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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 ‘창업 지름신’···‘눈7끼3’로 성공을 낚다
- 예비 창업자를 위한 길라잡이 도서 ‘창업 지름신’(이준우 외 공저·이앤송)이 출간됐다. 흔히 창업하면 프랜차이즈 카페, 치킨집, 대기업 계열 빵집 등을 떠올린다. ‘창업 지름신’에는 직장인 간식 배달, 취업준비생 면접용 옷 임대, 굼벵이 갈아 만든 애견 사료 등 생소하면서도 다양한 창업 아이템의 성공기가 담겨 있다. 비범한 사람이 특별한 기술과 자본으로 성공했다는 빤한 스토리는 이질감이 들게 마련이다. 이 책은 평범한 직장인, 주부, 청년백수, 실업자 등 우리 주변 이웃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사소해 보였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문제점을 뒤집으며 ‘성공의 기회’로 낚아챈 이들의 인생 역전극을 생생한 인터뷰로 들려준다. 아울러 40개의 창업 스토리를 웰빙, 워라밸, IT, 헬스, 에코 등 5개의 분야로 나눠 관심사별로 접근이 용이하도록 정리했다. 각 인터뷰 끝에는 창업자가 창업을 결심한, 또는 아이디어를 얻은 결정적 순간(이른바 ‘창업 지름신’이 들이닥친)을 소개하는 ‘창업 INSIGHT’ 코너를 따로 마련했다. 스토리 중심으로 읽혀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전반적인 로드맵을 그리게끔 한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저자는 소박한 아이디어로 대박을 일궈낸 창업자들의 성공 요인을 ‘남다른 눈과 끼’라 일컫는다. ‘눈’은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과 새로운 시장의 수요를 파악하는 눈썰미이며, ‘끼’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실행한 추진력이다. 책 뒷면에는 이러한 창업 부자들의 성공 비밀을 10가지를 ‘눈7끼3’으로 요약해 보여준다. 무엇보다 창업은 한 번의 행운으로 단박에 이뤄지지 것이 아닌, 눈과 끼로 끊임없는 고민 속에서 발전 시켜나가는 장기전임을 일깨운다. 책을 읽다 보면 “행운처럼 찾아온 창업 지름신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당부와 더불어 “보통 사람인 나도 창업으로 성공할 수 있다”라는 용기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 2020-01-06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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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놀이에 신난 두 남자
- 넘어져 부서져도 눈 덮인 산을 그리워했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참아가며 설상 경사로를 질주했다. 수줍은 미소로 시작한 두 사람의 인터뷰는 시간이 갈수록 반전에 반전을 더했다. 사람은 이렇게도 살 수 있다! 겨울 놀이에 인생을 던진 두 남자를 만났다. 이들은 1994년 처음 만났다. 도봉산에 있는 한국등산학교에서. 전영래(55) 씨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임세훈(51세) 씨는 그곳에서 강사로 일하는 선배를 만나러 갔었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얼굴을 자주 보면서 살게 될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체격도 비슷하고 뭔가 풍기는 느낌도 다르지 않다. 한국등산학교 강사 직함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 정작 본업은 따로 있다. 임세훈 씨는 음향 엔지니어, 전영래 씨는 건설업자다. 겨울 놀이에 빠져 산다는 이 두 남자의 시작은 모두 산(山)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암벽 등반한 임세훈 씨 “아버지가 군인이셨어요. 어머니께서 장교 부인들과 어울리셨는데 절에 자주 갔습니다. 저도 따라다녔어요. 대부분 절은 산에 있잖아요. 암벽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게 됐습니다. 기웃거리면서 ‘저게 뭐하는 것이냐’며 사람들에게 자꾸 물어보니까 알고 싶으면 직접 해보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암벽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이 되니까 선배들이 산에 간다면서 스키를 메고 가더라고요. 겨울 산행을 하려면 스키를 배워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알프스스키장에 가서 처음으로 스키를 접하게 됐습니다.” 요즘은 적설량이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에 제법 눈이 많이 내렸다. “중학교 때만 해도 산에 가면 보통 허리까지 눈이 왔어요. 눈을 그냥 등산화로 헤치고 밟아가며 산을 오르내렸습니다. 그걸 ‘러셀’이라고 하는데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뭔가 편안한 방법이 없을까 궁리했어요. 눈이 많이 내리는 유럽 지역의 사람들은 스키를 타고 다니더라고요. 러셀로 오르면 4~6시간 걸려 올라가는 산을 스키로는 2시간이나 1시간 반이면 갈 수 있어요. 시간도 단축되고 체력 소모도 없어요. 그때부터 산악스키에 빠져든 거죠.” 스키를 계속 타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있었다. 눈 쌓인 겨울 산을 보는 게 좋았다. “아무나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에요.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 다르죠. 그 경치를 보고 싶어서 자꾸 올라갔습니다. 등산과 스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죠.” 유럽 스키의 벽을 깨고 겨울을 찾아다니다 임세훈 씨는 스키를 좋아하는 것 이외에도 패러글라이딩도 하고 빙벽에도 오른다. 어린 시절 태권도 선수를 꿈꾸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곧바로 입대.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자마자 특전사로 차출됐다. 군에서 패러글라이딩 팀에 있었고 스키도 좀 타봤다. 7년 넘게 부사관으로 있다가 1991년 3월에 전역했다. 그가 찾아 들어간 곳은 역시나 스키장이었다. 스키장 패트롤(안전요원)로 들어가 일도 하고 원 없이 스키 슬로프를 질주했다. “스키 시즌이 끝날 무렵 스키 강사와 패트롤 사이에 말다툼이 있었어요. 지금도 종종 이런 논란이 일어나는데 강사와 패트롤 중 누가 더 스키를 잘 타냐는 거였어요. 그때 마침 자리에 한국스키협회 이사장님이 계셨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선을 그어주셨습니다. ‘너희 시합해봐.’” 매력적인 경품도 걸렸다. 10명에게 스위스 스키장 연수를 보내준다고 했다. 스키장이 폐장할 때쯤 슬로프를 정리하고 스키대회처럼 기문을 설치하고 각각 10명씩 20명이 맞붙었다. 협회 이사장이 연수를 보내주기로 약속한 10명에는 강사 4명과 패트롤 6명. 그중에는 임세훈 씨도 있었다. “스위스에 있는 체르마트 스키장으로 갔습니다. 처음에는 좋았죠.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한국에서 그래도 스키 좀 탄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연수 첫날 체르마트 스키장의 A급 패트롤과 최정상 슬로프인 블랙 다이아몬드 2급에서 같이 스키를 타고 내려왔는데 따라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 중 가장 늦게 내려온 사람과 20분 이상 차이가 났습니다. 저희 실력이 수준 이하라고 생각했는지 점점 슬로프 경사도가 낮아졌어요. 강사도 패트롤 A급에서 C급으로 내려갔습니다. 4일째 되는 날에는 아예 슬로프 근처에도 못 가고 평지에서 자세만 배웠습니다.” 8일간의 연수를 마친 뒤 임세훈 씨는 함께 갔던 협회 이사장과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다. 그렇게 돈을 끌어모아도 1000프랑(유로 가입 전 프랑스 화폐 단위)이 안 됐다. 한국에서 송금받을 방법도 알아냈다. 스위스 스키학교에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갈 생각하니 아쉽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하고요. 형편없더라고요. 제 실력이요. 한국스키협회 추천을 받아서 일단 스위스 국립스키학교에 등록했어요.” 입교 허락이 떨어지기는 했는데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돈도 없고 영어도 안 되니 학교 측에서 걱정했다. “한국어로 된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사전을 스위스 현지에서 샀습니다. 스스로 교재를 번역해서라도 이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죠. 어차피 내용의 80%는 전문용어이니까요. 제가 영어를 못하니까 강사들이 배려를 많이 해줬습니다. 학교에서는 아르바이트를 알선해주고 브랜드 협찬도 연결해주셨어요. 2년 공부하고 스위스에서 스키 레벨3을 땄습니다. 개인 강습을 할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학업을 마친 후 스키 전문 브랜드의 데몬스트레이터(최고 스키 지도자) 팀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스키도 열심히 탔고, 동양인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월급 받으면서 세계의 유명 스키장을 돌아다녔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렇게 지내다가 겨울에는 국내에 들어와서 스키도 타고 제가 하던 음향 일도 했습니다. 겨울만 찾아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스키의 재미에 빠져 살았다. 브랜드 홍보차 유럽의 한 스키장에서 모굴스키를 타다가 앞서 타던 사람이 넘어진 것을 보고 피하려다 엉덩이뼈가 부서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미칠 만한 이유가 있었네요. 우물 안 개구리는 자존심 때문에 싫었습니다. 돌아와서는 스키와 등산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재작년에는 남극에도 다녀왔습니다. 스키는 노는 날 탔죠.(웃음)” 2014년, 한국은 남극 대륙 본토인 테라노바 만에 두 번째 기지인 ‘장보고 과학기지’를 건설했다. 임세훈 씨는 이곳에서 연구하는 박사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안전요원으로 파견된 것. 크레바스를 건너는 방법을 알려주고 블리자드가 부는 극한 상황을 해결하는 등 더 원활하게 연구에 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돌아왔다. “사실상 백수입니다. 그래도 군에서 연금도 나오고요. 남극 안전요원으로 활동도 했고, 동호회 형식의 스키 교실, 등산학교 등에서 강연도 합니다. 봉사에 가깝지만 교통비 정도는 주십니다. 풍요롭지는 않아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저에게 스키와 등산은 생활이자 직업입니다.” 신장 투석하면서 해외로 스키 타러 다닌 전영래 씨 “매년 스키장 시즌권 판매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샀어요. 구입하고 나면 누구랑 갈까 생각해요. 혼자 가면 재미없잖아요. 마음 맞는 사람하고 가야 하니까 함께 스키 탈 친구들 목록을 정리합니다. 젊었을 때는 스키 시즌 내내 스키장에서 살았습니다.” 중학교 때 산악인이던 삼촌을 따라서 이 산 저 산 따라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산과 친해졌다. 암벽등반을 하는 삼촌의 모습을 보면서 산에 대한 열망이 강해져 고등학교 때 산악부에 들어가 활동했다. 그것도 성에 안 차서 결국 교복을 입고 성인들 틈 사이에서 산행하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산에서 학교에 다녔어요. 성북동 살았는데 우이동에 선배가 하는 산장이 있었어요. 책가방 거기다 가져다 놓고 등반하고 자고 아침에 학교 가고 또 등반하고. 그러다 산악스키에 빠지게 됐어요. 형들이랑 있으면 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눈이 많은 유럽 지역의 사람들은 걸음마를 할 때부터 스키를 탄다고요. 그리고 스키를 타야 산을 오르내리는 게 쉽고 빠르다고 했어요. 1985년도에 스키를 시작했습니다. 산을 제대로 타려면 스키도 타야 했어요.” 지금처럼 스키장이 많을 때가 아니라 선배들이 차를 몰고 스키장에 갈 때 따라갔다. 스키 타는 시간보다 선배들 밥 챙기는 시간이 더 길었다고. 그런데 정작 산악스키의 매력 포인트는 알고 있어도 산악스키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해외여행 자율화 이전이라 정보도 풍부하지 않았다. 혹여 누군가 외국에 나가서 배워오면 그게 정확한 정보라고 믿을 때였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조금씩 알게 된 정도였다. 스키장 가려고 사표 낸 건설사 직원 “직장생활할 때는 퇴근과 동시에 스키장으로 차를 몰고 갔습니다. 회사가 방배동 쪽이어서 용인 양지에 있는 스키장을 이용했죠. 다리 근육 강화를 위해 4~5년 동안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쇼트트랙을 했어요. 이상화 선수를 배출한 은석초등학교의 빙상부원이었습니다. 성북동에서 목동, 방배동으로 출근했다가 양지로 이어지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생활에 피로를 느껴 사표 던지고 나왔습니다.(웃음)” 1997년 직장을 그만둔 그는 회사의 대표가 되면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보다 자신의 일정에 맞춰서 등반하고 스키장가는 일에 더 몰두했다. 정말 원 없이 갔다. 4일, 5일 정도는 스키장에서 혼자 지낸 적도 있다. “아침에 스케이트장, 저녁에 스키장. 몇 년 하다 보니까 슬로프를 타는 게 재미가 없더라고요. 산악스키처럼 좀 색다르게 즐기고 싶었습니다. 2003년에 강원도지사배 강원 산악스키대회가 열렸어요. 그때 출전했습니다. 산악스키대회 장면을 영상으로만 접하다가 실제로 참가하려니 많이 떨렸습니다. 산악용 스키가 원래는 따로 있어요. 가지고 있는 게 없어서 엄홍길 선배에게 빌렸습니다. 스키장의 곤돌라가 돌기 전인 새벽 5시쯤에 대회를 시작해서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끝냈어요.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아주 신기하게 보더군요. 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게 아니라 올라가니까요.” 이렇게 신나게 살던 전영래 씨의 인생에도 브레이크가 걸렸다. 2005년 고산에 다녀온 뒤로 신장이 망가졌다. 7년 동안을 자가 투석해야 했다. 성격상 집에서 쉴 수 없었던 전영래 씨는 투석에 필요한 장비와 약을 가지고 다니면서 악착같이 스키를 탔다. “제가 좀 외향적이에요. 신장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몸이 안 좋아도 삿포로나 나가노에 가는 사람들이 있으면 함께 갔어요. 그리고 제가 가지고 다니는 약이 꽤 무거운데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해서 각자 짐에 나누어 넣고 다녔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투석하고 열심히 스키 타고, 돌아와서 남들 한잔씩 할 때, 자기 전에도 투석하고 그랬어요.” 스키 타고 등반하는 일을 멈추지 않은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현실을 잊고 싶어서. 신장을 이식받은 후에는 그동안 가지 못했던 유럽의 스키장을 다닌다고 했다. “2012년에 투석기를 꽂고 운전까지 해가면서 새벽에 스키장에 가고 있는데 일산 백병원에서 전화가 왔어요. 저와 조직이 일치하는 뇌사자가 있으니 수술받으려면 빨리 병원으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오후에 가면 안 되겠냐’고 하자 아내가 옆에서 듣고는 ‘이 사람이 미쳤나!’ 그러더라고요. 바로 차를 돌려서 병원으로 갔죠. 투석할 때는 어디든 3시간 이내로 다녀야 했습니다. 아무래도 환자니까 장시간 비행도 쉽지 않죠. 신장 이식하고 6개월 후에 바로 프랑스의 샤모니몽블랑으로 날아갔습니다.” 매년 못 가면 한 번, 기본 두 번은 해외 스키장으로 나간다. 산 다니고 스키 타는 사람들의 건배사에 ‘백두산’이라는 게 있다고 했다. “100세까지 두 발로 산에 가자. 저도 그런 마음입니다. 민폐 끼치지 않을 때까지 스키도 타고 산에 오르고 싶습니다.” 겨울 스포츠 즐기는 Tip 1 시즌권은 8월부터 준비한다. 홈페이지를 꾸준히 확인하기 싫으면 애플리케이션 알람 신청을 해놓으면 된다. 2 부상 없이 스키를 안전하게 오래 타고 싶으면 다운힐(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기술)은 최소한 정식 자격을 갖춘 곳에서 강습을 받아야 한다. 3 레벨에 맞는 강사에게 강습받기를 권한다. 기초지식이 없는 사람이 최고급 지식을 가르치는 데몬스트레이터에게 교육을 받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그들은 스키의 가장 기초적인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다. 스키스쿨에서 최소한 3회 이상 교육을 받으면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 4 시니어에게 산악스키를 권한다. 산릉선을 스키를 신고 돌면서 경치도 보고 운동도 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스키를 타고 올라갔다가, 스키로 내려오기 어려우면 짊어지고 내려와도 된다. 산악스키용 부츠는 등산화와 비슷해 신고 내려올 수 있다. 완만한 경사를 임도 따라서 산행하듯이 스키를 신고 걸으면 된다. 크게 힘들지 않다. •크레바스 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 •블리자드 쌓인 눈이 강풍에 휘날려 일어나는 눈보라. •러셀 등산에서 선두가 깊은 눈을 헤치고 나아가며 길을 뚫는 방법.
- 2019-12-2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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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생각 없었던 귀촌이 별나게 즐겁습니다”
- 별별 생각과 궁리를 다하고도 망설이게 되는 게 귀촌이나 귀농이다. 그러나 김석봉(62) 씨는 별생각 없이 시골엘 왔더란다. 무슨 성좌처럼 영롱한 오밤중의 현몽이 그를 이끈 건 아닐 것이다. 그는 매우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거니와, 자나 깨나 귀촌을 숙원으로 여긴 바가 없었으니 하필 후미진 산골로 데려가는 계시를 받았을 리 만무하다. 여하튼, 별 생각 없이 귀촌한 석봉 씨는 별 탈 없이 살아왔다. 별생각이 없었으니 별 볼일도 없었을 성싶지만, 사실은 별 볼일이 벌어졌다. 별별 일이 일어나며 삶이라는 숙제가 술술 풀려나갔다. 지금 석봉 씨는 별나게 즐겁게 산다. “운명이라 해두죠! 하하하!” 귀촌 내력을 묻자 돌아오는 석봉 씨의 쾌활한 답이 그렇다. 운명이라는 게 인간에게 미리 주입돼 있다는 운명론을 단단히 믿어서 하는 말이 아닐 게다. 사람은 때로 참 알 수 없는 상황이나 추세를 운명에 빗대어 적당히 눙치곤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별생각 없이 우연찮게 ‘필’이 꽂혀, 또는 충동의 대리운전에 편승해 산골로 이주했다는 뜻으로 들으면 되겠지. “어느 날, 친구 따라 지리산엘 놀러왔다가 빈집 하나를 보게 됐어요. 아, 마당에 들어서고 보니 너무도 좋더라고요. 2년째 비워둔 시골집이라 꼴이 말이 아니었으나 마음이 그지없이 편해지는 것이었어요. 마치 집이 저를 끌어들인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래서 운명적 만남인가보다, 그런 생각까지 했던 겁니다. 좋아, 이 집에서 살아보자! 그런 결심을 바로 하고 한 달 뒤 이사했습니다. 아내 역시 찬동했기에 걸릴 건 하나 없었어요.” 석봉 씨의 거처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산중턱에 있다. 집 앞으로 펼쳐지는 조망이 기차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이 한눈에 쑤욱 들어온다. 거봉(巨峯)을 바라보노라면 뭔가 새삼 거한 꿈이나 참신한 결의가 부푸는 법. 그러나 석봉 씨는 일단 규격화된 도시, 각박한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그 자체로 이미 모든 꿈을 이룬 것과 같은 만족감을 느꼈던 것 모양이다. 귀촌을 계기로 이제 무엇을 새로 시작하겠다거나, 무엇을 하지 않겠다거나, 그런 생각조차 없었다지. 당장 집수리가 화급하기도 했다. 그는 이삿짐을 풀자마자 거처의 환경 보수에 나섰다. 사실 석봉 씨는 ‘환경’에 관한 한 선수다. 젊어 한때 교도관으로 근무했지만, 주로 환경운동가로 분주히 뛰어 중년기를 통과했다. 그의 오랜 거주지였던 진주시의 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을 맡는 등 열렬한 활보를 했다. 전국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로 지내기도 했다. 이런 그가 돌연 산골로 들어가 처음 한 일이 바로 낡고 헌 옛집의 환경 보수였다. 대대적인 개조가 아니었다. 쓸 만한 기본은 물론, 나무와 흙을 주재료로 지어진 산골집 특유의 소박하고 아담한 본색을 그대로 살린 단장이었다. 그 결과 이젠 시골에서도 흔히 보기 어려운 정갈한 재래식 가옥으로 변신했다. 그게 2007년의 일, 어언 12년이 흘렀다. “하루아침에 느닷없는 이주를 하자 주변 사람들이 놀랐어요. 환경운동을 하던 사람이 별안간 지리산으로 사라졌다며, 별 쓸데없는 오해들을 하기도 했죠.(웃음) 저로서는 새로운 삶의 서막이었어요. 도시에서는 누리지 못한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감성이라는 걸 되찾을 계기였으니까. 환경운동, 그건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 이면엔 부대끼고 시달릴 일이 많았습니다. 업무와 사람들에게 말이죠. 삭막한 감성, 그런 걸 느끼며 힘들었어요.” “감성적인 일상이란 멋진 것이지만, 도시에서나 산골에서나 벌어야만 지속 가능한 생존 조건은 다르지 않겠죠. 생계엔 어떤 대책을 세우셨을까?” “도시생활을 청산하자 4000만 원 정도가 총재산으로 남더라고. 그걸로 이 집을 샀어요. 은행 대출을 끼고서였죠. 한마디로 돈 없이 들어온 겁니다. 그런데도 걱정이 전혀 없었어요. 아이고, 돈은 물론 농사기술 없지, 무슨 자격증 하나 없지, 산골에서 뭘 해서 먹고사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머리 싸매고 그런 걱정부터 했다면 여길 오지 못했을 겁니다.” “좌우간 가서 부닥치고 보자! 그게 대책이었어요?” “느낌이나 용기. 귀농귀촌엔 그런 게 가장 중요하다 생각해요. 그런 게 선행한다면 산골에서 무슨 일을 하든 굶지는 않을 테고요. 아내 역시 경제 문제로 불안해하지 않았어요. 제가 진주에서 환경운동을 하며 박봉으로 겨우 살았어요. 밤엔 아내와 함께 포장마차도 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심하게 애쓰는 삶, 그건 별로 좋지 않다고 봅니다.”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시절 누려 석봉 씨는 세상과 담을 쌓고 지리산 고사리로 살려고 산에 들어온 게 아니다. 백수건달은 더구나 생리에 맞지 않다. 집을 고친 뒤 그는 슬슬 일을 찾았으니 이게 순행(順行)이다. “현재 제가 1800평 규모의 밭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땅은 아니고, 이웃들의 밭을 빌려 쓰죠. 초기엔 200평 정도를 빌려 농사를 지었어요. 농사로 거둔 생산물들로 한과나 김장김치를 만들어 팔기도 했지요. 농사 외 봄엔 산나물을, 여름엔 오디를, 가을엔 야생오미자를, 겨울엔 얼어붙은 채 나무에 매달린 모과를 따러 다니는 게 일이었고요. 그걸 또 가공해서 판매했고요.” 석봉 씨네 동네는 산촌 특유의 납작하고도 포근한 토담집들이 돌담길 따라 이어져 평화롭다. 초록 물감을 흩뿌리는 숲과 능선과 봉우리들이 마을을 휘감아 어디를 봐도 씽씽하다. 이 청명한 산촌에서 석봉 씨는 뜻밖에도 쓴맛을 경험했다. 마을 사업을 주도하다 도중하차한 것. 그는 원주민들의 동참 유도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한계에 봉착했던 것 같다. “아쉽더라고요. 마을 공동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됐더라면 참 자랑스러운 마을이 됐을 텐데 중도에 올 스톱됐으니…. 마을 사업 성사를 위해서는 때로 관과 맞붙어야 합니다. 그러나 연로하신 분 일색인 마을 주민들은 저항이라는 걸 모릅니다. 사업으로 마을 공동이익이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아예 자기 생각이나 주장 자체를 드러내질 않아요. 과거의 권력자였던 관리들을 아직도 두려워하는 거죠.” “지리산 산간마을이라는 특성 때문이지 않을까요? 육이오를 처절하게 겪은 트라우마에서 기인하는 소극적 태도…. 빨치산 토벌대로 참전했던 저의 부친은 아직도 지리산 근처조차 가기를 싫어합니다.” “바로 그겁니다. 낮엔 국방군이, 밤엔 빨치산이 마을을 쥐락펴락했던 세월을 살았으니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을꼬. 손가락질 한 번에 죽고 사는 세상이었으니 말이죠. 충분히 이해할 만한 기질적 형성이라 봐요. 사실 주민들의 심성은 순박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남에게 신세를 지면 기어이 갚아요. 그게 그들의 오랜 삶의 관습이에요.” 구제받을 길 없는 중생마저 관음보살처럼 살뜰히 보살핀다는 지리산의 슬하라고 하지만, 삶은 이모저모 고역스러워 번뇌를 고이 털어버리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석봉 씨에겐 시름이 없다. 그렇다는 건, 그렇게 보인다는 얘기다.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평온한 시절을 누린다는 게 아닌가. 상추씨처럼 흙에 살짝 묻혀 사는 그는, 가족과 함께 담백한 푸성귀 식사를 하는 즐거움을 나날의 꿈이 아롱진 수채화로 여기는 기색이다. 평소의 버릇인 따뜻한 시(詩) 쓰기로, 저 드높은 천왕봉이 소리소문없이 열강하는 겸양의 도리를 가다듬기도 하겠지. 민박 손님이 며느리 된 사연 고리키 왈, 일이 즐거우면 낙원이고, 일이 의무이면 지옥이라지? 석봉 씨는 일이 즐거워 낙원에 사나? 그렇다. 그는 일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투의 표정을 짓기를 삼가질 않는다. “제가 참으로 좋은 일을 선택했어요!” 그는 그리 당당하고 유쾌하게 토로한다. 대체 무슨 일을 선택했기에 그러나? 민박이다. 민박을 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재미와 만족을 구가하게 되었다는 거다. 들어보자. “저희 집이 자그만하지만, 본래 모습을 유지해 손질한 덕에 나름 시골집다운 토속적 운치를 되살린 것 같아요. 어느 날 하루를 묵어간 지인이 그러더라고. 저 사랑채가 너무도 근사하다, 시골집에 향수를 가진 이들이 환호할 것 같다, 민박을 한번 해보라! 그 귀띔에 민박을 시작했어요.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죠.” “살림에 크게 보탬이 됐다는 점에서?” “물론 가계에 도움이 됐죠. 운이 좋았던 게 뭐냐면, 어느 날 우리 집 앞으로 별안간 ‘지리산둘레길’이 났다는 건데요, 이게 호재로 작용했어요. 상상하지 못한 행운이었죠. 별안간 손님들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런데 민박을 하는 진정한 즐거움은 수익성에 있는 건 아닙니다.” “사실 취향에 맞지 않을 경우, 민박도 고달프긴 마찬가지겠죠. 대체 진정한 즐거움이란 뭐죠?” “제가 환경운동을 하던 도시에서의 나날들은 업무와 타인들, 이 양자 사이에서 냉정한 처신을 해야만 했어요. 감성이나 정감이 끼어들 틈새가 전혀 없는 건조한 관계의 연속이었어요. 그런데 민박 손님과의 관계는 전혀 달라요. 함께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온갖 하고 싶은 얘기들을 나누다 보면 ‘타인’이라는 감각이 사라집니다. 가족적인 유대감이 형성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 단골이 되고, 수시로 안부를 전하고, 진심을 나누게 되고, 그렇게 좋은 관계를 지속하게 되더라고요. 이게 제 즐거움과 만족의 원천입니다.” 쌍방향 여행이랄까. 손님은 석봉 씨의 내부로 여행을 하고, 석봉 씨는 손님의 생각 속으로 여행을 한다. 그는 이 공정하고도 허심탄회한 관계에 쾌재를 부른다. 도시에서 그가 자주 목말라했던 인간관계의 따뜻한 생태계를 민박으로 구현하는 기쁨을 누려서다. 그는 딱 부러지는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그런 그의 내면에 웅크린 의외의 사교적 성향이 푸드덕 날갯짓을 해 관계의 신세계로 인도했을 수도 있겠다. 민박이 불러들인 선연(善緣) 혹은 선물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석봉 씨는 민박 손님으로 가끔 찾아들던 한 아가씨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참하고 곱살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는 결국 이 젊은이를 며느리로 맞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 아들놈이 현재 지리산 환경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합니다. 저 참신한 처녀를 이 녀석에게 소개했는데요, 처음엔 서로 심드렁하더니 어인 영문인지 기특하게도 결혼에 이르렀어요.(웃음) 현재 며느리는 우리 집 아래편에 아담한 카페를 차려 둘레길 탐방객들을 맞이합니다. 손녀도 이미 봤고요.” “3대가 한동네에 사는 게 불편하진 않으세요? 젊은이들이란 때로 발칙한 도발을 하는 법인데 말이죠.” “‘저는요, 시골이 너무도 좋아요!’ 며느리의 말이 그렇습니다. 불편도 단점도 전혀 없어요. 아이들에게 제가 가끔 잔소리는 하죠. 과욕을 부린다고 돈이 벌리는 거 아니다. 찡그리며 살아봤자 일이 풀리는 거 아니다. 이 애비가 그랬듯이 바르게, 옳게 살아다오. 나쁜 일을 보고서는 참지 마라. 그렇게.” “그런데 말이죠. 농사하랴, 민박 손님들 맞이하랴, 선생의 일상이 너무 바쁜 거 아네요? 산중의 낙은 한가하게 노니는 데에도 있지 않나?”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즐기는 것에 무슨 결함이 있을까.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쓰고, 사랑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 그게 자유롭게 사는 길이며 좋은 삶이라 생각합니다.” 석봉 씨의 집, 꽃그늘 나무그늘이 푸르다. 이 푸른 공기 속에서 별다른 불안이나 허기가 없이 산다면 인생도 소풍처럼 가뿐할 테지. 세상의 광기와 탐욕이 침범하지 못할 것이고. 한 무리의 민박 손님들이 들이닥친다. 오늘도 신났다, 석봉 씨. 김석봉 씨가 주는 귀촌 Tip •귀촌 준비에 너무 강박감을 갖지 말자. 준비를 충실히 해도 실패할 수 있다. 미장이나 목공처럼 실용적인 기술을 미리 배워두는 건 현명하다. 돈벌이 목적의 귀농이라면 더욱더. •농사에 미리 겁먹을 필요 없다. 수익은 열악하지만 내가 뜻한 대로의 영농을 할 경우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일테면, 기계나 비료를 쓰지 않는 줏대 있는 농법이 그렇다. •가급적 마을 변두리에 거처를 마련하자. 원주민들과의 갈등 소지를 줄일 수 있으니까. •민박을 할 경우엔 일단 돈벌이 목적보다 손님과의 소통을 중시하자. 열쇠만 건네면 그만인 펜션과 달리, 민박은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그게 매력이며, 성공의 첩경이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9-07-04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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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늘꽂이와 피 뽑는 선비 마누라
- 시어머니는 처음 뵈었을 때부터 쪽진 머리였다. 동그스름하고 몽똑하게 붙은 뒷머리 가운데로 은빛 비녀가 반짝였다. 농사일로 두 손을 호미 삼아 거의 평생을 사신 어머니. 그 시절 부녀자들에게 달리 돈이 될 유일한 게 머리카락을 파는 거였다. 젊은 시절엔 당신의 삼단 같은 머리카락을 내주고 항아리나 그릇 등을 장만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만든 바늘꽂이를 받았다. “머리카락 바늘꽂이는 녹이 안 슬어. 큰 바늘은 이불 꿰맬 때 쓰거라.”나일론 자투리 헝겊에 특별할 것 없는 무늬. “이걸 언제 쓴대요?”라고 되물으며 나는 조금 웃었다. 생활에 쫓겨 허덕이는 내게 바늘꽂이는 영 동떨어진 분위기였다. 어머니 생전에 내가 들었던 ‘피 뽑는 선비 마누라’ 이야기가 있다. 결혼해서 이 얘기를 몇 번이나 들었던 걸까. 그 얘기를 당신만 알고 있는 비밀인 듯 나직하고 조심스럽게 했다. 나 또한 그 이야기가 생의 비밀을 품은 실타래처럼, 어머니를 통해 마치 주문을 외는 제사장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결혼하면서부터 어머니와 시동생들과 함께 살았다. 첫애를 낳고 얼마 후, 시동생 결혼으로 우리는 시댁 근처 동네로 분가했다. 다락이 있는 단칸방 월세를 거쳐 방 두 개가 딸린 전셋집을 얻었다. 다락의 책들이 내려와 방 한 칸을 차지했다. 책 사이로 겨우 바람이 통한다 싶을 때 아이는 둘로 늘었다. 아침에 눈을 떠 밤늦게까지 육아와 생계를 잇는 노동으로 여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생활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의 시선이 당신 아들의 책에 머물렀다. 필요한 살림보다 책이 주인인 것 같은 방. 공부하는 아들이 시간제로 강의를 한다는데 그럴듯한 밥벌이는 아닌 것 같았는지 어머니는 짐짓 내게 물었다. “애비 공부는 언제까지 하는 거여?” “언제까지란 게 있나요. 죽을 때까지 하는 게 공분데.” “음, 그렇긴 허지.” 속 시원한 답을 기대한 건 아닐 터였다. 당신보다 한술 더 뜬다 싶은 며느리 말에 막연히 불안했을까. ‘피 뽑는 선비 마누라’ 이야기가 나오는 적절한 상황은 이때다. 어머니는 “서방이란 사람이 돈 될 일 하기는커녕,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책만 들여다보는 서방. 그렇게 가망 없겠다싶은 날들을 보내던 차에 쌀이 떨어졌다는구나. 논에서 피 뽑아 겨우 생계 유지하던 마누라가 부아가 나 그만 보따리를 쌌다지 뭐니” 하며 이야기를 늘어놓으신다. 이쯤에서 어머니의 의도는 알고도 남았다. 나도 찔리는 구석이 없진 않았다. 식구들이 잠든 어느 일요일 새벽, 집을 나왔다. 전날 술에 절어 들어온 남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남편 옆으로 여덟 살, 세 살, 두 아이들이 송이버섯처럼 나란히 자고 있었다. 집을 나선 건 계획된 게 아니었다. 식구들을 떠나 나를 돌아봐야 했다. 넘어질 것 같은 내 자신을 추스르려고 안간힘을 썼던 때였다. 얘기 속, 보따리를 싼 마누라는 공부만 하는 서방을 떠나 좀 편하게 살자 했으나 피를 뽑고 사는 궁핍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한다. 조금만 더 참았다면 영광이 있었을 텐데,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서방을 떠난 마누라를 어머니는 당신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머리카락이 들어간 바늘꽂이는 어머니의 체온인 양 은은하다. 평소에 바르시던 동백기름 향이 나는 것도 같다. 바늘꽂이를 보고 있으면 당신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머니는 백수를 한 해 앞두고 소천하셨다. 살아가는 동안 세상 욕심으로 힘들고 외로울 때, ‘비밀’처럼 들려주던 옛날이야기는 나를 부드럽게 꾸짖으며 따뜻하게 위로하는 메시지가 되었다. 바늘꽂이의 큰 바늘은 행여나 마음속 해지지 않게 한 땀, 한 땀 나를 꿰맨다.
- 2018-08-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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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소시인, 자넨 뚝심이 있잖아
-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시인 최돈선 님이 제자 최관용 님께 편지를 쓰셨습니다. 벌써 38년이 지났네. 자넬 처음 만난 지가. 이 사람아 자넬 만난 날이 무더운 한여름이었지. 8월의 매미가 지천으로 울어대던 그날, 나는 자네가 공부하는 2학년 2반 교실 문을 열었네. 교장선생님의 안내로 들어간 자네 교실은 창문을 열어놓아 시원했어. 창가 미루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렸지. 그때마다 미루나무 잎들은 은어떼처럼 바람에 재잘거렸어. 왜 그날 난 그게 선명히 기억났을까 몰라. 먼 바다 섬에서 오셨다고, 유명한 시인이라고, 실력을 갖춘 선생님이어서 이 학교가 정중히 모셨노라고… 과장되게 말씀을 마친 교장선생님이 나가신 뒤에도 난 한동안 창밖 미루나무 잎들의 재잘거림을 듣고 있었어. 이윽고 나는 칠판에다 내 이름 석 자를 쓰고 이렇게 말했지. 반가워요, 난 이 나라 남쪽 끝섬 완도에서 왔어요. 그 말에 학생들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 찼지. 그런데 그날 유난히도 두 학생이 내 시선을 끌었어. 한 학생은 미남형에 눈빛이 반짝거렸고, 한 학생은 소같이 우직한 인상에 곱슬머리였지. 책상에 앉은 둘의 눈빛이 어찌나 초롱초롱하던지…. 그랬어. 그렇게 자네들과 나는 만난 거야. 당시 강원고등학교에는 소설 쓰시는 선생님이 두 분 계셨는데 자네들은 그 선생님들의 지도를 받고 있었어. 문예부원인 자네들은 시인 선생님이 온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마음 설랬는지 모른다고 했어. 그래, 그날의 엉뚱한 질문을 내 어찌 잊을 리가 있겠나. 자네 곁에 앉은 눈 초롱초롱한 최준 학생이 벌떡 일어났어. 선생님 한국에서 누가 제일 시를 잘 씁니까. 학생들이 모두 나를 주시했지.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이렇게 대답했어. 그야 물론…, 나 말고 또 누가 있겠나? 그 대답에 학생들이 일제히 와! 환호성을 내질렀어. 책상을 쾅쾅 치는 학생들도 있었다니까? 기억나나? 자넨 그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지. 질문을 던진 최준 학생은 어쩐 일인지 멍한 표정이었고…. 마치 한 방 먹은 표정이었다니까. 자네들은 늘 같이 붙어 다니다시피 했지. 하지만 둘은 모든 면에서 확연히 달랐어. 최준 군은 재기가 넘치는 학생이었어. 글쓰기는 물론이고 운동에도 뛰어난 소질을 발휘했지. 배구, 탁구, 축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어. 체육대회 때마다 학급 대표로 선발되어 혁혁한 승리를 따내곤 했지. 최준 군은 재기가 반짝였고 자넨 뚝심이 남달랐고. 그랬어. 확연히 다른 성격임에도 자네들은 단짝이었지. 자네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를 찾아와 꺼낸 말을 분명히 기억하네. 저희는 강원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아니라 강원고등학교 문예부를 졸업한 사람들입니다. 자네들의 이 오만과 자부심은 어디에서 왔겠는가. 자네들은 정말 시를 사랑하고 시에 온 정열을 쏟기로 결심했던 거야. 그 후 최준 군은 신춘문예와 문예지 당선으로 시작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자넨 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장교를 아내로 맞이했지. 그리고 이듬해 강원일보 문화부 기자가 되었네. 바쁜 기자생활 중에도 자넨 이따금씩 내게 찾아와 좀 괴상한 시를 내밀곤 했어. 나는 늘, 생각이 엉뚱한 자네를 두둔했지. 시가 되든 안 되든 그 발상이 남다르다는 데 나는 엄지를 치켜세워준 거야. 아니나 다를까. 자넨 ‘오늘의 작가상’ 최종심에 올랐건만 소설에 밀려 낙선의 고배를 마셨어. 당시 시와 소설이 함께 겨루는 독특한 작가상이었지. 춘천 출신 최승호 시인이 ‘대설주의보’란 시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기억이 나네. 그 후 ‘오늘의 작가상’은 아예 소설 등용문으로 바뀌어버렸어. 하지만 자넨 뚝심의 소유자였네. 이듬해 낙선의 고배를 안긴 민음사 ‘세계의 문학’에 재도전해 당당히 시인으로 등단했으니까. 그 후 난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를 위해 식구들을 데리고 서울로 갔네. 그리고 틈틈이 자네 소식을 듣곤 했지. 이보게, 관용이. 그래도 자넨 뚝심의 소유자이네. 서울서 내가 춘천으로 다시 내려왔을 때 자넨 염소를 키우는 농부가 되어 있었지. 밭일과 염소를 키우면서 격일제로 아파트에 보일러 놓는 일을 한다고 했어. 자넨 나를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했지. 전 길을 가다가도 친구나 아는 이를 만나면 얼른 골목으로 피하곤 했어요. 시도 못 쓰는 껍데기 시인, 직장도 없는 백수가 되었으니까요. 언젠가 내가 페이스북에다 자네를 염소시인이라 부르면서 사연을 적은 걸 기억하나? 그래서일까? 자넨 금세 염소시인이 되어 많은 페친과 사귀게 되었어. 그리고 드디어 자넨 시를 쓰기 시작했네. 길 가다가 골목으로 피하는 일도 없어졌고. 제가 요즘 푼돈을 모아두고 있어요. 시집 한 권 내려고요. 평생 단 한 권뿐인 시집을요. 자네가 그런 말을 내게 했을 때 난 가슴이 뭉클했다네. 그런데 그 모아둔 돈이 갑자기 병마에 시달리는 자네의 예쁜 딸 병원비로 보태어졌지. 그 돈이 있어 참 다행이에요, 하고 자넨 말했어. 빼앗기듯 다 내주고 헐벗고 굶주린 배를 움켜쥐더라도 덕두원 밤하늘에 초롱초롱 빛나는 별들은 꼭꼭 가슴에 품고 싶다. 보석처럼 땅문서처럼 장롱 깊숙이 감추어두고 싶다. 애인처럼 아끼던 염소가 죽어 눈물 흘리며 묻어주면 염소는 밤하늘 별이 되어 시인의 밤길을 초롱꽃처럼 밝혀준다. 얼마나 애절하고 가슴 아픈 글인지…. 자네 글을 메모해두었다가 이 편지에다 적어보네. 이 글은 차라리 소슬한 한 편의 아름다운 서정시가 아닌가. 그래, 자넨 메모 쪽지처럼 글을 쓰더라도 그 글이 아름다운 시가 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는가? 결코 외롭다 생각 말게. 자넨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솔직한 시인일세. 춘천엔 염소시인 최관용이 있네. 그 염소시인을 멀리서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한 노인이 있다는 걸 꼭 기억해주길 바라네. 최돈선(崔燉善) 시인 강원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칠년의 기다림과 일곱 날의 생’, ‘허수아비 사랑’, ‘물의 도시’, ‘나는 사랑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등이 있다. 에세이집으로는 ‘너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속에 종이 울린다’가 있다.
- 2018-04-09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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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넘어진 김에 쉬었다 갑시다
- 백수가 과로사 했다는 말을 들으며 멋진 농담이라고 했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요즘은 든다. 직장에 나갈 때는 직장이란 조직이 개인의 역량보다 조직의 힘으로 움직이는 집단이었다. 정해진 회사의 작업스케줄 대로 업무에 종사하면 되었다. 지나고 보니 그때가 단순해서 좋았다. 출근하고 일상 업무보고 퇴근하면 끝이었다. 집안일이나 어느 모임에 참석을 하지 못해도 회사 출근하는 날이라고 하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용서되었다. 또박또박 급여도 나오고 건강검진까지 회사에서 알아서 다 해주니 별 신경 쓸 일이 없었다. 퇴직하고 집에 있으면 지금껏 가족부양에 고생했으니 휴식중이라고 말해야 옳지만 빈둥빈둥 놀고 있다고 말한다. 누가 오라고 부르는데 가지 않으면 노는 놈이 뭐가 바쁘다고 그 모양이냐며 핀잔부터 들어야 했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참가하다보면 백수가 과로사 했다는 말이 맞는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집에 놀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마음이 편할지 알았는데 딱히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안개처럼 늘 몸 주위를 감싼다. 밥을 먹을 때도 진짜 식충(食蟲)에 오물제조기로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 겁이 덜컥 날 때가 있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서 집밖으로 탈출하고 싶다. 콧바람 쏘이러 외출한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하다못해 은행에 가서 통장정리라도 하는 일거리를 만들어 집에서 나와야 뭔가 밥값 하는 것 같아 마음에 부담이 덜하다. 스스로 살이 있다는 행동을 하고 싶고 보이고 싶다. 배낭 속에 물통을 넣고 산에라도 올라가야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도서관에 가서 신문이라도 읽어야 시대에 뒤처진다는 강박관념에서 조금 진정된다. 한가로운 소설책보다는 생활 에세이 같은 글을 읽어야 ‘그렇지!’하는 공감과 마음속이 뿌듯해진다. 놀 수는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이곳저곳의 무료강좌에 눈독을 들이고 참가한다. 공짜커피라도 주는 곳은 고맙고 좋은 곳이다 한 번도 퇴직이나 은퇴자의 삶을 살아보지 않은 새파란 젊은 사람이 강사로 나와서 70세에 유엔군 사령관이 된 맥아더 장군 이야기를 들먹이며 막연하게 힘내라고 할 때는 ‘내가 맥아더냐?’하는 반발 질문을 하고 싶다. 한 번도 퇴직을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통계자료 몇 개 들고 나와 세상물정 다 아는 것처럼 말 할 때는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삼십년 이상을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일한 당신들 이제 몸과 마음의 휴식이 필요하다고 주위에서 격려를 받고 싶지만 국가도 사회도 가족도 퇴직자에게는 인사치례 말뿐이고 실질적인 배려나 관심이 없다. 일만하다 죽을 수 없고 지금껏 잘해왔다고 격려의 박수를 받고 싶다. 이제 숨차게 달려온 몸보다 마음 휴식이 필요한 때다. 어떤 사람이 어떨 때 마음 휴식이 필요한가를 도서관에 가서 이런저런 책을 뒤져 보았다. ‘마음휴식 자가진단 체크리스트’를 찾았다. 책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편적인 것을 추려 적어본다. 1,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 2,불면증에 시달리고 정신적으로 불안하다. 3,사람 만나는 게 두렵고 싫다. 4,휴가 때도 어디 가는 것보다 집에서 쉬고 싶다. 5,다 내 잘못 같은, 죄책감을 느낀다. 6,일하는 것에 보람보다 심적 부담과 긴장을 많이 느낀다. 7,맡은 일을 하는데 소극적이고 냉소적이다. 8,스트레스를 풀기위해 술, 담배를 즐긴다. 9,최근 짜증과 화가 늘었다. 10,세상이 원망스럽다. 11,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하고 암울하다. 12,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이중에서 6개 이상 해당되면 절대적으로 마음의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딱히 퇴직자가 아니더라도 자신감이 떨어지는 사람은 일단 마음휴식을 고려해 보자. 넘어진 김에 쉬었다 간다고 100년을 사는 세상에 몇 년 쉰다고 크게 달라질 일도 없다. 길고 오랜 인생길에 쉬엄쉬엄 쉬었다 가자. 크게 숨 한번 들이마시고 하늘한번 바라보고 천천히 가고 싶다.
- 2018-02-26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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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뱃돈 경제학
- 설날에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주며 한 해의 복을 바라는 덕담을 건넨다. 신권지폐를 구하러 은행에 갔다. 고액권은 수량이 부족하고 소액권은 남아돌았다. 경제발전만큼 세뱃돈도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손주들을 생각하면서 설날을 준비한다. 아이들이 첫돌이 되어 동전을 돈으로 알기 시작했다. 돈의 가치를 알지 못하여 오백 원 한 개보다 백 원 동전 몇 개를 더 좋아하는 식이었다. 어린이집 다니면서 큰 동전이 작은 동전 몇 개보다 좋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숫자를 세면서 더하기, 빼기 산수를 배우고부터다. 지폐는 가지고 노는 그림종이보다 관심이 없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면서 지폐가 동전보다 크다는 사실을 터득하였다. 세뱃돈 받자마자 ‘감사합니다’ 인사와 함께 제 엄마에게 돈을 맡기는 용돈관리를 시작하였다. 초등학생이 된지 두해가 지난 지금까지 얼마를 맡겼는지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그렇다고 할아버지 선물 하나 사달라고 하면 펄쩍 뛴다. 장난감 하나 사더라도 자기 돈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초등학생 수준의 본능이다. 자라면서 세뱃돈 경제를 철저히 익힐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세뱃돈도 급속하게 올랐다. 지폐였던 오백 원짜리가 동전으로 바뀌면서 봉투에 담아 세뱃돈으로 주기 부적절해진 때부터 최소단위가 천원으로 급상승했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치른 80년대 중반에는 물가가 급등하면서 천 원 한 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확 줄었다. 별 수 없이 세뱃돈도 오천원대에 진입하고 이어서 만원 단위로 껑충 뛰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다시 천 원짜리로 뒷걸음치는 슬픈 역사도 있었다. 2009년 오만 원 권이 등장하면서 세뱃돈에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다. 세뱃돈을 언제까지 받아야 할까 방송에서 토론이 한창이다. ‘일단 소득이 없는 학생들은 세뱃돈을 받을 수 있다. 나이 많은 대학원생이라도 소득이 없으면 세뱃돈을 받는다.’ 여기까지가 상식이다. 하지만 대학교 4학년이라도 빨리 ‘취업해 회사에 다니면’ 세뱃돈을 받지 않는다. 근로소득세를 낸다면 더 이상 못 받는다. 당연한 결론이다. 파트타임, 아르바이트생이나 취업 준비생은 세뱃돈 받을 수 있다. 단, 취업했다가 다시 백수가 된 '돌백'은 못 받는다. 세뱃돈 주기도 받기도 복잡한 세상이다. 자녀의 연봉수준에 따라 부모님께 드리는 세뱃돈이 달라진다고 한다. 이때 한 분에게 몰아 드리지 말고 아버지, 어머니께 따로 드려야 한다는 주의도 덧붙여졌다. 어린아이는 세배 안 하고 울기만 해도 얼굴을 봤으니 주라는 권고도 있다. 5촌 이상 넘는 조카나 손자뻘 되는 아이들은 조정이 필요하다. 혹시 이름이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아이라면 조금 더 얹어주면 된다. 그런데 형은 더 주고 동생에게 덜 주는 일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세뱃돈 법전’이라도 있어야 할 지경이다. 까치설날이다. 세뱃돈을 봉투에 넣고 덕담을 썼다. 그 위에 아이들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예쁘게 씩씩하게 튼튼하게 웃는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오후에 세 손주가 와서 와락 가슴에 안겼다. 설날 아침에는 넙죽 엎드려 세배를 할 터이다. 세뱃돈을 건네고 덕담을 해야겠다. ‘예쁜아, 씩씩아, 튼튼아 풍성한 설날에 큰 복 받고 항상 건강하여라!’
- 2018-02-18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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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조어 얼마나 알고 있나요?
- 온라인상에서 유행하던 신조어를 이제는 일상생활에서도 어렵지 않게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글 파괴, 문법 파괴라는 지적도 받지만, 시대상을 반영하고 문화를 나타내는 표현도 제법 있다. 이제 신조어 이해는 젊은 세대와 자연스러운 대화를 위해 필요해 보인다. 아래 신조어 중 몇 개나 알고 있는지 확인해보자. □자소설 □최애 □엄카 □파덜어택 □지옥철 □열폭 □발연기 □닭둘기 □남/여사친 □생파 자소설: 거짓된 내용으로 본인을 돋보이게 꾸며낸 자기소개서(자소서)를 뜻한다. A 자소서 써야 하는데 쓸 내용이 없다. B 요즘 누가 자소서를 정직하게 쓰니? 다 자소설이지. 최애: ‘최고로 사랑한다’의 의미로 특정 집단의 사람 중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용한다. A 제일 좋아하는 트로트 가수가 누구야? B 내 최애 트로트 가수는 당연히 나훈아 오빠지~ 엄카: 청소년은 물론 백수에게 한 줄기의 희망인 ‘엄카’. ‘엄마 카드’의 줄임말이다. A 엄마~ 용돈 다 썼는데 엄카 좀 빌려주면 안 돼? B 응. 안 돼. 파덜어택: father과 attack이 합쳐진 말로 몰래 게임을 하는 도중에 아버지가 들이닥쳤음을 뜻한다. A 게임 중간에 왜 나갔어? B 갑자기 파덜어택…. 다시 접속할게. 지옥철: 출퇴근 시간대의 혼잡한 지하철을 비꼬아 표현한 말이다. A 새로 간 직장은 어때? 괜찮아? B 매일 지옥철을 타야 하는 것만 빼면 좋아. 열폭: ‘열등감 폭발’의 줄임말로 과도하게 흥분해 상대방을 비방하는 것을 말한다. A 저런 얼굴은 남자들이 별로 안 좋아하죠. 성형한 티가 너무 나잖아요. B 예쁘기만 한데 열폭 대단하시네요. 발연기: ‘발로 연기한다’의 줄임말로 연기를 아주 못한다는 의미다. A 드라마 내용은 좋은데 주연배우 연기가 발연기라 차마 못 보겠어. B 그 배우 발연기로 유명하지. 어떻게 캐스팅된 걸까? 닭둘기: 닭과 비둘기가 합쳐진 말로 비둘기 덩치가 닭만 하거나 닭처럼 날지도 않으면서 사람이 주는 것만 주워 먹는 비만 비둘기를 뜻한다. A 저 닭둘기 좀 봐. 뭘 먹으면 저렇게 살이 찔까? B 요즘은 겁을 줘도 날아가지 않아. 내가 무서워서 피해 다니잖아. 남/여사친: ‘남자 사람 친구, 여자 사람 친구’의 줄임말로 이성적인 감정 없이 성별만 남자 또는 여자인 친구를 말한다. A 저번에 네 옆에 있던 남자, 남친이야? B 아니, 그냥 남사친이야. 생파: ‘생일 파티’의 줄임말이다. 자매품으로 생일 선물을 줄인 ‘생선’이 있다. A 생일 축하해~ 생선 뭐 받고 싶어? B 생선은 필요 없고 생파 때 꼭 와줘!
- 2017-09-22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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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망구와 영감은 억울하다
- 할머니를 일컫는 말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할매, 할멈 그리고 할망구 등이 그것이다. 할머니는 큰 어머니라는 뜻의 순 우리말이다. ‘할’은 ‘크다’라는 뜻의 순우리말 ‘한'이 변형된 말이다. 할머니는 원래 한어머니이다. 지금도 전남지역에 가면 할아버지를 한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한아버지가 발음하기 편하게 할아버지로 변한 것이다. 할매는 할머니의 경상도식 사투리이다. 경상도 아이들이 할머니를 할매라고 부를 때는 참 정감있고 귀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지방에서는 할아버지를 할배라고 한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할매라는 말은 많이 쓰여도 할배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자주 볼 수 없다. 왜일까. 할멈은 늙은 여자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지체 낮은 여자를 부르는 말이니 비속어에 가깝다. 마귀할멈은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빗자루를 타고 다니며 악행을 저지르는 할멈으로 서양의 동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파파할멈은 머리가 하얗게 센 할멈을 말한다. 역시 늙은 여자를 부르는 말이다. 할멈이라는 말도 자주 쓰이지만 할아범이라는 말은 자주 쓰이지 않는다. 도대체 왜일까. 할망구라는 말도 심심찮게 할머니를 부르는 말로 사용된다. 그런데 할망구에는 속어인 할멈이나 방언인 할매와는 전혀 다른 깊은 뜻이 담겨있다. 옛날에는 나이를 지칭하는 말이 많았다. 약관, 이립 그리고 불혹 등은 교과서에서도 수없이 나오는 말이다. 이처럼 망구(望九)는 구십을 바라보는 나이라는 뜻으로 81세를 일컫는다. 옛날에는 81세를 살았으면 장수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81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눈앞에 보이는 90까지 살라는 덕담이 담긴 망구라 했다. 속어처럼 들리는 할망구는 전혀 속어가 아니다. 오히려 장수를 한 할아버지나 할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담겨있다. 그러나 그 뜻의 호불호를 떠나 할망구는 더 이상 존경심을 담아내지 못하고 비속어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아마 그 발음에서 오는 영향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비슷한 의미로 나이든 남자를 지칭하는 영감이 있다. 원래 영감이라는 말은 지체 높으신 어른을 일컫는 말이다. 아직도 영화에서는 젊은 검사에게 영감이라고 부르는 대목을 가끔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이든 남자에게 영감이라고 하면 싸움이 날 만큼 영감이라는 말도 속어의 함정에 빠져 버렸다. 81세를 망구라 한다고 했다. 이처럼 나이를 빗대어 일컫는 표현이 많이 있다. 77세는 희수라 한다. 희(喜)자의 흘림체(초서)가 七十七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88세는 미수라 한다. 미(米)자를 해자하면 88이 된다. 당연히 88세를 미수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백수는 몇 살을 말하는 것일까. 100세라고 하면 틀렸다. 백수(白壽)는 99세를 일컫는 말이다. 백(百)에서 일(一)을 빼면 백(白)이 되기 때문이다. 할매와 할멈이 할배나 할아범 보다 자주 쓰이는 이유는 남존여비사상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짐작할 수 있다. 대체로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상대로 할멈이나 할매라는 말을 자주 썼기 때문이다. 할망구는 구십을 바라보는 어르신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대체로 남자들은 81세까지 사는 사람이 드물었다. 81세를 살아 망구라 불리는 사람은 대체로 여자였으므로 역시 할머니를 지칭하는 말처럼 되었다. 그러고 보니 어르신을 지칭하는 할망구와 영감이 비속어가 된 것은 정말 억울한 일이다.
- 2017-08-17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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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라와 놀기
- 모두가 백수를 하지 않아도 수명이 많이 늘어난 것만은 사실이다. 100세 장수 시대에서 이제는 100세 건강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 시쳇말로 ‘9988234’ 형국이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2, 3일 앓은 후 죽는다.’ 이러한 장수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일까?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아프면서 오래 사는 경우를 들 수 있고 돈 없이 오래 사는 경우를 꼽을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은 전자의 두 가지보다 할 일이 없이 오래 사는 경우를 첫 번째로 꼽기도 한다. 한 마디로 무료(無聊)한 나날을 보낼 때가 더없는 고통으로 여긴다. 생존을 위하여 돈을 버는 일에 매달리면서 여가를 보내는 방법 체득을 소홀히 해서다. 필자는 무료하지 않은 후반생을 위하여 취미활동으로 사진을 선택하였다. 뒤늦은 나이인 60살에 배우기 시작했다. 나이가 68살이 되었으니 사진 취미활동 기간도 8년째로 접어들었다. 사진은 이제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고 카메라를 몸에 지니고 있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고 불안한 마음이 한구석에 자리하기도 한다. 카메라는 친구가 됐다. 카메라만 손에 들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산책에 나서는 한여름의 아침 들녘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카메라가 손에 들렸다. 아침저녁의 온도 차가 커서인지 안개 구름이 산허리를 둘렀다. 사진 촬영에 좋은 시간대다. 주변의 산인 고봉산을 배경으로 삼각대를 세워 카메라를 장착하고 10초 타이머 설정(셔터를 누르면 10초 후에 자동으로 촬영된다)했다. 셔터를 누른 후 필자는 도로 추락 방지 턱 위에 올라 셔터가 떨어지는 순간에 맞춰 하늘을 향해 뛰어올랐다 낙하한다. 카메라로 돌아가 촬영된 화면을 되돌려 본다. 원하는 장면이 아니다. 다시 셔터를 누르고 달려와 뛰어내린다. 수차례 반복한다. 사진이 찍히는 순간에 적절한 모습으로 뛰어 내리기 만만하지 않다. 몸에 땀이 흥건히 밴다. 다시 찍힌 사진을 확인하여 보지만, 만족스럽지 못하다. 같은 작업을 이어간다. 조금씩 원하는 장면에 가까워진다. 열 번 이상을 뛰어내렸나 보다. 드디어 한 컷이 만들어졌다. 예의 사진이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한 장이다. 성취의 기쁨을 느낀다. 꿈을 향해 날고 싶은 마음을 사진 속에 담았다. 필자는 카메라와 이렇게 놀기도 한다. 혼자여도 외롭지 않은 이유다. 카메라가 친구 되어 여가가 무료하지 않다. 100세 장수시대를 걱정하지 않는다. 참 잘 선택한 취미다.
- 2017-08-01 0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