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안짝에 이 세상을 지나가는 덧없는 나그네. 그게 인생길. 이제 남은 생을 들판에서 일하며 만족을 구가하리라, 하득용(52) 씨는 그런 생각으로 산골에 입문했다. 산촌 노장들이 보기엔 짠했던 모양이다. “멀쩡하게 서울에서 그냥 살지 어쩌자고 내려와 생고생이오?” 오나가나 듣는 소리가 늘 그 소리였단다. 그러나 하 씨의 귀엔 맺히는 게 없는 관전평에 불과
‘영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37년의 삶 동안 극한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며 끝내 자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879점의 그림을 남겼다. 그런 고흐의 영원한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는 궁핍하지만 숭고한 예술혼을 지닌 형에게 금전적,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고흐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 동생에
춤꾼에게는 몸이 최고의 의상이라 말하는 손관중(孫官中·58) 교수. 10여 년 전 언더 하나만 걸치고 무대 위에 섰던 무용수는 이순(耳順)이 가까운 나이에도 여전히 군살 하나 없다. 자기관리의 혹독함이 미루어 짐작됐다. 남자가 무용을 한다면 다들 괴이하게 바라보던 시절, 그는 운명처럼 춤에 이끌렸다. 그리고 무용학과 교수가 됐다. 남자 무용수로는 국내 최초
봄이 힘들다. 혹자는 약동이니, 새싹이니, 희망을 얘기하지만 왠지 필자는 봄이 어렵다. 새 학년 ,새 교실, 새 친구… 어쩐지 3월이면 기지개를 펴야만 할 것 같고, 뭔가 엄청난 시작을 해야 할 것 같은 채무에 맘이 무겁다. 분명 겨울도 나름 살아냈는데 겨울잠에서 방금 깬 아딸딸한 곰 취급이 싫은 게다.
해마다 이런 투정을 했건만 여전히 봄은 오고 또
인류학강의 시간. 교수님은 키가 훤칠하고 얼굴이 맑았다. 깊은 표정, 차분하고 박식했다. 무채색의 옷차림으로 여대생들의 감성을 자극할 만큼 충분히 멋졌다. 미팅을 즐기느라 책을 잘 읽지 않는 우리에게 말했다.
“하버드에 적응하느라 긴장을 풀지 못했어. 읽으라는 책이 얼마나 많은지 체력과의 싸움이었지. 다 읽지 못하고 가는 날은 수업을 제대로 들을 수가
지난 가을에 도시여행 해설가과정 교육을 받았는데, 그 교육에서 필자가 우리 조를 대표해서 해설을 맡게 되었다. 평소에 성북동에 대해,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생각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터라, 성북동을 해설하기로 정하고 답사를 갔다.
평소에 아담하고 아름답다고 입소문난 길상사엘 갔다. 경내를 둘러보다가 ‘길상화 보살’의 사당과 공덕비 앞에서 그만, 넋을 잃고
남자들이 퇴직 하면서 꾸는 꿈이 있다. 그동안 일벌레처럼 직장에 충성하며 소홀히 했던 가정에 이제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거다. 새벽같이 출근하고 별을 보고 퇴근하느라 아내에게도 자녀들에게도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한 미안함 때문이다. 그래서 남은 인생은 적어도 아내에게만은 그 역할을 다하겠다고 다짐한다. 아내와 많은 시간도 갖고 시장도 보고 여행도 하면서
아내는 필자가 젊어서 코를 골며 잘 때는 피곤해서 그러려니 했단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한 단계 더 높이 발전하여 무호흡증세가 나타나니 방관할 수 없어 나와 상의를 해왔다. 자다가 숨이 멈출 것 같아 걱정이 되어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것이다. 코골이가 심하다는 말을 대충 듣고 넘겨온 세월이 10년이 넘었으니 무시하고 지냈는데 아내가 잠을 이룰 수 없다고
어느새 봄의 기운이 느껴진다. 아파트 뒤편 개울에 꽁꽁 얼었던 얼음과 눈도 녹아서 조금 깊은 여울에는 콸콸 소리를 내며 물결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며 되풀이되는 자연의 변화가 신비스러워 베란다에 서서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날씨도 풀렸고 오랜만에 삼총사 친구가 만나 영화 한 편 보자고 의기투합했다.
한동안 비싼 값 주고 영화를 보다가 시니어 할
세상엔 참으로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역사가 있다. 우리나라도 건국부터 왕조가 바뀌는 동안의 역사 이야기를 필자는 소설보다 더 흥미롭게 배웠다.
왕위에 오르기 위해, 아니면 왕권을 지키려고 암투와 배신, 음모 등 많은 술수가 동원되는 건 동양이나 서양이 마찬가지인 것 같다.
따스한 겨울 어느 날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영국의 역사 한 부분인 리처드 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