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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1만4000봉을 향해 오늘도 산을 오르는 70대 산사나이 문정남
- 취재를 위해 전화를 걸 때마다 그는 늘 산, 아니면 제주 오름에 있었다. 매일같이 산에 오르고, 등산했던 기록을 정리하면서 일과를 마무리하는 문정남(文政男·75)씨. 이제 그만 올라도 될 텐데, 70대 산사나이는 아침이 되면 또 새로운 산봉우리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선생님, 시내 가까운 산으로 가면 안 될까요?” 한 TV 프로그램에서 전투적으로 등산하는 문정남씨의 모습을 보고 난 후였다. 겨울 산을 오르는데 카메라 감독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혹시 나의 미래 같은 불길함. 인터뷰만 좀 하면 되지 않을까? 힘든 산은 제발 피하고 싶어 조심스럽게 여쭸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NO! “나는 갔던 산은 가지 않아요.” 조율을 거듭해 만난 장소는 경기도 남양주의 천마산역(경춘선). 나름 등산복장은 완벽하게 준비해 갔다고 생각했다. 812m 천마산 정상에 올랐을 때. 내 손에는 문정남씨의 스틱이 들려져 있었다. 문정남씨는 매일 산을 오르는 산사나이다. 지원해주는 스폰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산이 좋아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1000봉, 4000봉, 1만봉, 1만3000봉을 올랐다. 취재를 위해 만났던 4월 4일에도 마치고개 봉우리 3곳을 올랐다. 최근에는 제주도에 1주일 있으면서 50여 개 오름을 다녀왔다. 제주에 360여 개의 오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금까지 오른 오름만 360개. 제주 오름은 다 올라갔다고 해도 된다. 육지에서도 이제 오를 봉우리가 몇 안 된다고 했다. 모두 쉽지 않은 코스만 남았다. 문정남씨는 광신정보상업고등학교에서 화학교사로 30년 가까이 재직하다 2000년 2월에 명예퇴직했다. 사실 퇴직 전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생활지도 선생을 했었어요. 얼마나 신경 쓸 일이 많은지. 학교 가면 어떤 학생과 싸워야 하나 했어요. 요즘이었으면 제가 아마 학생들한테 많이 맞았을 겁니다. 그때만 해도 학생들이 좀 순수했다는데 선생님들을 얼마나 골치 아프게 했는지 몰라요.” 학교를 그만두고 나오니까 완전히 해방된 느낌이었다고 한다. 퇴직 후 문정남씨는 산에만 다녔다. 그런데 1년 뒤 암 증세가 나타났다. 원인은 스트레스였다. “이런 얘기를 학생들이 들으면 서운할지 모르겠지만 생활지도 선생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그게 암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문정남씨는 학생지도 교사를 하는 동안 학생들에게 무섭게 보이고 독하게 행동해야 했다고. “처음에는 아프지도 않고 통증도 없었어요.” 한창 산에 열심히 다닐 때였다. 하루에 7~8시간씩 산행을 했는데 체중이 3개월 만에 6kg이 줄었다. 그게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직장암 2기에서 3기로 넘어가는 단계였다. 죽음의 문 앞에 선 문정남씨. 그런데 등산을 중단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죽어도 산에서 죽지 뭐 집안에서 죽냐 생각했어요.” 문정남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항암치료를 받는 6개월 동안에도 계속 산에 올랐다. 병원에는 그저 산책한다는 말만 하고 산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항암치료 후 또 한 번의 수술을 받고 완치 판정을 받았다. “직장암이 낫고 3년 후에 병원에서 암이 간으로 전이됐다 하더군요. 정말 그때는 죽는 줄 알았죠. 그런데 간암 수술 날짜를 정해놓고 마지막으로 CT 촬영을 했는데, 암 흔적이 사라지고 없었어요.” 문정남씨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지만 의사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데 물어볼 이유가 없었다. 그 뒤 정말 열심히 산에 오르고 또 올랐다. “나는 좋은 아빠가 아니었습니다” 퇴직 후 매일 산을 오르는 아버지. 자식들과는 가깝게 지내왔는지도 궁금했다. 산을 다니면서 별다른 취미도 없고 사람을 만나는 일도 없다는데 자식들과 관계는 어떨까? “2남1녀를 뒀는데 다 시집, 장가갔습니다. 나는 그렇게 인기 있는 아버지가 아니었어요. 엄부자모(嚴父慈母) 즉, 아버지는 엄해야 하고 어머니는 자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때는 꼭 부모가 그래야 하는지 알았어요. 물론 지금은 편합니다.” 자식들에게 못 다 준 사랑을 손자와 손녀에게 쏟아 붓는다는 문정남씨. 아이들과 잘 노는 모습을 보면 아들이 “아버지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느냐”고 물어본다고. 키울 때 사랑을 많이 주지 않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단다. 가족 얘기가 나오니 자연스럽게 오랜 시간 함께해준 부인에 대한 고마움도 나눌 수 있었다. “병원에서 내 병의 근원이 스트레스라고 했잖아요. 의사도 이제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 뒤 집안의 모든 일을 아내에게 맡겼고 저 또한 참견하지 않습니다.” 문정남씨는 본인이 하는 일은 무조건 반대하지 말아달라고 아내에게 당부했다.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고, 남편이 등산갈 때 도시락 싸주는 일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도와준 아내가 1만3000봉 오른 산사나이를 만든 일등공신이다. 기록의 왕 산행을 하다 문정남씨가 갑자기 마른 숲이 우거진 곳으로 들어갔다. 1973년도에 만든 국가기준점(삼각점)이었다. 그는 삼각점에 쓰여 있는 내용들을 메모지에 꼼꼼하게 써내려갔다. “산에 다니면서 이런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그냥 왔다만 간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산행을 할 때마다 가는 과정을 전부 기록합니다. 출발 시간부터 어디를 지나왔고 또 몇 시에 도착했는지 삼각점 좌표 등도 적고 말입니다.” 이렇게 메모한 것들은 집으로 가서 컴퓨터에 기록해 놓는다. 문정남씨가 산에 있는 동안 모든 시간이 기록이고 역사였다. 1만4000봉까지는 이젠 슬슬 쉬면서 문정남씨는 산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60세부터 지금까지 자연경관을 느끼기보다 봉우리 하나하나 정복하는 심정으로 올랐다. 어떤 날은 하루에 봉우리 10개를 오른 때도 있었다. 산 밑에서 아침 7시쯤 시작해 오후 5시까지 줄곤 봉우리만 찾아다녔다. 어떤 때는 아침 7시에 시작해 저녁 7시까지 걷기만 했다. 문정남씨가 똑같은 산을 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이는 바로 기록 때문이었다. 똑같은 산을 10번을 가나 20번을 가나 기록에는 한 봉우리로 표시하기 때문에 굳이 갈 필요를 못 느꼈던 것이다. “지금 공식적으로 어디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1만3000여 봉을 오른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올해는 산을 얼마나 탈 것인지 계획을 물었다. 이제는 조금 여유 있게 밀도를 낮출 생각이라고 한다. “이제 오를 산이 거의 없어요. 지금까지는 기록을 위해 산행을 했다면 이제는 좀 즐겼으면 합니다. 갔던 산도 좀 가고 말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다닐 것이냐고 물었다. 연세가 많기에 관절도 걱정됐다. “다행히 타고난 관절 때문에 먹어본 약은 없어요. 아마 산을 오르는 것을 그만두는 날은 무릎에 고장이 왔을 때가 아닐까요? 내 다리가 허락하는 한 다니고 싶어요. 다리가 성하지 않으면 안 하는게 아니라 못 가는거지.” 등산은 곧 인생이다 인터뷰가 끝났을 때 길은 오직 하나였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꺾어질 듯한 절벽을 기어올라가야 했다. 문정남씨와 멀어져 뒷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무조건 걸어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됐다.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또 산을 오르다 보니 812m 정상에 다다랐다. 문정남씨에게 숨을 헐떡이며 “도망칠 곳도 없고, 무조건 올라가야 하니 산을 오르는 게 꼭 인생 같다”는 말을 건넸다. 그랬더니 문정남씨가 TV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강연한 주제라고 했다. “등산은 인생살이랑 똑같아요. 등산할 때 처음은 순탄하게 시작하잖아요. 높은 데 오르다 절벽을 만날 때도 있고, 평탄한 길이 있고 또 좋은 길을 만날 수 있잖아요.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서히 내리막이 있을 수도 있어요. 아닐 수도 있어요. 언제 교통사고가 날지, 실연을 할지, 나처럼 암에 걸릴지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절벽을 만났다고 생각하다 보면 절벽 뒤편에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잖아요.” 잠깐이었지만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동안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넘어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문정남씨와는 하산하는 길목에서 헤어졌다. 안 가본 봉우리가 근처에 있어서 가보고 싶다 했다. 분명 인터뷰 때는 느릿하게 등산하고 싶다더니 아직은 아닌가보다. 언제나 건강하시길 기원하고 1만4000봉 달성은 제발 좀 천천히 이루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 2016-05-23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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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건강]나의 버킷리스트 하나 헌혈금장을 받다
- 인생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헌혈 50회를 달성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로부터 금장까지 받았다. 이 소원을 달성하면서 필자를 건강하게 낳아주시고 별 탈 없이 길러주신 부모님께 제일 고마웠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까짓 것을 감히 버킷리스트에 올리나’ 하고 콧방귀 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적혈구인 헤모글로빈이 적게 생성돼 전혈비중이 낮은(?) 필자에겐 매우 소중한 기록이다. 헌혈하기 위해 ‘헌혈의 집’에 가면 헌혈자의 건강 상태를 체크한다. 주로 체중, 혈압, 헌혈 주기 준수와 위험지역(외국과 국내지역 모두 포함) 방문(숙박) 여부를 확인한다. 수십 개 항목을 봐서 건강하지 않은 사람의 헌혈은 받아주지 않는다. 특히 건강한 피인지 전혈비중을 체크하는데 그 수치가 기준치인 1.052에 미달하면 불합격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기준치에 미달해 불합격을 많이 받았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헌혈하러 가서 못하고 돌아올 때의 그 씁쓸함과 실체 없는 누군가에 대한 분노는 길바닥에 있는 깡통이라고 걷어차야 풀렸다. 가끔은 ‘‘헌혈의 집’ 간호사로부터 나이도 있는데 헌혈보다 잡숫는 식사에 신경을 좀 쓰라는 조언을 들을 때면 얼굴이 붉어졌다. 불합격되면 철분을 보충한다고 시장통에 가서 선지를 듬뿍 넣은 선지 순댓국이나 순대를 사 먹고 병원에 가서 종합 진찰도 받아 철분제도 사 먹어 봤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다. 마라톤도 하고 테니스도 하면서 남들보다 체력이 절대 약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평소 필자 혈액의 철분 부족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나의 체질이라고만 믿고 있다. 이렇게 내가 헌혈하는 데 부적합(?)한 몸이기 때문에 헌혈 금장을 받으려고 더 안달했다. 남들처럼 쉽게 쑥쑥 피를 뽑아서 헌혈할 수 있었다면 필자는 결코 헌혈을 버킷리스트에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헌혈하기 적당한 내 몸을 만들기 위해 적당한 운동(지나치면 헤모글로빈이 감소한다)과 균형 잡힌 식사로 건강한 혈액을 만들기 위해 늘 신경 써왔다. 만년 2등의 설움에서 벗어나 올해 동호인 테니스대회에서 우승한 것도 이런 노력의 결과다. 현대 의료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피는 인공적으로 만들지 못한다. 동물의 피를 사람의 몸에 대신 넣어다가는 큰일이 난다. 천 년을 산다는 거북이나 학의 피도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직 사람에게는 사람의 피만 필요하다. 피라고 해서 다 같은 피도 아니다. A형도 있고 B형도 있다. 그 혈액형에 따라 줄 수 있는 피가 있고 못 주는 피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피를 만드는 것은 조물주의 영역이다. 헌혈에 집착해왔던 필자 아니면 누구도 이 사실을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헌혈 금장을 받고 집에 와서 부모님 산소 쪽으로 큰절했다. 그리고 아내와 자식들 모두가 함께 뭉쳐져 있는 단체 카톡방에 제일 먼저 기쁜 소식을 알렸다. 건강하게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부모님께 고맙다는 말을 제일 앞에 올렸다. 카톡을 보고 눈치 빠른 내 자식들의 반응이 온다.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가 대단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 사진을 찍어서 보내온다, 아이들도 아버지처럼 반듯하게 건강관리를 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카톡에 올려줬다.
- 2016-05-17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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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문화] 연극 '그리워 그리워'를 보고 떠올린 친구
- 동년기자 박미령 나이가 드니 추억이 재산이라 지갑에 남은 돈 헤아리듯 옛 생각만 뒤적인다. 특히 6월이 오면 찬란한 하늘 너머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하늘나라에 먼저 간 친구다. 그 젊은 나이에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 한 달 내내 애태우다 겨우 찾은 그녀는 얼굴도 알아볼 수 없었다. 얼굴은 내 마음속에만 있었다. 꽤 마음이 통하는 벗이었다. 급작스레 가버리니 가족과 주위 사람들은 혼이 나갔다. 남은 사람들은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의 조각들을 주워 모으기 바빴다. 누군들 죽음을 예상하겠냐마는 젊은 죽음은 더없이 안타까웠다. 바람이 그 친구의 손길처럼 온몸에 스미던 날 임동진의 모노드라마 를 보았다. 무대는 갓 이사한 짐으로 스산하다. 독거노인 서진우는 추억을 꺼내듯 이삿짐을 정리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임동진의 50년 연륜이 깃든 목소리의 울림이 자연스럽게 극 중으로의 몰입을 유도한다. 임신 8개월에 사고로 죽은 딸 사진에 대고 마치 살아있는 딸에게 말하듯 시시콜콜 이야기해댄다. 아내도 암으로 먼저 가니 말은 허공에 뿌려져 한마디씩 외롭게 떨어진다. 메아리도 없는 그곳에 오직 들려오는 소리는 옆집 젊은 부부가 싸우며 내는 악다구니뿐. 그는 젊은 날의 자신에게 말하듯 ‘인생은 사랑하기에도 짧은 시간’이라고 소리친다. 삶의 막바지에 깨달은 고백이다. 그때 한 점 혈육인 손녀에게서 전화가 온다. 결혼 소식이다. 한없이 기쁘다. 그녀의 결혼식에 가려고 옷가지를 준비하며 그는 모처럼 만면에 희색을 띠고 몸동작도 의욕적이다. 여기에 사위의 전화는 찬물을 끼얹는다. 결혼식에 오지 말란다. 일순 객석은 서진우와 함께 못된 사위를 요즘 젊은 세대의 얄팍한 마음 씀씀이로 감정이입하며 술렁인다. 오은희 작가는 여기에 서진우 아내의 일기로 진실을 밝히며 극을 반전시킨다. 누구의 어떤 행동인들 이유가 없겠는가? 가만히 살펴보면 모두 그 상황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로 인생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결국, 혼자 이 세상에 남았지만, 젊은 날 감쪽같은 줄 알았던 바람에 대한 벌이 마음의 짐으로 남는다. 속죄하는 마음과 그리움으로 애가 탄다. 아내는 사랑을 용서로 대신하고 남편은 그리움으로 속죄한다. 여기서 과연 죽은 자가 고통스러운가? 살아남은 자가 더 고통스러운가? 하는 질문이 관객들의 마음에 던져진다. 후회가 또 다른 벌은 아닐까? 함께 있을 때는 몰랐던 소중함은 왜 늘 상대가 사라진 다음에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그리움은 복일까? 벌일까? 배경의 찌그러진 창은 어느 쪽으로든 조금은 일그러진 삶의 모습을 닮았다. 첼로 박스의 흠집도 마음의 상처를 말하듯 무대 곁에서 끝까지 버티고 있다. 임동진의 탄탄하고 노련한 연기는 마치 동네 아저씨가 이야기를 들려주듯 자연스럽다. 아내의 목소리로만 나오는 정영숙의 마음 담은 소리는 진한 감동으로 퍼진다. 최병로의 섬세하게 바뀌는 창밖 풍경 연출은 짐짓 모노드라마의 단조로움을 깨고 극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어 좋았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마지막 부분 배경이 너무 현란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너무 자주 바뀌고 끝부분의 현란함은 관객들의 시선을 분산시켜 몰입을 방해했다. 그러나 가족관계가 옅어져 가는 이 시대에 의미 있는 연극이었다. 90분의 모노드라마가 지루하기는커녕 아쉬웠다. 극에서 빠져나오니 자연 그리운 사람들이 떠오른다. 푸른 하늘에 어른거리던 친구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다. 그녀에게 이토명 시인의 이라는 시를 보낸다. 너에게 사랑을 말할 때 목이 울컥, 하고 메이는 걸 보니 마음은 목 언저리에도 있나 보다.
- 2016-05-13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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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을 맞으며]어머니 기일이 돌아온다
- 퇴직 후 양재천을 자주 걷는다. 아내와 함께 걷기도 하고 때로는 혼자서 걷기도 한다. 시간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산책할 수 있어 좋다. 양재천은 철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6월이면 화사하던 봄 꽃 들은 자취를 감추고 연초록 나뭇잎은 싱싱한 푸르름을 더해간다. 6월에는 우리 가족에게는 큰 행사가 두 개있다. 어머니의 기일이 있고 둘째 동생이 회갑을 맞이한다. 어머니는 당뇨와 암으로 16년 전 6월에 68세로 돌아가셨다. 요즘 같은 장수 시대에 칠십도 넘기지 못하신 어머님은 우리 가족에게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꽤 시간이 지났건만 우리 형제끼리 모여 술 한 잔 할 때면 막냇동생을 울리는 것은 간단하다. 동생이 취할 때쯤 어머니 이야기만 꺼내면 보고 싶다며 큰소리로 운다. 오십이 넘고 대기업의 임원으로 있건만. 세브란스 암센터, 원자력 병원 검진 결과 너무 늦었다는 결론이 내려져 항암치료를 포기하시고 어머님이 고향집으로 내려가시기로 결정하시던 그날 ‘그만 내려가자’ 고 아버님이 하시던 그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 어머니는 5년을 더 사셨다. 고향집에서 고통의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생을 마감하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2년이 지나지 않아 아버님도 어머님 곁으로 가셨다. 이제 세월이 흘러 동생이 회갑을 맞이해 잔치를 한다고 한다. 호텔에서 가족들을 초대해서 음악회를 열 계획이다. 노래방 반주기에 맞춰 동생은 색소폰을 연주하고 우리 형제들은 부부 단위로 노래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날 부를 노래 곡목을 미리 제출하라고 한다. 색소폰 반주를 해주기 위해서다. 동생은 퇴직 후 색소폰을 배운다고 아파트에 방음시설을 갖추고 몇 년을 연습하더니 이제 프로가 되었다. 우리 부부는 그날 댄스를 하려고 한다. 지난해 내가 라틴 댄스 차차차를 배워 몇 달을 집에서 아내와 함께 연습한 적이 있어 이번에 그 실력을 뽐내보려 한다. 사실 나도 4년 전 회갑을 지냈지만 잔치를 하긴 쑥스러웠다. 그래서 아내와 유럽 여행을 하고 형제들과 간단히 식사를 했다. 팔순을 넘긴 삼촌도 계시는 데 거창하게 잔치를 한다는 것이 좀 어색했기 때문이다. 동생은 나와 성격이 달라 잔치를 제법 제대로 할 모양이다. 아무리 장수시대라 해도 회갑이란 인생에서 의미가 있는 날이긴 하다. 아이들은 다 자라 품을 떠나가고 직장에서 퇴직을 하고 제대로 홀가분하게 제2의 인생을 설계할 시점이다. 회갑을 지나니 인생이 뭔지 좀 알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도 안다. 내 나이도 어느덧 60중반이 되어 며느리도 보고 손녀가 생겨 할아버지가 되었다. 인생은 다 때가 되어야 깨닫게 되나 보다. 손녀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깨닫는다. 보자기에 싸여 태어나 업치고, 일어서고, 걷고, 말을 배우는 과정을 자세히 보면서 너무 신기하고 귀엽다. 아들과 딸을 다 키웠건만 그때는 어떻게 키웠는지 모르겠다. 생명의 신비와 핏줄에 대한 애정이 이렇게 소중하게 다가올지 몰랐다. 가끔 아들과 며느리, 딸 우리 가족이 다 모여 식사하는 날이 더없이 행복하다. 작은 일이지만 이러한 일상생활 속의 소박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한다. 이것이 치열하게 살던 젊은 날과 달라진 점이다. 유월에는 아내와 제주도 서귀포 여행을 간다. 제주도를 몇 번 다녀오긴 했지만 이번 여행은 별다른 의미가 있다. 제주도 공무원 연금공단 강의가 있어 함께 가기로 한 것이다. 일과 여행을 동시에 하는 의미 있는 일이다. 내가 강사가 되어 내가 먼저 경험한 소중한 것들을 후배 시니어들과 나눌 수 있어 기쁘다. 직장생활의 오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 이 막을 준비하는 데 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내려놓고 가벼이 해야 자유스러워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새로 준비하고 끊임없이 학습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유월을 맞이하며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다.
- 2016-05-10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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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내 평생 부끄러움 잃지 않기를…” 문단 등단 50년, 안혜초 시인의 끝없는 젊음
- 여전히 청춘의 시간을 통과하는 이화여고 정동길을 안혜초(安惠初·75세) 시인과 걸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 나이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젊음을 보여줬다. 민족지도자인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1891~1965)의 손녀이기도 한 그녀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1967년 의 추천으로 등단했으니 작가로서의 경력도 내년이면 50주년이 되는 원로시인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이와 경력에 안주하지 않고 여전히 꾸준한 시 활동과 더불어 소설, 콩트, 동화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준비하고 있는 안 시인의 젊음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사랑 지금은 잠들어 가도 조금씩 알게 모르게 잠들어 가도 그대와 나 어느 한쪽이라도 깨어 있으면 오뉴월의 싱그러운 햇바람으로 깨어 있으면 우리 사랑 이대로 스러지지 않아요 그대 사랑 나 먼저 하품을 하면 내 사랑이 자꾸 자꾸 흔들어 주고 내 사랑이 그대 먼저 눈을 비비면 그대 사랑 자꾸 자꾸 흔들어줘서 - 중 안혜초 시인의 시 은 2006년 봄, 시비(詩碑)로 만들어져 전남 화순군 남면 운산리 평화문화휴양 시비공원에 세워졌다. 또한 2004년 가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중국어역시집의 제목으로 선정, 타이틀 포엠이 되기도 했다. 1941년에 태어난 안 시인의 나이를 잊게 만드는 풋풋함이 담겨 있는 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감수성은 저 시를 쓴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한 듯해 보였다. 시는 기도, 일기, 편지, 세상에 내보내는 뜨거운 메시지 안 시인이 기억하는 자신이 처음 쓴 글은 중학교 2학년 때다. 에서 내는 문예지에 투고했던 산문이었는데 제목은 였다. 그 글이 입선된 것을 계기로 문예란에 계속적으로 글을 투고했다. 이화여고 재학 중 교지 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사람이 된 것이다. 안 시인 스스로 말하길 자신에게 시란 ‘기도, 일기, 편지, 세상에 내보내는 뜨거운 메시지’이다. 그녀는 어떤 길을 갔더라도 시만큼은 계속 썼을 거라고 말하는 투철한 시인이기도 하다. “무얼 바라서가 아니라 시를 쓰지 않곤 못 배겼을 겁니다. 오죽하면 내가 ‘시는 내게 있어 평생 결혼만큼은 하고 싶지 않은 숙적 같은 연인’이라고 시로도 썼을까요?(웃음) 평범한 시민인 나는 사회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시인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제 시는 관념적이지 않고 쉽죠. 조금이라도 살아가는 데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시를 쓰고자 앓고 또 앓았습니다. 시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 시는 쓰는 시인이 아프면 시도 아프고 시인이 비틀어지면 시도 비틀어집니다. 그리고 원래는 언론인으로 크게 성공하고 싶었는데 건강 문제도 좀 생기고 결혼 생활과 병행도 힘들고 해서 집에서도 쓸 수 있는 문학 쪽으로 기울어졌지요.” 윤동주 시인과 안혜초 시인 안 시인은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시집 와 영화 의 흥행으로 다시 주목받게 된 윤동주 시인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바로 2001년 제17회 윤동주문학상의 수상자이기 때문이다. 바보야, 이 바보야 차 한 잔 사과 한쪽에도 맘에 걸리고 잎새에 이는 잔바람에도 잠 못 이루는 … - 중 “자작시에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윤동주 시인하고 나하고는 기질적으로 비슷한 데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동안 50년 가까이 시를 써 오면서 꽤 여러 번 문학상을 받았는데 윤동주문학상은 그중 가장 먼저 내세우고 싶은 상이기도 합니다. 이 상이 내게 더의미가 있는 것은 한국문인협회 사상 처음으로 수상자를 한국문인협회 이사진 및 문협지회장 투표로 결정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동안은 심사위원에 의해 결정했는데 당일 회의석상에서 ‘수상자 선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열띤 토론 끝에 투표로 하자고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난 그 당시 임원이 아니어서 나중에야 알았지만.” 안 시인은 자신의 시집들 중 가장 아끼는 시집은 따로 없고, 시집마다 각별히 아끼는 시들이 있다고 밝혔다. “이제 시선집을 내게 되면 시선집이 되겠지요. 지난 2012년 9월 세계한글작가대회(국제펜한국본부 주최) 한영대역 자선 소시집을 만들어냈는데, 현재로선 그게 가장 아끼는 시집이에요. 시집 제목은 이구요.” 그녀가 시를 쓰면서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보너스 같은 일들이 있다. 와 등 두 편은 시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 , , 등 여러 편은 작곡되어 노래로 발표되기도 했다. 그녀는 시가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건 굉장히 보람 있고 행복한 일이라고 재차 말했다. 오랜 경륜에서 다져진 삶의 철학과 포스 관념적인 시가 아닌 생활 속에서 살아 있는 시를 쓰고 싶었고 주로 우리 누구나의 보편적인 진실을 추구했다는 안 시인은 그렇게 살아있는 것에 대한 몰두를 통해 자신의 생명력을 지켜왔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피할 수 없는, 나이듦에 대한 깨달음이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늘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들이 쌓여 있어서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민센터에서 ‘지하철 어르신 우대용 교통카드’를 신청하라는 공문이 날아들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원로시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 정말 이제부턴 내가 노인세대로 분류되는구나’ 하여 내심 당혹스러웠습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최근 유엔에서 재정립한 평생 연령 기준을 보면요 0~17세 미성년자, 18~65세 청년, 66~79세 중년, 80~99세 노년,100세이후 장수노인이라네요. 하하.” 활달하게 웃어젖히는 안 시인의 몸짓과 말투에서 오랜 경륜으로 다져진 삶의 철학, 아우라가 느껴진다. ‘20세의 청춘에도 노년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80세 노년에도 청춘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는 새뮈얼 울만의 저 유명한 말과 함께. 인간으로선 ‘부끄러움’, 여자로선 ‘수줍음’을 잃고 싶지 않아 나이가 들면서도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거기에 그녀가 유지하고 있는 젊음의 비밀이 있는 게 아닐까? “인간으로선 ‘부끄러움’이고 여자로선 ‘수줍음’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수줍음’은 ‘약한 것’과 다릅니다. 요즘 강하고 유능하게 보이고 싶어 ‘수줍음’을 벗어 던져 버린 듯한 여자들이 많아져 가는 게 안타깝습니다. 요즘 여자들은 ‘예쁘다’보다 ‘섹시하다’는 말을 듣기 원하는데, 수줍음이야말로 여자를 가장 여자답다고 느끼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난 남자도 약간 수줍어하는 남자가 매력이 있어요(웃음).” 그러고보니 활달한 듯 보이면서도 언뜻언뜻 수줍어하는 기색이 만년 소녀와도 같다. 안 시인이 요즘 들어 가장 쓰고 싶은 글 중의 하나가 ‘여자는 여자로 강하라’라는 주제다. “강하게 보이기 위해 남자처럼 구는 여자들은 한심하잖아요? 보이시한 여자가 일면 매력 있긴 하지만, 그건 남자 흉내하곤 다르지요. 여자로 태어나 여자만이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 무엇보다 어머니가 된다는 건 숭고한 거예요. 자녀를 낳아 한 사람의 몫을 훌륭하게 해 낼 수 있도록 양육함은 개인과 나라와 인류를 위한 실로 위대한 공헌이 아닐 수 없죠.” 할아버지 민세 안재홍이라는 거대한 산 최근 가장 행복한 일로 지난해 가을 첫 손자를 본 게 가장 큰 경사이고 기쁨이라고 꼽는다. “너무 늦게 본 손주라서요. 기도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손주를 본 지금이)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맘 편한거 같아.” 안 시인은 독립유공자인 민세 안재홍의 손녀이기도 하다. 민세(民世)는 ‘민족과 세계’라는 뜻이다. 안재홍은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 주필, 사장 등 언론인으로 종횡무진 활약, 일제에 의해 9번이나 투옥되었으며 사학자로서의 업적도 크게 남겼다. 해방 이후엔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국민당 당수 등 중도우파 성향의 정치인으로 활약, 초대 대통령 선거에선 이승만·김구에 이어 3위를 하였고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한국전쟁 때 불행히도 납북되었다. “혜초(惠初)는 첫 은혜, 첫 손녀라는 뜻으로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분은 아랫사람에게도 존칭을 쓰셨고, 모진 고문에도 신음조차 크게 내지 않아 심문하던 왜경들도 경탄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성실하고 검소해 미 군정시절 한국인 행정수반인 민정장관 시절에도 도시락을 꼭 지참하셨고, 고매한 품성의 민족지도자였습니다. 할아버지께 물질적 혜택을 받은 적은 없지만 나라를 구하시는 데 평생을 헌신한 분의 손녀라는 자긍심과 함께 그 분께 누를 끼칠까봐 조심 조심하며 살아왔어요.” 등단 50주년, 이젠 나를 위해 살아야 할 시점 안 시인에게는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다. “내년 1월이면 문단 등단 50주년이에요. 시집 7권을 정리해서 시선집을 꼭 내려구요,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신앙 간증집도 내야겠구요. 또한 한불대역 시집, 한일대역 시집도 준비 중입니다. 지난 20년 가까이 할아버지 민세 안재홍 선집에 이어 전집을 내느라고 내 것은 자꾸 보류해왔는데 이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게 됐어요. 수필집, 칼럼집도 내야 할 것들도 있고 단편소설, 콩트, 동화 들도 써서 발표할 것들이 각각 여러 편씩 쌓여 있는데….” 안 시인에게는 평생을 살면서 꼭 지키면서 살아온 것이 있다. “40세 전후에 몇 차례 걸쳐 성령은사체험을 경험한 이후로 지금까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을 하루도 잊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넋두리를 하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는 그녀의 말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안 시인의 의지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그 의지 또한 안 시인의 나이를 믿기지 않게 만드는 젊음의 원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선 특유의 에너지가 느껴지곤 한다. 세상의 잣대에 흔들리지 않고 신념을 따라 걸어온 길은 고스란히 그녀의 자부심이 됐다. 그녀의 시가 투명한 건 삶에 대한 특유의 낙관 때문일 것이다. 정갈하고 깔끔하게 바라보는 안 시인의 예쁜 감정을 담아왔다. 봄이 오는 덕수궁 길목에서 안 시인과의 짧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벌써부터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이 기다려진다. △ 안혜초 시인 이화여고·이화여대 졸업. 세계여기자 작가협회 한국지부 부회장 역임.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평화위원회 위원장. 한국현대시인협회 부회장, 현 지도위원. 한국문인협회 대외 협력위원. 한국여성문인회 이사. 이화여대 동창문인회 회장, 현 고문.
- 2016-05-02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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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aA 디자인 뮤지엄 김명한 관장
- 가구 컬렉션계의 대부 혹은 가구 컬렉션계의 1세대. 모두 aA 디자인 뮤지엄 김명한 관장을 지칭하는 수식어다. 그의 컬렉션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질과 양에서 모두 세계 수준으로 손꼽힐 정도다. 디자인 가구의 컬렉팅은 그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처음엔 단순한 취미로 시작했지만, 새로운 인생을 펼치는 도화선이 됐다. 그 노력의 집약체가 바로 aA 디자인 뮤지엄이다. 그 곳에서 김명한(金明漢·63) 관장을 만났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젊은이들이 흔히 말하는 ‘홍대’는 단순히 홍익대학교와 그 앞 거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신촌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큰 소비의 축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디자인과 출판, 건축 등 다양한 창조물이 샘솟는 곳이다. 이제 지역적으로는 마포구 서교동과 동교동을 넘어 합정동, 창전동에 일부는 서대문구 연남동 일대까지로 그 의미가 확대되기도 한다. 수십 년 전 저잣거리를 축으로 확대된 ‘종로’가 있다면, 지금은 그 역할을 홍대가 해내고 있는 셈이다. 그 홍대의 랜드마크 중에는 aA 디자인 뮤지엄이 있다. 휴일에는 문을 닫고, 오후 5시 전에는 나가야 하는, 으레 생각하는 그런 박물관이 아니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밤늦도록 머물 수 있는, 디자인을 손에 쥐고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aA 디자인 뮤지엄이다. 문화를 주도했던 주인공들이 주변으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 속에서도 aA 디자인 뮤지엄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창작을 지속할 수 있는 공간과 영감의 공급처 역할을 하고 있다. 설립자 김 관장은 aA 디자인 뮤지엄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홍대에, 젊은이들에게 빚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을 통해 돈을 벌고 일어설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이 디자인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다들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 콘텐츠를 담을 하드웨어예요. 어린 친구들은 그 하드웨어를 만들 여력이 없으니 그 부분만큼은 기성세대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aA 디자인 뮤지엄은 권위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다. 인터뷰가 진행된 날에도 박물관 공간 한쪽에선 학생들의 전시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 디자이너들을 해외에 소개할 여러 가지 수단을 찾고 있고, aA 디자인 뮤지엄과 유사한 상설 전시공간을 유럽에 마련하는 것도 고민 중이라고 했다. 홍대를 지키는 기둥으로 마포 디자인·출판 진흥 지구협의회의 회장을 맡아 서울시와 함께 중소 출판인들의 인프라 개선을 위한 작업을 올해부터 본격 진행할 계획도 갖고 있다. 그의 가구 컬렉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조금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91년 유럽식 레스토랑 ‘아지오’를 열면서 그의 수집은 시작됐다. 그의 공간을 장식할 소품과 가구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그가 손대는 레스토랑과 카페들은 연이어 성공했다. “운이 좋았던 시절이었어요. 젊고 순수했고 열정으로 가득한 시기였지요. 똥폼도 잡고 밤새 예술에 대해 이야기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엔 정원이 있는 레스토랑에 대한 전문가도 없었고, 평론에도 자유로웠던 시절이어서 쉽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침 1980년대 후반부터 해외여행 자유화를 통해 외국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그 추억을 공유할 장소가 필요했고, 대표적 여행지인 유럽과 유사한 공간은 그들에게 어필하기에 충분했으니까요.” 그의 공간에 대한 감각과 욕심은 유년 시절의 경험과 맥락을 같이한다. 유복했던 어린 시절 그가 뛰어놀던 정원은 아버지의 정성으로 가득했고, 그가 자란 안동은 미적으로 뛰어난 한옥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한국전쟁이 막 끝난 시기여서 주택문화라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기입니다. 독서와 정원 가꾸는 것 말고는 취미가 없었던 아버님 덕분에 정서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죠. 디자인 역시 직접 경험하고 체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그의 배경은 ‘경험’을 중시하고, 나누고자 하는 계기가 된다. aA 디자인 뮤지엄이나 제주도에 세운 게스트 하우스 모두 이 맥락에서 출발했다. 수집이 본격화되면서 시작한 것은 공부다. “유럽의 각국을 다니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주로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의 경매소들을 많이 다녔죠. 그곳에서 물건을 감정하는 눈을 키우고, 거래 기관과의 신용을 쌓았습니다. 관련 전문서적도 갈 때마다 사들여서 매달 번역해서 읽었고요.” 20년 넘게 진행된 그의 컬렉션은 100여평의 창고 8개를 채울 정도가 됐다. 일본의 업계 관계자가 한국시장 진출을 꿈꾸다 그의 컬렉션을 보고 규모에 깜짝 놀라 포기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제 수집 스타일은 일본 사람들의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들이 중요시하는 학술적 가치 말고도 조형적 가치나, 시대적 가치를 갖고 있는 것들도 모았으니까요. 전시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활용까지 생각하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죠. 덕분에 컬렉션의 형식이나 아이템들이 다양해졌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 속에서도 그가 세운 원칙은 철저하게 지켰다. 김 관장 스스로가 정한 약속이다. “그동안 가구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지켜왔던 원칙이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경쟁은 피하고, 갖고 있는 능력 안에서만 하자는 것이죠. 기본적으로 수집은 저에겐 사업의 대상이 아니라 취미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절대 무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집은 3년 전 멈췄다. 그가 아지오나 다른 카페들에서 손을 뗐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 자르듯 그만뒀다. 관리에도 문제가 있었고, 다른 관심사들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아지오를 그만둘 때도 주위에서 이런저런 만류가 있었지만, 단칼에 실행했던 그다. 지금은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것처럼 행복하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수집은 그의 인생 2막의 시작이었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양하게 확대됐다. 그중 하나가 무크지 ‘캐비닛’과 ‘캐비닛 Jr.’의 출간이다. 캐비닛 창간호는 전 세계 디자이너 20명의 인터뷰를 실었는데, 출간되자마자 업계의 반향을 일으켰다. 외국 기사를 번역한 것이 아닌, 현지에 찾아가 그들과 직접 나눈 이야기와 촬영한 사진을 게재한 잡지는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궁금한 사람이 있으면 날아가서 만나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향이 반영됐다. 또 다른 사업은 그의 디자인 안목과 경험이 집약된 ‘aA 디자인 퍼니처’다. 2011년 론칭해 주목받았던 그의 가구 브랜드 aA 디자인 퍼니처는 최근 경기도 가평에 공방을 열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그의 공방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구 공장’과는 차이가 크다. 공방이 곧 전시장이 될 수 있는 정갈한 작업환경과 디자이너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까지 갖추고 있다. “내 직업에 대한 평가를 상대적 가치로 판단하려 들면 자식에게 내 일을 물려줄 생각을 못 하게 됩니다. 하지만 직업과 일터를 물려주겠다고 생각하면 공간이나 도구 등 모든 것이 달라지죠. 춥거나 덥거나 더럽지 않은, 직원들이 폼나게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위치가 가평인 건 혼자 떨어져 있는 것을 좋아하는 제 성격이 많이 표현된 것이죠.” 그는 이 공방을 통해 디자인 샘플이 탄생되면 소비자들을 고려한 가격을 정해 시장에 내놓을 생각이다. 최근 제주에 세운 게스트 하우스 ‘Jeju in aA’는 다시 한 번 그가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워낙 제주가 좋았던 그는 지인들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이 하나 있었으면 했고, 수집한 가구들로 공간을 근사하게 꾸며놓고 보니 많은 사람과 그 경험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 목적에 맞게 비용도 저렴하게 책정했다. 주말 가격도 없고, 성수기 가격도 따로 없다. 1년 365일 같은 가격이다. 바가지 상혼이 가득했던 크리스마스나 연말에도 평소 가격을 유지했던 ‘아지오 아저씨’ 김 관장의 고집이다. “게스트 하우스를 사람들에게 개방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름을 지었는데, 두 채는 제주 방언으로 게으름뱅이를 뜻하는 ‘간세다리’와 영어로 빈둥거린다는 뜻의 ‘아이들(idle)’입니다. 다른 한 채는 제 손녀의 이름이자 순우리말로 바다를 뜻하는 ‘아라’고요. 이름처럼 젊은이들이 여유를 즐겼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성산일출봉 근처에는 미술관을 세울 계획이다. 예기치 않게 제주 제2공항이 근처로 발표되는 바람에 오해도 받고,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한다. 그는 두 번째 인생을 준비하는 또래의 중년들에게 미루지 말고 바로 실행할 것을 주문한다. “돈에 얽매이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돈은 절대 가치가 될 수 없어요. 대신 자신에 대한 가치, 신념이 있어야 해요. 저는 생일을 챙겨본 적이 없습니다. 매일을 태어난 날이라고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하루라도 거르거나 미룰 수 없는 것처럼 인생도 똑같다고 봐요. 그렇게 인생을 준비해나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 2016-03-03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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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성환의 똑똑한 은퇴] 영화<인턴>: 로버트 드 니로와 10 Up
-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영화 을 보고 나오면서 문득 ‘이 영화의 감독은 분명 여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주인공 벤 휘태커(로버트 드 니로 분)는 혼자 살면서도 자신의 집과 주변을 매우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특히 회전식 넥타이 걸이와 잘 다려진 셔츠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는 걸 보는 순간 ‘아~ 이건 여자의 시각이 만들어낸 장면’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낸시 마이어스라는 꽤 나이(1949년생)가 있는 여자 감독이었다. 벤은 ‘바람직한 은퇴남’, 그것도 여자의 시각에서 본 바람직한 은퇴남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여자건 남자건 스스로를 잘 가꾸고 다듬어야 한다. 어떻게 가꾸고 다듬을 것인가? 마음은 물론 외모에도 적잖이 신경을 써야 한다. 자칫 내 나이에 무슨 멋인가 할 수도 있지만 나이가 들수록 ‘Clean up’과 ‘Dress up’, 즉 깨끗하게 잘 차려입고 멋을 내야 하는 것이다. 옷이 날개라고 하지 않는가? 특히 손자·손녀들의 경우 언제나 뛰어가서 안기고 싶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원할 것이다. 냄새가 나거나 지저분하면 뜨악해하면서 뒤로 물러서는 게 인지상정이다. 우중충한 집에서 우중충한 분위기로 지내고 있으면 자식들도 손주들도 선뜻 오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물론 논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 깨끗하게 잘 차려입으라는 말은 아니다. 일하는 모습과 옷차림은 그 자체로도 보기 좋은 어른의 표본이니까. 수년 전 인터넷과 SNS상에 존경받는 노후를 위한 필수요건이라며 ‘7 Up’이 올라왔다. ‘Clean up, Dress up, Shut up, Show up, Cheer up, Pay up, Give up’이었다. 여기에다 필자는 ‘Open up, Listen up, Health up’의 ‘3 Up’을 덧붙여 ‘10 Up’을 만들어 은퇴강의 때마다 잘 써먹고 있다. 7가지도 많은 것 같은데 10가지면 너무 긴 것 아닌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식들은 물론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으려면 이 정도의 수고는 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순서를 잘 따라가면 외우기도 그리 어렵지 않다. 필자가 내놓는 ‘10 Up’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Open up, Listen up, Shut up, Give up, Cheer up, Clean up, Dress up, Show up, Pay up, Health up.’ 모두 쉬운 영어인 데다 우리말로 풀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마음의 문을 열고 남의 이야기는 듣고 내 입은 닫고 포기할 건 포기하고 웃는 얼굴로 깨끗하게 차려입고 다니자. 때로는 돈도 낼 줄 알고 건강도 챙기자.’ 수첩 한곳이나 휴대폰에다 ‘10 Up’을 적어놓고 가끔씩 새겨보자. 아침에 일어날 때, 누구와 만날 때는 물론 뭔가 시무룩하고 만사가 귀찮을 때도 한 번씩 들여다보자. 마치 자신에게 주문(呪文)을 거는 것처럼 연습을 하는 것이다. 거울을 보면서 ‘Cheer up! Show up!’만 해도 오른손이 번쩍 올라가면서 자신을 스스로 격려해 밖으로 나가게 만들 수 있다. 그러려면 깨끗이 차려입어야 하고(Clean up, Dress up) 지갑도 챙겨야 할 것(Pay up)이고 한 바퀴 돌고 오면 마음과 건강(Health up)도 저절로 좋아질 것이다. 오랜만에 손자·손녀들이 온다고 하면 ‘10 Up’ 중 무엇이 필요할까? 깨끗하게 차려입는 것은 기본이다. 지난번 만났을 때 손주들에게 잔소리만 늘어놓은 것은 아닐까? 그래, 이번에는 마음의 문과 귀를 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입은 닫기로 하자(Open up, Listen up, Shut up). 동시에 웃는 얼굴(Cheer up)로 아이들을 대하면서 주머니의 문도 열어 맛있는 것도 사주고 슬쩍 용돈도 주면(Open up & Pay up) 더없이 좋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Open up’은 두 가지 뜻으로 사용할 수 있다. 마음의 문과 귀를 넘어 돈주머니를 열라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마음의 문과 주머니의 문을 여는 어른을 싫어할 자식과 손주, 친구는 없을 것이다. 열어젖히면 닫고 있을 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상대방이 먼저 문을 열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문을 열면 행복이 더 크게 다가온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분석이다. 좀 손해 보는 듯 사는 것이 잘 사는 방법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일일이 따지기보다는 웬만한 것은 이해하고 포기하고 넘어가야 한다. 부부 사이에도 부모·자식 사이에도 따지기 시작하면 피곤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Open up과 Give up은 서로 통하는 사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Give up’ 역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포기할 건 포기하는 Give up일 수도 있고 이웃에게 베풀고 살라는 뜻의 Give up일 수도 있다. 우연이겠지만 Give의 발음 ‘기브’는 한자어 ‘기부(寄附)’와 엇비슷하다. Give up을 ‘기부(寄附) 업’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나보다 못한 가족이나 이웃에게 베푸는 재미에 맛들이면 여느 재미에 못지않다고 한다. 돈이 아니더라도 체력과 재능 등으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기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Health up’은 10 Up의 가장 기본이자 핵심이다. 내가 건강해야 기부도 할 수 있고 마음의 문을 열 수도 있고 일과 취미생활도 즐길 수 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말이 나이 들수록 더 절실해진다고 한다. 하는 일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가면 지루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다. 내 건강을 내가 지키기 위해 뭘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문을 열고 박차고 나가자. 세상은 밖으로 나오는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를 열어줄 것이다. 영화 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벤은 전화번호부를 만드는 회사의 부사장까지 지낸 성공한 월급쟁이로 퇴직한 후 나름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자녀들도 잘 자라서 독립했고 가끔 손자들을 보러 다니면서 요가와 화초재배를 취미로 즐기는 평범한 은퇴남이다. 하지만 3년 전 아내와 사별해서인지 잠들 때마다 뭔가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들자 새로운 도전을 해보자면서 나선 것이 시니어 인턴이었다. 그렇다고 누구나 벤처럼 너그럽고 여유로운 데다 지혜와 위트도 겸비하고 잘생긴 것은 아니다. 더욱이 누구나 벤처럼 새로운 도전에 멋지게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도전 그 자체가 의미 있고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Give up이라고 해서 이런 도전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나라 관객이 400만 명에 달한 것도 벤의 그 멋진 도전을 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10 Up도 많다지만 마지막으로 하나 더 Up을 더한다면 그것은 ‘Challenge Up’이다.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도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일 테니까.
- 2016-01-12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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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재미 플로럴 아티스트 클레어 원 강, 플라워아트 손끝으로 완성하다
- 꽃과 더불어 사는 삶은 아름답다. 꽃은 피고 지고 나면 그뿐인 듯하다. 그런데 그 꽃은 씨앗을 남기고, 씨앗은 다시 꽃을 피운다. 미국서 활동하고 있는 클레어 원 강(Claire Won Kang AIFD, 한국명 이원영)은 금세 시드는 꽃의 아름다움을 시간의 굴레에서 끌어낸 플로럴 아티스트(Floral Artist)다. 그는 꽃이 가장 아름답게 핀 순간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도록 꽃과 소품을 재창조한 콜라주로 플라워아트의 새 장르를 열었다. 남진우 뉴욕 주재기자 namjin@etoday.co.kr 세계 최고의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Best in Show)’을 여러 차례 수상한 강 작가는 일생의 역작인 화집 를 출간, 플라워아트에 새 이정표를 세웠다. “꽃 앞에서는 인종 간의 차이도, 빈부의 차이도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플라워아트를 전수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플라워아트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쏟을 생각입니다.” 클레어 원 강은 1968년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미술아카데미(Pennsylvania Academy of Fine Art)에서 공부할 때까지만 해도 플라워디자인과는 별 인연이 없었다. 강 작가는 당시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장학생이었던 강성권 박사(현 IBM 중앙연구소 연구과학자)와의 신혼생활 중에도 미술공부를 계속하며 필라델피아의 갤러리에 전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남편의 이직으로 뉴저지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남편 직장 동료 부인의 소개로 플라워 숍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이것이 플라워아트와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클린턴, 록펠러 등 유명 가문이 단골고객 “플라워디자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해볼 만한 일이니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술로 다져진 기초 위에 뛰어난 손재주가 더해지면서 플로리스트로서의 면모를 빠르게 갖추어 갔다. 1984년은 특별한 한 해였다. 뉴욕의 부촌인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채퍼쿼(chappaqua)에 아름다운 집을 마련했고 뛰어난 디자이너만 채용하는 그 지역 플라워 숍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지만 즐거웠습니다. 꽃에 완전히 빠졌던 거죠.” 플라워아트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객과 교감을 하다 보면 고객에게 어울리는 꽃과 디자인이 순간적으로 떠올려지기도 했고, 꽃들을 바라보면 그 꽃이 말하는 듯한 무아의 경지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의 신들린 듯한 플라워아트가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클린턴, 록펠러 등 유명 가문들이 하나둘 단골고객이 되었다. 또 웨딩드레스로 유명한 ‘베라왕’ 매장의 화훼 디자인을 전담하기도 했다. 티파니, 블루밍데일, 노드스트롬 등 미국의 화려한 매장도 활동무대였다. 현대미술관(MOMA)을 자주 들러 다른 예술과 컬래버레이션 모방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지키면서 꾸준히 노력하면 창의성과 자기만의 브랜드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창의성을 유지하려면 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맨해튼의 현대미술관(MOMA)을 자주 들러 다른 예술작품을 꾸준히 접한 것이 디자인 감각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클레어 원 강은 2001년 미국플라워디자이너협회(AIFD)의 시카고전국대회에서 꽃 콜라주 페인팅을 성공적으로 소개하여 플라워아트의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 2008년 이화여대 총동창회 창립 100주년 기념 플라워 쇼에서는 100개의 호접란이 단단한 그물을 뚫고 사이사이로 피어나는 디자인으로 ‘진선미 정신’을 표현하여 기념행사의 대미를 장식했다. 그는 미국, 영국 등지의 수많은 플라워 쇼에 초대되었다. 2014년 필라델피아 뮤지엄에서 열린 ‘조선왕조대전’에 전시된 ‘무신년진찬도’를 주제로 한 작품 ‘글로벌 댄스(Global Dance)’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태극과 오륜을 바탕으로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은 이 작품으로 그는 지난해 3월 세계 최대 규모, 최고 전통의 실내 플라워아트 경연장인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을 수상해 더 뜻이 깊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죽음을 애도한 꽃장식 작품 클레어 원 강은 수많은 초대전에 참여하고 큰 상도 많이 받았지만 정작 가슴에 가장 깊이 남아 있는 작품은 죽음을 애도한 꽃장식이었다. 친구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작업한 장례식장의 플라워아트는 오 헨리의 를 연상케 했다. “남편 친구가 평소에 좋아했던 보석 색깔의 꽃으로 꾸민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들은 망자가 천국으로 가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플로리스트에게는 최고의 찬사였다. “그 사람을 알고 그 사람에 맞는 디자인을 했을 때 가장 아름답고 큰 감동을 준다”는 강 작가는 “아름다운 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조그만 국화와 카네이션도 제자리에 꽂히면 아름답고, 잎의 앞면보다 뒷면이 더 어울릴 때가 있다는 것이다. 클레어 원 강의 삶은 자연과 예술에 교육이 어우러진 여정이었다. 1991년부터 20여 년간 뉴욕식물원(New York Botanical Garden)에서 플라워아트에 대해 강의해 2000명이 넘는 후배를 배출했다. 2005년에는 재직 교사 200명 가운데 학생들이 꼽은 최고의 강사로 선정돼 ‘올해의 우수 교사상’을 받기도 했다. 미국 전역의 가든클럽과 특별강좌에 초빙되어 꽃과 인생을 강의했다. “이파리가 너무 무성하면 꽃이 피지 않는다. 중앙에 먼저 핀 꽃을 잘라내야 주변 꽃들이 잘 자라난다”는 강 작가는 “혼자만 잘 자라면 주변 꽃들이 피지 못해 조화로울 수 없으며, 꽃 자체로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질 수 없다”고도 했다. 꽃을 통해 인생을 배우는 것이 강의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화보집 발간하라는 어머니의 소원 지난해 5월 숙명여고 졸업 50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귀국한 강 작가를 어머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구순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는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이었다. 항상 건강하시고 그 자리에 계실 줄 알았다. 갑작스런 수술과 별세는 강 작가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어머니는 평소 소망을 이룬 것이었다. 자녀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고 주무시는 듯 세상을 떠날 수 있기를, 미국의 딸이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면서 장례 꽃장식을 해주기를 간절히 빈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못다 이룬 어머니의 소원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강 작가가 40여 년간 디자인한 작품을 집대성하여 최고의 화집을 발간하라는 어머니의 소망이자 명령이었다.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을 탄 작품을 비롯하여,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을 선별해 재현하고 보관해 놓은 콜라주 작품을 하나하나 담았다. “올 6월 말 덴버에서 있었던 미국플라워디자이너협회 창립 50주년 기념총회에 이 화집을 출품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고, 이는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저를 도와주신 것입니다.” 강 작가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이제야 지켰네요. 어머니와 나의 평생의 소망이었던 화집 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됐습니다”면서 울먹였다. ‘일체(Oneness)’는 모두가 어우러져 하나 됨을 뜻한다. 여러 부분이 서로 보완하고 협력하여 아름다운 전체를 만드는 것이다. 원네스(WONNESS)는 조화와 일체를 이루는 클레어 원 강의 예술세계다. 화려한 꽃과 눈에 잘 띄지 않는 수수한 꽃의 조화다. 절대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제자리에 맞는 아름다움이다. 강 작가는 화집을 발간하면서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였던 인생의 순간들이 어느 시점에서는 모두 연결된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 가족, 동료, 친구, 후배, 제자, 이웃 등 이 모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이란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한글과 영문으로 제작된 화집 는 이제 클레어 원 강의 화신이 되어 하버드대학, 옥스퍼드대학, 스미소니언 등 각지의 도서관에서 플라워아트를 전파하고 있다. 꽃 이야기로 마음을 치유하게 하다 강 작가의 목소리는 30~40대다. 타고난 맑은 목소리로 강의를 계속할 작정이다. 뉴욕식물원과 가든클럽에서 요청하는 강의를 힘닿는 데까지 맡을 생각이다. 봉사활동도 그의 일상생활이 되었다. 미국 내 한인 여성을 중심으로 구성된 ‘세계아동기금(Global Children Foundation)’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기증 받거나 구입한 상품을 바자회를 통해 미국과 한국에서 판매하여 수익금 100%를 세계 각지의 굶주린 어린이를 위해 지원하고 있다. “젊을 때는 나, 내 자식, 내 작품 위주였는데, 이제는 남을 돕는 일이 훨씬 즐겁게 느껴집니다.” 강 작가는 죄수나 소외된 사람에게는 꽃 이야기로 마음을 치유하고, 직업이 없는 사람에게 꽃꽂이 기술을 전수해 일자리를 찾는 데 도움을 줄 작정이다. 왕성한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몸 관리가 필수다. “화집을 만드느라 중단한 인도 요가인 비크람(Bikram)을 다시 시작할 계획입니다.” 강 작가는 5년 전 무릎이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아팠으나 비크람을 통해 극복했다. 정신적 스트레스는 사랑하는 손녀를 보면 저절로 낫는단다. “나이가 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간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마음이 더 즐거워지는 느낌입니다.” 그는 미국의 주류사회에서 활동을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한인 모임에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
- 2016-01-05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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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도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팔십처럼만! <상상 팔십(常常 八十)>의 저자 김혜원 인터뷰
- 저자 김혜원은 1935년에 태어나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해 선생님이 됐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네 아이의 엄마, 손녀 아린이의 할머니가 됐다. 누군가의 아내, 엄마, 할머니보다는 ‘김혜원씨’로 불리는 게 좋다는 그녀는 올해 80세를 맞아 그동안 고민해온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담은 에세이 을 펴냈다. 서울구치소와 청주여자교도소에서 재소자 교화활동을 하며 느낀 점, 장기기증 서약의 의미, 삶에 대한 성찰과 애정 등이 담겨 있다. Interveiw. 의 저자 김혜원 작가 팔팔했던 시절 삶은 당연히 살아지는 것이었지만, 팔십이 되니 하루하루가 기적이라고 한다. 군더더기가 다 떨어져 나간 ‘참[眞] 나’에 대한 탐구야말로 나이 듦의 열매라고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책 제목의 의미 첫 글자 상은 ‘항상 상(常)’입니다. ‘상’을 연거푸 써서 ‘항상’ 또는 ‘늘’의 뜻을 강조하려 했습니다. 팔십은 문자 그대로 올해 제 나이 80세고요.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의 강건함을 항상 유지하면서 살고 싶다는 희망을 뜻합니다. 책에 드러낸 나의 삶과 꿈에 대한 열정을 마치 여덟 살 아이와 열여덟 살 청춘처럼 간직하고 싶다는 소망도 담겨 있습니다. 희망독자를 두 돌 지난 손녀로 지정한 이유 요즘은 책이 흔해진 반면, 책 읽는 사람은 감소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귀한 나무의 희생으로 탄생한 내 책이 인쇄물 공해로 작용하는 건 아닐까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그 두려움을 넘어서는 당위성을 찾고 싶었죠. 그때 떠오른 이유 하나, 손녀 아린이에게 나를 기억케 하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가 커서 이 글을 읽으며 할머니의 기쁨과 슬픔, 절망과 성취감을 느끼고 천국에 있는 나를 잠시라도 그 애 가까이로 불러내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할머니’가 아닌 어떤 호칭으로 불릴 때 가장 기분이 좋은가? 한국 사회는 직위나 직급을 딴 호칭을 사용하다 보니 전업주부로 살아온 여성에게는 마땅한 호칭이 없죠. 그래서 편의상 젊어서는 ‘아가씨’, 중년에는 ‘아주머니’, 중년 이후에는 ‘할머니’라고 불리는 게 아닐까요. 나는 아린이 할머니임에는 틀림없지만 늙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도 ‘할머니’로 취급 받고 싶지는 않아요. ‘할머니’라는 호칭 속에는 대가족제도 속에서 지녔던 존경과 사랑의 이미지보다는 늙어 무능하고 시대에 뒤처지는 존재라는 비하의 그늘이 어리기 때문입니다. 엄연히 등단한 작가이니 ‘김 작가님’ 또는 ‘김 선생님’으로 불리고 싶습니다. 아니면 ‘김혜원씨’도 좋습니다. 장기기증 서약의 계기와 지금의 심정 오랫동안 사형수와 재소자 교화활동을 하며 눈뜨게 된 세상이 있습니다. 비록 끔찍한 범죄로 극형을 받는 이들이지만 참회와 반성을 통해 장기기증이나 시신기증을 하며 아름답게 삶을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죽으면 한 줌의 재가 되거나 땅에 묻힐 덧없는 육신이 산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다면 그들을 교화했던 내가 장기기증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장기이식을 받는 사람일지라도 적지 않은 비용 부담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장기기증 서약과 동시에 장기기증운동본부에 소액의 후원금도 내고 있습니다. 젊어서는 이런 점에 착안하기가 어렵지만 살 만큼 산 노년이라면 삶을 어떻게 마무리 짓고 갈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끔찍한 게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삶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성찰을 줍니다.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수 교화 활동을 하던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 서울구치소에서 만난 최초의 사형수는 1975년에 17명의 무고한 생명을 살해한 사형수 김대두였습니다. ‘살인마’였던 그와의 만 1년간의 경험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때까지는 엘리트 의식에 젖어 네모반듯한 모범생 생활을 지향했는데, 우리 사회의 어둡고 음습한 구석을 보고는 경악했습니다. 그 충격은 위로만 향하던 마음의 눈을 아래로도 뜨게 했고 삶의 자리를 좀 더 낮은 곳에 깔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처절한 반성을 통해 새 사람이 되었고 서울구치소에 수많은 선행 미담을 남기고 1976년 12월 28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평생 그를 잊을 수 없습니다. △김혜원 작가 저서 , , , 등.
- 2015-12-18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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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어머니] 치매 어머니와 사는 남자
- 우리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치매 판정을 받는다면? 아무리 효자라도 악몽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 7년 동안 치매 어머니를 모시고 산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치매로 말미암아 가족 모두를 변화시킨 어머니도 있다.그 사연은 무엇일까? “아빠는 책상 앞에서 하루 종일 책 읽고 일하면 중간에 허리도 좀 펴고, 스트레칭도 좀 하지 지금 죽으려고 작심한 거야?” 일주일에 20권의 책을 읽고, 수도 없이 많은 원고를 쓰며 책상 앞에서 일을 놓지 않았던 한 소장에게 그의 딸이 언성을 높인다. 딸에게 30분 정도 호되게 야단(?)을 맞으면서도 귀엽다는 듯이 아이를 쳐다본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면 저럴까?’ 방에서 소란이 일자 다른 방에 있던 한 소장의 어머니 박외조씨가 지팡이를 짚고 그 광경을 지켜본다. 치매로 인해 이성을 잃을뻔했지만 손녀에게 역정을 내지도 않고 그저 지켜만 볼 뿐이다. 30분 정도가 지나 소란이 잠잠해지자, 슬그머니 한 소장의 옆으로 다가온 어머니가 한마디 한다. “네가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 사실 일과 어머니를 한꺼번에 돌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모시기로 결심한 초기에는 가사 도우미를 고용해 그가 집에 없는 시간에 어머니를 돌볼 수 있도록 했다. 처음 2년은 어머니와 정서적으로 교감을 잘하는 아주머니가 많은 도움을 줬지만, 그녀가 관두고 난 뒤에는 모두 못 버티고 그만두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한 소장은 생각했다. ‘내가 어머니를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라고. 그러고는 결심했다. 단둘이 지내보기로 말이다. 그 일은 큰 용기를 필요로 했지만 몇 개월 지내며 어머니가 파악되면, 어머니 성격에 맞는 다른 도우미 아주머니를 모시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소장은 7년동안 어머니를 모시며 새로운 깨달음과 영향을 받았다. 그 전까지는 몰랐던, 아니 알면서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 지나쳤을 수 있는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것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한 소장 자신의 인생에 더 큰 변화를 준 사건이었다. ◇찌개를 끓이는 남자 한 소장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자 홀로 된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고 동생들은 아우성이었다. 퇴행성관절염 수술을 위해 병원에서 한 달하고도 보름이라는 시간을 보낸 어머니는 온몸의 감각을 잃어버린 듯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아들의 안부 전화를 얼마 전에 받아 놓고도 그 사실을 까맣게 잊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치매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무턱대고 병원 신세를 지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한 소장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책임지기로 했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한 소장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어머니를 위해 찌개를 끓인다. 아침에 끓인 찌개가 남아 있어도 저녁에는 새로운 메뉴를 요리한다는 것이 그만의 철칙.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치매를 앓고 계신 어머니에게 유일한 낙은 자는 것과 먹는 것이죠. 그중에서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먹을 것을 해결해드리는 일인데, 그것을 잘할 수 없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한 소장은 요리를 하면서 어머니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소한 어머니의 음식 취향조차 말이다. 이러한 고민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자 많은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다. 도움이라고 해봐야 치매 어머니에게 해 드릴 만한 음식 레시피를 공유해주는 것 정도였지만, 요리에 서툴렀던 한 소장에게는 천금과 같은 내용이었다. 한번은 블로그 이웃이 추천해 준 레시피로 치아가 좋지 않아 고생을 하는 어머니께 갈치찜을 해드린 적이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기껏 해드렸더니 어머니는 두어 젓가락을 들고는 이내 내려놓았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났지만 어머니에게는 표현을 할 수 없는 노릇. 예전에 어머니를 모셨던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하고 나서야 알게 됐어요. 어머니가 갈치를 못 드신다는 것을요. 어머니가 천막 공장에서 일하셨을 때 한여름에 상한 갈치를 드시고는 크게 고생한 적이 있으셔서 그 이후로는 못 드신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런 사소한 것조차 몰랐던 것이죠.” ◇침묵의 어머니 “어머니는 저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요. 어떤 걸 싫어하시고, 하루 종일 어떤 일이 있으셨는지 말이에요. 한번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후 내내 잠만 잤다는 걸 알아채서 어머니에게 왜 말 안 했냐고 여쭌 적이 있어요. 어머니가 그러시더군요. ‘내 걱정 할까 봐.’” 올해 83세인 어머니는 늘 그랬다. 시어머니에게 순종하고, 말없이 해야 할 일을 해가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들처럼 말이다. 홀로 시부모를 모시고 6남매를 키웠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연민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환갑이 지나서까지 시어머니를 모시며 고생이란 고생을 다 했으면서,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며 칠순이 지날 때까지 일을 놓지 않았던 어머니였다. 한 소장은 요즘 이런 생각이 든다고 한다. ‘어머니에게 음식을 해드리는 것 빼고는 어머니가 나를 보호하는 건지, 내가 어머니를 모시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어머니는 침묵으로 올바른 인간관계를 알려주신 스승님입니다. 치매로 정신이 없으시다가도 제가 잠을 자면 열이 많은 것을 알고, 창문을 살짝 열어주시고 가시곤 하죠. 이 나이가 돼서야 그 사소한 것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치매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 “결혼을 한 뒤에 일에 빠져 있었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잘 몰랐습니다. 여자도 사람도 말이죠. 하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알아야 사랑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어머니는 어느 날 한씨에게 전기밥솥과 세탁기를 조작하는 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일터에서 끊임없이 일을 하고도, 집에 돌아와서는 집안일에 또 다시 일을 하는 아들에게 부담을 주는 느낌이었을 게다. 그도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건강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한 소장은 어머니의 그 말과 행동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의 모습을 봤다고 얘기한다. 어린 시절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고 배려했던 모습들 말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어머니가 행하는 모성애는 치매에서 회복되는 모습이었을 테니 말이다. 이러자 한 소장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일밖에 모르고 살았던 때는 배려라는 감정을 잊고 살았다. 아내와의 결별도 그때 즈음이었다. 그런 그에게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는 배려와 공감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어머니를 모시면서 생각을 해보니 사랑한다는 표현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뽀뽀하고, 안아드렸어요. 어머니도 처음에는 어색해하시다가 지금은 익숙해지셨나 봅니다.” ◇치매로 뭉친 가족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가장 많이 변한 것이요? 우리 가족들의 우애예요.” 처음에는 침대 하나만 있으면 어머니를 모실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불철주야 일을 하면서 어머니를 돌본다는 것은 현실과의 싸움 이전에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 소장은 그런 어려움을 동생들에게 내색하지 않는다. 6남매의 장남으로서 당연히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고 느끼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를 홀로 모시는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어머니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그다. “제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어머니와 있었던 일들을 일기처럼 써놓곤 했죠. 그리고 어머니를 모시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담은 책을 내니 동생들이 많이 반성하더라고요.” 한 소장의 블로그에 글이 올라오고, 6월에는 는 책이 나오자 남매들에게 변화의 미동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생판 모르는 남들도 책을 보고 나서 눈물을 쏟아낸다는데, 누구보다 한씨의 사정을 잘 아는 동생들이 장남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동생들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거나 직접 찾아뵙는 횟수가 이전보다 많아지기 시작했다. 긍정적인 변화였다. 무엇보다 형제간에 좋지 않았던 감정과 오해를 풀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 더 큰 소득이었다. “책 팔아서 받는 인세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어머니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해진 것이 더 감사하죠. 이게 어머니가 살아 생전에 남기시려는 선물이 아닌가 싶어요.” 한 소장은 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동생들이 그럽니다. 홀아비랑 과부 둘이서 아주 잘 살고 있다고요. 그래요. 어머니! 홀아비랑 과부 둘이서 연애하면서 잘 삽시다. (웃음)”
- 2015-11-05 0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