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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재산 몽땅 쏟아붓는 건 미련한 귀농이다
- 귀농 생활을 근사한 쪽으로 끌어가기 쉽지 않다. 물이야 고수라서 거침없이 순행하지만, 그래 물을 스승으로 삼아보지만, 정작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치르기 십상인 게 귀농이다. 생각보다 더 만만치 않고, 예상보다 더 까다롭다. 기대처럼 낭만적이지도 않으며, 계획대로 수익이 발생하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폭풍 속의 질주다. 광주광역시에서 알아주는 이가 많은 ‘여장부’로 살았던 박선주(50, ‘들꽃다물농장’ 대표)의 귀농 경력은 올해로 6년 차. 그는 비바람 속을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가 믿은 건 자신의 야무진 근성 하나였으며, 그걸 아낌없이 꺼내 썼던 것 같다. 덕분에 나가떨어지기는커녕 여하튼 앞으로 나아가는 성과를 거두었다. 산을 무척 좋아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은 마침내 도시를 떠나 산에서 살기를 꿈꾼다. 박선주가 그랬다. 산 아니고 다른 데서 살까 보냐! 동갑내기 남편 고광민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산촌 귀농을 염두에 두고 살던 중에 절호의 찬스를 포착했다. 부부의 건강에 상당히 심각한 이상이 생겼던 거다. 옳다구나! 이제 지리산으로 가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귀농에 시동을 걸었고, 지체 없이 일을 서둘러 드디어 전북 남원시 운봉읍의 산자락에 살게 됐다. “지리산 근처에 경치 좋은 터를 잡고 살며 부부의 건강을 되살리고 싶었다. 지리산을 수시로 오르내리고, 산나물들을 가꿔 먹고, 정직한 노동으로 땀 흘리고, 그러면 까짓것 뭐 건강을 회복할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귀농을 하고 보니 뭐 하나 쉬운 게 없더라. 펑펑 눈물을 쏟은 날이 많았다. 어라, 이게 왜 이런 거야? 이러자고 내가 귀농했나? 광주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냐? 귀농을 후회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지리산은 자주 올랐고? “그토록 좋아하는 지리산이지만 일에 치어 거의 올라가지 못했다. 2019년 내 생일날 천왕봉을 한 번 올랐을 뿐이니까.(웃음)” 박선주는 야트막한 야산 하나를 통째로 사들여 농장으로 가꾸었다. 2만 6000평에 달하는 너른 규모다. 허리 휘어질 신역이 실로 자심할 걸 짐작할 만하다. 건강은 좋아졌나? 때로 위중한 사람도 살리는 게 산인데. “좋아지는 것 같더니만 더 나빠지더라고.(웃음) 남편은 허리디스크에 시달렸고, 나는 뇌경색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이게 다 스트레스 탓인 것 같다. 농사일 자체는 어렵지 않다. 몸이 아프더라도 작물이 성장하는 걸 바라볼 때면 행복하니까. 문제는 역시 스트레스의 강도다. 도시에서보다 과중한 스트레스와 상처를 받으며 살았다.” 욕심을 줄이면 스트레스 관리가 좀 쉬워진다고 한다. 과중한 스트레스의 원인이 무엇일까? 과욕? 외부의 횡포? “스트레스 유발인자가 한둘이 아니다. 난 욕심 많은 여자는 아니다. 기질적으로 어지간한 상처엔 끄떡도 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민과 갈등하면서 오는 상처엔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더라. 예를 하나 들어볼까? 귀농 초기에 지방신문 기자의 고발로 곤욕을 치렀다. 우리가 백두대간을 훼손했다는 죄목이었다. 이 가당찮은 사건은 무혐의로 결론이 났지만 상처가 컸다. 무섭기도 했다. 외지인을 배척하는 지역 일각의 풍토를 여실히 깨달은 것이다.” 지역에 귀농인이 등장하면 주민들은 무대에 오른 배우를 바라보듯 주시하기 마련이다. 이 무대에서 호감을 사기 위해서는 일단 자세를 낮추는 게 현명하다고들 한다. “원주민들과 어울리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았으나 돌아오는 대가는 정당하지 않았다. 나는 귀농 초기부터 친목과 공동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갖가지 단체에서 열심히 뛰었다. 리더로도 활동했다. 지역민들과 우호적인 관계 맺기에 성공한 사례라는 얘기도 자주 들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탱크처럼 과감하게 밀고 나가다 박선주 부부는 광주에서 그들의 전공인 기계설비업을 지속해 기반을 잡았다. 남편에 이어 그 역시 ‘기계가공 기능장’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여성 3호’ 기능장을 받았다. 아마도 뭐 하나에 꽂히면 들입다 파고들어 끝을 보는 성격의 소유자일 게다. 두둑한 배짱을 장기처럼 달고 사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자산을 정리해 만든 13억 원쯤의 자금을 임야 구입과 토목공사에 썼다. 그리고 ‘탱크처럼 매사 과감하게’ 밀고 나갔단다. 그 저돌적인 행진으로 ‘성공한 강소농’이라는 평을 듣기에 이르렀던 것. 그러나 원주민과의 관계에선 한숨이 폭폭 터져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광주로 달아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지경으로 겪은 애환이 많았다. 세태란 원래 어딜 가나 사특한 것. 저기는 안 그런데 여기만 그럴 리야 있겠나? 저기는 낙원이고 여기는 지옥일 리 있겠나? 그저 내가 처신하기 나름이거니, 그리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박선주가 귀농으로 경험한 세태는 얄궂다. “귀농하는 사람들은 제2의 삶을 위해 도시에서 찌들었던 마음을 미리 내려놓고 온다. 대부분 순수한 마음으로 농촌의 정과 인심에 녹아들고 싶다는 의도를 가지고 귀농한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지역 현실은 차가웠다. 거의 모든 게 토박이들 중심으로 돌아가더라.” 토박이 그룹이 먹이사슬의 상위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은연중에 발동하는 텃세. 이건 보수적인 농촌 지역에 흔히 고착된 폐습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들은 지역사회를 위한답시고 단체에 슬쩍 발을 담근 채 영악하게 혜택만 찾아 누린다. 이기적이며 순수하지 않다. 귀농인에겐 좋은 정보나 마땅한 권한조차 공정하게 배분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남원 사람이 될 수 없겠구나! 결론이 그렇게 나더라고.” 대안은 무엇일까? “물론 토박이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좋은 이들도 많으니까. 그들의 우정에 힘을 얻으니까. 그러나 별수 없다. 발을 빼는 수밖에. 이젠 마음의 문을 닫았다. 이런 얘기를 길게 하는 건 귀농하려는 이들이 참고하길 바라서다. 성급하게 귀농지를 정했다간 낭패를 볼 수 있는 거다. 지역의 인심과 풍토부터 미리 파악하는 게 그 무엇보다 앞서 중요하다.” 부부가 부업에 나서기도 겨울바람이 맵차다. 바람에 눕는 마른 풀들. 잠들어 고즈넉한 나무들. 외진 산기슭의 외딴 거처에 감도는 적막감. 농장의 겨울 풍경은 잠잠해 고독해 보인다. 그러나 수려한 산간이다. 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나선형으로 낸 길에선 과도한 인위가 느껴지지만 생산의 기지로 변환한 노고는 더 큰 실감으로 다가온다. 이 산에 사는 텃새들은 알까? 박선주 부부가 야산 개간에 과연 몇 톤 분량의 비지땀을 쏟았는지. 산에 심은 주 작목은 호두나무다. 어린 것들을 심었으니 여러 해가 더 흘러야 수확을 볼 수 있다. 박선주는 당장 생산이 가능한 작목들도 재배했다. 옥수수, 감자, 고구마 따위를. 생산량은 많지 않았지만 용케도 잘 팔려 농사에 재미를 붙이게 하는 촉매가 됐다. 현재까지 각별히 공을 들이는 건 비타민 C 함량이 높은 것으로 유명한 블랙커런트. 즙, 잼, 곤약젤리 등으로 가공해 유통한다. 이 농장의 모든 작물은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된다. 해섭(HACCP,식품위생안전시스템) 인증도 받았다. 경험을 살리고 식견을 돋워 일궈낸 성과다. 농업 공부도 그 기반이 됐다. “귀농 이후 건축법이나 산지관리법 등을 배워 숙지했다. 전국 곳곳의 수많은 농업 교육기관을 찾아다니며 이론과 기술도 습득했다.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건, 무상 교육의 경우 대형 기관이나 단체에서 한결 실속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수익 상황은 어떤가? “2018년 총매출은 2400만 원이었다. 2019년엔 6800만 원, 2020년엔 9800만 원이었고, 2021년엔 1억 원을 넘어섰다. 순수익은 매출의 60% 정도다. 연도별 증가율로 보면 고속 성장이다. 그러나 손익분기점 도달에는 한참 미달한 상태다. 워낙 많은 자금을 초기에 쏟아부었기 때문이지. 게다가 지속적인 재투자가 필연이라 버겁다. 그나마 좀 안도하는 건, 처음엔 지니고 온 자금을 털어 투자했지만 지금은 소액이나마 돈을 벌어 투입한다는 점이다.” 귀농인들이 흔히 하는 얘기가 있다. 농사로 먹고살기 쉽지 않다는 거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먹고살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다. 물정 모르고 덤볐다가는 파탄 나기 딱 좋은 게 농사다. 문제는 판로다. 우리는 공격적인 SNS 마케팅을 구사해 그나마 수입을 거둔다. 그러나 농사일에 정신없이 바빠 SNS에 충실을 기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래저래 상황이 열악해 때로 눈물 나는 것이지.(웃음)” 어떤 방법으로 현실을 타개하지? 무슨 수가 있기는 있나? 귀농의 명암이야 이미 또렷이 인식했을 텐데. “멀리 보고 긴 호흡을 하며 달려간다. 미래적 비전은 사회적 농업이나 치유 농업에 두고 있다. 당장 급박한 자금 조달을 위해서는 농외소득을 벌어들인다. 우리 부부가 농사만 짓는 건 아니라는 얘기지.” 농사 외에 어떤 일을 하지? “내가 알바를 뛰곤 했다. 광주시에 가서 전공인 기계설비 분야의 수업을 해주고 보수를 받는 식으로. 남편은 더 많은 일을 한다. 오늘도 그는 인근 양계장에서 병아리 입출 일을 도와주고 일당을 받아왔다. 이런 식의 부업으로 부부가 매월 벌어들이는 수입이 200만 원 정도다. 농업소득에만 의존하는 귀농은 낡은 방식이다.” 귀농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다각도로 모색하며 멀리 넓게 보라! 박선주가 털어놓는 언설의 행간에 비친 메시지가 그렇다. 이런 그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귀농을 한다면? 답은 이렇다. “돈 들이지 않고 귀농 생활을 시작하겠다. 300평 정도의 농토를 임대해 농막에 살며 농사 경험부터 쌓을 것이다. 농외소득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것도 필수고. 자금을 왕창 쏟아붓는 귀농은 미련한 귀농이다.” 박선주 씨가 주는 귀농 Tip •승률 높은 농업을 원하면 지역 특산물을 작목으로 선택하자. 판로 확보가 용이하고, 지자체의 지원을 받을 수 있어 유리하다. •대규모 농업도 잘만 하면 승산이 있다. 지역 특산물을 규모화할 경우엔 승률이 더 높아진다. •농촌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은 깨끗이 버려라. •농업정책자금을 함부로 받지 말자. 자립 의지가 수반되지 않은 지원금 운용은 빚만 늘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농사만 믿지 말고 농외소득 획득 방법도 적극적으로 모색하자. 찾으면 일은 얼마든지 있다.
- 2022-02-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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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초 농사 실패 후 펜션과 찻집, 마을사업까지... 강승호 씨의 귀농 사연
- 인생이 하루살이와 비슷하다지만, 하루라도 온전한 기쁨으로 두근거리며 살기가 쉽지 않다. 나이 들수록 생활도 욕망도 가벼워지면 좋겠지만, 실상은 달라 정반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흔하다. 이럴 때 들솟는 게 변화에의 욕구이며, 시골살이를 하나의 활로로 모색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광주광역시에서 학원 강사로 살았던 강승호(60, ‘지리산과 하나 되기 농원’)의 귀농 역시 활로 찾기의 방편으로 결행되었다. 강승호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전남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 마을로 귀농했다. 귀농의 직접적인 동기는 건강 문제였다고 한다. 그는 대입학원의 유능한 수학강사였다. 입시학원 강사란 피 말리는 직업이다. 긴장과 스트레스를 혹처럼 붙이고 산다. 그럼에도 과속질주를 습으로 삼았고, 마침내 몸에 이상이 온 것이다. “건강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동안 주력한 건 등산이었다. 백두대간 산행에 몰두하기도 했다. 산이 주는 좋은 에너지와 자연 생태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더라. 긍정적인 가치를 산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러자 아예 산에서 살고 싶더군. 결국 아내의 동의를 얻어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처음의 구상은 간결했다. 조용한 산자락에 작은 집 하나 짓고 텃밭이나 일구며 한가하게 살 계획이었으니까. 일에 덜미 잡히지 않아도 좋을, 덜 벌고 덜 소비하는 산골 생활로 몸은 물론 마음까지 북돋아 진정한 만족을 누리고 싶었다. 단순 소박한 삶이 주는 행복을 원했던 셈이다. 그러나 이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딱히 일 없이 술렁술렁 텃밭이나 가꾸는 생활은 그의 적성에 부합하지 않았다. 단순한 생활이 어디 쉽던가. 채우기보다 어려운 게 비우기다. 일벌레로 살기보다 어려운 게 별 할 일 없이 빈둥거리기다. 게다가 강승호는 일을 거침없이 벌이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일이 없으면 무슨 재미? 적막한 산촌에 들어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독백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런 것이었을 테다. 강승호는 일을 도모하기로 작심하고 약초 농사에 뛰어들었다. 한결 야심만만하게 덤벼든 건 토종벌 농사였다. 하지만 보기 좋게 나가떨어졌다. 치사율 90%에 달하는 전염병인 ‘낭충봉아부패병’의 기습으로 벌들이 대부분 괴사했던 것. 이렇게 초장부터 확실하게 실패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 밤잠을 설치며 궁리하고 연구해 찾은 대안이 펜션 운영이었다. 그는 자신이 보유한 최상의 무기에 속할 추진력을 발동했다. 초봄이면 와글와글 피어나는 산수유 노랑꽃 화신(花信)으로 세상의 겨울잠을 깨우는 산수유 마을 중에서도 가장 높고 수려한 언덕배기에 위치한 터를 사들여 펜션을 짓고 이사했다. “펜션에 어울릴 땅을 마련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 뒤져 마음에 드는 터를 발견하고 지주를 찾아 매입한 뒤엔 건축 허가 문제를 해결하느라 뛰어다닌 곳이 많았다. 길을 내기 위해 마을 주민들의 동의서를 받아낸다든가, 처리해야 할 일이 많더라고.” 귀농해서 민박이나 펜션을 차리는 이들이 많지만 실패 사례가 흔하다. 당신의 펜션은 어떤가? 기대치가 있었을 텐데. “순조롭게 돌아간다. 입지의 자연환경이 좋은 덕분이다. 보다시피 산 중턱에 자리해 조망부터 뛰어나다. 지리산의 풍치를 한눈에 만끽할 수 있는 자리로 여기보다 나은 곳이 없다는 얘기를 흔히 듣거든. 미디어에도 수차례 소개되면서 꽤 알려졌다.” 펜션 투숙객에게 인생을 배워 펜션의 성공 관건은 입지 여건에 달려 있다. 강승호는 썩 이상적인 자리를 잡았다. 터전의 저 아래로 높고 낮은 산들이 펼쳐지고, 골짜기로는 농가들이 올망졸망 들어앉아 정겹다. 그는 조경에도 공을 들였다. 널찍한 잔디 뜰과 정원수를 적절히 조합해 안락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이 집에서만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물도 있다. 하나는 벼락을 맞고 무 토막처럼 통째로 절묘하게 갈라진 벼락바위. 산 너머 어느 집에서 구해왔다는 이 바위 두 덩어리를 그는 열린 문처럼 배치해 펜션의 상징물로 삼았다. 지하수와 약수, 계곡물 세 가지 식수를 세 개의 수도꼭지를 통해 동시에 비교하며 맛볼 수 있는 샘터도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강승호의 재주와 수완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어떻게든 펜션 손님들의 흥미와 호감을 사고 싶었던 것이다. 고객의 뒤치다꺼리로 피곤해지기 쉬운 게 숙박업이다. 강승호가 이를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 접근했다. 손님들과 요령껏 어울려 산중 생활의 무료감을 달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거다. “도시와 달라 시골에선 사람들과 교유할 기회가 드물다. 고립감을 느낄 수 있다. 투숙객들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귀농 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등을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숙박업은 그래서 매력적이다. 단지 수익 목적으로만 차린 펜션이 아니라는 얘기다.” 민박집을 하다 평생의 벗을 얻는 경우도 있더라. “손님들의 요구와 비위를 맞추기가 쉽지는 않다. 주말 밤마다 술 시중꾼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웃음) 그러나 포용해서 함께 어울리다 보면 누구나 마음을 연다. 감동적인 사연을 털어놓기도 한다. 이럴 때면 나는 인생을 배운다.” 이를테면 어떤 사연을? “꽉 찬 예약으로 공실이 없던 어느 날, 어떤 이가 방을 하나 달라고 간청했다. 그래 예약 손님의 양해를 구해 방을 마련해줬다. 알고 보니 가슴 뭉클한 사연이 있더군. 그날이 아내의 환갑날이라며 ‘오늘을 위해 2년 전부터 색소폰을 배웠다’는 게 아닌가. 색소폰을 연주해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던 거다. 그날 밤 그는 가수 하수영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연주했다. 잊지 못할 풍경이었다.” 그토록 뜨거운 부부애라니! 수십 년을 함께 살아도 부부 사이에 빙하가 흐를 수 있다. 성공적인 귀농을 위해서는 부부간의 유대가 가장 중요하다고들 한다. “무조건 아내 말을 따르면 탈 날 게 없다. 남자보다 매사에 현명한 게 여자라는 게 내 생각이다.” 강승호는 지역에서 잘 알려진 귀농인이다. 이름 있는 기관이 주는 상도 받았다. 유기농으로 지은 산수유를 가공해 현대백화점 명인명촌관에 납품도 한다. 물정도 기술도 모르는 초심자로 귀농했지만 거둔 성과가 한둘이 아니다. 아내 이경영(54)의 조력이 있어 가능했던 성적이다. 처음 귀농 제안을 했을 때 아내는 망설였다. 그러나 긴 고민 없이 동의하더란다. ‘그토록 원하는 귀농이라면 당신 뜻에 따르겠어요!’ 그 한마디 던지며. ‘분산 전략’을 구사하다 강승호에겐 할 일이 많고 많다. 벌여놓은 일이 여러 개라 몸이 닳도록 뛰어야 한다. 펜션에 쏟아부은 땀과 정성도 수북할 테지만, 갖가지 약용작물을 기르고, 찻집을 운영하고, 산수유마을학교를 이끌며, 산촌 유학을 테마로 한 마을사업까지 주도한다. 일복이 터졌다. 열심히 몸 놀려 일하는 것만이 유일한 비법이라는 듯 동으로 뛰고 서로 달린다. 여하튼 그의 귀농은 탕탕 순항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렇지만은 않단다. “시행착오가 적지 않았다. 순탄하게 흘러온 게 아니다. 농산물을 생산해 그대로 파는 1차 농업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가공 판매와 체험 교육까지 접목한 6차 농업을 지향해야 한다. 이게 만만한 일이겠나? 가공 농가가 타산을 맞출 확률은 10% 미만이다.” 귀농 전에 농업 교육은 받았나? “아니다. 귀농을 하고 나서야 사전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거든. 뒤늦게 부지런히 기관을 쫓아다니며 배웠다. 숲 해설사, 문화 해설사 등 자격증도 여섯 가지나 땄다. 이렇게 나름대로 분발해 자리를 잡은 편이지만 경제적 애환도 있었다. 그로 인해 아내와 자식들을 고생시켰다. 이건 귀농 이후 내 삶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일의 규모와 방향을 과도하게 설정한 걸까? “농촌에 와서 안타까운 건 주민들의 열악한 현실이었다. 나만 편하게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했다. 뭔가 작으나마 주민들에게도 도움 되는 일을 하는 게 좋다고 판단한 거다. 귀촌이나 귀농을 해서 이웃들이야 어떻든 나만 즐겁게 살면 된다는 생각, 살다가 정 싫으면 떠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지만 이는 무모하다. 외지인들이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더 힘들어지는 건 원주민 농부들일 뿐이다.” 똑똑하고 이타적인 귀농인이 나서서 마을 공동사업을 추진하더라도 벽에 부닥쳐 좌초하는 사례가 많다. 아예 나서지 않는 게 상책이라 조언하는 이들도 있더군. “그 대목이 참 어렵다. 원주민들의 동참을 유도하기가 만만치 않아서다. 합리성과 효용성이 명백한 경우에도 색안경부터 쓰는 이들이 있다. 나는 현재 산촌 유학 관련 사회적 기업을 추진하고 있다. 산림청으로부터 이미 승인도 받았다. 그러나 부지 마련이 어려운 상황이다. 일부 주민들이 반대해서지. 귀농인이 선의를 가지고 앞장서도 외지인에 대한 본능적인 불신이랄까, 원주민들에겐 그런 게 있어 난처하다. 차라리 나서지 않는 게 현명한 처신이라는 견해는 어쩌면 탁견이다.” 귀농을 고려하는 사람들 중엔 ‘아주 작은 농사’로 ‘소확행’을 누리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소규모 농사로 최소한의 생활비를 벌어 쓸 수 있을까? “흠, 가능하다. 작물을 길러 가족이 먹고 남는 걸 수시로 로컬 매장에 가져가 손수 팔면 된다. SNS를 통한 직거래도 유망하다. 이 문제엔 관이 나서야 한다. 소규모 귀농 농가 지원을 위한 연구를 서둘러야 한다.” 강승호는 10여 종의 명함을 지니고 산다. 햐, 그는 문어발식 농업의 선수? 그게 아니란다. 분산 전략이 아니고선 가망성이 낮아 다종다양한 일을 펼쳤다. 지독한 승부욕이 그를 몰아치는 것 같다. 그런데 뜻밖에도 목표는 조신하다. “결론은 비우고 살기다!” 무욕으로 진정한 행복을 맛보겠다는 얘기다. 강승호 씨가 주는 귀촌 Tip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 함께 귀농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한다. •이민보다 정착하기 ㅁ더 힘든 게 귀농임을 명심하자. •원주민과의 갈등이나 마찰을 극구 피하라. 먼저 배려하고 이해하는 게 상책이다. •작물의 트렌드를 정확하게 읽자. •종묘상이나 묘목 상인의 얄팍한 상술에 현혹되지 마라. •농업기관이 주관하는 농업 교육이나 영농 상담 창구를 적극 활용하자.
- 2021-10-07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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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낱말의 속살] 결
- 원시의 인간이 언어를 시작했을 때 해, 달, 별, 풀, 불, 숲, 너, 나처럼 한 음절의 말을 툭툭 뱉으며 무엇인가를 가리키기 시작했다. 한 음절로 된 말들에는 대개 인간이 우주와 사물을 처음 대하던 때의 낯섬과 놀라움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 가장 긴급한 것부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저게 뭐지? 그 질문에 응답해야 하는 것. 그런데 결이란 말은 즉흥적으로 생각해내고 단호하게 붙일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인간의 시선이 정교해지고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힘이 갖춰지기 시작했을 때 생겼음직한 명사다. 그런데 왜 한 음절일까. 그것도 약간 혀를 굴려 음을 흐르게 하는 듯한 소릿값을 지닌 한 음절. 아마도 이 말은 ‘두 음절 명사 시대’(지금도 여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로 진입한 이후에 무엇인가를 빠뜨린 기분으로 두리번거리다 문득 찾아낸 개념이 아닐까. 찾아낸 뒤 그 본능적이고 본질적이며 생의 원천을 이루는 느낌 때문에 애써 한 음절 시대로 돌아가 딱 한 글자로 언어화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말이다. 원시의 일상 속에서 만난 첫 결은 나무와 파도가 아닐까 싶다. 나무 속에는 무엇인가가 마치 흘러간 듯한 자국들이 켜를 이루며 짜여 있다. 가로로 자르면 나이테가 결을 이루고 세로로 자르면 그 나이테의 원무를 그리며 나아간 무수한 줄들이 결을 이룬다. 나무껍질도 결을 이루며 나무뿌리와 잎들도 스스로의 결을 지니고 있다. 물은 흘러가는 지형이나 출렁이는 양상에 따라 결을 만들어낸다. 물결은 부드럽고 순하고 감미로운 것도 있지만, 때로 성난 감정이라도 있는 것처럼 무섭게 흔들리며 위협적으로 달려드는 것도 있다. 돌도 결이 있다. 돌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무늬와 금은 단단히 박혀 있는 경우가 많지만 한때는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고 출렁거렸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돌은 단단하지만 결은 그 속에서도 부드러운 활성(活性)을 드러낸다. 조개 무늬도 결이며 그 결이 옮겨온 자개 무늬도 결이다. 결은 인간이 짓는 공예(工藝)에도 스며들었다. 찰랑이며 흩어지는 비단결이 그것이다. 실오라기가 가지런히 눕는 것도 결이다. 그런데 결은 인간의 삶 속에 깊이 들어오면서 스스로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말이 되었다. 숨결은 숨이 물결치고 무늬지듯 흐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시도 멈출 수 없는 생명의 오롯한 펌프질인 숨은 그 결이 곧 생명이다. 숨결이 부드럽고 고르고 온기가 있으면 잘 살아 있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위험한 것이다. 죽음을 숨이 졌다고 하는데, 지는 것은 숨결이 꺼지는 것이다. 또 인간은 스스로의 몸을 이루는 살의 결들을 가끔 애틋한 기분으로 내려다본다. 살결은 마치 물결처럼 흘러간다. 언제나 어리고 젊은 살결 그대로 있지 않고, 늘어나고 처지고 물컹해지는 살결로 흘러간다. 생체시계는 이 결 속에도 숨어 있다. 어린 시절의 얼굴과 늙어가는 얼굴을 조금만 유심히 들여다보며 비교해본 사람이라면, 늙은 얼굴이 들어와 앉은 게 아니라 어린 시절 얼굴의 살결이 흘러내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살결은 수많은 감정을 실어내면서 조금씩 흘러온 것이다. 숨과 몸을 이루는 결에 마음을 두었던 인간은, 마침내 마음에도 결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결이 고운 경우가 있고, 그 결이 부드럽게 흐르고 따뜻하게 물결치는 경우가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음을 알게 된다. 눈으로 뚜렷이 볼 수 있던 결과는 달리, 마음결은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파도치는 결인지라 훨씬 높은 수준의 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린 심청이나 흥부의 착한 마음결을 들어서 알고 있고, 스스로도 가능한 한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 결이 고우면 마음도 고와진다고 믿는 ‘결의 신앙’을 갖고 있다. 그 사람은 ‘결’이 다르더라. 이 말보다 더 확실하게 그 사람의 삶과 내면을 규정하는 말이 또 있을까. 결은 묘하게도 ‘겨를’이란 말과 닮아서 가끔 넘나들기도 한다. 겨를은 무엇인가를 하다가 잠시 생각이나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말한다. 틈과도 같은 뜻으로 쓰인다. ‘무심결에’나 ‘얼떨결에’ 같은 말에 쓰이는 결은 겨를을 가리키는 말 같기도 하고, 파도나 흐름의 결을 가리키는 말 같기도 하다. 무심과 같은 결을 타고 가는 것이나 얼떨떨함의 결을 타고 가는 것이나, 모두 그런 묘한 결의 맛이 끼어든다. 바람결이란 말도 바람이 불 때를 가리키는 맛도 있고, 바람의 흐름 자체를 가리키는 느낌도 있다. 또 꿈결도 그런데, 이것은 꿈의 흐름이란 뜻보다 꿈을 꾸던 겨를의 뉘앙스가 조금 더 강하게 느껴진다. 결에는 운동성(運動性)이 있고, 그 운동이 기입되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시간성(時間性)이 있다. 결은 생동감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고, 내면의 잘 제어된 흐름을 말하기도 한다. 결에서 느끼는 의식과 무의식은, 생명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타고난 존재들이 공유하는 깊은 공감일지 모른다. 지속적인 움직임은 삶의 낌새이며 자국이다. 결은 그 꿈틀거림을 직조(織造)해나간 물성(物性)의 긴박하고 또렷한 자취라고도 할 수 있다. 화가 김덕용 선생의 ‘결’로 이룬 작품들을 보면서 몹시 매료되었다. 그 이미지에 매료되었다기보다는, 그 이미지에 흐르고 있는 익숙하고도 정겨운 결에 매료되었다고 말하는 게 옳을지 모른다. 어린 시절 늘 보고 자랐던 장농이나 화장대의 무늬들, 대청의 천장과 벽에 드러나 있던 무늬들. 그 결의 흐름을 한동안 잊어버린 듯했는데, 그림들이 마치 무의식처럼 형상의 안으로 흐르게 해놓았다. 그 결이 형상을 이룬 것도 아니다. 형상이 마치 스스로 결을 지닌 것처럼 얼비칠 뿐이다. 나무의 질감이 형상을 품고 있는 서늘하고 우묵한 기분이 나를 황홀하게 했다. 결이 왜 이토록 마음을 상기시키며 안정시키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결들과 우리의 목숨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왜 우리는 결에서 비로소 안심이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알 수 없음이 일으키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 내 안에 흐르는 결, 내 눈앞에 늘 흐르던 결을 복원시켜주고 복각시켜준 어느 예술의 원형적 통찰. 신비란 신의 비밀이라고 한 사람은 다석 류영모였다. 신비는 도처에, 아니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이미 저절로 다 들어 있다.
- 2021-09-15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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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별 클래식카들의 별난 매력
- 레트로(Retro)는 이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패션, 음악, 미술, 영화, TV 프로그램, 마케팅은 물론, 하다못해 전단지 디자인에까지 레트로가 등장한다. 열풍이다. 과거의 낡은 것을 현시대에 불러들여 감성적 만족을 구가하는 이 흥미로운 사조는 자동차 분야에도 당도했다. 올드카 또는 클래식카 마니아가 늘어나고 있는 것.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에 있는 ‘더원 클래식카 카페’는 클래식카 마니아들의 관심을 사고 있는 클래식카 전시장이자 찻집이다. ‘더원 클래식카 카페’가 문을 연 건 1년여 전. 고즈넉한 시골 도로변에 있다. 특별할 것 없는 2층 건물이다. 언뜻 그렇고 그런 테마 카페로 보인다. 처음엔 우연히 스쳐가다 호기심으로 들어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일단 찾아온 이들은 찬탄하더란다. 알고 보면 특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카페의 너른 뜰과 건물 내부에 진열된 30여 대의 클래식카들이 발산하는 멋과 위용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어디서도 보기 힘든 올드카를 여기서 흔하게 볼 수 있어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다. 그런 연유로 어느덧 찾아오는 발길이 늘었으며, 마니아들에게 입소문 나면서 주목받게 되었다. “햐, 놀랍다!” 흔히들 터뜨리는 감탄사가 그렇다. 국내에는 몇몇 곳에 자동차 박물관이 있다. 클래식카 전문 박물관도 있다. 모두 자동차 회사나 단체가 운영하는 곳들이다. 더원 클래식카 카페는 이들 박물관에 비하면 규모나 시스템에선 한참 급이 낮다. 그러나 보유 차량의 퀄리티 면에서는 뒤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능가한다. 박물관들에 전시된 차들이 운행 불가능한, 말 그대로 전시 목적의 ‘죽은 차’인 반면, 이곳의 클래식카들은 두세 대만 빼고 모두 멀쩡한 내연기관을 갖춘 ‘살아 있는 차’다. 공도를 주행할 수 있는 인증을 받은 차, 즉 번호판 달린 차들이다. 고유한 히스토리로 이름을 날린 차도 많다. 다시 말해 이 카페는 국내에서 가장 독특한 고품격 클래식카 전시 공간이다. 개인이 운영하는 클래식카 전시장으로는 유일하다. 카페 대표는 이제 인생의 하오에 접어든 김성환(68) 씨. 유아교육을 전공한 그는 반평생 교육 사업에 전념했으며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그러다 은퇴를 계기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땀 흘려 가장의 책임을 다했으니 이젠 종래의 궤도에서 내려와 자신만의 삶을 즐길 자격이 충분하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말하자면 지도 위에서 전에 가보지 않은 길을 찾아 새로운 여정에 나선 거다. 인생 2막을, 유한한 시간을 오직 자신을 위해,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선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뛰어든 게 클래식카 카페 운영이다. 이건 사실 완전한 미지의 길은 아니다. 클래식카 마니아로 지낸 세월이 10여 년이니까. “20년 전쯤의 어느 날, 우연히 도로 위에서 쌍용 칼리스타가 달리는 걸 보고 한눈에 반했다. 나도 모르게 뒤를 쫓아가게 되더라고. 용인에서부터 영등포까지. 갖고 싶은 차였던 거다. 그러나 당시엔 형편이 안 돼 포기했다. 이후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칼리스타를 사들였다. 그게 클래식카에 입문한 계기였다.” 칼리스타는 국내 최초의 로드스터로 쌍용이 수작업을 통해 생산했다. 정통 클래식카의 DNA를 계승한 이 멋들어진 차의 출현에 시장은 경악했다. 그러나 1992년부터 2년간 단 69대만 생산한 뒤 단종됐다. 당시 국산 스포츠카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데다 사치품을 배척하는 사회 분위기를 넘어서지 못해서였다. 이 카페에서 칼리스타는 특히 인기를 끄는 차종이다. 클래식카는 하나의 종합예술 칼리스타를 손에 넣은 후 김성환 대표는 본격적으로 클래식카에 관심과 애착을 갖기 시작했다. 조예를 키웠고, 차들을 사들였다, 그러면서 흥미와 만족의 농도가 점점 깊어졌던 모양이다. 돈이 모이는 대로 아낌없이 털어 컬렉션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차 숫자가 늘어나면서 보관 문제가 불거지더라. 그래서 지은 게 이 카페 건물이다. 애초 카페를 겸할 계획은 없었다. 차만 안전하게 보관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투박한 건물을 지었으니까.” 계획에 없었던 카페 영업을 병행한 이유는? “사람들이 편하게 찾아와 차를 마시며 클래식카를 즐길 수 있으면 좋을 거라는 착상이 떠올라서다. 나는 종종 딸이 사는 미국을 드나든다. 그런데 미국에선 노인들이 클래식카 동아리를 만들어 노년을 즐기는 문화가 정착돼 있더라. 그게 아주 부러웠다. 그때 한국에도 클래식카 문화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막연했던 희망이 카페를 겸한 전시장을 꾸린 단초가 된 셈이다.” 클래식카란 어떤 차를 말하나? 일정한 기준이 있을 텐데. “기본적으로 최소 30년 이상의 차령을 가진 차여야 한다. 더 중요한 건 희소성이다. 생산 개체 수가 적을수록 가치가 높아진다. 디자인의 우수성, 외관과 엔진의 상태, 실내 인테리어의 유지 상황 등도 따진다. 히스토리도 본다.” 클래식카에 어떤 매력을 느꼈기에 그토록 빠져들었나? “미감을 즐기기에 적격인 게 클래식카다. 아름다운 선과 색, 세련된 디자인을 보라. 당대의 첨단 기술력과 감수성이 집약된 클래식카를 나는 하나의 종합예술로 본다. 기능과 편의 위주로 만드는 요즘의 차들이 감히 따라갈 수도, 흉내 낼 수도 없는 특유의 예술적 경지가 있다.” 보유한 차들 가운데 가장 진귀한 모델은? “이곳을 찾은 마니아들이 하나같이 놀라는 게 대부분의 차가 고품질 클래식카이기 때문이다.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는 퀄리티에 반색하는데, 사실 어떤 차를 특정해서 뛰어나다고 평가하기 곤란한 면이 있다. 그럼에도 하나를 꼽자면 ‘BMW Z8’이다.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클래식카에 속하는 차종이다. 제임스 본드의 007 영화에 나온 ‘본드 카’로도 유명하다.” ‘BMW Z8’은 BMW 최고 기술자들이 팀을 구성, 수작업으로 생산한 차다. 소량 생산해 1년에 2000여 대만 나온 모델로, 풍만하면서도 민첩한 디자인이 압권이다. 가장 아름다운 차의 하나로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가뭄에 콩 나듯이 어쩌다 국내 중고차 시장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가격은 3억여 원에 달한다고. “클래식카의 성지로 발돋움하겠다” 나는 문외한이라서 클래식카에 큰 관심도 지식도 없다. 자동차란 그저 잘 굴러가면 고맙지, 그쯤의 생각을 한다. 클래식카가 기차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을 지닌 걸 알아 감탄하지만, 일부러 돌아다니며 구경할 정도는 아닌 거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보니 흥미진진하다. 클래식카들의 극적으로 세련된 디자인에 예술품을 바라보는 기분이 든다. 아마도 로맨티시즘이 반영되었을 감미로운 선과 곡면은 섹시하고 평화롭다. 허무하게 사라진 시간의 잔영이 비치는 낡고 쓸쓸한 어떤 차들의 형상에서는 인생을 닮은 우수가 느껴진다. 레트로에 감흥을 받는 사람들과 못 말릴 클래식카 마니아들은 몹시 설렐 테다. 명차와 희귀차를 숨이 차게 잔뜩 만끽할 수 있으니까. 몇몇 차를 볼까? 1959년산 ‘캐딜락 엘도라도.’ 이 차는 제너럴모터스의 고품격 브랜드로 크고 화려하며, 보디 후면의 번쩍 치솟은 테일 핀으로 디자인 혁명을 가져온 모델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애마로도 유명하다. 외국에서도 흔히 볼 수 없다는 ‘포르쉐356A’도 눈길을 끈다. 제임스 딘이 즐겨 탔다는 히스토리도 돋보이는 차종이다. 외부 주차장에 전시된 ‘포드T’는 더원 클래식카가 보유한 가장 오래된 모델로 차령 110년이다. 자동차의 원초적 형태를 지닌 이 차의 휠은 심지어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생산 당시에는 첨단 테크놀로지의 총화였다. 미국의 자동차 역사는 물론, 미국 자체를 혁신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 희귀한 차를 김 대표는 어디서 구했을까. “미국에서 구입해 배로 들여왔다. 클래식카 애호가가 많은 미국에선 매매 시장도 활성화돼 차 구입이 어렵진 않다. 관건은 수준 있는 차, 가치 높은 차를 고르는 안목이다.” 영국엔 와인과 주화에 이어 클래식카를 투자 가치 3위로 꼽은 조사가 있더라. 국내에서도 클래식카 시장이 움직이고 있나? “미국, 유럽, 일본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클래식카를 찾는 사람들이 최근 급작스럽게 늘어났다. 깜짝 놀랄 정도다. 마니아들이 급격히 늘었고 커뮤니티 활동도 왕성하다. 이미 클래식카가 생활 속으로 파고들었음을 실감한다.” 한두 대면 모를까, 수십 대의 올드카를 사들이는 모습에 놀라 당신을 거의 미친 사람 취급한 이들이 있었다지?(웃음) “과연 내가 그 정도로 깊이 심취했나? 그런 자문도 해보지만, 남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웃음) 그런데 나에겐 확고한 방향이 있다. 클래식카와 예술적 이벤트를 접목한 문화 공간, 소통과 사교의 장으로 카페의 성격을 강화할 참이다. 장기적으로는 주행 가능한 고품격 클래식카를 더 확보해 소(小)박물관으로, 또는 클래식카의 성지로 키울 계획이다.” 내친김에 한 걸음 더 들어가겠다는 얘기다. 늘 재즈 음악이 흐르는 이 카페엔 예술적 분위기가 감돈다. 그림과 사진과 음악으로 자기 세계를 구축한 전방위 예술가 문순우가 조력자로 나서 콘셉트를 제공하고 있다. 클래식카의 문화적 가치를 잘 알아서다. 문순우의 절친인 원로 재즈피아니스트 신관웅도 나섰다. 그는 토요일마다 재즈를 연주해 분위기를 달군다. 이쯤이면 다이내믹한 항진이다.
- 2021-09-1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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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부적 쓰는 여자
- 나직이 숨을 고르고는 붓에 힘을 주었다. 오늘은 왠지 붓끝이 가볍다. 이제 한 획만 쓰면 된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마지막 획을 길게 내리긋는다. 미세한 흔들림도 없이 붓끝이 전서체의 획을 마무리했다. 나는 황색 부적지에서 붓을 떼고 지긋이 글씨를 바라보았다. 집안에 두 마리의 용이 화목하게 깃들어 있는 모양새다. 마주 보는 획이 기울지 않고 균형을 잘 이루고 있다. 게다가 단아한 글씨와 잡귀를 물리치는 담백한 운필로 금방이라도 집안 가득 화평한 꽃 기운이 생동할 것만 같다. 나는 매우 흡족해하며 붓을 옆에 나란히 놓았다. 보통 부적符籍이라 함은 대개 한 해의 액厄을 피하거나 벽사壁邪와 기복祈福의 민간 신앙을 담고 있는 데서 유래한다. 요즘에는 현대적이며 새로운 글씨체를 통해 무병장수의 삶과 소망을 담긴 부적을 주로 찾는다. 적당한 먹의 농담과 담백한 운필. 그리고 기운 생동한 붓질과 여백 등이 조화롭게 그려진 부적을 높이 쳐 준다. 가게 진열대에 인쇄소에서 찍어낸 부적이 다발로 있지만 단골 손님들은 내가 직접 쓴 부적을 원한다. 내가 직접 써서 파는 것은 한 장에 십만 원 정도를 받는다. 부적은 누가 쓰느냐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비싼 것은 한 장에 백만 원까지 받는다는 소문도 있다. 그런 경지의 부적은 가로세로 획마다 금석기金石氣가 있으며 글씨는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과 다양한 서체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조형미까지 갖추고 있다. 실로 대단한 경지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게다가 그보다 한술 더 뜬 최고 경지에 이른 부적은 완연한 획의 흐름에서 삶의 희로애락이 감지되며 파격적인 데다 변화무쌍하고 괴기스러움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나는 부적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쓴다. 부적을 쓰는 날은 보통 손 없는 날을 잡는다. 부적을 쓸 때는 신령한 공력이 배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날은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를 하고 동쪽을 향하여 정화수를 올린다. 그리고 향을 사른 후 무릎을 꿇고 주문한 손님들의 소망을 염원하며 기도를 올린 뒤 경건하게 붓을 든다. 나는 진열장 겸 책상으로 쓰는 계산대에 앉아 방금 쓴 부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색종이 위에 마르지 않는 붉은 글씨가 물기로 번들거렸다. 부적지로 사용하는 종이는 홰나무로 만든 괴황지다. 크기는 가로 10센티 세로 15센티 정도다. 붉은 먹물은 흔한 물감이 아니라 경면주사鏡面朱砂라고 하는 특별한 안료이다. 그것의 원료는 붉은색을 띠는 광석에서 채굴한다. 원료를 작은 용기에 넣고 절구공이로 곱게 빻아서 미세한 가루로 만든다. 그리고 부적유符籍油로는 참기름이나 백설탕을 녹인 액체를 가루와 섞으면 부적 특유의 붉은 색깔과 특유의 향을 풍기는데 이것을 경면주사라 한다. 나는 고개를 들고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벽시계는 한겨울의 나른한 오후를 가리키고 있다. 가게 중앙에는 활활 타는 전기난로가 썰렁한 가게 안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다. 아담한 공간에는 무속인들에게 필요한 각종 제의 용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맞은편 붙박이 진열장에는 망자들의 넋을 달래줄 영가 옷이 촘촘히 쌓여있고 그 옆에는 무속인들이 굿할 때 쓰는 무신도 대신방울 오방기 장군칼 향로 장구 꽹과리 북 등 무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으며 등 뒤로는 기도할 때 쓰는 등초 무지개초와 목향 금난향 궁연향 등 각종 향과 초가 칸칸마다 들어있다. 다시 고개를 들고 실내에 놓인 간이 탁자 위로 시선을 옮긴다. 그것은 장판을 씌운 자그마한 작업용 탁자다. 무속인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골라 탁자에 놓으면 그것들을 큰 보자기로 싸서 묶는 곳이다. 그들이 한 번씩 가게에 들러 굿판에 쓸 제의 용품을 고르면 보통 서너 보따리가 넘을 때도 있다. 흔히 사람들은 무속인, 하면 무당이라 하여 천시하는데 정작 그들의 신심은 대단하다. 그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어 보는 신령님을 섬긴다. 신령님을 무가에서는 보통 몸주라 부르는데, 그들은 몸주와 교감하는 능력을 지닌 영매자靈媒者이기 때문이다. 잠시 창밖으로 눈길을 부렸다. 하늘이 점차 흐려지는가 싶더니 진눈깨비가 풀풀 날리기 시작했다. 저만치서 팔짱을 낀 연인이 까르르 웃으며 정답게 걸어왔다. 세련된 차림에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두 사람의 어깨엔 얼음 가루가 묻은 스케이트화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어디 스케이트장에라도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언뜻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눈길을 당겨 부적을 봤다. 부적이 거의 다 말라 있었다. 부적을 조심히 집어서 서랍장에 넣었다. 지금은 명절 전이어서 손님이 뜸한 편이다. 설이 지나면 한해의 액땜이나 복을 바라는 부적 주문이 들어오고 굿판도 자주 열릴 것이다. 내가 부적을 쓰게 된 것은 손님들 때문이다. 부적을 찾는 손님마다 직접 손으로 쓴 걸 원하기에 오빠를 통해 부적 쓰는 법을 배웠다. 처음엔 한 장 두 장 팔리던 것이 지금은 소문이 좋게 돌아 단골로 내 부적을 사가는 손님들이 제법 있다. 유리문에 매달린 종소리가 쨍그렁, 하고 울렸다. 출입문 쪽을 보았다. 조금 전에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걸어가던 연인이다. 나는 방긋 웃으며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언니, 우리가요, 만난 지 꼭 백 일째거든요. 그래서 부적처럼 간직할 수 있는 기념품을 찾는데, 어떤 게 있어요?” “그러세요? 축하드려요.” 나는 현대적으로 고안된 액세서리 부적 용품이 걸려 있는 매대로 그들을 안내한다. 진열대에는 갖가지 액세서리 부적 용품들이 걸려 있다. 그들은 이것저것 가늠해보다 그중 하나를 고른다. “언니, 이걸로 할게요.” 그들이 고른 것은 나비 문양의 매듭 핸드폰 줄이다. 날개 사이에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옴(범어)자가 새겨져 있다. 옴이란 길상의 뜻을 지닌다. 전통 문양인 나비 그림에 상감기법을 적용한 앙증맞은 부적이다. “나비 문양이네요. 나비는 기쁨과 행복 그리고 아름다움을 상징한대요. 게다가 사이좋은 연인이나 금실 좋은 부부를 상징하기도 하구요.” “그래요? 그럼 우리가 잘 고른 거네요, 호호.” 풋풋한 연인들이 싱그러운 웃음을 떨어뜨려 놓고 나가자 마음 한곳이 공허해졌다. 나는 콤팩디스크를 켰다. 오카리나의 잔잔한 소리가 가게 안을 흘렀다. 혼자 있을 때면 자주 듣는 음악이다. 나는 눈을 감고 향기로운 소리에 잠겨 들었다. 짙고 푸른 숲이 보이고 맑은 계곡물 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가난한 저녁을 먹고 달빛 맑은 산중에서 도란도란 자연과 대화하는 소리. 때로는 별빛 아래에 앉은 외로운 목동의 피리 소리 마냥 멜로디가 귓가에 들려왔다. 주전자에 물을 끓여서 찻잔에 부었다. 계산대에 앉아 한 모금 들이키고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눈발이 제법 굵어져서 분분히 날리고 있었다. 집안일 외엔 다른 일이라곤 전혀 해 본 적 없던 내가 10년 전에 불교용품점을 차리게 된 까닭은 불의의 화재 때문이다. 그 화재로 인해 남편은 세상을 떴다. 남편을 빼앗아간 그 화마의 기억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악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내 마음 어느 한켠에는 여전히 남편과의 마지막 순간이 스냅사진처럼 뚜렷하게 찍혀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남편이 내 곁에 존재하는 듯 그의 부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환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남편을 빼앗아가 버린 그 악몽의 기억이 스르르 떠올랐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자동차 딜러였던 남편은 여느 날처럼 출근 준비를 했다. 새로 다려놓은 하얀 와이셔츠에 내가 생일 선물로 사 준 넥타이를 맸다. 그리고는 셋집 빌라 이 층 계단을 바쁘게 내려갔다. 부지런함이 몸에 밴 남편은 남보다 항상 먼저 출근을 했다. 또한 가장의 책임감 때문인지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성실함 때문인지 남편은 동기들보다도 먼저 승진하는 기쁨도 누리기도 했다. 잠시 뒤 남편이 투덜거리며 다시 계단을 올라왔다. 자가용 바퀴가 펑크 났다고 했다. 아무래도 전철역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날씨가 풀렸다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한 날씨여서 나는 남편에게 외투를 한 겹 더 입혀주며 잘 다녀와요, 라고 하며 생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잘 다녀와요, 라고. 그리고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킨 후에 청소를 하며 TV를 켜는데, 뉴스 속보가 자막으로 떴다. 오전 9시 경 ㅇㅇ역 전철 내에서 50대 남성이 플라스틱 통에 든 휘발유에 불을 붙인 뒤 객실 내에 던져 차량 내부를 완전히 전소시켰다는 뉴스였다. 뉴스 자막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ㅇㅇ역은 남편이 종종 전철을 타고 회사에 출근할 때 이용하는 전철역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범인의 방화시간과 남편의 출근 시간을 되짚어보았다. 9시 경이면 남편은 이미 회사에 출근해서 근무를 하고 있을 시간이다. 남편은 보통 회사에 한 시간 정도 일찍 출근하기 때문에 화마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남편의 직업상 외근이 잦은 업무여서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그의 휴대폰에 전화를 해 보았다. 그런데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음성만 줄곧 들려왔다.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계속 통화 중이더니 겨우 연결이 되었다. 저쪽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사모님,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김과장님이 9시 경에 ㅇㅇ역 방향으로 외근을 나갔다고 합니다. 저희도 지금 연락이 안 돼...‘ 나는 저쪽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전철 화재는 내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남편의 시신은 화염 속으로 사라져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너무나 큰 충격에 오열과 통곡을 하며 까무러치기를 반복했다. 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빙의 상태로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넋을 놓고 살았다. 살아도 산 게 아닌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남편은 꿈속이든 현실이든 가릴 것 없이 언제든지 내 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우리가 연애할 때 서로 손을 꼭 부여잡고 마음 졸이며 봤던 이라는 영화가 문득 떠올랐다. 예기치 못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슬픔에 잠긴 한 여자와 그런 여자를 두고 이승을 떠나지 못한 한 남자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감동적인 영화였다. 우린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눈물을 글썽이며 가슴 저릿하게 관람했었다. 그런데 그 영화가 몇 년 후 내 얘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편을 잃은 그 도시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내가 어느 정도 사고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고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을 무렵. 친오빠의 도움으로 수원으로 이사한 뒤 ’종로불교사‘라는 가게를 열었다. 친오빠는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불교용품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가게를 연 후로 나는 남편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살아왔다. 행여 힘든 일이 생기면 나 자신이 나약해질까 두려워서 일부러 강해지려고 노력했다. 창밖에는 여전히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리고 있었다. 가게 앞에 서 있는 남천나무에도 조용히 눈이 쌓여갔다. 붉게 물든 채로 말라버린 남천나무 이파리들은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어도 떨어지지 않고 나무에 꼭 붙어있다. 나는 시선을 당겨 계산대 끝에 놓인 모래시계를 발견했다. 유리로 된 호리병 모양의 입구가 위아래로 마주 보게 붙어있다. 그 안에는 보라색 모래 알갱이가 들어있다. 모래시계를 거꾸로 세우자 보라색 모래 알갱이가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듯 모래 알갱이들이 시간을 거슬러 쌓인다. 모래시계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보니 남편을 떠나보낸 지 5년쯤 후에 문득 내 앞에 나타난 한 남자가 떠올랐다. 평소 친한 언니의 소개로 알게 된 남자다. 언젠가 그 남자와 애들이랑 커다란 모래시계가 있는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사 온 기념품이다. 피차 서로 미워해서 헤어진 게 아니어서 추억이 깃든 모래시계를 굳이 버리지 않고 남겨두었다. 초혼일 때는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크고, 재혼일 경우에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더 크다,라고 어느 심리학자가 말했던가. 만약 다시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한 남자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될까. 아니면 아이들의 의견을 따라 지금처럼 혼자의 삶을 선택하게 될까. 지혜롭게 사랑하고 냉정하게 판단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행복이다, 라는 명제를 어느 책에선가 읽었지만, 나는 여전히 내 운명에 대해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운명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바꾸기 나름일까. 여전히 나는 홀로서기라는 무거운 숙제 앞에 주눅이 들곤 한다. 그 남자는 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은혜 씨를 향한 사랑만큼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자신도 몇 년 전 이혼이라는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수수하고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그의 첫인상에 호감이 갔다. 그 남자가 싫지는 않았다. 아니, 그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나도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는 결혼을 전제로 종종 만남을 가졌다. 남자가 모 문예공모전에서 상을 받았을 때 나는 누구보다도 기뻐했고 축하를 건넸다. 그날 밤 우리는 수상의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격렬하고도 뜨거운 사랑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사랑의 증표로 남자에게 새 자동차를 선물했다. 자동차 키를 받아든 남자는 감격하며 자신은 여태까지 한 번도 자동차를 소유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한다고 다 결혼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신은 인간에게 그렇게 호락호락 않다는 걸 알았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은 그 남자에게 매우 호의적인 데 반해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은 은근히 적의를 품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어쩌면 낯선 남자에게 엄마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심리가 깔려있는 것 같았다. 그런 심리가 은연중에 나타난 날이 있었다. 한번은 다 같이 어느 공원에 나들이 가는 중이었다. 그날따라 비를 뿌렸는데 자꾸 앞 유리창에 성에가 끼면서 뿌예졌다. 아직 새 차에 적응하지 못한 남자는 어떻게 성에를 제거하는지를 몰라서 무척 당황해했다. 그 와중에 뒷좌석에 탔던 아들이 괜히 심통을 부렸다. 남자는 차량 조작법을 몰라 당황하던 터라 아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풀이를 했다. 그 순간 왠지 모를 불안감이 머리를 스쳤다. 과연 내가 저 남자를 선택한 것이 잘한 일일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들기도 했다. 내가 가끔씩 남자를 만나는 동안 유독 예민해진 아들이 은근히 속을 끓였다. 어느 날은 밥을 먹지도 않고 짜증을 부리는가 하면 예전에 안 하던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아들이 한편으로는 안 되어서 하루는 잠들기 전 나란히 누워서 대화를 나눴다. “엄마, 그 아저씨랑 함께 사는 거야?” “왜? 그러면 안 돼?” “나, 그 아저씨 싫어. 나는 엄마랑 오래오래 살 거야. 엄마, 그 아저씨랑 살지 마. 알았지?”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며 뭔가 설움 같은 게 울컥 치밀어서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엄마는, 아무하고도 안 살아. 우리 아들하고만 살 거야.” 나는 아들을 꼭 껴안아 주었다. 아들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내 품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기어코 사단이 나고 말았다. 한날은 잠시 놀러왔던 남자는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거실에서 깜박 낮잠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밖에서 들어온 아들이 그걸 보고는 안 그래도 꼴보기 싫었던 터라 마침 잠자고 있던 남자의 머리통을 냅다 발로 밟아버렸다. 남자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듯 너무 황당하고 화가났다고 했다. 어찌 생각하면 순수한 아이로서는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이었지만, 사랑하는 엄마를 빼앗아가는 남자가 오죽 미웠으면 그랬겠는가, 싶기도 했다. 남자는 어린아이의 돌발적인 행동에 무척이나 당황하기도 하고 실망해서는 그날 이후로 발길도 뜸하다가 자동차를 돌려주는 것으로 관계를 정리했다. 그렇게 그 남자와 사이가 멀어지고 나니 다시 예전처럼 되돌리기는 쉽지가 않았다. 아마도 남자도 자신의 혈육이 아닌 두 아이를 감당하며 어찌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 후로 그 남자와는 가끔씩 안부를 묻는 친구 사이로 남기로 했다. 최근에 그 남자로부터 시집이 배달되었다. 등단 후 출간한 첫 시집이라고 했다. 나는 가만히 그의 시집을 펼쳐들었다. 모래시계의 모래 알갱이들이 거의 다 흘러내릴쯤 유리문에 달린 방울 소리를 짤랑거리며 누군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고개를 돌려보니 천궁 보살이다. 보살은 올해 쉰 줄로 머리가 벌써 반백이다. 생머리를 뒤로 빗어 넘겨 쪽을 쪘다. 굿이 있는 날이면 가게에는 가끔씩 들렀다. 그는 늘 피곤한 기색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가격을 흥정할 때도 고갯짓으로 거의 다 하곤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쉽게 속내를 보인 적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말해야 될 때도 필요한 말이 끝나면 도로 입이 닫힌다. 나는 예의 밝은 표정으로 인사말을 건넸다. “보살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 “차 한 잔 드릴까요?” 보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탁자에 앉았다. 그날따라 보살은 더욱 초췌하고 피곤해 보였다. 나는 차를 타서 보살에게 건네고 곁에 앉았다. 볼륨을 줄인 오카리나 소리가 가게 안을 잔잔히 흐르고 있다. 보살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입에 댔다가 뗐다. “부적이나 한 장 받을까 하고….” “부적이라면 보살님도 쓸 수 있지 않아요?” 사실 웬만한 무속인들에게 부적은 필수여서 대개가 다 직접 써서 판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저 어깨너머로 배운 내게 부적을 써 달라니. 나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부적이라면 신통력이 있는 무속인들의 부적을 더 높이 치기 때문이다. 무속인 중에도 세습무인 숙무와 신내림을 받은 강신무가 있는데, 특히 강신무의 부적이 더 영험하다 하여 부르는 게 값이다. 천궁보살도 내 짐작으론 강신무降神巫임에 틀림없다. 일전에 어느 손님이 천궁보살한테 부적을 받은 거라면서 쓴 지 오래된 부적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흔히 보는 부적이 아니라 자동 기술된 검은색 글씨였다. “나, 부적 안 쓰네.” “아니, 부적을 안 쓰다니요?” “…….” “아무렴, 제가 쓴 부적보다야 보살님이 쓴 부적이 훨씬 더 영험하지 않아요.” “영험은 무슨...우리 집 영감이 엊그제 죽었네. 그래서 저승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부적 보시나 하려고.” “그렇다면 영감님을 위해서 더욱 부적을 쓰셔야죠.” “급살 맞을 냥반….” 보살은 퀭하게 들어간 눈언저리를 비비며 물기를 닦았다. 나이에 비해 훨씬 늙어 보인다. 그동안 마음고생도 어지간히 한 것 같아서 측은한 생각마저 들었다. 남편과 살아오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을 보살의 심정을 어느 정도 헤아릴 것 같다. 어쩌면 보살의 마음이 시린 하늘에 떠 있는 조각달처럼 한없이 쓸쓸하리라. 남편이 떠난 이후에 내게 하늘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길을 걷다가도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면 마치 남편이 손짓하는 듯한 환영. 꿈속을 찾아온 남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 눈을 뜨면 문득 혼자란 생각에 하염없이 베개를 적시던 눈물. 내 안에 간직된 남편이라는 슬픈 단어. 신의 시샘을 받은 것일까. 남편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려고 내게 많은 사랑을 안겨주었는지도.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힘들게 결혼한 만큼 남편은 나를 더욱 아껴주었지. 그런 남편의 따뜻한 품에서 나는 온실 식물처럼 살았다. 쉬는 날이면 나를 데리고 드라이브하는 게 취미인 듯, 바다로 가서 개펄을 파헤치거나 산을 오르기도 했다. 한 번은 산을 오르다 토끼풀이 수북이 우거져 있는 걸 발견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네잎크로버를 찾기로 했다. 먼저 내가 한 잎을 찾자 남편도 곧이어 찾았다. 그리고는 네잎크로버가 잇따라 발견되었다. 남편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행운이 줄줄이 오려나 보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행복했던 시간들. 남편은 발견한 네잎크로버를 행운의 부적이라며 책갈피에 소중히 끼워 두었다. 실내를 흐르던 오카리나 멜로디가 다음 곡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보살을 향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영감님이 생전에 보살님한테 잘못한 게 많으신가 보네요?” “웬수도 그런 웬수가 없지. 불쌍하기도 하고….” 목이 타는 듯 보살은 손에 든 찻잔을 입에 가져가 길게 들이키고 한숨을 내쉬었다. 윤기를 잃은 반백의 머리가 빗질을 자주 하지 않아서 부스스 일어나 있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보살이 부적을 쓰지 않을까. 보통 무속인들은 굿이 없을 때는 사주를 봐주거나 부적을 써서 생업을 이어간다. 더러는 식당이나 상점을 하기도 하지만. 보살은 찻잔에서 입을 떼고 헛기침을 한 뒤에 목청을 다듬었다. “우리 집 냥반이 젊었을 적부터 내 속께나 썩였지. 아들을 하나 낳고 둘째를 가지려는데 어떤 영문인지 들어서지가 않더구먼. 그래서 외아들을 금쪽같이 여기며 키웠네. 그런데 원래 난봉기질이 있던 냥반이 슬슬 바람을 피우더란 말일세. 그래서 바람기를 잡으려고 점쟁이 집에 가서 부부금슬이 좋아지는 애정 부적을 샀네. 부적은 양과 음이 조화를 이루어야 효험이 있잖은가. 그래서 두 장을 받아서는 한 장은 꼭 접어서 영감 바지춤에 몰래 숨겨놓고 또 한 장은 베개 속에 넣었지. 그런데 부적이 효험이 없는지 이 냥반의 바람기는 갈수록 심해지더구먼. 그래서 다음번엔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서 비방을 물어봤네. 남편 바람기를 잠재우는 데는 여우자궁 만큼 좋은 부적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요새 살아있는 여우도 보기 힘든데 어디서 여우자궁을 구하냐니까. 다 구하는 수가 있다며 알려주데. 중국을 드나드는 보따리 상인들이 몰래 사가지고 들어온다는구먼. 그래서 얻기 힘든 여우자궁을 하나 얻지 않았겠나. 그리고는 그것을 내 속옷에 몰래 숨기고 있었지. 그러고 한 며칠 지나니까 아닌 게 아니라 이 냥반의 바람기가 수그러들더란 말일세. 집에도 곧장 들어오고 사업차 출장 간다는 핑계도 줄어들고 말이지. 그게 정말 효험이 있어서 그런 건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바람기는 없어졌네.” “아휴, 보살님. 사내들은 젊을 적에 한 번씩 다 바람을 피운다잖아요.” 남편에게도 그와 비슷한 일이 한 번 있었다. 한번은 빨래를 하려고 남편 바지주머니를 뒤지는데 쪽지가 하나 나왔다. 업무적인 메모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아닌 것도 같고. 암튼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건 메모 내용이 아니라 글이 적힌 메모지였다. 그것은 일상적인 메모지가 아니고 하트 그림이 그려진 종이였다. 저녁에 퇴근하자 대뜸 당신, 어디 숨겨놓은 여자 있어요? 하고 물었다. 남편은 뜨악한 눈빛을 하다가 이내 웃으며, 당연히 있지. 여기 당신, 하고는 얼버무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남편이 뭔가 숨긴다 싶어 감추고 있던 메모지를 얼굴에 디밀었다. 메모지를 본 남편은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아, 그거! 하면서 고백을 했다. 며칠 전 출장길에 우연히 결혼 전 사귀었던 여자를 만났다고. 그리고 함께 차를 마시고 헤어질 때 여자가 남편에게 메모지를 건네준 거라고. 나는 남편에게 이딴 메모지를 받지 말라며 못을 박고는 씩씩댔던 기억이 났다. 보살은 눈이 약간 침침한 듯 눈을 한번 비비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일별했다. 어젯밤에 잠을 옳게 못 잤는지 눈동자도 붉게 번져있었다. 찻잔에 남은 차를 마저 입에 붓고는, “그것뿐이면 말을 안 하지. 이 냥반의 바람기도 좀 잠잠해지고 사업에 열심이다, 싶었는데 덜컥 부도가 나버렸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 앞으로 열차가 지나다니는데, 철로에서 놀고 있던 외아들이 열차에 치여 죽었어. 부도난 이후로 이 냥반은 도망다니느라 기별도 없고, 외아들은 죽고. 나는 실성하다시피 해서 사는 걸 작파했지. 그러다가 종종 부적을 받으러 드나들던 무당을 찾아가서 죽은 아들 넋이나 달래주려고 굿을 부탁했어. 그리고 굿판이 한창 열리고 연신 비나리를 하는데 천궁에서 온 신령神靈이 그예 턱 하니 내 몸주로 들어와 버렸다네. 그때가 아마 20여 년 전이었지.” 물끄러미 얘기를 듣고 있는 내 마음도 덩달아 숙연해졌다. 늘 입을 닫고 살아가는 보살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게다가 가게에 올 때마다 늘 추레한 옷차림. 영감님의 행방불명과 외동 아들의 불의의 사고. 아마 보살은 죄인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소중한 자식을 잃고 녹록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저 앙상한 가슴에는 얼마나 깊은 한을 담고 있을까. 부모가 죽으면 산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데, 생떼 같은 아들을 잃은 어미의 슬픔을 그 무엇에 비할 수 있겠는가. 살아있는 날이 어쩌면 죽는 일보다 못한 형벌의 삶이리라. 내 삶이란 것도. 남편이 남기고 간 흔적을 매일 마주쳐야 하는 슬픈 날들. 아침이면 눈물로 흥건히 젖어있는 베개를 안고 또 흐느껴야 하는 텅 빈 시간. 남편이 여느 날처럼 일찍 일어나는 습관처럼, 불쑥 화장실에서 나올 것만 같은 착각에 물끄러미 화장실 문을 응시하기도 했다. 다른 남편들은 반찬 타박도 잘한다는데, 어떻게 된 건지 음식솜씨도 별로인 내가 밥상을 차려주면 꾸역꾸역 군소리 없이 잘도 먹었다. 한번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그때는 정말 남편이 귀엽게 보여서, 일부러 맵고 짜게 국을 끓였더니 내 입맛이 변했나,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남편이다. 남편과 사내 결혼한 내가 잠깐 직장 생활한 것 말고는 결혼한 이후 줄곧 살림만 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서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남편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데, 하며 문득문득 며칠 전의 아침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침울한 아이들을 달래 학교에 보내 놓고 힘없이 앉아 남편의 체취가 밴 가구들을 만져보다 울컥 슬픔이 복받쳐오기도 했다. 가난한 우리는 소박한 결혼식을 하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신혼여행을 설악산으로 갔다. 마침 눈이 내려 산길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등산로에 사람들이 아무도 없을 때 나를 덜렁 업고 가면서 내 와이프가 보기보다 무겁네, 하며 놀려댔었지. 엊그제 남편의 쉰 번째 생일날, 생일상에 밥과 미역국을 떠 놓고 그의 부재에 난 또 얼마나 흐느꼈던가. 남편은 결혼하고 십 년간 내 곁에 머무르다 떠났다. 그리고 홀로 견뎌온 십 년의 시간. 그 시간 동안 가끔씩 모든 게 허무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살아있으면서 이렇듯 무감각하게 세상을 응시하는 지금의 나. 어떤 날은 일이 손에 안 잡혀 매사에 흐느적거리다 하루해를 넘기기도. 그럴 때면 거울을 들고 또 다른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치 깨진 거울 조각 속에 내 얼굴이 들어 있는 것처럼. 그 안에 조각난 얼굴이 슬픈 눈으로 나를 지그시 건너보았다. 언젠가 남편과 함께 동해 바닷가로 드라이브 갔던 날, 처연한 장면을 봤다. 국도 한복판에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차량들이 쌩쌩 달리며 일으키는 바람에 하얀 털이 날리고 있었다. 만지면 아직은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을 것 같은 들개의 주검. 나는 문득 죽어있는 들개의 몸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순간 내 손끝을 타고 끔찍한 소름과 시체의 온기가 동시에 전해져 온 것 같아 몸을 가늘게 떨며 움츠렸다. 사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차량들이 들개의 몸을 타고 넘어갔다. 그럴 때마다 죽은 들개의 머리가 들썩거렸다. 죽기 전까지도 한 발만 더 뛰면 바퀴에 치여 죽는다는 것을 모른 채 앞으로만 달렸을 미련한 짐승. 어쩌면 내 삶도 길 위에 죽어있는 그 미련한 짐승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욱한 존재. 어느 순간 내 앞에 깊은 슬픔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달려오지 않았던가. 남편이 책갈피에 끼워놓은 네잎크로버의 행운이 늘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여기듯. 슬픔과 행복은 야누스의 얼굴처럼 둘이 아님을, 남편을 잃고서야 가슴이 저리도록 와 닿았다. 전철 화재사건 뒤 처참한 내 심정은 길에서 죽은 개의 사체 같았다. 개의 몸뚱이 위로 차바퀴가 수없이 지나다 보면 나중에는 털가죽만 남듯, 남편을 잃고 한동안 방황한 내 삶은 생명을 잃은 털가죽이나 다름없었다. 남편이 바닷가 큰바위에 서서, 우리도 여기 온 기념으로 글을 새겨두자고 했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싫어할 텐데, 하며 말렸다. 그러나 남편은, 옛날 선사시대에 바위에 그렸던 암각화라는 것도 일종의 행운을 비는 부적이래. 그때 사람들도 바위에 그림을 새기며 풍요를 빌었을 거야. 그리고 바위에 새긴 동물마다 상징하는 그들의 소망도 깃들어 있는 거래, 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마침 색깔이 나는 작은 돌멩이를 찾아서는 글을 새기기 시작했다. 우리 가정에 사랑과 행복이 가득 넘치기를. 현우와 은혜 다녀감. 글을 다 쓰고 난 남편의 환하게 웃는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이들과 함께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하는 많은 시간. 어느 순간 남편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아이들과 나를 지켜보리라는 느낌이 불현듯 들 때도 있다. 언뜻 등 뒤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시선. 얼핏 뒤돌아보면 무료한 정물 풍경만이 헛헛한 가슴으로 밀려들던 상실감에 몸을 떨기도.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유독 아빠를 잘 따랐다. 퇴근한 남편과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장난을 치거나 할 때면 은근히 질투가 생길 정도였으니까. 짧은 시간 동안 남편은 나와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안겨주고 떠난 것 같다. 평생 나누어 줄 사랑을 한꺼번에 다 주고 가려는 것처럼. 시난고난한 삶을 살아 온 보살은 나이에 비해 주름도 많이 잡혀 있었다. 그 모진 세월을 저 보살은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을까. 보살은 눈언저리로 흘러내린 몇 올의 머리카락을 갈퀴 같은 손으로 쓸어 올리더니, “그렇게 집안 폭삭 망하고 팔자에도 없는 무당이 되었지. 사는 게 힘들 때는 한 많은 이 세상과 연을 끊으려고 골백번도 마음먹었지. 그래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고, 모진 게 목숨인가 벼. 이를 악물었지. 죽을 때 죽더라도 이 냥반이 집에 돌아오는 것 보고 죽겠다고. 그래서 내가 배운 짓이라고는 푸닥거리밖에 없으니 굿판을 열거나 부적을 쓰면서 연명했네. 시난고난 갖은 고생하며 사는데 한날은 파출소에서 깜깜무소식이던 그 냥반 소식이 들려오더란 말이여. 웬 부랑인이 나를 찾더라고 하면서. 한달음에 가보니 허, 이 냥반이 거지꼴을 하고 쭈그려 앉아있는데, 우리 집 영감이 맞는가 싶더구먼. 가만히 보니 눈도 좀 이상해 보이는 게 정신도 온전치 않더라니. 옛날에 그 번지르르하던 행색은 어디 가고 꼭 비렁뱅이 짝이었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조금 전까지 사락사락 날리던 눈발이 어느새 멎었다. 그 눈발은 보살의 앙상한 가슴속에서 여전히 날리는 것 같다. 황량한 들판 위로 가뭇없이 날리는 눈보라처럼. 보살의 눈동자가 텅 비어 보인다. 생기라곤 한 가닥도 없어 보이는 그런 눈빛. 예전에 내 눈빛이 그랬었지. 멍한 눈으로 앉아있는 날들이 많았다. 공원에서 낯선 이가 앉았다 간 빈자리도 쓸쓸해 보이는데, 하물며 가장 사랑하는 남편의 빈자리임에랴. 혼자인 시간에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면 햇빛 쨍쨍한 대낮이 걸려 있고, 눈을 감으면 내 안에는 굵은 눈발이 날렸다. 하루하루가 혼돈과 혼란스러움의 연속이었다. 행여 시장이라도 다녀오다 아는 이를 마주치면 왠지 미워지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도 저이와 나는 행복의 저울질을 하지 않았던가. 우리 형편과 비슷한 집이나 조금 잘 사는 집의 행복을 저울질하며 그렇게.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 오면 일부러 돌아가기도 하며 내 처지에 대해 원망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나는 작은 일에도 신경질을 내거나 분노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한없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전에는 간혹 싱크대 밑에 서식하던 바퀴벌레라도 스멀스멀 기어 다니면 징그러워 비명을 질렀는데, 언젠가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꾹꾹 눌러 죽이는 내 모습에 스스로도 놀랐다. 남편을 잃은 내 마음은 늘 공허했다. 부적 쓰는 법을 배운 뒤 처음으로 남편의 넋을 위해 붓을 잡던 날. 나는 한 획도 쓰지 못하고 펼쳐진 부적 종이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종이 위에 남편의 얼굴이 어른거려 눈물만 떨어뜨렸다. 나는 붉어진 눈언저리를 닦고 모질게 마음먹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 악착같이 한번 살아보리라. 만약 신의 시샘이라면 멋지게 살아서 초라해진 내 삶을 복수하리라고. 그리고는 다시 붓을 잡고 온 기력을 쏟아 부적을 썼다. 나는 고즈넉이 난로를 바라봤다. 여전히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열기로 가게 안이 따뜻해졌다. 혼자가 된 이후 나는 한동안 불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불을 보면 자꾸만 남편이 떠올랐다. 저 뜨거운 불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남편의 모습. 그 악몽 같은 환상에 사로잡혀 꿈속에서도 남편은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나타나곤 했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남편과 내가, 그리고 단란했던 우리 가정이 송두리째 불길에 휩싸였던 그날의 악몽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어느덧 오카리나 소리도 멎어있었다. 보살은 회한이 밀려오는 듯 눈을 잠깐 감았다 떴다. 다시금 눈에서 물기가 나오는지 손등으로 살짝 훔치더니,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집에 돌아온 냥반이 그래도 핏줄은 보고 싶었는지 아들을 찾더라니. 벌써 저 세상으로 간 아들이 살아올 리는 없고. 아들이 열차에 치여 죽은 걸 알고는 점점 더 정신이 오락가락했지. 그래서 굿판도 열어 푸닥거리도 해보고 부적을 써서 집안 곳곳에 붙여도 봤지만 효험이 없더구먼. 나중에는 병이 깊어져 할 수 없이 병원에 입원을 시켰네. 그런데 며칠 후에 이 냥반이 병원에서 사라져 버렸다네. 다시 찾고 보니 이 양반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큰 사고를 내지 않았겠나. 그 사고로 온몸에 중화상을 입고 여태까지 식물인간과 다름없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네. 그러다가 결국 저승사자가 불러서 엊그제 저 세상으로 갔네.” “참 안 되셨네요. 그런데 영감님이 무슨 사고를 냈는데요?” “급살 맞을 냥반이 글쎄, 귀신에 홀렸는지 전철 안에다 불을….” “전철요? 아니, 영감님이 전철에다 불을 냈다구요?” “…….” 나는 너무 놀라 동공이 저절로 크게 열렸다. 혹시 보살의 말을 잘 못 들었나 싶었다. 그날의 악몽을 잊기 위해 그곳에서 이사를 왔는데, 설마 그 사건의 방화범이 지금 내 앞에 있는 보살의 영감님이라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내 볼이라도 꼬집어보고 싶었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엉키어버린 듯 복잡해졌다. 나는 보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살의 얼굴이 많이 일그러져 있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지 입매가 씰룩이고 눈썹이 파르르 떠는 것 같았다. “그 냥반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뒤로 부적을 끊었네. 천벌을 받아도 시원치 않을 여편네가 무슨 낯으로 부적을 쓰겠나. 죽는 날까지 그저 죄인의 몸으로 살아야지….” 고개를 세우고는 남편의 부적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쓴 남편의 부적을 들고 유골이 안치된 납골당으로 갔다. 화재 현장에는 여러 유해가 뒤엉켜있어 그 일부를 유골함에 담아 납골당에 안치했다. 유골함에 부적을 붙이고 돌아오는 길에 여러 무리의 새 떼가 황혼의 서편 하늘가를 나는 게 보였다. 나는 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새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산과 하늘의 경계선이 흐릿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하늘 한편에서는 노을이 스러져 가고, 아래로는 완만한 능선이 아름답게 보일 무렵이었다. 새들은 황혼을 날면서도 서두름 없이 날고 있었다. 뒤 쳐진 새 한 마리가 바삐 무리를 쫓고 있었다. 나는 새들이 서편 하늘로 가뭇없이 사라질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들이 사라지고 난 후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편안해진 것도 같았다. 천궁 보살이 가게를 나간 뒤 시계를 보니 정오를 막 지나고 있었다. 나는 멍해진 기분으로 줄곧 앉아있다가 창밖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멎었던 눈발이 다시 내리고 있었다. 나는 깨끗한 부적지를 꺼내어 조심히 유리판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복잡한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남편 얼굴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희미하게 웃는 것도 같았다.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뒤 망자의 부적을 정성껏 써 내려갔다. •수상소감 - 최우수상 단편소설 박도열 “닐 암스트롱처럼 아무도 밟지 못한 미지의 땅에 소설가로서 첫발자국을 남기고 싶어” 코로나 19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저에게 뜻밖에 소설 당선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게는 올 한해 최고의 선물이 되겠습니다. 제가 소설에 관심을 가진 지는 오래됐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여건과 생업 때문에 소설 쓰기에 집중적으로 매달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최근 오랫동안 하던 일을 접고 비로소 소설 쓰기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소식을 접하고는 응모를 하게 됐습니다.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으며 다방면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십 대에는 감동적인 소설을 읽고 나면 볼펜으로 필사를 해 보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저의 경험을 토대로 여러 편의 소설 습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시에도 관심이 많아서 초기에는 한동안 시에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모임에 종종 참석하게 됐는데, 그곳에서 유명한 소설가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분이 평소 저의 시를 보셨는지 하루는 시보다는 소설 쪽에 더 어울린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도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분 말씀을 듣고 나서 소설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소설가라면 으레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오래도록 기억되는 작가로 남는 게 가장 큰 소망이겠습니다. 저 또한 그런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겠습니다. 더 욕심을 부려본다면 달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처럼 아무도 밟지 못한 미지의 땅에 소설가로서 첫발자국을 남기고 싶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제게는 아픈 손가락들이 있습니다. 늘 무거운 짐으로 제 가슴에 내려앉아 있습니다. 그 아픈 손가락들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 2021-08-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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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세 이하 어르신를 위한 네이버‧카카오 잔여백신 예약 방법과 Q&A
- 오늘(27일)부터 60세 미만 어르신들도 네이버와 카카오톡 앱이나 웹을 이용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잔여백신을 예약해 접종할 수 있다. 코로나19 예방접종대응추진단은 27일 오후 1시부터 네이버와 카카오톡 앱과 웹을 이용해 잔여백신을 예약할 수 있으며, 당분간 시범적으로 운영해 부족한 점을 보완한 뒤 6월 9일부터 정식으로 운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실제로 예약할 수 있는 오후 1시 이후에 네이버와 카카오톡 앱을 설치하고, 잔여백신 예약을 시도해봤다. 먼저 이미 설치된 카카오톡을 이용해 오후 2시에 접속했다. 그런데 알려진 내용과 달리 카카오톡 아래에 있는 ‘#’ 버튼을 누르고 이동해도, 상단에 뉴스와 코로나19 메뉴만 나올 뿐 ‘잔여백신’ 메뉴는 뜨지 않았다. 이유는 접속자 폭증으로 서버가 다운돼서다. 이에 카카오톡은 잔여백신 메뉴를 빼고, 복구에 나서 오후 3-4시쯤에 다시 오픈했다. 브라보가 다시 접속을 시도한 오후 4시에는 정상적으로 ‘잔여백신’ 메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잔여백신 메뉴를 선택하면 ‘30세 이상만 예약할 수 있으며, 백신은 아스트라제네카(AZ)만 신청할 수 있다’는 내용과 ‘예약 후 방문하지 않으면 잔여백신 예약이 불가능해진다’는 안내문이 나온다(①). ‘모든 내용을 확인하였습니다’를 선택하고 잔여백신 조회하기를 주변 지역 지도에 있는 접종 병원에 잔여백신 상황이 표시된다. 카카오톡은 위치정보를 확인하지 못할 경우 광화문 지역 지도를 기본으로 보여준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위치한 동작구 대방역 부근으로 지역을 이동하니, 대방역에서 가까운 성애병원이 나온다. 하지만 여기도 잔여백신은 모두 ‘없음’이다(②). 아마도 첫날이라서 많은 이용자가 접속해 시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빠르게 예약하지 않으면 순서가 오지 않는 선착순의 비애다. 그렇다고 잔여백신을 위해 계속 앱을 확인할 수는 없다. 이때는 지도에서 원하는 병원을 선택하고 ‘알림신청’을 하면 된다(③). 해당 병원에서 잔여백신이 생기면 알림신청을 한 신청자에게 알림을 보내는 방식이다. 이때도 가장 먼저 알림을 확인하고 신청하는 사람 순대로 잔여백신을 맞을 수 있으니 빠른 신청이 필요하다. 기자는 성애병원을 선택해 알림신청을 했다. 잔여백신 예약 뿐 아니라 알림신청에서도 본인확인과 카카오 인증서를 요구한다. 기자는 카카오 인증서를 이미 만들어 둔 상태여서 따로 인증서 만드는 과정은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카카오 인증서를 별도로 만들어야 한다(④⑤⑥). 네이버는 네이버 앱을 설치하거나 웹에서 ‘잔여백신’ 예약 관련 메뉴를 찾거나 검색창에 '잔여백신'을 검색해서 신청할 수 있다. 스마트폰으로 네이버 앱이나 웹 모두 아래로 조금 내리면 ‘잔여백신’ 메뉴를 찾을 수 있고, 4시까지는 검색창 바로 아래에 ‘잔여백신’ 메뉴를 확인할 수 있었으나, 예약 오류 발생과 서울의 경우 잔여백신 예약 없는 상황이어서 메뉴를 밑으로 조정한 것으로 보인다(①). 오늘 오후 1시 이후에 네이버를 이용해서 잔여백신을 예약해 정상적으로 예약됐다는 내용과 문자를 받은 시민들은 오늘 백신 접종을 기대했다. 그런데 예약 후 얼마가 지난 뒤 적지 않은 시민들은 병원으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오전에 백신을 다 소모했는데, 전산오류로 이런 내용이 반영되지 않았던 것 같다’는 내용을 병원 관계자들이 시민들에게 전했다. 시범 운영 첫날로 시스템 오류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에서 잔여백신 메뉴를 선택하면 카카오와 마찬가지로 알림사항을 안내하고, 아래에 잔여백신 예약하기 메뉴가 나온다(②). 이를 선택하면 위치정보 이용에 동의를 한 경우 주변 지역의 병원에서 잔여백신 수량을 알려준다(③). 지난해 마스크 대란 당시 약국에 마스크 구매 가능 수량을 알려줬던 방식과 매우 비슷하다. 네이버는 아래에 ‘잔여백신 보유 병원’ 선택 메뉴가 있어서, 이를 선택하면 숫자가 0인 병원은 아예 표시를 하지 않는다. 잔여백신만 있는 병원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다. 오후 2시 즈음에는 예약할 수 있는 병원이 없었다. 네이버도 동일하게 알림신청이 가능하다. 네이버는 ‘네이버 인증서로 인증’과 ‘휴대폰 본인인증’ 2가지 방법으로 본인을 확인한 뒤 알림신청을 받았다. 한 사람이 여러 번 신청하는 중복신청을 막기 위한 조치다. 잔여백신을 신청할 때도 한 병원에 신청하면 다른 병원에 신청할 수 없다. 또 잔여백신 예약을 하고 방문을 하지 않으면 역시 이후에는 예약을 할 수 없게 된다(④⑤). 이후 과정은 카카오와 거의 비슷하다. 기자는 이투데이 건물 부근에 있는 성애병원과 이영록내과의원 두 곳에 알림신청을 했다(⑥). 카카오 인증서와 네이버 인증서는 스마트폰 사용에 익숙하지 않는 50에 이상 어르신들에게는 복잡할 수 있다. 이런 분들은 자녀의 동무을 받아 진행하는 것이 빠르고 편리하다. 잔여백신 당일예약 Q&A Q 잔여백신은 왜 발생하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포장된 1개 백신(병) 당 10명 분량(도즈)을 접종할 수 있다. 하지만 1개 병을 개봉하면 최대 6시간 내에 사용해야 한다. 이 시간 안에 사용하지 못하면 ‘폐기물관리법’에 따라 폐기 처분한다. 또 예방접종을 예약한 시민이 접종기관을 방문하지 않거나 예진 시 접종이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하면 해당 인원 수만큼 접종하지 못하고 백신이 남게 된다. 이런 두 가지 경우를 잔여백신이라 한다. Q 잔여백신 어떻게 접종하나? 잔여백신은 의료기관에서 긴급하게 접종대상자를 찾아서 접종할 수 있다. 하지만 의료기관에서 미리 준비한 예비명단이나 내원한 환자나 보호자 등 적절한 대상자를 직접 찾지 못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 인근 접종기관에서 아스트라제네카 예방접종을 원하는 국민이 네이버와 카카오 관련 앱을 이용해 빠르고 간편하게 예약해, 당일 가까운 접종기관에 바로 방문해 접종할 수 있도록 했다. Q 잔여백신 상태를 조회하고 싶은데 가능한가? 잔여백신 정보는 네이버와 카카오톡 앱 등을 통해 접종기관 위치 및 잔여백신 현황을 지도로 조회할 수 있다. 네이버는 검색 창에 ‘잔여백신’을 입력해 검색하면 잔여백신을 조회할 수 있고, 카카오톡은 아래의 샾탭(#)에서 ‘잔여백신’ 메뉴를 선택하거나 카카오맵 앱을 통해 잔여백신을 조회할 수 있다. 카카오맵 앱은 앱 업데이트가 필요하고, 나머지 앱은 업데이트를 하지 않아도 된다. Q 잔여백신 정보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잔여백신은 접종기관에서 잔여백신 수량 정보를 질병관리청 코로나19 예방접종시스템에 등록한다. 그러면 이 내용이 네이버와 카카오 앱을 통해 보여진다. Q 접종기관에 잔여백신이 생겼다가 0이 됐다면? 잔여백신은 접종기관에서 등록과 동시에 당일예약을 받는다. 시민이 당일예약을 할 때마다 잔여백신이 줄어든다. 잔여백신 수량만큼 예약이 완료되면 잔여백신 수량이 0으로 표시되며, 그날은 더 예약할 수 없다. Q 잔여백신이 발생한 접종기관에 예약하는 방법은? 잔여백신 조회 지도에서 잔여백신이 발생한 접종기관을 선택한 뒤 ‘예약’을 누르면 유의사항 안내 뒤 당일예약 신청이 완료된다. 이때 예약자 인적사항을 확인하려고 본인인증을 요구한다. 네이버 인증서나 카카오 인증서를 미리 발급받아 두면 본인인증을 생략할 수 있다. Q 잔여백신이 있어 예약신청을 했는데 실패했다고 나온다면? 잔여백신은 발생과 예약으로 인한 차감이 실시간으로 이뤄진다. 예약 실패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나온다. - 예약 신청 시 잔여백신이 0인 경우 - 예약자가 이미 예방접종을 1회 이상 완료하여 예방접종시스템에 등록된 경우 - 예약자가 이미 사전예약시스템 등을 통해 접종예약이 완료된 경우 - 예약할 수 없는 30세 미만인 1992년 1월 1일 이후 출생자 - 잔여백신 예약을 했으나 취소하지 않고 접종하지 않은 자 - 해당 접종기관의 운영종료시간이 30분 이내로 남은 경우 Q 당일예약했는데 취소해야 하는 사유가 생긴다면? 잔여백신을 네이버나 카카오 앱을 이용해 당일예약을 하면 반드시 당일 접종기관 운영종료시간 내에 방문해 예방접종을 받아야 한다. 다만 불가피한 사유로 인해 접종기관 방문이 어려워질 경우 해당 의료기관에 전화해 예약 취소를 요청해야 한다. 예약 취소를 하지 않고 접종기관을 방문하지 않으면 신청자는 앞으로 네이버와 카카오를 이용해 잔여백신 당일예약을 할 수 없게 된다. Q 부모님을 대신 당일예약해 드리려면? 본인 명의의 스마트폰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당일예약은 불가능하다. 자녀가 부모님 스마트폰을 이용해 도와주는 것은 가능하다. Q 잔여백신이 발생하면 알림을 받을 수 있나요? 알림을 받을 수 있는 접종기관은 네이버와 카카오 앱에서 각각 최대 5개까지 신청할 수 있다. 선택한 접종기관에서 잔여백신이 새롭게 발생하면 네이버 알림과 카카오톡 지갑 채널에서 안내한니다. 잔여백신이 새롭게 발생한 것이 아닌 예약과 취소 등을 통해 증감될 때는 알림을 보내지 않는다. Q 알림이 오면 곧바로 예약할 수 있나? 알림 메시지에 당일예약할 수 있는 버튼이 포함돼 있다. 이를 선택하면 예약이 완료된다. 지도 형태 예약과 동일하게 처리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네이버 앱과 카카오톡을 이용해 알림 신청을 할 때 인증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가 인증이 불필요하다. Q 잔여백신으로 1차 접종을 하면 2차 접종은? 아스트라제네카 1차 접종을 완료하면 접종기관에서 예방접종 등록과 동시에 11주 후 동일한 접종기관에서 동일한 요일로 자동으로 2차접종을 예약한다. 다만 2차 접종 일정 과 기관을 바꾸고 싶을 때는 2차접종예정일 기준 1개월 전부터 가능하다. Q 아스트라제네카 1차 접종을 했는데, 2차 접종을 잔여백신 예약으로 가능한가? 잔여백신 예약을 통해 접종 가능한 사람은 1차 접종 대상자만 가능하다. 2차 접종은 잔여백신을 이용할 수 없다.
- 2021-05-27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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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 것 참 많은 산골짝 미술관…공주 임립미술관①
- 임립미술관으로 들어서자 대뜸 눈에 들어오는 게 봄꽃들이다. 나뭇가지마다 꽃 걸렸다. 하얀 꽃, 노란 꽃, 붉은 꽃들 소담히 만개해 살가운 눈짓을 보낸다. 산중의 4월은 통째 꽃 천지다. 저 멀리 산등성이에서도 벚꽃들이 아우성을 친다. 여길 보소! 날 좀 보소! 그렇게. 궁벽한 산골에 꽃 제전 벌어져 볼 게 둘이다. 꽃과 미술이 겹을 이룬 게 아닌가. 이런 미술관이 드물다. 순전한 자연 속에 들어앉은 미술관이다. 임립미술관은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 그러나 한번 왔던 사람들은 다시 찾아온다. 미술관 일대의 목가적인 전원 경관에 홀딱 반해서다. 사람은 자연 속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해진다. 때 묻은 마음을, 뒤틀린 생각을, 어찌해볼 길 없는 불안을 자연과의 해후로 헹궈낼 수 있어서다. 자연이 지닌 치유 능력. 이건 미술 작품이 주는 감동의 힘과 동일하다. 다른 게 있다면 자연은 ‘그냥 그렇게’ 날것으로 존재해 완전한 생태를 이루지만, 미술은 불완전한 인간의 간절한 꿈과 욕망으로 가공된 인위의 세계라는 점이다. 그러기에 미술이 자연과 맞먹을 길은 없다. 조물주의 영역에 있는 자연을 탐색하거나 탐닉할 뿐이다. 모든 미술은 궁극적으로 자연을 모방하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자연의 비밀을 염탐한 게 많은 미술 작품을 우리는 명작이라 부른다. 자연은 결국 예술의 어머니다. 그 고귀한 어머니가 여기에서 생동하는 숨결을 뿜는다. 숲의 저 속삭임에서 보들레르는 시를 건졌고, 밀레나 루소는 그림을 얻었다. 무성한 숲속의 미술관을 만난 건 행운이다. 임립미술관은 새 둥지처럼 안락하다. 어린 것을 껴안은 어미처럼 산이 보듬고 있어서다. 굳이 멋 부려 미술관을 치장하지 않아도 절로 그윽한 미감이 살아나는 환경이니 자리 한번 기똥차게 잘 잡았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에 있다. 충남의 제1호 사립미술관으로 서양화가 임립(77)이 1997년에 개관했다. 임립을 만나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그가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누룽지탕에 반찬은 달랑 김치 하나. 워낙 식성이 담백해 소찬 식사가 잦다고 한다. 이는 어릴 적 식습관에서 유래한 기호란다. 예전엔 흔히들 곤궁해 별로 올라온 것 없는 밥상을 받기 십상이었다. 그럼에도 그리운 게 어린 시절이요, 고향이다. 소음과 풍문이 들끓는 도시에서 화가로, 대학 교수로 활갯짓을 했던 그의 마음은 자주 흘러 고향으로 향했다. 눈에 아롱거리는 고향의 산천. 코끝에 감도는 고향의 흙냄새. 철없이 덤벙거리며 희희낙락 도랑에서 멱을 감고 가재를 잡던 기억이 야기하는 그리움. 마치 꿈속에 펼쳐지는 선경(仙境)처럼 고향의 풍정과 서정이 파랗게 살아나 남몰래 깊은 향수병을 앓았던 모양이다. 이건 원색적인 감정이라 억누르기 쉽지 않다. 결국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동심으로 기뻤던 유년의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풍진세상 가뿐히 떠나리라. 이런 생각으로 고향의 산골짝에 세운 게 임립미술관이다. 미술관의 눈, 푸른 호수 이 미술관의 모든 걸 둘러보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자그마치 2만여 평이나 되는 부지 안에 갖가지 시설이 산재해서다. 전시 공간만 해도 가마 형상을 본떠 지은 본관과 특별전시관 A·B·C동 등 넉 동이나 된다. 야외 대공연장과 소공연장, 조각공원, 도예체험관, 세미나실, 학예실도 구비했으며, 편의 시설로는 게스트하우스와 카페가 있다. 부지의 크기도 어마어마하지만 시설물의 수효로도 단연 독보적인 사립미술관이다. 임립이 쏟아부은 땀의 총량이 아마도 드럼통으로 여럿일 테다. 흘린 땀이야 그렇다 치고 자금은? 산중의 임자 없는 청풍명월이야 공으로 거저 얻는 것이지만, 개인미술관의 건립과 운영이라는 게 워낙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난해한 사업이다. 우리가 사립미술관을 귀하게 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임립은 꽤 잘나가는 화가다. 작품을 팔아 모은 자금을 미술관 건립에 썼다. 창작의 실력과 단단한 심지로 하고 싶었던 일을 기어이 해낸 셈이다. 코로나19의 해일은 미술관에도 들이닥쳐 불황이 만연했다. 아예 전시회를 열지 않거나, 미루거나 축소하는 미술관이 흔하다. 임립미술관은 여기에서 예외다. 전시장마다 기획전이나 상설전이 진행되고 있어 쌩쌩하다. 그래도 찾아드는 이가 드물어진 건 어쩔 수 없다. 산책과 소풍에 적격인 산경(山景)이 찬연하고, 다수의 미술전이 극진한 갈망으로 관람객들을 기다리지만 감염병의 횡포를 당할 재간이 없다. 미술관의 역할은 단지 그림을 보여주는 데에만 있지 않다. 미술과의 접촉을 유도해 삶의 흥미를 북돋우는 데에서 나아가, 누구나 화가일 수 있고 모든 것이 예술이라는 걸 일깨우기 위한 체험 프로그램의 가동 역시 미술관의 주요 책무다. ‘예술은 나의 신(神)’이라 주장하는 작가도 있더라. 그러나 희로애락으로 점철되는 일상의 고행과 눈물이 이미 예술이다. 그럼에도 예술 장르의 체험 기회가 없어 미술을 어렵다고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임립미술관은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찾아가는 미술관 프로젝트’ 등 다수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올가을 18회째 펼쳐질 ‘공주국제미술제’(총감독 임립) 역시 임립미술관이 야심차게 끌고 온 대승적 미술운동의 일환이다. 임립미술관의 푸른 눈동자랄까, 공간의 중심부엔 멋진 호수가 있다. 호숫가를 한바탕 거닐자니 낭만적인 상념이 가슴에 고인다. 이래저래 임립미술관에선 하품 한 번 할 겨를이 없다. < 2편에 계속 >
- 2021-05-10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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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걸음 더 들어가 구축한 ‘개그의 제국’
- 전해 들은 얘기가 있다. 개그맨 전유성(72)이 젊었던 날 친구들과 놀러 간 어느 해변에서의 일. 그가 별안간 바다로 걸어 들어가더란다. 바닷물이 몸에 차오르고 마침내 머리까지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놀란 친구들, 그를 건져내기 위해 우르르 물로 달려갔다. 그때 전유성이 머리를 수면 위로 쑥 내밀더니 태연히 해변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고선 하는 말이 이랬다. “나 웃겼냐? 바다가 나를 부르더라고!” 그 해변에 폭소가 퍼졌더란다. 친구들을 웃기기 위해 온몸을 던져 펼친 해프닝이었으니 웃음 보시치고도 상품(上品)이다. 그런데 이 즉흥 쇼의 성공 요인은 그 액션 자체에 있지 않다. 물귀신 시늉으로 사람을 웃기는 몸짓은 독창적이지 않은 흔한 일이니 말이다. 전유성은 진부하지 않고 언제나 한 걸음 더 나아갈 줄 아는 사람이다. “바다가 나를 부르더라고!” 그는 다분히 서정적인 대사를 읊음으로써 이벤트의 격을 높인 게 아닌가. 그날따라 바다에 참을 수 없는 매혹을 느껴 물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아무려나 그는 친구들을 웃기되 이왕이면 운치와 여운까지 가미한 쇼를 보여주고 싶었을 테다. 그렇다면 아마도 충동적으로 떠올린 각본으로 행위를 하고 대사를 읊조렸던 게 아닐까. 하나의 엽편(葉片) 모노드라마를 순간에 기획해 연출하고 연기했던 셈이다. 그의 삶에 피부처럼 붙은 예능 감각과 순발력을 엿볼 수 있는 예화다. 무덤덤한 일상에 웃음을 배포하고, 상황을 요리해 생기를 돋우는 일에 전유성은 능하다. 기발함과 도발을 밑천으로 삼아 지루한 인생사를 소극(笑劇)으로 끌어올린다. 쉼 없이 산소를 들이마셔 허파를 움직이게 하듯이, 그는 쉼 없이 머리를 회전시켜 개그맨이라는 직분에 부합하는 아이디어를 연구하고 생산한다. 어디서 뭘 하든 ‘한 걸음 더 들어가는’ 집중력과 재능으로 롱런한다. 전유성은 지리산 근처 남원시 인월면에 산다. 벌써 4년째, 얼추 인월 사람 다 됐다. 그와 마주 앉은 곳은 딸과 사위가 운영하는 찻집 제비카페. 세한의 창밖 저 너머로는 지리산이 수묵화처럼 묵연하다. 많고 많은 곳 중에서 하필 이곳에 몸을 둔 건 지리산이 곁에 있어서다. “내가 ‘절친’이다. 절하고 친하거든. 옛날에 지리산을 자주 오르기도 했고, 이 산의 절에 있는 스님 한 분과 가까워 지리산을 종종 찾아왔다. 그 인연으로 여기에 산다.” 지리산을 자주 오르겠다. “아직 올라가진 않았다. 올해엔 제대로 올라볼까 한다. 지리산이 어디로 사라질 것도 아니고 마음 내킬 때 가면 되니까.” 어떤 매체에서 봤는데, 살면서 가장 잘한 걸로 쉬지 않고 일을 해온 거를 꼽았더라. 요즘은 무슨 생각, 무슨 일을 하나? “코미디 전용 극장 만들 궁리를 자주 한다. 여건이 여의치 않아 지연되고 있지만 어떻게든 추진할 작정이다. 일상생활은 나름 분주하다. 남원 동편제 마을에 가서 창의력 강의도 하고, 우리밀로 빵 만들기도 가르친다. 마술도 가르치고.” 어딜 가나 알아보는 사람이 많은 게 연예인이다. 이게 불편하진 않은가. 메릴린 먼로는 대중의 관심에 너무도 두렵고 외로웠다 하더라. 선생은 어떤가. 개인의 자유를 수시로 침해당할 수 있을 텐데. “매우 피곤하다.” 몰래카메라가 늘 나를 주시한다는 기분이지 않을까?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피곤하다. 가령 라스베이거스를 여행할 때 사람들이 셀카를 막 찍어대던데, 만약 내가 도박장에라도 들어가 앉았다면 턱없는 잡음이 생길 수도 있는 거다. 그러나 저분들의 관심 덕분에 내가 밥을 먹고 산다는 걸 생각하면 고맙지.” 여행을 자주 한다지? 여행지에선 주로 무엇을 즐기나? “유럽의 오페라극장을 가더라도 오페라보다 극장 앞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더 흥미롭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관찰하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거든. 저 사람들은 무슨 얘기를 하며 저렇게 웃을까,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런 상상을 하며 구경한다.” 사람 구경처럼 재미있는 게 없다지만 보통은 외모나 차림새 감상에 쏠린다. 전유성은 다르다. 한 걸음 더 들어간다. 남들의 얘기와 생각을 읽으려 집중하며 상상을 펼친다. 그는 상상, 공상, 몽상으로 사고의 외연을 확장해 쓸모 있는 아이디어 채집하기를 습관으로 삼고 사는 것 같다. 타성과 고정관념을 깨고 경계를 넘나들며 감각의 촉을 세운다. 이런 전유성의 유심한 촉수가 한번은 자동차 터널에 꽂혔다. “남원의 어떤 터널을 통과하는데 밋밋한 터널 입구 전체를 돼지 코 모양으로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고. 터널 내부에서 울리는 졸음 방지용 사이렌도 돼지가 꿀꿀대는 소리로 바꾸고. 이거 재미있잖아?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지만 별 관심이 없더라고.” 현장에 바로 도입할 만한 아이디어인데? “당장에 돈 되는 일이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는다. 공공기관이나 민간이나 마찬가지다. 난 폐탄광촌을 활용해 누구나 스스로 들어갈 수 있는 사설 교도소를 세워도 유망할 거라 생각한다. 여기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스스로 형기를 정하면 된다. 하루든 여러 날이든. 가령 소설이 안 써져 괴로운 소설가는 형기 동안 구상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에게 잘못한 게 많은 사람도 하루쯤 감옥살이를 하며 삶을 돌아볼 기회를 가지면 된다. 이곳에서 가끔 참선 강좌가 열리며, 모든 ‘수감자’에게 반성문을 쓰도록 하는 것도 좋을 거 같다. 반성문을 모아 책으로 내고. 이런 교도소, 어떤가?(웃음)” 이색 교도소로 순식간에 이름날 것 같다. 사람들은 늘 새로운 것에 열광하니까. 교도소 옆엔 ‘출소자’들을 위한 주막집도 만들면 좋겠다. 인생에 달관한 주모가 있는. “그런데 하려는 사람이 없더라. 돈이 생기는 사업은 아니라고 보는 거다.” 흔히 돈에 목숨을 걸다시피 집착한다. 돈만이 행복을 보장한다고 믿는다. 돈 없는 노후를 맞이할까 봐 미리 과도한 불안감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나의 노후 대책은 돈이 아니라 일이다.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는 것보다 더 좋은 노후가 어디 있겠나. 특별히 욕심 부리지 않으면 적은 돈으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시골에서 살다 보니 월 100만 원 정도로 무난하게 사는 경우도 있더군.” 그는 인월에서 월세 50만 원짜리 아파트에 산다. 집이야 몸을 눕힐 수 있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그리 산다. 안으로 너른 사람은 바깥 치레에 도통 관심 없는 법이다. 시골 주민들, 특히 노년층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돈보다 참여가 가능한 문화 공간이다. 그분들도 공연 같은 걸 보고 즐겨야 하지 않겠나. 경로당이나 지어주고 외면하는 건 유기(遺棄) 행위에 가깝다. “관람은 물론 직접 공연할 수 있는 기회 제공도 필요하다. 이를테면 노인 합창단이나 무용단을 만들어 공연에 나서게 하면 된다. 이때 중요한 건 단체 이름부터 재미나게 지어야 한다는 거다. ‘임플란트가 비싸다고 생각하는 할아버지들의 합창단’이라거나 ‘며느리가 꼴 보기 싫은 할머니들의 합창단’ 같은 이름이라면 빵 터지지 않겠는가.” 끔찍하게 요상하고 재미없는 세상에서도 가장 끔찍한 건 시골 노인들의 지루하고 고독한 일상이다. 전유성, 이 센스쟁이야말로 그 문제풀이에 일조해야 하는 거 아냐? 이런 생각을 하던 차, 그의 입에서 기발한 합창단 이름들이 데굴데굴 굴러 나온다. ‘명란젓을 좋아하는 할머니들의 합창단’이라는 이름도. ‘소녀시대가 되고 싶은 할머니들의 무용단’이라는 이름도. 시골 노인들을 위한 복안이 이미 내심에 박혀 있다는 표시겠지. “너무 진지하게 살 거 없다” 남원에 오기 전 그는 경북 청도에 살며 하고 싶은 일을 다 했다. 코미디 전용 극단 ‘철가방극장’과 야외 음악 공연 프로그램 ‘개나소나 콘서트’를 만들어 10년을 쾌속 질주했다. 덕분에 고즈넉한 청도군이 일약 코미디와 콘서트가 난무하는 지역으로 도약했다. 개그맨으로서, 문화기획자로서 거둔 성취가 참 많았다. 그중 전유성이 가장 기뻤던 건 구경을 와 흥겨이 들썩이던 시골 노인들의 모습이었다고. “정말 좋아하시더라. 열댓 번씩 공연장을 찾아오기도 했다. 내가 썩 괜찮은 일을 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에 즐거웠다.” 그랬으나 판이 흐트러졌다.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시피 군과의 소통에 불협화음이 생겼고, 전유성은 홀연히 청도를 떠났다. 상심이 남았을 것 같지만 그는 훌훌 털었다. 다만 문화를 바라보는 비좁은 시야에 대해서는 보탤 말이 있다. “문화를 적자와 흑자 개념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무형 자산이기 때문이지. 계산을 앞세우는 태도를 버리고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와 경험의 폭을 키우는 게 필요하다.” 선생의 인기, 기획력, 추진력은 청도에서 입증됐다. 다른 지자체에서 콜 사인을 보내왔을 것 같은데? “남원에 온 뒤 몇몇 지자체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오더라고. 그때마다 내가 물었다. ‘1년에 공연을 몇 번이나 보십니까?’ 제대로 본 사람이 없더라고. 이래서야 일이 되겠어? 포기했다. 결국 자력으로 코미디 전용 공연장을 만들 수밖에. 문제는 자금이다. 요새 좀 고민하고 있다. 남의 돈을 뜯어올 재주는 없고.(웃음)” 차를 마시다 그가 소주 한잔을 목으로 털어 넣는다. 전유성은 술꾼이다. 생활에 술이 딱 달라붙었으니 외로움인들 범접 가능하랴. 술이란 무적함대? 때로 인생의 난제들을 척척 해치운다. 전유성을 보면 그게 증명된다. 슬럼프니, 못 채운 오욕칠정의 사무친 서러움이니, 무슨 고뇌니, 우리에게 한없이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는 종목들을 술 한잔으로 거꾸러뜨린다. “즐거울 때나 고달플 때나 한잔 마시고 잊는다. 날려 보낸다. 난 그게 되더라.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 살 거 없다고 생각한다. 살아 있는 오늘 하루를 재미있게 살면 되는 거 아냐? 그러고도 남는 불편이 있다면 팔자려니 하면 되고. 근데 나 예전처럼은 안 마셔. 건강 문제 때문에 어쩌다 소주 한두 잔 마실 뿐이라고.” 아예 끊어버리진 않고? 선생은 오래 살아 재미없는 세상을 비틀어 웃겨줘야 할 거 아닌가. “술을 어떻게 끊나? 액체를 어떻게 끊어?(웃음) 담배는 끊었다.” 햐. 그 무슨 금연 비법으로? “금연을 선언한 뒤 흡연하는 사람들을 마구 욕했다. 그러고서 뻔뻔하게 다시 담배를 피울 순 없잖아?(웃음)” 선생을 ‘아이디어 뱅크’라 한다. 어디서든 반짝거린다고. “어? 와서 보니 나 아니잖아. 반짝거리지 않잖아?” 겸손하구나, 그리 여겼으나 5초 뒤 다시 생각하니 이게 또 아재 개그다. 내가 유리로 만들어졌냐? 새벽별이냐? 뭐 그런 게 축약된 ‘썰’이지만 거기엔 겸양이 스며 있다. 시퍼런 촉으로 솟은 야산 종교가 인류를 구원한다고 하지만, 내 생각엔 웃음이 종교보다 파워풀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고인 빙하를 녹이는 게 웃음이지 않던가. 삶이 멸치대가리처럼 따분한 건 웃음이 말라붙었을 때다. 전유성은 이 진귀한 품목을 생산하고 가공하고 유통하는 전문가다. 매사 한 걸음 더 들어가는 머리와 행보로 ‘개그의 제국’을 구축했다. 이게 백지 상태에서 그냥 된 게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다독가다. 열 권짜리 ‘구라 삼국지’를 비롯해 다수의 책을 써낸 촉과 깡을 보라. 공부인이 아니고선 도달하기 어려운 지평이다. “과거엔 개그든 공연이든 잘해 보려고 노력했다. 근데 그건 아마추어 시절에나 필요한 미덕이더라고. ‘잘’하는 것보다 좋은 건 ‘재미있게’ 하는 거거든. 좀 서툴면 어때? 뭐든 재미있어야 하지 않겠어?” 재미있게 살고 싶어도 그게 잘 안 되니 환장할 일이다. 재미라는 샘물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니 그냥 목마르게 사는 거지. “발상을 전환하자고. 새로운 눈으로 사물을 보자는 거다. 가령 그 왜 가수들 공연 시작 때 불꽃 같은 축포를 발사하잖아? 난 뭐든 남들과 똑같이 하는 건 싫더라고. 그래서 내 공연 때는 시장에서 뻥튀기 기계들을 빌려다 뻥뻥 터뜨렸다. 관객들이 재미있어 하며 엄청 폭소를 터뜨리더라.” 머리에 서리가 내린 뒤에도 장난기와 유머와 재기가 번뜩인다. 단무지 없는 짜장면을 먹는 것처럼 섭섭한 인생에 고소한 양념을 뿌리는 데 이골이 났다. “생각의 타성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재미있는 ‘거리’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가령 ‘직접 만든 수제 칼국수’라고 써 붙인 말 안 되는 간판을 봤다 치자. 그때 저거보다 재미있는 이름이 없을까 생각해보는 거다. 그러면 뭔가 떠오른다. ‘놀러 온 사람이 시켜 만든 수제 칼국수’라거나, ‘소주가 생각나는 수제 손만두’라거나. 이거 재미있잖아? 장사도 더 잘될걸?” 재미의 출처가 곳곳에 널려 있다는 건가? “바로 그거다. 특별할 거 없는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면 기발하고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언젠가 마트 입구에 놓인 카트에 이런 문구가 적힌 걸 봤다. ‘정관장 드신 분들은 살살 밀고 가세요!’ 야, 이거 기발하잖아? 기똥찬 광고 문안이잖아?” 강적을 만난 기분이었겠다. 나보다 한 수 위 인간이 있네 하며.(웃음) “관찰과 생각도 많이 하지만 내 아이디어의 상당 부분은 일상에서 나온다. 특히나 사람들과의 잡담은 아이디어 공장이지. 잡담에 소재를 하나 올려두고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아이디어가 저절로 떠오르거든. 요번에 준비하는 책은 이 잡담에 관한 얘기다.” 가제목도 생각해뒀다. ‘다 알 필요 없다. 잡담이나 알고 지내자’로. 어떤 신들은 인간이라는 미증유의 생물이 너무 불어나거나 장수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세를 규합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몰라서다. 반란은 왜? 전유성의 사고에 기대자면 인간들이 너무 진지하게, 너무 재미없게 살아서다. 그러니 잡담이나 하고 가자는 거다. 잡담으로 안면 근육을 실룩여 웃음의 파랑이 너울거리게 하자는 거다. 그의 나이 올해로 일흔둘. 이 나이면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다들 그걸 생각해보거나 의논한다. 치매 역시 관심사다. 전유성에게 물어볼까? 이 두 가지 성가신 문제를. “무슨 수가 있겠나? 오면 오는 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되겠지. 난 지나간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엔 별 관심이 없다. 치매? 가족들이야 고생하겠지만, 치매에 걸린 당사자는 아무것도 몰라 고통도 없을 텐데 무슨 걱정이야?(웃음)”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지만 그게 쉬울까 보냐. 그러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떡할 건가. 농담과 언어유희, 해학과 기지가 맞물려 돌아가는 그의 얘기엔 인생과 세상의 문제를 찍어내려는 갈고리가 들어 있어 짭짤하다. 달관한 시늉이 없어 미덥다. 거침이 없어 시원하다. 시퍼런 촉으로 솟은 야산이라 할까 보다. 그 산 언저리에서 귀 호강 한번 잘했다.
- 2021-03-08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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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춘화, 왕가의 성 교육용에서 출발했다?
- 최근 인문학이 대세다. ◯◯인문학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따라서 유행이다. 그런데 성만 한 인문학이 또 있을까?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고, 사랑을 나누고, 종족을 남기고, 늙고 죽어가는 이야기는 다 성에 있다. 성을 한자로는 ‘性’이라 표기하는데 어찌 이렇게 적확한 표현을 찾았는지 놀랍기까지 하다. 성은 그 사람의 본성을 뜻한다. ‘배정원의 성 인문학’은 역사, 예술, 사회 등 사람이 만들어가는 문화 속에서 성을 재미있게 풀어볼 것이다. 춘화는 아주 오래전부터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어 왔지만, 특히 한·중·일 동아시아의 춘화는 나라마다 독특한 특징이 있다. 우리 한국의 춘화는 일본이나 중국만큼 발달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러우면서도 그림 자체에 이야기가 들어 있어 마치 문인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다만 일본이나 중국처럼 목판화로 춘화를 인쇄하지 않았기에 자료가 그렇게 많진 않다. 일본의 춘화는 모네, 드가, 르누아르, 고흐 등 서양의 인상파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주어 신비로운 동양에 대한 동경심을 품게 했다. 또 화려한 색채, 배경, 의복의 섬세한 표현과 함께 성기 페티시즘이라 불릴 만큼 성기를 거대하게 그리고 노골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려냈으며, 그림에 괴기스럽거나 우스꽝스럽거나 엉뚱한 상상력이 담겨 있어 보는 맛이 유난하다. 중국의 춘화 역시 우리나라나 일본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중국 춘화에 대한 기록은 한나라 시대부터 찾아볼 수 있으니 그 역사가 유구하며, 경제적으로 안정기를 누렸던 명나라 시대의 작품이 유난히 많다. 원래 춘화(春畵)는 춘궁비화(春宮秘畵), 즉 동궁이 사는 춘궁의 비밀스런 이야기를 의미할 정도로 왕가의 성 교육용에서 출발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태자는 해가 뜨는 쪽인 동궁에 기거했으며, 동궁을 식물의 생장이 시작되는 봄을 뜻하는 춘(春)자를 넣어 춘궁이라 불렀다. 중국의 춘화는 왕가와 귀족, 호족, 부호 등 경제적·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전유물로 발전해왔으며, 자연스레 그들의 생활 속 성을 반영하고 있다.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성은 유교와 도교의 생활 철학 속에서 정립되었다. 특히 도교의 철학이 강력한 영향을 미쳐 성적 접촉을 통해 신체의 에너지를 운용함으로써 남자의 건강과 장수를 도모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여기에서 방중술과 양생술이 나왔다. 흔히 이야기하는 접이불루(接以不淚, 여러 여성과 관계하되 사정을 참음으로써 여자의 음기로 남자의 양기를 보한다는 것)와 환정보뇌(還精補腦, 사정을 참음으로써 그 정기가 척추를 통해 뇌로 흘러 들어가서 뇌를 강화한다고 믿는 것)가 대표적인 방중술과 양생술이다. 또한 중국 춘화에서는 남녀가 자연 속에서 거리낌 없이 관계를 갖고, 누군가가 곁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관계를 맺기도 하며, 심지어 하녀들이 두 사람의 몸을 밀거나 들어서 성관계를 돕기까지 하는데, 이것은 모두 그림 속 주인공이 부호이거나 권력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누가 지켜보거나 말거나 남녀의 표정은 느긋하기만 하다. 각설하고, 이번에 가져온 그림은 ‘마상 섹스’다. 이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슬며시 웃음을 빼물게 한다. 남녀가 말 위에서 한창 섹스를 하고 있으며, 하얀 말은 갈기를 휘날리며 신나게 달리는 중이다. 두 남녀의 머리 스타일과 복색을 보니 청나라 때 그려진 그림이다. 여자는 귀부인인 듯 연미(가발과 굵은 철사, 융단이나 비단 같은 천을 이용해 제비꼬리같이 만든)를 이용해 화려한 머리 장식을 하고 있고, 채찍을 사용하느라 팔을 한껏 들어 올린 탓에 넓은 통의 소매 사이로 보이는 양 손목엔 팔찌를 하고 있으며, 귀에도 역시 커다란 보석이 달린 귀걸이를 하고 있다. 아마도 그 당시 유행하던 진주나 비취로 만든 귀걸이겠다. 옆트임이 있는 청대의 저고리만 입은 채 하체는 벌거벗은(아마도 달려오는 중에 벗어 던졌을까?) 여자는 가죽으로 만든 부츠 같은 신발을 신고 있어 무척 호방하게 보인다. 그녀가 타고 앉은 남자는 아무 옷도 입고 있지 않은데, 변발을 한 것으로 보아 청나라 남자다. 달리는 말 위에 누워서도 균형을 잘 잡고 있는 남자는 배가 불뚝 나오고 가슴이 좀 처졌으나 평소에 승마와 사냥 등에 익숙한 자로, 사회적·경제적 지위가 높은 사람임에 분명하다. 이 그림이 눈길을 끄는 것은 말 위에서의 섹스라는 흔하지 않은 배경 때문이다. 춘화의 배경은 부호나 왕족의 거대한 저택 실내나 넓은 정원 등 정적인 공간이 많은데, 달리는 말 위에서 그것도 여성 상위의 섹스라니! 더욱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의 표정이다. 남녀의 자세로 보아 그들은 이미 삽입 중인데, 말이 달리며 오르내리는 것을 이용해 여자는 오르가슴에 이른 것 같기도 하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여자는 더한 극치감을 쫓아, 심지어 달리는 말에 채찍을 마구 휘두르고 있지 않은가! 그에 반해 남자의 표정은 극치감이라기보단 얼핏 두려움마저 서려 있는 듯 보인다. 이 여자가 황홀감에 취하다 못해 말이 아니라 자신에게 채찍을 내려칠까 두려운 걸까? 아니면 고정된 침상에서의 여성 상위조차 자칫 각도 조절에 삐끗하면 남자의 생명과도 같은 음경이 골절되기도 하는데, 마구 흔들리는 달리는 말 위에서의 삽입이라니 쾌감보다 걱정이 앞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남자 위에 올라앉은 여자는 신이 났는데, 설상가상 남자는 떨어질까 봐 말의 몸뚱이를 손으로 부여잡느라 여간 노심초사가 아니겠다. 황홀함으로 발그레 달아오른 그녀를 태운 말은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 사이로 질주 중이다. 바위 주변의 나무들도 싱싱하게 하늘로 가지를 향하고 있는 것을 보니 남자의 발기는 아무 문제 없이 청청하게 진행 중이지만, 남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아니 생각이란 걸 하면 발기가 사라질지도 모르니, 그냥 그녀가 충분히 만족해서 말을 세울 때까지 ‘말아, 달려라’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쩌면 좋은가? 성에 관해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낫습니다. 이는 물이 불을 이기는 이치와 같지요’라고 했던 소녀(素女)의 말처럼 달리는 말을 타고 여성 상위를 즐기는 그녀는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는구나!
- 2021-03-02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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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속으로 한나절, 김포 독립운동기념관
- 멀리 떠나지 않아도 괜찮다. 이제 신종 코로나 팬데믹은 일상 속에서 즐겨볼 수 있는 여행으로 돌파구를 찾는다. 일상 속 여행. 홀로이 걸어서 다녀오기, 또는 자전거나 자동차로 한두 시간 내에 돌아올 수 있는 일종의 근교 여행, 마이크로 투어리즘이 대세인 요즘이다. 마이크로 투어라는 산뜻한 형태로 가뿐하게 즐길 수 있으니 나서는 기분도 가볍다. 이제 3월이다. 3.1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막상 천안의 독립기념관도 함께 떠올려 보지만 선뜻 나서지 못한다. 늘 그래 왔다. 언제든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거리가 멀다고 핑계 댔고 도로가 막힌다는 이유도 있었고 볼거리가 더 많은 곳이 있다 해서 밀려나기도 했었다. 독일 베를린 여행 중에 브란덴부르크 남단의 숲 쪽 방향의 추모공원 홀로코스트에 들른 적이 있다.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고 자신들의 역사적 과오를 드러내며 오늘을 사는 그들의 자세가 신뢰를 갖게 했다. 그래서 독일의 현재가 있음을 느끼게 했던 곳이었다. 역사 왜곡에 안간힘을 다하는 일본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렇게 역사를 잊지 않고 개방하여 널리 알리는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Holocaust Memorial)까지 가보았으면서 가끔씩 이렇게 눈앞의 것을 무심히 지나치곤 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역사적 사실과 그 정신을 가끔씩이라도 기려볼 일이었다. 독립기념관은 천안의 목천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서울과 수도권을 기준으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만 달리면 김포에도 독립운동기념관이 있어서 가까이서 쉽게 그 의미를 돌아볼 수 있다. 물론 규모는 많이 다르다. 그뿐 아니다. 독립만세를 불렀던 천안의 아우내 장터와 같은 김포 오라니 장터에 만세운동의 현장이 있다. 경서 지방의 대표적인 장터였던 김포 양촌리의 오라니 장터와 월곶면 군하리 장터에서 3.1 만세운동을 조직적으로 벌였다는 사실도 새롭다. 시절 탓인지 독립운동기념관은 한적하다. 전시장 입구에서 맞아주는 멋진 영상의 선명한 태극기가 반갑다. 부모님과 함께 온 어린이와 전시실을 묵묵히 오가는 어르신이 눈에 들어온다. 만세운동을 재현한 미니어처와 캐릭터들이 첨단의 세상에 사는 이들에게 지루함을 덜어준다. 독립운동기념관 건물은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획전시실, 사료열람실, 영상실, 로비, 상설전시실로 구성되었다. 잊고 살았던 시간을 재조명해 볼 기회다. 2층의 청소년 문화의 집이나 북카페 등은 코로나의 현실로 지금은 열리지 않지만 1층의 전시실만으로도 볼거리가 쏠쏠하다.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3.1 운동 이야기는 물론이고, 김포지역에서의 3.1 만세운동과 항일의병활동, 그 배경과 특징, 발발 과정을 음성이 포함된 영상과 함께 자세하게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김포는 독립운동가와 항일의병들이 유난히 많았다. 그리고 김포 전 지역에서 주민들의 3.1 만세운동이 전개될 만큼 큰 규모로 투쟁했던 유서 깊은 고장이기도 하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약 2천만 명이었는데 3.1 독립운동 참여 인원이 2백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일제의 총칼 앞에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쳐댔던 순박했던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비폭력 저항의 모습에 가슴 뭉클해진다. 이 모든 역사의 흔적들이 성실히 모아졌다. 당시 일본군들의 야만적이고도 처참한 만행을 볼 수 있고 독립군들의 유물을 확인할 수 있다. 전시장을 한 바퀴만 돌아도 당시의 독립을 향한 열망이 전해진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멋지게 조성해 놓은 기념관이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있음을 모르고 지냈다니 이런 무심함이 어디 이뿐일까만. 독립의 함성이 느껴지는 전시물을 감상하다 보면 나라를 구하기 위한 그분들의 아픈 과거가 눈앞에 생생히 그려진다. 특히 1910년 안중근 의사가 32세 나이로 뤼순감옥에서 사형집행을 앞두고 받은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글 앞에서는 심장이 멈추는 듯하다. “나라를 위한 죽음이라면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벌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글이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서신이 될 것이다. 여기 너의 수의를 보내니 이 옷을 입고 잘 가거라. 이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서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서서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고 있겠지만 이런 기념관 관람만으로도 잊고 지냈던 시간을 되짚어 만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덕분에 저절로 호국과 애국의 DNA를 되살려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기획전시실은 매 주기마다 다양한 주제로 기획전시를 열고 있다. 3.1 만세운동의 태극기 물결을 떠올리게 하는 전시장이다. 독립의 역사를 쉽게 이해하며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결집력을 보여준 태극기의 다양함이 펼쳐진다. ‘역사가 담긴 태극기’ 전의 기획전시실이었다. 태극기의 상징성과 태극문양의 의미, 독립운동의 간절함을 담은 김구 서명문 태극기와 태극기 목판 등 저마다의 의미가 담긴 태극기들, 역사와 용도가 다양한 태극기의 면면을 알아가는 게 새롭고 흥미롭다. 한 점 한 점 아프고 묵직한 의미를 담은 태극기들과의 조우가 독립을 향한 당시 우리 국민들의 3.1 운동 정신을 절절히 전한다. 기념관 주변 언덕 위로 조성된 공원이 다시 찾은 평화로움을 대신하는 듯하다. 산책하듯 걸으며 3.1 운동 기념비와 위령탑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쳐 나라를 지키려고 항거했던 이들을 비로소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기념관은 소박하지만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 속에 슬프고 안타까운 사연들이 가득하다. 기념관 가까이에 있는 오라니 장터에서는 해마다 가을이면 축제가 열린다. 그 날의 함성을 떠올리며 3.1 만세운동 퍼레이드를 하고 다채로운 행사를 한다. 그렇게 3.1 운동 100년의 기억을 되살린다. 살면서 가끔씩 잊고 지냈던 것을 모두 함께 되짚어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김포의 독립운동기념관과 주변으로는 산성이나 돈대, 다양한 갤러리와 문화시설이 포진해 있다. 봄 햇살이 따사로워지면 소풍삼아 찾아볼만 하다. 조용한 하루나들이 코스로, 역사여행으로 의미 있음을 알아차렸다면 가볍게 나서보아도 좋을 듯. 한나절이면 된다. 주변 볼거리 김포 아트빌리지 아트센터 & 김포 인삼쌀맥주 갤러리 백제 고대국가의 시원(始原)으로 추측하는 김포 모담산 운양동 자락에 위치한 김포 아트빌리지, 그곳에 수준 높은 전시를 볼 수 있는 아트센터가 있다. 쾌적하고 모던한 현대식 예술공간에서 감상하는 예술가들의 작품 전시 공간이 고퀄리티다. 훌쩍 떠나온 하루 외출에서 품격 있는 시간 획득이다. 아트센터 앞의 너른 야외 공간과 전통놀이체험마당, 주변의 전통한옥 숙박시설, 맛집 등 누구나 언제라도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용요금 무료, 주차무료. 품질 좋은 쌀과 인삼의 특산지인 김포, 김포의 6년근 인삼과 김포쌀로 빚은 인삼쌀맥주와 인삼 전시장도 둘러볼만하다.
- 2021-02-25 1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