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
시니어들에게 차별화된 자부심을 심어주는 명칭이 아닐까?
'나 이렇게 멋지다!'
패션쇼를 할 때 그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으로 빛난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열정으로 가득하다.
모델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대다수 여성들의 로망이다. 요즘은 남성들도 많은 관심이 갖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8년에는 65세 이상 노령인구가 14%를 넘는 고령사회, 2026년에는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은퇴 후 재정적·시간적 여유가 있는 시니어를 강력하게 끌어들일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은 없을까? 깊이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하면 합리적인 비용으로 건강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노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2012년 퇴직하면서 무엇을 하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놀까 고민했다. 필자가 하고 싶은 것은 패션모델과 패션디자이너, 왈츠와 탱고 배우기, 오페라와 발레 감상이었다. 이런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곳은 서울이었다. 필자가 사는 평택은 문화적으로 낙후되어 있다. 그렇다면 서울로 가자! 그래서 집을 서울로 옮겼다. 그리고 인터넷 검색을 했다. 시니어 대상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운용되고 있는 곳은 강남시니어플라자와 서초문화원이었다. 서초문화원에서는 영어회화, 수필 쓰기, 시 낭송하기, 문화해설사, 왈츠 과목을 수강했다. 모델 워킹 수업은 서초문화원에 없어 강남시니어플라자에서 받기로 했다.
강남시니어플라자 프로그램 중에서 상한가를 친 것은 단연 '모델 워킹'이다. 이 과목은 늘 대기자들로 넘친다. 나는 초창기부터 수강해 벌써 3년이 지났다. 모델 워킹은 경쾌한 음악에 맞춰서 바른 자세로 1시간 동안 워킹을 한다. 몸도 좋아지고 마음이 즐거워져 힐링도 된다. 이른바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해지는 훌륭한 프로그램인 것이다.
2018년부터는 강남구민만 강남시니어플라자 프로그램을 수강할 수 있게 됐다. 소비자의 강력한 니즈가 있는 곳에서 수익이 창출될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이 탄생하는 것이다. 수요가 있는데 공급자가 없다. 누가 과연 이 블루오션을 선점할 것인가? 결실은 재빨리 트렌드를 읽어내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상암에서 영등포 비콤 벗들과 송년 행사가 있던 날 언주역에 있는 삼정호텔로 갔다. 코리아시니어 모델 학원 김소영 원장님 초대로 패션쇼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모델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입기 때문에 세련됨이나 기품이 떨어지는 옷들이 간혹 눈에 띄어 아쉬웠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모두 통과! 사진에 담지 않았다. 4기 수료식과 패션쇼를 마친 후에는 '시니어 롤 모델'에 관련한 짧은 강의도 있었다.
뷔페로 마련된 식사시간에는 현역으로 활동하는 성악가들의 공연이 있었다. 먼저 바리톤의 우렁찬 목소리로 비제의 ‘카르멘’ 중 '투우사의 노래'를 불렀다. 다음은 소프라노 차례. 푸치니의 오페라 '잔니 스키키' 중에 나오는 너무도 아름다운 아리아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가 곱게 흘러나왔다. 이어진 순서인 테너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중에서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불렀다. 이어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화한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중 아름다운 이중창 '투나잇 투나잇'을 테너와 소프라노 둘이서 불렀다.
"이번에 부를 곡은 뭘까요?"
테너가 참석자들에게 물었다.
"축배의 노래요."
필자가 대답했다.
그가 웃으며 다시 물었다.
"어떻게 아셨지요?"
당연한 것 아닌가? 즐거운 식사 자리에서 대미를 장식해야 하는 노래로 그 곡을 뛰어넘는 곡은 없으니까 말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중에 나오는 '축배의 노래'는 젊음의 환희가 가득한 아름답고 카리스마 넘치는 노래다.
바로 이거다!
품격 높은 현역 성악가들을 초빙한 것은 감각 있는 원장님의 '신의 한 수'였다. 참석자들의 즐거운 저녁 만찬 시간이 단번에 럭셔리한 분위기가 되었다. 레퍼토리가 너무도 잘 알려진 곡들이라서 신선함은 떨어졌지만 익숙함과 편안함이 있었다. 클래식 음악 마니아인 필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행사였다. 새삼 김소영 원장님의 기획력에 깊은 신뢰가 간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머지않아 멋지고 아름다운 그녀의 꿈이 큰 결실을 맺을 것이다.
이번 겨울 들어 롱 코트를 입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많이 보인다. 일종의 유행이다. 백화점 한정 수량 판매로 밤을 새며 난리를 피웠던 평창 롱 패딩이 유행의 불씨가 된 것 같다. 평소 잘 보이지도 않던 흰색 롱 코트가 많이 보이는 것을 보면 그렇다. 롱 패딩이라고 하는데 사실 평창 롱 코트는 구즈 다운이 들어 있어 패딩 코트가 아니다. 패딩이란 인조 솜을 말한다. 보온력이 다운만큼 높지 않아 값이 그리 비싸지 않다. 그런데 내용물에 관계없이 패딩 코트라고 하는데 내용물에 따라 패딩 코트 또는 구즈다운 롱 코트라고 해야 맞다. 평창 구즈 다운 롱 코트를 15만원대에 팔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성비가 높아 인기가 좋았던 것이다. 물론 평창 동계 올림픽 홍보에 일조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필자가 대표이사로 해외 유명 스포츠 브랜드 사업을 전개할 때 롱 패딩 코트에 관한 일화가 있다.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퍼거슨 감독이 입고 있던 롱 패딩인데 그 당시 롱 패딩은 국내에 거의 보이지 않을 때였다. 카탈로그에 실린 퍼거슨 감독의 롱 코트를 보고 특별한 관심을 가지긴 했다. 같이 갔던 회장은 이 롱패딩이 한국에 수입되어 들어오면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 것이라며 흥분했다. 그 브랜드가 아직 국내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라서 필자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문을 1000개를 했다. 그것도 신규 런칭 품목으로 도박이었다. 그런데 돈을 대는 회장은 주문을 늘려 3000장으로 했다. 들여오기만 하면 없어서 못 팔 거라는 자신감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 롱 패딩 코트의 원가는 출발지 가격으로 1만 5000원대였다. 거기에 운임, 관세, 기타 유통비용을 계산하니 9만 원 대가 나왔다. 회장은 가격이 싸다고 잘 팔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싸야 잘 팔린다며 판매가를 올리라고 했다. 그러나 필자는 자신 없다며 올릴 수 없다고 고집을 피웠다. 필자가 해외 출장을 다녀 오니 12만원으로 가격을 올려 놓고 팔고 있었다. 여전히 판매는 부진했다. 필자가 한 번 더 출장을 다녀 오니 가격이 18만원으로 올라 있었다. 필자가 없는 사이에 회장이 지시하여 가격을 올린 것이다. 잘 팔렸다면 좋았겠지만, 판매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판매 부진의 이유를 가격이 너무 높아서라고 설명했더니 그러면 가격을 다시 내려서 팔아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1월에 접어 들어 겨울 상품이 팔릴 시기가 지났다. IMF 금융위기를 겪고 재고 상품을 원가 처분할 때 이 롱 패딩 코트를 1만 5000원으로 가격을 매겨 놓았으나 역시 판매가 부진했다. 그 당시만 해도 유행 상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롱 코트가 잘 팔리는 이유를 분석해보면 요즘 젊은이들의 신장이 상당히 커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20년전 롱 패딩을 내놓았을 때는 키도 안 큰 사람이 롱 코트를 입으면 더 작아 보였기 때문에 안 팔렸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신장에 관한 한 콤플렉스가 없다. 웬만한 서양 외국인보다 작지 않다. 그 당시는 높은 굽의 구두가 유행이었지만 몇 년 전부터인가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뒷 굽 없는 플랫 슈즈가 유행이었다.
롱 패딩 코트는 사실 입으면 불편하다. 다리 쪽이 두툼해서 걸을 때마다 걸리적거린다. 전철 안에서 자리에 앉을 때 벗지 못하므로 깔고 앉아야 한다. 흰색 롱 코트는 깔고 앉으면서 때가 탈 수 있다. 롱 코트에 달려 있는 모자도 불편하다. 모자가 필요한 경우는 아주 추운 날 얼굴을 감싸는 경우인데 그런 정도의 추위는 많지 않다. 모자 앞 쪽에 털이 달린 경우는 더 불편하다. 모양은 좋을지 몰라도 사실 보온 효과는 별 차이 없다. 입고 있는 사람보다 보는 사람 위주이다. 양 옆이 잘 안 보이므로 길을 건너거나 할 때 위험하기도 하다. 롱 코트의 용도는 추위에 많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에게나 맞는다. 주차장 요원, 지하철 봉사요원, 스키장 요원 등 한자리에 고정적으로 외근해야 하는 사람들이나 입는 옷이다. 그런 옷을 유행이라고 너도나도 입고 다닌다. 패션 면에서 볼 때에도 그리 모양이 좋은 편은 아니다. 바디라인이 다 감춰진다. 무릎 아래까지 오니 아무래도 다른 옷보다 보온 효과가 좋겠지만, 발목은 유행이라고 맨 살로 내놓고 다니는 것을 보면 그것도 아니다. 발목이 노출되면 더 춥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유행이니까 입는 것 같다. 중고등학생들까지 롱 코트가 유행이니 부모들 주머니 사정이 더 팍팍할 것 같다.
“방송이 너무 안되고 하는 일마다 자꾸 어긋난 적이 있었어요. 그때 간절하게 기도했지요.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개그맨으로서 온 힘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어요.”
한국 예능계의 최정상에 올라 예능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는 스타 유재석(45)의 말이다.
“칸 영화제에 오는 것은 배우로서 로망이다. 연기자로서 오래 일했지만, 칸에 온다는 생각은 꿈도 못 꿨다. 꼭 벼락 맞은 것 같다. 마치 70도 기운 고목에 꽃이 핀 기분이다.”
5월 20일 70회 칸 국제영화제의 레드카펫에 선 중견 배우 변희봉(75)이 한 말이다.
연예계에는 한 작품 성공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다 이내 사라지는 벼락 스타가 적지 않다. 노래 한 곡 히트로 반짝 스타가 됐다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 가수도 있다. 물론 오랜 기간 대중의 사랑을 받는 거성(巨星)도 있다. 그리고 유재석과 변희봉처럼 오랜 세월 무명을 견디며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스타 반열에 오른 대기만성 스타도 있다. 최근 들어 대기만성 스타들이 대중문화계에서 맹활약하며 경쟁력 있는 연예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1991년 KBS 1회 ‘대학개그제’ 입상을 계기로 연예계에 데뷔했지만, 오랫동안 무명생활을 하며 남희석, 김국진, 김용만 등 동기의 화려한 스타 부상을 묵묵히 지켜봤다. 7~8년 동안 발버둥을 쳤는데도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 실패했다. 바로 유재석이다. “노력과 실력 부족으로 저에게 온 기회를 살리지 못했기에 포기할 수가 없었어요. 절망도 했지요. 게스트 등 작은 역할이라도 전력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프로그램에 임했지요. 그러다 보니 대중과 팬들이 많이 좋아해주셨지요.”
짧지 않은 무명생활을 하며 고생을 하다 스타가 된 유재석은 스캔들 한 번 내지 않는 철저한 자기관리와 항상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세, 끊임없는 자기계발과 노력으로 10여 년 넘게 최고의 예능 스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 번만 기회를 달라는 소원이 이뤄지고 난 후 만일 내가 초심을 잃고 이 모든 것을 나 혼자 이룬 것으로 생각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큰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고 다짐했습니다.”
유재석이 무명생활 탈피 이후에도 방송활동에 전력을 다하는 이유다.
최고의 연기력으로 관객과 시청자에게 믿고 보는 배우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스타가 김명민(45)이다. 김명민 역시 오랜 무명생활을 견뎌내고 스타가 된 대기만성 배우다. “무명일 때 매니저와 코디가 없어 의상 등을 직접 구해 드라마 촬영장에 갔더니 PD가 출연자가 바뀌었다며 집으로 가라고 하더군요. 자괴감으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지요. 무명의 고통과 가장의 책임 때문에 꿈을 접고 이민까지 갈 생각을 했지요.”
10여 년 동안 단역과 조연을 오가며 무명의 설움을 겪었던 김명민. 그는 드라마 에서 혼신의 연기로 시청자의 박수를 받고 연기대상을 거머쥐며 스타가 됐다. 스타가 된 뒤에도 볼펜을 물며 발성 연습을 하고 캐릭터 소화를 위해 20kg 이상을 감량하는 등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는 김명민은 “무명의 고통이 저를 늘 노력하게 하는 원동력인 것 같아요. 작품에 임할 때 무명 시절을 생각하며 열심히 합니다”라고 말했다.
1966년 MBC 성우로 출발해 연기자로 전업한 중견 배우 변희봉은 대기만성 스타의 전형을 보여준다. 변희봉은 수많은 드라마에서 개성적인 연기를 보여줬으나 비중 있는 배역을 맡지 못해 스타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 드라마 , 등에서 잡범 등 악역을 연기하고 사극에선 개성 강한 캐릭터를 맡았지만, 대중의 환호를 받지 못했다. 연기에 대한 열정 하나로 포기하지 않고 오랜 시간 수많은 작품을 소화하며 연기자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이름 없는 중견 연기자는 생계의 위협을 받고 배우 자존심에 상처받기 일쑤다. 변희봉 역시 그랬다. 1990년대 후반 IMF로 방송사들이 제작비 절감을 위해 중견 연기자를 기피하는 바람에 변희봉을 한동안 TV에서 볼 수 없었다. 변희봉을 재발견하고 스타화를 이끈 사람은 봉준호 감독이다. 2000년 를 시작으로 , 등에 잇따라 출연하며 변희봉은 비로소 대체불가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로 칸 국제영화제 레드카펫에 섰다. 30여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무명의 고통을 견딘 변희봉은 “봉준호 감독을 만난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오랫동안 아웃사이더 연기자로 살아왔기에 시청자와 관객의 사랑을 받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다.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내가 좋아하는 연기를 하고 싶다”라며 웃는다.
요즘 에 남편 우효광과 함께 출연하고 있는 배우 추자현(37) 역시 파란만장한 연기 인생을 살아온 대기만성 스타다. 1996년 드라마 로 데뷔한 뒤 등에 출연해 중성적 매력을 발산하며 시청자와 관객에게 존재감을 보여줬다. 하지만 강력한 한 방을 보여주지 못해 스타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점차 배역의 비중이 떨어지고 출연 기회가 줄어들었다.
“출연 기회가 줄면서 연기자로서 자신감도 사라지고 배우로서 위기감을 느꼈어요.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죠. 중국 진출은 배우로서 마지막 몸부림이었어요.”
중국으로 건너가기 직전 추자현이 한 말이다. 그녀는 혈혈단신 중국으로 건너가 맨땅에 헤딩하며 단역부터 다시 시작했다.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 연기 스타일을 익히며 닥치는 대로 오디션에 임했다. 2005년 을 시작으로 중국 드라마에 본격적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저는 한국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한류 스타로 중국 드라마에 출연한 것이 아니잖아요. 무명 연기자로 중국에 건너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며 단역부터 출발했지요. 힘들고 서러워 많이 울기도 했어요.”
추자현은 2011년 중국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은 의 중국판 드라마 주연을 맡아 한국과 중국에서의 길고 긴 무명 배우의 설움을 털어내며 스타 배우 대열에 합류했다. 회당 1억원을 받는 한류 스타로 화려하게 비상한 추자현은 “한국과 중국에서 관심을 받는 것이 꿈만 같아요. 포기하지 않고 도전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초심을 잃지 않고 배우로서 임하는 작품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라고 각오를 밝혔다.
대기만성 스타들은 죽음보다 더하다는 무명의 설움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정상에 오른 만큼, 탄탄한 실력은 물론 철저한 자기관리 능력까지 갖춰 경쟁력 있는 스타로 군림하며 한국 대중문화의 지평을 확장하고 있다.
한국 시니어블로거 협회에서 주관하는 토요3시간 걷기 행사가 남양주에 있는 수종사에서 있었다. 경의중앙선 열차를 타고 운길산역에서 내려 도보로 수종사까지 한 바퀴 도는 것이다. 필자는 며칠 동안 감기 기운으로 망설이던 끝에 전 날 저녁에 참석하기로 최종 마음을 정했다. 상봉역에서 만난 회원들이 경의중앙선 운길산역에서 내렸다. 미리 도착한 회원들까지 11명의 회원들이 합류하여 수종사를 향해서 걷기 시작하였다.
해발 610m 운길산 중턱에 자리 잡은 수종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사찰이다.
영하5도의 쌀쌀한 날씨에 살랑살랑 불어대는 산바람이 제법 매섭게 옷깃을 파고들었다. 운길산 역에서 수종사로 가는 길은 계곡의 등산로나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가파른 경사로를 힘들게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필자 일행은 처음에는 계곡의 산길을 따라 오르다가 중간에 가파른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섰다. 등산로와 산비탈 여기저기에는 적지 않은 눈이 쌓여있어 여간 미끄럽지가 않았다. 헐벗은 겨울 산 나뭇가지 사이로 옹알옹알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언덕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땀이 차오른다.
이 길은 필자에게는 지울 수 없는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단풍이 곱게 물들던 10여 년 전의 어느 가을날, 지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이 곳을 찾았다가 수종사 입구에서 운명처럼 만난 여인과 불타는 사랑에 빠졌던 필자의 지인이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다. 추억을 꺼내 두런두런 음미를 하다 보니 어느덧 수종사 일주문이 눈에 들어올 때 쯤엔 등까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운길산 수종사는 대한불교조계종 봉선사의 말사로 창건연대의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세조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부스럼을 앓던 세조가 오대산 상원사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깨끗이 낫고 한강을 따라 환궁하는 길이었다. 양수리까지 오니 밤이 이슥해 쉬어 가는데 운길산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신하가 알아보니 천년 고찰 터 암굴 속에 십팔 나한상이 앉아 있고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내는 것이라 했다. 세조는 이곳에 절을 복원해 수종사라 부르고 이 은행나무(500년)를 하사했다고 한다.
500년 수령 느티나무 두 그루의 환영을 받으며 경내로 들어서자 겨울 속에 빠진 사찰의 고즈넉함이 불쑥 다가왔다. 경내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나니 마당 앞에 아담하게 지어진 전각 다실, 삼정헌(三鼎軒)이 눈에 들어왔다. 필자 일행은 툇마루에 배낭을 벗어놓고 다실 안으로 들어갔다. 무료다실 삼정헌에서는 약수를 끓여 이곳을 찾는 중생들에게 차를 제공하고 있었다.
투명하고 탁 트인 통유리 밖으로 두물머리의 풍경을 감상하며 녹차 한 잔을 여유롭게 마실 수 있는 삼정헌은 수종사만의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은은한 녹차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정오를 갓 지난 말간 겨울 햇살이 섬섬옥수처럼 다실 안을 비추고 있었다. 가파른 경사로를 따라 경내까지 당도하느라 이미 땀으로 촉촉해진 몸이 한기(寒氣)가 엄습하기 이전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 곳 삼정헌에서 보살님의 녹차 공양은 덤으로 맛볼 수 있는 행복이다. 시원한 전망과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은 마음에 찌든 때까지 말끔히 거두어간다.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도란도란 둘러앉아 우려낸 녹차 한잔을 나누면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뻑뻑했던 피로는 가시고 젖어있던 속옷도 대충 말라가고 있었다. 운길산 수종사를 한번쯤 찾았던 사람들은 이런 맛에 잊지 않고 다시 이 사찰을 찾아오곤 하나보다. 따뜻한 다실 분위기에 공짜로 차까지 얻어마셨으니 어찌 고맙지 않을 손가? 나오는 길에 시주함에 소박한 정성을 담았다.
삼정헌에서 감미로운 시간을 보낸 필자 일행은 하산 길에 올랐다. 낮에 잠깐 녹았던 길이 저녁이 되면서 다시 살얼음이 살짝 얼어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내리막길에서 우려하던 일이 기어코 일어나고야 말았다. 2명의 대원이 급경사로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는데, 부축을 해서 일으켜 놓고는 하늘을 향해 네 팔 벌린 나무 같다고…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몸과 마음이 한없이 움츠러드는 겨울, 12월의 첫 주말에 시니어 회원님들과 더불어 운길산 수종사를 찾아 활기차고 좋은 시간을 보냈다. 엄동설한 맹추위에 대항하여 가슴을 활짝 펴고 씩씩하게 걸었던 회원님들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당구 고점자들은 그만한 수준이 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다. 물론 소질이 있어서 빨리 고점자가 된 사람도 있기는 하다. 일반인들은 대부분은 거기서 거기이다. 그래서 200점대에 가장 많고 대부분 거기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한다.
당구는 심심하면 시간 날 때 치는 편이지만, 고수들은 그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다. 그 중 몇 가지는 참고가 될 만했다.
오른손잡이는 왼손으로 브리지를 한다. 스트로크 할 때 큐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브리지가 흔들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다른 공 때문에 가려져 편안하게 브리지하기가 곤란할 때도 있다. 소위 “큐 자세가 불안하다”고 하는데 이럴 때 손가락 힘이 필요하다. 특히 위에서 찍는 마세를 할 때는 심지어 새끼손가락만으로 브리지를 할 때가 있다. 그러려면 손가락 힘이 필요한데 그럴 때를 대비하여 평소 악력기로 손아귀 힘을 기른다는 것이다.
체력 검사할 때도 악력 검사를 한다. 팔 근육을 강화시키는데 악력기가 좋은 것이다. 당구를 잘 치기 위해서도 좋지만, 손아귀 힘을 세게 해준다는데 일석이조라 할 수 있겠다.
또, 고점자들은 개인장비를 갖고 다닌다. 당구장에 있는 큐를 사용하지 않고 개인 큐를 갖고 다니는 것이다. 당구장 큐도 손질을 잘 해 놓으면 쓸 만 하지만, 아무래도 개인에 맞는 큐를 못 고르면 당구 치는데 막대한 지장을 준다. 특히 큐 무게가 스트로크에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심지어 초크도 가지고 다닌다. 당구장에서 쓰는 초크는 분가루가 날리고 공을 칠 때 큐 팁 마찰에 적당하게 사용되어야 하는데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장갑도 고점자들은 자기 장갑을 가지고 다닌다. 엄지와 검지 끝을 가위로 잘라 사용하는 사람이 많다. 당구장에서 제공하는 장갑은 끝부분이 막혀 있고 심지어 손가락보다 길다. 브리지 할 때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장갑 손가락 끝을 잘라 사용한다는 것이다. 프로 선수 중에는 장갑을 안 끼고 경기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그만큼 민감하다는 얘기이다.
연습하는 과정도 고점자들은 다르다. 보통 사람들은 공이 굴러가서 배치된 대로 계속해서 치는 것을 연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점자들은 한 가지 형태를 놓고 조금씩 변형해서 계속 반복해서 연습한다.
일반인들은 경기 중에 안 맞은 형태의 공은 그때가 지나면 기억도 못한다. 그러나 고점자들은 프로 선수들은 그 공 배열을 기억해서 다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시도해본다. 그러면 다음에 비슷한 유형의 배치가 되었을 때 자신감을 갖고 성공할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제1목적구가 멀리 쿠션에 붙어 있고 수구가 거리가 멀면 치기 어렵다. 일반인들은 대충 쳐서 맞으면 다행이고 안 맞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점자들은 맞히기 위해서 정성을 다 한다.
고점자들은 다음 공을 치기 쉽게 만들기 위해 힘 조절이나 두께 조절을 해서 공의 움직임을 조정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우선 맞히기 급급하기 때문에 다음 공까지 못 본다. 바둑에서 고점자들이 몇 수 앞을 내다보는 것과 같다.
시스템 연습이라는 것도 있다. 당구대 프레임에 일정 간격으로 점이 있는 것을 이용하여 공의 움직임을 정하는 것이다. 뱅크 샷으로 쿠션만 먼저 맞혀 3 쿠션으로 맞혔을 때의 쾌감은 짜릿하다. 시니어들은 당구를 배울 때 순전히 감으로 배웠기 때문에 시스템 계산을 안 하고 치는 사람이 많다. 시스템 계산을 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것을 상대방에게 미안해하고 계산도 익숙해지기 전에는 복잡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기지 못할 것이 운발이라고 한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운이 70%라면 재능과 노력은 30%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심지어는 운11. 기 마이너스 1이란 이야기조차 있다. 운이 좋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윤은기(66) 한국협업진흥협회장은 그 답을 협조와 협업에서 찾는다. 그는 개인이나 기업이나 공생, 상생하는 것이 운을 좋게 만들고, 지속가능경영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가 아니라 ‘남을 돕는 자’를 돕는다”가 그의 신조다. 남과 나눠야 운이 따른다. 운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기보다 후천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별명이 ‘미스터 콜라보(Mr. collabo)’인 그를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윤 회장께선 일찍이 미래의 물결, 정보화사회를 이야기하는 등 미래 트렌드를 남보다 앞서 예측하시고 강의해왔습니다. 그런데 운 이야기를 강조하시는 게 좀 모순 같습니다.
“정보화를 넘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운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내가 말하는 운이란 덕행의 인과법칙입니다. 지극히 과학적입니다(웃음). 남을 돕지 않는 자에겐 운이 따르지 않아요.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도 남이 도와주지 않거나 방해를 하면 성과를 낼 수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노력뿐만 아니라 남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는 점입니다. 귀인을 만나야 운이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귀인을 만나려면 먼저 인간 존중,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최근 를 쓴 일본의 원로 변호사 니시나카 쓰토무도 국내 언론 인터뷰에서 ‘운=도덕과학’이라고 풀이한 바 있다. 니시나카 변호사는 “도덕적 과실이 운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라도 갚지 않으면 운이 나빠진다. 은혜를 받기만 하면 ‘도덕적 부채’로 쌓인다”고 말했다. 도덕적 선행과 나눔이 운을 불러온다면, 도덕적 부채와 독과점은 금전적 부채보다도 더 큰 불운을 초래한다는 지적이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보다 남을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은 과학적 근거가 있다. 남을 돕는 봉사를 하고 난 뒤에는 거의 모든 경우 심리적 포만감, 즉 ‘하이(high)’ 상태가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지속된다. 의학적으로도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현저히 낮아지고 엔도르핀이 정상치의
3배 이상 분비되어 몸과 마음에 활력이 넘친다. 이른바 마더 테레사 효과다. 기업의 사회적 공헌(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리더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인의 사회적 공헌(PSR, Personal Social Responsibility) 실행은 이타적이라기보다는 운을 불러들이는 이기적 행위인 셈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말은 많이 합니다. 반면에 일반 개인의 사회적 공헌(PSR)은 그만큼 강조되진 않지요.
“‘사회 공헌, 기부’ 하면 거대 담론으로만 생각합니다. 나중에 여유 생길 때 기부한다고 미뤄두면 평생 하기 힘듭니다. 기부는 물질적 여유가 아니라 평상시 태도, 습관입니다. 저는 재능기부 차원에서 군에 강의를 갑니다. 또 공군 순직 조종사 유자녀 장학금을 매년 1000만원씩 지원하는 일을 7년째 해오고 있습니다. 기부를 꾸준히 하는 것은 남을 위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그는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앰뷸런스를 이용하며 운전기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소개했다. “부자들은 앰뷸런스에 시체가 실리는 순간부터 가족이 싸우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그렇게 산다면 부자인들 무슨 삶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있어야 나누는 것이 아니고 나누어야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부자는 돈이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1년에 기부금 1000만원을 약정하고 꾸준히 하는 것, 쉬운 일은 아닌데요. 사모님도 처음부터 동의하셨는지 살짝 궁금합니다.
“저는 집사람을 설득해야 할 때 집에서는 절대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하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술집에 데려가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사는 게 뭐 별것 있나, 잘사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으로요. 먼저 길을 닦고,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 뒤 본론을 꺼내지요. ‘우리 여행 한 번 덜 가고, 골프 한 번 덜 치자, 소비를 조금 줄이더라도 좋은 일을 해보자, 돕고 사는 게 재미지, 혼자 잘사는 게 무슨 재미인가’ 하고요. 똑같은 이야기라도 반응이 전혀 달라요. 집사람이야 콩나물값 깎아가면서 알뜰살뜰 살림하는 전업주부인데 처음엔 좋아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저보다 더 기부에 적극적이랍니다.”
윤 회장은 스스로의 전공을 심경학, 즉 심리경영학(그는 학부는 심리학, 석·박사는 경영학을 전공했다)이라고 말하곤 한다. 심리를 경영할 줄 안다는 의미에서다. 그는 “정의파, 대의명분파들이 설득에 실패하고 저항에 부딪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옳으냐’로 ‘좋으냐’를 무시하거나 압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진정한 소통은 ‘옳다’를 넘어, 마음속으로 ‘좋다’고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이성보다 감성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베스트셀러 비결도 사모님과의 심경학 소통 덕분이라면서요.
“하하. 네. 제 책의 첫 독자, 안테나 마켓은 집사람입니다. 작가에겐 책 내용이 정리돼 영감이 오는 ‘유레카’의 순간이 있습니다. 한밤중이라도 깨워 한바탕 책 내용을 설명하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심드렁해하면 책의 콘셉트 혹은 틀을 바꿉니다.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대부분 집사람이 한밤중 잠결에 들어도 흥미롭게 들은 책, 말 된다고 집사람이 동의를 표한 책이었습니다(웃음).이번 협업 책도 그렇고요.”
진정한 소통은 같은 세대, 같은 수준의 말을 쓰는 사람뿐 아니라 이질적 그룹의 사람과 통하는 것이다. 그의 강의가 폭넓은 호응을 얻는 것도 그 덕분이다. 이장우 브랜드마케팅그룹 회장, 차동엽 신부, 장용동 목사 등 숱한 명사들이 윤 회장의 강의를 ‘내 인생에 영향을 준 명강의’로 꼽는 것도 소통력 때문이다.
윤 회장께서 살아오시면서 겪은 가장 큰 고비는 무엇인가요.
“1980년도에 발간된 앨빈 토플러의 을 읽고 우리나라가 살 길은 정보화사회에 빨리 도전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게 됐습니다. 잘 다니던 종합무역상사에 사표를 내고 1983년 여의도에 정보전략연구소를 차렸는데 2년 만에 퇴직금까지 모두 까먹고 엄청난 부채를 지게 된 거예요. 하루가 지나면 부채는 늘고 철수하자니 빚 감당을 못하겠고. 그때가 내 인생의 최대 위기였습니다. 마침 1985년 앨빈 토플러가 방한해 붐이 일어나면서 극적으로 위기를 벗어나게 됐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은 세상 모든 일은 반드시 때가 있다는 거였습니다. 너무 늦어도 안 되지만 너무 빨라도 안 된다는 겁니다. 이후, 무슨 일이든 최적의 타이밍을 찾아내려고 심사숙고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자신감이 넘쳐 성급하게 뛰어드는데 그러면 실패하기 십상이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 칼럼니스트로 골프와 경영을 접목한 글로 인기를 끄셨지요.
“우리 사회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치고 저랑 골프를 치지 않은 사람은 드물지요. 골프를 치면서 인생의 깊은 내공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글로 써본 것이지요. 특히 김종필 전 총리랑 골프를 치면서 들은 인생 허업(虛業) 이야기가 제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정치는 허업이야. 잘났다고 하는 저 사람(정치인)들이 하는 일이 뭐가 있어? 온갖 폼은 다 잡지만 남는 게 뭐 있어? 정치는 자기들끼리 싸우다 다 잃는 거야. 제일 어리석은 직업이 정치야’라고 허무하게 말씀하신 게 기억에 남아요.”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분께 그런 이야기를 들었기에 허명(虛名), 허업(虛業)에 대한 내려놓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욕심을 많이 부리면 반드시 터지거나 넘어지게 돼 있다. 윤 회장은 인생의 욕심을 풍선과 계단오르기에 비유해 설명한다.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면 문제가 없지만 한꺼번에 많이 오르려 하면 반드시 고꾸라지는 게 인생의 법칙이다. 풍선도 마찬가지다. 있는 힘껏 풍선을 끝까지 불 수는 있지만 그러다가 터질 수도 있다. 그래서 80~90% 정도만 불고 남겨둬야 한다. 너무 빵빵하게 불면 언제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힘을,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다.
탈속의 이야기만 했네요. 세상 이야기로 돌아와 볼까요. 정보화사회, 협업 등 늘 기업 경영의 화두를 먼저 설정, 새바람을 일으키셨습니다. 또 시(時)테크, 골드칼라 등 시사용어를 선도해 유행시키셨는데요. 그 촉(觸)의 비결이 무엇인지요.
“지도자라는 것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선지자, 선견, 먼저 보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지도자는 지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즉 방향성을 제시하는 게 중요합니다. 청년기에 군에서 훌륭한 리더를 만나 생각의 틀을 다진 게 제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청년 장교(중위) 때 투스타 김동호 장군의 부관을 하다 보니 엄청난 용량의 공부가 필요했습니다. 인생의 한창때 존경할 만한 롤모델을 만나는 것은 큰 운입니다. 책 100권, 아니 1000권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책 에서 귀인효과를 말씀하시는데요. 김동호 장군이 윤 회장님의 귀인이셨나보군요.
“맞습니다. 김 장군은 영어, 일어 등 외국어 실력도 뛰어나시고, 유도, 검도 유단자에다 특히 인품이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지덕체, 문무를 겸비하신 분이었습니다. 김 장군이 면접하는 모습을 보고 단번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 실력을 묻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력, 종교, 꿈을 들려주시며 리더로서 이렇게 노력하겠다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겁니다. 당시 제 주변 동료 장교들은 퇴근 후 취직 공부를 해야 한다며 24시간 근무해야 하는 부관을 기피했어요. 저는 퇴근 후 두 시간 공부보다 이분을 모시는 게 훨씬 큰 공부가 되겠다는 느낌이 한 번에 오더군요. 존경받는 것도 기쁘지만, 존경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는 것이 더 기쁜 일입니다.”
윤 회장은 그 후 4년간을 한결같이 김 장군을 곁에서 ‘모셨다’. 제대하는 토요일, 오후 3시까지 초과 근무를 자청한 것은 초급 장교 중 전무후무해 공군 본부에서 화제가 될 정도였다. 윤 회장은 김 장군과의 인연을 40년째 이어오고 있다. 지금도 1년에 두세 차례씩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예전 어록과 교훈을 같이 추억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한다.
김 장군도 훌륭하시지만 그분을 한눈에 알아본 윤 회장님도 대단합니다. 더구나 20대 중반의 청년 장교 때요.
“그런가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알아보는 용인술도 중요하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알아보는 ‘역용인술’도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롤모델을 만나고 싶어 하지만 스스로 찾아보려고 노력하진 않거든요. 존경하는 사람이 없으면 반쪽 인생이에요. 한 번도 사랑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보다 더 불행하고 불쌍한 삶이지요. 어려운 의사결정을 할 때 ‘김 장군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자기객관화가 되면서 답이 보여요. 존경할 대상이 생기면 상대의 장점 DNA가 보이고 배워야 할 사항이 쏙쏙 들어와요. 존경하는 사람을 가지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요.
“앞으로 10년 정도는 우리나라 모든 영역, 모든 분야에 협업문화를 확산시키는 일에 매진할 계획입니다. 그 후에는 청소년 시절부터 꿈이었던 소설가로 데뷔하고 싶습니다. 소설은 현실에서는 추진할 수 없는 이상향을 마음껏 그릴 수 있으니까요. 제가 존경하는 소설가 김주영 선생님도 수시로 만나고 있고 최근에는 김홍신 선생님도 몇 번 만났습니다. 평생 동안 경험한 일들과 상상했던 일들을 융합시켜 멋진 소설을 쓰는 게 내 인생의 마지막 직업이 될 겁니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요즘은 출산율 저하로 인구감소를 걱정하지만 1970년대만 해도 ‘둘만 낳아 잘 키우자’는 표어가 골목마다 나붙을 정도로 정부에서 산아제한을 적극 장려했다. 당시의 자녀의 평균수가 6명이라고 했으니 많긴 많았다. 형제가 많은 가정에서 태어난 필자는 생일날 아침에 쌀밥정도 먹는 것으로 생일날 호사는 끝났다. 요즘처럼 저녁외식이나 가족들이 모여 케이크를 자르고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는 의식은 아예 모르고 살았다. 다만 농경사회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이니 부모님 생일은 생신이라고 높여 부르며 인근에 사는 자식들이 모여들었다.
가족의 생일을 기억하고 챙겨주는 것은 서로 가족임을 인식시켜준다. 집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밖에 나가서도 천대 받는다는 생각은 옳다. 가족의 생일을 기념하고 챙겨주는 행사는 어느 집에서나 잘한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어서 생일 당사자의 의견을 물어 외식도 하고 케이크 위에 나이숫자대로 촛불도 밝혀 생일축하 노래와 촛불 끄는 행사를 하고 있다. 가족들이 손뼉 치며 노래하고 웃음꽃이 핀다. 지켜보는 가장인 필자도 흐뭇하다. 돌아가며 생일을 맞은 식구에게 한마디씩 덕담을 하도록 한다.그러나 필자의 생일만은 필자가하는 독특한 의식이 있다. 식구들보다 먼저 일어나 세수를 하고 간편한 옷을 고쳐 입은 후 부모님 산소 쪽을 향해 큰절을 올린다. 마음속으로 “저를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는 말을 먼저 한다. 다음에 자녀들의 근황도 말씀 올리며 지금처럼 계속 보살펴 달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렇게 큰절을 올리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부모님의 영혼도 좋아하실 것 같다는 느낌은 받는다.
산소 쪽 방향은 마음속 느낌으로 판단한다. 나침판을 사용하지 않으니 틀릴지도 모르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아내는 이런 필자의 행동을 보고 있지만 특별한 말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식들에게 전화를 해서 아버지가 너희네 가정사정 이런 문제를 조상님께 보고하더라는 말을 하는 것 같다. 자식들이 아버지의 뜻을 쫒아서 실행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으로 보아 느낌으로 짐작할 뿐이다.
21세기 문명과학시대에 귀신은 없다. 하지만 잠시나마 부모님이 우릴 키울 때 고생하시던 모습도 떠올리며 건강한 몸을 주신데 대해 부모님께 늘 감사한다. 생전에 자식 걱정만 하시던 분들이 부모님들이시니 하늘나라에서도 언제나 가족을 지켜주실 것으로 믿으니 든든한 빽이 있는 기분이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생일날 축하 인사만 받으려 하지 말고 나를 있게 해준 부모님께 고마운 마음을 갖는 것이 먼저다. 건방진 소리지만 자식들에게 효행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자기만의 독특한 의식이 나는 남과 다르다는 또 다른 자신감이다.
바둑 천재 이창호의 좌우명이다. ‘부득빈승(不得貧勝)’이란 바둑용어로 ‘욕심이 과하면 승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나이 들면 승부가 걸린 것은 피하라’는 말이 있다. 승부에 집착하다 보면 상대방과 다툴 수도 있고 자신에게도 건강 상 좋지 않다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 약간의 긴장은, 약간의 스트레스로 오히려 정신 건강에 좋다고 생각한다. 댄스 경기에 나가 보면 경기시간 종목당 2분 동안 틀리지 않고 춤을 춰야 한다는 긴장감이 있어 좋다. 아직까지 여러 번 경기 대회에 출전하면서 순서를 까먹은 적은 없다. 그만큼 많은 연습과 요령에 속하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 결과이다.
필자는 당구도 즐기는 편이다. 당구는 승패가 있다. “져서 기분 좋은 사람 없다”고 한다. 일단 승부에서 져서 기분 나쁘고 결과에 따라 게임비나 술값을 내야 하니, 지면 기분이 더 안 좋은 것이다. 그래서 되도록 이기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너무 이기는데 집착하다 보면 오락의 범주를 넘어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승부 게임에서 팽팽하면 경기가 끝났을 때 상당한 피로감을 느낀다. 이기면 짜릿한 승리의 기쁨이 있어 피로가 덜 하지만, 졌을 경우는 더 피로감이 심하다. 당구도 머리싸움이라 뇌 에너지 소비가 상당하단다. 수많은 경우의 수 중에 자신이 가장 성공 확률이 높은 방법으로 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든 게임을 치르고 나면 탈진 비슷하게 되는 모양이다. 뇌 에너지 소비는 근육 에너지보다 에너지 소비량이 많고 회복도 느리지만, 치매 예방에는 그만큼 도움이 될 것 같다.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 하여 전투에서 한 번의 패배나 실수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늘 이기기만 하면 좋겠지만, 승부를 겨룬다는 것은 상대방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 덤비는 것이므로 결코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전투에서 한번 졌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전투가 여러 개 모여 대세로 나타나고 작은 전투에서의 패배는 귀중한 참고가 되어 큰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도 있다.
승자는 적이 많이 생긴다. 진 사람이 적의를 품는 것이다. 경쟁자들도 호시탐탐 승자를 꺾을 기회를 노린다. 승자의 약점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약점이 보였다 하면 가차 없이 공격해 들어간다. 그러므로 삶이 피곤해진다. 결국 ‘부득빈승(不得貧勝)’의 결과만 남는다.
성격이 강한 사람들은 남과 의견 충돌이 일어나면 물러서지 않으려 한다. 물러서면 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듣고 싶으면 져주면 효과가 좋다. 그러나 일부러 지려는 듯 져주면 상대방이 오히려 농락당한 기분이 든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게 져주는 방법이 상책이다. 져주는 방법은 양보이다. 한 번 이겼다고 해서 큰 소득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한번 졌다고 해서 크게 손해 볼 일도 없다. 어느 편이 속 편할지는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다.
우리가 흔히 형제의 나라로 칭하는 터키였지만 솔직히 필자에겐 그런 감흥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십몇 년 전에 터키를 가볼까 생각한 적은 있었다.
언젠가 인터넷 서점을 뒤적이다가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와 바로 주문해서 읽었던 책이었다. 책 내용이 단순히 터키 여행이 꿈이었다거나 너무도 멋진 풍광의 나라였기 때문인 제목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제목에서 지칭되었던 터키가 한동안 필자의 뇌리에 박혀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 책의 소개 글에서 말하기를,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 '빌어먹을, 벌써 쉰이네!' 하는 생각이 들 때 집어 들고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집필했다고 했다. 또 저자는 폐경기를 이기고 삶의 열정을 새롭게 지피기 위해서 늘어진 유방과 얼굴의 주름과 잡티를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자신감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단순히 중년의 미국 아줌마들의 인생 수다판이라고 생각하고 쉽게 쑥쑥 읽기엔 던져주는 화두와 해법이 명쾌해서 빳빳해지는 긴장감과 함께 활기를 주기도 했었다.
40대, 50대... 90대 여자들의 소중한 삶의 경험만이 아닌 기다리고 있는 삶에게 외치는 모습이 유쾌했다. 그녀들은 외친다.
"연령차별과 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빈둥대며 놀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충고하는 90대의 할머니(아니, 여성!!)
"난 이제 더 이상 외모에 신경 쓰지 않아요." 주름 수술할 돈으로 터키와 그리스로 여행 다녀왔어요"
"나이를 빨간 스카프처럼 목에 감고 꼿꼿이 대로를 활보하자”
6.25 참전국이었거나 월드컵 축구 때문이기보다는 별 의미도 아닌 이런 즉흥적이고 단순한 의미에서 터키 여행은 어이없겠지만 그 정도가 이유였다. 물론 지금은 그조차 이미 생각나지 않는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터키 공항은 생각보다 작았고 저녁시간이어서인지 북적이는 사람들이 바쁘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입국심사 행렬에서 뒤죽박죽 엉킨 채 터키인 인듯한(모습이나 말소리로 보아서) 일행들끼리 길을 막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새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 편인 필자는 긴 비행시간으로 이미 고단한데 점점 더 지친다. 더구나 지하철을 타려고 교통카드를 구입하고 충전하는 과정에서 거스름돈이 나오지 않는다. 마침 옆에 서있던 한국 학생이 “여기 원래 자주 그래요” 한다. 이래저래 피곤해 진다.
지하철과 트램을 연결 이용해서 시내인 술탄 역(Sultanahmet)까지 나오니 저녁 바람이 쌀쌀하다. 이스탄불은 구도시와 신도시로 나뉘는데 유명한 사원이나 궁전, 그리고 다양한 볼거리들이 구도시인 이곳 슐탄 역 부근에 많이 있다.
미리 예약해 두었던 숙소도 이곳이어서 시내 구경도 할 겸 두리번거리면서 천천히 밤거리를 걸어갔다. 짙은 눈썹과 검고 큰 눈망울의 터키인들이 활보를 한다. 머리에 히잡(Hijab)을 두른 여성들도 흔하게 보인다. 이스탄불이다.
는 독일의 외무장관을 역임한 요쉬카 피셔가 쓴 책이다. 181cm키에 112kg의 뚱보였다가 마라톤으로 일 년 만에 75kg으로 감량한 체험 수기이다. 피셔는 택시 운전사에서 외무장관까지 지낸 사람으로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체중이 그렇게 늘었다는 것이다. 현직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감량에 성공하고 나니 자신감도 생기고 건강도 좋아져 마라톤 마니아가 된 것이다.
피셔는 너무 뚱뚱해서 세 번째 부인에게 이혼 당했다. 돌아보니 그럴 만 했다는 것이다. 볼 품 없는 뚱뚱한 외모, 걷기만 해도 숨 가빠 하는 저질 체력, 그대로 가면 건강상으로도 무슨 일이 터져도 터질 것이라는 불안감도 있었다고 한다. 이혼의 충격으로 그때부터 감량할 방법을 찾다가 마라톤을 선택한 것이다. 1948년생인 그는 그때 나이가 한창 50대를 향해 갈 나이였던 1996년이다. 정치 일선에서 한창 바쁠 때였다. 바빠서 운동할 시간이 없다는 사람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새벽 시간을 쪼개든, 밤 시간을 쪼개든, 달리고자 하는 의욕만 있다면 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피셔는 그렇게 했다.
살을 빼는 데는 달리기만한 운동은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먹는 것도 중요하다. 둘 다 겸해서 해야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쉽지 않지만, 달리기를 열심히 하다 보면 고기, 술 등 살찌는 음식을 자연스럽게 멀리 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 다 겸한 결과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주변의 약간의 오르막에서 걷는 것도 힘들었단다. 조금씩 운동량을 늘려 나가면서 1년 9개월 만에 풀코스까지 완주하게 된 것이다.
필자도 올해 마라톤을 시작했다. 늘그막에 마라톤을 시작하면서 과연 너무 늦은 나이에 무리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었다. 아직 풀코스는 뛰지 못했고 첫해인 올해 10km를 3번 뛰었다. 내년에는 10km를 몇 번 더 뛰어보고 하프 코스에 도전해 볼 목표를 세웠다. 피셔의 기록과 필자의 기록은 비슷하다. 10km면 한 시간, 하프 코스인 20km면 2시간, 30km는 3시간, 풀코스는 4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썼다.
피셔는 마라톤은 늦은 나이에 시작해도 상관없다고 썼다. 심폐 기능이 좋아지고 다리 근력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필자의 경험으로도 다리 근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특히 오르막 계단의 경우 피로도가 많이 감소되어 좋아졌다. 마라톤에서 속도를 낼 때 땅을 박차는 다리 근육이 강화 된 것 같다. 뱃살이 당기는 것은 체감했지만, 아직 체중 감량 효과까지는 맛보지 못했다. 달리는 것을 생활화해야 감량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먹는 것도 아직 변화 시키지 못했다. 고기든 술이든 기회 닿는 대로 마다하지 않는다. 체중이 더 안 늘어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이제 막 마라톤을 시작한 필자의 경우에 이 책은 많은 도움을 준다. 피셔나 필자나 프로가 되려고 마라톤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나 프로처럼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특히 체력 배분을 위해서 초반에는 천천히 뛰어야 하는데 주변 분위기에 휩싸여 속도를 내다보면 무리가 온다는 것이다. 프로 선수들도 그 분위기 때문에 초반 레이스에서 오버 페이스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빨리 뛸 수는 있지만, 초반에는 그 기분을 억제하는 것이 요령이자 수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