은 전분이나 찹쌀가루로 농도를 조절하지 않고 팥만 그대로 갈아 만든다. 그밖에 콩빙수(7000원), 인절미(1200원), 약과(1200원)도 즐겨 찾는 메뉴다. 100% 자가제조만을 원칙으로 한다는 주인장의 고집처럼, 믿음과 정성이 담긴 팥빙수 맛으로 서촌(서울 종로구) 인기 맛집 중 한 곳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67-3
영업시간 12:00~21:30(매주 일요일 휴무)
문의 02-722-0044
제주도에는 가끔 갔지만 한라산에 올라 백록담을 못보고 내려오기를 여러 번, 기어코 이번에는 백록담을 보고 오기로 하고 2박3일의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 인생이라는 게 다 그렇 듯, 다람쥐 채바퀴 돌 듯 돌아가는 세상에 늘 퍽퍽하고 지루하기만 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군 시절의 동기인 3부부가 의기 투합하여 꽃향기가 그윽한 5월의 어느 날 제주도로 떠났다. 2박3일 중, 한라산 등반은 두 번 쨋날로 정했다.
상판악에서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한라산 등반!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잠속으로 빠졌들었는데…. 또드락 뚝딱! 또드락 뚝딱… 고요한 아침공기를 깨고 거실 쪽에서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가 아련하게 귓전을 울렸다. 눈을 번쩍 떠보니 창문너머로 환하게 동이 터오고 아직은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주방에서 식사준비를 하는 아낙들의 조용하면서도 부지런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덕분에 아침식사는 걸쭉한 전복죽으로 영양을 보충하였는데, 각자가 한라산 등반을 대비하여 두세 그릇씩을 뚝딱 비워 든든하게 속을 채웠다.
해발 1950m의 한라산 정상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는지 걱정은 태산이면서도 웬 먹을거리를 그리도 많이 준비하였는지? 돼지고기 수육에 홍어회와 양념장류, 각종 나물류, 그리고 금세 지은 밥을 바리바리 배낭에 넣고 그것도 모자라 막걸리에 물까지 챙겨 넣고 보니 배낭무게만 해도 어깨가 묵직하기 그지없었는데, 설상가상 무거운 카메라까지 목에 걸고 보니 아득하기만 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랴! 한창 젊은 시절에는 웬만한 고지는 단숨에 뛰어오르던 역전의 용사들이 아니던가?
한라산 백록담까지 오르기 위해서 성판악코스를 택했는데 성판악코스는 편도 9.6km 이며 보통 걷는 시간만 4.5시간을 잡아 왕복 19.2km로 총 9시간을 걸어야만 하는 험난한 코스였다. 다행히 코스자체가 완만하다고 하여 한결 마음은 놓였지만 그래도 마음은 놓이지를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한라산 등반길, 다행히도 비가 그친 산길에는 시원한 나무그늘과 신선함이 묻어났고 싱그러운 숲속에서 산들산들 바람이 불어와 상쾌하게 발걸음을 시작하였다. 완만한 등산로라고 하지만 제주도 특유의 울퉁불퉁 돌계단으로 이어져 걷기가 만만하지가 않았다.
일행 중, 최 박사는 무릎이 좋지 않아 전 날부터 걱정을 했다. 한라산 등반을 하기 위해 두어 달 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집근처 야트막한 산을 연습 삼아 오르곤 했다는데 딱 2시간만 걸으면 무릎에 신호가 와서 걱정이 태산이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등반이 시작되자 제일 앞에서 씩씩하게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 산비둘기 소리가 산중에 울려 퍼지고 가끔은 까마귀가 머리 위를 빙빙 돌면서 환영을 해주었는데, 일행과 뒤질세라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아낙들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제주도 특유의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삼나무 숲이 나오는데 삼나무 숲을 지나니, 해발 1,140m에 위치한 속밭대피소가 나왔다. 세 부부가 조금씩 떨어져 오르고 있었으니 숨도 고를 겸 선두에서 오르던 팀이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일행들과 합류하기로 하였다.
1차 휴식! 달콤한 휴식이었다. 물도 마시고 간식도 먹으면서 재충전을 하였다.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속박대피소에서 1차 휴식을 취한 후 본격적인 오름이 시작되었다. 끝없이 이어진 돌계단과 중간 중간을 이어주는 데크… 그래도 싱그러운 숲내음과 선들 한 바람, 그리고 환영이라도 하 듯 울어주는 산새소리를 동무삼아 꾸역꾸역 오르고 있었다.
이 시기에 한라산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진달래를 볼 수 있다고 하는 소리를 반신반의 하면서 혹, 멋진 진달래꽃밭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기도 하였다.
육지에서는 이미 져버린 진달래꽃을 정말 볼 수 있을까? 강화도 고려산 진달래 능선에서 보았던 붉고 화려한 꽃잎을 상상하면서 오르다 보니 드디어 진달래 밭에 도착하게 되었다. 진달래 밭 대피소 앞에 배낭을 내려놓고 2차 휴식을 취했다.
데크에 다리를 쭉뻗고 털썩 주저앉아 초콜릿을 먹고 있는 최박사의 모습은 마치 몇날며칠 전투를 하다가 지쳐서 휴식을 취하는 곤궁한 병사의 그 모습이라면 과장일까? 물한모금 마시고 다시 기운을 내서 배낭을 짊어지고 올라선 길에서 저 멀리 옅은 구름에 둘러싸인 한라산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스라이 구름에 닿은 길에는 울긋불긋 등산객들이 행렬을 지어 올라가고 있었는데, 평일임에도 산을 찾는 이들이 이토록 많을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는 60대의 시니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르다가 잠시 뒤돌아보면 짙푸른 녹음이 길게 드리워진 산자락 밑, 서귀포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그 끝에는 일렁이는 검푸른 바다가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수령(壽齡)을 짐작할 수 없는 주목(朱木)이 등산로 양옆으로 이어져 있고 그 중에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폐목(廢木)이 되어 고고하게 바람을 견디어 내는 주목도 있었다. 한라산 정상에 가까워오자 가파른 등산로는 테크로 계속 이어졌고 물밀 듯 불어오는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아! 드디어 백록담이 지척에 보인다.
아! 한라산 백록담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미리 백록담에 도착한 필자는 속속 도착하는 동료들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입구 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곤한 몸을 이끌고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띤 채 드디어 해냈다는 기쁨으로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는 동료들을 일일이 환영하며 사진을 찍었다.
인증 샷을 위해 백록담 표지석 아래로 길게 줄이 이어졌는데, 어찌나 바람이 세게 불던지 황급히 배낭에서 바람막이 옷을 꺼내 입었다. 5월임에도 불구하고 변화무쌍한 날씨가 필자 일행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허둥지둥 인증 샷을 마치고 말로만 듣던 백록담을 보러 조금 위로 올라섰다. 초겨울의 싸늘한 바람이 천둥치듯 불어대는 가운데 백록담을 조망(眺望)할 수 있었으니 역시 변화무쌍한 한라산은 그 높이가 백두산 다음가는 산중의 산인가보다.
바로 밑 양지바른 테크에 배낭을 풀고 가져간 음식들을 꺼내놓으니 이보다 더한 진수성찬이 있으랴! 돼지고기 수육에 홍어, 그리고 막걸리를 곁들인 삼합이 갈증 나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올라오면서 고생담을 비롯한 온갖 이야기꽃을 피우며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던 중에 홀로 쓸쓸하게 앉아서 비스킷을 먹고 있는 외국인 청년을 보게 되었다.
세 남자들은 모두 그를 데려다가 음식을 좀 나누어먹이자고 의견을 모으니 마님들께서는 먹던 음식을 어떻게 권하느냐고 반대의 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언어구사가 무난한 최용호박사가 다가가서 몇 마디 나누고는 그를 우리 자리로 데리고 왔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고 주도해 온 우리들의 캡틴 海松 김금섭 대장의 사위가 미국인이기도 하거니와 우리의 아이들도 미국의 콜로라도주 덴버에 살고 있기에 혹여 마음이 더 쓰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자신의 이름을 ‘마이클’이라고 소개한 그 외국인은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은 스페인 청년이었다. 이것저것 챙겨주니 먹기도 잘하였는데, 아마도 몹시 시장했던 모양이었다. 헌데 그 녀석, 막걸리는 물론 돼지고기 수육을 된장에 꾹 찍어 잘도 먹어댔다.
막걸리 한 잔 쭉 들이키던 마이클이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났다며 데크에 벌렁 나가 자빠졌는데, 어찌하랴! 모두가 달려들어 털이 북슬북슬한 그 녀석의 다리를 붙잡고 마구마구 주물러 주었더니 괜찮아 졌다고 하였다. 입식문화에 익숙한 그가 데크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서 음식을 먹다보니 쥐가 난 모양새다. 어쨌거나 밥과 반찬은 물론이고 이것저것 잘 먹으면서 여간 고마워하던 그가 기념사진을 찍겠다고 하면서 두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 친구를 데려다가 음식을 나누어 먹인 것은 어찌 보면 보잘 것 없는 작은 배려이지만 참 잘한 일인 듯싶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우리가 낮선 외국에 여행을 갔을 때를 생각하면서 작은 관심과 배려의 차원에서 나눔은 역시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몇 번이고 고맙다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그 스페인 청년을 보내고 나니 내려올 일이 꿈만같았다.
드디어 해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일 터, 육십 고개를 넘어 이제 내리막길에 가속을 붙일 시기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한라산 등반. 그 하산 길에서는 피로가 온 몸을 엄습했다. 아침 여덟시에 시작한 한라산 등반은 오후 6시 30분에 모든 동료들이 성판악 주차장으로 되돌아오므로 써 장장 10시간 30분의 고단한 여정이 끝났다. 고단한 가운데서도 모두가 해냈다는 뿌듯함이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언제 또다시 이 곳을 찾을까마는 명산중의 명산 제주도 한라산을 당당하게 정복했다는 은근한 자부심이 샘솟았다. 거기에다가 날씨까지 좋아서 멋진 백록담을 볼 수 있었으니 얼마나 상쾌한지 모르겠다.
우리 인생에 있어 더 이상 젊은 시절은 돌아올 수 없으나 늘 긍정적인 사고로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말 잘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시니어가 되면 반대 상황이 도래한다. “한 번 말하고, 두 번 경청하며, 세 번 감명하라!” 한마디로 말 씀씀이를 확 줄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격언을 무시하고 말만 해대는 친구와 의가 상할 뻔한 적이 있다.
또래 친구로 구성된 산악회는 매달 가족동반 산행을 20년 넘게 하고 있다. 맛난 도시락과 간식, ‘정상주’가 어우러져 1급 호텔 뷔페가 부럽지 않은 산상 오찬이 포인트다. 산상 오찬엔 오순도순 이야기까지 있으니 금상첨화.
그런데 은퇴자가 늘어난 몇 년 전부터 모임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동반하였던 부인들은 늙은 남자 냄새가 싫어 거의 빠지고 시간 여유가 많은 남자만 남아 산에 갔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산행을 힘들어하는 친구가 증가하면서 걷기 쉬운 둘레길을 찾는 횟수가 많아졌다. 도시락 싸기 귀찮아지고 남는 게 시간이니 산상 오찬은 사라지고 하산 후 뒤풀이가 풍성해졌다. 대신 만찬에선 고삐 풀린 망아지들이 ‘무림의 자유’를 차지하여 말 많은 친구가 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술을 즐기는 A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계속 읊어대 모두의 원성을 샀다.
대다수 친구가 고개를 내저었고 분위기는 썰렁해졌다. 알아듣도록 설명하면 고개를 끄덕였다가도 말을 시작하면 제 버릇 남 못 주고 ‘말 폭탄’으로 변하였다. 그렇다고 이를 계속 말리기도 곤란하였다. 사람 숫자가 줄어들면 모임 유지가 안 되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고민이 깊어졌다.
‘말 폭탄’ A에게 시달리던 중 외국생활을 마치고 역이민을 한 B가 나타났다. 외국 이야기를 몇 번 들어줬더니 녹음기가 되었다. 말쟁이가 하나 늘어난 것이다. 그는 조용한 다수가 자기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대책을 찾아 나섰다. 뒤풀이 때면 A·B와 주사파 몇 명을 한자리로 모아서 실컷 떠들도록 멍석을 깔아줬다. 좌석분리 작전은 효과가 있었다. 자리가 떨어져 있는 다른 친구들은 조금이나마 소음 공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구나 몇 번의 모임에서 ‘말 많이 하기’에 승부가 났다. A가 “저 친구에게는 안 되겠다”고 꼬리를 내린 것이다. 소재가 부족한 자기 이야기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때부터 B가 이야기를 주도하고 A는 묵묵히 들으면서 별로 대꾸도 하지 않았다.
A의 변하는 모습에 친구들은 “세상 많이 달라졌다”고 감탄하였다. 그러나 밀림의 왕좌만 바뀌었을 뿐 시끄러움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몇 달 전 이른바 자칭 예술가 C가 모임에 나오기 시작하였다. 고리타분한 이야기보다 노래방에서 1차 승부를 벌였다. 노래 실력에 밀리던 B는 슬그머니 뒤로 빠지기 시작하였다. 부질없는 논쟁보다 C처럼 노는 것을 친구들이 훨씬 좋아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부터 B도 말 씀씀이가 확 줄었다.
결국 느긋하게 기다려주는 방법이 주효했다. 말 많은 친구를 책망할 필요가 없어졌고, 멀리할 이유도 사라졌다. ‘동물의 세계’처럼 질서가 잡혔다.
그래서 좀 발전적인 대안을 만들었다. 각자의 장기를 살려 ‘대장’을 삼은 것이다. 발바리처럼 잘 걷고 지리를 잘 아는 친구는 산행대장이, 카리스마투성이인 친구는 군기반장이 되었다. 그랬더니 최근 서울대 수목원 산행에서도 도토리 키 재기 말다툼은 없었다.
부부가
부부가 함께 세월을 쌓다 보면 때때로 다툴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하면 이 지옥 같은 전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깊이 고민한다. 그래서 집안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나 경제문제가 아니면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작은 일들은 남편이 하자는 대로 대부분 들어준다.
그런데도 남편이 술을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부부싸움을 참 많이도 했다. 술을 많이 마시면, 술을 이기지 못하고 그냥 쓰러져 자는 편이라 주사는 없지만 술자리를 좋아해서 늦는 날이 많아 집안일을 두고 말을 섞어 볼 시간이 없다.
아들도 엄마의 장점 중 첫 번째로 ‘인내심이 많다’는 것을 꼽을 만큼 필자가 살아가면서 인내심을 발휘하여 참아내는 방법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방법은 싸움이 시작되면 일단 밖으로 나가 공원에서 바람을 쐬면서 자리를 피해 시간을 버는 것이다. 남편은 뒤끝은 없는데, ‘욱’하는 성품의 소유자라 한 번 화를 내면 불같다. 나중에 감당해야 할 일은 그 순간에는 생각조차 없는 모양이다. 대신 그 자리만 피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새새거린다.
이런 방법은 여름에는 최고의 방법이지만 겨울에는 쓸 수가 없다. 머리를 식히려 밖에서 배회했다간 얼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울엔 공원 대신 대형마트를 은신처로 삼는다. 마트에 갔다 와도 공원에 다녀온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필자가 집에 들어가면 남편은 반가워하는 눈빛을 확연히 드러낸다. 그러면서 자기 것도 사왔느냐고 묻는다. 부부 싸움한 건 기억조차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참, 어린애 같다.
둘째는 아들을 앞세우는 방법. 남편이 열 받아 있을 때 어린 아들을 안고 있으면, 화를 못 낸다. 아들이 어릴 때는 특히 유효했다. 어린 아들 앞에서는 차마 화를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남편은 결국 뜨거운 화기를 주체하지 못해 밖으로 나가 버린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나면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간식을 사 들고 들어온다. 들어와선 “확 가출해 버리려고 했는데 아들 먹일 간식거리를 전해줘야 해 가출을 못 하고, 할 수 없이 들어왔다”고 둘러댄다. 어이가 없다.
필자는 지금도 남편이 화를 내려는 눈치가 보이면 은근슬쩍 다 큰 아들을 앞세운다. 그러면 남편의 화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다. 아들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것도 있지만 아버지의 체면과 권위의식 때문에 아들 앞에서는 참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남편의 약점을 아낌없이 활용한다.
셋째는 남편이 화를 내면, 부리나케 어머니에게 고자질해 혼쭐나게 하는 것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도 있듯이 어머니도 심정적으로는 당연히 아들의 편을 들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의 행복을 위해서 눈 질끈 감고 며느리 편을 들어 준다. 남편이 어머니 앞에서는 필자에게 무척이나 잘해주는 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방법은 현재는 사용할 수 없다. 어머니가 저세상으로 가셨기 때문이다. 아무튼 필자의 집에서는 이 세 가지 방법만 쓰면 전쟁은 죄다 끝이 난다.
요즘은 다들 형편이 좋아졌는지 휴가철이나 무슨 때만 되면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들로 인천공항이 북새통이 된다고 한다. 소시민인 필자는 아이가 어릴 적부터 어른이 되어 더는 아빠 엄마와 휴가를 같이 보내려 하지 않게 되었을 때까지 여름휴가나 겨울휴가 여행을 국내, 특히 동해안으로 갔다. 우리나라 곳곳 다 아름답지만, 그래도 한계령을 넘어 설악산으로 가는 구불구불 길이 좋았다. 고개 넘어 맞닥뜨리는 동해의 탁 트인 파란 잉크 빛 바다와 특히 내가 좋아하는 먹거리 해산물이 풍부하다는 점이 그곳을 여행지로 꼽는 첫 번째 이유였다.
가수 양희은 씨의 노래처럼 한계령은 나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아 정답고 한계령 올라가는 길에 있는 한옥 민박집이나 바람불이라 불리던 계곡 야영장은 우리 가족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겨주었다.
지금은 어딜 가도 호텔이나 콘도, 화려한 리조트로 쾌적한 숙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우리 가족은 텐트를 준비해 자연 속에 머무르는 방법을 택했는데 남편이 아들에게 숲 속에서 지내는 낭만을 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고 나도 도심과 다르게 밤하늘의 쏟아질 듯 촘촘히 빛나는 별빛을 볼 수 있고 풀벌레 소리 들리는 야외가 마음에 들었다.
아들이 고사리손으로 제 아빠를 도와 텐트 치는 걸 보는 것도 대견하고 즐거웠다.
아무튼, 우리 가족은 아들이 서너 살 무렵부터 차에 온갖 캠핑 장비를 싣고 여행을 떠났다. 엄마인 나는 휴가 동안 먹을 밑반찬이며 간식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바닷가에서 회를 사 먹는 일 외에는 집에서와 똑같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요즘은 어디를 가도 그 근처의 특산품이 무언지 맛집은 어디 있는지 찾아다니며 식도락을 즐기지만, 그땐 왜 그리 힘들게 양념 하나까지 준비했는지 아마 그게 현명한 아내와 엄마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우습기만 하다. 자청해서 고생한 거지만 그런 게 또 즐거웠고 준비하는 동안 행복했었다.
승용차에 텐트며 오색파라솔 달린 테이블, 온갖 캠핑 장비를 갖추고 떠나는 날은 가족 모두 들떠서 가슴이 설레었다. 설악산으로 가는 길로 미시령과 한계령이 있는데 미시령 쪽도 휘몰아치는 물살이 시원한, 계곡을 끼고 달릴 수 있는 멋진 길이지만 주로 한계령을 지나서 갔다. 한계령은 필자가 정말 좋아하는 곳이다. 꼭대기에 있는 한계령 휴게소는 그림처럼 아담하고 경치가 좋아 마음에 들었다. 가끔은 온통 안개에 휩싸여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일 때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 맑고 청량한 공기와 둘러 보이는 경치가 너무나 멋졌다.
짙은 갈색의 휴게소 건물도 운치 있고 안으로 들어가 테라스의 나무로 된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강원도 명물 음식을 맛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으며 특히 테라스 끝쪽에서 사진을 찍으면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정말 멋진 풍경의 사진이 되어서 매번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곤 했다. 그래서 설악이나 동해안에 갈 때는 항상 한계령을 거쳤는데 요즘은 빠른 길이 생겨서 한계령 고개를 넘는 차량이 많지 않다는 소식이 들려 어쩐지 애잔하고 마음이 쓸쓸하다. 한계령에 오르기 전 초입에 시원한 물줄기가 모여 옥빛의 깨끗한 연못을 이룬 옥녀탕이라는 계곡이 있는데 그곳에 나는 재미있는 추억 하나가 있다.
어느 해인가 설악산으로 휴가를 갔을 때였다. 시끌벅적한 동해안 대진항의 분위기도 만끽하고 맛있는 회와 싱싱한 해산물 구경도 실컷 하는 등 좋은 시간을 가졌으며 다음날은 그곳에서 좀 떨어진 동명항이라는 작은 포구에도 들러서 또 다른 맛과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설악산에서는 너무나 피곤했다. 모든 사람이 다 여기로 모인 듯 인파에 뒤덮여 온통 계곡이나 길이 복잡하고 소란스러웠다.
여행 마지막 날에 나는 몸과 마음이 지쳐서 몹시 피로함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예외 없이 한계령을 지나 구불구불 산길을 내려오다가 옥녀탕 앞에 이르렀다. 여기서 잠깐 쉬어가자고 내려서 보니 정말 맑고 깨끗한 계곡 물이 있었다.
필자는 물을 너무 좋아한다. 수영을 그리 잘하는 것도 아니면서 물만 보면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설악산의 계곡에서 실망했던 마음이 옥녀탕을 보니 다 풀어지고 티셔츠와 핫팬츠 차림이었던 나는 옥녀탕 물속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정말 시원하고 기분이 좋아서 두 팔로 물을 휘휘 저으며 수영을 했다. 남편이 그만 나오라고 손을 흔들었는데 그때 지나가던 순찰차에서 마이크로 “옥녀탕에 계신 분 빨리 나오세요, 들어가면 안 됩니다.” 라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에서 쉬고 있던 관광객들도 웃으며 빨리 나오라고 손짓을 해 댔고 누군가는 휘파람까지 불었다. 깜짝 놀라서 재빨리 나왔는데 어찌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곳에 들어가면 안 되는 줄 몰랐고 주변 어디에도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판이 없었다고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벌금이라도 내야 하나 걱정했지만, 경찰관을 태운 순찰차는 자리를 떴다.
그저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있는 설악산 계곡이니 들어가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순찰차의 경고를 듣고는 이름 있는 계곡에 무단 침입한 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있던 많은 관광객에게도 무척 부끄럽고 미안했던 기억이 난다. 자연을 아끼고 보호해야 하는데 깨끗한 물이라고 텀벙 뛰어들다니 너무 철없는 행동을 했다. 그후에도 휴가 갈 때 올 때 그곳에 들러 보았다. 들어가지 말라는 팻말이 없어도 물에 들어간 사람은 없으니 많은 사람은 나처럼 지각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반성도 되고 너무 창피하지만, 그래도 나는 설악산 옥녀탕에서 수영해 본 사람이라는 생각에 즐거운 미소가 떠오른다.
줄담배를 피웠던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금연을 시작하였다. 금단현상이 너무 심하여 수많은 중단위기를 맞았으나, 17년 동안 한 개비도 피우지 않았다. 이제는 담배를 피우고 싶은 유혹을 다 뿌리치고 금연에 성공하였다.
한여름 더위에 가벼운 차림으로 산에 올랐다. 중간에서 친구와 간식을 들면서 쉬고 있었다. “산에서 담배를 피우면 되는 거예요?” 누구인가 소리쳤다. 주위를 살폈더니 또래 등산객이 조금쯤 흥분한 상태였다.
“담배를 피우다니요?” 반문했더니, “담배냄새가 엄청 나는데요.” 또 들이밀었다. 담배냄새가 났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금연 중 ‘담배냄새’ 금단현상에 매우 시달렸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담배골초였으나 휴일 하루만은 피우지 않았다. 1999년 2월 첫 휴일, 산에서 만난 등산객과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피웠다. 월요일 출근하였더니, 큰 사무실에서 생담배 타는 냄새 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악취가 내 코에서 진동하였다. 머리가 아프고 헛구역질이 났다.
금연경험자로부터 ‘금단현상’의 한 형태라는 말을 들었다. 손 떨림, 체중증가, 우울 등은 종종 들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고통스러운 금단현상이 악취, 기억력감퇴, 꿈 3가지 형태로 찾아왔다.
악취가 몇 개월간 너무나 심하여 금연중단의 유혹을 수 없이 느꼈다. “금단현상의 강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낮아지지만, 담배를 한 대만 피워도 다시 처음처럼 강해진다.”고 하였다. 수시로 코를 헹구면서 지독한 악취를 이겨냈다.
제일 큰 문제가 기억력 일시 감퇴현상이었다. 폐인이 될 것 같은 두려운 생각도 들었다. 생각 끝에 기억력 이상 유무를 테스트하려고 2개의 국가자격시험에 도전하였다. 읽고, 쓰고, 외우면서 기억력 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다행히 합격의 영광을 안고 금연을 계속하는데 자신감을 가졌다.
꿈에서 담배를 피우는 현상이 제일 오래 갔다. 아주 맛있게 담배를 피우다가 벌떡 잠에서 깨어나 가슴을 쓸어내리곤 하였다. “내 의지력이 이것뿐인가?” 담배가 완전히 꿈에서 사라진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17년 금연 작전은 막을 내렸다. 신진대사가 잘되고 건강해져서 좋다. 깨끗한 시니어가 되어서 좋다. 무엇보다 손주들과 뒹굴고 놀아도 냄새나지 않아서 좋다. 우연히 찾아 온 금연기회를 끝까지 지켜낸 금연성공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는 대한장애인댄스스포츠서울연맹 소속 선수 겸 코치이다. 자원봉사자로서 시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댄스스포츠를 가르치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은 혼자서는 댄스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나 같은 비장애인이 파트너로 같이 경기대회에 나간다. 올해가 4년째이다.
장애인들은 겨울철 빙판이 위험하기 때문에 겨울 동안에는 훈련을 쉰다. 그리고 대략 4월부터 새로 선수등록을 하고 연습에 들어간다. 그리고 6월부터 대회에 출전한다. 겨울 기간이 길기 때문에 그 사이에 신상의 변화도 생기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매년 4월이면 안무를 새로 짜고 5월부터는 파트너와 만나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4년 전 처음 만난 파트너는 60대 후반의 시각장애인 할머니였다. 선천적으로 전혀 앞을 못 보는 전맹이었다.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허약해 보였다. 나이를 물어 보니 수줍은 듯 자기 나이를 밝히며 너무 늙지 않았느냐며 미안해했다. 나이도 많지만, 몸이 너무 허약해 다른 시각장애인들처럼 자이브나 차차차 같은 격렬한 라틴댄스는 무리여서 다른 장애인들이 춤출 때 구경만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내가 택한 것이 왈츠, 탱고 같은 모던 댄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각장애인들에게는 공간의 이동이 많지 않은 라틴댄스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농구장에서 하는 경기대회에서 플로어 전체를 돌면서 추는 모던댄스는 무리라고 봤던 것이다. 그러나 한 손만 잡고 추는 라틴댄스보다 한손을 서로 손을 맞잡고 다른 한 손을 여성은 남자의 어깨에, 남성은 여성의 등을 잡아주는 모던댄스가 오히려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왈츠 교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왈츠에서 그네의 흔들리는 스윙을 설명하기 위해 그네를 타 봤느냐고 물었더니 그네 자체를 모르고 있었고 타본 적도 없다고 했다. 탱고의 동선을 가르치기 위해 게처럼 옆으로 가는 것을 설명하고자 했으나 역시 게를 본 적이 없어서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고 다른 시각장애인처럼 점자를 배운 것도 아니었다. 원래 학교를 전혀 다녀 보지 못한 무학이었기 때문에 점자도 배울 생각도 안 해봤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팔과 다리를 잡아 기본 동작을 가르치고 스텝을 외우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시작했으나 다행히 몸이 가벼워서 내가 리드해 나가기 쉬웠다. 스텝을 외우지 못 했어도 내가 힘으로 밀고 나가면 내게 몸을 맡기기 때문에 춤추는 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성격도 좋았다. 얼마 안 되는 장애연금으로 생활하는 형편이었으나 아침부터 복지회관에 나와 수영, 사물놀이 등 무료 강좌를 열성적으로 배웠다. 간식으로 주는 빵이나 떡, 과자 등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와중에도 받은 먹거리를 가방 안에 넣어 두었다가 내게 줬다. “선생님! 선생님!”하며 따르는 모습도 귀여웠다. 그해 첫 대회는 6월에 열린 춘천 전국대회였다. 해마다 6월에는 장애인 대회가 시작된다. 전국 18개 시도에서 모인 선수들끼리 대회를 벌이는 것이다. 필자는 그와 왈츠로 출전했다. 그런데 당당히 3등을 한 것이다. 메달과 상장을 거머쥔 그는 너무나 감격해 했다. 그렇게 시작해 그해 왈츠와 탱고로 전국대회에 출전하며 상위권의 성적을 냈다. 가을 전국체전에서는 단체전 금메달까지 땄다. 그렇게 필자와 한 해를 보내고 그도 다른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고령으로 은퇴했다.
다음해에 만난 파트너는 30대의 젊고 아름다운 시작장애인이었다. 겉보기에도 시각장애인 같지 않았고 아주 가까운 거리는 어렴풋이 볼 수 있는 약시였다. 댄스에 소질이 있어서 가르치는 것을 쉽게 이해했다. 몸매도 예뻐서 같이 춤출 만했다. 장애인대회에서는 처음으로 모던 5종목으로 출전할 정도로 출중했다. 4월에 처음 만나 6월에 창동에서 열린 첫 대회에 나갔다.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장애인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고 오후에 같은 장소에서 열린 일반인대회에도 출전해 역시 좋은 성적을 올렸다. 시각장애인이 일반인대회까지 나간 것도 처음이지만, 좋은 성적까지 거둔 것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오전 장애인대회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이 전맹도 있고 약시도 있으므로 공평을 기하기 위해 안대를 착용한다. 그때는 스텝을 전혀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러나 오후에 일반인대회에 나가게 되자 안대를 벗자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방향 감각에 혼란이 왔는지 댄스를 시작하는 코너를 멀쩡하게 잘했던 오전과 달리 반대편에서 해야 한다며 우기기도 했다. 관중들을 의식하면서 스텝을 간혹 틀리기도 했다. 이 파트너와는 그해 장애인대회는 물론 일반인 대회도 나란히 출전하면서 자랑스러운 성적을 만들어 나갔다. 그해 여름,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전에 대중 무용부문으로 참가하여 댄스스포츠로 수상한 것이 그와의 마지막 출전이었다. 안타깝게도 안마사로서 주야간으로 몸을 혹사하다 보니 건강을 상한 것이다.
올해도 6월부터 장애인 댄스대회가 시작된다. 지난겨울 동안 역시 서울연맹 소속 선수들의 신상에 변화가 많았다. 주로 청소년부 선수로 활동하던 남자 비장애인 선수들이 군 입대한 사람이 많아 새로 파트너를 짜야 한다. 내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어쩌면 단일 파트너가 아닌 종목별로 따로 파트너 역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6월을 위해 지금부터 또 땀을 흘려야 한다.
봄이 되면 왜 그래야 하는지도 별로 생각하지 않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꽃밭을 일구곤 했다. 꽃밭 가꾸기가 우리 집 연례 행사였기 때문이다. 받아 놓았던 꽃씨를 전부 꺼내서 뿌리고 물뿌리개로 물을 줘가며 내 동생들과 정성을 다해 열심히 만들었던 일들이 그립다. 또 꽃모종들을 동네를 다니며 얻어 와서 심기도 했다. 그 해에는 금낭화를 처음으로 담임선생님 집에서 모종으로 얻어 와서 심었다. 6월 정도에 꽃이 필거라 했다.
조롱조롱 주머니를 달고 피어나는 금낭화가 혹시라도 죽을까봐 자라나는 걸 거의 매일 관찰해가며 꽃이 피길 기다렸다. 묘한 꽃 분홍으로 피어나는 꽃이 너무도 예뻐서 어서 피어나라고 기도까지 해가며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요즘에는 절이나 깊은 산속에서도 가끔 만날 수 있는 앙증맞고도 귀여운 꽃이다. 우리 집 꽃밭은 예쁘게 꾸며 놓은 곳은 아니었다. 생각나는 대로 자기 마음대로 심고 가꿔서 들쑥날쑥 했다. 예를 들면 작은 키의 채송화가 피어 있는 곁에 엄청나게 많은 가지를 뻗치면서 한 무더기로 변하는 분꽃이 자리할 때도 있었고, 양귀비, 기생 꽃들이 마구 섞여 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해엔 유독 금낭화만 맨 앞줄에 심어 놓고 기다렸었다.
봄을 알리는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이 지며 민들레 오랑캐꽃이 만발하면서, 산에는 어느 덧 라일락과 아카시아가 피어 향기를 날렸다. 그 뒤를 이어 패랭이도 별별 색을 뽐내며 피어났고, 들판에는 보라색 꿀 꽃들이 가득 가득 무더기로 피어나면서 우리들에게 달콤한 꿀 간식을 선사하며 입을 즐겁게 해줬다. 그 즈음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금낭화도 꽃을 매달았다. 어찌나 신기하고 예쁜지 입가에 웃음은 절로 피어났고 매일매일 봐도 귀엽고 고왔다. 꽃말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 해서 더욱 더 가슴에 와 닿던, 여고시절의 수줍음과 별 이유도 없는 부끄러운 감정이 누구에겐가 들킬까 마음 졸이며 꽃을 보고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 탓이었을까 지금도 금낭화를 만나면 가슴에 설렘이 슬며시 지나가는 걸 느끼곤 한다.
난 혼자 금낭화를 보면서 그 꽃들이 복주머니라고 마음속에 꾹꾹 적어 놓고 믿었다. 내 맘대로 지은 복주머니 꽃이 피는 6월 신부가 되면 일생동안 복이 함께 할 거라는 웃기는 생각을 해가며 혼자 쿡쿡 대기도 했다. 그렇게 하리라 마음을 굳게 먹은 바는 아니었지만, 하고 싶다는 희망은 늘 지니고 살았다.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은 비밀이었다. 막상 결혼을 앞두고 나 혼자의 결정으로는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고 6월이 아닌 3월에 결혼을 했다. 그러나 지금도 금낭화를 만나면 내 옛날의 수줍던 마음으로 그리 될 것을 바라던 멋모르고 꿈만 꾸던 내가 보여 픽 웃음이 절로 나곤 한다. 나는 정말로 금낭화가 피는 6월에 결혼을 하고 싶어졌었다. 실수를 했나? 금낭화가 피는 6월에 결혼하고 싶었던 꿈이 아직도 마음에 걸려 있다.
광복 이후 한국인을 설명하는 말은 ‘빠르게’다. 무조건 ‘빠르게’에만 집착한 우리는 너무 오래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놓치고 부수고 망가뜨렸다. 이제 우리는 걷기에 대해 물어봐야 할 때다. 신정일(辛正一·62) 우리땅걷기 이사장은 걷기를 하나의 문화로 정립하고 전파한 독보적인 인물이다.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동학을 복권시킨 황토현문화연구소 소장이었으며 현대 시각에 맞춰 다시 쓴 이중환의 고전 ‘택리지’를 포함한 78권의 책을 쓴 작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길 위에서의 사색을 전파하는 길 위의 인문학자 ‘자연대학 총장’, 신 이사장이 말하는 걷기의 힘, 걷기의 철학.
“강변의 모래가 아름답다고 쓴 걸 읽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직접 본 것들, 걸으면서 본 것들이 굉장히 중요하죠.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은 우리가 감동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한 발 한 발 걸어가며 본 것들이 곧 내 살이 되고 정신의 활력소가 된다는 신정일 우리땅걷기 이사장의 말은 나이 들어서 천천히 바라보면서 걸어야 하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빨리 걸을 필요가 없어요. 마사이족은 팔을 힘차게 휘두르며 걷는데 그건 아프리카에나 맞지 우리에게는 맞지 않아요.”
우리나라 곳곳은 도서관이고 박물관이다
마사이족 얘기처럼, 요즘 걷기는 소위 건강을 추구하는 걷기가 유행이다. 이 시대에 신 이사장이 생각하는 걷기란 무엇일까?
“겨울에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 만저우리(滿洲里)까지 갔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평야만 가고 어떤 때는 자작나무숲만 가고 했죠. 그 길을 가면서 ‘내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게 행운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골짜기도 많고 산도 많고, 땅은 넓지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곳곳에 역사가 있어요. 그런데 거기는 그런 게 없었어요. 우리나라 곳곳은 어디나 도서관이고 박물관입니다. 허투루 볼 게 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고 가는 게 걷기 문화예요. 그래서 어디 갔다 왔는지도 몰라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늙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니 순간순간의 아름다움을 발견해야 해요.”
신 이사장은 많이 간다고 좋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차라리 정상까지 안 가도 된다. 중간쯤 가면서도 많은 걸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걷기에서는 멀리 바라본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나이가 들면 관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너도 나도 같이 쏠려서 일행이 함께 가는 것은 자기의 자아를 찾는다기보다는 그저 다른 사람에 휩쓸려 가는 것이지 않나요. 길을 걸으며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그러지만, 많은 시간은 나 자신을 생각하는 시간이 될 수 있어요. 칸트, 니체, 루소 등등 수많은 철학자들도 걸으면서 사상을 확립했습니다.”
해파랑길에서 케이프타운까지 걷고 싶다
한강 길만 네 번을 걸었고, 낙동강은 세 번, 관동대로를 두 번, 서해안, 임진강, 영산강 등등…. 신 이사장이 지금까지 걸은 길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길 것이다. 그러한 길들 중 어느 길은 모두의 길이 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는 해파랑길이 있다.
“2008년만 해도 길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 제가 제안한 길이 거의 길이 됐어요. 변산마실길, 소백산자락길 등등.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답사길을 만들자, 해서 만들어진 게 해파랑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해파랑길처럼 아름다운 길은 없어요. 저는 해파랑길을 시작으로 해서 우리나라에서 북한을 거쳐 러시아, 스웨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까지 걸어 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누가 그러더라고요. ‘너무 길어서 혼자선 못 걷겠는데요’라고. 그럼 3대가 걸으면 되죠(웃음).”
2014년 완공한 해파랑길은 선비들이 걸어가던 관동팔경길, 낙동강변에서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길을 모두 현대인들이 걸을 수 있게 재정비 했다.
신 이사장에게 좋은 길이란 무엇일까?
“잘 만들어지고 시설이 좋은 게 아니라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길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길인 게 좋아요. 경북 봉화군 석포면 소재지에서 명호면까지 이어지는 낙동강길을 특히 좋아합니다. 거기는 한나절을 걸어도 길 물을 사람조차도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아름다운 길이에요.”
여기저기를 보고 느끼며 빠져드는 즐거움
신 이사장은 ‘해찰’이란 말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해찰은 순우리말로 ‘쓸데없는 다른 짓’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신 이사장에게 해찰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빠져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걸으면서 유독 여기저기를 보고 확인하며 경험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에게 길은 어떤 도달해야 할 목적이 아니다. 마치 도반(道伴)처럼, 그렇게 기억에 남는 길동무가 있냐는 질문에 그는 많다고 대답했다. 당연하다. 그에게는 인생 자체가 길과 같을 테니까.
“훈련소에서 첫눈에 반했던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서울대를 다니던 운동권이어서 강제징집을 당했는데, 신약성경 하나를 갖고 문답을 주고받으며 42일간 훈련을 함께 했었죠. 이후에 자대 배치를 받을 때 그 친구가 ‘신정일, 너 공부 많이 했다’라고 말해주더군요. 저는 고작 초등학교 졸업장 하나 있을 뿐이었는데 그 친구가 인정해주니 참 좋았어요. 이후로도 그 친구와 꾸준히 교류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군대를 간 게 행복이에요. 그 안에서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나고 자유를 구속당하면서 나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신 이사장과 김지하 시인, 신영복 교수, 박경리 작가와의 인연도 길을 타고 만나게 된 기연이다. 신 이사장은 김지하 시인의 시를 즐겨 읽는 애독자 중 하나였다. 김지하 시인의 시는 신 이사장에게 동학을 알게 해주는 길이 됐다.
인생이라는 길에서 만난 인연들
“향토현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을 때부터 동학농민운동가인 김개남 장군의 추모비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결국 1993년 5월에 세우게 됐는데, 비문을 누가 쓸 것인가 싶었어요. 그때 만나던 김남주 시인이 신영복 선생을 소개해 주셔서, 신영복 선생이 비문을 쓰게 됐습니다. 4월에 연락이 왔죠. 글을 써놨으니 자택인 목동으로 와서 가져가라고. 그때 가서 비문을 받고자 하는데 김지하 시인 얘기가 나와요. 그날 볼 수도 있겠다 싶어서 기다리려고 파리공원을 갔는데 한 200m쯤 떨어진 자리에서 이상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있더군요. 지남철에 끌려가는 것처럼 갔더니 사진에서 보던 김지하 선생이었어요. 인사를 드리니 반가워하며 동학에 대해 두 시간 동안 얘기를 들려주셨어요.”
인연의 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지하는 장모님, 곧 박경리 작가가 김개남의 팬이라고, 오늘 자신이 전화할 것이니 전주에 가서 박경리 작가에게 전화하라고 말했다. 신 이사장은 그래서 그날 저녁에 박경리 작가도 만나 두 시간여 담소를 나눴다. 에서 나오는 김개주가 김개남을 모델로 했다는 것도 그날 알 수 있었다. 박경리 작가가 김개남을 세계적인 혁명가로 생각하고 후배들에게 그에 대한 글을 쓰라고 종용했지만 아무도 안 쓰더라는 작은 불평도 들을 수 있었다. 모두가 인연이 만들어낸 귀중한 경험들이었다.
길 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고상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상하다는 것은 꾸미지 않는 것입니다. 별로 꾸밀 것이 없어요 인생 자체가. 인생은 자기 소신껏 사는 것이죠.” 도인의 말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로 적용하면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말이다. 신 이사장 또한 사람이다. 욕심도 생기고, 뭔가 해보고 싶다는 야심도 있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들은 정규 학교를 가고 부모 재력도 있었지만 저는 의지할 데가 없었어요.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책을 쓰기 전에는 변방에서 시인들 뒷바라지나 했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이 전혀 없었고 작가가 되겠다고 시험을 본 적도 없으니까.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이 없으니 오로지 글을 쓰고 걷기만 한 거죠.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그것이 삶의 지표였었죠.”
말의 행간에서 조금씩 느껴지는 것처럼, 신 이사장의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매일 두드려 맞고 책을 뺏기다가 결국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학교를 관뒀다. 그 후에 그는 14살에 가출을 했고 15살에는 출가를 했다. 출가한 지 두 달만에 스님이 ‘넌 여기 있는 것보다 세상에 나가 살아라’라고 말해서 절에서도 나와야 했다.
“그때 정말 많은 곳을 방랑했습니다. 조직에 얽매이지 않는 성질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했던 그지만, 역경은 그의 삶에 꾸준히 자리했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극복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을 이겨냈다.
“돌이켜보면 저는 인생 중에 한 달 남짓 행복했어요. 그런데 한번 헤아려 보세요. 행복한 날이 얼마나 있었는가. 헤아려보면 많지 않아요. 연암 박지원이 누나 제문을 쓴 걸 보면 ‘어찌 이리 짧더란 말이냐. 왜 슬프고 가난하고 곤궁했던 일들만 많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죠. 다 그래요. 인생 자체가 그래요.”
그걸 인정하고 사는 것이라고, 그게 삶이라고 그는 말했다. 마치 길을 걷는 것처럼.
“들뢰즈가 ‘창조란 불행한 것들 사이로 자신의 길을 금 그어 나가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좋아해요. 내가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문자조립공’의 나이 들지 않는 길
신 이사장은 태어나 최초로 군대에서 월급을 받는다. 690원. 그는 그 돈으로 200원짜리 삼중당 문고 세 권을 사고 나머지 90원으로는 라면 몇 개를 사서 한 달 동안 간식으로 먹었다. 제대할 때가 되자 2만원을 갖고 나오게 됐는데, 그 돈을 종로서적에 가서 책 사는 데 다 써버렸다. 그때 그는 종로서적에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책들을 보며 ‘과연 내가 쓴 책이 저 자리에 꽂힐 날이 있을까’ 되물었다고 한다. 물론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신 이사장은 교보문고에서 독자와의 대화를 통해 독자들과 함께 정선으로 열차를 타고 가기도 하고 에 출연하기도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대표였던 시절에는 국회의원과 보좌관들을 데리고 섬진강을 걸으며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 신기한 일들이 벌어졌다고 말한다. 그래서 ’항상 꿈을 꾸자. 꿈은 공짜다’라고 말한다.
그는 현재 자신의 직업을 ‘문자조립공’이라고 부른다.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 어느덧 일흔여덟 권에 이른다.
“글 쓰는 사람은 모두 ‘문자조립공’이에요. 한문은 몇 만 자를 다뤄야하는데 우린 스물네 자만 다루면 되니 얼마나 행복해요.”
요즘 부쩍 철학 자체에 관심을 가진다는 신 이사장은 카프카,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연암 박지원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제는 내 곁에 놓고 가끔씩 펼쳐볼 수 있는, 인간에 대한 내용의 책을 만들고 싶어요. 에서 ‘우리는 수백만 금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이 말을 금과옥조로 여겨요. 돈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과 명예도 사라지는 것인 만큼 부럽지 않아요.”
‘현자란 바라보는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이다’라는 신 이사장의 마지막 말은 길과 인생에 대한 소회이자 해법으로 다가왔다.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 법이니, 길을 걷는 순간순간이 기적인데 깨닫지 못하면 기적이 아닐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이 그처럼 기적에 가까이 닿아 있는데, 마땅히 고개를 돌려 주시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 대한 예의 아니겠는가.
시니어 펫팸족이 대세라지만 집안에 새로운 가족을 들이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반려동물을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단지 반려동물이 예뻐서? 혹은 내가 적적해서 펫팸족이 되려고 했다면 생각부터 고쳐야 한다. 반려동물을 만나러 가기 전 적어도 당신이 알아야 할 10가지를 알아보았다.
1. 반려견과 함께 살면 10년이 젊어진다.
최근 메디컬데일리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영국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지리·지속 가능 발전학과 연구진은 개를 키우는 것이 신체 나이를 최대 10년 젊게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지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스코틀랜드 중동부 테이사이드 주(州)의 평균 79세 노년층 547명을 대상으로 신체나이와 반려견의 상관관계를 조사했다. 이들 중 반려견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 그러지 않는 사람들보다 신체운동능력이 월등했다. 불안감이나 우울증도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연구진은 “반려견과 생활하는 것이 노년기에 접하기 쉬운 정신적, 신체적 퇴보를 자연스럽게 극복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2. 반려견·반려묘를 입양하는 것은 소중한 생명을 살리는 일
유기·유실동물은 동물보호법이 정한 10일이 지나면 유기·유실동물의 인도적 처리(안락사)로 생을 마감한다. 열흘 안에 주인이나 입양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작은 생명의 심장은 멈춰버린다. 혈통 좋은 반려동물도 좋지만, 입양도 한 번쯤 생각해보길 권한다. 그런데 꼭 명심할 것이 있다. 유기·유실동물들은 버려지고 상처받은 기억이 있다. 그러므로 더 세심한 관심이 필요하다. 분양동물보다 더 큰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3. 반려견과 반려묘의 평균수명
개의 경우 큰 개인지 소형·중간 개인지에 따라 수명 차이가 있다. 소형·중간 개의 수명은 14~17년, 큰 개는 9~13년으로 큰 개가 소형·중간 개보다 수명이 더 짧다. 소형·중간 개는 빨리 어른이 되지만 큰 개에 비해 노화가 느리다. 큰 개는 천천히 성숙하는 대신 노화가 빨리 온다. 고양이 평균 수명은 15년이다. 고양이 종류에 따라 수명 차이가 있지만 거의 40세 가까운 나이까지 살아 기네스북에 올랐던 장수 고양이도 있다. 현재 미국에 사는 고양이 ‘코듀로이’가 ‘세계 최고령 고양이’ 기네스 기록을 가지고 있다. 작년 보도 당시 26세로 사람으로 치면 124세에 해당하는 나이다.
4. 반려견은 초콜릿, 양파를 먹으면 안 된다
반려견이 먹으면 안 되는 대표적인 음식이 땅콩버터다. 알레르기나 만성 질환이 있는 반려견은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 초콜릿 또한 위험하다. 초콜릿 속 카페인과 테오브로민을 반려견이 섭취하면 구토와 탈수증 복통을 일으키고 체온 상승과 발작, 심한 경우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양파의 매운 성분은 적혈구 생성과 활동성을 낮춘다. 위험할 정도로 양파를 섭취하면 수혈을 해야 한다. 포도 또한 먹어서는 안 된다. 강아지 종류에 따라 구토나 설사 증세가 나타나는데 식욕감퇴, 탈수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신부전증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이 경우 3~4시간 안에 죽을 수 있다.
사과, 자두, 복숭아, 배, 살구 등에 들어 있는 시안배당체를 반려견이 먹으면 현기증, 호흡곤란, 발작을 일으킬 수 있고 심할 경우 혼수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이 외에도 우유, 치즈, 아보카도, 빵, 베이컨 등도 반려견이 먹으면 안 된다.
5. 반려인의 잘못된 행동 3가지
1. 안내견을 제외한 다른 반려동물은 대중교통이용 시 이동장(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반려동물을 담는 물건)을 이용해야 한다. 반려동물이 답답해한다고 잠시 내려놓은 순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남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충분히 이동장 적응 훈련을 해야 한다.
2. 반려견과 산책할 때 목줄을 풀어주거나 감정 상태를 모르는데 다른 반려견들과 어울리게 두면 안 된다. 사람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서먹하다. 동물들이라고 다르겠는가. 반려인이 생각 없이 한 행동 때문에 반려견들이 싸울 수 있다.
3. 준비 없이 길고양이에게 밥 주는 것도 삼가야 한다. 한국고양이보호협회는 작년 10월 주변과의 갈등을 줄이면서 ‘길고양이 돌보는 방법’을 소개했다. 이 단체는 “먹이뿐만 아니라 깨끗한 물을 먹이는 것이 중요하며 야행성인 고양이의 습성을 고려해 일몰 이후 일정한 장소에서 먹이를 주는 것이 좋다”고 했다. 또한, 길고양이의 치아, 잇몸질환 등의 문제를 줄이기 위해 사료 이외의 음식을 줘서는 안 되고, 고양이가 먹고 남긴 음식물은 즉시 치우기를 당부했다.
6. 안내견에게 말을 걸지 말라안내견은 잘 알다시피 시각장애인의 안전한 보행을 돕는 장애인 보조견이다. 심심치 않게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안내견. 이들을 대하는 성숙한 자세는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더라도 꼭 알았으면 한다. 안내견과 마주쳐도 말을 걸면 안 된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안내견은 몸과도 같은 존재다. 안내견 또한 주인을 보호해야 할 임무가 있다. 혹시 안내견과 소통하고 싶다면 주인에게 먼저 물어봐야 한다. 주인의 동의 없이 말을 걸고 만지면 안내견은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음식물 또한 절대 주어서는 안 된다. 안내견들은 바닥에 떨어진 음식이나 간식을 갈구하는 눈빛을 보내지 않도록 훈련돼 있다. 반려동물이 안내견 가까이에 가는 것도 막아야 한다. 안내견들 모두 힘든 훈련을 통해 뽑힌 우수견이기는 하나 갑작스러운 상황이 오면 짖고 싸울 수 있다. 무엇보다 안내견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훈련됐다. 다른 곳에 집중하면 주인 돕기에 어려움이 생기니 방해되는 행동은 삼가라.
7. 반려견의 발바닥을 살펴라
반려견을 키우다 보면 발을 들고 겨우 걷거나 혹은 발을 만졌을 때 신경질을 내는 일이 종종 있다. 이때 반려견의 발바닥을 확인해봐야 한다. 발톱이 부서져 피가 났다면 반려견이 통증을 심하게 느끼기 때문에 지혈제와 붕대를 이용해 빨리 치료해줘야 한다. 부서진 발톱을 제거할 경우 회복이 늦고 발톱이 변형될 수 있다. 발바닥에 뾰족한 돌, 마른 진흙, 뭉친 털 등이 낄 때도 있다. 이때는 털을 깎고 발을 씻은 뒤 소독약을 발라준다. 맨발로 땅을 디디고 다니기 때문에 발바닥이 마르고 갈라지면 위험할 수 있다. 급한 상황이라면 일반 로션을 발라줘도 되지만 피부를 단단하게 해주는 성분이 포함된 강아지 전용 크림을 발라주는 것이 좋다.
집안에서만 활동하는 반려견의 경우 발톱이 너무 자라 피부로 파고들 수 있으니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8. 반려견은 반드시 동물등록을 해야 한다
2014년 1월 1일부터 개를 기르는 사람들은 전국 시·군·구청에 반드시 동물등록을 해야 한다. 단, 동물등록 업무를 대행할 수 있는 자를 지정할 수 없는 읍·면·도서(島嶼) 지역은 제외된다. 대상은 3개월 이상 된 개이며 미등록 시 4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동물등록을 하는 이유는 주인이 반려동물을 잃어버렸을 때 동물보호관리시스템(www.animal.go.kr)의 동물등록정보를 통해 더욱 쉽게 찾기 위해서다. 동물등록방법은 3가지다. 동물의 몸에 직접 삽입하는 내장형 무선식별장치와 외장형 무선식별장치, 등록 인식표 부착 방법이 있다.
9. 반려동물 분양 계약서를 써라
개와 고양이에 한해 소비자 분쟁 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고시 제2014-4호, 2014. 3. 21)이 마련돼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판매업자는 반려동물을 판매할 때 7가지 항목이 기재된 계약서를 제공해야 한다. 소비자 분쟁 해결기준에서는 분쟁 유형 3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우선 반려동물 구매 후 15일 이내 폐사할 경우엔 동종의 동물로 교환 혹은 구매가를 환급받을 수 있다. 단, 소비자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경우 배상 요구를 할 수 없다. 구매 후 15일 이내에 질병이 발생하면 판매업자가 책임지고 치료를 한 뒤 소비자에게 인도해야 한다. 단 회복 기간이 30일 이상 지연 돼 도중 폐사할 경우 동종 동물 혹은 구매가를 환급한다. 마지막으로 계약서를 내주지 않았을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에 계약해지가 가능하다.
반려동물 분양계약서에 기재되어야 할 7가지
1. 분양업자의 성명과 주소
2. 애완동물의 출생일과 판매업자가 입수한 날
3. 혈통, 성, 색상과 판매 당시의 특징사항
4. 면역 및 기생충 예방접종기록
5. 수의사의 치료기록 및 약물투여 기록 등
6. 판매 당시의 건강상태
7. 구매 시 구매금액과 구매날짜
10. 반려동물 사체, 이제는 폐기물이 아니다.
동물장묘사업은 농림축산식품부의 동물보호법을 적용받는다. 그동안 반려동물 사체는 환경부의 폐기물관리법상 폐기물로 분류·처리됐다. 동물장묘사업장을 개설할 때 환경부에서 주변 환경 피해 여부를 점검해 ‘설치승인서’를 내줬는데 받기가 쉽지 않았다. 농식품부는 “동물화장은 일반폐기물 처리와 달리 유독물질이 거의 나오지 않고, 크기도 작아서 설치승인서 제출 사업장에서 제외했다”고 말했다. 동물이 죽으면 쓰레기 봉지에 넣어서 버리면 그만이었다. 지금까지 반려동물 사체 상당수가 불법 화장, 매장, 폐기물로 처리됐지만, 법 개정으로 더욱 존엄한 장례 절차가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