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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가지에서 생긴일] 시부의 휴가계획… 며느리 민낯보기
- 은퇴한 시니어들이 집을 줄인 것을 후회할 때는 명절이다. 아이들이 많은 딸네에게 안방을 내어주고, 아들 식구는 건너방, 그리고 부부는 서재에서 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며칠 간의 명절을 위해 예전의 집을 그대로 유지할 수도 없다. 그래도 장난감들이 가득한 손자들만의 방을 꾸며 자식들의 방문을 살짝 유혹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오늘날 3대가 같이 자고 먹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여름휴가철은 시니어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렇지만 자식들의 휴가 일정에 맞춰 시기를 선택하고 그들이 선정한 장소로 출발하여 그네들이 운전하는 차에 얹혀 돌아오는 휴가는 뭔지 초대받은 손님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이번 여름만큼은 스스로가 휴가계획을 짜서 애들을 소집하는 호기를 한 번 부려보고 싶어진다. 사실 휴가란 자식들에게 또 다른 부담으로 다가온다. 바쁜 직장, 가정 생활 속에서 휴가 여행을 계획하고 진행해야 하는데, 그 와중에 모시지 못 하는 있는 부모님들도 눈에 밟힌다. 이럴 때 한 번쯤은 시니어들이 주도하는 휴가여행을 제시하고 진행한다면, 그네들도 그리 싫지만은 않으리라는 상상도 해 본다. 물론 숙박 경비정도는 지불할 각오는 돼 있어야 하지만. 먼저 자식들의 휴가 일정을 대강 파악해 부담이 가지 않도록 그네들의 일정 중 1박 2일 정도만 할애하도록 유도한다. 사실 2박 3일 이상은 비용과, 만족도라는 측면에서 위험부담이 크다! 말을 꺼내면서 ‘숙박은 내가 예약을 하고 경비도 지불한다’고 하면 대개‘ 마침 저희도 휴가 중 부모님들을 모실 계획이었는데 마침 잘 됐네요’라는 효자성 멘트가 날아온다. 만약 애들 사정으로 못 가게 되더라도 필자는 일단 어른으로서의 폼은 다 잡았다. 이 무산된 필자의 성의는 그네들에게 계속 커다란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므로 결코 밑질 게 없다. 일정이 확정되면, 어디로 가 어디에서 묵을까를 직접 정해야 한다. 먼저 장소다. 그런데 손자들은 무조건 바닷가다. 그러면 바다는 다른 일정에 그네들끼리 가라고 해야 한다. 필자와 떠나는 1박 2일만큼은 계곡이나 휴양림지역이라는 것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 어린 아들, 딸을 데리고 갔던 젊은 시절의 바닷가를 절대 잊으면 안 된다. 광대한 바다에서의 안전사고 위험, 세찬 바닷바람, 젊은이들의 소음, 온몸과 음식에 끊임없이 파고드는 그 모래들…. 그래서 애들을 계속 씻기고 수영복 빨래한 후, 햇볕에 익은 살갗에 연고를 발라주던 밤을 잊을 수가 없다. 이제 이 나이에 파라솔에서 식구들 짐 지키며 햇볕, 모래와 싸우고 싶지 않다. 다음으로는 묵을 곳이다. 그러면 호텔과 콘도가 먼저 떠오른다. 모두 각종 부대시설이 잘 갖춰져 있고 또 경관이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휴가철의 비싼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예약의 번거로움을 생각하면 망설여진다. 무엇보다 끊임없는 에너지로 계속 들락날락대는 손자들에게 자연을 만끽하게 하고 싶은 생각이라면 제외하고 싶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펜션으로 넘어간다. 최근의 숙박 형태에 대한 한국관광학회 연구보고서(2013년)도 전체 숙박시설 중 펜션, 서비스드레지던스 등의 ‘생활숙박시설’에 대한 선호도가 상승하고 있음을 얘기하고 있다. 펜션의 장점은 먼저 취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콘도에서도 취사가 가능하지만, 넓은 야외 바비큐장이나 독립된 베란다에서 고기를 직접 굽기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복층펜션이나 독립된 방갈로식 펜션의 경우, 다세대가 함께 숙박하면서 한 집 식구라는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콘도의 경우는 어린 아이들이 마음 놓고 자주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는 데 반해 펜션은 문만 열면 마당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펜션들은 마을 속에 함께 자리잡고 있어 해당 지역의 문화를 만끽할 수도 있다. 식사 후 동네 어귀 구멍가게의 평상에 앉아 막걸리 한 잔하며 동네이야기를 푸근하게 들을 수 있어 좋다는 얘기다. 또, 펜션을 운영하는 이들은 거의 다 시니어들이다. 그래서 같은 세대의 공감대와 하룻밤을 묵는 정을 바탕으로 그 지역의 유기농 특산물이나 좋은 식당들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새로 지은 펜션의 경우는 베란다에 야외욕탕들을 마련한 경우도 많아 하늘의 별을 보며 온몸을 담글 수 있는 한 여름밤의 낭만도 맛볼 수 있다. 다만 부대시설이 미흡하고 소음에 취약하지만, 아직도 사생활 보호(?)를 중시하는 시니어가 아니라면 펜션을 이용하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펜션들 중, 제대로 된 펜션을 고르는 방법들은 무엇일까? 시니어의 경우 원거리는 배제하고 2-3시간 거리의 지역을 선택한 후 ‘떠나요닷컴’이나 ‘ 우리펜션’ 등의 펜션관련 사이트에서 실시간 빈방 검색을 한다. 다음으로 풀빌라펜션, 수영장펜션, 월풀, 독채형 등의 유형을 정해 예약을 진행하면 된다. 선정 시엔 먼저 ‘펜션정보’에서 건립연도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일단 최근에 생긴 펜션을 우선으로 선택해야 한다. 전문적인 관리를 하지 못하는 펜션들의 특성상, 호텔이나 콘도에 비해 시간이 갈수록 급하게 시설이 낙후되기 때문이다. 또한 인터넷 사이트에 보이는 펜션들의 사진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야간 조망사진은 너무 낭만적이라 혹하기 쉬운데, 그 조명발에 절대 넘어가면 안 된다. 그리고 주인들의 셀프댓글들이 많으니 칭찬 일색의 사용후기들도 유심히 봐야 한다. 특히 ‘주인이 직접 재배하신 상추에 삼겹살을 주인 식구들과 너무 맛있게 먹었다’는 글을 보고 그런 상황을 기대하면 마음에 상처만 얻는다. 숙박비는 보통 10만~20만 원 대이지만 대부분 휴가철에는 성수기요금을 따로 책정하고 있어 확인이 필요하다. 최근에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특급호텔보다도 훨씬 비싼 최고급 펜션들도 많아 선택의 폭이 더욱 넓어졌다. 마지막으로 ‘구매 후 의심’을 버려야 한다. 직접 선택한 것들이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지만 ‘우리 아버님이 펜션 잡아 주셔서 다녀온 휴가’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 함께 먹고 자며, 며느리 민낯 보는 게 어찌 예사로운 일인가! 이런 자신를 대견스럽게 여기며 이런 선택에 대해 절대 후회하지 말자! 사실 겁이 살짝 나기는 나지만….
- 2016-06-01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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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46년生, 결핍과 허기의 시대
- 문창재 내일신문 논설고문 집에서 지하철역에 가려면 백화점 두 곳을 지나게 된다. 하나는 주로 중소기업 제품을 취급하는 곳이고, 하나는 굴지의 재벌기업 소유다. 통행인이 많은 길옆 점포들은 고객을 유혹하려고 바리바리 물건을 쌓아놓고 늘 ‘세일’을 외친다. 60층이 넘는 주상복합 아파트 세 동의 하부를 이루는 재벌 백화점 지하에는, 지하철역과 통하는 무빙 워크가 있어 편리하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젊은 날 나를 괴롭힌 결핍의 시대가 떠오른다. 그 많은 의류와 잡화들이 그런 회억의 실마리다. ‘그때 저렇게 값싸고 질 좋은 방한복이 있었으면 그날 그렇게 떨지 않았을 텐데….’ 눈에 띄는 제품마다, 후각을 파고드는 음식과 향신료 냄새마다 지나간 결핍의 시대 영상을 내 기억의 창고에서 끌어낸다. 저런 신발이 있었으면 시린 발을 동동거리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저렇게 강렬하게 후각을 유혹하는 음식이 그 시절에 있었던가! 4·19 학생혁명이 일어난 1960년 제야에 나는 처음 서울에 왔다. 다음 해 3월의 고등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위해서였다. 그날 아침 나는 지독한 추위에 떨었다. 아마도 영하 20도는 되었을 혹한의 미명이었다. 삭풍이 몰아치는 신작로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얼마나 제자리 뛰기를 했던지, 눈썹에 먼지가 허옇더라 하였다. 그 새벽 버스는 오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장터에 올라가 보았다. 운전사가 버스 밑에 엎드려 장작불을 피우고 있었다. 밤새 얼어 시동이 걸리지 않는 기관을 녹인다는 것이었다. 밤에 읍에서 올라와 다음 날 새벽에 떠나는 그 버스밖에는 교통편이 없었다. 도리 없이 서울행이 하루 늦어졌다. 구불구불 느릿느릿 달리는 그 버스 편으로 250리 밖 중앙선 철도역에 닿아, 귀성객으로 꽉 찬 열차에 결사적으로 올라탔다. 짐짝처럼 흔들리고 구겨진 열다섯 시간의 여행 끝에 청량리역에 도착한 그날 밤부터 나는 지독한 감기몸살로 앓아 누웠다. 그때 나의 입성은 초라하였다. 마직 검정색 교복 안에 목내의를 겹쳐 입었을 뿐이었다. 외투도 털목도리도 없이 얇은 명주 수건을 목에 두르고 세 시간 넘게 한데서 떨었으니, 얼어 죽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신발도 그랬다. 눈만 흘겨도 찢어질 것 같은 조잡한 운동화 차림이었다. 한겨울 백두대간 종주산행 때나 한라산 눈밭에서도 그렇게 발이 시려본 적이 없는 근래의 기억과 비교하면, 참 어이없는 시대였다. 우리는 ‘해방둥이’로 불린 축복의 세대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광복조국에 태어났으니 어른들 보기에 얼마나 복 받은 세대겠는가. 그렇지만 우리의 유소년 시대는 그 반대였다. 6·25 전쟁의 격류 속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전쟁 중에 입학한 학교생활의 하나부터 열까지가 없거나 모자랐다. 그러나 큰 불편을 몰랐다. 당연한 줄 알았다. 산골짜기여서 6·25 때는 피란을 가지 않았다. 광산 갱도 안에서 급박했던 며칠을 피하고, 인민군과 국군에게 번갈아 지배당한 몇 달이 지나간 1·4후퇴 때는 피란을 갔다. 모두 피란을 가라는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하였다. 태백준령 눈밭을 넘어 경상북도 봉화 땅에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다음 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국공 양측 군대의 본부로 쓰였던 교사는 불타고 없었다. 컴컴한 군용천막 안이 교실이었다.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책상도 없는 바닥에 앉아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가마니 바닥에 책과 공책을 펴놓고 ‘가갸거겨’를 배웠다. 칠판을 보고 글씨를 쓰려면 궁둥이를 높이 쳐들고 어깨를 낮추어야 하였다. 궁둥이 때문에 칠판이 안 보인다고 툭하면 싸움이 났다. 교과서가 부족하여 두 사람이 한 권을 같이 보았다. 그러다가 한두 아이가 작은 책상을 들고 와서 교과서와 공책을 올려놓았다. 그게 부러워 너도나도 그런 책상을 들고 다니게 되었다. 줄지어 들고 와서 하학 때 들고 나가는 모습이 교문 앞 풍경으로 굳어졌다. 날씨가 풀려 야외수업을 할 때가 제일 즐거웠다. 특히 벚꽃 그늘에서 공부할 때가 좋았다. 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고학년이 되어 새로 지은 판잣집 교사에 들어갔을 때는 행복하였다. 소나무 판자의 향기가 그윽한 널따란 교실 벽을 트고 학예회를 할 때는 세상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몇 해가 지난 뒤 ‘사라호’로 불린 태풍에 학교 함석지붕이 날아가고, 벽면이 위태롭게 기울었을 때는 왜 우리 학교만 그런 신세가 되었는지 의아스러웠다. 그때는 너나없이 돈이 없었다. 돈을 본 일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님 따라 화전민 마을에 갔다가, 자두 한 되를 5환에 사먹은 일이 있다. 돈 구경을 못 해보았는지, 촌 아주머니는 선생님이 꺼내든 10환짜리와 5환짜리 돈 가운데 빨간색 5환짜리가 탐났던 모양이다. 10환짜리를 주려 하니 빨간 돈을 달라 하였다. 태풍 피해자 돕기 의연금 같은 돈 걷는 일에 현금을 낼 수 있는 아이는 드물었다. 새 학기가 되어 갈려 가는 선생님에게 주어야 한다고 전별금을 걷을 때도 그랬다. 돈을 낼 수 없는 아이들은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을 한 됫박씩 가져왔다. 팔아서 돈으로 주었던 모양이다. 6학년 수학여행 때도 쌀을 지고 갔다.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셨다는 정암사까지 80리 길을 쌀 두 되를 지고 종일 걸어서 갔다. 밤중에 도착하여 지고 간 쌀로 밥을 지어 먹고, 다음 날 수마노석으로 쌓았다는 돌탑을 보고, 또 종일 걸어서 돌아왔다. 객지에 공부하러 나간 학생들 하숙비도 쌀로 내던 시절이다. 식량의 결핍은 너무 슬퍼 되돌아보기 싫다. 그 시대 어느 고장 어느 마을이고 넉넉히 먹고 산 데가 없으니 특별한 이야기는 못 되리라. 그러나 미국에서 왔다는 우유가루 배급 이야기만은 빼놓을 수 없다. 쌀자루에 그걸 배급받는 날, 손으로 집어먹어 얼굴에 허연 가루를 묻히고 장난치던 일이 결핍의 시대 화제에서 빠질 수는 없다. 사료용이었다는 그 가루를 쪄서 과자처럼 만들어 먹은 날에는 어김없이 배탈이 났다. 그런 날 온종일 학교 변소가 붐비던 일은 비탄의 감정 없이는 돌아볼 수 없다. 사람 사는 세상에 꼭 있어야 할 것 가운데 책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을 파는 곳이 없어 낙망하였던 일은 나의 소년기에 큰 상처가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지 못하여 기가 죽어서 지낸 몇 달 동안, 나는 어린이 도벌꾼이었다. 중학교 참고서를 사다가 독학을 하리라는 장한 꿈으로 산에 올라 소나무를 베어 젖혔다. 그걸로 장작을 만들어 장에 지고 가면 “어린 것이 진학을 하지 못하고 나무꾼이 되었구나!” 하고 측은해 하며 사주었다. 그렇게 참고서 값은 마련되었으나 책을 살 길이 없었다. 빨간 딱지 이야기책이나 취급하는 잡화점에 부탁하여 ‘간추린 영어’ ‘간추린 수학’ 같은 참고서를 주문하여 책을 손에 넣고 나니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알파벳을 배워 본 일이 없는 영어 까막눈에게 영문법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수학도 그랬다. 1학년 2학기에 편입한 첫 수학시간부터 나는 그 과목과 멀어져야만 하였다. 그때 선생님들은 왜 그렇게도 질문을 싫어하셨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집안에도 이웃에도, 그 목마름을 풀어줄 사람이 없어 나의 영어와 수학은 점점 ‘불구’가 되어 갔다. 읽을거리에도 목말랐다. 교과서 말고는 책도, 신문도, 잡지도 없었다. 유일하게 책을 가진 동네 형 집에서 찾아낸 책들은 소용에 닿지 않았다. 서울에서 신문을 배달하며 야간대학에 다니던 그의 책꽂이에서 어느 날 눈에 번쩍 뜨이는 책을 발견하였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였다. 그 전 해였던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빌려다 읽어 보았으나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우리말로 된 책이었지만 그렇게 어려웠던 까닭을 이제는 알만하다. 노벨상 대목을 노려 급하게 이중삼중 번역판으로 내놓았을 책의 내용이 오죽하였으랴! 그나마도 얇은 축약판으로 나온 책이니 물어볼 나위도 없는 일 아닌가. 책에 대한 허기를 채우려고 나는 서울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도서반에 들어갔다. 방과 후 교내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원하는 책을 찾아주고 반납 받은 책을 정리하는 서비스의 대가로 도서반원에게는 관외대출 특전이 주어졌다. 그 혜택 덕분에 책과 가까이 하게 된 것이 내 인생행로의 나침반이 되었다. 서울생활에서는 겨우 책에 대한 갈증을 풀었을 뿐, 다른 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내 주머니는 텅 비어, 갖고픈 게 있어도 가질 수가 없었다. 물건은 많은데 돈이 없어 욕망을 채울 수 없는 고통이 더 크다는 걸 그때 알았다. 고등학교 3년간 통학로였던 서울역 염천교 길은 오사리 잡탕. 백화점이었다. 갖가지 먹을 것을 파는 노점상에서부터 입을 것, 신을 것, 지닐 것, 야바위판 등등 없는 게 없었다. 어떤 루트로 흘러나온 것인지, 시장골목보다 값싸고 멋진 물건으로 넘쳐났다. 그러나 한 달 치 전차회수권 60장이 유일한 유가증권이었던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내가 제일 갖고 싶었던 것은 멋진 학생 단화였다. 다른 아이들은 다 가진 그것을 나는 못 가졌다. 입학 때 내게 떨어진 것은 3년 넘게 신을 수 있다는 군화였다. 무게를 줄이려고 목을 잘라낸 그 신발을 꼬빡 3년을 신었다. 졸업 무렵에는 발등 부위에 두 군데씩 구멍이 뚫려 우리 반 아이들이 “박물관으로 가져가자”고 한 유명한 신발이다. 유소년 시절과 학생시절 나를 괴롭힌 유형무형의 결핍은 대학에 가서도 풀리지 않았다. 머리가 굵어질수록 욕망은 커지는데 여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가슴속에는 늘 욕구불만이 자꾸 쌓여갔다. 내 욕구를 눌러 꼼짝 못 하게 할, 쓰고 또 써도 넘쳐날 풍요를 찾아 헤맨 4년이었다. 그 허기는 직장생활을 시작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일하면 채워질 날이 있을 것 같았다. 밤을 낮처럼 지새우는 끝없는 일구더기를 벗어나, 세상의 주역이 될 나이가 되면 달라지지 않을까. 이런 기대에 속아 허겁지겁 달려왔다. 퇴직을 하고 인생의 종점이 보이는 곳에 당도하여서도 달라진 건 없다. 그래서 불행한가? 난 요즈음 이런 자문을 할 때가 있다.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누구도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원히 욕구를 채울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는가. 그리고, 가득 채워본들 무엇 하리! 저 세상 갈 때 무얼 가져갈 수 있겠는가. 유형무형의 결핍 속에서 모자라고 빈 데를 채워보려고 허덕이는 과정 자체가 인생이라는 것을, 불유구(不踰矩)의 언덕에 올라서야 알았다. 아 아, 이 미욱함이여!
- 2016-06-0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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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문화] ‘쇼 미 더 머니 (show me the money)’를 아시나요?
- 우리 시니어에겐 조금 생소할 수도 있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제목이 ‘쇼 미 더 머니’인데 직역하면 돈을 보여 달라는 것이지만, 요즘 이 말은 우리 시니어에게는 잘 알지 못 할 수도 있는 ‘랩’ 배틀 프로그램이다. 이제 우리에겐 지상파인 KBS, MBC, SBS 방송 외에도 아직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채널이 있을 정도로 선택해 볼 수 있는 방송이 많아졌다. 공중파 채널을 이리저리 탐색해 보다가 이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는데 인기가 매우 커서 벌써 쇼 미 더 머니 시즌5 가 되었다. 필자는 지난번 쇼 미 더 머니 4시즌 때 처음 접해보고 정말 문화적 충격과 그 매력에 흠뻑 빠져 한 회도 거르지 않고 금요일 11시를 기다렸다가 시청하곤 했다. 많은 경쟁자 중에서 마지막까지 경연을 벌였던 시즌4의 베이식과 송민호는 유명인이 되었고 나도 그들의 팬이 되었다. 오디션이 시작되면 수많은 젊은이가 모여 심사를 받는데 이번 쇼 미 더 머니 시즌5에는 1차에 8.000명가량이 와서 80여 명 정도 통과했다. 1차 진행방식으로는 프로듀서라고 불리는 기존 힙합음악인들이 오디션에 온 참가자의 랩을 잠시 듣고 합격 불합격을 매긴다. 그때부터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다. 짧은 시간 안에 프로듀서의 눈에 들어야 합격 목걸이를 얻을 수 있으니 그들의 사활을 건 오디션 모습이 젊은이들의 지친 단상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랩이란 내게 생소한 분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꾸 듣다 보니 힙합 랩만이 보여주는 매력이 있었다. 16마디가 주를 이루며 가락에 맞추어 말하듯 내뱉는데 주로 시사풍자나 사회고발이야기가 많다. 게다가 욕설도 간간이 섞으니 어른들이 보면 상스럽다거나 이상해서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아들에게 쇼 미 더 머니 라는 프로그램이 참 재미있더라고 했더니 우리 엄마가 좀 이상하다는 듯 “그 막 욕하는 거?”하며 놀란다. 그만큼 어른들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방송 중에는 욕설하는 부분은 삐~하며 묵음으로 처리하고 입에는 모자이크되어 직접 들리진 않으니 큰 거부감은 없다. 그래도 많은 시니어께서는 저게 뭐냐며 싫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경쟁해서 이긴 마지막 일등의 참가자는 억대의 상금과 고급승용차도 받고 명성도 얻게 되니 많은 젊은이가 꿈을 이루려고 구름처럼 몰려든다. 필자는 음악이라면 장르 불문하고 다 좋아했다. 젊었을 때는 무슨 치기였는지 팝송이나 샹송 칸초네를 좋아해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채 한국발음으로 가사를 써서 외우고 다녔고 가요, 특히 뽕짝이라고 불리던 노래는 듣지 않았다. TV를 보다가도 뽕짝 가수가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그런 노래는 들으면 창피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중 남진 나훈아 씨도 있었다. 옛말 그른 것 없다더니 나이가 들면서 가요가 좋아지고 남진 나훈아 씨가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한때 경멸했던 그들의 오빠 부대 여자들을 이해하게도 되었다. 그렇게 장르 불문 좋아했던 음악에 힙합 랩이라는 생소한 음악이 더해졌다. 이들이 겨루는 배틀 장소도 영화에서나 보았음 직한 격투기장을 연상시켜 흥미롭다. 그 무대에서 벌어지는 배틀을 보며 많은 젊은이가 환호하고 즐기는데 보는 동안은 나도 젊은 그들과 똑같이 즐겁고 신난다. 경연자 중 어느 팀이 우승할 것인지 무척 기대되며 다음 주를 기다린다. 이번 시즌5에서는 또 어떤 새로운 히어로가 탄생할지 자못 궁금하다. 우리 시니어들도 그저 생소한 분야라 외면하거나 욕설이 있는 저속한 청년문화라 치부해 버리지 말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면서 관심을 가져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젊은이들과의 생각 차이를 줄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새로운 문화를 알게 되는 것도 즐거운 배움이 아닐까?
- 2016-05-23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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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우리가 원로라고? 음악 속 우리는 스무 살” 평균나이 65세 보컬그룹사운드 ‘파파스 밴드’
- 히 식스(He 6). 1960~1970년대 미8군 무대와 이태원·명동 일대 음악 살롱을 격렬한 록 음악으로 장악하던 여섯 명의 청년(권용남, 김용중, 김홍탁, 유상윤, 이영덕, 조용남)이 있었다. 당시 젊은이들의 우상이자 거울과 같았던 그들은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또 다른 세대의 거울 앞에 섰다. 중·장년의 답답한 마음을 달래주고, 낭만을 추억하는 그들의 새로운 이름은 ‘파파스(PAPAS)’ 밴드다. 그 이름처럼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음악만 있다면 언제나 20대로 돌아간다는 그들을 만나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히 식스 원년 멤버였던 조용남(曹龍男·69), 유상윤(兪尙潤·68), 김용중(金用中·68)을 주축으로 조용필 밴드 ‘위대한 탄생’의 이건태(李建泰·63), 변성용(卞成鏞·63), 와이키키브라더스의 리더 최훈(崔薰·59)이 합세한 파파스 밴드. (다른 히 식스 멤버들은 건강이 좋지 않거나 해외에 거주해 함께하지 못했다고) 히 식스 2기로 함께 활동했던 고(故) 최헌(1948~2012)을 추모하기 위해 다시 모인 것이 밴드 결성의 계기가 됐다. “(조용남)보컬이었던 최헌씨가 작고한 후, ‘2013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에서 대통령표창을 받았어요. 고인이 되어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 수 없으니 같은 팀이던 우리가 그를 위해 연주하면 어떨까 생각했죠. 그렇게 잠시 모여 공연을 했었는데, 김용중씨가 못내 아쉬웠는지 ‘우리 다시 뭉쳐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그 친구가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정말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뜻을 모았죠.” 당시 간암을 앓고 있던 김용중씨는 자신을 가장 활력 넘치게 했던 젊은 날의 그 음악이 간절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음악으로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았다. “(김용중)다 같이 모여 연습하는 것은 일주일에 하루뿐이지만, 그 하루를 위해 6일 동안 열심히 준비해야 해요. 내가 좋아하는 음악에 푹 빠져 지낼 수 있으니 참 행복하고 재밌어요.” 파파스 음악, 중장년 마음의 ‘사이다’ 보컬그룹사운드라는 것을 강점으로 내세운 그들은 각자의 포지션(베이스-조용남, 색소폰·건반-유상윤, 리듬기타-김용중, 건반-변성용, 드럼-이건태, 리드기타-최훈)과 더불어 모두 보컬을 겸하고 있다. 그들이 주로 연주하고 부르는 음악은 1970년대를 풍미하던 올드 팝과 로큰롤이다. 젊은 시절 손끝이 닳도록 기타를 치고, 목청이 나갈 정도로 불렀던 노래들이다. 부른다기보다는 부르짖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당시 나온 기사들만 보아도 그들의 모습을 ‘폭발하는 젊음의 절규’, ‘화려한 조명 아래 정글에 가까운 노래’ 등이라 표현했으니 말이다. 파파스 밴드의 맏형인 조용남씨는 히 식스 시절 한 인터뷰에서 “젊은 세대의 음악인 우리의 울부짖음을 통해 위안을 얻는 거죠. 청량음료 역할을 하고 있는 우리의 참 마음을 (어른들이) 알아달라고 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언어 중에 ‘사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이다(탄산음료)처럼 시원하게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을 표현할 때 쓰는 신조어다. 그 시절에 그들의 음악이 바로 ‘사이다’ 같은 존재였던 것. 위축되고 권태에 짓눌린 젊은 세대의 마음을 톡톡 쏘는 음악으로 시원하게 만들어준 그들이다. 그리고 현재, 그들이 그때의 곡들을 다시 연주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유상윤)젊은 사람들이 요즘 중·장년은 트로트나 뽕짝 같은 것만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당시 우리에겐 그룹사운드의 음악이 가장 세련되고 인기 있었죠. 밴드 간 경쟁도 대단했어요. 그 치열하던 시절에 심취한 음악을 연주하다 보면 꼭 20대로 돌아간 것 같아요. 패기와 열정으로 함께한 친구들도 같이 있으니 철없던 시절 추억들도 새록새록 떠오르고요.” 뭉클한 옛 기억에 잠기는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파파스의 음악을 듣는 관객 역시 혈기왕성했던 시절의 추억 한 자락을 곱씹어 본다. “(최훈)얼마 전에 우리 공연을 보고 간 한 관객이 자기 블로그에 ‘팬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말에 울컥했다’고 썼더라고요. 젊은 친구들은 경험하기 어려운 오랜 팬과의 음악적 교감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죠. 우리의 음악을 통해 그런 짙은 감정을 공유할 때가 참 뿌듯하고 흐뭇해요.”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순간의 감동과 즐거움일 수도 있지만, 파파스 세대에게 음악이란 과거의 리듬을 되살아나게 하는 촉매제와도 같다. 조용남씨는 “음악이 그래서 좋은 거잖아. 내가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음악이 나오면 그 시절로 확 돌아가는 거야!”라며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보였다. 그의 말에 “맞아! 맞아!”라며 맞장구치는 파파스 멤버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간직하고 있을 뜨거운 추억의 온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배려’로 다져지는 파파스 음악 그룹 ‘와이키키브라더스’와 ‘믿음소망사랑’의 핵심 멤버였던 기타리스트 최훈. 사실 그도 웬만한 공연에 나서면 대선배 대우를 받지만 파파스에서는 귀염둥이 막내다. “(최훈)히 식스의 팬이었는데 그들과 함께 연주하는 지금 이 순간이 무척 영광스럽고 소중해요. 형님들의 완벽한 소리를 들을 때면 지금도 전율이 느껴지곤 하죠. 다른 데서는 저도 긴장을 안 하는데 선배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늘 신경 쓰고 풀어지지 않으려 해요. 그러면서 음악에 더 집중하고 완성도를 높일 수 있어 좋더라고요.” 그만큼 록 밴드 사이에서는 전설로 통하는 그들이지만, 원로(元老) 대우는 사양한다. 왜일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유상윤)음악 하는 그 순간만큼은 스무 살이라니까. 나는 젊고 싱싱한 기분으로 연주하는데 극진한 원로 대접을 받으면 어쩐지 팍 늙어버린 기분이 들잖아요. 무대에 올랐을 때의 마음가짐은 몇십 년이 지나도 한결같은 걸요.”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음악과 함께해 온 그들에게 무대는 편안한 놀이터와 같을 것이다. 하지만 무대에 오르기 전 긴장과 설렘으로 여전히 손에 땀이 난다. “(이건태)연주하며 표현하는 퍼포먼스나 스킬은 능숙해졌을지 모르지만, 무대에 임하는 자세는 거의 변함이 없어요. 열심히 애정을 가지고 준비한 음악을 관객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늘 떨리고 신중하죠. 경력에 상관없이 청중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고요. 오히려 명성 때문에 책임감과 부담이 더 커졌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 더 신경 쓰이고 가슴이 뛰죠.” 그런 그들이 오랜 밴드 생활을 하며 터득한 삶의 지혜는 ‘배려’와 ‘양보’다. 밴드 음악은 무엇보다 팀워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파파스는 리더를 따로 두지 않았다. 모두 각 분야의 리더인 만큼 솔선수범하되, 서로를 존중하자는 의미에서다. “(이건태)혼자 너무 튀려고 하거나 자기만 잘하려고 하면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없어요. 젊은 시절에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죠. 연습하다가 치고받고, 그러다 팀이 깨지는 경우도 많았어요. 지금 파파스 멤버들은 그 세월을 지나왔기 때문에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요. 밴드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그게 옳다는 것을 아는 거죠. 그러다 보니 공연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세련되고 성숙한 음악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인터뷰 동안 변성용씨는 유독 말이 없었다. 하지만 틈틈이 멤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호응하고, 따뜻한 미소를 짓는 모습에서 그들이 말하는 팀워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팀 내 건반을 맡아 부드러운 멜로디로 멤버들의 개성을 살려주고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그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작게만 보여… 그들의 무대는 ‘Can’t take my eyes off you’, ‘Boxer’, ‘Hotel California’ 등 팝을 비롯해 ‘초원의 빛’, ‘물새의 노래’ 등 히 식스 시절의 음악을 주요 레퍼토리로 구성한다. 대부분 30~40년 전 노래이지만, 가장 최근 만들어진 ‘사랑은 무슨 사랑’을 타이틀곡으로 선정했다. 이 곡은 1997년 조용남씨가 속해 있던 ‘2040 밴드’의 멤버인 김기표가 작곡했다. 20년 가까이 된 노래이지만, 당시 이미 중년이었던 그들의 마음을 담아 만든 곡이다. 가사는 이러하다. ‘왜 이럴까/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음악 속에 묻혀 산 나날/ 어느덧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작게만 보여/ 그날의 꿈은 어디에/ 내 열정은 어디에/ 뒤돌아보면/ 못 견디게 그리워/ 가거라 아주 가거라/ 사랑은 무슨 사랑/ 내 나이 몇이더냐/ 이제부터인 것을…’ 전반부는 담담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열정을 토해내는 듯한 보컬이 인상적인 곡이다. 특히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작게만 보인다는 노랫말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조금은 씁쓸하게도 느껴지는 가사이지만, 그들은 “그거야 (나이가 들었으니)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음악과 동고동락한 지금까지의 삶이 살아갈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자 가치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파파스 멤버들이다. 나이가 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무대 앞에서는 늘 새로 태어나기 때문. 타이틀곡의 마지막 구절을 힘 모아 불러보는 그들이다. “이제부터인 것을!”
- 2016-05-23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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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우리 마음에 다시 심는 못 다 핀 소녀들의 ‘꽃’ - 권비영 작가
- 1992년 1월 8일 시작한 수요집회(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정기 시위)는 2011년 12월 14일 1000회를 맞았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다 할 해결책이 나오지 않아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이 여전한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최근 일제강점기 세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를 펴낸 권비영(權丕映·61) 작가는 “위안부 문제는 냄비 물 끓듯 일시적으로 분개할 일이 아닌, 가마솥에 불을 때듯 서서히 고아가며 해결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권 작가는 우리 문학이 그런 가마솥을 데우는 작은 불씨 역할을 하길 바란다. 그녀가 를 쓴 이유, 그리고 을 추천하는 까닭 또한 그러하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은 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한 소설가 윤정모가 쓴 역사 동화책이다. 권 작가는 을 처음 접했을 때, 그 제목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면, “봉선화가 필 때쯤이면 돌아올 끼다”라는 순이의 말이 맴돌아 더욱 가슴 아픈 제목이기도 하다. 책에는 강덕경, 강일출, 김복동, 김순덕 등 위안부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삽화가 담겨 있어 애잔함을 더한다. “윤정모 소설가는 우리 사회 문제에 대해 강성이 센 작가고, 특히 위안부 문제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 분 같아요. 를 시작으로 그동안 일제강점기와 위안부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꽤 나왔어요.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해 계속 묻혀왔죠. 수십 년 동안 끌고 온 민족의 문제인데, 주목받지 못한 게 항상 안타까웠어요. 그렇다고 덮어두고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저도 를 썼지만, 이러한 작품이 계속 나와 지속적인 관심을 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라나는 키만큼 생각도 쑥쑥 크는 우리 아이들 권 작가의 말처럼 위안부 문제에 대해 다룬 책은 여러 권 있다. 그중에서도 을 꼽은 것은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어린이도 함께 볼 수 있는 책’을 추천해달라는 기자의 제안 때문이었다. 동화라는 장르는 부담 없었지만, 위안부가 주제라는 점에서 몇 가지 고민이 생겼다. 책은 일본군이 한국 소녀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못된 짓을 하려 한다’, ‘피에 젖은 옷자락’ 등 간접적으로 표현했는데, 이러한 상황을 아이들이 잘 이해할 수 있을지, 또 어른들은 어떻게 설명을 해줄 수 있는지 등이었다. 이에 그녀는 “대답을 피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요즘 아이들은 신체 성장뿐만 아니라 사고와 의식도 우리 때보다 더 성숙해요. 일단 아이들이 어떤 점에서 의문을 품었다면, 그만큼 그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질문할 생각조차 못 하고 넘어갔을 테니까요. 아이들에게 적나라하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상징적인 표현이나 이미지를 빌려 충분히 설명해주면 웬만큼 다 이해할 수 있어요. 아이들은 생각이 쑥쑥 자라는데 어른들이 민망하다고 해서 ‘그건 몰라도 돼’ 하는 식으로 넘겨버리면 우리 역사를 정확히 아는 기회를 빼앗는 셈이죠.” 그녀가 중학생 시절 배운 인수분해를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배운다. 체계적인 성교육을 받는 시기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그렇게 아이들의 의식은 앞서가는데 중·장년의 어린 시절 수준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는 게 권 작가의 생각이다. “언젠가 사인회에 초등학교 2학년, 5학년 자매가 온 적이 있어요. 는 어린이가 보는 만화도 있고, 청소년 소설로도 냈는데 그 아이들은 어른이 보는 책을 들고 왔더라고요. 그래서 너희는 왜 그런 걸 안 보고 소설로 읽었느냐고 했더니, ‘그건 너무 재미없다’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내용은 알면서 읽었는지 물으니까 다 이해했다 하더라고요. 물론 어른처럼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만큼 아이들이 빨리 큰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언제까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고 끝나는 동화 이야기만 하면 안 된다고 느꼈죠.” 한 방울 한 방울 모여 거대한 강을 이룰 때까지 어른·아이 모두에게 사랑받으며 100만 부 돌파라는 기록을 세운 다. 역사 교과서 속 몇 줄에 지나지 않는 덕혜옹주의 삶을 재조명한 소설로, 현재까지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역시 우리나라 역사에 등장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로, 시대적 아픔을 이야기한다. 의 소설가 윤정모는 ‘아픔이 피의 강물처럼 흘렀을 우리 여성들의 참극을 중편이라는 어중간한 그릇, 아니 그저 바가지 하나로 강물을 떠내서 핏빛만 보여 주고 만 꼴이 되었다. (중략) 좋은 작품은 후배들에게 기대해 본다’라고 썼다. 도 그런 기대에 부응하는 작품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윤정모 작가가 그랬고, 권비영 작가가 그렇듯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머리가 아닌 가슴 언저리에 박히게 하는 살아 있는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권 작가는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가 큰 사랑을 받고 나니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내가 하는 게 잘하는 건가? 내 꿈에 취해 잘난척하는 건 아닌가? 그러다 보니 작가라는 자리가 얼마나 무겁고 영향력 있는 존재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죠. 저는 나서서 강하게 행동하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문학은 한 발짝 뒤에 서서도 얼마든지 내 주장을 펼칠 수 있잖아요. 그렇게 우리 사회가 꼭 짚고 넘어갈 문제에 대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이후로 더 뚜렷해졌죠. 는 그런 작가로서의 책임감과 소명의식이 깃든 작품입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자신의 소설로 단기간에 사회적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뜨거운 자극에 의한 일시적 행동보다는 지속적인 관심으로 뭉근하게 데워가다 보면 더 합리적인 방법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 를 읽어보면 그런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드러내고 주장하는 인물이 아닌, 다소 평범하고도 침묵하는 소녀들을 통해 객관적 시선으로 더 큰 아픔을 발견하게 한다. “제 소설을 읽고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독자를 한 방울의 물에 비유하자면,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웅덩이가 되고 내[川]를 이룰 수 있겠죠. 내가 되면 졸졸졸 소리를 낼 수 있고, 그 내가 모이면 커다란 강을 이루고요. 그렇게 생긴 강은 누가 갑자기 없앨 수도 없을 뿐더러, 없앤다 한들 그 물줄기가 흐른 자리를 부정할 수 없을 거 아녜요.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이야기하다 보면 오히려 무기나 거친 표현을 하지 않고도 평화로운 방안이 도출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우리 중·장년들도 아이들과 이런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끊임없이 관심의 영역 안에 있을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야 합니다.”
- 2016-05-16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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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 라이프] 행복한 노후 제2 조건은 ‘손주’
- 지난해 3월 하순의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전남 구례군 산동면의 산수유 축제현장을 거니는 도중 아내가 불쑥 얘기했습니다. “나무들은 매년 봄이면 다시 꽃을 피우는데, 사람은 한번 늙으면 그만이라는 게 참 허무하네요. 우리도 이 산수유 꽃처럼 다시 새봄을 맞을 수 있다면 좋겠네…” 저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나무는 매년 꽃을 피워서 되살아나지만, 우리에게는 손자들이 있잖소. 그 녀석들이야 말로 우리 인생의 새봄 아닐까요.” 아내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지난 호(號)에서 은퇴한 남자의 행복한 노후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배우자와의 관계’에 대해 얘기했습니다만, 오늘은 그에 못지않게 소중한 손주들과의 좋은 관계, 그리고 그 관계의 키(key)를 쥐고 있는 며느리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여기서 손주들과의 관계만을 애기하는 건 제게 외손주가 없기 때문일 뿐이지, 외손주들과의 관계가 친손주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친외손 가릴 것 없이 하나같이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은 “외손자들의 육아에 가담한 것은 오직 ‘내리사랑’이라고밖에는 일컬을 수 없는,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웅크리고 있었던, 제어 불능의 끌림 때문이었다고 해야 옳겠다” 는 정석희 님의 증언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정석희 저 - ) 이처럼 내 핏줄에 끌리는 것은 본능이니까요. 그는 외손자를 키우며 쓴 책의 말미에서 “내 인생이 다 저물기 전에 이처럼 아이들의 시작과 내 삶의 끄트머리가 겹쳐질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것이 축복이 아니면 무엇이랴. (중략) 아이들의 존재란, 경험한 적 없으나 응당 그럴 것이라 상상되는 마약처럼 황홀하고 중독성이 강했다. 나의 노년에서 가장 행복하고 충일했던 시기를 손자 녀석들과 함께 보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지난 6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두 손자를 키워 온, 아니 그 녀석들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저의 생각도 정석희 님의 고백과 꼭같습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전형적인 ‘손자 바보’입니다. 그걸 부인하기보다는 저는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다닙니다. 어찌 보면 구제불능인 사람이지요. 저는 두 손자가 태어난 이후로 가능하면 많은 시간을 손자들과 보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 취미를 살려서 두 손자가 자라나는 과정을 사진으로 담고, 거기에 제 나름의 설명과 소회를 담아 ‘바보 할배의 육아일기’라는 제목으로 블로그에 올리는 걸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 언젠가 동창 모임에서 한 친구가 “야! 뭐 때문에 그런 일에 아까운 시간을 다 보내나? 그래 봐야 손자들이 크고 나면 할아버지가 잘 해준 것 기억도 못한다”라고 타박을 하더군요. “그거야 자네 생각일 뿐이고…”라며 웃고 말았습니다. 두어 달 후 저녁 자리에서 바로 그 친구가 “나는 밥 후딱 먹고 먼저 갈 거다. 오늘 손자가 집에 오는 날이거든…” “손자가 얼마 만에 오는데?” 하고 물으니 “한 달에 한 번 정도…”하고 말끝을 흐리더군요. 두어 달 전 그 친구의 타박이 저에 대한 부러움의 표현이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아차렸습니다. 세 손주들을 적어도 일주일에 한 차례 이상, 어떨 때는 녀석들이 집에 가지 않으려 해서 일주일 이상 함께 자고, 먹고, 뒹굴기도 하는 제 입장에서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손자를 보려고 달려가는 그 친구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니까요. 요즘은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50~60대가 한자리에 모이면 저마다 손주들 사진 꺼내놓고 자랑하기가 바쁘다고 합니다. 동창 모임 같은 데서는 손자 얘기하고 싶은 사람은 미리 만원씩을 내놓고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지요. 뿐만 아니라, 손주가 있는 친구들은 예외 없이 지갑 속이나, 휴대폰에 손주들 사진으로 가득합니다. 실버 라이프에 있어서 손주들의 중요성을 입증해주는 사례들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어쩌다 한 번 손주들을 보면서, 사진으로나마 애끓는 그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 피를 받아 세상에 나온 손주들을 매일 보고 싶은 실버들에게는 그러지 못한다는 사실은 일종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손주들을 자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손주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친밀감을 느끼지 못해서이거나, 아니면 며느리들이 손주를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자주 보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손주들을 자주 보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들과의 관계, 그리고 손주들의 엄마, 즉 며느리와의 관계를 보다 친밀한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손주들과 친밀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까요… 물론 돈으로 손주들의 환심을 살 수도 있습니다만, 그건 그때뿐입니다. 정말 손주들과 좋은 사이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시간과 마음을 투자하십시오. 즉, 할아버지가 먼저 동심으로 돌아가서 손주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손주들이 집에 오면 그때부터 녀석들과 친구가 되어 놉니다. 놀이터로 가 같이 미끄럼도 타고, 같이 달리기도 하며, 모래판에서 씨름도 합니다. 키즈 클럽에 가면 함께 작은 공이 가득한 풀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좁은 미로 속을 같이 기어 다니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어릴수록 같이 노는 친구를 필요로 하고,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며느리는 자신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시댁, 혹은 시부모와 자신의 아이들이 가까워지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며느리와 사이가 썩 편하지 않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당연히 손자와 가까워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결혼 전에 심하게 반대를 했다거나, 예단 등의 문제로 며느리에게 격하게 스트레스를 준 원죄가 있다면 ‘구원의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며느리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고 손주를 맡겨도 좋겠다는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른들 스스로가 자신이 어른으로서 예우 받아야 한다는 권위의식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쓸데없는 권위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며느리에게 어른 대접을 받으려 하거나, 한 술 더 떠서 며느리가 자란 환경을 은연중 무시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노후의 행복 한 가지는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일체의 권위를 다 내려놓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사랑으로 먼저 다가갈 때, 며느리도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 며느리에게 시댁에 올 때 느끼게 되는 부담감을 덜어 주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제 경우는 아이들이 집에 오는 날은 기본적으로 외식을 하되, 메뉴는 반드시 며느리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합니다. 그게 저녁시간이면 아들, 며느리와 함께 폭탄주 한두 잔을 곁들이기도 하지요. 시아버지가 ‘말아주는’ 폭탄주 한두 잔이면, 웬만큼 두터운 장벽도 다 허물어지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하면 며느리가 시댁에 와도 밥 짓고,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기본적인 부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거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외식을 하게 되니 손해 볼 게 없는 장사가 되는 것이지요. 여유가 있어서 아이들이 돌아갈 때 신사임당 초상화 몇 장 찔러 줄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지요. 손주들과 노는 시간에 간혹 역사상의 위인 전기와 같은 교훈이 되는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려주는 할아버지가 된다면 더욱 좋습니다. 손주들이 바른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데는 할아버지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합니다. 결론적으로, 손주들은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얻은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 손주들이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자주 찾아와 준다면 그건 인생 최고의 훈장이기도 합니다. 이런 축복, 이런 훈장과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면 다른 어떤 것으로 노년의 무료함과 공허함을 메울 수 있겠습니까. >> 조용경(趙庸耿)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해서 한국은행을 거쳐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故 박태준 회장의 비서부장과 홍보부장과 회장 보좌역으로 일했다. 포스코건설 인천 송도신도시사업본부장과 지난 2009년부터 2012년 3월까지 포스코엔지니어링(전 대우엔지니어링)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현재 포스코엔지니어링 상임고문, 한국트라이애슬론연맹 부회장, (사)글로벌인재경영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 2016-05-07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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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압구정 멋쟁이와 나누는 유쾌한 이야기
- 주 무대는 압구정이다. 마피아가 주로 애용한다는 보르살리노 모자와 젊은 층이 열광하는 디젤 청바지를 즐겨 입는, 멋을 제대로 아는 사람. 패션 감각이 조금이라도 빠진다 말하면 서러워할 이 남자의 직업은 ‘서예가’다. ‘서예가’라고 해서 갓 쓰고 도포 자락 휘날리며 나타날 것으로 생각했나? 완벽한 오산이다. 현재라는 프리즘으로 시공간 너머와 호흡하는 서예가 하석 박원규(何石 朴元圭·69)를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만났다. 서예가 하석 박원규(이하 하석)는 만나기 전 겁부터 났다. 먹 묻힌 붓 들어본 지 어언 20년은 됐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하석의 기사나 인터뷰는 만만치 않은 도량 아니면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조금이나마 가깝게 하석을 느꼈다면 그건 임권택 감독과 영화 , , 작업을 함께했다는 정도. 하석을 만나기 전 첫인상은 그랬다. 마침내 하석의 작업실 석곡실(石曲室) 문이 열렸다. 생각지 못한 젊은 청년(?)이 빼꼼 문을 열어준다. 세련된 옷차림, 칠십을 바라보는 하석이 맞나 싶다. 하지만 생각도 잠시. “아유, 나 같은 사람 인터뷰해서 뭐해요. 그냥 붓 잡아 글 쓰고 전각 공부한 사람이 뭐가 궁금해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듣는 순간, ‘주소는 바로 찾아왔구나!’ 부잣집 아들로 산 세월에 대한 고마움 하석은 매일 석곡실에 들어서자마자 일종의 의식을 치른다. 돌아가신 부모님 사진과 마주하며 아침 문안을 드리는 것. 하석은 김제평야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직장생활 한 번 없이 살았다. “아버지 말씀이 ‘먹고 사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조금 부지런하면 먹고는 산다. 그런데 남자는 꿈을 크게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석은 선친에 대해 ‘시골 농부였지만 굉장히 깨어있는 어른’이었다고 회고했다. 시대를 앞서간 부모의 지원 덕에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에 접근하며 살아왔다. 알 수 없는 끌림, 서예에 빠지다 하석이 서예의 매력에 빠진 건 이종사촌 집에 살면서 고등학교 다닐 때다. “검사 집안이라 그런지 서화 작품이 많았어요. 집에 걸려있는 작품을 보고 한순간에 빠졌습니다.” 이때부터 하석은 길을 걷다 어려운 한자가 있으면 그대로 그려 한문교사 조두현(1925~1989)을 찾아갔다. 조두현은 스테디셀러인 ‘한시의 이해’를 쓴 작가다. 하석이 서예대가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준 스승 중 한 명. 조 선생은 하석의 서예 스승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1913~1999)을 만나게 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됐다. “한 녀석이 흰 봉투 하나들고 조두현 선생님을 찾아왔는데 자기 아버지 글씨를 가지고 왔다고 했어요. 그게 강암 선생 글씨였습니다. 조 선생이 남성여고 가정관 현판을 강암 선생께 부탁했더라고요.” 하석은 강암의 실력을 알게 된 뒤 그가 산다는 전주의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68년 강암 문하에 입문했다. “전북대 법대에 다닐 때는 서예 공부를 위해 동양철학이나 국문과, 동양사 쪽으로 전과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기회를 놓쳐서 법대에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각 과목 교수를 찾아가 수업을 꼭 들어오겠지만, 법 대신 한문 공부를 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는 하석. 수업 시간을 열심히 들어서 시험문제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문제를 물어오는 학생도 있었단다. “C 학점은 민법 말고는 없습니다.” 그의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오점 혹은 역경은 ‘아마 전과를 하지 못한 것’과 ‘민법에서 받은 C학점’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석은 무슨 얘기를 해도 살면서 어려운 게 없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말이 잠시 대학 이야기로 흐르면서 젊은 시절 연애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연애라……. 난 다 차여서…….” 의외의 대답이었다. 김제평야 대지주의 아들이 여자한테 차이다니. “까무잡잡하고 눈만 빤질 했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래도 고등학교 때 연서는 몇 장 써봤다고 했다. 언젠가 편지를 받았다는 여고생을 한번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고교동창회 자리였다. “내 고등학교 친구랑 결혼한 거예요. 난 잊고 있었는데 편지를 받았었다고 얘기해주더라고요.” 대만에서 마침내 무림고수를 만나다 하석의 연애 얘기로 즐거워졌을 때 대만 유학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이 또한 무림고수 일대기를 듣는 것만큼이나 흥미로웠다. 기회는 1979년 제1회 동아 미술제에서 대상을 받고 난 뒤 찾아왔다. “당시 동아일보가 대만과 관계가 아주 좋았습니다. 장다첸(張大千·1899~1983)을 비롯해 대만 최고 작가는 전부 모셔다 전시회를 열어줬어요. 그때 동아일보 측에서 권유했습니다.” 1회 대상자를 위한 특급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학위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견문을 넓히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지 않으려고요. 나의 현주소가 어딘지, 이 사람들은 뭘 어떻게 하는지 알고 싶었어요.” 하석은 서예 분야 고수들을 만나 기술을 연마하고 배움을 얻어나갔다. 그들이 쓰고, 깎고, 그리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수업이었다. 대만에서 유학하는 동안 언어의 장벽은 어떻게 넘었는지도 궁금했다. “나 같은 돈 있는 사람이 치사하게 그러겠어요. 통역을 썼지요. 공부하는 사람이 정확하게 물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화교 유학생을 통역사로 고용했습니다(웃음).” 이 시기 하석은 전각 스승인 독옹 이대목(獨翁 李大木·1926~2002) 선생도 만난다. 이들의 인연은 동아미술제 대상을 타기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각을 독학으로 공부할 때 책을 사러 가끔 명동에 갔습니다. 중국 대사관이 당시는 대만 대사관이었어요. 입구에 있는 중국서점에서 해교인집(海嶠印集第一集)을 찾아냈습니다.” 하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에서 해교인집을 찾아 이대목의 전각을 보여줬다. “이 각을 보세요. 재밌죠?” 언뜻 봐선 삼지창 모양인데 무엇을 느끼라는 건가. “‘대’는 음각이고 ‘목’은 양각입니다. 음각과 양각 두 개를 한 공간에 새긴 건 처음 봤어요.” 하석은 대만 대사관을 통해 이대목의 주소를 알아냈다. 그리고 한문 실력을 총동원해 자신의 호와 이름 석 자를 전각에 새겨 달라는 편지를 썼다. 전각을 새겨주는 대가로 벽천 나상목(碧川 羅相沐·1924∼1999)이 그린 산수화도 동봉했다. 1년 쯤 대만에서 소포가 하나 왔다. 기쁨도 잠시. 열어보는 순간 이대목의 솜씨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제 눈으로 보기에 이것은 선생님의 각이 아닙니다. 선생님 솜씨가 이 정도면 소장할 가치가 없습니다.’ 하석은 이렇게 편지 한 통과 받은 전각을 싸서 다시 대만으로 보냈다. 그 이후 제대로 된 전각이 왔다. 하석이 몇 살인지도 모르면서 ‘하석 선생’이라고 쓴 전각을 만들어 보낸 것이다. 하석은 대만에 가자마자 이대목부터 만났다고 했다. “너무 반가웠어요. 보통 인연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처음 만남 자리에서 제 이름을 전각에 새기는 작업을 끝까지 보여주셨습니다. 하루가 걸렸어요. 저는 옆에서 열심히 지켜봤습니다.” 대만에서 유학하는 동안 이대목과 매주 만나며 돈독한 스승과 제자로 지냈다. 서예 대가는 아직도 이루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하석은 세계 중심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세계서예올림피아드’를 여는 게 꿈이다. 여기에는 한국 서예에 대한 하석의 걱정이 담겨있다. “중국과 일본은 서예 인구가 많죠. 우리는 중국 인구에 막히고 일본의 축적된 문화에 안 됩니다. 우리 젊은 세대들은 한문과 꽤 멀어졌습니다. 나 때 하지 않으면 어떤 의미에서 영원히 (세계 서예계에서) 설 길이 없을 겁니다.” 혹시 ‘세계서예올림피아드’가 열리면 우승할 자신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내가 감히 ‘자신 있다’라고 한다면……. 그냥 알아서 짐작하기를 바랍니다.” 한문 작업을 많이 하고 있지만 결국 마지막 목표는 한글이다. 한글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만큼 어렵고 고민되는 부분도 없다. “내가 쓰는 한글은 달라야 합니다. 창조는 나 혼자 해야 합니다. 어떤 작품을 하더라도 나에게 계속 묻습니다. 혼자만 할 수 있느냐고 계속 물어요. 누구도 흉내 못 내는 것인가? 이 정도 가지고? 늘 생각을 해요. 그러나 즐거운 고민입니다." 패션의 완성, 예술가 느낌 가는 대로 사실 그의 미적 감각은 서두에서 밝혔듯 패션에서부터 드러난다. 석곡실 입구에는 세련된 운동화와 부츠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젊은 예술가라 느낄 정도로 색깔 선택도 과감하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까 1년에 한 번을 사도 질 좋은 것을 사는 게 현명한 쇼핑이라 생각합니다. 구두는 아테스토니 블랙라벨을 선호하고요.” 15년이 됐다는 그의 명품 구두는 어제 산 듯 깨끗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명품을 명품답게 보관할 것! 하석의 철칙이다. 그가 입은 청바지는 젊은층이 선호하는 고가 브랜드. 젊은이만큼 멋지게 입으려면 몸매 유지는 필수. 하석은 일주일에 세 번은 꼭 사이클 25km를 탄다. 저녁은 아주 가볍게 먹고 매일 4시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30년째 이어오고 있다. 하석과의 시간은 상상 이상으로 즐거웠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으로 새삼 익숙하진 바둑만큼 서예도 가깝게 다가왔다고나 할까. 하석의 붓에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있다. 시니어돌 서예가 하석 박원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오래오래 사랑받길 바란다.
- 2016-05-02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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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의 窓 사진 촬영 가이드③]한국전쟁의 상흔 찍는 사진작가 이병용
- 사진은 아마추어나 비전문가에게 일종의 ‘오락 부산물’ 같은 것이다. 좋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즐거운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 우리는 사진을 찍는다. 즐거움과 기억, 과시하고픈 욕망을 사진에 담는다. 하지만 사진작가에게 사진은 창작의 고통이고, 노력만큼의 보상이다. 경기도 일산의 작은 작업실에서 만난 사진작가 이병용(李秉用·57)에게 사진은 마땅히 해야 할 감사를 담은 각고의 산물이었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1968년 춘천. 한 소년은 동네에서 낯선 국기와 함께 태극기를 든 군중을 발견하고, 무슨일인가 싶어 어른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늘 보아왔던 파월장병 행렬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조금 기다리자 훈장이 잔뜩 달린 군복 차림의 외국인이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소년에게 그 모습은 강렬하게 기억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그 사람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자국 군인의 참전비 제막식에 참석한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1892~1975)였다. “나중에 일본에서 사진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사진가로 활동하다 사고로 이전 작업물들을 잃고 말았습니다. 맘을 추스리며 참전용사의 사진을 찍겠노라고 맘 먹은 것은 아마 그날 각인된 기억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2006년 9월 참전용사 후손들의 한국 방문 행사를 우연히 보게 됐는데, 막연히 상상했던 용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죠. 생활에 찌든 그들에게 어떻게든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한국전쟁 참전국 중 에티오피아를 제일 먼저 선택한 것도 어릴 적 기억 때문일 겁니다.” 이 각오를 시작으로 이병용 작가는 2007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16개국과 의료지원을 한 5개국 모두를 촬영할 계획을 세운다. 참전용사나 미망인, 유가족을 모두 찍겠노라고 맘먹는다. 그리고 2007년 에티오피아를 두 차례 촬영하고, 곧이어 2008년 터키를 방문해 5만장 분량의 작업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는 이 결과물을 2008년과 2009년 에티오피아와 터키에서 발표하게 된다. 이 작가의 에티오피아 방문은 이전부터 에티오피아와 교류가 잦았던 동양일보 조철호(趙哲鎬) 회장을 만나 후원 약속을 얻어내면서, 어렵지 않게 진행됐다. “2007년 2월 24일부터 10일간 방문했죠. 그 이후 4월 18일부터 6월 8일까지 다시 한 번 방문했고요. 수도 아디스아바바는 해발 2400m가 넘는 고산지대라 고산병에 고생도 했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낙후된 지역이라 사진작업을 하기에는 최악의 장소였어요. 그래도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 위해 늘 촬영 전에는 그분들께 큰절을 올리고 작업을 시작했죠.” 터키는 프로젝트 준비 과정에서 한국을 방문한 참전용사와의 만남 덕분에 두 번째 국가로 결정됐다. 터키에서의 작업도 비슷했다. 열악하기는 마찬가지. 그래도 따뜻한 환영 덕분에 6개월 동안 50개 도시를 돌았다. “그곳에서 한 할머니를 만났죠. 아이세 두주균 여사라고. 그의 남편은 결혼한 지 2주만에 덜컥 입대해 한국으로 떠나버렸죠. 그리고 6개월 만에 전사 통지서가 날아왔어요. 이후 그는 평생을 혼자 살았죠. 자식에 대한 모성애와 같은 평범한 감정을 평생 못 느끼고 사신거예요. 어렵사리 수소문 끝에 공식 문서에서 남편의 사진을 찾아 전해드리고, 그분의 사진도 찍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그에게 실컷 어리광을 부린 일이에요. 제가 자식이 된 것같이 말이죠.” 이후 작가는 부산 유엔공원묘지에서 남편의 묘비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참전용사 사진 프로젝트 시계는 2008년에 멈춰버렸다. “두 차례 대량의 작업을 하고 나면 그 이후의 작업을 위한 예산을 마련할 방법이 생길 줄 알았어요. 일본에서 유학하며 느꼈던 사진가나 사진 작품에 대한 대중이나 기관의 반응이 한국에서는 완전히 달랐어요. 어렵게 보훈처 관계자를 만났을 때는 ‘왜 개인이 이런 일을 하냐’라는 핀잔만 들었죠.” 그래도 다행히 터키에서의 작업을 정리한 책 를 지난 1월 발간할 수 있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후원 덕분인데, 진흥원이 사진집에 예산 지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책의 부제는 ‘한국전쟁 참전 UN 21개국 참전용사 사진 프로젝트 Vol.2’이지만, Vol.1 그러니까 첫 번째 책은 아직 이 세상에 없다. 역시 예산 탓이다. “그래도 이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할 계획입니다. 애초 계획보다 10년 늦어져 2027년까지 마무리하는 것이 목표가 됐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감사는 정말 제대로 이뤄졌는지 반문하고 싶어요. 정부대 정부 차원의 형식적인 행사 말고요. 한국전쟁과 관한 일로 한국에서 찾아온 사람은 제가 처음이라며 되레 저에게 감사 인사를 하신 그 어르신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일부에선 용병이라 비아냥거리지만, 그들이 받은 목숨 값은 정말 푼돈이었어요.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은 그분들에 대한 감사인사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제가 찍는 사진은 그 과정에서 생겨난 하나의 부산물일지도 모르겠어요.” 한국전쟁 중 한반도에서 전사나 사망한 유엔 참전용사는 17만8569명이고, 부상은 55만5022명, 실종 2만8611명, 포로는 1만4158명이다.
- 2016-04-2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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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궁궐 속 나무에 스민 조선의 역사, 박상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우리 궁궐을 아는 사전>
- 책(book)과 사람(人)의 이야기를 담아온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이번 호에는 그 의미를 살려 책을 통해 맺어진 특별한 인연을 소개하려 한다. 바로 박상진(朴相珍·76) 경북대학교 명예교수와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이다. 지난해 3월호에서 박 회장은 박 교수가 쓴 를 추천했다. 박 회장은 그전부터 여러 언론을 통해 박 교수의 책을 호평했고, 이를 고맙게 생각한 박 교수가 그를 찾아가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 두 사람을 이어준 매개체는 책과 나무다. 이번 호에서 박 교수는 을 추천했다. 과거 박 회장과의 인연이 그랬듯, 책 그리고 궁궐을 매개로 한 새로운 인연을 기대하며 박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역사건축기술연구소의 김동욱 이사와 이경미 소장 등이 합심해서 펴낸 은 평소 궁궐을 자주 찾던 박상진 교수에게 아주 반가운 책이었다. 궁궐이라는 소재와 더불어 책 표지의 ‘동궐도(東闕圖, 조선 후기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창덕궁과 창경궁 그림)’에 그려진 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그동안 궁궐에 대한 책이 많이 나왔지만, 궁궐의 건물들에 사람 이야기를 입힌 것이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건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잖아요. 선정전(宣政殿), 인정전(仁政殿), 낙선재(樂善齋), 성정각(誠正閣) 등 곳곳마다 얽힌 이야기를 소개해 역사와 더불어 선조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했죠. 문학이나 철학 등의 장르가 아니니 책 제목처럼 우리 궁궐을 이해하고 알고 싶은 분들에게 유용한 책이에요. 하지만 읽다 보면 내용의 깊이나 정보 면에서 결코 가볍게 볼 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책은 건물마다 실물 사진과 함께 동궐도에 그려진 모습을 보여준다. 지도에 나타난 모습이나 위치 등은 현재와 다른 부분도 있지만, 이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라고 한다. 에도 동궐도가 자주 등장하는데, 현재의 모습을 반영한 지도가 있어 더불어 읽기 좋은 도서라 권할 만하다. “지도와 사진, 이야기를 종합적으로 넣어 품이 많이 들어간 책이에요. 궁궐의 다양한 면모를 알고 가면 더욱 생생한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죠. 손주와 함께 간다면 들려줄 이야기가 참 많을 거예요. 궁궐은 역사의 현장입니다. 책이나 교과서로만 알던 역사를 그 현장에서 다시 보면 아이들에게도 기억에 남는 교육이 되겠죠.” 궁궐의 나무는 다 알고 있다 박 교수는 , 등 줄곧 나무와 역사를 함께 이야기해왔다. 나무를 전공한 그가 이토록 역사에 관심이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 누구나 역사를 알아야 하겠지만, 나무와 연관 짓는 그에게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카페를 가는 일이 드물었죠. 그럴 때 휴식을 겸해서 찾은 곳이 바로 궁궐이었어요. 일이 광화문 근처면 경복궁에 갔고, 종각 쪽이면 창덕궁이나 창경궁에 가서 쉬곤 했죠. 그런데 궁궐에 가보니 오래된 나무가 정말 많은데,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더라고요. 왕도 떠나고 사람들도 떠났지만 나무는 수백 년 역사를 그 자리에서 지켜봤잖아요. 나무에 입이 있다면 많은 기록을 남겼을 텐데, 그럴 수 없으니 내가 나무를 대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창경궁(昌慶宮)에는 영조 38년(1762년) 문정전(文政殿) 앞에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비명을 들은 나무가 아직도 살아 있다. 문정전에서 조금 떨어진 선인문(宣人門) 앞 회화나무와 광정문(光政門) 밖의 아름드리 회화나무다. 선인문 앞 회화나무는 줄기가 비틀리고 속이 완전히 비어 있는데, 너무 가슴이 아파 속이 까맣게 썩어버렸다고도 이야기한다. 이 두 나무는 동궐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박 교수를 만난 창덕궁(昌德宮)에서 가장 오래된 어른 나무는 바로 선원전(璿源殿) 앞의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다. 약 750세가 넘은 것으로 창덕궁의 터줏대감과 같다. 이 향나무는 와 에 모두 소개됐다. 그러니 나무와 역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 말할 수 있겠다. 나이가 들수록 느티나무처럼 창덕궁의 향나무도 역사적 가치가 있지만, 그는 느티나무도 빼놓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우리 궁궐에서 볼 수 있는 100여 종의 나무 중 박 교수가 가장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무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 나무 중에 가장 재질이 좋아요. 그래서 조선시대 궁궐의 기둥, 가구, 양반들이 쓰던 탁자 등에 주로 쓰였죠. 쓰임새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삶에 보탬이 됐다는 뜻이에요. 느티나무의 용도는 한 가지 더 있어요. 요즘도 시골 마을 입구에 가면 오래된 느티나무가 지키고 있잖아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추해지기도 하는데, 나무는 세월이 흐를수록 멋있어지죠. 그 넉넉한 품으로 오랜 세월 백성들의 안식처가 돼 주고, 고달픈 삶을 위로해준 고마운 존재예요. 나도 그런 느티나무처럼 늙어갔으면 좋겠어요. 살아서는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보듬을 수 있고, 죽어서는 여러 쓰임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어요.” 느티나무뿐만 아니라 모든 나무에는 본받을 점이 한 가지 더 있다고 한다. 바로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나무는 한 번 뿌리 내리면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봄에는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열매 맺기 위해 노력한다. “나무는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포함한 동물들은 자기가 마음에 안 들면 옮겨 다닐 수 있잖아요. 바람에 날아왔든, 동물이 물어다 놨든 열심히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죠. 요즘은 사회에 불평하고 참을성 없는 이들도 많잖아요. 우리도 나무를 본받아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가 필요해요.” 4월 궁궐 나들이엔 ‘매화’ 겨우내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 나무. 봄기운이 충만한 4월이면 궁궐에도 나무마다 꽃망울 터뜨리기에 분주해진다. 궁궐은 어느 계절에나 가도 좋다는 박 교수는 특히 봄에는 매화나무가 으뜸이라고 했다. “4월 10일쯤 되면 궁궐에 있는 모든 나무가 꽃을 피웁니다. 그중에서도 꼭 한번 가서 보시라고 권하고 싶은 건 매화나무예요. 매화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품격 있는 동양의 꽃 중 하나죠. 조선시대에는 난초,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에 꼽히기도 했고요. 태종이 특별히 좋아하던 꽃인데, 창덕궁 선정전 앞에는 와룡매(臥龍梅)라 불리는 백매와 홍매 두 그루가 임진왜란 전까지 있었다고 해요. 지금은 덕혜옹주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낙선재에도 매화나무가 많으니(근래에 심은 것), 아름다운 매화를 볼 겸 궁궐 나들이 떠나보는 것 어떨까요?”
- 2016-04-19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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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펫팸족 당신이 알아야 할 10가지 [2]
- 시니어 펫팸족이 대세라지만 집안에 새로운 가족을 들이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반려동물을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단지 반려동물이 예뻐서? 혹은 내가 적적해서 펫팸족이 되려고 했다면 생각부터 고쳐야 한다. 반려동물을 만나러 가기 전 적어도 당신이 알아야 할 10가지를 알아보았다. 1. 반려견과 함께 살면 10년이 젊어진다. 최근 메디컬데일리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영국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지리·지속 가능 발전학과 연구진은 개를 키우는 것이 신체 나이를 최대 10년 젊게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지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스코틀랜드 중동부 테이사이드 주(州)의 평균 79세 노년층 547명을 대상으로 신체나이와 반려견의 상관관계를 조사했다. 이들 중 반려견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 그러지 않는 사람들보다 신체운동능력이 월등했다. 불안감이나 우울증도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연구진은 “반려견과 생활하는 것이 노년기에 접하기 쉬운 정신적, 신체적 퇴보를 자연스럽게 극복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2. 반려견·반려묘를 입양하는 것은 소중한 생명을 살리는 일 유기·유실동물은 동물보호법이 정한 10일이 지나면 유기·유실동물의 인도적 처리(안락사)로 생을 마감한다. 열흘 안에 주인이나 입양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작은 생명의 심장은 멈춰버린다. 혈통 좋은 반려동물도 좋지만, 입양도 한 번쯤 생각해보길 권한다. 그런데 꼭 명심할 것이 있다. 유기·유실동물들은 버려지고 상처받은 기억이 있다. 그러므로 더 세심한 관심이 필요하다. 분양동물보다 더 큰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3. 반려견과 반려묘의 평균수명 개의 경우 큰 개인지 소형·중간 개인지에 따라 수명 차이가 있다. 소형·중간 개의 수명은 14~17년, 큰 개는 9~13년으로 큰 개가 소형·중간 개보다 수명이 더 짧다. 소형·중간 개는 빨리 어른이 되지만 큰 개에 비해 노화가 느리다. 큰 개는 천천히 성숙하는 대신 노화가 빨리 온다. 고양이 평균 수명은 15년이다. 고양이 종류에 따라 수명 차이가 있지만 거의 40세 가까운 나이까지 살아 기네스북에 올랐던 장수 고양이도 있다. 현재 미국에 사는 고양이 ‘코듀로이’가 ‘세계 최고령 고양이’ 기네스 기록을 가지고 있다. 작년 보도 당시 26세로 사람으로 치면 124세에 해당하는 나이다. 4. 반려견은 초콜릿, 양파를 먹으면 안 된다 반려견이 먹으면 안 되는 대표적인 음식이 땅콩버터다. 알레르기나 만성 질환이 있는 반려견은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 초콜릿 또한 위험하다. 초콜릿 속 카페인과 테오브로민을 반려견이 섭취하면 구토와 탈수증 복통을 일으키고 체온 상승과 발작, 심한 경우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양파의 매운 성분은 적혈구 생성과 활동성을 낮춘다. 위험할 정도로 양파를 섭취하면 수혈을 해야 한다. 포도 또한 먹어서는 안 된다. 강아지 종류에 따라 구토나 설사 증세가 나타나는데 식욕감퇴, 탈수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신부전증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이 경우 3~4시간 안에 죽을 수 있다. 사과, 자두, 복숭아, 배, 살구 등에 들어 있는 시안배당체를 반려견이 먹으면 현기증, 호흡곤란, 발작을 일으킬 수 있고 심할 경우 혼수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이 외에도 우유, 치즈, 아보카도, 빵, 베이컨 등도 반려견이 먹으면 안 된다. 5. 반려인의 잘못된 행동 3가지 1. 안내견을 제외한 다른 반려동물은 대중교통이용 시 이동장(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반려동물을 담는 물건)을 이용해야 한다. 반려동물이 답답해한다고 잠시 내려놓은 순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남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충분히 이동장 적응 훈련을 해야 한다. 2. 반려견과 산책할 때 목줄을 풀어주거나 감정 상태를 모르는데 다른 반려견들과 어울리게 두면 안 된다. 사람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서먹하다. 동물들이라고 다르겠는가. 반려인이 생각 없이 한 행동 때문에 반려견들이 싸울 수 있다. 3. 준비 없이 길고양이에게 밥 주는 것도 삼가야 한다. 한국고양이보호협회는 작년 10월 주변과의 갈등을 줄이면서 ‘길고양이 돌보는 방법’을 소개했다. 이 단체는 “먹이뿐만 아니라 깨끗한 물을 먹이는 것이 중요하며 야행성인 고양이의 습성을 고려해 일몰 이후 일정한 장소에서 먹이를 주는 것이 좋다”고 했다. 또한, 길고양이의 치아, 잇몸질환 등의 문제를 줄이기 위해 사료 이외의 음식을 줘서는 안 되고, 고양이가 먹고 남긴 음식물은 즉시 치우기를 당부했다. 6. 안내견에게 말을 걸지 말라안내견은 잘 알다시피 시각장애인의 안전한 보행을 돕는 장애인 보조견이다. 심심치 않게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안내견. 이들을 대하는 성숙한 자세는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더라도 꼭 알았으면 한다. 안내견과 마주쳐도 말을 걸면 안 된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안내견은 몸과도 같은 존재다. 안내견 또한 주인을 보호해야 할 임무가 있다. 혹시 안내견과 소통하고 싶다면 주인에게 먼저 물어봐야 한다. 주인의 동의 없이 말을 걸고 만지면 안내견은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음식물 또한 절대 주어서는 안 된다. 안내견들은 바닥에 떨어진 음식이나 간식을 갈구하는 눈빛을 보내지 않도록 훈련돼 있다. 반려동물이 안내견 가까이에 가는 것도 막아야 한다. 안내견들 모두 힘든 훈련을 통해 뽑힌 우수견이기는 하나 갑작스러운 상황이 오면 짖고 싸울 수 있다. 무엇보다 안내견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훈련됐다. 다른 곳에 집중하면 주인 돕기에 어려움이 생기니 방해되는 행동은 삼가라. 7. 반려견의 발바닥을 살펴라 반려견을 키우다 보면 발을 들고 겨우 걷거나 혹은 발을 만졌을 때 신경질을 내는 일이 종종 있다. 이때 반려견의 발바닥을 확인해봐야 한다. 발톱이 부서져 피가 났다면 반려견이 통증을 심하게 느끼기 때문에 지혈제와 붕대를 이용해 빨리 치료해줘야 한다. 부서진 발톱을 제거할 경우 회복이 늦고 발톱이 변형될 수 있다. 발바닥에 뾰족한 돌, 마른 진흙, 뭉친 털 등이 낄 때도 있다. 이때는 털을 깎고 발을 씻은 뒤 소독약을 발라준다. 맨발로 땅을 디디고 다니기 때문에 발바닥이 마르고 갈라지면 위험할 수 있다. 급한 상황이라면 일반 로션을 발라줘도 되지만 피부를 단단하게 해주는 성분이 포함된 강아지 전용 크림을 발라주는 것이 좋다. 집안에서만 활동하는 반려견의 경우 발톱이 너무 자라 피부로 파고들 수 있으니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8. 반려견은 반드시 동물등록을 해야 한다 2014년 1월 1일부터 개를 기르는 사람들은 전국 시·군·구청에 반드시 동물등록을 해야 한다. 단, 동물등록 업무를 대행할 수 있는 자를 지정할 수 없는 읍·면·도서(島嶼) 지역은 제외된다. 대상은 3개월 이상 된 개이며 미등록 시 4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동물등록을 하는 이유는 주인이 반려동물을 잃어버렸을 때 동물보호관리시스템(www.animal.go.kr)의 동물등록정보를 통해 더욱 쉽게 찾기 위해서다. 동물등록방법은 3가지다. 동물의 몸에 직접 삽입하는 내장형 무선식별장치와 외장형 무선식별장치, 등록 인식표 부착 방법이 있다. 9. 반려동물 분양 계약서를 써라 개와 고양이에 한해 소비자 분쟁 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고시 제2014-4호, 2014. 3. 21)이 마련돼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판매업자는 반려동물을 판매할 때 7가지 항목이 기재된 계약서를 제공해야 한다. 소비자 분쟁 해결기준에서는 분쟁 유형 3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우선 반려동물 구매 후 15일 이내 폐사할 경우엔 동종의 동물로 교환 혹은 구매가를 환급받을 수 있다. 단, 소비자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경우 배상 요구를 할 수 없다. 구매 후 15일 이내에 질병이 발생하면 판매업자가 책임지고 치료를 한 뒤 소비자에게 인도해야 한다. 단 회복 기간이 30일 이상 지연 돼 도중 폐사할 경우 동종 동물 혹은 구매가를 환급한다. 마지막으로 계약서를 내주지 않았을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에 계약해지가 가능하다. 반려동물 분양계약서에 기재되어야 할 7가지 1. 분양업자의 성명과 주소 2. 애완동물의 출생일과 판매업자가 입수한 날 3. 혈통, 성, 색상과 판매 당시의 특징사항 4. 면역 및 기생충 예방접종기록 5. 수의사의 치료기록 및 약물투여 기록 등 6. 판매 당시의 건강상태 7. 구매 시 구매금액과 구매날짜 10. 반려동물 사체, 이제는 폐기물이 아니다. 동물장묘사업은 농림축산식품부의 동물보호법을 적용받는다. 그동안 반려동물 사체는 환경부의 폐기물관리법상 폐기물로 분류·처리됐다. 동물장묘사업장을 개설할 때 환경부에서 주변 환경 피해 여부를 점검해 ‘설치승인서’를 내줬는데 받기가 쉽지 않았다. 농식품부는 “동물화장은 일반폐기물 처리와 달리 유독물질이 거의 나오지 않고, 크기도 작아서 설치승인서 제출 사업장에서 제외했다”고 말했다. 동물이 죽으면 쓰레기 봉지에 넣어서 버리면 그만이었다. 지금까지 반려동물 사체 상당수가 불법 화장, 매장, 폐기물로 처리됐지만, 법 개정으로 더욱 존엄한 장례 절차가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 2016-03-25 1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