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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들수록 행복한 삶… ‘마음 나이’ 먹는 나이 듦이란?
- 팔순 노인이 스스로를 ‘이팔청춘’이라 말한다. 그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여기서의 나이는 행정적 나이도, 생물학적 나이도 아닌 ‘마음의 나이’에서 비롯됐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팔청춘 노인의 노후 또한 마음처럼 꽃다우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현실에서 늙지 않는 삶은 모순이다. 그러나 마음이 늙지 않는 삶은 가능한 일이다. 젊음을 유지하며 사는 법, 마음의 나이로 살면 그만이다. 나이보다 젊고 건강하게 살기 위한 ‘웰에이징’(Well-aging)과 ‘안티에이징’(Anti-aging) 관련 정보는 주변에서 흔히 찾을 수 있다. 대체로 보면 일상에서의 균형 잡힌 식사와 규칙적인 운동 등을 조언한다. 이러한 방법이 옳고 중요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어떤 생각과 마음을 품고 살아갈 것인지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세계적인 안티에이징 전문가 벨른트 클라이네궁크 박사(독일 항노화의학협회 회장)는 저서 ‘행복한 노인은 늙지 않는다’를 통해 “영양 섭취와 운동은 변함없이 안티에이징에 중요한 주제다. 그러나 활력 넘치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적인 노화에 기여하는 건 바로 우리의 ‘생각’이다”라고 강조했다. 주관적 나이 따라 삶의 양식 달라진다 같은 맥락으로 이호선 한국노인상담센터장(숭실사이버대학교 기독교상담복지학과 학과장)은 ‘마음 나이’에 대해 언급했다. 나이는 크게 ‘주민등록상(객관적) 연령’과 ‘주관적 연령’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여기서 ‘마음 나이’는 후자에 속한다. 주관적 나이는 심리적 나이 또는 정서적 나이와도 같다. 현장에서 수많은 중장년을 상담하고 교육해온 이 센터장은 “마음의 나이를 물었을 때 중장년은 대체로 실제 나이에서 20세 정도 더 젊게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며 “사람들의 행동 패턴이나 소비 방식 등을 보면 마음 나이에 기준이 있다. 스스로 느끼는 심리적 나이에 따라 사회적으로 자신을 규정하고 삶을 일궈가는 것이다. 여러 연구에서 실제 나이보다 마음 나이를 더 젊게 사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사회 활동 및 관계성, 일하는 빈도 및 수입 등에서도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즉 마음의 나이를 더 젊게 여기는 것이 삶에도 더 유익하다고 볼 수 있다. 고무적인 것은 실제 나이는 날 때부터 주어진 것이지만, 마음의 나이는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불행한 노후? 노년기 행복은 상승세 주관적 나이를 젊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긍정적 사고가 바탕이 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를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바로 ‘나이 듦’에 대한 선입견이다. ‘노화’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장면은 무엇인가? 주름진 얼굴, 굽은 허리, 홀로 있는 노인 등 쇠약하고 무기력한 다소 부정적인 모습을 그린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묘사는 언론 및 미디어를 통해서도 노화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줄곧 쓰인다. 그러면서 우리에겐 노화가 두렵거나 회피하고 싶은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국회미래연구원 ‘한국인의 행복조사’(2021) 보고서에 따르면, 그간 선행된 서구 선진국 연구들에서 연령대별로 느끼는 주관적 행복감은 중년에 감소했다가 노년기에 증가하는 U자형을 띠는 경향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나 자녀 양육 및 부모 부양에 대한 부담이 커지는 시기인 40대 전후에는 행복감이 최저에 이르지만, 이를 지나면 60대를 변곡점으로 행복 그래프는 상승세를 보인다. 주목할 점은 80대 이후에는 그래프에 굴곡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가령 80대가 넘으면 유익한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지녔더라도 건강상의 문제들이 나타나곤 한다. 이러한 문제는 당사자 또한 익히 예상한 터라 일상의 만족감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간의 인생 경험을 통해 주어진 상황에서 최대의 만족과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삶의 지혜를 터득한 시기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호선 센터장은 “노화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 가령 노인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든지, 노인은 사회적 활동이나 성(性)생활을 할 수 없다든지 등이다. 대체로 이러한 편견은 20세기 소위 ‘뒷방 늙은이’ 시절에 만들어진 부정적인 노인상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현재의 베이비붐 세대, 액티브 시니어들은 스스로 이전 세대 노인과는 다른 정체성을 부여하며 제2의 르네상스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중장년기, 배움의 사치를 한껏 누릴 때 노화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중 하나는 ‘나이가 들수록 뇌가 퇴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오해다. 이는 40년이라는 장기간 6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 연구진의 ‘시애틀 종단연구’ 결과로도 설명 가능하다. 해당 연구에서는 대상자들의 어휘, 계산, 귀납적 추리 능력 등을 조사했는데, 인생에서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지능이 가장 높은 시기는 바로 중장년기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은 50대 후반 정도에 종합 지능이 가장 높았고, 여성은 60대 중반 이후에도 꾸준히 지능이 높아진다는 내용도 있다. 이와 유사한 연구로 데이비드 베인브리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는 젊은 층과 비교해 중년 집단의 지능을 조사했는데, 그 결과를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는 중년에야 비로소 신을 닮은 지혜와 이성과 기억력을 갖는다.” 앞서 언급한 벨른트 클라이네궁크 박사 또한 저서에서 “뇌의 기능 중 몇몇은 노화되지 않고 나이 들어서도 계속 발달한다. 특히 선견지명과 통찰력은 노년에 점점 강화된다”며 “인간은 평생 배우는 존재로서 성격 또한 평생 발달시킬 수 있다”고 내다봤다. 흔히 배움에도 때가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중장년기’가 바로 그 시기일 수 있다. 이호선 센터장은 “중년 이후의 공부는 이전보다 훨씬 몰입도가 높고 성취도도 크게 나타난다. 나이가 들면 일상에 여유가 생기게 마련인데, 그 덕분에 할 수 있는 가장 신나는 사치가 바로 ‘학습’이다. 요즘은 온·오프라인 할 것 없이 중장년을 위한 학습 공간과 시스템이 잘 마련돼 있다. 이러한 사치를 충분히 누리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일상이 축제, 잔치가 시작됐다 노후에 늘어난 여유 시간을 학습으로 채우는 이가 있는가 하면, 상실감에 빠지는 이도 있다. 이 센터장은 중년 이전을 서양화, 중년 이후를 동양화에 비유하며 이 또한 나이 듦이 주는 이점이라 설명했다. 이를테면 새로운 경험을 계속 채워나가는 젊은 시절은 색채가 풍부한 서양화에 가깝지만, 나이가 들수록 군더더기를 비우고 여백의 미가 강조되는 동양화로 화풍이 옮겨간다는 것이다. 즉 노년기의 긴 여유도 생각하기에 따라 누군가에겐 공허함으로, 또 누군가에겐 아름다움의 크기로 여겨질 수 있다. 이렇듯 일상의 현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이를 즐기려는 태도는 나이 들수록 삶을 더 유익하게 만든다. 이 센터장은 “매일의 일상은 신이 준 선물이자 축제와 마찬가지다. 오늘, 바로 이 시간을 지금 만끽하지 않으면, 내일은 더 늙어 있을 것”이라며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잘 헤아려보고, 이를 기쁘게 여기며, 주변과 나눌 수 있다면 ‘웰에이징’이 아닐까. 특히 노년기엔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나눌 것인가 고민해보길 바란다. 나눔은 사회공헌이나 봉사일 수도 있고, 가르침일 수도 있지만, 때론 누군가와 건강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나눔을 실현하는 것이라 하겠다. 최영미 시인은 ‘서른, 잔치는 끝났다’ 했다. 이에 반해 중년은 잔치가 시작됐다고 말하고 싶다. 변화를 꿈꾸고 실행하면서 나이 듦이 주는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도움말 이호선 한국노인상담센터장(숭실사이버대학교 기독교상담복지학과 학과장)
- 2024-02-0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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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물셋에 접은 꿈, 일흔여덟에 펼쳐… 연극배우 유만석
- 스물셋, 무명 배우는 이상과 현실 앞에서 현실을 택했다. 그 선택이 일흔 넘어서까지 미련으로 남을 줄 몰랐다. 유만석(78) 씨는 꿈의 무대로 돌아왔다. 오랜 로망을 소박하게 이뤄나가고 있는 지금, 그는 말한다. 그게 언제라도 좋아하는 일을 꼭 하라고. 제4회 서울시니어연극제 개막식 후 대학로 종로마루홀 내 모든 조명이 꺼졌다. 곧 개막작 종로노인종합복지관 시니어연극단 대학老愛(대학로애)의 ‘지하철 두더지’가 소개됐다. 암흑 속에서 살그머니 무대에 오른 유만석 씨는 생각했다. ‘잘하자. 처음이니까 더더욱 잘해야 해. 아, 실수하면 어떡하지? 그건 절대 안 돼! 연습한 대로만 하자. 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조명이 탁 켜지고 노신사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탄탄한 발성의 대사가 극장을 울렸다. “나는 을지로3가역 역장이다. 1983년 개통된 2호선 을지로3가역은 2000년대부터 오후 12시, 2시, 4시, 6시, 하루에 네 번 분주해진다. 지하철 문이 열리면 두툼한 패딩을 입은 어르신들이 어깨에 쇼핑백을 잔뜩 메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한곳으로 모인다. 어르신들이 내려놓은 쇼핑백들은 끝이 보이지 않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쇼핑백들은 어르신들과 함께 연기처럼 사라진다. 우리는 그들을 ‘지하철 두더지’라고 부른다.” 시작을 알리는 2분 30초 남짓의 독백. 완벽히 해냈다. 연극은 순조롭게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청년 유만석의 꿈도 일흔여덟에 다음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해방둥이의 연기 짝사랑 1945년생 ‘해방둥이’ 유만석 씨는 6·25전쟁 후 일었던 연극 붐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 속 피폐해진 심신을 위로한 건 동네마다 가설무대를 만들어놓고 활동한 극단이었다. “휴전 이후 연극이 대단히 인기였습니다. 그때 상당히 매료됐어요. 고등학교 가서는 자연스럽게 영화를 즐겼지요. 저는 박노식 배우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탤런트 박준규 씨 부친 말입니다. 할리우드 배우 리처드 위드마크도 좋아했지요. 저도 그런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유만석 씨는 꿈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종합예술대학인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 전신)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해 배우 수업을 받았다. 그때가 1965년이었다. 기회는 곧 주어졌다. 1967년과 1968년 2년여 동안 작은 배역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꿈에 다가갈수록 벽에 부딪히는 것 같았다. 용돈벌이도 안 되는 현실 속에서 이상만 좇을 순 없었다. “대여섯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든 생각은 생활의 안정 없이는 어렵겠다는 거였어요. 하루 세 끼 안 먹어도 괜찮습니다. 두 끼를 먹더라도 안정만 됐다면 계속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됐어요. 언제까지고 고향에서 돈을 받아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보내줄 수도 없을 것이고요. 배우로 인정받으려면 무수히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오래 활동한다고 다 되지도 않습니다. 이름 한 번 못 알리고 늙을 수도 있지요. 그 어떤 보장도 없는 생활… 접어야 했습니다. 현실이 그랬습니다. 돈을 벌어야 했어요.” 1969년 유만석 씨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 아니, 내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배우가 되고 싶은 감정이 계속해서 자리 잡고 있었다. 대학老愛와 다시 꾸는 꿈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호프집, 신문 판매직, 세탁소, 부동산중개업까지 하며 바삐 살다 보니 어느덧 일흔이 넘었다. “젊었을 때 마스크가 꽤 괜찮았다”며 보여준 사진 속 부리부리한 청년의 눈매는 어느덧 선하게 처져 있었다. 이제 꿈꾸기 늦은 나이라고 생각했을 때 운명은 그를 연극으로 이끌었다. “복지관은 생활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기관인 줄만 알았습니다. 여러 특화 활동을 한다는 것은 몰랐어요. 우연히 컴퓨터를 가르쳐준다기에 와봤습니다. 가입하는데 이것저것 묻더군요. 그런데 마침 가입 상담해주신 분이 연극단 담당이었던 겁니다. 이제 와 다시 한다는 것이 어쩐지 꺼려졌는데 올해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지금이라도 해봐야겠다고요.” 유만석 씨가 가입한 대학老愛는 종로노인종합복지관의 시니어연극단이다. 2011년부터 활동한 극단 빨래터가 지역사회 노인 전문 연극단원들의 활동을 알리고 전문성을 갖춘 연극단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2015년 7월 대학老愛로 탈바꿈했다. 세대 공존 연극학교(수업, 공연)를 통해 노인 연극인을 양성하고, 격년으로 서울시니어연극제를 운영 중이다. 단원은 2023년 11월 기준 모두 12명(평균연령 71.4세). 주로 대학로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으로 구성돼 있다. 단원들은 매주 월요일 오후 2시에 모여 합을 맞춘다. 대본을 읽고, 역할을 분담하고, 내공을 덧입힌다. 그렇게 올해는 ‘지하철 두더지’를 연극제에 올리고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크지 않은 무대, 작은 역할이지만 유만석 씨는 만족해 보였다. “매주 월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그 두 시간이 기다려져요. 작품상이 없는데, 혹 있었다면 우리가 받지 않았을까요?(웃음)”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 유만석 씨는 짐짓 차분해 보였다.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식의 호들갑은 없었다. 알려진 배우가 되고 싶다는 욕망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이토록 침착한 이유는 과거 행보로 짐작할 수 있다. 1995년 그의 나이 쉰의 일이다. 그때까지도 유만석 씨는 연기 욕심을 냈다. 역할과 분량에도 신경 썼다. 하지만 세상사는 마음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실은 영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출연했습니다. 하고 싶은 역할이 있었는데 다른 배역을 맡게 됐어요. 일본인이었지요. 촬영장에서 쪽대본을 받았는데, 우리나라 말이면 어떻게든 외워서 했을 겁니다. 그런데 짧지도 않은 대사를 모르는 말로 하려니 잘 안 되더라고요. 결국 카메라를 돌려놓고 후시 녹음을 했습니다. 개봉 후 열린 시사회 무대에 오르라고 했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요. 그게 끝이었습니다.” 유만석 씨는 이제 어떤 것도 따지지 않는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그 자체의 가치를 완전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대뜸 그는 아들 이야기를 했다. 학창 시절 게임을 좋아해 속을 썩이던 아들은 아르바이트로 게임 회사에 들어갔다가 정식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지금까지 잘 일하고 있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순수하게 따른 아들을 긍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다시 50여 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스물셋 유만석의 선택은 어떨까. 그는 다를 거라고 했다. “잊고 살면서도 가끔 연기 생각이 났습니다. 이따금 도전하고… 그러다 일흔여덟이 됐어요. 지금은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연기를 하면서 즐겁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후회와 아쉬움 그리고 깨달음. 그 뒤에 그는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연극이 끝나고 난 후 연극 ‘지하철 두더지’를 올린 대학老愛 단원들의 허심탄회한 소감을 들었다. 자기반성부터 쓴소리까지 역할 크기와 관계없이 이들의 대화는 진지했다. 무대 아래 단원들은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었다. “돌아보니 대본 속에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습니다. 대사에 있던 ‘7업’(깨끗하게 클린업, 용모를 단정히 드레스업, 말하기보다 듣기 셧업, 혼자 있지 말고 모임 활동 쇼업, 밝고 유쾌한 분위기 치얼업, 지갑을 열고 입은 닫는 페이업, 마지막으로 포기할 것은 포기하는 기브업)은 친구들에게도 들려줬습니다. 늙어서도 지켜야 한다고요. 무대에서 또 일상에서 박수를 많이 받았습니다. 연극 덕입니다. 감사합니다.” - 배우 남궁유선 “작은 역을 맡았지만 나름대로 카리스마를 보여준 것 같아서 만족스럽습니다. 긴 대사를 외우고 능청스럽게 연기하는 다른 단원들을 보면서 배우고 또 배웁니다.” - 배우 신동숙 “하루는 대사를 외웠는데도 자꾸 실수해서 울었습니다. 암기는 자신 있었는데 잊어버리는 스스로에게 좌절감이 들었어요. 그래도 그 눈물이 더 열심히 하자는 다짐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또 다른 도약을 기대해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 배우 양숙자 “딸에게 어떤 옷을 입으면 좋을지 물었는데 대뜸 ‘현장에 한 번이라도 가봤냐’고 했습니다. ‘대본만 앵무새처럼 외워서 하는 게 과연 연극이라고 할 수 있냐’며 신랄하게 비판하더군요. 그 말이 가슴에 꽂혔습니다. 그동안 너무 편하게 해온 건 아닌가 반성했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기에 임해야겠습니다.” - 배우 구신자 “현실의 저는 사람을 앞에 두고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닙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끌어내는 게 연극의 매력이라고 매번 느낍니다.” - 배우 송원자 “지금까지 연극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와준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한 가지 단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연극 무대에서 사설은 피해주셨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내 연기, 그리고 내 것에 몰입했으면 좋겠습니다.” - 배우 김정남
- 2023-12-07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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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기는 주식 전문가 ‘최고민수’… “중장년, 추가 매수 노려야”
- ‘주식계의 개그맨’ 박민수(50) 씨는 순수한 광기를 지닌 유쾌한 인물로 보이지만 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돈 벌어야겠다고 생각하면 못 할 게 없다”고 대놓고 말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이 땅의 아버지다. 쌍둥이 아들을 위해 은퇴도 미뤘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절실하게 하는 중이다. 여의도 증권 유관기관 24년 차 직장인이자 주식투자 1타 강사. 샌드타이거샤크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그리고 구독자 225만 명을 자랑하는 이말년 작가의 유튜브 채널 ‘침착맨’에서 인지도까지 쌓아 올린 사나이. 박민수 씨와 마주하기 전에는 능력 있는 직장인의 흔한 성공 스토리로 보였다. 주식투자에 성공하면서 업계에 이름을 알린 뒤 실타래 풀리듯 각종 섭외 대상이 되는, 우리네에겐 무척 어렵지만 그 동네에서는 가능한 이야기의 주인공인 줄 알았다. 그래서 50대에도 해맑은 미소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만나보면 다르다는 말을 자주 들어요. 어쩌다 보니 재미를 주는 캐릭터가 됐는데, 사실 평소에 저는 굉장히 침착해요.” 차분한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더 의외였다. 그들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운이라고 여겼던 영역마다 박민수 씨의 의도와 숨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을 위해서, 쓸모를 찾아서 직장인은 사표를 가슴속에 품고 다닌다는 말이 있다. 박민수 씨도 그렇다. ‘쓸모’라는 말을 유독 좋아하는 그에게 나이 들어 쓸모없어질 수 있다는 건 실체적 불안 그 이상이었다. “쉰 살이 되기 6~7년 전부터 회사에서의 내 쓸모가 줄어들겠다는 느낌이 왔어요. 회사 밖에서의 쓸모가 비자발적으로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고요. 쉽게 말해 나가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거죠. 언젠가 생길 일을 미리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가족을 어떻게 먹여살릴까’ 생각하면 엄청나게 절실해지는 거죠. 굶기면 안 되잖아요?” 박민수 씨는 고3처럼 살아가고 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주식투자 뉴스를 정리해서 네이버 카페에 올리고, 직장으로 가 오전 9시부터 오후 6~7시까지 업무를 본다. 운동 삼아 가급적 목동 집까지 1시간 30여 분 걸어서 퇴근하고, 오후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글쓰기 등 자기계발을 한다. 라디오나 유튜브 촬영이 있을 때면 꼬박 며칠을 준비에 매달리기도 한다. 체력의 한계를 느끼지만 루틴에 변함은 없다. “절실함이 원동력인 것 같아요. 가족이 있잖아요. 책임감인지 의무감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가족이라는 존재가 굉장히 에너지를 올려줘요.” 40대 초반까지 그는 쓸모를 회사 안에서만 찾았다. 밤샘 야근을 마다하지 않았고, 술은 마시지도 못하면서 회식 자리는 꼭 참석했다. 그렇게 ‘에이스’라 불리며 승진이 동기보다 2년 이상 빨랐지만, 몸은 정직했다. 버텨내지 못한 것이다. “2018년에 협심증으로 쓰러졌어요. 그때 또 한 번 이런 일이 있으면 큰일 난다는 의사 소견을 들었습니다. 당시 쌍둥이가 초등학생이었어요. 중환자실에 누워서 본 두 아이의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내가 이 아이들을 두고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해야 할 게 있더라고요.” 박민수 씨는 무작정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서른여섯에 “넌 뭘 잘하니?”라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불현듯 ‘주식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는 이후 점심도 굶어가며 주식 공부에 매달려 7년 만에 종잣돈 3000만 원을 8억 원으로 불렸다. 그 노하우를 아이들에게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죽으면 아이들이 물려받을 텐데, 아직 어리잖아요. 쓸데없는 짓 해서 다 까먹을까 봐 걱정되는 거죠. 아빠만의 투자 방법과 원칙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하루에 3시간 자면서 3주 동안 쓰니 책 한 권 분량이 됐어요.” 2018년 9월 출간돼 현재까지 10만 부 이상 팔린 ‘주식 공부 5일 완성’은 이렇게 완성됐다. “인쇄소 가서 그럴듯하게 포장하려 했는데, 사장님이 그러더라고요. ‘내용이 좋으니까 책을 내보라’고요. 그래서 진짜 투고를 해봤어요. 당연히 안 되죠. 그런데 임프린트(한 출판사에 속한 별도의 하위 브랜드)에 원고가 흘러갔나 봐요. 마침 대표가 증권사 경험이 있는 분이라 가치를 알아봤고 출간이 이뤄졌어요.” 책은 2020년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대형 재테크 유튜브 채널 ‘신사임당’ 출연이 결정적이었다. 그 계기는 한 통의 메일에서 시작됐다. “제가 먼저 출연 요청을 했습니다. 답변은 2개월 후에 받았어요. 촬영 후 업로드까지 다시 2개월이 걸렸고요. 그리고 다음 날부터 소위 말해 빵 터졌죠. 인생 역전이었습니다.” 또 다른 유명 재테크 유튜브 채널 ‘김작가TV’ 출연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문의했고, 정중히 고사하자 재차 어필해 출연 기회를 얻었다. 그 6개월 사이 책 7만여 권이 팔렸다. 최고민수, 침착맨을 만나다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애썼던 시간은 의외의 보상을 줬다. ‘침착맨’ 이말년 작가와의 인연이다. 박민수 씨는 2021년 초 MBC 웹예능 전문 유튜브 채널 ‘M드로메다 스튜디오’의 기획 시리즈 ‘말년을 행복하게’에 일일 주식투자 강사로 출연하며 ‘침착맨’과 안면을 텄다. ‘최고민수’라는 애칭도 그때 생겼다. ‘주식계 박찬호’라는 설명이 붙을 만큼 지치지 않는 열강에 ‘침착맨’이 “최고네요, 선생님. 닉네임도 바꾸세요, 최고민수”라고 하면서다. 인연은 ‘침착맨’ 채널까지 이어졌다. 7번 정도 출연했고, 그중 한 콘텐츠는 100만 뷰가 넘었다. “본인 채널에 와서 주식 강의를 1~2시간만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실수를 했어요. 주식 강사로 섭외된 자리에서 쓸데없는 이야기만 한 거예요. 군대 이야기, 축구 이야기,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 등등 걷잡을 수 없이 말이 새버렸어요. 6시간 방송을 했는데 정작 주식 강의는 20~30분에 불과했죠. 집에 가면서 무지 걱정했어요. 욕먹을 각오를 했는데, 감사하게도 신선하게 봐주셨어요.” 콘텐츠에 대한 열의와 쉬지 않는 입은 이제 박민수 씨의 캐릭터가 됐다. 경제사 특강, 주식 종목 고르는 10단계 특강, 주식 ETF 투자법 7단계 특강 등 평균 6시간에 달하는 장시간 방송은 그 이미지를 굳혔다. 10시간 42분짜리 일본 기타큐슈 여행 브이로그는 그 정수로 꼽힌다. 박민수 씨는 한시도 말을 쉬지 않았고, 구독자는 그 모습을 오롯이 즐겼다. 영상은 90만 뷰를 기록 중이다. “기타큐슈 여행 브이로그로 인지도가 굉장히 올라갔어요. 어쩌다 보니 재미를 주는 캐릭터가 됐는데, 사실 굉장히 열심히 준비해 가는 사람이에요. 말했잖아요, 저는 ‘쓸모’가 중요한 사람이라고요. 출연 전 일주일 정도 준비에 매달려요. 기타큐슈 여행도 정말 많이 준비했어요. 실은 항일 투어로 계획한 거라 일본 역사까지 속속들이 공부했죠. 내 밥값을 다하기 위해, 내 쓸모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앞으로 3년, 은퇴 후는 내 마음대로 박민수 씨는 3년 뒤 은퇴를 꿈꾸고 있다. 그때가 되면 가장의 부담을 다소 내려놓아도 괜찮을 시점이기 때문이다. “3년 뒤면 아이들이 스무 살이 됩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직장인 신분을 유지할 생각이에요. 아빠 이야기가 나왔는데 제가 집에서 쉬고 있는 상황이면 아이들이 움츠러들지 않을까 해서요. 지금은 월급이 소중한 상황이기도 하고요. 은퇴하면 2년 정도 저도 질풍노도의 시기가 될 수 있다고 봐요. 또 다른 일을 할 텐데 그게 잘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3년 정도 여유를 두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때까지 준비를 잘 해야죠.” 앞으로 3년, 그는 망가질 준비가 돼 있다. 내성적이지만 가장이라는 무게는 개인 성향을 뛰어넘는다고 말한다. 그는 아예 스스로를 ‘주식계 개그맨’으로 포지셔닝할 정도다. “다들 그래요. 얼굴 내놓고는 못 하겠다고요. 그런데 가장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서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는 거예요. 너무 직설적인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하면 저는 어떤 것도 할 수 있어요. 카메라 앞에서 웃고 떠드는 일이 쉽지 않아요. 그런데 절실하면 부끄러운 거 없습니다. 일단 하는 거예요. 은퇴를 꿈꾼다면 더욱더요.” 은퇴 후 박민수 씨는 ‘침착맨’ 같은 삶을 꿈꾼다. 예능 PD를 꿈꾸며 방송국 최종 면접까지 본 경험이 있는 그다. 제2의 인생은 보다 즐겁고 자유로운 나날로 채워지길 바라고 있다. 그가 기획하는 프로그램은 ‘최고민수의 중2병’. 박민수 씨는 3년 뒤 유쾌한 방황을 예고했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여행 유튜버예요. 지난해 빠니보틀(구독자 190만 명의 여행 유튜버)님도 만났어요. 회사를 그만두면, 그때는 진짜 내 맘대로 막 삐뚤어져보고 싶어요.”
- 2023-10-02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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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혼 약속한 바람둥이 유부남과 부적절한 관계에 가슴앓이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작고 허술한 나뭇잎 배가 시냇물의 작은 소용돌이에서 맴돌듯이 그와 나의 관계도 좀체 진전되지 않는 상황이 위태롭고 답답했다. 나뭇잎 배처럼 가볍고 부서지기 쉬운 관계였던가, 우리 사이가. 나는 사별, 그는 이혼(을 전제로 한 별거 상태), 서로의 공감대가 달라서일까. 아니 그건 이유가 될 수 없다. 두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런 조건 따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더구나 우리는 고교 시절을 오롯이 함께 지냈던 사이인데… 그렇게 조마조마 위태롭던 나뭇잎 배가 내 바람과 달리 순풍을 타기는 고사하고 기어이 뒤집어지고 말았으니…. 동창 장례식에서 재회한 그와 나 지방 소도시의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함께 졸업한 그와 내가 다시 만난 것은 공교롭게도 1년 전 동창의 장례식장이었다. 세상을 떠난 친구가 남자 동창이었으니 나보다는 그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동창들은 학교를 같이 다닌 사이다. 게다가 고작 3개 반이었으니 학년이 바뀌고 반이 달라져도 서로 낯선 얼굴은 없었다. 교통사고라고 했다. 서울에 거주하던 그는 추석을 맞아 어머니를 뵈러 고향에 오던 중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을 한 것 같다고. 동창은 즉사했고 옆자리 아내는 중상을 입고 입원 중이라 썰렁한 빈소는 바로 밑의 동생이 지키고 있었다. 충격을 받으실까 노모한테는 알리지 않았다고. 어차피 90세 넘은 고령에다 치매로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니 굳이 사실대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 장남이 죽은 것도 모르고 목 빼고 기다리는 노모에게는 내려오기로 한 아들이 갑자기 일이 생겨 못 오게 되었다고 적당히 얼버무렸다고 들었다. 급하게 사람이 간 데다 사고가 난 지점이 고향 가까운 곳이라 구태여 거주지 서울에서 장례를 치르지 않기로 했다지만, 되도록이면 노모 곁에서 마지막을 보내게 하고 싶었던 형제자매, 고향 친척들의 마음도 작용했다. 아무리 다 큰 자식이라 해도 집에 다 와서, 엄마 곁에서 죽고 싶었던 것 같다는 말을 보태며. 나는 마침 추석을 쇠러 3일 전부터 고향에 머물고 있었다. 내게도 고령의 어머니가 계시니. 남편이 7년 전 떠난 후부터는 명절에 고향 친정을 찾는다. 시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당연히 시댁에서 지냈지만 남편에 이어 시부모님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돌아가신 후에는 친정엄마와 오롯하게 보내고 있다. 비보는 작은 마을에 삽시간에 퍼졌다. 나뿐 아니라 명절 맞아 고향을 찾은 동창생들이 더러 있었기에 뜻하지 않게 모두 장례식장에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식당이나 슈퍼마켓 등 자영업을 하면서 고향을 지켜온 동창들을 제외하고 타지에 나가 사는 동창 중에 몇 년에 한 번이나마 얼굴 보는 이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얼굴도 있었다. 그는 후자에 속했다. 그가 고향을 찾은 것은 20년 만이라고 했다. 결혼 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가 가족은 그대로 있고 본인만 사업 관계로 한국에 다시 돌아온 게 3년 전이라고. 재정착하느라고 나름 바빠서 고향을 찾은 것은 그해가 처음이라고 했다. 마치 나를 만나기 위해 20년 만에 발걸음을 한 것 같다며 농담을 진담처럼 해서 내 가슴을 뛰게 했다. 나는 사별녀, 그는 엄연한 유부남 그와 나는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우리는 30분 거리를 걸어 통학했는데 집 방향이 거의 같아서 함께 등하교하는 날이 많았다. 그렇다고 둘만의 내밀한 추억이나 은밀한 기억이 있지는 않다. 나는 선머슴 같은 기질이라 사춘기 이성에게 야릇한 감정을 느끼기엔 뭘 한참 몰랐고, 그는 그대로 그 나이의 보통 남학생이었을 뿐 여학생의 마음을 섬세히 읽을 줄 안다거나 감수성이 예민한 편은 아니었다. 그랬다 하더라도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때 좀 특별한 관계였더라면 하는 것은 지금의 내 마음이 빚어낸 환상이자 뒤늦은 달뜸 탓이 아닌가. 그때 그랬기에 그와 내가 운명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중년 아줌마의 소녀적 감성이 빚어낸 통속적 로맨스라도. 그럼에도 나는 그가 반가웠고 그도 나를 반겼다. 특별한 관계는 이제부터면 되지 않나. 그렇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금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것이다. 20년이나 지난 후에야 비로소. “동창 녀석의 죽음이 우리를 연결해줬다고 하면 이기적이고 잔인한 말 같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우리가 좀 더 일찍, 아니 아주 많이 일찍 같은 학교, 같은 반이었을 때 사귀기 시작하고 그 인연을 따라 맺어졌다면 너도 나도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지 않았을 텐데….” 그의 말에 내 가슴은 또 콩닥이며 설레었다. 죽은 남편만 불쌍하지. 단언컨대 내 결혼 생활은 불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했다. 남편은 나를 많이 아껴주던 사람이었다. 개인택시를 운전하며 큰돈을 벌어오진 못했지만 성실하게 가족을 챙겼다. 그러고 보니 남편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운전을 하다 보니 사고 위험에 늘 노출될 수밖에 없었고, 어느 날 음주운전 차량과 충돌하여 의식을 잃고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과 금슬이 좋았기에 혼자 살아온 지난 세월이 더 외로웠고, 누군가를 만나 빈자리를 메우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간절하던 때에 그를 만난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엄연히 아내가 있고 대학생 두 자녀가 있다. 유부남인 그와 나는 처지가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사귐은 깊어지고 있었다. 차 한잔이 밥이 되고, 밥자리가 밤자리, 잠자리로 이어졌다. 한번 열린 마음과 몸은 거침이 없었다. 7년간 굳게 닫혀 있었으니 더. 뻔한 레퍼토리라 해도 그 말을 믿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는 아내와 곧 이혼할 거라고 했다. 그래서 사업을 핑계 삼아 한국과 캐나다에서 별거 중이라고 했다.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존재라지 않나.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싶었다. 삼각관계 질투의 덫에 걸린 나 그러나 정작 일은 엉뚱한 데서 불거졌다. 세상 떠난 동창의 아내와 그가 자주 만난다는 게 아닌가. 내가 그와 사귀는 줄 알 리 없는 내 친구가 가십 삼아 한 말이 나한테까지 들려온 것이다. “장례 마치고 그 아내의 문병을 갔던 모양이야. 좀 어색한 그림이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남편을 창졸간에 잃은 데다 아내도 많이 다쳤으니 위로차 문병할 수도 있겠지. 근데 병원 출입이 너무 잦은 게 수상한 거지. 서울 사는 가족들이 간호하기 힘들다며 서울 병원으로 옮기자고 하는데도 본인이 마다했다잖아. 남편 고향이지 본인은 아무 연고도 없으면서 말이야. 아마도 두 사람이 자유롭게 만나려고 그런 것 같아.” 명치쯤이 타는 듯 아리면서 가슴에 쿵 소리가 났다. 머릿속에서는 ‘웅~’ 하고 사이렌이 울렸다.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그렇다면 나와 만나면서 동시에 그 여자도 만났다는 건가. 캐나다에 있는 그의 아내가 아닌 연적(戀敵)이 따로 있었다니! 이 무슨 전혀 예상치 않은 삼각관계인가! “죽은 동창의 아내를 돌보는 야릇한 상황이라니, 소설 쓰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 사람 캐나다에 가족이 있다지? 근데 그 여자한테는 돌싱이라고 속였다나 봐. 그 여자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은 사람이 있어. 그 말을 하는데 그 여자 얼굴이 한껏 달떠 보이더래. 남편 죽은 여자 낯빛이 아니더라나. 사랑에 빠진 얼굴이 그런 얼굴이라지 아마?” 이어지는 친구의 말이 귓전에서 웅웅대며 가슴에서 홧홧한 질투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가 정말로 그 여자와 만나는 사이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어차피 싱글도 아닌 놈이니 한바탕 잘 놀았다 생각하고 잊어버리면 그만이지. 굶주려 있던 차에 그렇다고 아무 놈하고나 할 수는 없고 그래도 좋아하는 놈하고 한 게 어디야? 좋아. 까짓 거 헤어질 결심을 하는 거야. 그 여자의 존재에 대해선 아는 척할 것도, 거론할 것도 없이 조용히 물러나주는 거야. 그게 그나마 구겨진 자존심을 챙기는 길이고. 어차피 유부남이잖아. 여기서 끝내는 게 뒤탈이 없을 거야. 오히려 잘됐어.’ 진심도 아니고 위로도 되지 않는 말을 마음속으로 지껄이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결국 양다리 걸친 놈한테 속았다는 생각이 차오를 무렵, 그러고도 한참을 망설이고 망설이다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그러나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니나 다를까 노모를 뵈러 고향에 내려가 있다는 게 아닌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자주 가네.” “연로하시니까. 언제 또 캐나다로 불쑥 가게 될지도 모르고. 있을 때라도 자주 뵈러 와야지.” “근데 지금 자기 혼자 있어?” “혼자 있지 그럼 누구랑 있어? 아, 우리 어머니? 잠깐 텃밭에 나가셨어. 왜 인사드리고 싶어서? 장래 새 며느리 될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어서? 하하.” 전화기 너머로 부스럭 소리가 난 것도 같다. 그 여자를 향해 “쉬” 하며 입술에 손가락 대는 모습도 보이는 듯하다. 아, 나는 꼼짝없는 덫에 걸린 것이다. 바야흐로 질투에 뼈와 살이 타들어가는 삼류 영화의 여주인공이 되어가고 있다.
- 2023-09-20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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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에 그런 정답은 없습니다
- 아들과 의절한 정 선생 지난 설날 고향 다니러 온 아들을 한밤중에 내쫓았다고 속상한 마음을 전한 정순일(가명) 씨. 올해 88세, 미수(米壽)가 되는 정 선생은 저녁상을 물리고 오십 넘은 아들과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 한판 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지지하는 사람과 자신이 지지하는 인물이 달라서 그동안 선거를 치를 때마다 종종 부딪혔던 이력이 있었다는군요. 하지만 이번에는 첨예하게 맞붙어 서로 양보하지 못하고 으르렁대다 너무 화가 치밀어서 “내 집에서 당장 나가라! 다신 꼴도 보기 싫다!”고 덩치가 산만 한 아들 등을 밀어 기어이 쫓아내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것도 밖에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통에 말입니다. 격분해 자리를 박차고 나온 신 여사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러 광화문 나들이에 나선 신연정(가명) 여사. 집구석에 갇혀 있다 콧바람 쐬니 기분이 좋아 발걸음마저 가벼웠습니다. 초코 와플과 시저 샐러드 그리고 거품 가득 카푸치노까지 완벽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요. 당시 쟁점 한가운데 있던 성추행 사건을 두고 팽팽하게 입장 차를 보이던 두 사람. “자기는 가난하게 자랐는데 어떻게 보수가 되었어요?” 지인이 내뱉은 말을 듣고 어처구니없어하던 신 여사는 “그런 오만한 발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나요? 진보는 다 그래요?” 맞받아치고 말았습니다. 주고받는 말은 더 이상 대화가 아닌 평행선을 달리는 입씨름에 불과했습니다. 참다못한 신 여사는 마침내 카페 안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더 이상 당신이랑은 얘기 못 하겠어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는군요. 분이 안 풀려서 밖에 나와서도 씩씩거렸다고 합니다. 시비가 아니라 취향 차이 시비(是非). 옳음과 그름 혹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말다툼을 뜻합니다. 해 일(日) 밑에 바를 정(正) 자를 옆으로 펼쳐놓은 게 옳을 시(是)라는 글자입니다. 며칠 전 천지가 상쾌하게 맑은 공기로 가득 찬다는, 청명(淸明)이었잖아요. 보통 4월 5~6일 즈음이라 성묘도 하고 나무도 심고 그래왔습니다. 1년이 24개 절기(節氣)로 나뉘어 있는데 그 절기를 구분하는 경계, 기준이 바로 태양의 움직임입니다. 해가 뜨고 지는 일, 계절의 변화, 낮과 밤, 이런 게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는 데서 시(是)라는 글자는 ‘옳다, 바르다, 어긋남이 없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아닐 비(非)라는 글자는 새가 양 날개로 날아가는 모습, 두 날개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두 날개가 등을 대고 반대편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르다, 틀리다, 아니다, 나아가서는 ‘비방(誹謗)하다’라는 뜻을 갖게 됩니다. 사람 사이 관계가 틀어지거나, 어떤 현상을 볼 때 논쟁을 넘어 언쟁이 되거나, 그래서 의절하거나 영영 안 보는 사이가 되는 경우가 바로 시비를 따질 때입니다. ‘나는 옳고 당신은 그르고, 내 말은 맞고 네 말은 틀리다.’ 한 걸음도 양보 없는 이런 고집, 아집 때문에 관계가 어긋나고 상처를 받기 십상입니다. 봄이 좋은 시어머니와 겨울 좋은 며느리 당신은 어떤 계절을 좋아하시나요? 필자는 겨울을 좋아합니다. 정말 단순한 이유입니다. 겨울에 태어난 겨울 아이여서 겨울을 좋아합니다. 물론 눈이 좋아서도 그렇습니다. “얘야, 너는 무슨 계절을 가장 좋아하니?” “어머니, 저는 겨울이 좋아요.” “야, 겨울이 뭐가 좋냐? 춥고 다 얼어붙고, 미끄러질까 무서워 외출도 못 하고.” 이렇게 시비가 붙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필자가 겨울을 좋아하는 거랑 시어머니가 봄을 좋아하는 것은 시비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호불호(好不好), 취향(趣向)인 거죠. 필자가 정윤희라는 배우를 좋아하고 다른 배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옳고 그름의 차원이 아니잖아요? 또 ‘미스터 트롯 시즌1’에서 경연(競演) 참가자 101명 가운데 이찬원이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역시 필자가 옳고, 다른 참가자를 좋아하는 분이 그른 것이 아니듯이 말이죠. ‘부먹’과 ‘찍먹’ 사이 며칠 전 후배들과 만난 자리에서 저녁을 먹고 빙수 가게에 갔습니다. 주문한 빙수가 나왔을 때 숟가락을 들기 전 필자가 먼저 물었습니다. “그쪽은 빙수를 다 섞어 먹어요? 아니면 인절미 따로, 팥 따로, 얼음 따로 먹어요?” 그랬더니 다행히 한 사람은 둘 다 괜찮고, 나머지 두 사람은 얼음은 얼음대로, 콩가루는 그 맛대로, 팥은 팥 맛대로 느끼며 따로 먹는다는 거예요. 탕수육 ‘찍먹’과 ‘부먹’, 그걸로 논쟁이 많이 붙곤 합니다. 튀긴 고기 전체에 소스를 부어 먹느냐, 고기마다 따로 소스를 찍어 먹느냐로 어느 편이 더 맛있는지 곧잘 시비나 승부를 가리려 합니다. 누가 맞나요? 호불호나 취향이 반대되거나 확실한 사람을 만나면, 그게 부부든 자식이든 아주 친한 사이든 직장 동료든 간에 마음이 상하고 기분이 언짢을 수 있습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취향이 다를 뿐인데 말입니다. 한신과 유방 누구나 한 번쯤 ‘삼국지’나 ‘초한지’에 빠져 영웅호걸들을 손꼽으면서 친구들과 침을 튀며 열띤 토론을 펼친 적이 있을 것입니다. 화려한 라인업 가운데 필자는 금기(禁忌)였던 배수진(背水陣)을 처음으로 전략에 역이용한 불세출의 명장이자 신출귀몰한 용병술로 패배를 몰랐던 병법(兵法)의 신, 한신(韓信)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비범한 능력으로 유방(劉邦)에게 천하 패권을 쥐어준 일등공신, 한신. 마침내 초패왕 항우(項羽)나 한고조 유방보다 유리한 입지에서 천하를 손에 넣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름 없는 자신을 중용했던 유방이 베푼 은혜를 잊지 못해 멈추고 말았던 인물입니다. 자신이 가진 뛰어난 능력과 사양하는 마음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반란을 도모한다는 유방의 의심에 결국 처형당하고 마는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깐! 역사적 인물인 한신과 유방을 놓고도 평가가 극과 극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밥을 얻어먹고 살 만큼 보잘것없던 자신에게 막중한 역할을 맡긴 은혜를 잊지 않았던 한신이 옳은가요? 아니면 출중한 부하에게 권력을 뺏길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모반하게끔 몰고 가 싹을 잘라버린 유방이 옳은가요? 평가가 엇갈리는 만큼 시비 가리기 참 어렵습니다. 존경하거나 좋아하는 인물도 시비보다는 취향을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비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우리 삶에서 시비로 명확히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얼마나 있을까요. 태양의 움직임은 항상 일정하고 한결같지만 우리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나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일은 한결같을 수도 없고 쉽게 예측하기 힘듭니다. 동식물이나 물건도 좋아졌다 금방 싫증을 내기도 합니다. 나아가서는 정치적인 성향도 진보와 보수라는 스펙트럼 안에서 결이 무척 다양합니다. 한쪽에 실망해서 반대편으로 넘어가기도 하고, 다른 한쪽에 상처받아서 그 반대편으로 옮겨가기도 하듯이 말입니다. 시비를 걸고 시비를 따지는 대신 취향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덜 고통스럽습니다. 취향이나 호불호에 시비 걸지 맙시다! 딱 시비 걸고 싶은 마음이 들 때, 필자가 앞서 들었던 예를 떠올리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아,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하나를 누가 좋아하는 게 죄가 아니고 틀린 게 아니지. 어리석은 게 아니지. 또 탕수육, 팥빙수도 그렇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다면 관계가 좀 더 부드러워지고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질 거라 믿습니다. 그 사람 나름대로의 생각과 의견과 취향을 존중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옳고 그름으로 정색해 따지지 말고 취향의 문제로 존중하고 이해하면 한결 따뜻한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정답 없는 인생, 모범답안이 있을 뿐 나와 당신을 옳고 그름이라는 시비하는 마음으로 볼 때는 갈등이 고조되고 관계를 망치기 쉽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그 사람에게 공연한 적개심을 품어 이성을 잃은 행동을 저지르고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생깁니다. 우리 인간은 해와 달이 일정한 주기로 움직이듯 한결같을 수 없습니다. 늦잠을 자는 해와 결근하는 달을 본 적이 있습니까. 봄이 지나가고 오뉴월에 겨울이 다시 온 적 있습니까. 정답이 하나인 수학 문제와 우리 인생은 다릅니다. 저마다 모범답안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답이 여러 개라고 틀린 삶이 아니고 그릇된 인생이 아니듯이요. 자신이 푼 답안을 존중받고 싶다면 남이 푼 답안도 존중해줘야 합니다. 잡초로 볼지 꽃으로 볼지 ‘악장제거무비초(惡將除去無非草) 호취간래총시화(好取看來總是花).’ 나쁘다고 없애고자 하면 풀 아닌 것이 없고, 좋아하여 취하고자 들여다보면 모두가 꽃이라는 뜻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취향이 다르다고 상대를 미워할 때 그 사람은 세상 쓸모없는 잡초밖에 되지 못합니다. 백해무익하다 단정해 얼른 뽑아버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나와 다른 의견이 관계를 발전시키고 묵혀온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가 되는 경우도 많이 경험합니다. 듣기 불편하고 괴로운 이야기도 좋게 새기려는 마음을 먹는다면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숨겨진 아름다움과 가치를 발견하는 일에 우리 도전해볼까요. 내가 소중하듯 나와 다른 그 사람도 소중하니까요. 내가 아름다운 존재이듯 그 사람 역시 아름다운 존재니까요. 모두가 꽃입니다.
- 2023-04-21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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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 딸린 두 여자와 요절남의 역학 관계?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며칠 전 글 수업 시간에 우연히 나온 40년 전 내 친구 이야기, 그 사연을 풀어보려 한다. 나는 2018년 경영하던 사업체의 대표 자리에서 물러난 후, 회사에 묶여 있을 때 하지 못했던 일을 해보고 싶어 3년 전부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일대일 나눔이라 나와 지도 선생 둘 다 내밀한 속내를 드러낼 수 있어서 글과 함께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유용한 시간이 되고 있다. 글 선생의 지론은 글은 발가벗고 써야 한다는 것이고, 혼자 벗기 민망할 거라며 본인도 가차없이 벗어 보이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글을 쓰기 위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가 되었다. 죽음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한 날, 부모 등 윗대가 아닌 나와 동년배, 구체적으로 친구의 죽음을 경험한 일이 있냐고 글 선생이 물었을 때 나는 그 친구를 떠올렸다. 그 친구의 서글프고 황망한 죽음에 대해, 아니 죽음보다 더 아리고 허망한 두 번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40년 전의 친구를 떠올리는 것은 순전히 나의 상념 속 일이지만, 여리고 섬세한 성정을 가졌던 친구의 내면만큼은 사실로 기억된다. 철인(哲人)처럼 고뇌했고 시인처럼 노래했던 친구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는지는 모르지만 누구보다 진실했으며, 거기에 더해 유약한 운명의 냄새를 풍겼다. 결과적인 소리지만 성격 속에 이미 예고된 불행을 배태하고 있었다고 할지…. 그렇게 그 친구를 추억하며 기억의 묵은 빗장을 열자 형체 없이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40년 전의 상념이 뒤엉켜 떠올랐다. 40년 전 갑작스런 친구의 죽음 그 친구와 나는 서울대 철학과 동창. 지금도 그렇지만 75세인 내가, 그리고 그 친구가, 우리 과 동기들 모두가 철학과를 택했을 당시는 세상살이에 어눌하고 현실 감각이 둔하고 무엇보다 부모를 실망시키기로 작정한 불효의 표상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철학과를 나와 무슨 밥벌이를 어떻게 할 것이며, 부모 봉양은 고사하고 처자식이나 제대로 먹여 살릴 수 있을지가 세상 사람들의 우려이자 반대의 이유였던 때였다. 그러한 우려 속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전공을 살려 살지 못했다. 졸업 후 변리사 자격시험 공부에 바로 돌입했던 것이다. 그렇게 ‘철학과 출신 변리사’란 꼬리표를 달고 우여곡절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전공과는 무관한 영역에서 삶의 기반을 닦았고, 순탄하게 장래가 풀려 지금까지 무난한 삶을 살고 있다. 내가 변리사 시험 준비를 하는 동안 그 친구는 전공을 살려 서양 철학의 본산지인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는 국제 통화도 여의치 않았고 기반을 닦느라 서로 정신없이 달리던 때라, 가족이 아닌 한 외국으로 간 친구와는 자연히 연락이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처럼 그 길로 소식이 안 왔으면 차라리 잘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서로 잊고 지낸다 한들 그 또한 감사한 일이었겠지만…. 그로부터 약 10년 후 나는 친구의 관을 메고 친구의 고향인 충청도 어느 산자락을 오르게 된다. 친구를 지상에서 영원히 작별하기 위해. 학창 시절 모습만을 기억할 뿐인 내겐 30대 중반에 주검으로 돌아온 친구와의 만남은 당혹스러웠다. 또한 가혹했다. 땅에 묻은 후엔 시신을 담고 있던 관을 제거한 후 깨서(파관) 불에 태우든가 없애버리던 그 지역 풍습으로 인해 친구의 관은 얇고도 위태로웠다. 관을 걸머쥔 손에 시신의 차가움이 닿는 듯했고, 관을 뚫고 친구의 손이 불쑥 나와 그간 격조했다며 내게 악수라도 청할 것처럼 차가움 더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졸업과 동시에 바로 외국으로 갔기 때문에 동기생 중 ‘내가 아무개와 각별한 사이였다’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운구 대열에 낄 줄이야. 살아 있을 때의 인연보다 죽은 후의 인연이 더 깊게 다가왔다. 친구는 밤에 자다 죽었다고 했다. 옆에는 한 여인이 함께 자고 있었고. 친구의 죽음이 그 여인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30대 중반의 신체 건강하고 정신 멀쩡한 남자라면 아내든 애인이든 이성과 동침한 것이 특별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을 테고. 다만 35년 남짓 살다 간 친구의 짧은 생에서 두 여인과 인연이 있었고, 친구는 두 번째 여인 곁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의 전부다. 아이 딸린 이혼녀와 결혼 그리고 이혼 친구는 독일 유학 시절 같은 한국 유학생과 결혼했다. 유학생끼리의 만남이란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이국에서는 가장 무난한 인연이었으리라. 아내가 된 여자의 전공은 독문학이었다고 들었다. 철학도와 독문학도의 결합이란 이지적 커플 탄생에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것도 같고. 둘은 대화가 잘 통했을 것이며, 샤프하면서도 여성에 버금갈 감수성과 섬세함을 갖춘 내 친구는 다정다감한 남편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아무나 선뜻 내릴 수 없는 선택을 내릴 수 있었을 테고. 상대 여성은 아이 딸린 이혼녀였으니까. 몇 살인지는 들은 바 없지만 이혼 후 딸 하나를 데리고 독일로 유학 갈 정도면 그 시대로선 당찬 부류에 속한 여성이었을 테지. 독립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거리낌 없이 앞날을 열어가는 페미니스트. 문학 전공자이긴 해도 그 여자는 외향적이며 진취적 성향이지 않았을까? 한 번의 실수는 용납해도 두 번은 허용하지 않는. 자기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는 여성에게 두 번의 실수는 실패와 다름없을 테니까. 원래 성격은 그렇지 않았다 해도 이혼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갔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내 친구는? 내 친구는 스마트한 엘리트지만 내향적 성격을 가진 사색가. 본인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를 묵묵히 수용하고 들어주는 타입이다. 친구도 그 사이 변했을 수 있지만, 친구의 아내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도 친구에 대해서는 절반쯤 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둘이 상반된 성격으로(순전히 나의 추측이라 할지라도) 마치 보색관계처럼 튀면서도 개성 있는 조화를 이뤄 잘살았다면야 성격 다른 남녀가 오히려 잘산다는 경험치를 보여줬을 테지만, 둘은 7년 정도를 함께 살다 헤어지고 말았다. 친구의 아내로서는 두 번째 이혼이었고, 내 친구는 첫 이혼이었다. 그렇게 각자 이혼 경력만 쌓은 짧은 인연 속에서 이혼 사유는 알 수 없었다. 내 친구라서가 아니라 이혼 후 친구의 아내보다 친구가 더 좌절하고 헤맸을 것 같다. 친구로서는 이혼 경험이 처음이니까. 갈라선 이후 각자는 공부를 마쳤고, 친구의 전처는 학위를 딴 후 한국의 어느 지방 대학 독문과 교수로 재직하다 은퇴했다는 소식을 바람결에 들었다. 세 번째 결혼을 했는지는 들은 바 없고. 아이 딸린 여인 곁에서 영원히 잠들다 내 친구는 어찌 되었을까. 친구의 옆에서 함께 잔 여자는 누구였을까. 이혼녀였다던가, 사별녀였다던가, 그 여자 또한 아이가 딸려 있었다. 함께 공부하거나 일로 만난 사이는 아닌 것 같고, 그야말로 오가다 만난 사이라는 것을 장례 때 들었다. 둘은 동거를 했던 것 같다. 결혼으로 상처를 받았으니 내 친구 쪽에서 선뜻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혼인신고를 하고 안 하고가 중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 이목이나 형식이 중요했다면 또다시 그런 만남은 갖지 않았을 테니까. 35년이란 짧은 생애에 두 여자가 있었지만 세상 떠나는 날에 두 여자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나의 추측, 나의 상상력으로는 그 친구의 허망한 죽음에 두 여자의 관여와 영향이 가장 컸을 것 같음에도. 섬세한 내면과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친구인 만큼 이혼은 충격적이었을 것이며, 그 여파로 뒤이어 만난 인연이 안정적이고 안온하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두 여자 모두 지난 결혼이나 과거의 인연으로 자녀가 있었고, 결혼 상대자의 그런 평범하지 않은 상황을 받아들인 친구의 모질지 못한 성정이(모질지 못하다는 말을 이런 상황에도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혼자 져야 할 삶의 고뇌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반적 기준에서 다소 빗겨난 관계가 지속적인 부담이나 족쇄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해도, 그럴수록 그 친구 쪽으로 하중이 쏠렸을 것이다. 불균형하게 출발한 결혼과 관계가 자신을 먼저 챙기거나 이기적이지 못한 내 친구의 삶에서 에너지를 빼앗고 삶의 의욕을 갉아먹었을지 모른다는 뜻이다. 이런 것들이 내 마음을 어지럽히고 친구의 죽음을 안타까이 돌아보게 하지만, 이 모든 것 또한 부질없는 상념인지 모른다. 무엇보다 나는 학창 시절 이후 그 친구와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어쩌다 내가 운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친구와 매우 가까운 사이라거나 다른 누구보다 친구의 삶을 속속들이 아는 것처럼 굴 이유도 없다. 75세가 된 지금, 내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에 부모도 형제도선배도 아닌 동년배로서 가장 먼저 떠나보낸 이가 그 친구라는 사실이 그저 각별하게 다가올 뿐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2023-03-15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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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째 한 남자가 가슴속에 있습니다”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2023년 새해가 밝았다. 나이를 한 살 더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게 된 것이 내 경우는 50세 이후였던 것 같다. 올해부터 우리나라도 법적으로 ‘만 나이’를 적용한다고 하니 한 살을 되돌린 느낌이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한 살이 어딘가. 그러니까 서양처럼 우리도 이제는 태어났을 때 0살로 시작하는 것이다. 토끼띠인 나는 올해 생일에 환갑을 맞는다. 한 바퀴 돌아 다시 태어났다고 쳐서 0살이라 우겨도 또래 친구들은 함께 웃어주며 공감하리라. 시집 못 간 노처녀가 한해 한해 더할 때마다 속이 타들어가듯이(요즘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초조하고 심란하기는 여전할 테지), 이혼 후 ‘돌싱’ 10년 차인 나도 이제는 막차를 탄 느낌이 확연하다. 60세, 재혼이든 그저 친구 사이든 남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올해 마지막으로 삼겠다는 뜻인데, 이미 너무 늦었나? 솔직히 50대가 끝나는 작년을 기점으로 했지만 나 스스로 1년 더 연장하는 것이다. 더구나 올해부터는 공식적으로 만 나이가 적용된다지 않나. 이렇게 연장, 연장하면서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을 달래는 걸 테지. 사랑에는 연령도, 국경도 없다지만 그건 그런 사랑을 성취한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령에서 걸리고, 국경은 아예 넘어볼 생각도 못 한다. 그렇다고 이혼 후 적극적으로 상대를 찾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먹고사느라 바빴고, 이미 성인이지만 그래도 엄마 마음에 두 아들을 심리적으로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이혼을 하고 나니 아이들에게 더 마음이 쓰이고, 집착까지는 아니라 해도 안쓰럽고 미안해서 그저 마음뿐이지만 그 마음뿐인 마음을 더 쏟게 된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건 막연한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만나면 좋고 못 만나면 하는 수 없고. 그런데 이런 말은 하나마나다. 만남을 위한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기에. 로또에 당첨되려면 우선 매주 로또를 사야 할 게 아닌가. 내 나이 60, 이성을 만날 수 있을까? 나보다 두 살 많은 이혼 선배 언니는 기한을 정해놓고 남자 찾는 일에 열심이고 부지런했다. 주변에 소개를 부탁하고, 모임에 나가서도 적당한 사람이 없나 둘러보는 등 적극적이었다. 내가 올해까지만 남자를 찾아보겠다고 한 것도 실은 그 언니의 말을 흉내 낸 것이다. 그러니까 그 언니는 만 60세까지 열심히 찾고, 그래도 안 되면 포기하고 혼자 살겠다고 한 것이다. 이혼한 지 30년 된 그 언니는 말했다. 혼자 밥 먹으면서 혼자 늙어가는 것, 너무 쓸쓸할 것 같다고. 결혼은 안 해도 함께 밥 먹고 편안한 차림으로 밤마실도 가고, 그러다 온기 비치는 카페에서 차도 마시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누구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싫은가? 혼자 사는 사람 백이면 백, 다 그런 사람을 원한다고 할 테지. 하지만 그 언니는 나와 달리 적극적으로 찾지 않았던가. 60세에 소개팅을 하기까지 했으니. 결과는 이번에는 혹시나 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였지만. 그렇게 해서 그 언니는 본인이 말한 대로 결연히 ‘연애계’를 떠났고, 지금은 동성 친구들 속에서 다양한 취미생활로 삶의 활력을 찾으려고 노력 중이다. 아무런 시도도 노력도 없이 올해 60세가 된 나는 포기하고 말고도 없다. 포기란 노력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세 가지 카드 중 하나니까. 노력해서 성취하거나, 노력했지만 실패하거나, 노력한 후에 포기하거나. 이런 세 가지 카드 말이다. 떠난 사랑에 10년째 가슴앓이하는 나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이런 사설을 늘어놓으려던 건 아닌데. 실은 내게는 짝사랑 상대가 있다. 사랑 중에 가장 안전하고, 돈도 안 들고, 헤어질 염려가 없는 게 짝사랑이라고 하듯이 내 사랑도 그렇다. 엄밀히는 짝사랑이 아니지만. 그러니까 이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딱 3개월을 만난 사람.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유부남을 만났다고 손가락질해도 하는 수 없다. 그러곤 10년을 가슴앓이 중이다. 아니 앞으로 30년을 가슴앓이할지도 모른다. 고작 3개월 만나고 30년 가슴을 앓는 사랑. 그 고통이면 유부남을 만난 대가를 충분히 치르는 것 아닐까. 그는 나보다 열두 살 많은 띠동갑이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열두 살보다 더 많았다면 더 좋았을 만큼. 왜냐하면 나는 그에게서 아버지를 찾았으니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임에도 왠지 그는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았다. 마냥 푸근하고 의지가 됐다. 물론 이혼한 직후라 쓰라린 상처를 위로받고 기대고 싶은 마음이 커서 더 그랬을 것이다. 그가 유부남이란 게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끌렸던 것도 그에게서 아버지를 발견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이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심리적·정서적으로 거의 독립적인 삶을 살고 있으니까. 다섯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었다. 아버지는 선비풍에 우울 기질이 있는 이른바 문학청년이었다고 한다. 학창 시절의 멜랑콜리함이 생활 전선에서는 치명적으로 작용하여 적성과는 무관하게 선택한 금융 계통의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했고, 설상가상 불명예스러운 일로 사표를 쓴 후 우울증을 앓았다고 했다. 지금 같으면 정신과 치료라도 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때는 그럴 상황도 아니었고, 어머니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욕실에서 목을 매어 돌아가셨다. 미처 손 써볼 겨를도 없었던 순식간의 일이었다고. 5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와 단둘이 남게 된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늘 그리웠다. 아주 어릴 때라 기억에 아예 없으면 부재만을 느꼈을 테지만, 다섯 살 무렵이면 어렴풋이 기억나는 나이였다. 그렇게 형체 없는 그리움에 아버지 있는 친구들에 대한 부러움이 버무려져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처가 허한 속을 휘젓곤 했다. 이혼한 남편은 차갑고 냉담한 사람이었다. 내가 부성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빈자리를 채워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를 두고 나를 대했다. 때로는 조종을 했다. 사랑을 거래하고 조건을 걸면서 늘 나를 목마르게 했고, 안달나게 했고, 외롭게 했다. 결혼한 지 10년 지났을 무렵부터 외도를 하기 시작하더니, 한 여자를 꾸준히 만나는 것도 아니고 이 여자 저 여자를 바꿔가며 습관적으로 바람을 피웠다. 부부랄 것도 없이 어느 새 우리는 남남이 되어 있었고, 작은애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각자의 길을 택해 떠났다. 그는 지금도 어느 여자의 치마폭에 감겨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환상을 쫓는 사랑 나는 그렇게 늘 쓸쓸했다. 전 남편을 통해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붙잡고 싶었지만 말 그대로 그림자처럼 스러져버렸고, 그러고는 그 남자를 만난 것이다. 그는 따뜻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다. 사랑이 고픈 내게 사랑을 선물로 주러 온 사람 같았다. 이혼 후 내가 찾은 일은 출판 기획이었다. 대학 졸업 후 결혼 전까지 출판사 일을 잠깐 했을 뿐인데, 단절된 경력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취직할 수 있었다. 규모도 꽤 되는 곳이었다. 언론 계통의 출판을 의뢰하러 온 그를 그렇게 만났다. 책이 나온 날 자축 겸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며 그가 식사 대접을 제안했고, 그 후 우리는 가까워졌다. 그날부터 3개월 동안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났다. 언론사에 근무했던 터라 비교적 자유로이 시간을 낼 수 있는 그에 비해 나는 붙박이로 일해야 했기 때문에 더 자주 만나지 못해 안달이 난 쪽은 처음엔 그였다. 만나는 동안 이제 그만 관계를 끝내야 하지 않겠냐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가 두어 차례 꺼냈을 때 들은 척도 하지 않았을 정도로 그는 내게 푹 빠져 있었다. 그러던 그가 정확히 석 달 만에 관계를 정리하자고 했다. 만나는 내내 그만 만나야지, 그만 멈춰 서야지 하고 늘 생각해왔다면서. 그가 멈추면 멈추는 것인가? 내가 멈추자고 했을 때는 아예 브레이크가 없는 듯이 질주하더니.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했던 게 누구였던가. 결혼도 남자가 하자고 해야 성사된다더니, 만났다 헤어지는 주도권도 남자가 쥐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매달리지도 않았지만 매달려봤자라는 것을 모를 나이가 아니었다. 알았다고 하고, 그러자고 하는 것으로 우리 관계는 끝났다. 그나마 자존심을 그렇게라도 지킬 수 있었던 것이 그와 나의 관계에서 내가 추스를 수 있는 전부였다. 그는 내 눈앞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그때부터 내 마음에서 짝사랑이란 형태로 10년째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10년간 끌어오고 있는 그에 대한 사랑은 환상이라는 것을. 그는 나에게 상처 준 남편을 대신하고, 목마른 아버지의 사랑을 대신하기 위해 내가 만들어낸 남자라는 것을. 올해 나는 그 남자를 마음에서 지워버리려고 한다. 60세 이후 새로운 10년을 또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될 것이기에. 하지만 자신은 없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할 것이다. 그 나이에 그런 짝사랑이나마 마음에 품고 사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데, 때로는 행복하기조차 할 텐데 왜 굳이 지우려 하냐고. 정말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비참한 여자인가. 아니면 그의 아내가 죽기를 빌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옆자리가 비면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건 환상도 아니고 망상일 테지만. ※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2023-01-27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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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겐 너무 과분한 돌싱남 서서히 드러난 그의 본색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드디어 내가 이혼을 했어. 우리 이제 함께 살 수 있게 된 거야.” “그래요? 잘됐네요….” “당신, 기쁘지 않아? 반응이 왜 그래? 왜 시큰둥한 거지? 너무 오래 기다려서 실감이 나지 않는 건가?” “그런가 보죠. 어쨌든 당신이 원하던 거니까 잘된 일이네요.” “나만 원하던 일인가? 그럼 당신은 안 원했단 말이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까칠하게 구는 거야? 도대체 뭐가 또 문제냐고?” 뭐가 또 문제냐고? 그 말에 성질이 발끈 돋았다. 그래, 지금까지 당한 것도 모자라 지금 와서 감정을 쏟고 화를 내는 건 정말이지 바보짓이지. 저 인간이 내게 뭘 해줄 수 있다고. 그렇게 당하고도 모른다면 나는 정말 하나님도 구제 불능인 인간인 거지. 이혼을 했다니 그 마누라는 드디어 해방인가? 그럼 이제 내가 저 인간을 차버려야 할 순서란 말이지? 남편 사별 후 운명처럼 나타난 남자 나와 그는 7년 전에 만났다. 그를 만나기 6개월 전 남편을 하루아침에 잃고 나도 따라 죽고만 싶은 시간을 보낼 때,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온몸으로 느끼던 나날 중에 교회에서 그를 알게 되었다. 남편은 교회를 안 다녔고, 나도 큰 열정 없이 꾸린 가게가 한가해진 틈을 봐가며 이따금 출석하곤 했다. 그도 나처럼 아내 없이 혼자 교회를 다니던 터라 두 사람 다 미적지근한 교인으로서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치 짐승의 후각처럼 그가 싱글인 것을, 아니 명확히는 돌싱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혼자가 된 나는 예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처지를 눈치채게 되었고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끌림의 법칙이 있는 걸까. 멀쩡한 유부녀였을 때는 내 삶 반경 내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그 남자. 그러나 혼자가 되고 나니 그 남자가 갑자기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아내와의 관계가 10년 넘게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흔히 말하는 무늬만 부부로 지내며, 나를 만났을 때는 이미 함께 살지도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이 함께 카페를 꾸리고 있었기에 각자의 거처에서 아침에 따로 출근해 밤에 퇴근할 때까지 함께 일만 할 뿐이었다. 이혼을 전제로 한 별거였지만, 치열한 일터에서 부대끼다 보니 바쁘고 지쳐 헤어질 법적 절차를 미루고 있었다고 할지. 나도 카페를 운영하기 때문에 그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영업이란 게, 특히 카페란 게 식당보다는 여유가 있지만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일인지 해본 사람은 안다. 그런 그에게 이혼 성사는 그 자체로 축하할 일인 건 맞다. 그 바쁜 와중에 아르바이트도 거의 두지 않고 생업을 꾸리면서 차일피일 미루던 일을 강행하여 결론을 냈으니.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랴. 두 시간 만에 주검으로 돌아온 남편 “이선희 씨가 본인인가요?” “네, 그런데요. 무슨 일이죠?” 경찰 둘이 가게로 들어서며 누가 먼저 말을 꺼낼지 머뭇대는 순간 직감이 들었다. ‘남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구나’ 하는. “남편 되시는 분 성함이 최성호 씨 맞나요?” “네, 맞습니다만, 무슨 일로…?” “잠깐 서로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확인해주실 일이 있어서요.” 마음은 이미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두려움에 주춤대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제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가서 확인부터 하셔야 하는데… 남편께서 오늘 오후 4시경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카페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러 나간 지 2시간 만에 남편은 주검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바쁜 점심 시간을 막 치른 후 몇 가지 떨어진 품목을 구입하려고 잠깐 재료상에 갔던 길이었다. 주차하기 편하다며 짧은 거리는 주로 오토바이를 이용했는데, 도로를 가로지르다 마주 오던 차에 정면으로 부딪혀 즉사했다고 한다.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도, 하늘이 무너지던 마음도 반추하고 싶지 않다. 또다시 가슴이 헤집어진다면 나도 남편도 두 번 죽는 꼴이기에. 한 달 가까이 가게 문을 닫고 두문불출 칩거하다시피 지냈다. 대학과 직장에 다니며 각자 사는 딸과 아들의 위로도 귀찮기만 해서 같이 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편하게 여겨질 정도로 그렇게 나는 혼자 그 시간을 버텨냈다. 그와의 동거가 시작되었으나 이러다 영 사람 구실 못 하겠다 싶어 허깨비 같은 몰골로 교회에 나갔고, 그렇게 반년이 지났을 즈음 그와 가까워진 것이다. 그는 동종 업계 종사자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운영하는 카페를 들락거리며 내 주변을 자연스럽게 맴돌았다. 자기 가게는 뒷전인 것 같았지만 내 알 바 아니었다. 남편이 떠난 후의 빈자리에 절대적으로 일손이 필요한 데다 원래부터 나는 일이 서툴렀기 때문에 그가 와서 도와주는 것이 고맙고 반갑기만 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혼자 운영하기 벅차 일찌감치 카페를 접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우리는 정이 들었고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그의 카페는 규모도 크고 매상도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가뜩이나 사이 좋지 않은 아내와 붙어 있는 것보다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기 가게는 아내에게 전적으로 맡겨버리고 우리 가게로 출근했다. 나는 고마움을 핑계 삼아 퇴근 후 그에게 늦은 저녁밥을 지어준다며 집에까지 그를 끌어들였다. 그렇게 우리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의 아내가 나를 찾아와 머리끄덩이를 잡는다거나 하는 통속극은 없었다. 나를 만나기 전부터 별거를 하던 부부이니, 그가 어디서 누구와 살든 그의 아내가 상관할 바가 아닌 데다 내 탓 또한 아니었다. 우리 사이는 평온했고 나는 그가 좋았다. 남편의 빈자리를 메우고 외로운 마음만 달랠 수 있어도 더없이 고마울 상황에 가게 일까지 도움을 받으니 나로서는 더 바랄 게 없었다. 게다가 그는 키도 훤칠하고 인물도 좋고, 나와 나이 차이도 두 살밖에 안 났다. 50대 초반인 우리는 얼마든지 새 출발해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드디어 이혼을 했다고 하는데 왜 반가워하지 않는지 의아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가 기혼 상태일 때 그의 이혼을 간절히 바랐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다 내 곁을 훌쩍 떠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탓에 그 사람 앞에서 늘 저자세였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 자녀도 없다. 이혼 후 재산의 절반이 오롯이 그의 것이 되니 재혼하면 내게 유리한 점이 없지는 않았다. 물론 그가 자기 재산을 내게 나눠주겠다고 한 적은 없지만, 딸린 자식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홀가분하지 않은가. 가스라이팅으로 피폐해져 “당신, 어쩌면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어? 도대체 몇 번을 가르쳐줘야 알아듣겠어? 도대체 내가 없었다면 어떻게 카페를 꾸릴 생각이었어? 너처럼 덜떨어진 여자랑 함께 살았던 죽은 네 남편이 불쌍하다.” 사귄 지 반년이 지났을 무렵 그가 폭언을 퍼부었다. 손님이 많은 시간에 내가 계산 실수를 하자 카운터 앞에서 대뜸 성질을 부린 것이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다 나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거니 내가 참아야지. 앞으론 잘하자’ 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당한 창피함을 애써 잊으며 혼자 삭이곤 했다. 그 후로도 몇 번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고, 그럴수록 나는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곰곰이 이성적으로 따져볼 생각은 점점 더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시비를 걸면서 나를 바보 취급하며 몰아붙였고, 아내와 다투기라도 한 날은 그 화풀이까지 해댔다. 나중에는 반찬 투정에 음식 타박까지 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며, 자기가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겠냐며, 공연히 자기 감정에 겨워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나의 주눅 듦과 정신적 혼란은 더욱 심해졌으니, 이른바 나는 그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두렵기도 했고 서러웠다. 남편이 죽지 않았다면 이런 수모를 겪을 일도 없었을 거라는 원망 아닌 원망도 올라왔다. 남편을 떠올리니 나도 더는 참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용기가 솟았다. 하루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렇게까지 힘들면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 가게는 나 혼자 알아서 꾸릴 테니 일과를 마친 후 밤에 만나자”고 단호히 말했다. 느닷없이 허를 찔린 듯 갑자기 겁먹은 표정으로 그가 내 눈을 외면했다. 그렇게 일단락되는가 했지만 그는 꾸역꾸역 나와서 예의 고약을 떨었다. 그랬다. 그는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기생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였던 것이다. 사실 그는 아내에게 쫓겨났고,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자 나의 약점을 이용해 기생충처럼 파고들면서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 그의 나약하고 비겁한 성질이 폭로될수록 그의 이혼이 달갑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이제야말로 나도 그를 쫓아내야겠다는 복수심마저 들었다. 그가 왜 이혼 위기에까지 몰렸으며, 딴 여자를 만나고 있음에도 그의 아내가 전혀 반응하지 않았는지 이제는 이해가 된다. 그의 아내가 떼낸 혹이 내게 붙어버렸으니 이 골칫덩어리를 어떻게 처치할까.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2022-09-21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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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와 환자, 사랑해선 안 될 사이 그러나…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조심스레 진료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아연 긴장했다. 간호사가 진료 기록부를 가져다놓을 때까지도 설마 했다. 차트에 쓰인 이름을 보고 동명이인이려니 하면서도 흠칫했고, 생년월일을 흘끗 보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이다. “네, 들어오세요.” 목청을 가다듬으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겠지, 설마. 그때가 언젠데….’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내심 피어오르는 일말의 기대감은 또 뭔가. 내 음성을 듣고도 잠시 머뭇거리는 듯한 문밖 환자의 기척. 주춤주춤 문고리를 돌리는 손길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그러지 않으려고 할수록 긴장감은 더했다. 빼꼼 문이 열리며 고개를 반쯤 숙이고 들어서는 50대 초반의 여성, 어깨 길이 생머리에 무릎 길이 파스텔 톤의 민트색 원피스 아래 드러난 매끈한 종아리와 잘 정돈된 맑은 피부, 이지적인 분위기의 이목구비로 나이보다 10년은 젊어 보이는 데다 우아하기까지 하다. 그 짧은 순간 환자의 외모와 표정이며 옷차림까지 스캔할 정도면 환자에 대해, 특별히 호감 가는 여성 환자에 대해 습관적으로 호기심을 갖는 불순한 의사라는 오해를 받을 법하다. 7년 만에 나타난 그녀 오해를 받든 이해를 받든 아, 어찌 잊으랴 그녀를! 진료 기록부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그녀가 실체를 드러냈다. “앉으시지요. 오랜만입니다.” “네, 선생님. 그간 안녕하셨지요?” 무덤덤함을 가장하려고 애쓸수록 이미 일기 시작한 가슴속의 잔물결은 파고를 높여가고 있었다. 긴장을 감추려다 보니 머리가 다 어찔어찔했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사정으로 오늘 또 이렇게 진료실을 찾아왔단 말인가. 정신과 의사로서 위협을 가하지 않는 한 환자 자격으로 나를 만나러 오는 그 누구에게든 진료를 거부할 수 없다. 지금 그녀는 그런 상황을 충분히 이용하는 것일 테고. “어떤 불편함 때문에 오셨는지요?” 평정심을 찾으며 평소의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어쨌거나 환자로서 날 만나러 온 것이니. “선생님, 저 이혼했어요.” 미리 연습한 듯 나직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그 한마디에 가슴속 파문이 동심원을 그리며 온몸으로 번져가려는데, 이어지는 그녀의 눈물 앞에 나의 방어벽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책상 한편에 놓여 있던 사각 티슈 상자를 그녀 앞으로 밀어주었지만, 그녀는 티슈를 뽑는 대신 쥐고 있던 손수건으로 찍어내듯이 눈가를 조심스레 눌러 닦았다. 7년 전 내 진료실을 떠나갔던 그녀가 지금 내 앞에 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3년을 나와 함께하는 동안 남편의 유흥업소 출입을 막을 뾰족한 방안도, 그녀의 뻥 뚫린 가슴에 적절한 치유도 해주지 못했던 무능한 내 앞에. 의사와 환자, 사랑에 빠지다 10년 전 나는 환자와 사랑에 빠졌다. 나와는 여섯 살 차이가 나는 지금 눈앞의 그녀와. 남편과의 불화에서 비롯된 불면증과 불안 증세로 내원했던 당시 마흔 살의 그녀. 첫 대면부터 한 마리 작은 새처럼 애처롭고 가련해 보였다. 의사 대 환자로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보호해주고 싶었다. 의사로서 환자를 보호해주고 싶었다면 무슨 문제일까만, 한 남자로서 한 여자를 품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거미줄을 거두듯 힘닿는 데까지 그녀의 불행을 거둬주고 싶었다. 사랑스러웠다. 20년 내 결혼생활의 권태와 무덤덤함을 일시에 씻어줄 것 같은 청량감마저 느껴졌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이성적 매력은 있었지만 남녀 관계로 발전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내면에 장착된 직업윤리라는 엄격한 경계경보가 늘 깜빡이고 있었기에. 결혼한 지 10년 이상 된 중년 부부 갈등이야 특별할 것도 없지 않나. 당사자들이야 그보다 더한 위기가 없을 것같이 굴지만, 들어보면 다 거기서 거기란 건 경험상 이골나게 겪었기에 그녀라고 특별할 것도 없었다. 단아한 외모에 끌렸다면 의사로서 자격 미달이니 딱 거기까지인 걸로 마음을 정리하고 스스로를 다잡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다. 우리 함께 살까요? 의사 이전에 나도 남자니 여성 환자에게 호감 간 일이 실상 처음도 아닌 데다, 첫인상에 가슴이 다소 설렌다고 해도 상담이 오가다 보면 결국 인간적 호의로 바뀌게 된다는 것을 정신과 의사 생활 20년 짬밥이 말해주지 않았던가. 다른 과와 달리 정신과는 내밀한 사생활과 내면적 속살이 드러날 수밖에 없기에 환자와의 라포 형성 과정에서 묘한 기류가 흐르기도 하지만 곧 정상 궤도로 진입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녀와는 그러지 못했냐고? 선을 지키지 못했다는 뜻이냐고? 고백하자면 그렇다. 둘이 어디까지 갔냐면, 각자 배우자와 이혼하고 함께 살자고 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그러자고 했고 그녀는 마다했다. 가정을 깨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더 안달이 나서 함께 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즈음 우린 면담을 빌미로 진료실에서 데이트를 했다. 하지만 맹세코 밖에서 따로 만나지는 않았다. 3년 동안 진료실에서 마주한 것이 전부였고, 따로 만나 밥은 물론 차 한잔 나눈 적도 없었다. 그러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직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면담 시간 50분 동안만 우리는 서로를 정신적으로 탐했다. 나와 동갑인 그녀의 남편은 금융업계 종사자로 업무적으로는 유능했지만 결혼 초부터 끊임없이 유흥업소를 드나들면서 아내의 신경을 긁었다. 처음 몇 번은 셔츠 깃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변명하고 건성으로 미안해하거나 시늉으로 용서를 빌곤 하더니, 나중에는 그조차 무감각해져서 아내가 추궁할 때면 남자가 바깥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며 되레 짜증을 내거나 언성을 높이며 적반하장으로 굴었다. “이혼을 하셨다고요…?” 그때의 생각이 떠올라 의외의 감정이 담긴 내 말꼬리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는 그녀. 손에 쥔 손수건 끝단을 하릴없이 돌돌 말면서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군 채 말이 없다. “이혼은 안 하겠다고 하더니 그간 심경이 변하셨나 봅니다. 그래, 언제?” “1년 전에요. 우울증을 앓던 아들이 3년 전 자살을 했어요. 그래서 이혼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어요. 결혼 관계를 유지해보려고 애썼지만 원래도 금이 가 있던 부부 관계가 아이를 잃고 좋아질 리가 없잖아요. 좁히려고 애쓸수록 사이가 더 벌어지면서 결국 파경을 맞았어요. 남편은 아들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에 대해 그간 가정을 등한시했던 자신의 잘못을 탓하며 늦게라도 부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 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비록 헤어졌어도 남편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 따위는 없어요. 하지만 더 이상 제가 의미를 못 찾겠더라고요. 아들을 잃은 마당에 가뜩이나 정 없던 부부가 새삼 노력해서 같이 살 가치가 있을까 싶었어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후 소식 한 자 없더니 지난 7년간 아들을 잃고, 남편과 헤어지고, 지금 이렇게 내 앞에 앉은 그녀.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죽을 것 같은 방황 다시 시작되고 성적으로 문란한 남편 때문에 시작된 치료였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쪽에서 곪아 불거졌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불화를 보고 자라온 외아들이 아동기 우울증을 앓게 되었고, 실상 그녀의 정신과 내원 동기도 아들로 인해서였다. 물론 처음부터 아들 이야기를 꺼냈던 건 아니다. 이유는 내가 아들을 보자고 할까봐 겁이 나서였다고 했다. 점차 내게 연애 감정을 느끼면서 모종의 수치심으로 아들 상태를 털어놓고 싶지 않았던 심정은 이해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 일은 그녀의 오판이자 어리석음이다. 왜냐하면 아들은 소아정신과로 보내졌을 테니 내게 치부가 드러날 염려 따위는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랬는데 지금 그 아들이 죽었다지 않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치료를 받게 했더라면 그렇게 어이없이 아들을 잃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닥쳐올 크나큰 불행을 미리 내다보지 못한 채 별 가망도 없는 남편 바람기 잡기에 대해서만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으니, 이 무슨 낭패인가 말이다. “그랬군요. 전혀 생각지 못했어요. 그럼 요즘 혼자 지내나요?” “이혼 후 친정에 들어가 지냈는데 친정어머니가 최근에 돌아가셨어요. 교통사고로 갑자기.” 점입가경이라더니, 불행이 불행을 낳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로 위로가 되랴. 내 기억으로 그녀는 외동딸이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셨으니 이제 그녀가 의지할 피붙이는 없다는 뜻이다. “제가 뭘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오늘 저를 찾아오신 이유는 뭐죠?” “그냥요, 그냥 선생님이 보고 싶었어요.” 얼마나 듣고 싶고 기다렸던 말인가. 7년 전 일방적으로 그녀 쪽에서 발길을 끊은 후 나는 적잖이 방황했다. 그녀가 떠난 빈자리로 인해 아내와는 더 권태롭고 더 지루해져서 그 참에 아내와 헤어져버릴 생각까지 했다. 그랬던 나를 가까스로 추스른 게 불과 2, 3년 전. 그런데 그녀가 내 앞에 거짓말처럼 다시 나타났으니. 아, 나의 죽을 것 같은 방황이 다시 시작되는 것일까.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2022-08-18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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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 전 연인과 재혼한 나는야, 운 좋은 남자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친구들은 나를 얄밉도록 운 좋은 놈이라고 한다. 뭐, 얄미울 것까지야. 하지만 운 좋은 건 인정! 50대 초반에 이혼한 걸 두고 대운(大運)이라고 할 순 없지만 1년 만에 재혼한 건 확실히 ‘운발’이 좋았다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재혼 상대가 30년 전 나를 짝사랑하던 ‘그녀’였으니. 친구들은 그 부분에서 나의 운을 얄미워하는 것일 테고. 우리 부부가 재혼한 지 올해 3년째다. 아, 그건 내 입장이고 아내로서는 초혼이다. 그러니까 나를 좋아했던 그녀는, 다른 여자와 결혼한(그것도 자기 친구랑) 나라는 남자를 못 잊어(믿거나 말거나) 50살이 다 되도록 혼자 살다가 내가 이혼한 후 나를 다시 만난 것이다. 첫 결혼에 실패한 후 ‘혹시나’ 하고 그녀에게 연락을 취해봤더니 ‘역시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건 좀 과장이고, 어쨌거나 그녀는 그때까지 미혼인 상태였다. 용감한 자가 사랑을 쟁취한다 했던가? 이혼남인 주제에 감히 용기를 내어 여태껏 한 번도 결혼하지 않은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했고, “와이 낫?”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는 나를 환대했다. 그러고는 일사천리로 결혼이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우리 부부가 남달리 관계가 좋다거나 남다른 결혼생활을 한다는 뜻은 아니다. 부부란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있어서 안정되고, 없어서 불편한. 그러고는 각자 자기 생활로 바쁜. 다만 우리 부부의 질긴 연이 특별하다면 특별하니 오늘은 그 특별한 연을 문어 다리 씹듯 잘근거려보련다. 강아지 그녀와 고양이 그녀 지금의 아내와 나는 같은 대학 같은 과 동기생으로 만났다. 이혼한 아내는 과는 다르지만 역시 같은 대학 출신이다. 두 여자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친한 친구였고, 나는 뒤늦게 대학을 들어가 그녀들보다 몇 살 더 많았다. 지금 아내를 가운데 두고 셋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다녔는데, 조합이 조합인지라 친구들한테서 삼각관계냐는 놀림을 받곤 했다. 당시 나는 두 여자 틈에서 보호받는 편안함을 느끼던 터라 연애로 인한 감정 소모와 긴장된 줄다리기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두 여자 중 어느 누구도 내게 연애 감정을 품지 않길 진정으로 바랐다. 언제나 살가운 쪽은 지금의 아내였다. 모성 본능으로 나를 잘 챙겨줬고 이성 본능으로는 나를 잘 따랐다. 시험 기간에는 먼저 새벽에 나와 도서관에 자리를 잡아두기도 하고 여학생 특유의 감성이 담긴 자잘한 선물도 주곤 했는데, 고마워하면서도 그 모든 것에 무심코 별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던 나와 달리 그녀는 처음부터 나를 각별한 감정으로 대했던 것 같다. 나는 또래보다 늦게 대학에 들어간 처지라 동성 동급생들보다는 이성들 속에서 지내는 게 편했다. 내성적인 성격에다 여린 선의 외모로 같은 남자 집단에서는 약간 주눅이 들곤 했으니까. 나같이 생긴 사람을 요즘은 ‘꽃미남’이라고 해서 여자들이 호감을 느낀다고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남자답게 생기지 않은 자신에 대해 자신감이 없었다. 그러니 나를 잘 챙겨주고 싹싹하고 상냥한 그녀와 함께 지내는 것이 편안하고 한편 의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함께 다니면서 그녀의 친구를 만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 또한 그녀의 친구는 강아지 같은 아내와 달리 고양이처럼 도도한, 그야말로 둘은 ‘개와 고양이’ 사이 같았다. 언뜻 생각하면 앙숙으로 지낼 법한데 예의 배려심 많은 아내의 마음 씀씀이 덕에 둘이 잘 지냈다. ‘고양이 그녀’는 좀처럼 마음을 주는 법 없이 언제나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나를 대했는데, 신비감과 매력이 없지는 않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연애를 하기에는 나의 에너지가 부족한 편이라 그러거나 말거나 내게는 ‘강아지 그녀’가 역시 편했다. 나를 친구에게 빼앗긴 아내 일은 셋이 춘천에 가기로 한 날 벌어졌다. 4학년 학기말 시험이 끝난 주말, 내 친구 한 명을 끼워 넷이서 당일치기로 여행을 하기로 했다. 문제는 내가 데리고 나오기로 한 친구 녀석이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겨(아마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것 같은데 기억이 확실치 않다) 못 나오게 된 것이 발단이었다. 여행을 취소할까 하다가 어차피 주 멤버는 우리 셋이었으니 그냥 셋이 가도 별문제 없겠다 싶어 그대로 추진했다. 거기까지는 실상 아무 문제도 없었다. 공교롭게도 지금의 아내인 ‘강아지 그녀’마저 일이 생겨 못 온다는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그때는 휴대폰도 없었을 때라 이미 나와 ‘고양이 그녀’는 약속 장소로 나와 있는 상태에서 소식을 들었다. 출발 시간이 가까워오는데도 모이기로 한 청량리역에 나타나지 않는 ‘강아지 그녀’. 기다리다 못해 ‘고양이’가 ‘강아지’의 집으로 전화를 걸고 나서야 사정을 듣게 되었다.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발을 접지르는 바람에 꼼짝 못 하게 된 상황에서 연락할 방법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집애야, 발을 다쳤는데 어떻게 발을 동동 구르니? 내가 먼저 전화 안 했으면 마냥 그대로 있으려고 했어?” 걱정은 고사하고 얼마나 다쳤는지 물어보지도 않은 채 첫마디부터 쏘아붙이던 ‘고양이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상대를 할퀴는 목소리, 그때부터 인정머리 없는 여자라는 걸 알아봤어야 하는데. “진철 씨, 제 친구가 발을 다쳤대요. 그냥 우리끼리 가요.” “어떻게 그래요? 나으면 다음에 함께 가요.” “일껏 준비하고 나왔는데 그럼 이대로 돌아가잔 말이에요?” “그래도 우리끼리 가면 섭섭해할 것 같아서….” ‘강아지 그녀’를 사이에 두지 않고 ‘고양이 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이 어색했던지라 그렇게 핑계를 댄 것인데, 그 말이 ‘고양이’의 성질을 건드린 것 같아 내심 움찔했다. 그녀와만 따로 만난 적도, 함께 있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가뜩이나 숫기 없고 붙임성 없는 내가 대화를 주도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물이나 공기처럼 부지불식 중에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강아지’의 존재가 그때처럼 절실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좋아요, 그럼 춘천은 다음에 가기로 하고 우리 어디 가서 밥이라도 먹어요. 벌써 점심때가 다 되어가네요. 어차피 열차는 떠나버렸으니 가고 싶어도 오늘은 갈 수가 없게 되었어요.” 일이 왜 이렇게 풀려가나. 왜 내가 이 상황을 전적으로 떠맡아야 하는 거지? 나는 적이 긴장되고 당황해서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술의 힘이라도 빌려보고자 밥 대신 술을 마시자고 했고, 아니 대낮부터 밥과 술을 함께하자고 했고 일은 그렇게 터져버린 것이다. 술김에 결혼, 술 깨자 이혼 술의 힘은 묘했다. ‘고양이’가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호기심이 동했고, 2차, 3차로 옮겨가는 동안 밤이 깊어갔고, 취할수록 괜스레 안달이 나면서 도도하고 앙칼진 그녀를 한번 꺾어보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녀가 나를 유혹했는지 내가 그녀를 유혹했는지 엉망으로 취해서 기억이 안 난다. 그렇게 우리는 몸을 섞었고, 그 하룻밤의 일로 그녀가 덜컥 임신을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술김에 한 결혼이었지만 아주 몰랐던 사이도 아니고 집안 환경도 비슷해서 ‘복불복’이라고 꼭 잘못되라는 법도 없었다. 근데 잘못됐다. 무엇보다 그런 동기의 결혼이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결혼생활 내내 구겨진 자존심을 만회하려는 안간힘인 양 덤터기를 죄다 내게 씌웠다. 그나마 관계가 순조로울 때는 잠잠하다가 일이 꼬일 때면 나를 무슨 성폭행범처럼 몰아세웠다. 내가 그때 그러지만 않았어도 나 따위와 인생을 함께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거라며. 그렇게 한 번씩 퍼부어댈 때면 내 자존심은 안중에 없었다. 아내의 기질과 성질을 잘 아는 나로서는 대거리를 하는 게 일을 더 크게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해 묵묵히 듣곤 했는데, 그 자체가 인정하는 꼴이 되어갔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지, 수십 년간 혐오스러운 소리를 듣자니 나로서도 더 이상 참아지지 않았고 참고 싶지도 않았다. 그날 생긴 딸 하나 외엔 어찌된 게 자식도 더 이상 생기지 않아 딸을 볼 때마다 그날의 불쾌한 기억이 떠오르는지 아내는 딸조차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그 점이 가장 나를 화나게 했고 무기력하게 했다. 동시에 그 점 때문에 어떻게든 아내를 달래서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의 진짜 속내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 그 점이 나를 비참하게 했다. 그랬다. 전 아내는 처음부터 나를 좋아하지 않았고,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었다. 현 아내가 처음부터 나를 좋아했고 한결같이 사랑했던 것과는 반대로. 그러나 감정보다는 가정을 지키고 싶었기에 딴에는 노력했다. 설혹 잘못 꿴 첫 단추라 하더라도 단추 구멍을 추가로 내겠다는 각오로. 하지만 결국 헛수고였다. 오래 산 부부들이 아무리 밋밋하고 멋없이 산다고 해도 그 바탕에는 장처럼 묵은 정의 강이 구수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던 것이다. 술김에 한 결혼이 술 깨자 이혼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고 할지. 다시 찾은 나의 강아지 그렇게 나는 고양이와 헤어진 후 강아지를 다시 만났다. 어떤가. 사연을 듣고 나니 얄밉도록 운이 좋았던 건 아니고, 나 역시 겪을 만큼 겪고 나서 겨우 찾은 일상의 안온함일 뿐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가. ‘강아지 아내’는 여전히 나를 잘 따르고 내게 충성스럽다. 참 고마운 일이다. 내가 자기 친구와 그날 밤 그런 일을 저질렀을 때도 말없이 받아들였던 여자다. 그때 자기와 내가 특별한 사이는 아니었다 해도 내심 얼마나 당황하고 실망스러웠을까. 아니 그녀는 분명 나를 특별하게 느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야 나의 허망한 지난 결혼에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밤엔 꼭 물어보리라. 당신은 나의 30년 전 연인이었냐고. 그래서 나를 잊지 못하고 오랜 세월 기다리고 있었냐고. 위로받아야 할 쪽은 내가 아니라 아내인가?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2022-07-13 0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