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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그리움을 넘어
-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 하는 사람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리움이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어렸을 때의 일을 글로 한번 꼭 표현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항상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만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돌아가 볼 수 없는 정말 그리운 그 시절의 추억을 끄집어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정말 기쁜 마음이다. 유년시절 필자는 살아오면서 자신을 서울 토박이라고 생각해 왔다. 60년 인생에서 50년이 넘는 시간을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당연히 서울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는데 실은 고향은 대전이다. 필자 머리가 특별히 좋은 건 아니지만 유년 시절의 많은 일을 기억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마 서너 살 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와 유성온천 만년장호텔의 개울 위 다리에서 벚나무에 기대어 사진을 찍었던 일도 기억나고, 만년장 객실의 커다란 전면 유리창 밖으로 봄날의 벚꽃이 하나 가득 흩날려 쏟아지던 것도 생생하다. 필자는 1952년 아름다운 계절 6월의 첫날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전 근교에서 큰 포도밭을 하시는 할아버지의 장남으로 많은 동생을 보살펴야 했으므로 피아노를 좋아하셨지만 예술가의 길로 가지 못하고 초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셨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평양이 고향인 이북 사람이셨다. 할아버지는 경성제대를 졸업하시고 충남대학교에서 사학과 교수로 평생 후학을 길러내셨으며 명망이 두텁고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아주 인자하고 훌륭한 분이였다. 아버지는 대전 사람이지만 어머니는 서울 옥인동이 고향이고 진명여고를 다니다 대전으로 피난 가서 대전여고를 졸업했다 어머니도 역시 피아노를 전공해서 초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었는데 거기서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집엔 피아노가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는 건 참 즐거운 일이었다. 전쟁도 있었고 다들 어려운 형편이었을 텐데 두 시림은 어떻게 피아노를 그렇게 잘 쳤는지 존경스럽다. 필자가 태어난 동네는 대전역 건너편 골목의 정동이라는 동네였다. 아주 어릴 때의 일인데도 그때 있었던 일들이 기억이 나니 필자 머리가 보통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한다. (크면서 공부는 잘 못 했지만…. 부모는 딸 셋을 낳고 더는 아이를 갖지 않으셔서 필자 집은 세 자매가 되었다. 필자 집은 대전역 건너편의 중심가에 있었고 친가는 조금 떨어진 가양동, 외가는 10km쯤 떨어진 문창동에 있었는데 아주 어릴 때부터 외가를 좋아해서 거기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곳이 그렇게 좋았던 이유는 바로 꿈과도 같은 집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제 나라로 돌아간 일본 사람의 적산가옥이라 불리던 집을 외할아버지가 장만하셨는데 그 집은 정말 꿈의 동산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집 건물이 있고 왼쪽으로는 커다란 팽나무에 할아버지께서 필자를 위해 매어주신 기다란 그네가 보였다. 필자는 언젠가는 꼭 이 집에 대해서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필력이 모자라 표현을 어찌해야 할지 항상 머릿속에 담아 두고만 있었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는 마음만 갖고 있었다. 마당에는 일본 사람 특유의 정원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수 있을 정도의 동산과 돌다리가 걸쳐진 연못이 있었다. 연못 속에 돌로 만든 거북도 멋있었고 연못 속에서 피어난 늘씬하게 쭉쭉 뻗은 수선화의 초록 이파리와 꽃도 아름다웠다. 대문에서부터 집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까지 놓인 발 디딤돌 외의 공간에는 빼곡히 알록달록 키 작은 채송화가 융단처럼 깔렸기도 했는데 외할머니께서 가꾸신 것이다. 오른쪽으로 가장 끝에 부엌이 있고 그 옆에 칸 칸으로 나누어진 커다란 미닫이 유리창이 안방 문이었다. 부엌 앞에는 아래위로 손잡이를 움직이면 언제나 콸콸 시원한 물이 쏟아지는 펌프가 있었고 안방을 지나 돌출된 현관을 가진 작은방 옆에는 석류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새빨간 석류가 딱 벌어져서 그 안에 보석 같은 알맹이가 가득 들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 외가에 들어와 본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필자는 덕분에 동네의 헤로인이 될 수 있었다. 놀이할 때에도 필자는 우선권을 가질 수 있었으며 동네의 또래 아이들은 모두 필자를 떠받쳐주었기 때문에 그곳이 그렇게 좋았을 수도 있겠다. 필자는 항상 집이 부자인 줄 알고 살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당시 처절하게 돈을 모으셨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부족함 없이 딸 셋에게 풍족하게 해 주려고 부모가 많이 노력하셨다는 걸 알았다. 필자는 어릴 땐 숫기 충만하고 남 앞에 서는 걸 좋아했었던 것 같다. 대흥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책 읽기를 잘해서 4학년 때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교장 훈화하는 단상에 올라 동화구연을 하기도 했다. 욕심 많은 어부의 아내 이야기로 어부가 잡아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부리다 망한다는 교훈적 이야기였던 것도 생각난다. 동화구연이 끝나고 과자를 사 먹으려고 교문 밖 문방구에 갔더니 주인아줌마가 “너 참 잘하더라” 라고 말씀을 해서 군것질을 못 사고 공연히 연필 한 자루만 사 들고 오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공인이 되면 그렇게 체면치레도 해야 하는가 보다. 필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유행가도 잘 불렀다. 또 어머니와 영화를 보고 온 날은 아이들 앞에서 어찌나 실감 나게 연기를 해 보였던지 극장에 갔다 온 것보다 더 재미있다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어릴 때 그런 재주가 있었다. 이렇게 신나게 살던 필자 맘에 꼭 드는 도시인 대전을 떠날 일이 생겼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서울로 이사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전이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필자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필자는 식구들이 필자만 외가에 두고 떠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지만 며칠 후 초등학교 6학년이 시작되던 해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의 첫 집은 아현동에 있었고 아현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아현동 집은 대문 앞에 대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어서 대추나무 집이라고 불렸으며 아주 예쁘고 깔끔한 한옥이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 다녔던 아현초등학교를 한 학기만 마치고 전학을 간 곳은 돈암초등학교였다. 집이 돈암동으로 이사했기 때문이었다. 돈암동 집 역시 한옥이었다. 그때로써는 더 좋은 동네로 옮긴 거지만 요즘으로 따져보면 아현동은 지금 너무나 발전한 고층빌딩 숲으로 시내 중심가가 되었으니 이사하지 않고 그냥 그 대추나무집에 살았다면 어머니, 아버지는 재테크를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후 돈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필자는 동대문 밖 창신동에 있는 동덕여중에 들어갔다. 동덕여중은 일제 강점기에 여성교육에 큰 뜻을 품으신 조동식 박사가 설립한 민족 학교라 할 수 있는데 교정이 아름답고 건물이 너무나 멋졌다. 본관 건물의 빨간 벽돌담을 초록 담쟁이가 가득 뒤덮어 고풍스러운 모습은 그림 동화책을 보는 듯 마음을 설레게 했다. 등교하던 모습도 생생하다. 허리를 졸라매는 하얀 블라우스와 군청색 스커트의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고 등교했다. 등굣길의 버스 안이 얼마나 만원이었는지 그때 학교에 다녔던 학생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터질 듯한 버스 속으로 안내양이 등으로 밀며 필자를 구겨 넣었다. 그러면 운전기사 아저씨는 일부러 차체를 흔들어 뭉쳐 있는 사람들을 고루 뒤섞어 놓았다. 버스에서 내리면 반듯하게 다림질하고 주름 잡아 허리를 매어 입은 교복이 구겨지고 삐뚤어져서 한동안은 동소문동 집에서부터 보문동, 신설동을 돌아 창신동 학교까지 걸어 다니기도 했다. 혜경, 대학생이 되다 그리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고3 때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꼭 가고 싶었던 이화여대는 아니어도 청파동 언덕의 아름다운 숙명여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과도 영문과나 불문과 아니면 국문과가 좋았지만 예비고사 성적에 맞추어 무난하게 경제학과를 지망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최고의 학과이지만 그 당시 필자가 경제학과 학생이 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뭐 어쨌든 이렇게 청춘 시대가 활짝 열렸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공부보다는 노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은 듯하다. 수많은 미팅도 있었고 친구들과 명동이나 종로 등 좋아하는 거리를 섭렵하며 다녔다. 이렇게 미팅 전성시대를 누렸지만 정작 결혼은 매우 철저한 중매로 했으니 아이러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었으나 그런 추억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 아닐까? 필자는 학교 다니는 동안 교직과목을 듣고 교생실습을 거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땄다. 친구들은 취직한다고 동분서주했지만 필자는 그때도 놀기만 했다. 교사자격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근무지였다. 서울에서는 임용고시가 너무나 어려워 통과하기 어렵다고들 했다. 그래서 많은 친구가 경기나 지방으로 교사가 되어 떠났다. 지방은 서울보다는 선생님 되기가 쉬웠다고 한다. 그러나 딸만 셋인 아버지는 필자를 지방에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결국 필자는 본의 아니게 빈둥빈둥 노는 신세가 되었다. 끔찍하게 딸들을 사랑한 아버지 덕분에…. 20대 후반이 됐는데도 시집을 못 가 나이가 27세가 되자 어머니는 매일 한숨을 내 쉬며 걱정했다. 대학 시절 그렇게 연애를 많이 했는데 정작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시집을 못 간 것이다. 그래서 선을 보기 시작했다. 무척 많이 보았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필자가 자타공인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많은 선을 보았는데 어느 날 부모님이 강력히 추천하는 사람을 만났다. 약대를 나왔고 시아버지는 변호사라고 했다. 어머니는 첫딸이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야 동생들도 그렇게 될 거라며 이 사람을 만나보라고 했다. 선을 봤는데 남자가 너무 못 생겨 보였다. 못 생겨서 싫다고 했더니 제 복을 제가 찬다면서 야단치셨다. 그런데 이야기해 보니 마음이 참 착해 보였다. 그래서 이 사람으로 결정해 버리고 말았다. 부잣집 맏며느리? 이 남자를 만나보니 인물보다는 마음이 참 착해 보였다. 더구나 어느 날 자기 집 얘기를 하는데 집에 수영장이 있다는 게 아닌가. 필자는 거짓말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 외국 영화에서 본 것처럼 넓고 푸른 잔디밭에 파란 물이 출렁이는 예쁜 풀장을 생각한 것이다. 실제 가서 보니 뭐, 거짓말은 아니고 정말 집안에 수영장이 있긴 했다. 집은 장충동 고급 주택가인데 어머니가 손수 지휘하셔서 아주 공들여 지은 집이었다. 필자가 상상한 그런 수영장이 있는 집은 아니었지만 멋지고 좋은 집이었다. 전면으로 볼 때 3층이었고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오른쪽으로는 분수가 나오는 정원이 있고 왼쪽으로 반지하인 1층이 있는데 그 층에 운전기사 방과 제사나 명절 때만 사용한다는 넓은 부엌이 있고 그 구석에 어린 시동생과 시누이를 위해 네모난 풀장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 수영장을 보고 필자가 엉뚱하게 상상했던 게 생각나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결국 결혼했다. 처음엔 결혼하고 바로 분가하기로 했었는데 사정이 있었다. 시아버지가 첩이 있어 따로 살고 있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집이 너무 큰 데 식구가 없으니 몇 년 만 같이 살자고 제의했다. 이혼의 위기에서 그런데 그렇게 시댁은 빌딩도 여러 채 갖고 있고 분당이 개발되기 전에 서현동이라는 곳에 정원이 아름다운 크고 근사한 별장도 있었으며 시아버지가 아직 현역 변호사로 활동하는 등 굉장한 부자이긴 했지만 첩과 나가 계셨기 때문에 좀 복잡했다. 그렇게 멋진 집에서 5년을 살고 분가했다. 분가는 친정 옆 동네로 했다. 시댁의 가정사가 복잡한 것과 대조해서 친정은 너무나 인자하신 아버지가 있어 언제나 평화로웠다. 특히 아버지는 손자를 목숨처럼 사랑했다. 이혼의 위기 부잣집 맏며느리라고 부러움을 받고 살던 필자에게 큰일이 일어났다. 상속받은 소공동 프라자호텔 뒤편 북창동에 있던 5층 건물이 넘어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 건물은 시아버지가 죽기 직전까지 변호사 사무실로 쓰고 있었던 알토란같은 건물이었다. 위치가 좋아 건물세도 잘 나오고 필자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다고 표현하며 좋아했었는데 마음만 착한 남편이 사기에 걸려 보증을 서는 바람에 날려 버렸다. 그런 상황에 놓이자 이혼도 고려하게 되고 심각해졌는데 필자는 이혼하지 않았다. 아들을 생각해서 온전한 가정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주변에선 필자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가끔 남편을 구박하기도 하고 화풀이도 하지만 이혼 안 한 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큰 재산을 잃었지만 든든한 시댁과 친정아버지 덕분에 그리 힘들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다. 아들이 잘 자라주었고 키우는 동안 너무나도 기쁘거나 즐거운 일이 많았기 때문에 없어진 큰 재산이 아깝긴 해도 무난하게 살아왔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아주 예쁜 손녀와 돌 지난 손자, 아들, 며느리를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 행복한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큰 불행이 닥쳤다. 남편이 큰 병에 걸렸다. 정말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이다. 투병 중인 남편을 보며 한때 재산을 없앴다고 못되게 굴었던 일도 후회돼 마음이 아팠다. 이런 상황이 되어 보니 유행가 가사가 다 진리로 다가온다. 있을 때 잘하라는 유치한 말이 정말 가슴에 와 닿고 누구에게나 해 주고 싶은 말이다.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소풍 나온 이 한 세상 잘 살았으며 이별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을 갖자고 다짐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 2016-06-30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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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지의 한국인
- 누구나 그렇듯이 앞만 보고 살아온 것 같다. 방향과 방법은 다를지라도 모두가 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것 같다. 때로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왔노라고 위안도 해본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몸이 맘대로 안 들어 먹는다.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알 수없는 통증으로 견딜 수가 없다. 이것이 갱년기 인가? 옛날 엄마가 하던 소리, “너희들도 나이 먹어 봐라.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 하시던 말씀들이 그대로 재연되고 있었다. 세상에 무서울 것 없이 눈썹 휘날리며 멋도 부려가며 정신 없이 살아왔는데 병명도 모르는 병원체가 자신을 마구 무너져 내리게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본성이 어디로 갈 것 인가. 몸 속에 여전히 꿈틀거리는 열정의 피는 다시 생동하고 있었다. 필자의 별명은 “의지의 한국인”이다. 그러나 정말 좋아하는 또 하나의 별명이 있었다. 자신을 늘 살아있도록 만들어 준 말, 바로 산소 같은 여자라고 사람들은 불렀다. 그 말은 언뜻 들으면 칭찬 같기도 하지만 어쩌면 상당히 부담스러운 말 일수도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거울을 들여다 보면서 혼자 지껄였다. "산소? 그래, 그렇게 살자. 앞만보고 열심히 살다 보면 없는 산소도 뿜어져 나와 내 몸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더 신명 나게 살아왔다. 그저 닥쳐올 미래보다는 당장 현실에 적응하며 힘들 때는 때때로 체념도 하면서, 열심히 처해져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러다 보면 그것들의 연속이 좋은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나름의 위안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필자는 두 딸들에게도 그저 욕심내지 말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서 살다보면 다 살기마련이라고 습관처럼 말하곤한다. 그것이 필자의 가훈이자 좌우명이었다. 두 딸들은 말한다. 어느 때는 엄마가 계모냐고 또는 악녀라고 소리치며 반문을 한다. 아마도 자기들 마음을 몰라준다고 반란스러운 생각을 한 모양이다. 왜냐하면 다른 집 엄마처럼 마냥 다정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집 같으면 공부 잘하고 착하고 그만하면 떠 받들어 주련만 필자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 보다 정성을 다했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기에 그것들이 아이들에게는 어쩌면 훌륭한 엄마로 내제되어 있을런 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인가. 우연히 아이들이 의대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제출하는 서류 안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글을 읽게 되었다. 잔잔하게 떨려오는 감동이 손등위로 뜨거운 눈물을 떨어트리도록 짜릿했다. 아니 아이들이 흐뭇하고 대견스러웠다. 자기들 소개서에 엄마의 생애를 그려 넣고 있었다. 이러이러한 장한 엄마 덕분에 그 영향 아래 자기 들이 자라온 것을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소개하며 엄마의 지나온 삶을 아주 정확하고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결국 아이들에게 계모같은 엄마는 대단한 멘토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 감격의 감사함으로 오늘날 까지 버텨 왔는 지도 모르겠지만 필자는 그것들을 복사 해 지금까지도 아이들 몰래 고이 간직하고 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지난 한해는 너무나 캄캄한 지옥 이었다. 물론 다시 시작하는 한국생활에 적응기간이라고 할 수 있었겠지만 감당하기가 아주 힘이 들었다. 한 해 동안 응급실로 실려간 횟수가 아마도 대 여섯 번은 되는 것 같다. 정말 모든 것 다 내려 놓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남은 미련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5년의 시간동안 떨어져 있던 가족들은 한국에서 다시 만났고, 한 가족이 사랑으로 섞이는 과정은 일년이라는 세월과 그 매일은 전쟁터였다. 다행히도 가족 전쟁이 끝나게 된 것은 오로지 필자 한사람 자신의 패전이었다. 자식들이 더이상 품안에 자식이 아님을 다소곳이 낮은 자세로 받아 들여야만 했다. 그것 만이 싸움터 해결의 실마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식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인가보다. 지난날의 군주로 지내왔던 여왕의 시대가 끝나고, 그저 자식과 부모라는 단어 앞에 적당히 양보하며 받아들이고 성인이 돼버린 자식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부모가 결국 무기를 내려놓고 먼저 달라지기를 하면서 그 싸움은 종전이 될수있었다. 예전에 사람들은 필자를 보면 또 힘이 솟는다고 했었다. 에너지가 넘친다는 것이다. 그래, 솟구치는 에너지가 그들에게 전달되어 함께 나태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란 말인가. 나름 대로 위안도 하면서 열심히 그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던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은 잠시도 힘들다고 생각치 않았다. 그리고 이제 세월지나 나이든 지금 이순간도 애써서 행복은 넘쳐흐른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잘돼서가 아니라 이글을 쓰는 자신이 커다란 기쁨으로 다가와 작은 가슴에 충만하기 때문이다. 기쁨은 작은 것으로 부터 시작되고 감사는 자신이 마음먹기에 따른 것이다. 모든것 내려놓았던 마음에 휴식은 다시 자신의 울타리에서 잉태를 시작하였고, 필자를 의지의 한국인으로 정중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그것은 신비하게도 앤돌핀이라는 에너지를 창조 해주었다. 바로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내뱉어 지나온 삶을 글쓰기로 우러내어 세상과 소통하도록 해주는 일이었다. 글쓰기, 누구나 해보고 싶어하는 위대한 소망이며 선망의 대상이리라. 풀 죽어 시들시들 했던 시니어 라는 이름이 무거운 몸을 부추겨 다시 산소를 뿜으려 노력하니 하루가 활기차고 병원가는 일이 줄었다. 병원가는 비용으로 맛난것들도 사먹으며 힘을 충전한다. 글을 쓰는 시간, 자신의 솔직한 마음들을 드러내며 만들어가는 창조의 힘은 하나의 신세계가 되어 그 파장은 남편도 아이들도 모두 웃게 만들어주었다. 의지의 한국인은 여전히 살아 숨 쉬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젊은 날의 그 싱싱했던 의지가 아직은 남아 있기에 그 힘으로 자신의 삶을 당당히 써내려 갈것이다. 그리고 멋들어진 한 권의 책을 펴내어 사랑하는 주변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다. 그저 열심히 한국사람으로 당당하게 살아왔노라고 외치면서 묵묵히 자신의 찬란했던 그 별명들을 그대로 펼쳐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오늘도 한껏 뿜어져 나올것만 같은 산소의 에너지가 아이들에게 그리고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잠시 쉬어가는 쉼터의 활력소가 되기를 꿈 꾸어 본다.
- 2016-06-29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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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입학식 60년 전과 후
- 새 학기를 맞아 환갑 띠 동갑 쌍둥이 손주와 외손자의 입학식이 열렸다. 60년 전 초등학교 입학식이 오늘과 비교되었다.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친구 잘 사귀면서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랐다. 오전에 쌍둥이 손녀와 손자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열렸다. 바로 집과 가까운 학교이지만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잔뜩 호기심에 차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움에 대한 관심은 같은가보다. 어머님의 손을 잡고 한참 걸어가서 참가했던 초등학교 입하식이 생각났다. 입학 전 몇 년 동안 할아버님이 만드신 필사본으로 천자문을 공부하고 시조를 읊었다. 아버님에게 한글을, 어머님에게 산수를 익혔다. 하지만 ‘신학문’을 배우러 처음 가는 학교가 매우 궁금하여 밤잠을 설쳤다. 입학식이 진행되었다.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도 조용해졌다. 옛 입학식 때 교장선생님의 ‘훈화’가 떠올랐다. 당시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뭔가 보통사람과 다른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였다. 라디오 소리도 들어본 일이 없던 그 시절, 풍금반주 애국가를 처음 듣고 가슴이 뭉클했던 것도 기억났다. 책을 처음 받았고 어머님은 공책과 연필을 사주셨다. 글씨와 그림이 함께 인쇄된 새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잉크에 흠뻑 밴 책의 냄새가 정말 좋았다. 그때부터 책을 좋아하는 학생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이 기억에 오래 남고 인생에 영향을 가장 많이 주었다. 요즘 아이들은 이미 좋은 책을 읽었기에 학교에서 받은 책에 대한 호기심은 크지 않을 터이다. 예쁜 책가방과 필기구는 선물로 이미 챙겼다. 장난감으로 재미있는 놀이하기를 좋아한다. 방과 후에는 뛰어노는 것보다 체육관, 학원을 찾아 나설 것이다. 한국전쟁 정전 후 지금의 최빈국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 처음 본 공책과 연필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잘 깎이지 않는 연필을 낫을 갈아가면서 조심조심 깎아주셨던 아버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공책은 한 번 쓰기도 어려울 정도로 잘 찢어졌다. 딱딱한 연필심에 침을 발라서 공책이 파이지 않도록 글씨를 살살 그려야하였다. 연필심 흑연으로 입술은 시커멓게 물이 들곤 하였다. 오후에는 외손자가 유치원에 입학하였다. 어린이 집을 마치고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대비하는 중이다. 손재주가 좋은 이 녀석은 종이접기 작품을 내 손에 쥐어주면서 ‘입학선물’이라며 재롱을 부렸다. 담임선생님의 주의 말씀과 학교생활안내가 있었다. 새겨듣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였다. 교실과 선생님이 부족하여 합반수업을 하였던 옛날이 생각났다. 아무튼 좋은 환경에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랐다. 아들가족은 아주 가깝게 살고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들가족을 대신하여 쌍둥이의 손을 잡고 유치원의 등교를 도왔다. 올 첫 학년은 육아 휴직한 며느리가 직접 보살피고 있다. 퇴근이 늦은 딸 가족을 위하여 외손자의 어린이집 하교를 가끔 도왔다. 앞으로도 즐거운 마음으로 손주들의 등하교를 보살필 예정이다. 아이들의 입학식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기념사진에 예쁜 모습을 담고 교문을 나섰다. 먼 훗날 아이들의 추억에 할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 상상의 나래를 폈다.
- 2016-06-2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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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5 기획... 이 독립투사에 꽂힌 이유] 조선의 싹을 키워낸 최용신
- 중학교때, 작문시간엔 일주일에 꼭 책 한 권씩 읽고 원고지에 독후감을 써서 내는 숙제가 있었다. 숙제를 내면, 선생님이 빨간 펜으로 밑줄을 그어 가면서 평을 써 주었는데, 선생님이 평이 무척이나 궁금해서 숙제를 돌려 받는 날이 기다려지곤 했다. 문학을 사랑하는 작문선생님을 만나게 된 덕분에, 문학작품을 많이 읽게 되었는데, 그때 감명 깊게 읽은 작품 중의 하나가 심훈의 소설 ‘상록수’였다. 심훈은 1935년, 농촌계몽운동 소설 ‘상록수’를 썼다. 상록수는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고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중학생 이였던 필자의 눈에 여자주인공 채영신은 아주 멋진 사람이었고, 필자가 닮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 시절에 영화도 보았는데,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하나는 농촌실습을 마치고 실습 결과를 보고하는 ‘학생농촌계몽대귀환보고회장’에서 채영신은 당찬 목소리로 “농민들에게 희망의 정신을 심어주고, 우리 남녀가 모두 일어나 한몸 희생하여 농촌을 붙들어주지 않으면 이 민족은 영원히 일어나지 못 할 것입니다.”“여러분이 학교 졸업 후 의자에 앉아 월급만 받으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여러분이 화려한 도시생활만 꿈꾸고, 허영의 탐리에 빠진다면 이 민족은 어찌 되겠습니까?”하고 외쳤다. 이 장면에서 필자는 가슴 속에서 울컥하는 것이 올라오고, 큰 감동을 받았다. 또, 하나는 일본 면서기의 지시에 따라 제한된 수의 학생 밖에는 가르칠 수가 없게 되었을 때, 예배당 안에 들어 올 수 없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채영신의 가슴아파하던 장면과,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배당 밖에 서있는 아이들을 위하여, 창문가에 칠판을 세우고, 글씨를 크게 써서 창 밖에서도 볼 수 있도록 해, 울먹이면서 큰소리로 읽어가며 글을 가르치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필자의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절로 난다. 마지막은 남자주인공 박동혁이 채영신에게 ‘샘골 강습소’ 마당에 걸어둘 ‘종’을 선물하는 장면인데, 너무 가난하여 종을 살 돈이 없어서, 샘골 까지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서 오고, 차비를 아껴 그 돈으로 종을 사온 것이다.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런 멋지고 아름다운 소설과 영화 속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이 바로 ‘애국계몽독립운동가 최용신’이다. 소설도, 영화도, 실제의 최용신을 잘 표현 최용신은 1928년, 서울 감리교 협성여신학교에 입학 했을 때, 여성독립운동가 황애덕을 만나게 된다. 황애덕의 가르침으로, 민족을 위하여, 기독교정신인 ‘한알의 밀알’이 되고자 농촌계몽운동의 꿈을 키웠다. 그러던 중, 기독교청년회(YMCA) 농촌사업부는 1931년 그를 수원 샘골로 파견했다. 최용신은 가난으로 글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던 농촌의 아이들에게, 글을 모르는 아이들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글을 가르치며, 농촌계몽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한다. 또, 산수, 재봉, 수예 등을 가르치고, 위생 등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하여, 농촌 계몽에 헌신적이었다. 그는 샘골 마을 아이들을 ‘조선의 싹’이라고 부르고, 조선어가 국어임을 가르쳐, 조국에 대해 크게 눈뜨게 했으며, “나라를 되찾으려면 공부를 해서 힘을 길러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독립의식을 심어주는 교육을 했다. 그러나, 최용신은 1909년에 태어나, 겨우 26년을 살고, 1935년에,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과로에 시달리다가 애석하게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훌륭한 삶과 정신을 후대에 길이길이 전해서 ‘애국계몽독립운동가 최용신’과 같은 사람들이 이 땅에 많이 나오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 2016-06-29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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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5 기획... 이 독립투사에 꽂힌 이유] 잊혀진 독립운동가 김란사
- ‘독립운동가’하면 총칼로 맞서 싸우거나 옥고를 치른 인물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김란사는 유관순 열사의 스승으로 3.1운동을 태동시킨 주역이었다. 고종의 통역관이자 독립의 숨은 공로자였으나 그의 후손조차 활약을 뒤늦게 알 만큼 잊혀왔다. 성차별이 극심했던 조선 말기에 여성해방을 논하고 실천한 여인 김란사는 누구일까? 1872년(고종9년) 평양 출생으로 남편의 성 ‘하’를 따르고 난사(Nancy)는 이화학당 입학 후 지은 영어 이름이다. 하란사는 외교관 남편을 통해 일찍부터 신문물을 접했고, 기혼자는 안 된다던 이화학당의 문을 수차례 두드렸다. 그녀는 당시 당장인 프라이 여사에게 가지고 온 등불을 끄고는 자신의 삶이 이와 같다고 말하면서 교육받기를 간청했다. “내 인생은 한밤중처럼 어둡다. 학문의 빛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결국 1896년 이화학당에 입학해 육아, 가사, 학업을 병행하며 열정을 불태운 하란사는 1년 뒤, 일본 대학에서 1년 그 후 자비로 미국으로 가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 문학사를 받는다. 한국여성 최초로 학사학위를 취득한 것이다. 그녀의 집념과 과단성 있는 행동력과 남편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란사 등 외국의 신문물을 깨쳐 돌아온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큰 기대를 받았다. 귀국한 하란사는 이화학당 등의 교수로 재직하며 여학생들을 계몽하였다. 또 학생들의 어머니들을 모아 자모회를 구성, 육아법, 가정 의학 등을 가르쳤고 여성들의 자각을 촉구했다. 여성이 주도하는 비폭력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그에게 감화 받은 학생 중에는 유관순 열사도 있었다. 학생 자치단체인 ‘이문회’를 이끌며 암울한 민족의 현실과 세계정세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하란사는 국내외 독립운동 관련 비밀 연락도 담당했는데, 특히 고종의 밀사로 활약했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 여성 대표로 참석해 조선 독립을 호소할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이 폭로되고 하란사는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45세. 그녀의 시체를 확인한 남편 하상기는 독살 당해 검게 변해 있었다고 말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였던 배정자가 살해했다는 이야기 등 여러 독살설이 전해질 뿐이다. 그녀가 뜻을 펼치기에 시대는 너무 암울했다. 그녀의 놀라운 활약상도 많은 여성 선각자들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수려한 언변, 지성미와 뛰어난 패션 감각, 다재다능하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는 신여성 하란사. 학생들에게 그녀가 늘 했던 말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건네진다. “꺼진 등불을 켜라.”
- 2016-06-2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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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브라보 액티브 시니어
- 사주나 점을 믿지는 않지만, 매번 '무난’, ‘평탄’ 같은 단어가 튀어 나온다. 전반적으로 필자 삶을 돌아 볼 때 과연 맞는 말인 것 같다. 인생 전반의 삶 인생의 여러 중대사가 결정되는 1970년대가 필자 20대 나이였다. 그 시기 대학교에 입학하고 군대에 갔다 오고 취직해서 결혼했으니 말이다. 아들딸까지 낳았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운이 좋았는지 대학교도 단번에 합격하고 군대도 카투사로 갔다 왔다. 취업도 서로 오라는 데가 많아서 골라서 들어갔으니 요즘 청년들에 비하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 직장에서 아내를 만나고 건설회사인 둘째 직장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근무를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스포츠 장갑을 만들어 수출하는 중소기업에 스카우트 되어 임원으로서 12년간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혀 연고도 없던 회사에 기존 임원들보다 10세 연하인데도 젊은 패기로 승승장구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입사 6년 만에 단일 바이어에게 거의 의존하던 매출구조를 미국, 유럽, 내수시장으로 확장해 건전한 포트폴리오대로 만들면서 세계 스포츠장갑 1위 업체로 부상시켰다. 1997년 IMF 금융위기는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스포츠 브랜드 UMBRO 사업에도 직격탄이었다. 미화로 지급해야 하는 로열티와 수입대금도 막대했지만 국내 시장이 초토화되어 더 이상 사업을 끌고 나갈 수 없었다. 결국 경영책임을 지고 퇴사한 것이 21세기를 두 달 앞둔 1999년 10월이었다. 직장 생활 23년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나이 49세였다. 묘하게 퇴직 1주일 후 섬유의날 시상식에서모범경영인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재직 중이었더라면 큰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자리였으나 찜찜하게 퇴직하고 난 처지라서 가족들과 단출하게 자축할 수밖에 없었다. 퇴직했으니 앞으로가 막막했으나 대통령 표창은 큰 용기를 주었다. 뭔가 큰 힘이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표창은 위력을 발휘했다.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KAPPA의 한국 런칭도 그 덕분에 이뤄졌다. KAPPA의 성공 덕분에 JAKO 등 다른 스포츠 브랜드 도입도 수월했다. 비즈니스뿐 만 아니라 각종 서류 심사 때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밀레니엄 시대라는 2000년부터 퇴직 이후의 새 삶이 시작되었다. UMBRO 대표 시절에 여러모로 도와줬던 업자가 동대문 사무실에 나와 소일하라며 권유했다. 그의 사업도 도울 겸 필자 사업으로 스포츠 장갑을 수출하던 시절에 가까웠던 바이어들과 연락하며 지냈다. 주문량이 적은 바이어들은 본사에서도 귀찮아하던 것을 필자가 주문을 대신 처리해줬다. 한 바이어는 당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공식 스폰서가 되면서 대량주문을 해 와서 그때 꽤 짭짤한 수익을 건졌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 미국 경기가 급속하게 하락하면서 이 비즈니스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중국의 저임금을 활용하여 그나마 주문을 소화했었는데 중국의 인건비가 급속하게 올라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여기서 더 비즈니스를 이어가려면 중국보다 임금이 더 저렴한 나라를 찾아다니며 바이어들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했으나 비즈니스는 이쯤에서 접자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인생도 50 줄인데 돈을 더 벌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필자랑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퇴직 대열에 합류하면서 실패하는 사람도 봤고 건강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이 많았다.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인데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뜻 든 것이다. 그래서 자전거, 등산을 비롯하여 건강을 위한 삶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여러 가지 시도해본 결과 댄스스포츠가 가장 잘 맞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댄스 이야기 93년 한국에 댄스스포츠가 체계를 갖춰 상륙하자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했었다. 당시만 해도 댄스스포츠를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곳도 드물던 시절이었다. 독일에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어느 와인 촌 홀에서 백발의 할아버지와 고등학생은 되어 보이는 소녀가 같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완전히 매료된 충격적인 일이 기억났다. 그 춤을 제대로 배워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몇 몇 선생을 거치도 갈증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고는 10년 만에 다시 댄스스포츠에 빠져 들었다. 집 근처 올림픽공원 스포츠교실에서 라틴댄스를 가르치는 데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한번은 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댄스 경연대회를 했는데 하루 종일 예선부터 뛰어 최종 챔피언으로 등극하는 일이 생겼다. 춤에 대한 재능을 처음으로 확인한 일이다. 다음 해에도 챔피언 자리를 유지했다. 이 정도 했으면 필자도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기대학교 사회교육원의 ‘댄스스포츠 코치아카데미 코스’에 도전했다. 1년 만에 1, 2급 자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때 올림픽공원에서 가르치던 선생이 영국 유학을 권했다. 댄스스포츠의 본고장은 영국이며 거기 가서 공부하고 국제지도자 자격증을 따가지고 오면 우리나라 댄스 역사에 드문 일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영국에 유학할 준비로 개인 레슨을 받으며 국제지도자 자격증 코스를 공부했다. 6개월 공부 후에 영국 런던의 유서 깊은 ‘쌤리댄스스쿨’에 갔다. 지도교사로 'Technique of Latin Dancing' 이라는 책을 낸 라틴댄스 계의 전설 월터 레어드의 비서였으며 현존 최고의 지도자 준 먹머르도 여사를 만났다. 2개월간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집중적인 댄스 공부와 연습을 하며 결국 ‘국제지도자 자격증(IDTA:International Dancesport Teachers Association)’을 따 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영국에 가서 이 자격증을 따 온 사람은 몇 몇 댄스 계 원로에 불과했는데 동호인에 불과한 필자가 이 자격증을 들고 들어온 것이다. 개선장군처럼 귀국한 필자 주변에 댄스동호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해서 ‘댄스엔조이’라는 댄스 동호회를 만들었다. 무려 5년 동안 회장을 맡으며 댄스스포츠 동호회를 키웠다. 당시에는 1주일의 거의 절반을 댄스 강습으로 보냈다. 그 과정에 샤리권(권금순)이라는 학원 원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영국에서 귀국 직후 ‘댄스엔조이-라틴댄스’라는 책을 내려고 ‘댄스스포츠코리아’라는 잡지사에 찾아 갔다가 그 자리에서 편집 기자 자리를 제의받았다. 책도 나왔고 3년 후에는 ‘댄스엔조이- 라틴댄스 실전과 이론’, ‘댄스엔조이 – 모던댄스’, ’댄스엔조이 - 즐거운 댄스 라이프‘ 3권을 동시에 냈다. 그리고 10년 후 낸 ’캉캉의 댄스이야기‘까지 내면서 댄스 칼럼니스트로서 자리를 굳건히 했다. 특히 ‘댄스스포츠코리아' 잡지사의 기자 자리는 필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댄스 잡지는 드물지만 국내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댄스 잡지라서 권위가 있었다. 국내 댄스 경기 대회나 행사에는 언론사 자격으로 VIP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국내 댄스 계 중요 인사들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세계적인 챔피언들을 인터뷰하여 기사화할 수 있었다. 댄스 인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얘기하자면 장애인들과의 만남을 빼 놓을 수 없다. 원래 장애인들과의 만남은 94년 ‘댄스 동호회’에 나온 시각장애인들을 통해서였다. 몇 사람을 가르치고 있는데 혼자는 힘들다며 도와달라고 하여 갔던 것이다. 자이브를 중심으로 가르쳤는데 시각장애인들도 곧잘 했다. 처음에는 물론 막막했으나 그들도 노력했고 필자도 가르치는 노하우가 생겼다. 그들과 함께 여성의날 행사에 오프닝 무대에서 춤췄는데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였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도 함께 오프닝 무대를 자이브로 장식했는데 그때는 당시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참석했었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 객석을 보니 대부분 시각장애인이라 보이지도 않는데 춤을 춰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시큰둥했던 필자가 부끄러웠다. 보이지도 않고 댄스화 갈아 신기도 귀찮으니 운동화 신고 그냥 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 파트너는 진지하게 임했다. 끝나고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사진을 찍어 봐야 볼 수가 없는데 왜 찍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이들은 정상적인 시력을 가졌다고 했다. 이들과의 만남은 여기까지였다. 그 당시만 해도 장애인댄스대회가 없어 더 이상 끌고 나가기 어려웠던 탓이다. 또 다시 10년만인 2013년 서울시장애인댄스연맹에 코치 겸 선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장애인댄스스포츠연맹이 정식으로 발족하여 전국적으로 경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너무 나약해서 안마사 시험에도 떨어졌다는 40대 할머니를 파트너로 하여 선수로 출전했다. 처음엔 왈츠 단일 종목으로 동메달을 겨우 땄는데 스탠더드 5종목을 다 연습하고 나니 금메달까지 딸 수 있었다. 한 대회에 3개 부문까지 출전할 수 있으니 출전만 하면 메달을 수확했다. 이 할머니 파트너가 은퇴하고 나서 만난 파트너 중 최고였다. 나이도 40대라 젊고 체형이 날씬했다. 국내 ‘스타킹’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로 플라멩코 춤에서는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이 파트너 덕분에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장애인 문화예술 대상’에서 대중무용 댄스스포츠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장애인 댄스경기 대회는 대개 오전 중에 끝나지만 이 파트너와는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댄스경기대회에도 출전했다. 2014년 여수에서 벌어진 ‘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는 오전에 장애인 부문에서 3경기를 뛰고 오후에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장년부, 일반부, 아마추어부까지 결승에 올라 나란히 우승, 우승, 준우승하는 쾌거도 이뤘다. 스탠더드 5종목을 뛰려면 대단한 체력이 요구돼 세 부분을 연속해서 출전하는 선수도 처음이라며 화제가 되었다. 이 파트너도 건강상 그만두게 되어 아쉬웠다. 2015년에는 새 파트너를 만나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뤘다. 비록 동메달이나 덕분에 서울연맹이 ‘댄스스포츠 전국대항전’에서 간발의 차이로 우승할 수 있었고 전체 장애인종목에서도 만년 단골 우승인 경기 다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글쓰기 필자에게 글재주가 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국어시간에 다음 배울 것을 짧게 축약해 오는 ‘짧은 글짓기’에서 늘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받아쓰기는 늘 만점이었고 국어 성적도 거의 만점을 받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 그래서 글쓰기가 좋아졌다. 그 당시만 해도 책은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를 많이 본 것이 어휘 구사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는 전국적으로 글쓰기 열풍이 불어 학교 내에서는 물론 서울 단위에서도 ‘어린이글짓기대회’가 열렸다. 당시 대회에서 필자는 후배 여학생과 단 둘이 입상하고 돌아와 교내 스피커를 통해 방송도 하고 전체 조회 시간에 교단에 서서 수상작 낭독도 했다. 그 인기 덕분에 전교어린이회장까지 했다. 중학교 때는 문예반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당시 ‘학원’이라는 학생 잡지에서 하는 ‘학원문학상’에 응모했더니 수상했다. 당시 학교 정문에 플래카드가 붙기도 했다. 당시 그림도 좋아해서 미술반에 들어갔으나 저녁 식사도 못 한 채 매일 밤 10시까지 버티기가 힘들어 그만 두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중학교 때 못한 그림 공부에 미련이 남아 사진반에 들어갔다. 그림은 한 장 그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사진은 셔터만 누르면 되니 적성에 맞았다. 예술사진이니 작품성도 있어야 하고 설명과 제목도 멋지게 달아야 하는데 그림과 글쓰기에 대한 갈증을 한꺼번에 충족시켜주는 것 같아 한동안 사진에 빠져 들었다.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도 구성해서 활동했다. 사진에 꽂혀 있떤 필작 다시 글에 손을 댄 것은 40대 초반으로 직장에서 자리가 잡혔을 때였다. 젊었을 때부터 외국을 자주 다니면서 느낀 점들을 신문에 독자 투고했는데 인정받았다. 1000여 편의 독자투고 내용을 책으로 3권 냈고 서울 서초구청장으로부터 기록인증서도 받았다. 독자투고는 글이 짧아 하고 싶은 말을 간단명료하게 담아내야 했다. 그러나 글이 길지 않아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댄스 동아리를 만들면서 이 갈증을 충족할 수 있었다. 당시 인터넷에 댄스 칼럼을 길게 올린 것이다. 이 칼럼은 인기도 높었다. 그 글들을 모아 2004년 영국 유학 후 ‘댄스엔조이’라는 책을 4권 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유어스테이지’에 시니어 리더로 합격하면서부터였다. 블로거를 모집했는데 당시 필자는 블로그가 뭔지도 몰랐으나 그간 인터넷에 올린 글들 덕분에 합격한 것이다. 그때부터 ‘캉캉의 글모음’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었다. 이 블로그로 2012년에는 ‘대한민국 100대 블로거상’도 받았다. 필자 블로그는 하루 방문객 1500명 내외이더니 2016년 5월 드디어 누적 방문객 300만 명을 돌파했다. 2010년에는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한 ‘액티브 시니어 자서전 공모전’에서 우수상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1등상을 수상한 사람은 필자보다 10세 이상 연배로 전쟁도 직접 겪었고 인생을 모범되게 살아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방송, 잡지 등에서는 필자에게 출연 교섭을 많이 해왔다. 춤이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블로그의 힘은 대단했다. 필자 블로그를 검색한 방송, 잡지 등에서 섭외가 많이 들어 왔다. ‘시니어 파트너즈’에서 지원해준 덕도 많이 봤다. 한국의 모든 공중파에 나갔고 케이블 TV까지 합하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출연했다. 한 방송국에서는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며 무려 10일간을 매일 녹화하기도 했다. 블로그는 현재 중요한 일과 중 하나이다. 하루에 글 하나는 꼭 올린다. 글을 쓸 때 가장 마음이 편하고 생각이 정리되어 힐링되는 것 같다. 자꾸 희미해지는 기억력을 붙잡으려면 일상이든 독후감이든 영화 감상문이든 바로 써둬야 한다. 사회 활동 초등학교 때 어린이회장을 한 이래로 감투 복은 있는 모양이다. 대학 시절에 4학년이 관례로 맡던 사진반 회장을 2학년 올라가자마자 맡더니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를 결성하여 회장단을 꾸리기도 했다. 군 생활 때도 동기들과 선배들이 즐비한데도 중대 전체의 선임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참여하는 곳마다 크고 작은 모임에서 회장을 많이 했다. 리더십도 있는 편이지만 말이 많지 않아 카리스마가 있다고 한다. 틀이 좋다거나 돈이 많거나 말을 잘하는 일반적인 요소는 없으나 중심을 잘 잡고 전체와 미래를 보는 시각이 있다는 평이다. 퇴직 후 삶은 IMF 외환위기로 고통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직장 생활 때 인적 관계는 퇴직 이후 거짓말처럼 멀어져 갔다. 새로 새로운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댄스스포츠에 집중한 덕분에 ‘댄스엔조이’라는 동호회를 만들었고 5년간 회장을 맡았다. 동호회를 운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유어스테이지’에서 공모한 시니어 리더들의 모임에서도 5년째 회장을 하고 있다. 회장 맡은 것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회장을 맡은 덕분에 책임감을 가지고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는 것이 좋다. 그런 면에서 ‘브라보 마이라이프’ 기자 활동과 새로 맡은 운영위원회장 자리도 기대가 크다. 요즘은 유난히 발이 넓은 동네 친구 덕분에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그 덕분에 ‘KDB 시니어 브리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동문회 등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협회 자체의 행사나 프로그램도 많다. 강의도 자주 나간다. 퇴직을 앞둔 우리은행 지점장급 직원들을 대상으로 생산성본부에서 해마다 인생 이모작 강의를 했었다. 200명을 대상으로 하루 8시간 하는 강의이다. 퇴직 후 16년차에 들어섰으니 인생 이모작 선배로서 그간 경험한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한 경험을 전해주는 강의이다. 노사발전위원회에서도 공모전 입상을 한 덕분에 비슷한 내용으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도심권 이모작 센터’’, ‘사회연대은행’ 등에서도 강의를 해오고 있다. 댄스스포츠 강의도 하지만 홀로 살기, 파워 블로거 되기 등 테마도 다양화하고 있다. 필자 스케줄 표를 보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꽉 차 있다. 동호인들끼리 댄스하는 날, 노래배우러 가는 날, 책 만들러 가는 날, 댄스 동아리 강의 하는 날, 장애인 댄스 교습 및 댄스 선수 연습하는 날이 고정되어 있다. 일요일만 비워두고 있다. 그렇다고 전혀 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그런 스케줄은 대부분 저녁 모임이거나 한 나절 정도 걸리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다. 특히 남는 시간은 집 근처에 공유사무실이 있어 글쓰는 데 활용한다. 어떤 면으로 보면 너무 바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매력 없는 남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여유 있게 차 한 잔 하면서 같이 대화라도 나누고 싶은데 필자처럼 바쁜 사람에게 전화했다가는 바쁘다며 거절당할 게 빤하다는 것이다.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가까운 사람들 인터뷰가 있었다. 필자도 동석한 자리이므로 좋은 대답을 기대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절대 바쁜 척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전에는 댄스 하러 가는 날이면 다른 스케줄은 아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댄스는 어차피 여기저기서 하고 있고 한두 번 쯤 빠져도 큰 문제 아니니 결석을 택한다. 다른 고정 스케줄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가 60대 중반에서 70대 중반이라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런 것 같다. 아직 건강하고 활동력도 있다. 노후 대비 경제력을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도 다행이다. 사주에서 보듯 무난하고 평탄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인생의 정점에서 ‘브라보 액티브 시니어 인생’을 사고 있는 셈이다.
- 2016-06-24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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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자서전] 기적소리 울리는 인생의 기차를 타고
-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만 3년1개월의 종지부를 찍고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었으나 전쟁의 후유증으로 피폐해진 농촌은 더욱 먹고살기가 어려워졌다. 필자는 휴전이 끝난 직후인 53년 8월 14일 경기 부천시 영종면 중산리 1385(현 인천 중구 중산동)에서 5남 3녀의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채 보릿고개를 겨우 넘기며, 근근이 입에 풀칠하던 시절의 농촌에서 태어났으니 그 생활이야 오죽했을까마는 그래도 아버지의 부지런함과 노력으로 큰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당시 사랑채에는 몸이 불편하시어 동생에게 얹혀살고 있는 큰아버님이 야학 서당을 열고 있었기에 집안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 밤마다 천자문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창문을 넘었으니 이는 필자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늘 한자에 관심을 가지고 서예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특히 필자의 유년기 시절에는 당시 초등학교 근처에 집이 있고 비교적 상태가 좋았던 터라 도시에서 섬마을로 전근해 오시는 선생님들이 필자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자취를 하셨기에 어린 시절부터 선생님들과 가까이 지내곤 하였다. 60년도 3월에 집 근처에 있는 영종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학교는 집안 대대로 어르신들은 물론 부모님과 형님, 누님들이 다니던 학교다. 코 닦는 수건을 가슴에 달고, 학교에 첫 발을 떼어 놓았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농촌임에도 집안은 비교적 큰 농사와 과수원으로 어렵지 않게 살았는데, 필자는 8남매 중에 일곱 번째 이었다. 서열상 위로는 형, 아래는 막내 동생이 있었다. 중간에 끼인 필자는 늘 사랑에 목말라했다. 형은 형이라서 봐주고 동생은 막내라서 특별대우를 받다 보니 결국은 중간에 끼인 필자는 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유ㆍ소년시절을 보냈다. 도맡아 잔심부름을 하기도 하고 어쩌다 다투기라도 하면 꾸중은 비교적 필자에게 떨어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랐다. 더구나 필자 집에 세를 살고 계시던 선생님들께서 보실 때마다 장난이 심해 단추가 모두 떨어진 옷을 풀어헤친 채 돌아다니는 필자를 보고 유별난 ‘장난꾸러기’라고 하기도 하고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놀리곤 했다. 형제들에 비해 외탁을 해서 키가 조금 작은 편이었는데, 장난삼아 했던 놀림은 청년기 시절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진짜로 다리 밑에서 주워온 고아인줄 알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필자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소심하고 숫기가 없었지만 공부는 곧잘 했다. 아마 반에서 1등은 못했어도 4,5등은 늘 했다. 언젠가 송산 백구지라는 해변으로 가을소풍을 갔는데, 전 학년을 모아놓고 장기자랑을 하던 시간이었다. 우리 학년에서는 필자가 선생님께 호출되어 나갔는데, 고개만 푹 숙인 채 결국은 끝까지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들어오고 말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 시절, 집에서는 과수원을 크게 하였기에 원두막에 올라가 파수 보는 일을 돌아가면서 했다. 필자는 그 일이 제일 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올라가서 망을 보곤 했다. 이때 음악책 한 권을 들고 올라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곤 했다. 혼자서는 그렇게도 잘 부르던 노래 실력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소풍날, 장기자랑시간에 고개만 숙이다가 들어왔으니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을 만도 했다. 드디어 초등학교 졸업식이 다가왔다. 그 시절에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었기에 졸업을 앞둔, 면소재지 내에 4개 초등학교 아이들이 중학교에 가서 시험을 보았다. 운 좋게 수석은 못했어도 차석으로 합격통지서를 받았는데, 필자는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이유는 그때 잘살던 필자 집이 마침 빚더미에 올라앉아 빚쟁이들이 집과 전답을 팔아 그들만의 빚잔치를 했기 때문이다. 입학금은 6600원. 차석합격자는 절반을 면제받았기에 3300원 만내면 중학교에 입학을 할 수 있었는데, 그 돈조차 여의치를 않아 포기해야 했다. 등록을 끝까지 안하니 어느 날, 중학교 교감선생님께서 찾아와서 딱한 집안 사정을 알아보고는 등록금은 고사하고 책만 사가지고 보내라고 했음에도 경황이 없으신 부모님이 포기하였다. 나중에서야 교감선생님이 다녀갔다는 말을 듣고는 어린 마음에 받은 상처는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필자는 인천으로 나와 유동에 있는 대양알미늄공장에 취직했다. 그 와중에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떠나지 않았기에 동인천역 전에 있는 영어ㆍ수학학원에 등록했다.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싶어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고 공장에 갔다가 돌아와서 저녁에 학원으로 가는 고된 생활이 이어졌다. 그후에 둘째 형이 대학을 졸업을 하고 서울 화양동에 있는 씨티즌 시계회사에 취직됐다. 필자를 포함한 네 명의 형제자매는 서울 뚝섬에 5만 원짜리 단칸 셋방을 얻어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각자 할 일을 열심히 해 나갔다. 필자는 서울에서도 공장 생활을 이어갔다. 뚝섬 근처에 있던 한일공업사라는 공장에서 일했는데 처음에는 허드렛일을 시작하다가 점차 프레스 기계공으로 발전하면서 월급도 조금씩 올라갔다. 그런데 여사장은 서울에서는 꽤나 유명한 E여고의 전직 교사이었고, 어떤 연유에서인지 창업해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웬만큼 신임을 얻은 후에 사장에게 슬그머니 공부에 대한 속내를 드러내 보였는데, 흔쾌히 야간중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그렇게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서울 생활이 이어졌고, 2년 후 비록 친구들보다 1년이 늦었지만 당당하게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합격은 했지만 입학금이 없어 어린 마음에도 그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기에 못 먹는 소주 한 병을 사들고 뚝섬유원지 둑에 홀로 앉아 아련한 강물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홀짝홀짝 술을 마시면서 울기도 하고 푸념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고향에서 아버지가 그 이자가 비싸다는 장리쌀 한가마니를 얻어 둘러메고 서울로 올라왔다. 올라오던 날 밤, 농사일에 여윌 대로 여윈 아버지가 전세방에서 곤하게 코를 골고 주무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열심히 공부를 해서 효도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주경야독의 고단한 생활은 변하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 빛을 찾아 헤매듯 열심히 공부를 하던 필자는 3학년이 되던 가을에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게 되었다. 서울에서 5만 원짜리 전세방으로 시작한 우리 4남매는 회사로, 공장으로, 학교로, 학원으로 각자 나름대로 모두 열심히 살았다.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보다는 희망찬 미래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며, 적어도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만큼 좋은 날들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사서도 한다고 하지 않던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긍정적 사고와 순수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험난한 세상 서로 의지하며 열심히 살자던 어느 날, 바로 손위형님이 홀연히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형님이 우리 곁을 떠나고 어머님의 생신날이 다가왔다. 군에 가신 형님의 생일은 음력 9월 9일이었고 어머님의 생신은 음력 9월 8일이었는데, 남매들은 어머님 생신날에 맞추어 미리 고향으로 모두 내려갔다. 그런데 내려간 날 저녁부터 필자는 엄청난 복통과 오한에 시달리며 꼼짝 못하고 건넌방 한쪽에 누워 있었다. 그 고통스러운 중에서도 불현듯 군에 간 형님 생각이 떠올랐다. 형님 생일이 오늘인데, 군에서 따뜻한 밥이라도 한 그릇 드셨을까? 이런 생각이 드니 아프다고 그냥 있는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몸을 추슬러 큰형님과 같이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형님을 면회 가기로 했다. 군사우편에 찍힌 부대 번호를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물어 그곳이 강원 가평군이라는 것만을 알고 무작정 마장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그곳으로 가는 버스를 타게 되었다. 그런데 활짝 웃는 얼굴로 우리를 반겨야 할 형님은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있었다. 아! 이 무슨 청천하늘에 날벼락이던가! 그리고 아버지가 비통하게 울부짖으시는 모습을 나는 그때 처음 봤다. 평소의 아버지는 산처럼 높고 엄하신 분이라 눈물도 없는 분 인줄 알았다. 가족 중에 얼굴을 확인하라고 하여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형님의 얼굴을 확인하셨는데, 그 순간 오열과 통곡을 하시면서 비틀거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뜨거운, 아주 뜨거운 눈물을 삼키고 말았다. 꿈인가. 생시인가. 그렇게 형님은 사랑하는 가족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어떤 사유로 싸늘한 죽음을 맞았는지 너무 궁금한 필자 가족에게 부대 측에서는 순직통지서를 전하려고 서울 뚝섬 집주소로 찾아갔으나 사람이 없어 전달이 안됐다고 했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분노! 애절하게 가족을 그리워하던 형님의 편지! 조금만 기다리면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한 순간에 스러지게 만든 사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그해 가을, 낙엽처럼 형님은 떠나고 말았다. 그 사건으로 형님은 서울 동작동국립묘지에 묻혔다. 형님이 국립묘지에 묻히던 날은 다음 해 1월 초,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이었는데, 필자는 형님의 영정사진을 안고 묘지까지 행렬을 해야 했다. 행렬 내내 뜨거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눈보라 속으로 형님의 모습이 언뜻언뜻 스쳐지나갔다. 보이지 않는 분노가 가슴 속 깊은 곳에 소용돌이 쳤다. 형님의 죽음에 항거라도 하듯이 필자는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4년 12월 21일 빛나는 육군소위로 임관하게 되었다. 고3 수험생으로 대입 준비를 하던 필자 인생이 전혀 뜻하지 않은 물꼬를 타고 흘러간 것이다. 무난하게 전ㆍ후방에서 군복무를 하던 필자는 1985년 가을쯤, 서울 삼각지에 있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로 보직을 받게 되어 서울을 떠난 지 13년 만에 소령 계급장을 달고 금의환향(錦衣還鄕 )게 되었다. 군복무를 하면서도 공부에 대한 열정만큼은 버릴 수 없었던 필자는 이곳에서 일반대학 위탁교육 시험에 합격하여 서울에 있는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주경야독의 생활은 결코 필자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94년 만기전역할 때까지 필자는 공부를 계속하여 서울시립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필자는 담당 교수님으로부터 박사과정에 대한 권고를 받았으나 이를 뒤로 한 채 새로운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22년간의 군복무를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들을 전방에서 보냈던 필자는 대개의 직업군인들이 그러하듯이 오직 진급에만 초점을 맞춘 삶을 살아왔었다. 전역을 앞두고 보니 모든 것이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전역 후의 삶은 조금은 다른 방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필자는 전역 후에 직업을 갖는다면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원의ㅋㅋ(願意)를 가지고 있던 차에 지인의 추천으로 종교 계통에서 행정직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필자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여가시간을 활용하여 틈틈이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정진하여 98년 가을에 순수문학 수필작가로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아울러 쉬는 날에는 열심히 출사를 나가 사진 찍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수필작가로 문단에 등단한 뒤 2년 후부터는 서예를 시작하였다. 필자의 어린 시절, 사랑방에서 야학서당을 운영하던 큰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늘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강포 김상용 선생님을 만나 서예에 정식으로 입문하여 그야말로 혼을 불사르듯 글공부를 하게 되었다. 2013년 9월 13일. 필자는 그동안 열심히 습작했던 글들을 모아 2권의 수필집을 출간 하게 되었다. 필자의 61세 되던 환갑 날, 서울에 있는 가락2동 성당에서 조촐한 축하미사와 함께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친인척들과 60여 년 동안 살아오면서 이러저러한 신세를 졌던 지인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수필집을 선물로 드리게 되었다. 약 150여 명의 지인들이 참석하여 성황리에 격려와 축하의 인사가 이어졌다. ‘기적소리 울리는 인생의 기차를 타고’ 는 필자의 제1수필집으로, 태어나 힘차게 시동을 걸며 출발하였던 기차가 어느덧 60여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황혼이 아름답게 빛나는 플랫폼으로 멋지게 들어온다는 뜻이다. 내용은 그동안 삶의 애환을 반추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황금빛 마음의 고향’ 이라는 제2수필집은 어린 시절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글로 표현한 작품집이었다. 필자는 그해 12월, 위 작품으로 순수문학 본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 11월초에는 종로 인사동에서 동인들과 함께 그동안 갈고 닦았던 서예작품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청년기 크고 작은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살아온 필자는 뒤늦게 자신의 소질을 계발하여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어 무한히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2014년 12월 31일. 필자는 두 번째 정년퇴직을 맞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쉬지 않고 직장생활로만 만 43년을 살아왔다.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5년 12월에는 꿈에도 그리던 자녀들과의 만남을 위해 미국 콜로라도로 출발하였다. 필자는 딸과 아들, 두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미국에서 자리잡아 잘 살고 있다. 외손자 녀석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되도록 첫 대면을 못했으니 오죽 보고 싶었을까. 2014년 12월부터 약 2개월간 손자 현서를 만나고, 자녀들과 함께 보냈던 것은 축복의 시간이었다. 필자는 정년퇴직을 하면서 그동안 조금씩 저축해 두었던 돈으로 고향인 인천 신공항 근처에 집을 한 채 지을만한 땅을 사두었다. 이제 그곳에 아담한 집을 짓고 집필 활동을 하면서 살고자 한다. 2020년경에는 새로 지은 소박한 집에서 매년 한 번씩 지인知人들을 초대해서 출판기념회와 사진전시회를 번갈아 열고 싶다. 삶의 멋진 이야기가 흐르는 저녁이 되지 않을까가 기대한다.
- 2016-06-24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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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교사에서 시인으로
- 가난은 나의 스승 지난 세월에 살아온 길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니 나이가 들었다는 걸 실감한다. 한편으로는 살아온 길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전쟁 직후 태어나 1960년대 중고등학교에 다녔고, 7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다. 이후 80~90년대 비약적인 경제 발전으로 이제는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다. 가장 빈곤한 나라에서 태어나 가장 급속한 발전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그 시간을 모두 경험한 세대다. 이런 삶을 살아온 세대가 세계적으로도 거의 없을 것 같다. 한국 민족이 가진 넘치는 정과 근면함이 지금의 조국을 만들어 간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가난은 벗어났고 이제는 어디를 가도 한국이 낯선 나라가 아닐 정도로 발전했다. 필자 역시 보편적 가난을 겪으며 학창시절을 보내며 교복과 교과서만 있으면 만족해야 했다. 요즘 아이들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학원을 가야 하고, 문제집과 참고서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걸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당시 필자에게는 참고서나 문제집은 사치품이었다. 교과서만으로도 충분히 수업할 수 있었던 당시의 교육제도가 감사했다. 물론 그 시대에도 과외나 학원은 당연히 있었지만 필자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가끔은 지금도 나처럼 그렇게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와는 달리 열등감에 시달릴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그래도 가난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때는 사람들의 마음이 지금처럼 각박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는 아주 힘들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늘 넉넉했다. 작은 일에나 큰일에나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정이 기본이었기에 가능했다. 친구들과 뛰놀던 뒷동산이 지금도 가끔은 생각난다. 위로 오빠들만 셋이고, 밑으로는 여동생이 둘이 있었다. 따라서 오빠들의 행동에 많은 영향을 받아 여성성이 전혀 없다. 더욱이 오빠들이 다정다감하지도 않고 무뚝뚝했는데 필자는 그것을 그대로 닮았다. 놀이해도 남자들이 하는 놀이를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동네 아이들과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갖가지 놀이를 하면서 보낸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지난해 어느 봄날 유튜브로 ‘고향의 봄’을 들으며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라는 가사를 따라 부를 때 그 옛날의 뒷동산이 눈에 보이는 듯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늘 그 자체가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준다. 필자가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아침이었다. 학교에 가려고 나와 보니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우산이 하나도 없었다. 오빠들이 먼저 학교 가면서 다 갖고 갔다. 구석에 찢어진 비닐우산이 있기에 그걸 들고 갔는데 바람에 뒤집혀서 쓰나 마나 했다. 그렇게 해서 학교에 도착해 보니 지각까지 했다. 조용한 교실 문을 들어갈까 말까 하다가 살그머니 열었는데 웬걸 모든 눈이 필자를 향하고 있었다. 지극히 소심한 필자는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이후 비라는 소리만 들어도 경기가 날 정도였다. 그토록 비를 싫어했던 필자가 사춘기가 되면서 빗소리가 좋아졌다. 싫어했던 그 부피보다 몇 배는 더 좋아한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혼자 나무가 많은 길을 걸으며 혼자 빗소리를 음미한다. 그 맛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다. 세상이 다 필자 것처럼 여겨진다. 어려서부터 교사를 생각하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여자 직업으로는 최고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었기 때문에 다른 직업은 생각한 적도 없었다. 당시는 교사라는 직업이 지금처럼 최고 인기 직업이 아니었다. 경제가 엄청난 기세로 성장할 때여서 일반 회사원보다 비인기 직업이었다. 보수도 그렇고 업무 환경으로도 매우 후진적이었기 때문이다. 함께 입학한 남자 동창 중 교사로 남은 사람은 20%가 채 안 되었다. 그만큼 대우가 학교보다 월등하게 좋은 곳으로 빠져나가던 때였다. 사명감으로 한다고는 하나 일단 눈에 보이는 것에 움직이게 된다. 그런 분위기에서 대학생은 되었지만 머리로 생각했던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는 것이 필자에게는 어쩌면 사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 자신을 옭아매는 삶이었다. 돌아보면 그 시간이 인생에 주어진 가장 밝고 환한 시간이었는데 필자는 즐기는 걸 몰랐고 언제나 기계처럼 살아왔다. 사람이 기계처럼 산다는 걸 뒤늦게 더 깨닫게 되었지만 성격상 주어진 책임에만 충실한 기계였다. 자신의 감성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학 생활은 더 많은 고민으로 채워지는 시기였다. 당시 집에서는 누구든 고등학교까지만 학비를 대주고 대학부터는 알아서 가야 했다. 오빠들도 다 그렇게 다녔고, 필자 역시 대학은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서 다녔다. 그것이 자유를 빼앗기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생각의 틀이 굳어졌기 때문이지 환경이 필자를 누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졸업 후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첫 발령지가 충북 옥천군이었다. 생전 처음 접하는 시골 풍경이 생소했지만 그곳은 잠재했던 감성을 꺼내주었다.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었던 정서를 맘껏 풀어낼 수 있었다. 풋내기 교사를 맞아주는 학생들과 동료 선생님들의 아낌없는 격려와 배려가 삶의 기쁨을 주었다. 그중에서 학생들과의 만남이 참 좋았다. 필자를 잘 따라주고, 순수한 여고생의 감성이 한없이 즐겁게 했다. 국어 과목은 여고생들에게는 남다른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문학 작품을 공부할 때는 꿈속에서 헤매듯 빠져들었다. 가끔은 밖으로 나가 함께 시와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수업할 수 있었다. 지금 학생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낭만적인 시기였다. 사과 꽃이 필 때는 사과밭으로 가서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포도 철에는 포도밭으로 달려갔다. 필자에게 참 유익한 시기이었다. 조금은 느슨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자연이 주는 선물을 조금씩 맛보아 알게 되었다. 지금 부족하나마 시를 쓸 수 있는 감성을 일깨워준 고마운 곳이다. 언제나 다시 달려가고 싶은데 언젠가 가보니 아주 많이 변해서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더 깊은 속으로 들어가면 맛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다시 도전하는 삶 결혼하면서 교직을 떠났다. 그렇게 갑자기 전업주부가 되면서 마음의 고통이 많았다. 늘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필자의 행동이 후회됐지만 그런 모습 보이기 싫어서 가정에 더 충실했다. 그렇게 전업주부로 17년을 살면서 아들 하나를 키워 중학생이 되었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나니 삶은 참 무료했다. 그리고 우울했다. 40세가 넘은 그 시기에 인생 좌표가 어딘지 돌아보면서 그동안의 삶이 무척 우울하게 보였다. 그런 필자를 보던 남편이 대학원 입학을 권유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을 제안하는데 처음에는 거절했다. 40세가 넘은 나이에 어떻게 20대 학생들과 같이 공부를 하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결국 남편의 적극적 후원을 힘입어 1993년 가을에 대학원에 입학하고 5년 동안 모든 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취득했다. 그 시기 필자는 다시 젊은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도서관에 가는 날이 빈번해지고 발표 수업이 많았기에 자료 준비를 위해 책과 씨름해야만 했다. 암기해야 할 외국어 공부는 예전과는 달리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으나 몇 배의 노력으로 해냈다. 그런 노력은 할수록 더 힘이 났다. 즐거웠다. 그리고 행복했다. 필자는 행복과 즐거움을 주는 젊은이들과 계속 만나고 싶어 혜전대, 한서대, 경원대 교수까지 됐다. 필자가 전업주부로 사는 동안 학교 환경도 완전히 달라졌다. 실제 시간은 17년이지만 사회와 학교 환경의 변화는 30년쯤 지난 것 같았다. 사회 자체가 급속도로 변화하는 중이었고, 가치관도 하루가 다르게 확확 달라지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웠다. 가정이라는 테두리에서 조용하게 살았던 필자가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젊은 학생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많이 만들었다. 대상 학생들이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바뀌었지만 젊음 안에 있다는 것, 그들과 함께 호흡을 맞춰가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어느 날 문득 생각난 것이 필자가 고등학교 때 장래 희망에 교수라고 썼던 것이 생각났다. 결국엔 강단에 섰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웃었다. 창작과 신앙의 길 전공이 현대시였기 때문에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 정도여서 학위를 마치면서 바로 시로 등단했다. 어려서부터 글 쓰는 것을 막연하게 동경은 했지만 등단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 수필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만 했었는데 시를 쓰게 되었다. 창작이 고뇌의 산물이긴 하나 아주 조금씩 그 맛을 알아가고 있다. 모든 창작이 다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시 역시 그렇다. 필자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초보에 지나지 않지만 작은 희열을 알아가면서 보람도 느낀다. 나이 들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 더욱 애정이 간다. 이제 강의는 끝내고 창작만 남았다. 필자와 끝까지 함께 갈 절친한 친구다. 하나의 작품을 쓰기 위해 생각하고 삶을 반추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면을 볼 수 있어서 좋다. 필자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다. 대학 재학 중 친구의 권유로 시작된 신앙생활은 삶의 근간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짝으로 만나 친구는 대학교까지 10년간 같은 반, 같은 과여서 언제나 붙어 다녔다. 그가 내게 하나님을 알려주었고, 대학 3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한참 후였다. 하나님이 필자를 만나 주시면서 필자의 사고 체계가 바뀌었다. 아니 지금도 변화되는 과정이다. 인생의 윤택함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서 마음엔 여유가 생긴다.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삶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걸 깨달은 후부터 진실로 평안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사람이 애쓰고 힘써서 쌓은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 없이 이루어진 것은 언제나 불안하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 있을 때의 평안은 세상에서 누리는 편안함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필자 인생의 전부다. 가장 의미 있는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바울이 했던 것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온다.
- 2016-06-22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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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모성애 꽃은 그렇게 피어났다
- 첫번째 오남매가족사진, 1번 임산부필자 3번 40대의필자 4번 빛바랜 가족사진들 6번 두딸과 필자모습 카네이션 꽃들이 만발하는 5월이 되면 유년 시절의 필자는 그리움 반 미움 반으로 시들어진 꽃다발을 가슴에 품고 엄마를 그리다 잠이 들곤 했다. 어린 마음속에서 흘린 눈물은 차곡차곡 쌓여 강하고 모진 모성애를 잉태하기 시작했다. 눈물 속의 회상 어린 시절 필자 5남매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어머니를 면회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필자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 일종의 주말 이벤트였다. 그날도 우리는 큰오빠의 지시 아래 엄마에게 필요한 것과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고 묵묵히 오빠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버스에 타 자리에 앉자마자 이내 차창 밖으로 시선을 떨군 뒤 멍하니 바깥만 응시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얼굴을 들 수가 없어서였다. 버스가 서울 중랑구 면목동을 지나 중곡동 가까이에 닫자 필자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마치 멀고 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변해 있을 어머니를 만나려면 미리 단단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철창문이 열리고 퉁퉁 부어오른 모습으로 뒤뚱뒤뚱하며 걸어 나오는 어머니. 어머니 얼굴은 오랫동안 빛을 못 봐 하얗게 변해 버렸다. 또 오랜 병원 생활로 비정상적으로 부어 마치 ‘큰 바위 얼굴’ 같았다. 그리고 약에 취해버려 연신 흐느적댔다. 자식들은 그 만남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눈을 피하며 안절부절 어머니를 맞이했다. 아버지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구타까지 당했던 어머니. 그 옛날 귀한 집 외동딸로 태어나 심성 바르고 순수하며 착하던 어머니가 한평생을 정신 줄을 놓으시고 병원 생활로 약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머니 그만 해요. 도대체 왜 그래? 그까짓 아버지 뭐하러 생각해! 우리가 있잖아.” 필자가 보탤 수 있는 말은 이뿐이었다. 이따금 아버지가 자식에 대한 책임감만으로 마지못해 병문안 왔다 가는 날에는 어머니의 병세는 더 나빠지고 어머니의 정서뿐 아니라 자식들 기분도 엉망이 되곤 했었다. 필자는 그런 아버지를 늘 원망했다. 돈 잘 벌어 양쪽 집 9남매 대학 보내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따뜻한 가정 속 아버지를 더 몸서리치도록 그리워했다. 그래서 5남매는 서로 만나면 침묵한다. 그게 더 아프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니까 도망치듯 떠나온 어머니의 품 대학을 마치고 도망치듯 같은 캠퍼스 선배와 결혼했다. 그토록 그립던 사랑을 갈구하며 현실을 도피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전쟁 터 같은 생활들이 너무나 싫었다. 그러나 결혼생활 또한 살아온 각자의 삶이 다르듯 많이 부딪쳤다. 대학 졸업 후 시작한 교사직과 함께 나름대로 결혼생활에도 충실했으나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결혼 2년 후 큰아이를 임신하며 또 고통이 다가왔다. 건축 장교로 제대한 남편이 중동으로 파견 나간 후 필자가 임신 중독증으로 교단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혼자 남은 임산부 새댁은 유난히도 겁이 많았고 신혼생활의 달콤함을 접고 시댁으로 들어가 배부름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부자인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늘 여행을 일삼아 집을 비우셨고, 아침에 왔다 오후 5시면 돌아가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유일한 친구였다. 어쩌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퇴원할 때면 시부모의 허락을 받아 친정으로 달려갔다.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를 마음으로 느끼며 손을 꼭 잡고 함께 잠드는 밤이면 비록 병든 어머니였으나 그 품이 왜 그리 따뜻했을까. 시댁에서 밤마다 방에 드리운 길다란 옷걸이 그림자가 무서워 잠 설쳤던 한 달 동안의 밀린 잠을 푹 잔듯했다. 중동에서 돌아온 남편은 건설 회사를 차렸고 4년 후 작은아이를 가졌다. 남편은 큰아이 때 못 해준 것을 만회하기 위해 이 아이를 여왕마마처럼 모시겠다고 굳게 약속을 하더니 반대로 필자도, 두 아이도 용서할 수 없는 큰 사고를 쳤다. 남편은 무릎 꿇고 벌벌 떨면서 사죄했지만 용서되지 않았다. 결국 죽을 힘 다해 쌓아 올렸던 가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필자는 모든 것들은 다 포기 할 수 있었으나 아이들만큼은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혼란과 방황이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자신과의 싸움은 실로 ‘의지의 한국인’ 수준이었다. 그 방황을 감수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다시 대학을 다니며 학문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대학 때와는 전혀 다른 전공을 선택해 20세 차이 나는 아이들과 캠퍼스를 누볐다. 배움은 채워지지 않는 상처투성이 사랑의 빈 공간을 그나마 채워주었다. 늦은 나이에 다시 생소한 학문을 하며 젊은이들과 함께한 캠퍼스 생활은 신선한 삶의 충격이었다. 그 충격을 오래 누리고 싶어 대학원까지 다녔다. 그리고 드디어 시간강사, 전임강사가 되어 전국을 누렸다. 자신이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지,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지 확인하면서 모습이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다. 백 번 말보다는 보여주는 교육이라고 했던가. 다행히도 두 아이들은 필자를 자랑스러워△하며 열심히 그 뒤를 따라와 주었다. 큰아이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필자를 추천하여 아이가 다니는 과학고등학교에서 장한어머니상도 받게 해주었다. 이보다 어떤 값진 보석이 또 있을까? 1997년 온 나라에 IMF라는 경제 위기가 몰아 닥쳤다. 하루아침에 남편 회사는 문을 내리고 가족은 빈털터리가 되었다. 고심 끝에 이민의 길을 선택했다. 한 가정의 기둥이 되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어떻게든 어 다시 지붕을 쌓아가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했다. 남편을 설득해 먼저 보내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작은딸을 그 이듬해에 보냈다. 그리고 큰딸을 한국에 둔 채 필자는 2001년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만으로 허물어져가는 가정의 든든한 기둥이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동안 어렵게 오랜 시간 투자해 얻은 교수의 길, 필자의 것들을 다 포기해야만 했다. 무궁화 꽃 속으로 흐르는 눈물 한국과학기술대학교(KAIST)에서 국비 장학생으로 과외하며 생활하던 큰아이는 방학만 되면 가족이 보고 싶고, 엄마 품이 그립다며 열일 제치고 미국으로 날라왔다. 비록 낯설고 물 설은 이국 땅, 남의 나라였지만 그리웠던 가족의 재회는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삶의 원동력이었는지 모른다. 힘겨웠던 바닥생활 2년 후, 해변의 도시 싼타모니카에 세탁소를 시작했다. 필자는 바느질을 하고 남편은 빨래하며 자리잡기 시작했고 백인동네에 멋진 이층 집도 장만했다. 주말이면 1박 2일 파티도 열며 나름대로 훌륭한 이민생활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필자 가족을 무척 부러워했다. 그러나 작은 아이가 우등생으로 ‘캘리포니아주립대 LA캠퍼스(UCLA)’를 졸업하고 언니가 있는 한국으로 나와 버렸다. 왔다갔다 하던 큰아이는 어느덧 멋진 의사가 되었고 작은 아이도 남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꿈을 펼 수가 없다며 훌쩍 떠나와 버렸다. 아이들이 떠나고 난 빈 자리를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2층 아이의 방에는 덩그러니 아이의 그림자만 남아 있었고, 텅 비어버린 커다란 집은 더 이상의 따뜻한 가정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세탁소 2층에 머무르며 일만하며 살았다. 세탁소 재봉틀 앞에 큰 거울을 붙여놓고 필자 얼굴과 마주보며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필자는 또다시 미국 한 의대에 입학했고, 그 길만이 유일한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세탁소 일이 끝나는 저녁 6시에 가서 밤 11시면 돌아왔다. 장장 8년에 걸쳐 졸업했다. 그리고 작은아이도 1년 후 의대에 합격했다. 어느덧 나이 60세를 향하면서 이민생활도 고갯길에 접어들어 수시로 불안감이 몰려왔다. 남편이 있어도 파고드는 고독함은 중병이 되어 대학병원 응급실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을 머리 속에서 교차했다. 어느 날인가 남의 나라에서 아이들과 떨어져 소리 없이 죽어가는 꿈을 꾸었다. TV 속에 한국 뉴스가 끝나고 애국가만 흘러도 눈물이 주룩주룩 얼굴을 타고 내렸다. 삶의 질을 찾아 떠나온 18년 세월에 늙고 병만 들어 마음은 마냥 연약해져만 갔다. 아이들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몸을 황폐하게 만들어갔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고 했던가? 미국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일만 하는 노예의 삶이니 받아들이라며 세탁소에서 일만하던 남편도 필자 뒷바라지에 다리를 못쓰게 되었다. 병들은 부부는 낯설은 이국 땅에 내려앉은 눈커플만 껌뻑 거리며 나란히 누워버렸다. 피붙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산다는 것에 깊은 회의를 느끼며, 아무리 좋은 선진국, 부와 사치스러운 명예, 그따위 것들이 있어도 아무것도 아님을 철저히 느끼던 날에 다시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남편을 설득하고 뿌리를 내렸던 세월을 미련 없이 정리했다. 고생하며 정들어온 곳, 아픈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긴 땅을 뒤로한 채 고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차창 너머로 피땀 흘려 견뎌온 시간들이 추억과 함께 너풀대며 날아다녔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꿈으로 온몸이 날아 갈 것만 같았다. 행복은 별 것 아니었다. 하늘에 떠 있는 작은 공간, 부푼 가슴이 천국이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모든 것들을 얻었으나 또 다 버리고 선택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다시 만나 만들어가는 소중한 가정의 행복을 무엇에 비유한단 말인가. 아이들을 향한 모성애 꽃이 만발하는 날, 한국 행 비행기 날개 가슴에는 무궁화 꽃이 활짝 피어났다.
- 2016-06-22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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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이민 이야기] (3)작은 아이의 반항
- 미국은 평상시에는 17시간, 썸머 타임에는 18시간 한국보다 시차가 늦었다. 한국에는 큰딸만 남아 있어 필자는 자연히 큰 아이에게만 신경을 썼다. 작은 아이에게는 시간을 따져가며 수시로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국제 전화뿐이었다. 어느 날부터 착하기만 하던 작은 아이에게 이상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은 9월에 학기가 시작된다. 작은 아이는 중학교 1학기를 마치고 이민 갔다. 정상적이라면 7학년에 다시 들어가야 했지만 8학년으로 들어갔다. 교회 목사님의 도움으로 공립학교에도 무사히 들어가 다행이었다. 그런데 필자는 입학한 그 날도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견딜 만한지, 영어는 알아듣겠는지, 한국 아이는 몇 명이나 되는지 궁금한 것이 한둘이아니었다. 필자는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사춘기를 맞이할 14세 작은딸이 엄마와 멀리 떨어져 있어 마음이 여간 짠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학교 앞에 집이 있었고 학교는 아침 8시 반에 시작해서 오후 3시면 끝난다고 했다. 미국은 아이들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일이 부모에게는 아주 큰 일이었다. 한국 아이는 남녀 합해서 5명 정도이고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은 그냥 멍청히 참고 앉아서 끝날 시간만을 기다린다고 했다. 작은아이는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아 종일 지겹지만 방법이 없다”고 말을 흐리더니 울먹거렸다. 이내 남편에게 전화했다. 아이가 이상하다고 했더니 남편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 며칠 전부터 친구 집에서 자주 자고 오고 말도 잘 안 한다고 했다. 그 집 엄마가 엄청 잘해준다며 또 가도 되냐고 했단다. 방학이 오기가 무섭게 비행기 예약을 서둘렀다. 작은아이를 직접 보고 얘기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빨리 만나고 싶은 조급한 마음에 좁아터진 비행기가 어찌나 답답한지 숨통이 막혀왔다. 오랜 시간 비행 끝에 몸은 피곤했지만 그렇게 그립던 아이를 만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머리는 노랗게 물들여 풀어헤치고 엄마를 반가워는 했으나 어딘가 어색했다. 바라보는 묘한 눈빛이 엄마를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불과 얼마 만에 이상하게 변해 버린 사춘기 아이의 모습이었다.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함이랄까. 자기 멋대로 촌스럽게 멋을 부린 어설픈 미국 중학생이었다. 필자는 집으로 향하는 내내 뒷자리에 앉은 아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잔뜩 긴장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아이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다른 문화 속에서 하나하나 성숙해가는 여성의 모습들을 이해는 했지만 감정이 이성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작은아이도 엄마에게 짜증 부리며 대들었다. 어찌 화가 나는지 조용히 앉아 반성하라고 했더니, 눈을 부릅뜨고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대꾸를 해왔다. 필자는 솟구치는 화가 조절되지 않았고 습관처럼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그때, 작은 아이 가는 손목이 필자 손을 불끈 잡더니 자기 몸에 손대지 말라고 소리쳤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폴리스(경찰)를 부르겠다고 했다. 순간 기가 막혀 그 자리에 펄썩 주저앉았다. 너무나 어이가 없었지만 그대로 주저 앉을 밖에 없어 힘을 모아 더 세게 몰아나갔다. “그래 전화해라! 지금 연락해! 엄마 잡아가라고 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가져다주었다. “대신, 전화하는 그 순간부터 너와 엄마는 남남이 되는 거야. 알았지!”라며 더 세게 몰아붙였다. 마음대로 하라고 목청 높이며 더 소리를 크게 질렀다. 아이도 겁에 질렸는지, 엄마의 기에 눌렸는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때다 싶어 아이에게 무릎 꿇고 앉으라고 명령했다. 아이가 마지못해 다리를 반쯤 굽히더니 막 울어대기 시작했다. 뭔가 서러움에 가득 찬 어깨 짓이었다. 바라보던 엄마가 안타까움에 와락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이는 어미의 가슴에 안겨 더 큰 목소리로 펑펑 울어댔다. 친구네 집은 엄마가 항상 집에 있고 먹을 것도 많은데 자기는 너무 외롭고 쓸쓸하고 힘들다고 했다. 아버지는 자기 마음을 다 몰라준다고 하면서 가슴을 후벼 파는 눈물로 엄마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앞이 캄캄하고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이 아이를 또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몰랐다. 아빠가 늘 곁에 있으니 그저 하루 세끼 밥 잘 챙겨주고 영어공부하는 것만 돌봐주면 되려니 생각했었다. 그때부터 머릿속에 고민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큰아이가 한숨을 푹 쉬면서 “엄마! 더는 나한테는 신경 그만 쓰고 미국으로 들어와요. 나는 이제 됐으니까”라고 말하면서 엄마를 위로했다.
- 2016-06-17 1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