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 파, 부추, 달래, 무릇(흥거) 등 우리 사찰에서 금하는 다섯 가지 채소를 ‘오신채(五辛菜)’라고 한다. 재료의 성질이 맵고 향이 강해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오신채를 사용하지 않고 만든 음식을 흔히 ‘사찰음식’이라 부른다. 이러한 사찰음식의 개념을 넘어 ‘한국 전통 채식’의 의미를 더한 무신채(無辛菜) 식단을 지향하는 맛집 ‘마지’를 찾아갔다.
순하게 즐기는 우리 전통 채식
서울 경복궁 인근 서촌마을에 위치한 ‘마지'는 아담한 한옥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2012년 사찰음식 도시락을 선보였던 마지는 이듬해 서울 방배동 매장을 마련했고, 올해 4월 지금의 서촌 분점을 열었다. 그 출발은 ‘사찰음식’이었지만, 오랜 연구와 고민을 거듭하며 현재는 ‘한국 전통 채식’이라는 의미로 확장해나가고 있다. 종교음식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마지의 김현진 대표는 “사찰음식점으로 유명해지긴 했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한국 전통 채식’입니다. 식물은 저마다 독성이 있기 때문에, 짧게라도 열처리를 해서 독성을 제거해야 해요. 그게 한국 전통 채식의 조리법이라 할 수 있죠. 우리는 그 방법을 고수해 음식을 만들고 있습니다”라며 이곳 음식의 의미와 고집을 드러냈다.
목사님도 즐기는 부담 없는 사찰음식
마지를 찾아오는 손님들은 대개 스님이거나 불교 신도들 아닐까? 이에 김 대표는 선입견에 불과하다고 했다. “서촌점 개업 날도 스님보다 목사님이 더 많이 방문했어요. 단골을 봐도 스님, 목사님, 신부님 비율이 거의 비슷하죠.” 또 한 가지 반전은 김 대표는 한때 잘나가던 수학선생님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사찰음식으로 전향하게 된 데에는 가족의 영향이 컸다. 암으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부쩍 건강에 신경을 쓰던 그녀의 몸에 이상증세가 나타났다. 병원에 가보니 항생제 알레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근력을 키우기 위해 즐겨 먹었던 (항생제 처리된) 닭고기가 화근이었던 것. 그길로 자신이 먹는 식재료들의 근원을 탐구하기 시작했고, 사찰음식에 눈을 뜨게 됐다. 그리고 마지가 문을 열기까지 그의 어머니인 백련성(본명 이춘필) 백련사찰음식 연구소 소장의 역할이 컸다.
재료 본연의 맛에 집중하다
선재 스님에게 사찰음식을 사사한 백련성 소장 역시 과거 고기를 먹다가 급체한 이후 채식만 먹게 됐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식재료 하나하나에 더욱 신경을 쓰고 정성을 다할 수 있었다. 마지의 대표 메뉴는 연밥올림 한상차림(1만7000원)인데, 여기에 쓰이는 연잎 한 장도 직접 엄선해 사용한다. 5월에서 10월까지, 여름내 촉촉이 비를 맞고 가을에 제대로 영글어진 백련 잎만을 고집한다. 여러 연꽃 중에서도, 백련 잎은 향이 진하고 약용 성분이 풍부해 연밥을 지었을 때 맛이 좋고 건강에 도움이 된다. 이곳에서는 지름이 50cm 정도인 큰 연잎에 흰 찹쌀만 넣고 연밥을 만든다.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지 않아도 건강한 자연의 향을 머금은 밥맛이 풍족하게 느껴진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깍두기는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 인공조미료나 액젓 대신 과일소스와 간장으로 양념한다. 흔히 식당에서 즐기는 새콤하게 무른 깍두기와 달리, 아삭아삭하면서도 기분 좋은 알싸함과 단맛이 느껴진다. 다른 반찬들 역시 천연 효소나 최소한의 양념만 넣어 담백하게 요리한다.
마지의 삼일(3·1) 캠페인
사찰음식의 맛에 눈뜬 사람이라도 가격이 부담스러워 자주 즐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이곳에서는 8000원부터 1만원까지, 비교적 부담 없는 가격으로 맛볼 수 있는 메뉴들을 선보이고 있다. 부담 없는 가격으로 부담 없는 한 끼를 즐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김 대표는 ‘삼일 캠페인’을 제안한다. 세끼에 한 번, 3일에 한 번, 또는 외식 세 번 중 한 번은 가벼운 음식을 먹어서 과한 영양 섭취에 지쳐 있는 우리 몸을 편안하게 해주자는 것. 그렇게 서서히 우리 몸과 영양의 균형을 찾는 식단을 마련하는 게 마지의 목표다.
마지에서는 주마다 종교학, 음식학, 철학 등을 아우르는 ‘인문학밥상’ 강의가 열린다. 단순히 밥을 먹는 식당을 넘어서 불교를 흥미롭게 접하고 종교 간 화합을 마련하는 소통의 장으로 발돋움하고 있다(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5길 19).
“아시시에 살고 싶어요. 거긴 천국 같아요. 아시시나 토디 근처에 새집을 장만할까 합니다.” 영국의 글램 록 가수의 대명사인 데이비드 보위가 한 말이다. 그는 1990년대 중반, 한 이탈리아 신문을 통해 “자신이 지상에서 본 천국은 아시시”라고 말했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이 도시를 찾았을 때의 첫 느낌은 분명코 데이비드 보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푸른 심장’ 아시시
아시시(Assisi) 여행은 혼자가 아니다. 시에나(Sienna) 숙소에서 만난 남미계 미국인 신디아(38세)와 동행한다. 그녀는 3개월간 혼자 여행 중이다. 시에나에서 아시시까지는 매우 복잡한 여정을 거쳐야 한다. 버스, 기차를 여러 번 바꿔 타면서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느낌을 주는 아시시 간이역(1866년 개통)에 내린다. 메인 타운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타원형의 고풍스러운 타운. 스바지오 산 언덕 위에 오롯이 모여 있는 아시시를 보고 서로 감탄을 금치 못한다. “리, 너무 아름답다. 시에나보다 나은걸.” 표정이 풍부한 신디아는 아시시의 첫 느낌을 한껏 표출하고 있다. 가파른 언덕길로 버스가 올라서자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정류장에서 성문을 따라 걸어 들어간다. 숙소가 서로 다른 신디아와는 클라라 성당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다.
아시시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주 북부의 아펜니노(Appennino, 켈트어로 ‘산봉우리’라는 뜻) 산맥의 남서쪽 기슭 위에 있다. BC 1000년경, 움브리아인들이 처음 정착했고 이후 에트루리아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BC 295년, 로마인들이 아시시움(Asisium)을 건설하면서 현재의 도시명 ‘아시시’가 됐다. 2000년에 유네스코에 등재된 이 도시는 이탈리아의 ‘푸른 심장’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오래된 가옥, 울퉁불퉁한 골목길마다 긴 세월의 흔적이 녹아들었다.
성 프란치스코 출생지, 코무네 광장
클라라 성당 앞에서 다시 만난 신디아와 함께 도심을 걷는다. 클라라 성당을 비껴 키에사 누오바 교회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간다. 1615년, 후기 르네상스 양식의 이 교회는 성 프란치스코의 생가 위에 세워졌다. 교회가 생기기 두 해 전(1613년), 프란치스코의 생가는 부서질 위기에 처했다. 이걸 본 스페인인 ‘비카’는 자국의 펠리페 3세(1578~1621) 왕에게 자금을 지원받아 교회를 지었다.
성당 앞쪽에는 성인의 부모님 동상이 있고 성당 안쪽에는 성인이 갇히게 된 감옥이 있다. 성인은 이곳에 갇혀 신의 부름에 답하고 고행의 길을 가기로 작정했다고 전해온다. 길을 따라 남쪽으로 더 내려오면 아시시에서 가장 오래된 코무네 광장이다. 로마의 흔적들이 남은 곳으로 사자상 분수대가 눈길을 끈다. 미네르바 신전 위에는 산타마리아 성당이 있고 그 옆에 포로 로마노 박물관이 있다. 포로 로마노 박물관에서는 부서진 로마의 유적과 함께 폼페이에서 본 똑같은 스타일의 벽화를 봤다. 1997년에 발견된 고대 로마의 빌라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이리라.
‘빈자의 성인’ 성 프란치스코의 도시
남쪽 끝에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이 있다. 수도복 입은 수도사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거리를 누빈다. 수도사들은 스스럼없이 다가와 함께 사진을 찍어준다. 유럽 전역에서 ‘아시시’ 하면 ‘성 프란치스코(St Francis, 1182~1226)를 떠올린다. 수많은 순례자들은 ‘가난과 결혼한 수도자’,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 그의 헌신적인 삶을 기린다. 부유한 직물 장사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군대에 입대했다가 포로로 잡혀 감옥에서 살기도 했다. 두 번째 군 입대 후 ‘환시’를 체험하고 아시시로 돌아와 스스로 ‘빈자의 성자’ 삶을 선택한다. 이때부터 최소한의 먹거리를 직접 구하며 청빈한 초막생활, 영성적 삶을 시작한다. 무수한 일을 해냈고 여러 번의 기적을 보여줬다. 그러다 건강이 급속히 안 좋아져 눈이 반쯤 멀고 심한 병까지 얻어 포르치운콜라(Porziuncola)의 작은 오두막에서 84세로 선종했다.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우여곡절 끝에 대성당 지하에 안장되었다. 대성당에서는 프레스코화,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눈길을 끌었고, 1230년부터 수사들이 기거해온 대성당 수도원이 특별하다. 프란치스코 대성당 앞 정원 쪽으로 올라오면 ‘패잔병 프란치스코’의 동상이 있다. 페루지아 전쟁터에 나갔던 23세의 청년 프란치스코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아시시로 귀환하던 날을 표현해낸 동상이다. 말 위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 듯 고개를 떨군 모습은 해질 무렵이라서 그런지 더 처량하게 느껴진다.
프란치스코의 여제자 성 클라라
패잔병 프란치스코의 동상 앞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해걸음을 벗 삼아 신디아와 저녁을 먹는다. 무척 배가 고팠다는 것을 표정으로 보여주는 신디아. 그녀가 “수도자의 삶을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길래, 난 일언지하에 “싫어. 평생 싱글로 사는 것은 좋지 않아”라고 말했더니, 한국어로 숫총각은 뭐라 말하느냐고 묻는다. ‘동정남’이라고 말해줬더니 그 말을 그대로 따라하며 흉내를 낸다. “그러면 너넨 뭐라고 말하니?”라고 물었더니 남녀 상관없이 ‘버진(virgin)’이란다. 그녀는 아시시에서 단 하루밖에 머물지 못하고 이른 아침, 로마로 가서 포르투갈로 가야 한다. 그녀를 위해 시간을 더 할애해준다.
길을 거슬러 처음 만났던 산타 키아라 성당(1257~1265년에 건축) 앞에 선다. 멋진 건축물이다. 이 성당엔 성 프란치스코의 여제자 클라라(Clara, 1193~1253)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떠나기 전에 아시시에서 가장 높은 로카 마조레는 꼭 가보고 싶다는 신디아의 뒤를 따른다. 가는 길목에 루피노 대성당이 있다. 이 성당과 종탑 앞 아치형 건물 사이에 클라라 생가가 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클라라는 이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이곳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듣고 제자가 됐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와는 달리 밀폐된 공간에서만 기도하며 살았다 그녀가 살았던 산 다미아노 수도원은 처음부터 엄격한 봉쇄의 장소였다. 그녀는 매일 허리를 끈으로 묶는 허름한 수도복을 입었고, 사시사철 맨발로 다녔으며, 삭발한 머리에는 흰 두건과 검은 수건을 쓰고 다녔다. 잠자리는 맨바닥 위의 요였고, 베개는 나무토막이었으며, 공동 침실은 춥고 적막했다. 식사는 대개 하루에 한 끼만 먹었고 주일과 성탄절에만 두 끼를 먹었다. 고기와 포도주는 언제나 금했고, 주로 빵과 채소를 먹었다. 계란이나 우유가 생기면 병자들에게 주었다. 그녀는 가난을 ‘그리스도인의 특전’이라고까지 불렀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가 죽은 지 30년 만(60세)에 죽음을 맞았다. 클라라의 삶을 되새기면서 ‘조선의 테레사’로 불리는 서서평(1880~1934) 미국 출신 여성 선교사가 떠올라 자꾸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아시시 ‘뷰포인트’ 로카 마조레 요새
로카 마조레(Rocca Maggiore)는 아시시의 북동쪽,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있어서 골목과 계단을 따라 지그재그로 올라야 한다. 신디아는 “운동을 해서 살을 빼야 해” 하면서 몇 번이나 숨을 고르면서도, 가로등 불빛에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발코니에 걸린 꽃 화분을 보며 감탄을 연발한다. 성곽 일부에만 서치 조명이 아름다운 요새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신디아와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다음 날, 일찍 요새에 올라 박물관이 오픈하기를 기다리면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아시시 마을과 움브리아 전원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평화롭고 아름답다. 넓은 평원에 감탄하고 아름다운 아시시의 전경에 넋을 놓는다. 더 작은 요새인 미노레 성채의 남은 흔적도 찾아낸다. 성곽 안에는 유명 인물의 연보와 중세의 물건들, 음악회, 연극이 열렸던 사진들이 걸려 있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아시시를 떠나 역에 도착해 짐을 맡기고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을 찾아가 포르치운콜라 예배당을 본다. 종교와는 전혀 무관한 한 여행객일 뿐인데도, 이 도시는 발길을 부여잡는다. “아직 넌 볼 것도 할 것도 많아”라는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Travel Data
현지 교통 정보 로마에서 열차와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테르미니 역에서 하루 네 번(토요일 3회) 직행 열차가 운행된다. 약 2시간이 소요되며 환승을 하면 2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또 로마 티부르티나 역 광장에도 버스(7시, 10시 30분)가 있다. 일요일과 공휴일은 1회(8시 15분) 운행된다.
아시시 박물관 카드 로카 마조레 외에 두 군데의 박물관을 더 볼 수 있는 ‘아시시 티켓’이 있다.
맛집 정보
타운에는 수많은 레스토랑이 있고 매일매일 색다른 코스 요리를 선보이는 레스토랑이 많다. 빵 위에 다양한 재료를 얹어 먹는 애피타이저 브루스케타가 깔끔하다. 호텔 추천 레스토랑은 할인이 가능하다. 길거리 음식인 파니니 등도 맛있다.
숙박 정보 아시시에는 호텔, B&B, 게스트하우스가 부지기수로 많다. 개개인의 상황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또 가톨릭 신도가 아니더라도 델 질리오 수녀원을 이용할 수 있다.
어탭터 정보 다른 지역과 달리 3핀 어탭터가 꼭 필요하다. 미리 준비 못했다면 타운 숍에서 구입 가능하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아시시 시내만 보게 된다면 딱히 할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천천히 순례지(Eremo della Carceri, San Damiano) 등을 찾아 트레킹을 즐기면 된다. 또 아시시 주변의 페루지아(Perugia), 아멜리아(Amelia), 나미(Nami), 토디(Todi), 오르비에토(Orvieto), 구알도타디노(Gualdo Tadino), 구비오(Gubbio), 치타디카스텔로(Citta di Castello)와 시에나를 거쳐 토스카나까지 여행을 즐기면 된다. 이탈리아는 한 달 여행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나라다.
옥시모론(oxymoron)은 수사학 용어로 ‘모순(당착)’을 뜻한다. 뜻이 대립되는 어구를 나열함으로써 새로운 뜻이나 효과를 노리는 수사법이다. 예를 들면 ’an open secret‘은 ’공공연한 비밀‘로 번역된다. ‘청순하면서 섹시하다는 말’도 그렇다. 일반적으로는 이해하지만, 청순과 섹시는 관계가 먼데 섹시하기도 하다니 어쩌라는 말인가.
유치환의 ‘깃발’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도 그렇다. 아우성은 시끌벅적해야 하는데 소리가 없단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도 겉으로는 웃고 있는데 속으로는 눈물이 난다는 의미다. ‘군중 속의 고독’도 그렇다. 군종 속에 있는데 고독하다니 말이 안 된다. 그러나 고독한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나 고독을 느낀다. 반대로 혼자 있어도 전혀 고독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다.
‘똑똑한 바보’도 겉과 내용이 다른 경우를 말한다. 겉보기에는 하는 일마다 잘되고 나무랄 데 없이 잘났고 똑똑해 보이는데 결과적으로 나쁜 결과가 왔다면 바보인 것이다. 조선시대에 젊은 날을 술과 여자에만 탐닉하던 인물들 중 나중에 왕이 되거나 큰 권력을 잡은 경우가 종종 있다. 일부러 바보 또는 난봉꾼 행세를 했던 것이지 숨은 뜻은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옥시모론’을 ‘표층적 역설’이라고 풀이하는 모양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 겉과 속이 다를 수 있다. 부자라고 해서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다. 권력이 있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다. 간혹 자살하는 재벌, 권력의 상층부에서 끝없이 추락하는 사람들을 보면 차라리 꼭대기보다 원래부터 낮은 데 있는 것이 더 나은 경우도 많다.
극과 극은 통한다. 아포가토(Affogato)가 그렇다. 하얀 아이스크림 위에 에스프레소를 부어서 먹는 커피 메뉴다. 흰색과 검정색이 잘 어울리는 것이다. 커피의 쓴맛과 아이스크림의 달콤한 맛을 함께 향유하는 즐거움이 있다.
세상 사는 요령은 옥시모론을 잘 활용하는 것이다. 필자가 싱글이라 외로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필자는 싱글이어서 외로울 틈이 없다.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인들이 쉴 새 없이 연락을 해오기 때문이다. 스케줄이 없는 날은 더 바쁘다. 새로 나온 노래도 배워야 하고, TV에서 하는 영화나 스포츠 중계도 봐야 한다. 책도 읽어야 하고 당구 방송도 봐야 한다. 개인적으로 누가 돌봐줄 사람이 없으므로 빨래도 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한다. 그야말로 과로사를 걱정해야 하는 백수인 셈이다. 이런 삶도 옥시모론이다.
곁에서 밥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잘 못 먹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여기저기 맛집을 찾아다니며 더 잘 먹는다. 배우자가 있으면 아침에 남은 김치찌개를 다 먹어치울 때까지 내 놓을 것이다. 그러나 싱글은 메뉴를 겹치지 않는다.
‘외롭다’고 생각하면 정말 외로워진다. ‘차라리 혼자 쉬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질 때면 ‘외롭다’는 사치처럼 들린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반대편을 보면 된다. 옥시모론을 활용하는 것이다.
“엄마, 이 오빠 알아? 이 오빠 엄마가 엄마 안다던데?”
교회에 다녀온 딸이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얘, 민철이 아니야?”
“맞지? 맞지? 오빠랑 얘기하다 우리가 옛날 살던 동네 얘기가 나왔는데 자기네도 거기 살았다고….”
민철이 엄마와 필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다. 아랫목에 배를 깔고 팝송을 함께 듣고, 디제이가 있는 빵집에 들락날락했던 둘도 없는 친구였다. 친구가 결혼해서 외국으로 떠났다가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면서 연락이 끊어졌다. 그런 친구 소식을 딸을 통해 듣게 되니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당장 연락을 하고 단짝 시절로 돌아갔다.
여의도에 사는 친구네 집은 잘 꾸며져 있었다. 현대적인 가구와 중국풍의 믹스매치가 세련돼 보였다. 거기다가 유럽이나 미국에 갈 때마다 사온 소품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필자는 친구의 세련된 감성과 친구가 만나는 품격 있는 사람들에 매료됐다.
친구와 친하게 지내게 되면서부터 바빠졌다. 함께 가는 곳도 많아지고 새로 만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친구는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 새로운 물건을 내보였다. 필자가 전에 살던 생활 방식과는 전혀 달랐지만 고맙고 즐거웠다.
어느 날 친구가 집 앞으로 오겠다고 전화를 했다. 감기가 심하게 걸려 나갈 수 없다고 하니 얼굴만 보고 가겠다고 찾아왔다. 친구는 부스스한 필자의 모습을 보더니 “차 타고 드라이브 좀 하면 나아질 거야” 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날 친구를 거절하는 게 힘들었던 필자는 조금씩 친구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필자가 홍콩 여행을 가게 됐다. 심천에서 수년을 살았고 홍콩을 밥 먹듯 드나들었던 친구는 최신 가이드북과 옥토퍼스카드(선불카드)를 챙겨주며 자기가 홍콩 맛집을 정리해서 주겠노라 했다. 필자는 친구의 말을 별스럽지 않게 생각하고 조용히 홍콩엘 다녀왔다. 문제는 홍콩 여행을 다녀온 후에 터졌다. 적극적인 성격의 친구는 이모저모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별일도 아닌데 뭐”라고 말한 필자의 대답이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고 쏘아붙였다. 그리고 장문의 문자로 서운한 감정을 그대로 전해왔다. 필자는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지만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와 가까워지면서 생활에 활기도 생기고 재밌는 일도 많았지만 끌려다니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필자만의 여행을 하고 싶었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그 후 누가 잘못한 것도 없이 서로 상처를 받고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오히려 친구를 안 만나니 홀가분했다. 그동안 손에서 놓았던 책을 읽고 사색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편안함을 되찾았다.
소노 이야코의 라는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집 주변을 둘러싼 나뭇잎과 가지를 손질했다. 통풍이 나쁘면 집이 썩고 그 집에 사는 사람도 병에 걸린다고 믿으셨다. 그 믿음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깊이 뒤엉킬수록 서로 성가스러워진다. 살다 보면 나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이 한둘은 나오게 마련이다. 이를 피할 도리는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지나치게 관계가 깊어져 서로에게 어느덧 끔찍할 정도로 무거워진 덕분에 문제가 생긴다.
사람들과 관계가 힘들고 어려울 때 약간의 거리를 두고 관계를 통풍하는 일 그것이 삶을 행복으로 이끌고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현명하게 관계를 끊는 일은 아직도 고민거리다. 페이스북에서 ‘알 수도 있는 친구’에 그 친구 이름이 뜨면 아직도 깜짝 놀라니 말이다.
4월 초순경, 장고항 어부들의 몸짓이 부산하다. 실치잡이를 해야 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실치가 적을 때는 하루에 한 번 정도 그물을 올리지만 많을 때는 수시로 바다에 나가 바쁘게 작업을 해야 한다. 흰 몸에 눈 점 하나 있는, 애써 눈여겨봐야 할 정도로 작은 물고기인 실치가 작은 몸집 흐느적거리면서 장고항 앞바다를 회유한다. 실치는 장고항 봄의 전령사다.
지형이 장고의 목처럼 생긴 어촌 마을
해돋이를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려 한다. 오전 6시가 채 못 돼 부스스 일어나 장고항 우측 끝자락의 노적봉과 촛대바위가 잘 보이는 위치를 찾는다. 마치 뫼산[山] 형태의 기암은 장고항의 지킴이다. 오랫동안 먼 바다에 조업 갔다 오는 어부들의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이 계절, 기암 사이로 멋지게 떠오르는 해돋이를 기대하진 않는다. 단지 장고항을 대변해주는, 육지 끝자락에 있는 모습을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물이 빠져 갯벌이 다 드러나는 서해에서 바라보는 일출. 동해에서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아침 햇살은 빠르게 사위를 밝게 해준다. 서둘러 장고마을로 들어선다. 장고항은 ‘지형이 장고의 목처럼 생겼다’ 해서 ‘장고목’이라 불리다가 후에 장고항 마을로 개칭되었다. 이외에도 가낭골, 당산 마을이라는 이름이 있다. 여행자들도 바닷가 마을만 한갓지게 배회한다. 서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닷가 마을인 장고항이 특히 유명해진 것은 ‘실치’ 덕분이다.
‘실치’로 이름 알린 장고항
장고항 사람들은 1970년대 초, 실치잡이가 본격화되면서 다들 실치포를 말렸다고도 한다. 실치잡이가 성행할 때는 150여 가구가 소위 멍텅구리배로 불리는 무동력 중선으로 실치잡이를 해왔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연안에서의 실치잡이 어선이 자취를 감춘다. 지금은 인근 앞바다에서 개량 안강망 그물로 실치를 잡는다. 2000년 초부터는 장고항 실치회 축제를 만들어 ‘실치회의 원조 고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마을 안쪽 건조대에서는 실치포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고샅 건물 벽에 씌인 손글씨를 따라 실치포 작업장을 찾아낸다. 아주 오랫동안 실치포를 만들어왔음이 느껴지는 작업장이다. 실치포 만드는 작업은 눈으로 봐도 힘겨워 보인다. 마치 김 한 장 만들 듯, 물그릇 담긴 실치를 그릇으로 적당량 떠서 사각 나무틀에 쏟아 납작하게 모양을 잡는다. 연륜이 깊고 숙련된 사람일수록 실치의 양을 정확히 가늠하고 평평하게 할 수 있다. 발에 붙은 실치는 신기하게도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붙어 있다. 몇 시간 해풍을 맞으며 건조되면 실치포가 완성될 것이다. 두껍고 살색이 흴수록 좋은 실치포라는 상식을 알게 된다. 기꺼이 실치포 몇 묶음을 산다.
젓가락으로 건져낼 정도로 아주 작은 물고기
건조대를 지나 마을 끝 방파제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수산물유통센터가 나온다. 2012년 4월 28일, 제9회 축제를 맞춰 개장한 곳으로 7209㎡의 부지의 1153㎡의 1층 건물에는 20여 곳의 횟집이 들어서 있다. 난전, 포장마차를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간판을 달고 한곳에서 영업하고 있다. 싱싱한 활어는 물론이고 실치와 간재미 등이 지천이다. 손님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일까? 바닷물을 가득 담은 고무 대야에 살아 있는 실치들이 헤엄치고 있다. 흰 몸에 점이 하나 있는, 마치 실처럼 가는 물고기가 활발하게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다. “나 살아있어요” 하는 듯하다. 횟집들마다 부산하게 실치를 씻으며 손님 맞을 준비에 여념 없다. 실치 씻는 방법도 아주 특이하다. 튀김을 건져낼 때 사용하는, 긴 나무젓가락으로 실치들을 휘휘 저어댄다. 젓가락에 실치가 걸쳐지면 소쿠리에 담아내는 일을 반복한다. 워낙 작은 물고기라서 손품이 많이 필요하다.
기암 촛대바위가 멋진 해안
수산센터를 지나 방파제로 가는 길목에서 멀리서만 봤던 기암을 가까이서 조우한다. 붓을 거꾸로 꽂아놓은 듯한 바위가 촛대바위다. 양쪽으론 기암이 감싸고 있다. 바다 쪽, 높은 바위를 노적봉이라 부른다. 바다 쪽으로 내려서서 좌측으로 돌아가면 석굴(해식동굴)이 있다. 용천굴이라고 부르는데 으레 그렇듯이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천장이 뻥 뚫려 하늘이 그대로 보인다. 이곳으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다른 전설도 있다. 200여 년 전, 나라에 큰 정변이 일어나서 사람들은 피난을 갔단다. 그때 한 아이가 이 동굴에서 7년을 공부해 장원급제를 해 재상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이야기다. 이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동굴을 신성시해 출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에는 올망졸망 배들이 매어 있는 선착장으로 가 본다. 조업을 마친 배들이 들어오고 몇 팀의 낚시꾼들은 부산스럽게 배를 타고 떠난다. 한편에서는 남편의 고깃배가 들어오는지 고개를 내밀고 기다리는 아낙도 있고 일찍부터 막걸리 한 사발로 술추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물망에 걸린 실치 작업에 한창인 어부를 만난다. 이들은 실치 철이 끝날 때까지 자주 바닷가에 나가 작업을 한다. 실치가 적게 잡힐 때는 하루에 한 번 정도 그물을 올리고, 많이 잡힐 때는 수시로 그물을 털 것이다. 내겐 볼거리이지만 어부들에게는 생계의 그물이자 돈 줄 아닌가.
씹힐 틈 없이 살살 녹는 실치회
이제는 ‘당진 8미(味)’ 중 하나로 꼽히는 실치회를 먹어야 할 시간이다. 실치회 한 접시를 시킨다. 아주 작은, 흰색의 물고기가 무더기로 뒤섞인 접시 위로 깨소금, 참기름, 파 등의 양념이 흩뿌려져 있다. 여기에 오이, 깻잎, 쑥갓, 당근 등 갖은 야채에 고추장 양념이 더해지면, 함께 쓱쓱 버무려 입에 넣기만 하면 된다. 실치가 미끄러워 반드시 나무젓가락으로 먹어야 한다. 한입 먹어본다. 작은 물고기라서 입으로 들어가자마자 살살 녹는 식감이 일품이다. 아욱을 넣어 끓여낸 고소한 실치 국에 실치 전, 실치 계란찜까지 배부르게 먹고 나니 실치라는 물고기가 어떤 놈인지 궁금해진다. 실치는 일반적으로 뱅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자료를 찾아보니 ‘베도라치’라는 이름도 있다. 서해에서는 흰베도라치가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실치는 ‘흰베도라치의 새끼’란다. 꽤 긴 이 이름을 외우려면 시간깨나 걸리겠다.
초봄 한 달간 ‘잠깐’ 먹을 수 있는 요리
첫 그물에 걸려드는 실치는 너무 연해서 회로 먹기는 어렵다. 3월 말부터 4월 초순경 적당히 몸집이 커져야 횟감으로 먹을 수 있다. 6월 말까지 잡히지만 4월 중순이 넘으면 뼈가 굵어져 맛을 잃는다. 그래서 실치회를 먹을 수 있는 기간은 약 한 달간으로 눈 깜짝할 새다. 실치는 성질이 급해 잡히면 얼마 안 가 죽어버린다. 당연히 먼 곳까지 운반할 수 없다. 산지에나 와야 싱싱한 회를 먹을 수 있다. 이후부터 잡히는 물고기는 실치포를 만든다. 멸치처럼 데쳐서 말리는 실치포는 칼슘이 풍부한 건강식으로 알려져 있다. 집에 돌아와 장고항에서 구입한 실치포로 밑반찬을 만들어본다. 요리법은 간단하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노릇노릇 구워낸 포를 먹기 좋게 가위로 자르면 된다. 밥하고 같이 먹으면 바삭바삭 과자 같은 고소함이 입안 가득 퍼진다. 과장 없이 놀라운 맛. 장고항의 바다 향이 어느새 따라와 있다.
Travel Data
찾아가는 길 서해안 고속도로→송악IC→38번 국도를 타고 대산 방향으로 진행→석문방조제를 지나 615번 지방도로→5㎞ 정도 직진→장고항으로 우회전.
추천 별미집 용왕횟집, 고향나루 횟집 등을 비롯해 다수의 맛집이 있다. 미식가라면 우렁이 박사는 꼭 들러야 한다. 또 당진 시내의 장춘 닭개장도 유명하다. 장어구이를 먹고 싶다면 옛날돌집장어구이, 원조장어구이를 찾으면 된다.
주변 여행지 삽교천도 좋지만 당진 시내 탐험을 해보자. 봄철 당진 장날(5일, 10일)의 장터 풍경이 정겹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실컷 들을 수 있는 색다른 여행 체험이다. 충남에서는 1위를 차지한 명품 쌀에 쑥이 어우러진 왕쑥송편, 기름을 바르지 않은 호떡을 사들고 남산 건강공원으로 가보자. 산이라기보다는 마치 구릉 같다. 그래도 당진 시내가 한눈에 조망되어 눈앞이 시원하다. 봄철에는 꽃 천국이다. 왕벚꽃이 만발한 봄은 화려함의 극치를 달린다. 당진향교(충청남도기념물 제140호), 의인, 역대 현감, 군수 등의 선덕비, 공적비, 기념비 등 비석문화재 21점의 유적도 있다.
한때 “칼질하러 가자”고 하면 그날은 ‘경양식집에 가서 돈가스 먹는 날’이었다. 요즘은 도시락 반찬이나 분식 정도로 생각하는 음식이 돼버렸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좋은 날 귀하게 먹던 고급 외식 메뉴였다. 멋스럽게 차려입고 나가 돈가스를 썰며 기분을 내던 그 시절의 추억을 재현한 맛집 ‘모단걸응접실’을 찾아갔다.
‘모단걸응접실’은 그 이름에서부터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조선 후기 ‘모단걸’이라 불렸던 신여성들이 서양문물을 즐기던 고급 살롱을 모티브로 했다. 가게 입구에는 ‘우린 내일 큰일을 할 거잖아요. 오늘 꼭 만나요. 그때 먹었던 음식과 술을 준비할게요. 기다릴게요’라는 문구가 보인다.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이 메시지를 읽고, 지하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비밀스러운 아지트로 향하는 듯한 오묘한 기분마저 든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강렬한 청록색 벽과 체스 무늬 바닥, 고풍스러운 샹들리에, 그리고 앤티크한 소파와 테이블이 앙상블을 이룬다. 예스럽지만 세련된 경양식집 특유의 매력이 잘 드러나는 공간이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더불어 테이블마다 놓인 와인 잔과 포크·나이프·스푼이 돈가스의 품위를 더한다. 왕돈가스를 비롯해 함박스테이크나 비후가스 등 메인 메뉴를 주문하면 식전 빵과 수프가 나온다. “빵으로 드릴까요? 밥으로 드릴까요?”라는 정겨운 멘트는 들을 수 없지만, 빵과 밥 모두 즐길 수 있다(밥은 메인 메뉴와 함께 제공). 후춧가루를 톡톡 뿌려 나온 따뜻한 수프에 빵을 곁들여 먹어도 좋지만, 이곳에서는 더 특별하게 즐길 수 있다. 채 썬 양배추에 마요네즈와 케첩을 버무려 만든 옛날식 샐러드, 일명 사라다가 함께 나오기 때문이다. 모닝빵을 반으로 갈라 사라다로 속을 채우면 추억의 사라다빵으로 즐길 수 있다.
메인 메뉴 옛날 왕돈가스(9500원)는 김치와 단무지가 함께 차려진다. 최신식 패밀리레스토랑에서는 보기 힘든 경양식집만의 독특한 구성이다. 케첩 뿌린 반달 모양 감자튀김과 흰쌀밥은 돈가스와 한 그릇에 담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투박한 차림에 더욱 정감이 간다. 새로운 조리법을 쓰는 것보다는 추억의 맛에 초점을 맞췄다. 돈가스 1인분에는 국내산 최상급 돼지 등심 250g이 사용된다. 질 좋은 재료로 만든 든든한 돈가스 한 접시는 예나 지금이나 훌륭한 외식 메뉴로 사랑받고 있다.
돈가스와 함께 경양식 대표 메뉴로 손꼽히는 오리지널 함박스테이크(1만2000원)를 찾는 이들도 많다. 진한 갈색 데미글라스 소스 위에 노란 반숙 달걀을 덮은 도톰한 함박스테이크가 입맛과 눈길을 사로잡는다.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가 함께 나오는 모단걸 세트(4만8000원)와 모단보이 세트(3만6000원)는 샐러드와 음료까지 즐길 수 있는 실속 구성이다. 음료 대신 1만2000원만 추가하면 와인 1병으로 변경할 수 있다. 분위기를 내고 싶은 날, 와인 한잔하며 여유롭게 식사하는 것은 어떨까? 식사보다는 알코올 위주로 즐기고 싶다면 바(bar) 자리를 추천한다. 높은 바 의자에 앉으면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와인을 비롯한 맥주, 보드카, 위스키, 칵테일 등 다양한 주류를 판매하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가게 된다면 치즈 왕돈가스(1만1000원), 카르보나라 함박파스타(1만9000원), 고르곤졸라 버섯 크림 떡볶이(1만6000원) 등 퓨전 메뉴를 즐겨보는 것도 좋겠다.
주소 (샤로수길점) 서울시 관악구 관악로 14길 11 (가로수길점) 서울 강남구 신사동 539-1
모단걸응접실은 샤로수길점과 가로수길점 두 곳에서 운영 중이며, 실내 인테리어와 분위기, 메뉴는 동일하다.
뭐든지 척척, 생각하고 말하는 대로 잘되는 사람을 보면 ‘도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뭘 해도 저렇게 운이 잘 따르나’ 싶다. 부럽다가도 얄밉고, 성공 비법이 뭘까 궁금할 때도 있다. 막걸리 전문 주점 ‘가제트 술집’은 8년 전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변두리 골목에 7평 남짓한 좁디좁은 공간에 문을 열었다. 개업 첫날부터 문전성시를 이루더니 맛집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매스컴도 꽤 탔다. 현재까지 전국 12개 ‘가제트 술집’이 매일 밤 손님맞이를 위해 불을 밝힌다. 스스로도 ‘운이 좋았다’고 평가하는 ‘가제트 술집’의 ‘가제트 오빠(?)’ 김경범(45) 대표. 그의 인생역전 운빨 성공기를 좀 들춰보자.
6년 전 괜찮은 술집이 있다는 지인을 따라 나섰다가 ‘가제트 술집’을 알게 됐다. 그런데 막걸리 집이라니. 홍대 옆 합정동이 지금처럼 번화하지 않을 때였다. 막걸리도 지금처럼 즐겨 찾는 이가 흔치 않았다. 그런데 웬걸? 술집 안은 빈틈없이 손님으로 가득 찼다. 술집이다! 회전율이 빠른 국수집, 밥집도 아닌 술집 대기 줄이 길기도 길었다.
“그때는 그랬어요. 요새는 경기가 안 좋은 것도 있고 본점과 2호점이 인근에 있어서 기다리지는 않아요.”
안경 쓴 얼굴, 수줍게 웃으며 이야기를 꺼내는 이 사람이 바로 가제트 술집 김경범 대표다. 왜 굳이 술집 이름이 ‘가제트 술집’이냐고 묻는다면? 사진을 보면 대충 감이 잡히지 않을까? 그런데 그의 얼굴이 애니메이션 주인공 가제트만큼 낯이 익다. 소소하게나마 TV 드라마와 영화에 얼굴을 비추는 현역 배우이기 때문이다. 최근 MBC 예능 프로그램 ‘2016 무한상사’에도 얼굴을 내비쳤고, SBS 드라마
과 영화 등에도 출연한 바 있다. 막걸리집 사장님이라는 직함은 배우의 삶이 이끌어준 또 다른 삶 중의 하나인 셈이다.
배우 인생에 막걸리 들어오다
인기 배우가 아닌 이상 배우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언제 들어올지 모를 캐스팅 기회 때문에 일정한 일을 갖는 것이 부담스럽다. 배우인 김경범 대표도 술집을 열기 전 여러 직업을 섭렵했다. 연기 선생은 기본이고 오징어 장사, 목수 등 분야도 다양하다. 카타르 현장 취업을 며칠 앞두고 양국 간 마찰로 해외 일자리를 포기했고, 중국 내 유통 사업도 생각했지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단념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것이 막걸리 아이템이었다.
“2009년 9월이었는데 막걸리 박람회를 한다는 소식을 신문으로 접하고 기록해놓았어요. 그런데 마침 박람회 날이 이사하던 날이더라고요. 박람회가 열리는 곳으로 이삿짐 차를 몰고 갔어요. 막걸리 붐이 일어나기 전이었죠. 그런데 막걸리 맛이 정말 다 다른 거예요. 이거다 싶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막걸리 파는 술집을 열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겁 없는 결정이었다.
올(all) 빚, 올(all) 도움으로 가제트 술집 문 열다
“그때 어떻게 시작했나 몰라.”
잠시 회상에 젖은 김경범 대표. 이 사업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난한 배우에게는 대출도 허락되지 않았다.
“대출이 되겠어요? 고맙게도 후배 중 주차 요원이었던 놈 하나가 전세자금담보대출로 1000만원을 꿔줬어요. 그리고 지인한테도 1000만원을 꿨고요.”
오로지 주위 사람의 도움으로 기반을 마련했다. 그저 운이 좋았다고 했다. 전부 다 빚이었고 도움이었다고 했다.
“당시 홍대 근처 상권이 점점 넓어지고 있어서 권리금이 어마어마했어요. 물어보는 곳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갈 수 없었어요. 포기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허름하고 작은 부동산 하나가 보였습니다. 제가 교회를 다니는데 부동산 이름이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더라고요. 그곳에서 지금의 가제트 술집 본점 자리를 안내해줬습니다.”
체계적인 상권 조사도 없었다. 가끔 가는 근처 닭집이 월 800만원 수익을 벌어들인다는 게 정보의 전부였다. 그리고 인테리어가 관건이었다. 당시 빈티지 인테리어로 꽤 유명했던 시나브로 자매가 가제트 술집의 대표 분위기를 연출했다.
“메일을 보냈어요. 구구절절했죠. 시골에서 상경해 연극을 하다 보니 먹고는 살아야겠고, 절박한 심정으로 부탁드립니다, 아니 감히 여쭤보겠다면서 인테리어를 부탁했어요. 솔직히 한 명은 반대, 한 명은 찬성했다더라고요. 결국 저랑 만나고 난 다음에 해주기로 하셨어요. 솔직히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으로 해주셨어요. 빈티지 핸드메이드라는 것이 작품과 상업의 중간인데 미안하고 또 너무 고마웠습니다.”
한 달에 80만원만 벌면 좋겠다
2009년 11월, 가제트 술집이 드디어 오픈했다. 열자마자 사람들이 계속 들어왔다. 사람들이 줄을 서는지도 처음에는 몰랐다.
“지금도 전화가 와요. 웨이팅(대기) 시간 얼마나 걸리느냐고요. 신기해요, 옛날 생각하면. 그런데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잘된 거 같아요.”
한 달에 딱 80만원 벌 생각으로 가게를 열었다. 돈 욕심이 없었다. 80만원 벌려고 한 사람이 150만원 버니까 너무 좋았다.
“손님이 앉아서 죽치는 거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즐겁게 하니까 잘된 거예요.”
김경범 대표는 1년 반 만에 지인에게 빌렸던 돈을 다 갚았다. 그런데 지금 누가 자기처럼 창업한다고 하면 뜯어 말린다. 본인은 운이 좋았던 것이지 빚은 원래 못 갚는 것이 빚이기 때문이다. 배우의 길을 잠시 접어두고 김경범 대표가 얻은 것은 너무 많다. 부인이 생겼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가정을 이뤘다. 창업을 열망하는 후배, 현역 은퇴자의 조언자로 나서 창업을 도왔다. 그래서 10개의 가맹점과 2개의 직영점을 가진 이른바 프랜차이즈 가제트 술집으로 거듭났다.
평균대 위를 오르다, 배우와 가제트 사이
반면, 김경범 대표는 무대와 촬영 현장을 그리워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배우로서의 삶이 까마득히 멀어져 간 것 같아 부쩍 아쉽다. 그래서 요즘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인터뷰가 잡혀 있던 날도 중국어 수업을 마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중국어는 솔직히 반반이에요. 배우적인 측면과 비즈니스적 측면이 있어요. 솔직히 내 생활에서 배우 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오디션보다는 감독, 작가, 스태프를 자주 만나야 해요. 지금 사드문제 때문에 한류가 단절됐다지만 언젠가 다시 좋아질 거잖아요. 그때 김경범이라는 배우가 중국어를 할 줄 안다고 하면 캐스팅에서 유리하지 않을까요(웃음)? 그리고 사업적인 면에서는 먹고살아야 하잖아요. 내가 전문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제트가 계속 승승장구할 거란 보장도 없고 말이죠. 블루오션인 중국에 치킨도 삼겹살도 아닌 막걸리 전문점은 어떨까. 강남이 아닌 합정동 뒷골목에 막걸리라는 아이디어를 들고 들어왔던 것처럼요.”
물론 사업을 하면서 배우로서의 센스가 다양하게 발휘됐다. 가게를 운영하는 것도 하나의 기획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김경범 대표가 맛으로 손님을 대하는 자세가 꼭 무대 위 배우의 모습과 닮아 있다.
“대다수 음식점 주인이 자기 음식은 다 맛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에요. 관객이 재미없으면 재미없는 건데 우기면 무슨 소용이에요. 관객에게 연기로서 만족감을 주듯, 납득할 만한 맛으로 손님에게 다가가야죠. 계속 손님의 입맛을 맞춰간 것이 주요했던 거 같아요. 최고의 맛이 아니라 만족감으로 사람 마음을 움직이잖아요. 공연할 때 배우와 관객과의 관계처럼 손님이 과연 맛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지속적으로 고민해요.”
그렇다면 김경범 대표의 앞으로의 계획은? 커가는 아이와 화가인 부인을 위해 사는 것은 기본이다. 그리고 이제 슬슬 자신의 꿈을 위해 다시 한 발짝 다가서고 싶다고 한다. 1인 미디어에 대한 관심도 오래전부터 있었다. 굳이 배우를 하지 않더라도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다가갈 계획이라고.
“지금도 차 안에 유튜브에 관한 책이 있어요. 예전에는 돈을 좀 무시했는데 이제는 더 열심히 벌어보려고요. 배우가 꼭 아니어도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밑바닥 배우 인생에서 우리 동네 뒷골목 세련된 막걸리 집으로 손님 취향 제대로 저격한 김경범 대표. 이제 다시금 꿈의 무대로 향할 채비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운빨을 모으고 모아 또 한 번 날려보겠다는 홈런 한방! 그럼 두 손 모아 기다려볼까?
지난해 담가두었던 김장 김치가 맞춤하게 익어가는 때다. 잘 익은 김치는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식재료가 된다. 새콤한 맛이 살짝 도는 포기김치에 두툼한 생고기를 넣고 푹 쪄낸 김치찜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 요리다. 인공조미료를 넣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재료와 김치만으로 맛을 내는 김치찜 맛집 ‘더 김칫독’을 찾아갔다.
모던한 분위기에서 즐기는 김치찜의 깊은 맛
김치찜은 김치찌개, 된장찌개처럼 부담 없이 즐겨 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꼭 전문점이 아니더라도 차림표에 올리는 가게가 많다. 간혹 전문으로 하는 맛집을 찾아가 보면 대개 오래된 식당이라 정겨움은 더할 수 있지만, 깔끔하다는 인상을 느끼기는 어렵다. 경기도 일산 킨텍스(KINTEX) 인근에 자리 잡은 ‘더 김칫독’은 소박하면서도 모던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곳이다. 더 김칫독의 뚜껑을 연 지는 이제 3년 차이지만, 그 맛만큼은 시골 할머니의 손맛처럼 깊고 진하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더 김칫독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장독대가 옹기종기 모여 맞이한다. 곳곳에 뒤주나 도자기 소품 등이 현대식 인테리어와 어우러져 편안한 분위기를 낸다.
더 김칫독의 김치찜은 100일간 숙성한 김치를 사용하고 국물이 넉넉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묵은지를 사용해 자박하게 조리하는 김치찜과 비교했을 때, 한눈에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묵은지를 쓰게 되면 신맛과 짠맛이 강하기 때문에 물에 여러 번 헹구거나 설탕을 많이 첨가해 자극적인 맛을 줄이게 된다. 충청도식으로 절인 이곳 김치는 평창 고랭지 배추에 양념을 적게 넣어 짠맛이 덜하고, 100일 동안만 숙성하기 때문에 신맛도 강하지 않다. 아삭한 식감이 남아 있는 김치에 8년 숙성한 오미자 효소와 설탕을 넣지 않고 자연 발효시킨 감식초, 우리 콩으로 빚어 만든 된장·간장, 국내산 멸치·꽃새우·다시마 등으로 간을 맞춘다. 설탕을 비롯한 인공조미료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으로 차별화를 뒀다.
여기에 제주산 돼지고기(삼겹·전지·등갈비)가 들어간다. 처음부터 김치와 고기를 넣고 한꺼번에 끓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재료를 따로 삶고 손님상에 내기 전 육수와 함께 부어서 내놓는다. 육수를 넉넉하게 넣고 서서히 끓여가며 먹는데, 초반에는 깔끔하고 시원한 국물 맛이 나고 육수가 졸아들수록 깊고 진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가게에서 직접 들기름에 구운 김 반찬이나 계란말이, 두부부침 등을 곁들여도 좋고 떡, 라면, 만두 등 사리를 넣어도 된다.
단골 사이에서 김치찜(1인분 1만원) 못지않은 인기를 자랑하는 메뉴가 있다. 바로 갓김치찜(1인분 1만2000원)이다. 포기김치와 마찬가지로 100일 동안 숙성한 전남 여수 갓김치가 들어가 독특한 풍미를 자아낸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삶은 우거지를 넣는다는 것인데, 보들보들하게 익은 우거지에서 구수한 맛이 우러나 국물 맛이 더욱 깊다. 김치찜을 주문하면 밑반찬과 함께 쌈 채소가 나온다. 두툼하게 잘라 넣은 우수한 품질의 제주산 돼지고기를 김치와 곁들여 먹기도 하지만 쌈을 싸서 먹으면 색다르게 즐길 수 있다. 맛 좋은 한식에는 밥맛 또한 중요하다. 국내산 햅쌀과 흑미를 사용해 조금씩 여러 번 나누어 밥을 지어 최대한 갓 지은 밥맛을 선사하고자 노력한다는 주인장이다.
김치찜을 끓이는 냄비도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전골냄비가 아니라 한국 전통의 방짜유기를 사용한다. 녹이 슬지 않게 닦고 관리하는 것이 번거롭지만, 그만큼 음식 맛을 좋게 하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고. 김치찜의 쿰쿰한 냄새가 옷에 배지 않도록 옷장을 따로 마련한 주인장의 세심한 배려도 돋보인다.
주소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호수로 838번길 8-4
문의 02-334-6856 (매일 10:30~23:00)
점심시간에 가면 돼지고기김치찌개를 비롯해 참치김치찌개, 꽁치김치찌개 등의 찌개류를 맛볼 수 있고, 저녁에는 숙성한 제주산 오겹살, 목살, 앞다릿살 구이류를 즐길 수 있다.
은퇴 이후 인생 2막을 삶의 황금기로 만들 것인가, 황혼기로 만들 것인가. 황혼기와 황금기를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 ‘충분히 쓸 만큼 모아놓고 쟁여놓은’ 돈일까? 그보다 중요하고도 필요한 것은 인생을 재설계할 수 있는 은퇴 멘탈 갑, 즉 새로운 은퇴 마인드다. 과거 경력, 직장, 직책의 아우라를 들어내고, 자기의 진짜 정체성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외칠 수 있다.
100세 시대를 앞둔 요즘, 은퇴 이후의 시기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인생의 3분의 1을 살아내야 하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다. 그래서 우리는 은퇴를 충격이 아닌 감격으로 맞고 싶다. 끌끌 혀를 차며 밸이 배배 꼬인 채 훈수나 푼수를 떠는 뒷방 노인이 아닌 적극 참여하는 현장의 선수로 사는 롤모델 인생 선배를 만나고 싶다.
퇴직 5년 차가 아니라 진짜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취업 5년 차’라는 박시호(63)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을 만났다. 인디언 핑크색 니트 상의에 옅은 브라운색 패딩 점퍼, 흰 바지 그리고 빨간색 운동화에 무스로 바짝 세운 밤톨머리 헤어스타일을 하고 나타난 그는 과거 CEO의 물이 쏙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에게선 인터뷰 약속 장소인 ‘신촌’의 청춘물결에서 한 치도 뒤처지지 않는 것을 넘어 자유인의 바람마저 느껴졌다. 2003년부터 행복과 관련한 앤솔러지를 사진에 담아 매일 아침 이메일로 배달하던 일은 이제 취미와 봉사에서 ‘주업’으로 승격됐다. 그 외 강연과 원고 쓰기, 사진 찍기 등등 요즘엔 여행기획가로서 행복을 오프(0ff)에서 실현하는 일에까지 관심사를 확장하고 있다. 그의 하루 24시간은 풍요롭다.
은퇴 괴담은 현실적으로 ‘밥’ 이야기로 시작하곤 합니다.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퇴직 가장의 현실을 표현한 단어 중에 ‘삼식이(집에서 삼시세끼를 먹는 가장)’란 호칭이 있는데요. 많은 퇴직 가장들이 “이러려고 지금까지 뼛골 빠지게 일했나”라며 피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감정계좌를 깡통계좌로 만들어놓고 만기일 됐다고 복리로 쳐서 가장 높게 대우해달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집밥만 우기지 말고 칼국수집이든 냉면집이든 같이 맛집 순례라도 해보세요. 찜질방 같이 가서 놀자고 해보세요. 절로 삼식님이 될 겁니다(웃음). 가장이 건강해야 집안을 끌고 간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부인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집안이 유지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남편 혼자 행복하고 즐거우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퇴직 이후 집에서 대우받는 것은 남편 하기 나름이지요.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부부입니다.”
그는 “체력관리한다며 주중, 주말 가리지 않고 매일 등산 가던 친구가 있었다”며 부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석에 누운 후 그 친구가 “부인이 건강할 때 산에 같이 갈걸, 왜 나 혼자 갔을까” 하며 땅을 치고 후회하더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행복은 거창하고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작은 데, 평범한 일상에, 함께 나누는 데 있다”고 말하는 그는 여러 일정 중에서 부인과 맛집 순례 후 하는 공원산책이 그날의 하이라이트라고 덧붙였다. 신혼 때처럼 전기가 찌르르 통하지는 않지만 40년 이상 살아온 인생 동지와 함께하는 ‘침묵의 공유’야말로 가장 든든한 의지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현직에 계실 때보다 더 활기차고 멋져 보이십니다. 부부 금실에서 비롯된 에너지 말고 비결이 있습니까.
“현직에 있을 때보다 몸무게를 10kg 정도 뺐어요. 회식이나 약속을 줄이고 운동을 하니 절로 빠지더군요. 제가 BMW족입니다. 버스(Bus)-지하철(Metro)-워킹(Walking),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많이 걷습니다. AMP 동기 부부동반 모임에 갔는데 집사람이 아무 정보 없이도 동기들 중 현직, 퇴직파를 족집게처럼 맞히더군요. 은퇴하면 현직 때의 아우라가 사라져 갈기털 빠진 사자처럼 되기 쉽습니다. 퇴직할수록 용모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퇴직하니 공식적 일 없다고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거나 등산복을 평상복으로 입고 다니면 안 됩니다. 오히려 더 산뜻하게,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어야 해요. 뚝배기보다 장맛이 아니라 겉볼안이 더 맞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이미지 판단이 6초 만에 끝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전엔 아우라가 우러났다면 이제는 만들어야 한다고나 할까요. 퇴직할수록 의관이 생명이란 게 제 지론입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탓하지 말고, 먼저 남이 알아주도록 갖춰 입을 필요가 있습니다.”
은퇴 준비에도 선행학습이 필요할까요?
“일관된 인생 계획을 세워서 현직 시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의미 있는 은퇴의 삶을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즐기기 위해서라도. 은퇴 이후의 공부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쫓기는 공부가 아닙니다.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것, 좋아하는 것 뭐든 좋습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뛰어오던 트랙을 벗어나는 걸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을 없애야 합니다. 등산도 높은 산을 오르려면 동네 산부터 오르며 준비하지 않습니까. 직장생활을 하면서 은퇴 후 뭘 하면 좋을까 늘 염두에 두고 그 일을 조금씩 준비해둬야 합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준을 향해 공부하십시오. ‘지금 이 나이에…’ 또는 ‘시간이 없다’ 말하지만 그것은 모두 새로운 것을 배우기 싫어해서 하는 핑계일 뿐입니다. 취미든 기술이든 뭐든 배움은 운명까지도 바꿉니다. 공부를 하고 도전하다 보면 전문가 반열에 오르고, 그것이 새로운 세상의 지평을 열게 해줍니다.”
실제로 미국의 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은퇴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대답한 은퇴자가 41%나 되고, 대부분 단조롭고 지겨운 일상과 목적 상실 및 지적 자극의 결여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은퇴에서 재정 설계 못지않게 필요한 것이 시간 설계, 즉 은퇴 후 동기 설계임을 보여주는 통계다.
행복이란 것이 요즘에야 흔한 담론입니다만. 행복편지를 시작한 2003년에는 요즘처럼 유행하는 화두가 아니었을 듯한데요.
“저도 욕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정치도 해보고 싶었고, 돈도 많이 벌어보고 싶었지요. 그런데 특별조사부장을 하며 정치인, 재벌 총수들의 영고성쇠한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지은 고충 건물에서 피고인으로 수사를 받아야 하는 기업 총수를 보며 권력, 금력의 무상함을 보았습니다. 또 부도가 나 자살을 한 금융인,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표변하는 인심의 허망함을 한꺼번에 압축해봤어요. 권력도 금력도 아닌 세상에서 진정으로 변치 않고 행복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지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에 미쳤습니다. 저의 어렸을 때부터의 꿈인 그림그리기를 시작했지요. 그러다 점차 재능의 한계를 느껴 사진으로 바꾸게 된 것이고요.”
그는 사진을 공부하면서 행복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쳇바퀴 같은 삶을 바쁘게 살던 그가 ‘저녁이 있는 삶, 주말이 있는 삶’을 애써 찾으며 여유를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번 주엔 이 꽃을 이런저런 각도에서 찍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단다. 또 사진을 찍으면서부터는 ‘집에 꿀단지를 묻어놓은 것처럼’ 퇴근을 기다렸고, 주말 새벽마다 강남고속터미널에 가서 꽃을 사는 행복한 마음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단다. 지인들에게 꽃 사진 선물을 하고, 그들이 감사인사를 전해오고, 급기야 행복편지까지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인 700명 정도를 엄선해 보내는 행복편지는 감동적인 내용으로 ‘작지만 강한’ 행복 공유의 플랫폼이 됐다.
직장 후배들에겐 멘토로 여전히 환영받는 ‘퇴직 상사’라는 말씀 들었습니다. 그 비결이 있습니까? 어떤 분은 퇴직하니 알던 사람들 중 절반은 모른 척하며 떨어져 나간다고 ‘동선하로(冬扇夏爐, 여름 난로와 겨울 부채라는 뜻으로 철에 맞지 않는 물건을 이르는 말)’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시던데요.
“하하. 저는 연락 안 해도, 거절당해도 고까워하지 않습니다. 또 조금도 불편하게 하지 않고요. 그러니 오히려 환영받네요. 잘해주면 고맙지만, 못 해주는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고까운 마음이 전혀 안 생깁니다. 상대도 부담스러워하지 않으니 오히려 더 찾더라고요. 부하직원들이 초대하면 병권을 맡깁니다. 예컨대 동석할 사람을 상대에게 정하라고 선택권을 주는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정해 만나자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또 그 밥에 그 나물인 예전 사람들만 만나면 재미없는데 후배들이 새로운 사람 소개해주니 저도 좋지요. 폐쇄성을 나부터 없애야 합니다. 자기를 열고 세상에 맞추면 세상살이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자기를 낮추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또 상대가 누구든 불편하지 않도록 마음을 더 내어 배려해주는 것이 존중받는 비결입니다.”
박 이사장께서는 퇴직 후 제일 먼저 할 일로 명함 만들기부터 권하신다면서요.
“은퇴한 사람들이 모임에 나가면 제일 먼저 당황하는 게 명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명함이 없으면 몸을 꼬며 온갖 군말을 갖다 붙여요. ‘제가 회사를 그만둔 지 얼마 안 돼서요’ 등등. 스스로도 초라하고 서로 당황하기 쉬워요. 명함을 만들려고 구차한 자리 부탁하기도 하거든요. 당당한 명함은 당당한 자기정체성과 통합니다. 이제 과거의 후광은 벗어던지고 자기정체성을 드러내는 명함을 만드는 게 필요합니다. 하다못해 ○○를 연구하는 사람 ○○○라는 명함이면 어떻습니까. 말로 구구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자기정체성을 잘 드러내줄 수 있는 한 줄짜리 문장을 만들어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초라해질 필요 없습니다. 명함 주고받는 게 부담스럽고 부끄러워지면 대외활동은 끝나는 겁니다. 그만큼 중요해요. 아날로그 구세대에겐 직책과 직장이 필수이지만 젊은 디지털 세대는 그보다는 업, 좋아하는 일, 하고 있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사진이면 사진, 서예이면 서예, ‘이것에 대해선 나한테 물어봐. 내가 설명해줄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전문 분야가 있다면 더 좋고요.”
박시호 이사장의 명함엔 사진가,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이라는 직함과 함께 연락처(전화번호와 이메일)가 간결하게 들어가 있다.
퇴직 후 부딪히게 되는 어려운 점 중엔 경조비 부담도 빠지지 않더군요. 국민연금 100만원 이상을 받는 사람들의 가계부에서 경조비 비중이 16%나 됩니다. 의료비보다 높은 비중입니다.
“퇴직 상태에서 대소사가 한꺼번에 밀려들면 아무래도 부담감이 커질 수밖에 없는데요. 은퇴한 사람들의 고민이 ‘경조사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이지요. 체면과 얽히고설킨 과거의 인연 때문이지요. 저는 기분, 체면보다 기준을 분명히 합니다. 과거의 주고받은 인연보다 1년간의 교류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아이들 결혼 때의 방명록도 그 자리에서 없애버렸습니다. 1년 동안 만나지 않은 사람은 교류가 없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연락이 와도 경조사에 가지 않습니다. 정말 필요한 사람만 부르고, 성의만큼 성의를 표하자. 허례허식은 없애자는 게 제 주의랍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돈을 벌었지만 이제는 다르지 않습니까? 동창회 단체 공지에 올랐다고, 안 하면 욕먹는다고 찜찜해하면서 자주 보지도 않는 사람의 경조사까지 챙겨야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주위에서 욕을 먹기도 해요. 그러나 욕을 먹더라도 자신의 기준을 지켜나가는 맷집과 용기도 은퇴 멘탈 갑의 마인드 중 하나입니다.”
박시호 이사장은 은퇴지능개발의 핵심 키워드로 배움을 꼽았다. 기술이든 지식이든 뭐든 배우고, 남의 눈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없도록 하는 것. 그는 “좋은 사람과 맛있는 것을 나눠 먹을 때 행복을 느낀다”며 이 모든 것을 합친 것이 여행이라고 했다. 앞으로 여행 프로그램도 꾸준히 운영할 계획이라고. 지난 경험보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할 때 그는 더 설레면서 반짝였다.
은퇴 이후 새로운 삶의 설계와 도전도 마찬가지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 신세계에 도전할 수 있다. 마음속에서 불을 뿜는 두려움의 용을 처단하고…. 박시호 이사장이 말한 ‘배움’은 구태의연함을 처단하고, 마음속에서 불을 뿜는 용을 무찌르는 날카로운 무기가 될 것이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찬바람 부는 겨울이면 뜨끈뜨끈한 국물이 떠오른다. 특히 모임이 잦은 연말에는 함께 즐기기 좋은 샤브샤브가 제격이다. 고기와 함께 채소와 버섯 등을 풍부하게 먹을 수 있어 부담 없이 즐긴다는 것도 매력. 여기에 우리 몸에 좋은 산약초까지 곁들인다면 어떨까? 산약초 샤브샤브 맛집 ‘솔내음’을 소개한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서대산 기운을 가득 담은 자연 한 상
충청남도 최고봉인 서대산(西臺山) 아래 자리 잡은 ‘솔내음’ 입구에는 그 이름처럼 커다란 소나무가 우거져 솔향기가 솔솔 번지는 듯하다. 도심과 떨어져 있어 한적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금산군에서 지정한 제1호 금산약초명품전문음식점으로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산약초 요리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어 멀리서 찾아오는 단골도 많다.
매일 사용하는 식재료는 그 전날 서대산 고산지대(700m)에서 직접 재배한 친환경 약초들을 주인장이 직접 채집해 마련한다. 산마늘, 부지깽이, 두메부추, 오가피 순, 당귀, 곰취, 삼채 등 다양한 산약초가 계절마다 조금씩 다르게 올라온다. 싱싱한 재료와 함께 직접 담근 매실 효소와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은 요리의 맛을 더해준다.
산약초샤브샤브(1인분 2만원)는 8가지 내외의 산약초와 질 좋은 한우, 백만송이·황금송이 등 다양한 버섯을 즐길 수 있다. 약초로 맛을 낸 육수에 갖가지 재료를 취향에 맞게 넣어가며 천천히 음미한다. 날것으로 먹으면 쌉쌀한 약초들이 육수에 살짝 데워지면 한결 부드럽고 달큰한 맛을 낸다. 육수 또한 각각의 재료가 내뿜는 맛을 고루 품어 시간이 지날수록 뒷맛이 깊고 진해진다.
데친 산약초와 버섯, 고기 등은 특제 소스에 찍어 먹거나 산약초 장아찌와 곁들여 맛볼 것을 추천한다. 두메부추·명이·오가피 장아찌와 제철 약초와 나물로 만든 기본 반찬이 입맛을 돋운다. 샤브샤브 재료를 다 먹고 나면 산부추칼국수 사리를 넣어 끓인다. 일반 면과 다르게 산부추즙을 넣어 반죽해 진한 녹색을 띤다. 샤브샤브만으로 부족하다면 가죽전(1만원)이나 가죽비빔밥(1만원)을 곁들여보자. ‘웬 가죽인가?’라는 생각에 의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용하는 가죽은 우리가 떠올리는 동물의 껍질인 아닌, 참죽나무의 잎이다. 솔내음이 있는 금산군의 제사상에 빠지지 않고 올라간다는 가죽은 독을 제거하고 염증을 없애는 효과가 있다. 가죽을 우린 물로 밥을 짓고, 가죽 튀김과 가죽 가루를 넣어 만든 고추장이 올라간 가죽비빔밥은 금산약초 명품음식 중 하나다.
가죽과 더불어 이곳의 주요 산약초로 꼽히는 두메부추는 일반 부추보다 잎이 두껍고 끝이 둥그스름한 것이 특징이다. 날것 그대로의 맛은 알싸하고 달달한데, 두툼한 부분을 잘라 잡아당기면 미끌미끌한 진액이 늘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뮤신 성분이 다량 함유돼 있기 때문인데, 이외에도 사포닌과 비타민 등이 풍부해 위와 신장기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아울러 어혈을 없애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성질이 있어 겨울철에 즐겨 먹으면 좋은 산약초다.
솔내음에 가면 꼭 찾아봐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서대산 일부를 돌아볼 수 있는 ‘모노레일’이다. 가게에서 5분 남짓 거리에 있는 모노레일은 주인장이 전문가와 함께 직접 고안한 것으로 약초를 채집하러 갈 때 이용한다. 손님에게도 개방한다고 하니 원한다면 모노레일을 타고 산약초를 구경할 수 있다(1인 1만원). 안전하면서도 볼거리가 있는 코스로 짜여 있어 식사 후 재미 삼아 휴식 삼아 즐기기 좋다. 주인장은 “직접 모노레일을 타고 돌아본 자연산 약초를 식탁 위에서 만나는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한 서비스”라고 설명했다. 모노레일을 타고 나면 인근 서대산 약용자연휴양림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가는 길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홍골1길 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