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모습
남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무척 힘들고 괴로웠다.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하고 끙끙 앓던 가슴앓이였다. 이상과 현실이 따라주지 않을 때 느끼는 좌절감은 쉽게 형언할 수 없다. 잘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 때는 고통도 따른다.
어린 시절 나는 아나운서처럼 말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남 앞에 서면
1960년도 중반 아시안 바스켓볼 챔피언 경기가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신동파 선수는 박신자 선수와 함께 국내뿐 아니라 필리핀에서도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들이 실력 발휘를 할 수 있었던 데는 농구화도 큰 작용을 했다. 그 농구화는 우리 공장에서 특수 제작한 제품이었다.
신발공장 아들
당시 국내에는 ‘비비(BB)’ 농구화와 ‘에이비
우연히 시작했다. 글을 낭송하는 것이 작품의 의미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내 글을 낭송하려니 쑥스러웠다. 작품이 좋아야 감명도 큰 것이어서 주로 좋은 작품을 골라 낭송하고 있다. 아직 고수는 아니고 순수 아마추어다. 1년에 두 번 정기공연하고 낭송 요청이 오면 가기도 한다. 낭송팀을 꾸린 것이 벌써 7년이 되었다. 현
히말라야 트레킹 때문에 네팔이라는 나라에 처음 갔다. 네팔은 한반도의 약 70% 정도 면적이며 인구는 대략 3000만 명이다. 인도, 중국, 부탄, 방글라데시에 둘러싸여 있는 내륙 국가다. 1인당 GDP가 2011년 기준으로 835달러에 불과한 빈국이기도 하다. 한국에 약 5만 명의 네팔 근로자가 와 있으며 한 해에 1만여 명이 입국을 대기하고 있다고 한다
크고 작은 후진국형 안전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통계를 관리하는 기관마다 특성이 다르고 복잡해 총망라하기가 어렵지만 인적, 물적 피해가 큰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왜 이렇게 안전사고가 많은가! 모두들 국민의 안전의식을 우려한다. 맞는 말이다.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살면서 안전의식은 후진국 수준이다.
안전관리 현장에서 오래 근무한 경험에
“먼 길 오셔서 뭐라도 건져 가셔야 할 텐데 저는 작업실이 따로 없어요.” 한 땀 한 땀 공들여 바느질하듯 상대를 배려하는 목소리는 촘촘하고 결이 고왔다.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박물관이 조각보를 구입해 소장할 만큼 경지에 이른 솜씨이지만 헝겊 자투리 갖고 잘 놀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소박하게 말하는 이소라(53) 섬유공예작가. 하루에 일고여덟 시간을 앉아
은퇴(隱退)란 사전적 의미로 ‘직임에서 물러나거나 사회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냄’이라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또 아름다운 말이다. 평생을 몸 바쳐 일한 사람에 대한 사회적 존경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고생하고 애썼으니 이제 편히 쉬어도 되지 않겠느냐는 일종의 사회적 배려가 담긴 말이다. 그래서 이전에는 은퇴한 분들을 보면 우러러 보
모두들 제 갈 곳으로 나간 후의 현관에 서서 이리저리 흩어진 신발들을 정리한다. 이 집에 사는 사람은 네 명이건만 좁은 현관에 신발들이 가득 차 있으니 볼 때마다 정리하지 않으면 가히 잔칫집 현관이다. 특히 작은아들은 매일 입는 옷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신발 때문에 갖가지 구두와 운동화들이 현관과 신발장으로 들락인다. 내가 현관 신발정리를 자주 해야 하는
엄청난 반전 혹은 거대한 진실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수도 없이 오가던 길목이었지만 분명 미용실은 없었다. 옷가게, 카페, 떡볶이집, 구둣가게가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곳. 스마트폰이 가리키는 장소에 당도했지만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은 외국 나가서도 하지 않는 일을 끝내 하고 말았다. “혹시 장성미용실이…?” 길을 물었다. 서울 종로구 삼청
‘주님 위의 건물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시니어의 로망을 넘어서(?) 이제는 모든 세대가 인생의 마지막 꿈처럼 여기는 듯한 건물주라고 하면, 흔히 일반 상가 소유자나 빌라, 빌딩 주인 등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여기 좀 독특한 건물주가 있다. 김현우 씨, 주한 외교관들에게는 ‘피터 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는 주한 외교사절들을 대상으로 주거공간 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