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온난화니 뭐니 해도 겨울은 겨울입니다.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에서 차디찬 냉기가 느껴지는 게 엊그제 불던 가을바람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아, 정녕 봄은 아직 멀고 복수초는 눈 속에 묻혀 있는 12월입니다. 제아무리 ‘따뜻한 남쪽 나라’ 제주도라고 해도 한겨울 해변에는 세찬 바닷바람만 오갑니다. 초가을부터 서너 달 동안 바닷가를 지켜왔던 보랏빛 해국도, 제주 해변 특유의 왕갯쑥부쟁이도, 노란색 감국과 산국도 저마다 여기저기 한 무더기씩 깡마른 흔적만 남긴 채 스러졌습니다.
‘봄은 아직 멀고 복수초는 눈 속에 묻혀 있는’ 한겨울, 그러나 제주도의 바닷가가 그저 텅 빈 것만은 아닙니다. 모든 꽃이 지고 스러진 계절 바닷가 현무암 더미 위에, 그리고 바다를 에둘러 난 둘레길 길섶 곳곳에 송골송골 황금빛 꽃송이를 가득 단 국화가 노란색 카펫이 깔리듯 풍성하게 피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 이름도 낯선 갯국입니다. 등심붓꽃이나 뚜껑별꽃, 국화잎아욱, 좀양귀비 등과 마찬가지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에 외국에서 들어와 제주도의 자연 상태에 적응하고 뿌리를 내린, 일종의 귀화식물인데 기존의 자생식물들이 겨울나기에 들어간 시기 쓸쓸한 바닷가에 황금빛 활력을 불어넣는 ‘핀치 히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제주도와 남해안의 벼랑이나 길섶에만 자생하기 때문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최근 일부 수목원이나 식물원 등지에서 일부러 심어 가꾸고 있지만, 대개는 눈여겨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입니다. 대부분의 식물도감에도 소개되지 않고 있고, 국가표준식물목록에는 재배식물로 분류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애초 원예용이나 조경용으로 들여온, 일본 동해안이 원산지로 알려진 갯국은 특히 제주도의 바닷가에 잘 적응해 갈수록 자생지가 늘고 있습니다. 덕분에 12월부터 1월까지 눈 내리는 한겨울 제주도를 방문하는 이들은 황금색 갯국이 핀 장관을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자생지의 특성을 따서 해변국화, 꽃 색을 반영해 황금국화라고도 불리는데 꽃 못지않게 잎이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잎 뒷면에 하얀 솜털이 촘촘히 돋았는데, 그로 인해 잎 가장자리에 은색 띠를 두른 듯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촘촘히 난 솜털은 눈 내리는 동지섣달에도 갯국이 시들지 않게 보온재(保溫材)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겨울 살을 에는 추위와 바닷바람을 이기고 피는 갯국의 특성을 반영한 듯 꽃말은 곧은 절개, 일편단심입니다.
Where is it?
지금까지 알려진 자생지는 제주도 및 거제도 등 남부 다도해 지역에 불과하다. 제주도에서는 최근 수년 동안 해변 및 해안도로를 따라 자연적으로 피어난 야생 갯국이 늘고 있을 뿐 아니라, 일반 주택의 화단 등지에서 가꾼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서귀포 송악산 인근 해안도로변에 핀 갯국은 저 멀리 눈 덮인 한라산과 우뚝 솟은 산방산, 짙푸른 하늘과 바다, 검은색 현무암과 어우러져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어 인기다.
어느덧 이순(耳順)의 나이를 지났다. 공자는 육십의 나이를 이순이라 불렀다. 어떤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인생을 그 나이만큼 살면 어떤 상황이든 대부분 다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리라. 그런데 이순의 나이에도 아직도 화를 내는 일이 있으니 문제다. 물론 예전보다는 화를 적게 낸다. 지나고 보면 화를 낼 일이 아닌데 화를 내서 후회하는 일이 빈번하게 있다 보니 다시 한 번 상황을 검토하는 습관이 들었기 때문이다.
개인적 차원과 공공적 차원의 분노를 구분해본다. 개인적 차원의 분노는 주로 인간관계에서 발생한다. 인간관계를 할 때 상대가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거나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거나 약속을 위반하면 화가 난다. 자신에 대해 화가 나기도 한다.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수준보다 형편없게 일을 처리하거나 노력한 만큼 일의 성과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다. 그러나 노력하면 개인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화는 대부분 피할 수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즉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된다.
그러나 자신도 잘 모르는데 다른 사람을 100% 파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다만 그렇게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생각해보면 화를 줄일 수 있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그리고 죽음을 통해 모두들 이별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아웅다웅하며 살다가 그 사람이 죽고 나면 후회를 한다. 이 세상에 여행 온 나그네처럼 좋은 추억만 남기고 가고 싶다.
그렇다고 화를 안 내고 살 수는 없다. 또 마땅히 내야 할 분노도 있다. 공익적 차원에서 내는 분노는 거룩하다. 필자가 애송하는 시 중에 변영로의 시 ‘논개’가 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로 시작되는 시다. 시인은 우리나라를 짓밟은 왜에 대한 분노를 거룩한 분노라 표현했다. 거룩한 분노는 의분이고 공분이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에는 당연히 화를 내야 한다. 인간을 노예로 팔거나 인간성을 파괴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볼 때는 참기 힘들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공익을 버린 사람들에 대해서는 화가 난다. 건강하고 거룩한 분노다.
개인적 차원의 분노는 수양과 수련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공공적 차원의 분노는 건강한 사회가 형성되어야 없어질 수 있다.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라도 거룩한 분노는 더욱더 필요하다. 따라서 개인적 차원의 분노는 줄이되 거룩한 분노는 잃지 말고 살자.
싫증을 잘 내는 사람들이 유행을 만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참 변화무쌍하다. 요사이 스키니와 통바지가 다시 유행이다. 필자가 대학 1, 2학년 때 꽉 끼는 바지와 통바지가 유행했었다. 외출할 때면 가끔 듣는 소리가 있었다. 스키니를 입으면 “그 바지는 입고 꿰맸니?”라는 말을 들었고, 통바지를 입으면 “동네 다 쓸고 다니겠다”라는 말을 들었다.
일정한 주기로 유행은 되풀이된다. 이에 따라 화장법도 진화해가고 있다. 미의 관점이 바뀌는 것이다. 겉에 걸치는 옷뿐만 아니라 몸매의 기준도 바뀌었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통통하고 배가 나온 사람은 사장 또는 부유한 사람의 표본이었다. 욕심 많은 사람이나 지배 계층을 의미하기도 했다. 반면 마른 사람들은 가난하거나 핍박받는 사람들로 무능하게 표현됐다. 그러나 요음은 뚱뚱한 사람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처럼 보이고, 마른 사람은 체육관에 나갈 정도로 여유가 있어서 체중관리를 잘하는 부유한 사람으로 비쳐진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보면 옷을 걸치지 않은 나체가 많다. 황금비율에 의해서 인체의 아름다움을 조형미 있게 표현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립 러시아박물관에서 본 조각들은 마치 살아 움직일 것처럼 꿈틀거렸다. 근육이 볼륨감 있게 표현되어 곧 긴 숨을 토해낼 것만 같았다. 신들이 나체인 까닭은 신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담과 이브도 에덴동산에서는 나체였으나 죄를 지은 후부터 옷을 입기 시작했다.
조각이나 서양화에서 보이는 여인들의 몸은 풍만하고 오동통하다. 마른 몸보다는 풍만한 여자가 더 육감적이다. 클레오파트라나 양귀비가 말랐을까? 그랬다면 역사책이 다르게 쓰였을 것이다. 처녀의 아름다움이 당찬 날렵함과 날씬함이라면 중년의 아름다움은 풍만하고 원숙한 건강미에 있다. 여자를 바라보는 미의 기준은 젊을 때와 중년 이후가 달라져야 한다. 건강을 해칠 정도의 비만도 깡마름도 아닌 건강미가 최고다. 그런데도 깡마른 연예인들을 보며 자신의 몸이 뚱뚱하다고 착각하거나 남의 시선 때문에 소중한 자신의 몸을 해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필자도 새해를 맞으며 세운 계획에 체중 5킬로 감량이 들어 있었다. 남의 시선을 의식했다기보다는 자존감 회복과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었다. 먹은 것 이상으로 움직이면 체중이 빠질 것으로 생각하지만, 체중계는 1~2킬로를 왔다 갔다 할 뿐 도무지 내려가질 않았다. 빠지지 않는 체중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칼로리를 계산하며 음식을 선택하고 아침마다 걸어도 변화가 없다. 나이가 들면 체중이 안 빠진다는 말이 실감 난다. 운동이야 계속하겠지만, 마음은 다르게 갖기로 한다. ‘중년이 되면 건강미에 중점을 두고 당당하게 풍만함을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
언젠가 서양화 모델처럼 오동통하고 풍만한 몸매가 미인으로 평가받는 시대가 다시 올지도 모른다. 누가 아는가? 필자가 혹시 풍만함과 원숙함으로 아름답게 나이 든 할머니 모델이라도 될지.
‘생식의 아버지’로 불리는 김수경(金秀經·75) 박사는 식품기술사, 이학박사로서 1988년에 처음으로 케일을 동결건조, 생식제품을 만들었다. 이후 생식 전문기업 ‘다움생식’을 만들어 30여 년째 운영하고 있다. 그는 최근 를 집필하고 있으며 중국 쪽과의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팔순을 향해 가고 있는 나이이지만 여전히 건강을 지키며 의욕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가 말하는 진정한 건강의 의미를 들어본다.
김수경 박사가 생식 전문기업인 ‘다움생식’을 만들면서 세운 모토가 있다. 바로 ‘모든 인간은 원래 건강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인간 위주로 바꾸어갈 때부터 인간의 수명이 짧아지고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새로운 것을 찾을 때가 아니라 원래의 먹거리, 원형에 가까운 먹거리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
병이 있는 곳에서 어떻게 병을 고치나
김 박사는 최근 중국 쪽과 긴밀하게 얘기들이 오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중국에 가서 공산당 간부와 얘기했어요. 산업혁명 이후에 산업이 발전되며 걸어온 길이 미국이 가장 먼저다, 그런데 산업화하면서부터 공해 문제가 발생했다. 중국도 산업사회가 되면 미국이 걸어온 그 길을 걸어갈 것이라고 말해줬죠. 그런데 미국과 중국의 패러다임은 다릅니다. 미국은 예전부터 유목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김 박사는 미국과 중국은 근본적으로 다른 문화이기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서 김 박사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중국 전체 13억 인구 중 당뇨 인구가 1억7000만 명입니다. 그리고 고소득 인구가 5억 명인데 그 5억 명도 다 환자라고 봐야 해요. 그런데 중국 사람들이 결과적으론 삶을 고쳐야 건강해지는데, 건강을 잃은 사람들이 의학적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니 문제가 되는 거예요.”
건강을 고치려면 삶을 고쳐야 한다. 이것이 김 박사가 지향하는 건강법의 핵심이다.
“병원은 병이 있는 곳이지 건강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병이 있는 곳에 가서 병을 어찌 고칩니까?”
건강은 자신의 삶의 결과
“건강이라는 것이 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들에 있는 것도 아니고 병원에 있는 것도 아냐. 나한테 있는 거예요. 내 안에 있는 걸 발견해야 합니다. 왜 내가 건강이 나빠졌는가, 스스로 화두를 던져야 해요.”
김 박사는 선천적인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거나 불의의 사고를 겪었다든가 하는 것 외에는 전부 다 어떤 형태가 됐든 병은 자신의 삶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건강에 대해 말할 때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로 화두를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지, 남이 사는 게 아닙니다. 잘못 살아놓고 남보고 고쳐달라는 얘기는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부부도 서로를 잘 모른다. 죽을 때까지 모르고 산다. 김 박사는 낮은 밤을 알 수 없고 밤은 낮을 알 수 없으며 낮은 영원히 낮이고 밤은 영원히 밤이라고 했다. 부부는 그런 낮과 밤과 같다. 부부도 서로를 모르는데 의사가 피 몇 방울 뽑아서 분석해보고 CT나 MRI로 조사한다 해도 그것은 그 사람의 일생이 아닐 수밖에 없다. 그저 그 순간 그 사람의 상태일 뿐. 그 정도의 정보로 한 사람의 건강을 논하는 거 자체가 난센스라는 게 김 박사의 주장이다.
내 몸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그게 바로 건강
김 박사가 바라보는 건강에 대한 시선이나 각도는 일반적인 의료의 정의와는 달랐다. 그것은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아주 안 좋았어요. 초등학교 다닐 때 말라리아를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앓았거든요. 당시에는 모기를 쫓는 유일한 방법이 모닥불을 피우는 거였죠. 그런데 그때는 사람들의 삶 자체가 짐승 수준이었어요. 먹는 거, 입는 것이 그랬고, 몸을 씻는 것도 추석 때 한 번, 설 때 한 번 하는 수준이었으니. 아무튼 고등학교 3학년 때는 6개월간 허리를 못 폈어요. 20대에는 편도선염으로 두세 달에 한 번씩 열이 39도로 치솟았고 서른두 살 때는 척추디스크에 걸렸어요, 서른일곱 살 때는 폐결핵, 마흔두 살 때는 통풍이 왔죠. 집사람이 약사이고 주치의가 있었지만 해소가 안 되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사람이 안 아프고 살 수 있을까가 제게는 가장 중요한 화두였어요.”
병으로 계속됐던 인생이었다. 고통을 통해 치유의 힘을 알았고 스스로의 몸을 낫게 한 것은 자연 치유의 힘이었다고 단정짓는다.
“제 인생이 마흔다섯 살을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졌어요. 사업에 실패했고, 온갖 병을 달고 살다 씨눈, 엽록소, 효소를 연구하고 그 식이요법을 직접 실천하면서 심신의 병에서 완전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확신에 차서 씨눈, 엽록소. 효소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고 1988년 서해식품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생식사업으로 성장하게 됐습니다.”
‘모든 음식물은 자연 형태 그대로 먹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생식사업이어서 그런지 그가 생각하는 건강에 대한 정의는 매우 간단명료했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건강한 겁니다. 나이 들어서의 건강은 자력으로 화장실을 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죠. 그럴 수 있다면 건강한 겁니다.”
나이 들어서 자력으로 화장실만 가도 건강한 것이다? 너무 늙게 보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아닙니다. 나이가 들면 중풍이 오죠. 그러면 화장실 못 갑니다. 류머티스 관절염에 걸려도 화장실에 자력으로 못 가요. 지팡이 짚고 가면, 그것도 엄밀하게 보면 자력이 아니죠.”
하, 독특하고 확고한 신념이 있으신 분이다. 민망하지만 이를 어째. 어디 더 들어볼까.
매 맞는 남자들의 진짜 비밀
그는 특히 남자들의 건강은 여자들과 잠을 잘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여자와 잘 수 없다면 명만 붙어 있는 것이지 생명의 의미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1975년에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게 총 맞아 죽을 때 인천에서 약국을 하고 있었어요. 저는 집사람을 돕는 셔터맨이었죠. 그때 일흔세 살이었던 한 영감님이 ‘이보게 젊은이, 여기 100만원이 있네. 이 돈을 매일 자네에게 줄 테니 날 좀 젊게 해주게’라고 말했어요. 1975년에 100만원이에요. 엄청난 돈이죠.”
노인은 6·25전쟁 때 월남해서 돈을 벌었고 부동산 임대 수입만 월 1억원이 되는 자산가였다. 매일 100만원씩이면 한 달이면 3000만원 정도. 노인은 재차 그렇게 줄 테니 날 좀 젊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노인이 젊게 해달라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성 기능이었다. 근처 다방 여자에게 빠져 있었던 노인은 절실했다.
“노인의 그런 행동이 내가 70이 되니까 이해가 돼요. 여자들한테 매 맞는 할아버지들 있죠? 그 능력이 안 되면 매를 맞게 돼 있어요. 남자가 힘이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점에서 비아그라는 의료혁명입니다. 그건 그냥 의약품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건강에 대한 개념 정립이다
물론 김 박사도 나이듦이 자유롭지는 않았다.
“이 나이 되니 술도 기운으로 먹어요. 친구들과 고스톱을 쳐도 옛날에는 밤을 샜는데 지금은 아파서 택도 없고요. 여자? 양귀비가 만나자고 하면 겁부터 나죠.”
그는 노화를 막을 수는 없다고 단정했다. 다만 지연시킬 수는 있다고 말했다.
“과거에 화장품은 피부를 보호하고 예쁘게 만드는 개념이었죠. 지금은 안티에이징입니다. 주름살을 없애고 지방을 빼는 등 화장품이 의료의 보조 기능을 하고 있죠. 물도 옛날에는 그냥 마시는 것이었지만 이제 물을 말할 때 건강 도모에 치료까지 얘기하고 있어요. 먹거리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사람들이 정말 건강식이란 것을 몰라요. TV에서 선전하는 건 건강식이 아니거든요.”
그는 건강식을 먹을 때 가장 중요한 건 건강식이 아니라 건강이란 개념부터 정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두 가지 때문에 삽니다. 우선 내 자신이 살기 위해서 살죠. 내가 살기 위해서 숨 쉬고 물 마시고 밥을 먹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결혼해서 자신을 닮은 다른 나를 만들어서 종족보존을 성공시키는 거죠. 내가 사는 것과 또 다른 나를 살리는 삶이 온전하게 정립될 때가 건강한 삶인 겁니다.”
즐겁고 행복하려면 내려놔야
그는 산업혁명 이전까지는 사람이 사는 것과 야생동물이 사는 것이 다를 게 없었다고 주장했다.
“산업혁명 이전의 삶은 사람이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 그대로의 것을 이용하고 먹고사는 것이었습니다. 야생동물과 별 차이 없잖아요?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부터는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어요. 그로 인해 수만 년, 수십만 년 이어온 인류 역사가 200년 만에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그 태풍 속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에요. 산업혁명과 통신혁명이 100세 시대를 만들긴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제품이 아니라는 게 문제예요.”
케일을 동결건조한 이유도 단순하다. “다른 채소보다 각종 미네랄 등이 많고 ‘야생의 힘’을 온전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란다. 어느 날 아내 엄성희 약사에게 간에 이상이 생긴 환자가 찾아왔다. 동결건조한 케일 분말을 권했더니 환자의 얼굴색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환자는 병원에서 간 완치 통보를 받았다. 그 환자를 통해 약이나 수술이 아닌 자연의 치유력으로 건강과 면역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얻었다. 지금까지 그가 생식 등 건강보조식품을 만들고 있는 이유다.
삶을 건강하게 만들어 병이 저절로 도망가게 만들자는 그의 건강론은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인생과 직결된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즐겁고 행복한 삶은 어떤 전제가 있어야 가능할까?
“내려놔야 해요. 내가 김정일과 이건희 회장과 동갑이거든요. 그런데 그들보다 행복해요. 이룬 일이 그들보다 많다는 게 아니라 현 시점에서의 얘기입니다. 한 사람은 엄청난 재산이 있지만 자신의 의지로 돈을 쓸 수 없는 상황이고 한 사람은 죽었잖아요.”
대체의학과 한방을 공부한 그는 ‘자연음식 전문가’ 아내와 경남 사천의 바닷가에 황토집을 짓고 산다. 효소가 살아 있는 생식 밥상으로 건강을 챙기며 치유의 식재료들을 찾고, 개발하고, 널리 알리고 있다.
“‘치료(cure)’는 의료적 행위입니다. 의사는 그래서 치료를 하죠. 우리 할머니들이 아픈 손자의 배를 쓰다듬었던 것은 치유(care)로 치료와는 다른 것이죠. 내가 나 자신을 돌보는 행위도 ‘치유’라고 하죠. 운동을 해서 건강한 몸을 만드는 것은 ‘치유’의 행위입니다. 운동도 우리 몸의 면역력을 높여주기에 치유의 영역인 것이죠. 좋은 음식도 면역력을 높여주기에 역시 치유죠. 그래서 면역에 좋은 음식을 알리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삽니다.”
△ 김수경(金秀經)
고려대 농학과 졸업, 고려대 식품가공학 석사, 고려대 생명공학원 이학박사, 다움생식 대표.
봄이 되면 왜 그래야 하는지도 별로 생각하지 않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꽃밭을 일구곤 했다. 꽃밭 가꾸기가 우리 집 연례 행사였기 때문이다. 받아 놓았던 꽃씨를 전부 꺼내서 뿌리고 물뿌리개로 물을 줘가며 내 동생들과 정성을 다해 열심히 만들었던 일들이 그립다. 또 꽃모종들을 동네를 다니며 얻어 와서 심기도 했다. 그 해에는 금낭화를 처음으로 담임선생님 집에서 모종으로 얻어 와서 심었다. 6월 정도에 꽃이 필거라 했다.
조롱조롱 주머니를 달고 피어나는 금낭화가 혹시라도 죽을까봐 자라나는 걸 거의 매일 관찰해가며 꽃이 피길 기다렸다. 묘한 꽃 분홍으로 피어나는 꽃이 너무도 예뻐서 어서 피어나라고 기도까지 해가며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요즘에는 절이나 깊은 산속에서도 가끔 만날 수 있는 앙증맞고도 귀여운 꽃이다. 우리 집 꽃밭은 예쁘게 꾸며 놓은 곳은 아니었다. 생각나는 대로 자기 마음대로 심고 가꿔서 들쑥날쑥 했다. 예를 들면 작은 키의 채송화가 피어 있는 곁에 엄청나게 많은 가지를 뻗치면서 한 무더기로 변하는 분꽃이 자리할 때도 있었고, 양귀비, 기생 꽃들이 마구 섞여 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해엔 유독 금낭화만 맨 앞줄에 심어 놓고 기다렸었다.
봄을 알리는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이 지며 민들레 오랑캐꽃이 만발하면서, 산에는 어느 덧 라일락과 아카시아가 피어 향기를 날렸다. 그 뒤를 이어 패랭이도 별별 색을 뽐내며 피어났고, 들판에는 보라색 꿀 꽃들이 가득 가득 무더기로 피어나면서 우리들에게 달콤한 꿀 간식을 선사하며 입을 즐겁게 해줬다. 그 즈음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금낭화도 꽃을 매달았다. 어찌나 신기하고 예쁜지 입가에 웃음은 절로 피어났고 매일매일 봐도 귀엽고 고왔다. 꽃말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 해서 더욱 더 가슴에 와 닿던, 여고시절의 수줍음과 별 이유도 없는 부끄러운 감정이 누구에겐가 들킬까 마음 졸이며 꽃을 보고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 탓이었을까 지금도 금낭화를 만나면 가슴에 설렘이 슬며시 지나가는 걸 느끼곤 한다.
난 혼자 금낭화를 보면서 그 꽃들이 복주머니라고 마음속에 꾹꾹 적어 놓고 믿었다. 내 맘대로 지은 복주머니 꽃이 피는 6월 신부가 되면 일생동안 복이 함께 할 거라는 웃기는 생각을 해가며 혼자 쿡쿡 대기도 했다. 그렇게 하리라 마음을 굳게 먹은 바는 아니었지만, 하고 싶다는 희망은 늘 지니고 살았다.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은 비밀이었다. 막상 결혼을 앞두고 나 혼자의 결정으로는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고 6월이 아닌 3월에 결혼을 했다. 그러나 지금도 금낭화를 만나면 내 옛날의 수줍던 마음으로 그리 될 것을 바라던 멋모르고 꿈만 꾸던 내가 보여 픽 웃음이 절로 나곤 한다. 나는 정말로 금낭화가 피는 6월에 결혼을 하고 싶어졌었다. 실수를 했나? 금낭화가 피는 6월에 결혼하고 싶었던 꿈이 아직도 마음에 걸려 있다.
벚꽃이 지면서 무성한 초록빛 잎만 남겼다. 반면 잎을 먼저 선보인 철쭉이 그 자리를 메운다. 우리 인생사와 비슷하다. 먼저 되었다고 으스댈 일이 아니고 늦다고 투덜댈 일도 아니다. 야산 언저리에는 앵초 미나리냉이꽃이 수줍게 자리를 지킨다. 그야말로 꽃들의 잔치다. 다른 꽃 부러워하는 일 없이 다들 제멋에 겨워 피었다 진다. 인생도 이들과 같으면 얼마나 좋으랴!
눈에 꽃을 담다 보니 영화 가 눈을 끈다.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타이틀이 무척 시적이면서 왠지 숙명적인 느낌이 들어 사뭇 슬픈 느낌이 든다.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를 지칭했다는 이 말은 미인을 뜻하기도 하지만, 조선 시대 기생을 일컫는 말이었다. 조선 시대는 아니지만, 1940년대 아직 기생이라는 신분적 굴레를 벗을 수 없는 시대를 배경으로 두 여인의 숙명이 가슴을 친다.
전반부의 꽃같이 화려한 기생의 의상과 더없이 맑은 소녀들의 우정이 지나치게 밝고 고와서 빛나는 사금파리를 보듯 오히려 불안을 더한다. 그 두 소녀는 국악인 ‘정가’의 맑은소리를 타고난 정소율(한효주)과 노랫가락이 심금을 울리는 서연희(천우희)다. 여기 그 시대 최고 작곡가 김윤우(유연석)가 소율의 애인으로 등장하며 이야기를 구성한다.
그런데 기생이면서 예인인 소율과 연희가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을 만나며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두 소녀의 우상인 이난영은 정가보다는 유행가에 알맞은 목소리를 극찬한다. 당시 윤우도 자신의 역작 ‘조선의 마음’을 부를 사람으로 소율이 아닌 연희를 택한다. 결국, 윤우는 연희에게 곡도 주고 마음도 준다.
철석같이 믿었던 애인의 배신에 소율은 윤우의 사랑을 되찾으려 연희같이 유행가 가수가 되려 한다. 그러나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세속적 권력의 논리로 운명에 대적하려는 비극을 내포한다. 그녀는 결국 끝까지 지키려던 정조를 버리고 일본 경무국장의 애첩이 되며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자신의 맑은 정가 소리를 헌신짝 내버리듯 던져버린다.
권번에서 함께 배우던 기생들이 부러워하던 소리를 버리고 남의 것을 흉내 내는 것은 변심한 애인을 되찾기만큼 힘들고 절망적이다. 잃은 것을 찾으려는 급급한 마음은 소율을 점점 불행의 늪으로 빠뜨린다. 결국,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소율은 연희를 따라 윤우도 죽고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도 연희를 쫓는다. 최근 발굴된 연희 앨범을 자기 것이라며 연희 역할까지 한다.
비극과 멜로의 차이는 작지만 분명하다. 주인공의 비극이 보편적 공감을 획득하면서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느냐의 여부이다. 마지막 거짓 공연장에서 만난 PD는 “진정 저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사랑은 거즛말이’였어요.” 라고 말한다.” 그것은 죽기 전 윤우가 어쩔 수 없는 변심을 용서하라는 의미로 소율에게 준 곡이다. 이 지점에서 경계선이 애매해진다.
영화는 맑은 정가의 소리와 목포의 눈물, 사의 찬미 등으로 이어져 뮤지컬만큼 다채롭고 화려하다. 성예람 작곡에 조선 중기 문신 김상용의 시조를 붙인 정가 ‘사랑은 거즛말이’는 가슴을 파고들며 에인다. ‘사의 찬미’ 또한 시대를 담고 영화의 결말의 복선으로 알맞다. 진실에 맞닥뜨려 꽃다발을 떨어뜨리는 장면은 해어화와도 어울리며 사랑의 상징인 꽃, 피었다가 시드는 사랑의 실체 등으로 중의적 의미를 나타낸다.
박흥식 감독은 당시 역사 속에 기생의 삶을 빌어 사랑과 인생에 대해 여러 생각을 영화 속에 담으려 한 것 같다. ‘사랑은 거짓말’ ‘그렇게 좋은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요?’ ‘헛된 나를 잊는 대신 부디 너만은 잊지 않기를····’ 등의 대사 속에 품은 의미는 관객의 공감을 끌어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다 보니 한 가지 주제로 쭉 끌어가는 힘이 옅어지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요즘 영화가 거의 그렇듯이 마치 뷔페를 차려 놓고 관객에게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먹으라는 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영화의 흥행을 좌우하는 것이 스타시스템으로 귀착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흥행 여부를 떠나 배우들의 연기에 의존한 바 크다. 남자 배우들의 ‘브로맨스’에 기대는 흥행 공식을 떠나 여배우를 투톱으로 내세운 것은 그런 면에서 모험적이며 두 배우에 대한 믿음을 드러낸다. 한효주의 눈물 연기와 천우희의 애절한 목소리는 영화를 살리는데 한몫을 했다. 눈물에 섞인 ‘사랑은 거즛말이’ 곡조가 지금도 가슴속에 바람처럼 잦아들며 기어코 한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김 현 (전 KBS 연구실장, 여행연출가)
12년간 출연했던 KBS-TV 여행 프로그램 를 비롯해 여러 라디오 및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부터 매스컴의 인정을 받게 되어, ‘대한민국 부부 배낭여행가 제1호’라는 별칭까지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내와 나는 늘 우리 부부에게 따라 붙는 이 별칭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해 왔다. 일단 여행지가 정해지면 주마간산에 그치지 않도록 더 철저하게 준비하고 체계적으로 여행일정을 짰다. 이번에 소개하는 2016년 추천 여행지인 「클린턴 코스 중국여행」 「일본 규슈 기차여행」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 일주」 「미국 서부 LA~샌프란시스코」 「캐나다 중부 그레이하운드 여행」도 여행 기간의 10배에 해당하는 준비기간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아내와 내가 역할을 분담하여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다. 물론 유명한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도 나름대로 유익한 여행이 될 수 있으나, 남들과는 조금 차별화된 여행을 가고 싶다면 한 가지 테마를 정해 여행지를 결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클린턴 코스 중국여행」은 코스 제목부터 시작하여 우리 부부가 처음으로 기획한 코스로서, 현재까지 시중에 나와 있지 않은 유일한 코스인 동시에 이곳만 둘러봐도 중국을 알 수 있게끔 핵심만 뽑아놓았기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김현·조동현 부부의 '특별한 부부여행 코스' 첫 번째 - 「클린턴 코스 중국여행」
일반적으로 ‘서양’ 하면 유럽과 미국이 떠오르고, ‘동양’ 하면 역시 중국이 떠오른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있긴 해도 크기나 역사·문화·풍광 등으로 보아 중국이 동양의 대표주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중국은 1년을 여행해도 다 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광대한 영토와 뿌리 깊은 역사, 볼거리가 많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중국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여행하느냐가 중요한데, 아내와 나는 늘 중국 여행을 좀 더 알차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연구해 왔다. 그러던 차에 마침 중국과 미국의 수교가 이루어졌고, 1998년 미국의 전 대통령 클린턴이 중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때 중국 정부가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서 미국 대통령에게 보여줄 중국을 대표 도시 5개를 선정했다. 이것이 바로 북경 - 서안 - 계림 - 소주 - 상해였다.
우리 부부도 1999년 이 코스를 그대로 밟아서 가보았다. 중국의 역사·문화·환경을 통틀어 핵심만 여행할 수 있는 코스여서 무척 만족했다. 그래서 내가 클린턴의 이름을 따 ‘클린턴 코스 중국여행’이라 명칭을 붙였다. 현재까지 시중에서 상품화된 적이 없는 코스이기도 하다. 물론 그동안 북경이나 상해 등을 비롯해 중국에 여러 번 다녀왔다. 90년 초에는 한국 여행관계자들이 중국의 33번째 성(우리나라로 치면 도)이 된 해남도에 초청받았을 때, 취재 겸 한국 단장 자격으로 5번이나 다녀온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늘 중국을 다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목말라 있었는데, 이 클린턴 코스로 인해 그 갈증이 말끔히 가신 것이다.
클린턴 코스의 첫 번째 도시는 북경이다. 엄청난 역사를 갖고 있는 만큼 볼거리 또한 굉장하다. 중국 민주화의 상징인 천안문 광장부터 시작하여 1420년~1911년 까지 중국 황제가 거주하던 자금성, 북경의 최대 번화가이자 중국의 명동으로 불리는 왕부정 거리,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서커스, 그리고 그 유명한 만리장성과 서태후의 여름 별장인 이화원까지.
두 번째 도시 서안은 중국의 한가운데 위치한 3000년 고도이자, 대표적 중국 문화를 엿볼 수 있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그 발전성과가 눈부시다. 한 농부가 발견한 병마용갱(진시황이 말년에 황릉과 함께 건설한 지하궁전의 일부로 지금까지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음)을 비롯하여 유명 서예가들의 필체를 직접 감상할 수 있는 비림, 서안의 인사동으로 불리는 문서거리, 당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눈 로맨스 장소로 유명한 화청지, 중국의 첫 황제인 진시황의 능묘인 진시황릉,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수상 가무쇼, 서안의 3000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섬서 역사박물관, 아시아에서 제일 큰 음악분수 쇼를 볼 수 있는 대안탑, 소수민족 회족의 전통양식을 볼 수 있는 회족거리, 서안의 명동이라 불리는 종고루 광장 등은 꼭 보아야 할 것들이다.
세 번째 도시인 계림은 중국을 대표하는 수려한 경치를 자랑한다. “계림의 산수는 천하제일이다(桂林山水甲天下).”라는 명성을 들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이다. 카르스트 지형에 속하는 계림은 지각변동에 의해서 바다가 솟아오른 것인데, 마치 물속에 산이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배를 타고 가다 보면 풍광이 너무도 아름다워 꿈속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이곳에서는 중국 각 민족의 생활풍습과 수공예를 볼 수 있는 세외도화원, 중국과 서양이 만난 이국적인 서가 재래시장, 계림관광의 하이라이트인 장예모 감독의 연출작 공연 계림시내 전경을 볼 수 있는 북파산, 계림 산수갑 천하제일인 이강 유람(관암~양재), 각양각색의 기이한 종유석의 세계인 관암동굴 등이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
네 번째 도시인 소주는 또 다른 역사의 도시이다. 수양제에 의해 건설된 대운하가 개통되면서 항주와 더불어 ‘천상천당 지하소항(天上天堂 地下蘇杭)’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하였다. 운하가 무척 아름답고 옛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다. 중국의 4대 정원이자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졸정원부터 동양의 피사의 탑이라 불리는 호구탑, 그리고 동양의 베니스인 소주운하에서 배를 타고 유유히 소주만의 정취를 느껴보는 것도, 빠질 수 없는 ‘클린턴 코스’만의 매력이다.
마지막 도시인 상해. 상해는 최근 들어 놀라운 번영을 하고 있는 중국의 심장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수도 북경이 정치의 중심이자 가장 역사적이고 남성적인 북방의 도시라고 한다면, 상해는 중국 경제의 중심지인 동시에 강남의 풍치와 함께 여성스런 남방의 도시라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북경 사람은 상해 사람을 촌놈이라 하고, 상해 사람은 자기들이 최고라고 각각 주장한다고. 원래 늪지대였던 상해는 운하로 연결된 도시이기도 하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가 있는 곳으로 우리에게는 뜻 깊은 도시이기도 하다. 경제 중심 도시답게 상해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의 상징인 동방명주 타워가 유명하고, 프랑스 조계지였던 신천지, 예원 등의 옛 거리, 그리고 1919년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 까지 사용된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꼭 가보아야 할 곳이다.
한약은 대중에게 ‘우리나라 전통의학의 원리에 따라 처방되며, 풀과 뿌리, 꽃과 잎 등을 재료로 주로 사용하고 독성이 거의 없으며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 사용되는 약’이란 인식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 한약이라는 것은 중병을 고칠 때도 많지만, 옛적부터 사람을 죽이는 목적으로 사용된 일도 많았다.
한약에는 독약도 분명히 존재했고 건강에 해를 주기 위한 역할도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독약으로 사용될 만한 한약은 그 당시에도 위험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임금이 내리는 사약이나 기타 음모와 얽힌 암살 등에 사용되던 것이 주류였다. 그러다보니 왕실이 자연스럽게 얽히게 된다. 아마 어진 임금이 재위할 때에는 사약을 내리거나 임금이 독살될 위기에 처하는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이고, 그 반대로 폭군이 집권할 때는 한약을 독약으로 사용하는 일이 빈번하지 않았을까? 여기에 폭군으로 알려진 두 명의 임금을 소재로 다룬 영화를 통해서 한약을 독약으로 썼던 예를 보고자 한다.
포악한 연산군과 ‘사약’
영화 는 연산군의 불우한 기억과 그에 기인한 파격적인 행보에 초점을 맞춘다. 연산군과 장녹수의 관계를 풍자하다 의금부에 끌려가서 모진 문초를 받던 남사당패의 광대 우두머리 장생과 그의 일행은 연산군 앞에서 공연을 하는 기회를 얻게 되지만, 극도로 긴장해 공연 전체를 망치고 목숨이 위험해지는 위기를 맞는다. 이때 그들을 구한 공길의 기지로 위기를 벗어나게 되고, 이들을 맘에 들어 한 연산은 희락원이라는 궁내 거처까지 마련해준다. 그러나 광대들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 왕을 위한 연회에서 왕의 충신인 처선이 꾸민 모종의 사건이 후세에 깊이 기억되는 장면을 만들게 된다.
왕의 권한을 견제하던 삼사를 풍자하면서 탐관오리를 비난하던 정극 공연에 이어서 여인들의 암투에 의해 왕이 후궁에게 사약을 내리는 장면이 난데없이 등장한 것이다. 이에 생모의 비극을 떠올린 연산이 분격하여 그 자리에서 선왕의 후궁들을 칼로 벤다. 사약을 마시고 비통한 죽음을 맞이한 장면이 바로 연산의 포악한 성정을 그대로 드러내게 한 발단이었다. 조선시대에 사약을 만드는 기관은 내의원이었고, 그 조성은 비밀로 되어 있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략 비상, 부자, 초오, 천남성 등의 약재를 섞어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상은 비소화합물로 유해중금속인 비소를 일정량 이상 복용하면 구토, 설사와 함께 중추신경이 마비되게 한다. 부자에 들어있는 아코니틴이라는 성분은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의 분비를 억제하여 근육마비를 일으킨다. 초오는 관절염, 신경통 등에 잘 사용되는 한약이지만, 과용하면 맥박을 떨어뜨리고 심장에 영향을 주어 호흡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혼수상태에 빠지게 하는 작용이 있다. 천남성도 코니인이라는 맹독성 성분을 가지고 있다. 특히 초오는 약을 달인 후에 식지 않은 상태에서 마시면 흡수가 빨라지면서 더 강한 독성을 나타낸다.
이런 한약의 부작용을 경감시켜 주고 이들이 가진 약성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 소금물에 담갔다가 찌거나, 강한 열에 오랫동안 쪄내는 과정을 거쳐 독성을 떨어뜨린 후 약재로 사용하곤 했다. 이렇게 강한 독성에도 불구하고 부자와 초오의 효과는 확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자는 한의학적으로 심장의 기능을 강화시키고, 남성의 성기능을 촉진시킨다고 알려져 있으며, 혈액순환을 촉진하거나 관절염을 치료하는 데 사용한다. 초오도 진통에 탁월한 효능을 갖고 있으므로 아코니틴의 함량만 기준이하로 떨어뜨려 줄 수 있다면 진통제로서의 활용가치가 높다.
한의학적으로는 이 초오의 독성을 낮추기 위해서 북어와 같이 끓이곤 했는데, 실제로 북어와 초오를 끓이면 신기하게도 독성 성분인 아코니틴의 함량이 떨어진다.
‘아편증기’에 중독된 광해
영화 는 광해군을 폭군이 아닌, 따뜻한 마음을 가졌으나 그것을 잃고 살았던 사람으로 묘사하며 풀어나간다. 실제로도 역사가들은 광해군을 폭정과 방탕에 빠진 임금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그보다 그가 추구했던 실리적인 외교가 당시 조정의 대세였던 신하들의 전통적인 보수적 외교관을 극복하지 못해 그가 폐위된 원인으로 분석한다. 이 깊은 얘기의 출발은 영화 말미에 광해군이 진짜인지 아니면 그가 자리를 비운 틈에 그의 역할을 대신했던 평민 하선인지를 가리는 중요한 증거인 그의 왼쪽 가슴에 난 깊은 흉터와 관계가 있다.
임진왜란의 격랑 속에서 피란가기에 바빴던 선조는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조정을 하나 더 만드는 분조(分朝)의 결정을 내렸다. 당시 적자가 없던 선조는 후궁 소생인 광해를 세자로 책봉하여 그 중임을 맡기게 된다. 동분서주하며 민심을 수습하고 군량을 모으며 몸을 바쳐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세자라면 당연히 전란이 끝난 후 어깨를 펴며 왕위를 계승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런 상식과는 달리 선조는 광해를 외면하고, 그 후 태어난 어린 영창대군이 그의 발목을 잡을 상황이 되면서 광해의 마음속에는 비정과 말할 수 없는 피해의식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영화의 서두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살해 위협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광해의 외침으로 시작한 이 의심의 굴레는 결국 영화가 끝날 때 즈음에는 자신을 대신하여 자리를 지켜준 하선을 죽여 입을 닫게 하라는 명령으로까지 이어진다.
현대판 왕과 거지로도 관객들에게 입소문이 바짝 났던 이 영화는 명분만을 앞세우고 양반들의 권익만 중요시했던 조정에 대한 따끔한 하선의 질책으로 맛깔이 난다. 현실에서도 후금에 대한 철저한 실리외교로 더 큰 전란을 막는 결과도 가져왔지만 말이다. 극중에서 이조판서는 광해군을 제거할 목적으로 이조정랑을 시켜 당시 왕의 총애를 받던 한상궁에게 밀명을 내린다.
바로 광해군에게 아편증기를 쐬게 하여 서서히 중독시켜 극적인 죽음보다 자연사로 보이게 하려한다. 이것을 모른 광해는 아편에 중독되어 의식을 잃게 되고 그 공백을 내보일 수 없는 도승지 허균과 조내관은 광해와 모습이 흡사한 하선을 몰래 끌어들여 왕의 역할을 맡긴다.
아편은 양귀비의 덜 익은 열매에서 얻는 유액을 건조하여 굳힌 것이다. 주성분으로는 모르핀, 파파베린, 코데인, 테바인 등 진경과 진통작용을 가진 성분들이 많다. 지방에서도 집안에서 복통 등에 사용할 목적으로 조금씩 재배하다가 마약법 위반으로 단속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중에서 모르핀은 계속 사용할 경우, 나중에 심각한 금단증상을 가져온다. 때문에 모르핀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서 단번에 모르핀을 끊게 되면 금단증상이 격하게 밀려들면서 환자의 생명이 위험해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현상을 피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반응을 지켜보면서 서서히 줄여나가야 할 정도로 모르핀은 중독증상이 강하다. 주사제로 사용되기 때문에 민간에서 제조하는 것이 거의 힘들고, 말기암환자나 담석통 등의 진정에 사용되거나 전장에서 심각한 부상의 즉각적인 대응에 사용한다. 때문에 모르핀의 유출사고는 모르핀을 보관하는 곳이 병원과 전쟁이 일어나는 전장의 한복판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최혁재(崔爀在)약사 경희의료원 약제본부 예제팀장
경희대 약학대학 객원교수, 한국병원약사회 법제이사, 서울시 약사회 병원약사이사,
대한약물역학위해관리학회 총무이사
한 달쯤 전에 유럽 몇 개국을 오랜만에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젊은 시절의 부푼 기대나 해방감, 잠자는 시간도 아까웠던 흥분은 이제 없었지만 며칠 동안이라도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홀가분하고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높은 ‘일상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에 썼듯이 “인생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몇 초보다 더 해방감을 주는 시간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외국에 나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속에 들어가는 것은 언제나 일상으로부터 헤어나는 일이며 나를 다른 세상에 세워보는 일입니다. ‘지금 여기’로부터 ‘다른 저기’로의 이동을 통해 인간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순전히 상한 삶을 새로이 하려는 시도가 여행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불편함을 느꼈던 샤를 보들레르(1821~1867)는 “늘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 어딘가로 옮겨가는 것을 내 영혼은 언제나 환영해 마지않는다.”고 썼습니다.
벨기에 여행 중 중풍으로 쓰러져 파리로 돌아온 끝에 사망한 보들레르는 일상이 기억나지 않는 곳, 다른 곳, 먼 곳, 다른 대륙으로 가는 걸 늘 꿈꾸었습니다. 그는 “삶은 모든 환자가 자리를 바꾸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병원”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이 환자는 난방장치 앞에서 앓고 싶어 하고 저 환자는 창가에 누워 있어야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건강을 위해 걷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졌지만, 그런 이들의 도보여행도 상한 삶, 모자라는 삶을 기우고 채우는 일입니다. 40일 가까이 걸어야 하는 스페인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산티아고에 가는 길) 순례를 다녀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나의 선배 한 분은 그 길을 걷는 동안 세 번을 울었답니다. 어느 성당 앞에 혼자 앉아서 종소리를 들으며 저녁노을을 볼 때, 들판 가득 메운 빨간 양귀비를 흔드는 바람 속에 꽃과 함께 섞였을 때, 비가 갠 다음 날 아침 곱다 못해 서러운 일출을 보았을 때 어디서 온 건지 알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이 여행으로 그는 맑아져 돌아왔습니다. 그 맑음과 성취감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반드시 외국이 아니더라도 낯선 곳으로 가는 것, 모르는 풍광과 사람을 접하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모두 다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꽃 핀 봄밤의 즐거움을 노래한 이백(李白)의 시 ‘춘야원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는 “무릇 하늘과 땅은 만물의 여관이요/세월은 영원한 시간의 나그네로다”[夫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라고 시작됩니다. 이어 “덧없는 인생 꿈과 같으니 즐거움을 누린다 한들 얼마나 되랴/옛사람이 촛불을 밝히고 밤에 논 것은 과연 그 까닭이 있도다.”[而浮生若夢 爲歡幾何 古人秉燭夜遊良有以也]라고 했습니다.
세상이라는 여관에 머무는 우리들 나그네는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언론인 오소백(吳蘇白·1921~2008)은 ‘단상’이라는 글에서 “여행량은 인생량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는 한 권의 책이며 여행하는 사람은 한 페이지밖에 못 읽는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 여행을 해야 합니다.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 썼듯이 시는 감정이 아니라 사실은 경험입니다. 이 경험을 구성하는 게 인간과 사물에 대한 학습, 그리고 미지의 세계와 세상에 대한 여행 아니겠습니까?
개인의 여행은 그 자신의 삶은 물론 세상에 대해 많은 변화를 몰고 옵니다. 모로코 출신 중세 이슬람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1304~1368)는 인도와 중국을 여행하는 데 체류기간까지 합쳐 25년이 걸렸습니다. 64년의 생애 중 25년이면 철들고 나서 절반의 생애를 바친 셈인데, 그의 여행을 통해 세계는 좀 더 가까워지게 됐습니다. 그보다 앞서 중국 천축 등을 24년간 여행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폴로(1254~1324)의 ‘동방견문록’이 세계사, 특히 서양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습니다.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여행에 대해 발섭(跋涉)이라는 말을 써왔습니다. 시경에 나옵니다. 발은 넓은 광야를 걸어가는 것, 섭은 물을 건너가는 것입니다. 여행이란 광야를 걷고 물을 건너가는 일입니다. 여행의 규모와 거리에 대해서는 장자의 붕정만리(鵬程萬里)라는 말이 동양의 언어를 지배해왔습니다. 상상의 새인 붕(鵬)은 크기가 몇 천리가 되는지 모를 정도이며 물을 치면 3천리에 파도가 일고 회오리를 일으켜 날아오르면 높이가 9만리에 이르는데, 6개월을 날아서야 한 번 쉰다고 합니다. 원대한 뜻을 지닌 사람의 일은 소인배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크다는 뜻이지요. 같은 여행을 하더라도 남기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어떤 이들이 ‘세계 최고의 여행기’라고 상찬하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중국 문명과 문물에 대한 정밀하고 방대한 관찰과 기록이 읽는 이를 압도합니다. 연암은 이 책의 ‘도강록(渡江錄)’에서 아득하고 묘막(渺漠)한 요동벌판에 이르러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사람이란 본시 어디고 붙어 의지하는 데가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아 다니게 마련임을 알았다.” 그리고 “좋은 울음터로다. 한바탕 울 만하구나”[好哭場 可以哭矣]라는 고금에 빛나는 멋진 말을 합니다.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도보여행객이 흘린 소리 없는 눈물과, 여기 나오는 연암의 소리 내는 울음은 다릅니다. 연암은 ‘울음터’ 다음에 인간이 꼭 슬퍼서만 우는 게 아니라는 긴 울음론을 펼치는데, 두 경우 다 슬퍼서 우는 건 아닙니다. 인간의 본질과 근원에 대한 인식이나 깨달음에서 비롯된 울음이지요. 작고 소박하고 아름다운 것과, 거대하고 웅장해 숭고미를 느끼게 하는 것을 볼 때의 울음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여행은 기록입니다. 아니 여행은 기록이라야 의미가 있습니다. 현장이 중요합니다. 소설가 김연수는 어떤 작품은 중국 옌볜(延邊)에서, 어떤 작품은 독일에 가서 썼습니다. 머무는 동안 그곳의 책을 많이 사서 보았다고 합니다. 여행이라는 직접 경험에다 독서라는 간접 경험을 결합한 글쓰기인데, 독서와 여행의 중요성을 갈파한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가 바로 이런 경우일 것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라고 했지만, 한 번 생을 받아 이 땅에 온 사람은 세상을 남김없이 돌아 괴테처럼 ‘하늘이 어디서나 푸르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고요하게 자신의 방에 머물러도 될 것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아니면 여럿이서 여행하는 것에 관해서는 이번에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학명은 Papaver radicatum var. pseudoradicatum (Kitag.) Kitag.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불리어온 백두산. 까마득한 옛날부터 국토와 민족과 국가의 시원(始原)으로 숭상 받아온 백두산은 식물학에 있어서도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져가고 있는 한반도내 북방계 식물의 고향과도 같은 곳으로 막중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 옛날 빙하기 때 백두대간을 타고 저 멀리 제주도까지 밀고 내려갔던 북방계 식물들이 후빙기 이후 기온이 상승하면서 점차 절멸해가고 있는 가운데 높이 2750m의 백두산은 한반도에 뿌리 내렸던 북방계 식물들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발 2500m를 넘는 봉우리만 16개에 이르는 백두산에는 2300종이 넘는 식물들이 서식하는데, 특히 해발 2000m 안팎의 고산 지대에는 두메양귀비를 비롯해 두메자운, 바위구절초, 노랑만병초, 가솔송, 좀참꽃나무, 구름범의귀, 돌꽃 등 북방계 식물의 특성을 가진 300여 종의 야생화들이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납니다.
이렇듯 한반도 북방계 식물의 고향, 희귀 야생화 및 고산식물의 보고인 백두산은 그러나 5월 말에야 기온이 0도로 올라가 8월 중순이면 다시 영하로 떨어지기 때문에 그야말로 6~8월 3개월 짧은 기간에 모든 꽃들이 한꺼번에 피었다가 지는 특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당연히 백두산 꽃 탐사도 대략 6월 초부터 8월 중순까지 단기간에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해발 3000m에 이르는 고산지대인 만큼 여름철 수시로 비가 오거나 바람이 강하게 부는 악천후 때문에 천상의 화원이 펼쳐지는 산정 부근까지 접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남한에서는 만날 수 없는 두메양귀비는 이른바 백두산 고산지대 평원에서 자라는 대표적인 고산식물의 하나로 꼽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백두산 중턱 수목한계선을 지나면 나타나는 고산 평원지대에서부터 눈에 띄기 시작해 천지 주변 큰 바위와 자잘한 돌, 흙이 뒤섞인 벼랑 끝에 이르기까지 많은 곳에서 무더기로 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꼭 1년 전인 지난해 7월초 갑작스런 폭풍우로 산문이 폐쇄되는 바람에 이튿날 겨우 오른 백두산 천지 바로 아래서 만난 두메양귀비는 모처럼 활짝 벗겨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연노랑 꽃잎을 살랑거리며 ‘한여름 밤의 꿈’ 같은 황홀경을 선사하더군요. 양귀비과의 두해살이 유독성 식물인 두메양귀비의 ‘두메’는 이른바 두메산골의 두메에서 따온 접두어가 맞습니다. 그러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골이나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변두리”라는 두메의 사전적 의미를 넘어, 그야말로 심심산천에 피는 꽃, 백두산 정도는 되는 오지나 높은 산에 피는 꽃들에 붙는 단어입니다.
두메자운, 두메양지꽃, 두메애기풀도 마찬가지입니다. 백두산의 모든 꽃들은 고산지대 특유의 강풍에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 필사의 노력을 하는데, 두메양귀비의 경우 바람의 반대 방향으로 꽃잎을 돌리며 꽃술과 꽃가루를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고 합니다.
“아~ 우리 동네 공원에서 본 꽃과 닮았네!” 누군가 두메양귀비를 보면서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동네 화단에 심어진 꽃양귀비가 두메양귀비를 닮았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섭한 말씀 마세요. 원조 양귀비더러 ‘꽃양귀비’를 닮았다고 하면 듣는 두메양귀비가 서운해 합니다” 하지만 꽃양귀비와 달리 정말 ‘아편’의 원료가 되는 유독성 식물이 바로 두메양귀비입니다.
*Where is it?
현재 백두산 야생화 탐사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남과 북의 통로가 막혔으니 중국을 통해 가는 수 밖에 없다. 중국명 ‘장백산’으로 불리는 백두산에 오르는 길은 세 개. 북백두(북파), 서백두(서파), 남백두(남파) 등 세 개 코스를 이용해 정상의 천지까지 오른 뒤 주변 고원지에 펼쳐진 꽃밭을 살피면 된다. 다만 최근 북백두 부근 달문이나 서백두의 장백폭포, 소천지, 지하삼림 등 중요 탐방지에 대한 통제가 심해 야생화 탐사가 예전처럼 수월하지가 않다. 사진의 두메양귀비는 북백두의 천문봉 아래 주자창 부근 초원에서 담았다. 기상대에서 숙박한 뒤 새벽 천지가 열리는 것을 보고 내려와 아침 햇살에 찬란하게 빛나는 두메양귀비를 보았다.
전문위원/야생화 칼럼니스트│김인철
서울신문 기자로 29년 일했다/ '김인철의 야생화산책(ickim.blog.seoul.co.kr)'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