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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특별한 VIP
- 헐렁한 바지와 감촉 좋은 티셔츠의 편한 차림, 가벼운 가방. 화장기 없이 모자를 눌러쓰고 자동차 열쇠를 챙겼다. 지하로 내려가며 오늘 할 일에 머릿속이 분주해진다. 양평으로 달릴 참이다. 요사이 혼자서 하는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데 연습 삼아 다녀보려고 하니 좀 긴장된다. 양평에 도착해서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예전에 맛있게 먹었던 양평 성당 근처의 식당에 들렀다. 점심시간이 좀 지나서인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집은 음식이 정갈하고 인심이 후해서 다른 손님들에게 소개해도 다들 좋아했다. 맛도 토속적이고 현지의 싱싱한 채소를 쓰다 보니 음식이 살아있는 느낌이 좋다. 자리를 잡고 둘러보니 계산대 위의 십자고상과 푸른 성지가지 꽂힌 것이 보였다. 가장 토속적인 차돌박이 된장찌개를 시켰다. 9천 원. 그때 허름한 차림의 할아버지가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여주인은 반색하며 달려가 말했다. “ 아~ 여기는 VIP용 메뉴판을 드려야죠.” 할아버지는 자연스럽게 메뉴를 고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음식은 다른 손님을 제치고 먼저 나왔다. VIP니까. 다른 손님들은 익숙한 듯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나도 그냥 묻혀서 조용히 기다렸다. 아니 돌아가는 분위기를 흥미 있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음식을 먹은 다음 계산대에 돈을 내고 나갔다. 수행원만 없을 뿐 분명 VIP가 분명했다. 나는 그 VIP용 메뉴판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메뉴의 가격은 정상가의 3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그 식당에서는 독거노인이나 경로당 노인에게 2500원을 받고 음식을 주고 있었다. 식당 주인은 손해나지 않는 범위에서 배고픔을 해결하고 배부르게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특별히 다른 메뉴판을 만들어 그들이 미안해하지 않고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얼마나 따스한 나눔인가. 계산대 위의 십자고상이 멋지게 보였다. 한 사람의 따듯한 마음이 공동의 선을 만들고 주변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명절이 다가온다. 구호품을 앞에 쌓아놓고 불편한 아이들이나 사람들을 엑스트라로 놓고 사진을 찍어 자신의 홍보용으로 쓰는 사람들은 해마다 줄고 줄어 없어졌으면 좋겠다. 봉사하면서 오히려 많이 배우고 감동을 한다고 한다. 함께 감사하는 마음은 인간이 가진 멋진 감정이다. 그래도 과연 주는 사람이 좋은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에게 정말 유익한 나눔인지 늘 생각할 일이다. 자신의 체면은 세우고 받는 사람이 굴욕적인 나눔이야말로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 2017-09-19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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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자녀의 파워!
- 며느리가 전화를 걸어왔다. 아파트 분양에 다자녀 특별 분양신청을 했더니 당첨이 되었단다. 아파트 경쟁률이 몇 백대 일이 되어 도저히 붙을 가망이 없었는데 자식이 셋인 덕분에 정부의 다자녀 특별 분양 혜택을 톡톡히 봤다고 한다. 셋째 막내가 복덩어리라고 이웃에서 모두가 한 마다씩 덕담을 해준다고 며느리 목소리에 잔뜩 기쁨의 웃음이 배어있다. 또 하나 다자녀의 혜택을 본 것이 있다.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시립유아원에 아이들이 쉽게 들어간 것이다. 시립유아원을 선호하는 아이들은 많은데 원생 수는 한정되어 있어 그림의 떡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입학 희망자가 넘치다보니 다양한 방법으로 점수 누진제를 하여 최고점을 받은 사람이 입학을 한다. 공평하게 입학기회를 준다고 제도화 하였지만 워낙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차례가 돌아오기가 하 세월이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셋째가 입학 적령이 되면서 다자녀 점수로 단번에 앞사람 여러 명을 제치고 입학하게 되었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지금은 다자녀에게 혜택이 있지만 우리가 젊었던 시절에는 반대로 산아제한이 있었다. 아이를 못 낳게 했다. 그 당시는 정관수술한 사람이 오히려 가점을 받아 아파트 당첨이 유리했다. 아파트를 받으려고 70대 노인이 정관수술을 했다는 소리를 듣고 웃었는데 이제는 정반대가 되었다. 인구가 자꾸 줄어드니까 출산을 장려하기위해 정부나 지자체에서 여러 가지 혜택을 주면서 출산을 장려한다. 다자녀에 대한 어떤 혜택이 있을까 인터넷을 통해 찾아보니 생각보다 많다. 지자체별로 혜택 내용도 다르고 명칭도 다르고 금액도 다르지만 대략이나마 알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알아본 내용을 옮겨본다. 1, 다자녀우대카드를 발급받아 수목원이나 박물관 무료입장 가능 2, 전기요금 상하수도 요금 감면 3, 년말정산 시 자녀 추가공제 4, 자동차 취득세 면제 5, 대학등록금 감면 6, 국공립어린이집, 병설유치원, 국립유치원 우선권 부여 7, 출산비용 지원 8, 통신비 할인 9, 중, 고등학교 수업료지원 10,국민연금 가입기간 추가인정 11,셋째 아이 교복 구입비 지원 12,도시가스 요금 감면 보건소에서도 특별 혜택이 있는 것 같다. 아들의 집 문제가 해결되니 그 밑의 딸아이의 집 문제가 또 걸린다. 딸은 이제 8개월의 아이가 있는 새댁이니 좀 더 전세를 살아도 된다. 하지만 오빠가 집을 마련했다니 ‘오빠 축하해’ 하는 목소리 속에 부러움이 들어있다. 딸도 다자녀를 낳아 이런 저런 혜택을 받고 정부정책에 호응하는 집안이 되었으면 하는데 자식들의 결정에 관여할 생각은 없다. 국가경쟁력의 첫 번째가 인구수라는데 우리나라는 저 출산으로 인구수가 줄어든다고 걱정이 많다. 다자녀에 대한 혜택도 필요하지만 아이들 키우기가 쉽도록 정부에서도 제도적으로 보완해주고 기업에서도 배려를 해주었으면 한다.
- 2017-09-12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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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한 자식이 주는 십일조
- “가형, 정말 고마워!” “원장님, 왜요?” “지난번 얘기해준 십일조 때문에….” “그래서 뭐가 달라졌나보죠?” “음, 덕분에 아이들한테 매달 용돈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 집안 분위기도 달라졌어!” 아침마다 체육관에서 보는 선배는 자식들한테 늘 불만이 있었다. 아들이 셋인데 국립병원장 출신이라 체면도 있고 해서 결혼할 때마다 강남에 집을 사주거나 전셋집을 얻어주느라 허리가 휘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본인은 칠순이 접어든 나이에 허리도 안 좋고 거동도 불편한데도 동네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결혼한 자식들이 그 정도 해줬으면 당연히 용돈은 물론 명절 때나 보너스를 탈 때 선물이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감감무소식이란다. ‘아들은 사춘기 지나면 남남, 군대 가면 손님, 결혼하면 사돈집 아들, 손주를 낳으면 해외 동포’라고 했던가. 마음 한구석이 섭섭했는지 가끔 자식교육 잘못시킨 것 같다는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그런데 지난봄, 필자 집에서 오래전부터 실천하고 있는 ‘십일조 제도’를 지나가는 말로 소개했더니 바로 가족회의를 열어 자식들한테 공개적으로 얘기했단다. 그리고 그다음 달부터 십일조까지는 아니지만 세 아들이 각각 매월 20만원씩 용돈을 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10여 년 전에 아이들과 협의해서 십일조 제도를 시작했다. 매월 받는 월급의 십 분의 일을 그동안 키워준 엄마한테 용돈으로 주라고 한 것이다. 은연중의 압력이라고나 할까 약간의 강제성을 띤 제안이었지만 아들과 딸은 입사 첫 달부터 이를 실천했다. 보너스를 탈 때도 예외 없이 용돈이 왔다. 다만 결혼한 이후부터는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해 정액으로 감면해주었다. 이러한 십일조 제도는 우리 가족에게 생각보다 큰 변화와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줬다. 첫째, 자식들과 더 가까워졌다. 자식들에게 용돈을 받은 부모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 이상을 자식이나 손자들에게 되돌려주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받은 돈으로 맛있는 찬거리나 고기를 사다 냉장고에 넣어놓고 문자를 보내보시라. 냉장고 털이범들이 차를 타고 총알같이 달려온다. 둘째, 가족과의 대화가 많아졌다. 이번에는 무엇을 사줄까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되고 필요한 게 뭔지 자식들에게 묻다 보면 소통이 원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신뢰가 생긴다. 셋째,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의 관계가 달라졌다. 어느 집이든 고부간의 문제는 있다. 그러나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서로를 알게 되고 그만큼 배려하는 마음도 생겨 작은 오해 정도는 웬만하면 이해하고 넘어간다. 행복이란 나비와 같아서 좇으면 도망간다. 자식들한테 바라는 것들을 내려놓으면 불만이 사라지고 행복해진다. 십일조 학습 효과 덕분인지 결혼 후 아들은 장모한테, 딸은 시어머니한테 매달 용돈을 드리고 있다. 옛말에 ‘사돈집과 뒷간은 멀리 두라’ 했는데 우리 집안은 사돈집과 한집안 같은 분위기라서 자주 식사도 하고 망년회도 함께한다. 또 서로 역할 분담을 해 네 명의 손자도 보살펴준다. 어느덧 큰 외손녀와 손자는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이러한 행복은 부모 자식이 서로에게 한 약속을 잘 실천하고 있는 덕분이 아닌가 싶다.
- 2017-09-1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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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으로 돌아가 잠드는 수목장
- 내가 묻힐 곳을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나의 취향이나 선호 방식도 중요하지만 나중에 찾아올 자녀들도 고려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고민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또 전통적인 매장묘 형태로 자리 잡을 만한 공간이 마땅치 않다는 것도 문제다. 묘지 부족을 생각하면 봉안당(납골당)이 답이지만 빽빽한 아파트 같은 장소를 마뜩찮아 하는 이가 많다. 그러다 보니 자연에 가까운 수목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수목장은 말 그대로 별도의 봉분이나 시설 대신 나무 밑에 골분을 뿌리거나 함에 넣어 묻는 방식을 말한다. 수목장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업계에선 1993년 스위스의 우엘리 자우터(Ueli Sauter)란 사람이 유언에 따라 친구의 골분을 나무 밑에 뿌린 것을 시초로 꼽는다. 이후 자연을 해치지 않는 ‘녹색장묘’의 개념으로 확산되다, 2004년 故 김장수 교수의 수목장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국내 보급이 시작됐다. 서양에선 자연친화적 가치 중요시 국내에서 수목장이 시행되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장사 등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며 ‘자연장’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부터다. 이후 국내에 자리 잡은 수목장의 개념은 유럽이나 다른 국가의 그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수목장을 시작한 스위스나 독일, 영국과 같은 유럽 국가들의 경우 골분을 뿌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묘비나 봉분 등의 인공시설은 최대한 배제하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기본. 영국에서는 골분함을 사용하더라도 생분해성 재질의 제품을 써 시간이 지나가면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배려하고 있고, 스위스는 유족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나무에 페인트로 표시하는 것만을 허용하고 있다. 이에 반해 국내의 문화는 다소 다르다. 아무래도 고인을 모시는 것은 자손의 도리로 여기는 문화가 남아 있고 제사나 차례와 같은 풍습이 유지되는 만큼, 묘소는 고인을 모시는 장소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내에서 운영되는 추모공원의 수목장을 보면 나무 밑에 오래 보관이 가능한 분골함으로 하거나 작은 비석을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예 소규모의 봉안당을 갖추는 경우도 있다. 기존 숲 활용, 국내에선 많지 않아 수목장은 기존 숲을 활용한 자연수목 활용 방식과 공원묘지 조성을 위해 인공적으로 나무를 심는 식재형으로 나뉜다. 시설에 따라서는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하는 곳도 있다. 자연수목을 활용할 경우 숲을 자연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관리가 어렵고 제반 시설을 갖추기가 만만치 않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국내에선 산림청에서 조성한 경기도 양평군의 하늘숲추모공원이 대표적이다. 인천가족공원에서는 자연수목을 활용한 것과 임의로 식재한 두 가지 방식이 모두 쓰인다. 이외에 공설이나 사설 수목장 시설은 대부분 식재형이라고 보면 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과 달리 대부분의 수목장은 울창한 숲을 활용하는 모습보다는 인공적으로 갖춰진 정원의 형태가 대부분이다. 수목장의 증가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정부에서도 보건복지부가 중심이 되어 묘지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수목장 같은 자연장지를 늘리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종·문중의 자연장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는 등의 제도개선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산림조합중앙회도 지난해 자체 상조회사인 ‘SJ산림조합상조’를 설립하고, 수목장을 위한 자연장지를 계속 늘려나갈 계획에 있다. 비싼 가격도 걸림돌 수목장의 단점 중 하나는 비싼 가격이다. 애초 취지대로라면 자연에서 온 인간을 자연으로 되돌린다는 개념이라 돈이 들 이유가 적지만, 국내에서는 수목장이 인공적으로 조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나무 값’이 만만치 않게 들기 때문이다. 여럿이 함께 안장되는 공동목을 제외하면 대부분 일반 봉안당(납골당) 시설보다 비싸다. 공설 시설의 경우 계약기간에 따라 다르지만 50만~200만원 내외의 분양비용이 필요하고, 별도의 관리비가 청구되기도 한다. 사설은 훨씬 비싸 함께 사용하는 공동목은 300만~400만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되고, 부부목은 1000만원 정도가 든다. 일가(一家)가 사용할 수 있는 가족목은 서울과 가까운 사설 공원묘지의 경우 5000만원이 넘기도 한다.
- 2017-09-06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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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받고 싶은 사람
- 우리 집 아파트 11층에 대학 선배 언니가 산다. 필자보다 8년이나 학번이 빠르니 나이도 꽤 들었는데 어떻게 관리를 했는지 필자랑 친구처럼 보여서 아파트 부녀회라도 열리면 다들 비결 좀 알려달라고 한마디씩 한다. 선배는 남편과 사이좋기로 소문이 났고 늘 다정하다. 노후대책도 연금이나 이자 수입으로 아주 튼튼히 해놓은 것 같다. 남편이 은퇴한 지는 오래되었는데 그동안 수고했으니 남은 인생 편하게 쉬게 하고 싶다며 재취업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말라 하고 두 사람이 철마다 여행 다니고 운동도 하고 좋은 음식 먹으러 다닌단다. 보통 남편들이 은퇴시기가 되면 노후 걱정과 불안감으로 부부싸움이 늘기도 하고 부담스러워진다. 물론 선배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노후대책을 마련해놓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두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본받을 만하다. 선배가 남편에게 하는 말투나 태도는 필자처럼 무뚝뚝하지 않고 언제나 상냥하다. 남편을 부를 때도 “여보~~오” 하며 뒷마디의 톤이 올라가니 필자처럼 애교 없는 사람은 따라 할 수도 없다. 하도 사이가 좋아 보여 남편이 미울 때가 한 번도 없었느냐고 물어보았다. 미울 때가 왜 없었겠냐며 그래도 상대편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보니 미운 생각이 없어지더라고 했다. 현명하게 사는 선배가 존경스러웠다. 언젠가 선배와 김치공장 견학을 갔다 오던 날이었다. 김치공장에서 우리가 직접 만든 김치는 택배로 보내준다 해서 그날 만든 겉절이 1kg 정도만 들고 왔다. 동네 어귀쯤 오자 선배가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상냥한 코맹맹이 소리로 “여보~ 다녀왔어요. 지금 주민센터 앞 지나고 있어요~” 했다. 김치공장 견학 간 것을 알고 있었던 선배 남편이 아마 우리가 무거운 김치를 들고 오는 걸로 알았는지 마중을 나오겠다고 하는 것 같았다. 만든 김치는 택배로 받을 거니까 무거운 건 없으니 힘들게 나오지 말라고 선배는 말했다. 필자 남편은 지방에 일 때문에 내려가 전화할 사람도 없었는데 다정하게 전화하는 선배를 보니 간질거리기도 했지만 부럽기도 했다. 힘드니까 나오지 말라고 재차 말하는 선배의 얼굴은 남편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듯 발그레하니 참 예뻐 보였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저만큼에서 선배 남편이 걸어오고 있었다. 외출하고 오는 아내를 마중 나온 것이다. “ 아이, 무거운 짐 없으니 나오지 말랬더니…” 하면서도 언니는 아주 기쁜 표정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앞서서 걸어가는 두 사람을 보니 정말 다정해 보이고 보기 좋았다. 작은 일에서도 서로 배려하고 아껴주는 모습이었다. 선배를 보면서 ‘나도 남편에게 저렇게 말 한마디라도 다정하게 해줘야지’ 하는 다짐을 해보지만 작심삼일이다. 선배 부부처럼 살려면 서로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도 많은 시간을 같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함께 보내야 한다. 선배네 부부가 좋아 보인다고 부러워만 하지 말고 필자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선배처럼 한 번 더 생각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인생 후반기를 선배네 부부처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생의 롤 모델이 될 만하다는 부러운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부다.
- 2017-09-05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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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나눔교실, 춘천 토박이 멘토 4인방
- 청춘의 낭만을 품은 도시, 강원도 춘천. 이곳에 남다른 교육열을 불태우는 멘토 4인방이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인생나눔교실을 통해 국군장병들을 위한 인생 멘토링에 참여하게 된 이백우(66)·이정석(67)· 차관섭(67)·허남신(43)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가르치는 수업’이 아닌, ‘함께 나누는 교감’을 통해 청춘들을 품고 있는 그들을 만나봤다. 인생나눔교실을 통해 ‘멘토’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함께하게 된 데에는 이백우씨의 역할이 컸다. 영어교사 은퇴 후, 인생나눔교실 1기에 지원해 3년째 멘토링 활동 중인 그는 고등학교 동기인 차관섭씨와 제자였던 허남신씨를 짝꿍으로 맺어주었다. 차관섭 “강원도청 산림정책관 등을 맡으며 반평생 공직생활을 했어요. 수직적인 직장 문화를 벗어나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멘토링 프로그램에 적응하는 것이 초반엔 걱정스럽더라고요. 그때마다 이 친구(이백우)가 ‘당신은 할 수 있을 거야!’라며 희망을 준 덕분에 활동할 수 있게 됐어요.” 그리고 또 한 사람, 차씨의 곁엔 환상의 짝꿍 허남신씨가 있다. 그녀 역시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이백우씨의 추천으로 인생나눔교실에 참여하게 됐다. 그렇게 그들은 사제지간에서 멘토로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이백우·이정석 멘토, 교직의 보람을 잇다 춘천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던 이정석씨는 은퇴 후 봉사활동에 눈을 뜨며 인생나눔교실에 참여하게 됐다. 동갑인 데다가 음악을 좋아하고, 같은 영어 교사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멘토링 파트너 이백우씨와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한 지도 3년째, 이제는 눈빛만 봐도 서로 호흡이 척척 맞는다. 이들의 수업 목표는 바로 ‘대화를 통한 공감’이다. 무언가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강의 형태에서 벗어나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세대 간 공감을 이뤄나가고 있다. 이정석 “두려움은 없었어요. 40년을 교육자로 지냈으니까. 하루는 종이접기를 하려고 색종이를 가져갔는데, 멘티들이 초등학교 때 추억이 생각난다며 종이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서 이들이 간직한 동심, 그런 감성적인 것들을 끌어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이백우 “신세대와 쉰세대 간의 공감·소통·배려에 중점을 두고 있어요. 최근 ‘욜로(YOLO)’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우리 기성세대와는 생각이 참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죠. 욜로는 한 번뿐인 인생 즐기며 살자는 건데, 어른들은 저축도 하고 앞날 생각하며 살길 바라니까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차관섭·허남신 멘토, 멘토링 속 멘토링 차관섭·허남신 멘토 콤비 역시 ‘노 티칭(no teaching)’을 원칙으로 대화와 이해를 통한 수업을 진행한다. 사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아버지와 딸뻘이다. 함께하는 데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묻자 이구동성으로 ‘전혀 없다’는 답변이 나왔다. 차관섭 “같이 군부대에 갈 때면 카풀(carpool)을 하는데, 1시간 반 정도 걸리거든요. 내가 살아온 이야기도 하고, 허 선생 사는 이야기도 듣고 하면서 오늘은 어떤 방법으로 수업을 진행할지 등등을 의논하게 되죠. 어떻게 보면 딸 같지만, 때로는 친구 같고 그래요.” 허남신 “나이 차가 많이 나는데, 상하적인 느낌이 들었다면 부담스러웠을 거예요. 차 선생님은 저를 굉장히 존중해주시고, 같은 멘토로서 대해주셔요. 또 둘이 있을 때는 제게 멘토 역할을 해주시거든요. 저는 A가 맞다 생각했는데, 차 선생님은 ‘그게 아니야’라는 말 대신 ‘B도 있고 C도 있는데, 나는 D도 해봤어’라는 식으로 말씀하시죠. 그런 유연성, 배려 속에서 선생님 인생을 나누고 제 인생도 나누는 것 같아요. 인생나눔교실의 또 다른 성과인 셈이죠.” 멘티에게 배운 ‘요즘 아이들’ 네 명의 멘토가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보람된 순간은 바로 자신으로 인해 멘티들의 삶이 긍정적으로 변화했을 때다. 모두를 만족하는 수업이 되기는 어렵지만, 단 한 명이라도 그 시간을 통해 작은 깨달음을 얻어갈 수 있길 바라는 그들이다. 차관섭 “얼마 전, 한 장병이 쉬는 시간에 쪽지를 하나 주고 갔어요. 나처럼 공직생활을 꿈꾸고 있는데 현실적인 조언을 듣고 싶다고요. 그야말로 내 인생을 나누고 도움을 줄 기회잖아요. 언제라도 시간이 되면 따로 만나서 그동안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주고, 그 아이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물론 그들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인생만을 나누는 것은 아니다. 멘티와의 생각나눔을 통해 배우는 것 또한 적지 않다. 이정석 “작년에 최전방에 있는 장병들에게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라 했는데, 제대하고 돈 벌어서 아버지 차 사드리겠다, 부모님 해외여행 보내드리겠다 등을 적더라고요. 대개 우리 세대는 요즘 애들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고 여기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오히려 이들은 이렇게까지 생각하는데 나는 내 부모에게 어땠는가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실수하는 멘토가 되고 싶다 국군장병을 위한 수업이지만, 사실 그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는 게 나름 고충이라고 한다. 사는 지역, 나이, 학벌, 가치관, 장래희망 등 각양각색의 성향을 지닌 이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늘 어느 것 하나에 치우치거나 차별이 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백우 “예전에 아이들에게 ‘아버지’로 삼행시를 지으라 했는데, 한 아이가 아버지에 대한 원망 섞인 시를 지었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요즘은 편부모나 조손 가정이 많아졌잖아요. 누군가는 상처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뒤로는 주제를 정하거나 대화를 나눌 때도 마음 다치는 아이가 없도록 배려하고 있죠.” 특별히 더 신경 쓰는 것은 언어다. 아무래도 나이 차가 나기 때문에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대화에 불편함이 생길 수 있어 이 점을 늘 염두에 둔다고. 이정석 “어느 날 ‘계모’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아이들이 잘 모르더라고요. 그런 것처럼 멘티들이 알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고, 또 유행어나 줄임말 같은 신세대 언어도 이해하려고 애쓰는 중이에요.” 이정석씨가 그토록 언어에 신경 쓰는 까닭은 ‘쉽게 대화할 수 있는 멘토’로 기억되고 싶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각자가 바라는 멘토의 모습에 대해 물어봤다. 이백우 “재미있는 멘토, 얼핏 생각나는 멘토, 그렇게 기억되면 좋겠어요.” 허남신 “여유 있는 멘토, 실수하는 멘토 그런 인간미 넘치는 멘토가 되고 싶습니다.” 차관섭 “나는 그들의 멘토보다는 형으로 남았으면 해요. 인생의 형이 되어주고 싶어요. 그냥 형처럼, 정말 형처럼 내 모든 것을 그들에게 주려고 해요. 그들이 그렇게 나를 형으로 생각해준다면 더 바랄 게 없죠.” 인생나눔교실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인생나눔교실은 선배세대(멘토)와 후배세대(멘티)가 나눔·소통·배려 등 인문 가치와 삶의 지혜를 공유한다. 2015년부터 인문적 소양을 갖춘 은퇴자 및 인문·문화 분야 전문가를 대상으로 수도권·강원권·충청권·영남권·호남권 등 5개 권역으로 나뉘어 멘토를 선발한다. 올해는 3월 지원자를 받아, 4월부터 12월까지 총 250명의 멘토가 3000여 회의 멘토링을 진행한다(자세한 사항은 인생나눔교실 블로그 참조 blog.naver.com/arko2010).
- 2017-08-3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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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의 따스한 마음을 읽다
- 작품을 보면 화가의 심성을 짐작하게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런 화가 중엔 단연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나 에드바르트 뭉크(Edward Munch, 1863~1944)가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 이들의 작품은 ‘미술 심리’, ‘미술 치료’ 분야에서 연구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종교화가 아닌 작품에서 따뜻한 이해와 배려를 고스란히 담은 화가가 있으니, 바로 우리네 풍속과 풍광을 작품에 남긴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직후 우리 땅을 밟은 키스는 많은 작품과 함께 소상한 인상기도 남겼다. 그중 3·1 독립선언서에 대한 글을 보면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독립선언서에서 발췌한 다음 글은 성명서라기보다는 한 편의 시 같은 느낌이다. 우리는 인류애의 깃발 아래 목숨을 바친다. 구름은 검어도 그 뒤에는보름달이 있나니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약속하도다. Under humanity’s flag let us perish. Shadowed from the great black cloud is perfect round moon Which to us great hope will show. 에서 발췌 그리고 그는 ‘한국인의 자질 중에 제일 뛰어난 것은 의젓한 몸가짐이다’라는 글을 여러 번 남겼다. 또한 키스는 일본,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를 여행하며 각 나라의 문화를 고루 체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작품과 글을 통해 한국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분명하게 표출한 것은 참으로 놀랍다. 키스의 작품 중엔 ‘종묘 제례 관리’란 제목을 붙인 그림이 있다. 그런데 작가는 바로 그 선비에게서 ‘의젓한 몸가짐’을 보았다. 혼란스러웠던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 속에서도 고유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느낀 그것을 화폭에 옮겼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진지한 시선과 따뜻한 마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을 사랑한 엘리자베스 키스는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작품에 담아냈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 2017-08-28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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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듣는 얘기야!”
-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알아도 모르는 척해야 할 때가 있다. 하얀 거짓말을 하는 경우와 같다. 인간관계는 대화가 주요 수단이다. 상대방이 신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는 마음 씀씀이가 필요하다. 분위기를 돋우기 위하여 어떤 유머를 하면 개중엔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이 나온다. “그거 알고 있는 이야기야!” 말을 한 사람은 맥이 풀리고 만다. 필자는 스마트폰 카메라 사진 강의를 한다. 어느 분이 쉽게 사진 편집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래서 상대방이 알아주면 좋은 유용한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 듣지도 않은 채로 유사한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여 자기도 할 줄 안다며 시큰둥해하는 눈치였다. 더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앞의 예와 같은 사례다. 요즘은 유머가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재미있는 총각이 인기 있는 신랑감이듯 일상 대화에서도 웃음을 주는 내용이 곁들여져야 한다. 유머 두서너 개는 외우고 있으면서 순발력 있게 쓸 수 있으면 좋다. 작은 수첩에 빼곡히 적어 다니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유머를 잘 구사한다. 때로는 오래된 것이나 다른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을 이용할 때도 있다. 어지간한 우스개는 거의 알고 있기 마련이어서 상대방은 재미없어한다. 지나간 유머를 사용하면 당연히 관심을 두지 못한다. 이미 알고 있는 유머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큰둥하며 팔짱을 끼기 마련이다. 그것을 때때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사는 것 자체가 노력이듯 삶의 모든 분야에서 향상이 요구된다. 인생 2막을 위해서 끊임없이 학습하며 2차 성장을 하듯 대화의 소재도 새로움으로 충전시켜야 한다. 자신의 내부 저장소에 쌓인 경험과 지혜의 활용도 있어야 하지만, 새로움으로 채워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즐겨보는 코미디 프로그램 방송을 시청해두면 도움이 된다. 반면에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적극적 자세도 필요하다. 자기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기를 바라듯 다른 사람의 말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자세가 절실하다. 나이가 들면 대체로 자기의 이야기에 더 열을 올리기 십상이다. 가끔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처음 듣는 얘기야, 재미있네!””라며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모르는 척하기도 한다. 좋은 반응인 맞장구를 치는 일이고 영어 표현으로 “리액션”이다. 이야기한 상대방을 배려해서다. 대화를 잘하는 기법의 하나가 상대방의 얘기를 잘 듣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반응을 더하면 금상첨화다. 어느 유명한 분을 모실 기회가 있었다. 그분의 말씀을 열심히 경청만 하였다. 가끔 맞장구를 쳐 드린 것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참 대화를 잘하십니다.”라고 칭찬을 남겨주고 자리를 일어났다. 잘 듣는 것이 첫 번째의 대화기술이고 내용을 설사 알고 있다손 치더라도 처음 듣는 것처럼 시늉할 필요도 있다. 시니어에 꼭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싶다.
- 2017-08-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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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종일 KDI 교수, 평생 동안 세상과 대결하다
- “안식년인데 안식을 못하고 있어요. 일이 많아서(웃음).” 주빌리은행장이자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인 유종일(柳鍾一·59) 교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근황을 얘기했다. 그러나 그 인간미 넘치는 모습은 한국사의 거친 부침 속에서 단련된 표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경제민주화 개념을 적극적으로 현실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오피니언 리더로서 지금의 시대정신에 누구보다도 가까이 닿아 있는 인물이다. 자존감 높은 유 교수의 상식적인 세상에서의 깨달음을 들여다봤다. “학교 다닐 때 굉장히 많이 맞았어요. 덤볐으니까.”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반골이다. 그것도 철저하게 확신에 찬 합리적 반골이다. “천성적으로 정의감이 과도했죠(웃음).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공부를 잘해서 특권층에 속했거든. 그러나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노골적인 차별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어요. 공부 못하고 가난한 학생은 사람 취급을 못 받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선생님들과 많이 싸웠지.” 아직 유교사상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던 시절, 스승의 그림자를 밟는 것도 안 되었던 세상에서 그는 스승과 대거리를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신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단 한 사람의 멘토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오만이라기보다는 삶의 흐름 속에서 체득한 겸손에 가까운 의미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배울 게 있습니다. 다만 내가 어리석고 오만해서 잘 배우지 못할 뿐이죠.” 천성적으로 정의감이 넘쳤던 사람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 중 중학교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 있다. “굉장히 정의로운 분이었어요. 칼같이 단정하게 하고 다녔죠. 얼핏 내비치는 걸 보면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심도 있었고. 그리고 아주 무섭기로 소문났었습니다. 굉장히 엄격해서 누가 촌지라도 건네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셨죠.” 그가 중학교 2학년 때는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학교에서 갑자기 ‘10월 유신’이라고 써진 리본을 가슴에 달고 오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당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재야인사들의 강연을 듣고 다녔던 유 교수는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 지시를 무시했다. 그랬더니 담임선생님은 그를 매우 심하게 체벌했다. 아마 시대에 대한 분노를 다소 잘못된 방향으로 표출한 게 아닐까, 그는 담임선생님의 마음을 그렇게 짐작한다. 그 짐작을 증명해주듯, 담임선생님은 이후에 그에게 함석헌이 쓴 를 선물했다. 운동권의 필독서였던 이 책과 함께 유 교수는 차차 유신시대의 금서들과 접하게 된다.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던 책은 리영희의 와 황석영의 였어요. 그리고 을 정기적으로 구독했죠.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했는데, 이런 책들을 접하다 보니 이 사회의 모순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이과 공부를 한다는 게 사치처럼 느껴졌죠.” 그는 학교에서는 이과 공부를 하고 대학 시험은 문과로 봤다. 학원도 다니지 않고 과외도 받지 않고 서울대학교 사회 계열에 입학한 그는 2학년 때 경제학과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 담당하는 형사가 따로 있었다 서울대 경제학과라는, 한국 사회에서 최고의 경제 엘리트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유종일 교수는 기득권에 안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의 대학 생활은 학생운동과 수사기관을 들락거리는 일상으로 채워지게 된다. “제일교회에서 전태일 열사의 남동생과 청계피복노조 노동자들과 함께 단식농성을 했고, 서울대 사회학과 심포지엄 사건으로 경찰서에 잡혀간 적도 있었고. 긴급조치 9호 위반 마지막 사건의 주동자로 구속된 적도 있었죠. 나를 담당하는 형사가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 이때 그가 잊지 못하는 또 한 명의 인물인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등장한다. 유종일처럼 철저한 운동권 학생의 지도교수는 당국의 감시와 압박을 받았으므로 현실적으로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새내기 교수였던 정 전 총리는 선배 교수들에게 골치 아픈 관리 대상으로 낙인찍힌 유 교수를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 전 총리는 유 교수를 타박하지 않았다. “정운찬 선생님께서 제게 ‘네가 말하는 것에 백 퍼센트 동의한다’고 말씀하셨죠. ‘학교에서 뭐라고 하건 지도교수로서 널 통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도 하셨고요. 그러나 대신 한 가지만 자신의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바로 학점관리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언제 도움이 될지 모르니 시험 때 한 이틀만이라도 신경을 쓰라는 게 정 전 총리의 주문이었다. 유 교수는 그렇게까지 자신을 배려해주는데 그 조언을 안 따를 수가 없었다. 비록 강의실에는 개강할 때 한 번, 종강할 때 한 번 들어가는 수준이었지만 시험 때가 되면 점수를 받기 위해 신경 써서 준비를 하곤 했다. 그리고 그러한 정 전 총리의 혜안은 유 교수가 하버드대학을 가게 되는 발판이 됐다. 운동권 문제아, 하버드대학 장학생 되다 ‘민주화운동’ 때문에 제적을 두 번이나 당하고 군대도 다녀오느라 나이가 훌쩍 들어버린 그는 좀 더 깊이 있게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느 날 지도교수였던 정운찬 전 총리에게 자문을 했다. 그러자 정 전 총리는 하버드대학을 가라고 권유했다. 하버드대학은 학풍이 자유로우니 유 교수의 기질과 잘 맞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토플과 GRE가 뭔지도 몰랐던 유 교수는 이 무모한 도전에 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도전에 성공하면서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박사과정 장학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장학생은 내가 공부를 잘해서 된 게 아니고 ‘니드 블라인드 정책(Need-blind policy)’이라는 하버드대학 입학사정 정책 덕분에 가능했던 겁니다. 이 정책은 우리도 본받아야 할 정책인데, 입학사정을 할 때 학생의 경제적 여건은 일절 고려하지 않고 능력과 잠재력만 보고 뽑은 후에, 경제적으로 지원이 필요하면 장학금을 주고 필요가 없으면 안 주는 것입니다.” 물론 하버드대학에 들어가서도 반골 기질은 전혀 죽지 않았다. 그는 보스턴의 한인 민주화운동 단체와 접촉해 일원으로 활동했고 하버드대학을 떠나기 전에는 학교 안에서 ‘광주항쟁 10주년 기념행사’를 기획해 치르기도 했다. 이후 미국 노트르담대학 조교수가 되어 미국 사회에서 교수로서 살아가게 된다. 용기와 신념 그리고 확고한 가치관 미국 사회에서 경제학 교수라는 직함을 갖고 주류사회의 일원으로서 평온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그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교수로서의 삶이 안온한 자신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들이 소수인종으로서 미국 사회에서 받을 차별이 걱정돼서였다. 하버드대학 경제학 박사인 유 교수를 찾는 러브콜은 많았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수석 제의를 받았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후보였던 시기에는 경제 공약을 총괄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때 신자유주의 정책을 반대하고 재벌 개혁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만족할 만한 액션이 취해지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때는 한미 FTA를 반대했으며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화되자 반발하며 정부와 각을 세웠다. 이 완고한 경제학 교수는 냉혹한 정치세계의 격랑 속에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해야 했다. “지금도 그러고 살잖아요(웃음). 옛날보다야 너그러워졌지만, 천성이 그렇기 때문에.” 확실히 과거보다야 너그러워졌다. 그가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스님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2004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고 여러 가지로 실망했던 때였어요. 그때 안식년을 받아 북경대학에서 강의하고 가을 학기는 미국에서 강의하게 되었죠. 그런데 미국을 가야 하는데 담배가 안 끊어지는 거예요. 미국 가서 처마 밑에서 담배 필 일을 생각하니 한심하더군요. 그런데 우연히 어떤 스님을 만나면 백 퍼센트 담배를 끊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겁니다. 산속 암자에서 혼자 수행하는 스님이었는데 수소문해서 만날 수 있었죠.” 폐부를 찌른 한마디, 인생을 바꾸다 스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앉자마자 스님은 유종일 교수에게 “인생에서 원하는 게 뭡니까?”라고 물었다. 아무리 유 교수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눌리고 싶지 않았던 유 교수는 “스님, 초면에 질문을 세게 하십니다” 하며 잠시 여백을 두고 싶었다. 그러나 스님은 그를 쳐다보면서 “시시껄렁한 얘기 말고 진짜 원하는 걸 말하라”며 강압적으로 물어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도망갈 수 없더라고. 꾸밀 수도 없고. 그래서 대답했죠.” “세상 한 번 뒤집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 교수는 자신의 행동을 직설적인 답변으로 응수했다. 그러자 스님이 말했다. “인생을 왜 그리 어리석게 사십니까.” 유 교수는 그 말이 이해가 안 되어 무슨 의미냐고 물어봤다. “인생은 진지하게 살아야 하는데 당신은 치열하게 산다. 개혁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지 머리 갖다 박고 깨지면 되느냐.” 유 교수는 스님의 말이 자신의 폐부를 찔렀다고 말했다. 그런 문답이 오간 후 스님은 기 치료를 해줬고 유 교수는 그 후 담배를 완전히 끊게 됐다. 희한한 일의 연속이었다. “가장 놀랐던 것은 하룻밤을 새고 그다음 날 아침에 밥을 해먹자고 한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그 전날 점심에 식사를 하고 오후 세 시쯤에 물 한 모금 마신 이후로는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그런데 스님이 그 말을 할 때까지 전혀 공복을 못 느꼈습니다. 신기한 만남이었죠. 그 스님은 티베트로 가셨다고 소식만 들었습니다.” 신우암은 몸을 존중하라는 시그널 “스님이 해준 말씀 중 ‘숨을 들이마실 때 지혜를 생각하고 내쉴 때 자비를 생각하라. 들어오는 모든 것은 지혜, 나가는 것은 자비여야 한다’는 말은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실천하고 있습니다. 워낙에 제가 지혜롭지 못하고 자비롭지 못한 사람이라(웃음). 스님이 제 지난 삶을 알아본 거죠. 그렇다고 지난 삶이 가치 없다고 여기진 않습니다. 제가 중심을 잡도록 만들어준 말이죠.” 변화가 시작됐다. 과거처럼 ‘이건 아니야’ 싶으면 무조건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가려가면서 싸워야 함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좋은 쪽으로만 오지 않고 나쁜 쪽으로도 왔다. 낙천주의자이자 긍정의 화신과도 같았던 그가 신우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암에 안 걸린다 여기고 살았죠. 속에 쌓아놓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CT 촬영을 하고 나서 예후가 좋지 않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신우암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내용을 찾아보니까 곧 죽겠더라고.” ‘사람은 어차피 죽는다, 멋있게 맞이하자’ 2015년 1월 신우암 판정을 받았을 때 유종일 교수가 한 생각은 ‘사람은 어차피 다 죽는다. 나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훨씬 일찍 죽음이 찾아온 건데 여기서 당당하게 멋있게 죽음을 맞이해야겠다. 두려워하거나 너무 억울해 하거나 소심한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겠다’였다.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더라고요. 원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나름대로 이 정도면 잘살았다, 잘 정리하고 가면 되겠다 싶었죠.” 죽음에 대해서도 긍정적이었던 유 교수의 그런 기질이 운명을 바꾼 걸까? 수술 후 회복하는 중 삶을 돌아보고 죽음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됐다. 삶의 질이 아닌 죽음의 질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가 수술하고 처음으로 한 일은 유서와 장기기증,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의 서약이었다. 죽음 앞에 바짝 다가갔던 경험은 그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그는 2년 반이 지난 지금 건강은 회복했지만 그때 얻은 깨달음을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 “이 기회에 정책 제안을 하나 할게요.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사람에게 건강보험료를 할인해야 한다고 봐요. 이는 의료비 절약에 굉장히 도움이 될 겁니다. 환자에게는 무의미한 연명이고, 그렇다고 주변 사람이 치료를 끊으라고 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죠. 그래서 본인이 고통스럽지 않으려면 스스로 미리 해놔야 하는데, 사실 닥치기 전에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런데 보험료를 깎아준다고 하면 많은 관심이 생기겠죠. 사전의료의향서는 환자에게도 사회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얻은 삶의 평온 삶의 수라장을 거쳐 암 투병을 겪고도 여전히 일복 많은 유종일 교수에게선 긴 사이클을 거치고 나온 사람 특유의 편안함이 있었다. “원로학자들 중에서 김경동 선생님 등은 연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여전히 건강하시죠. ‘어떻게 그렇게 유지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드리니 ‘욕심을 버렸기 때문이다’라고 대답들을 하셨어요. 젊었을 때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 못했죠. 이제 좀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불교의 가르침 중 핵심적인 것이기도 하고요.”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과거에 비해 편안해진 것은 내려놓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유 교수의 얼굴은 굉장히 밝았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말은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 해도 과도하게 집착하면 굴레가 됩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감수성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기자도 유종일이라는 ‘자존감 강한’ 남자가 좋아졌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사과할 줄 알고 부끄러움을 아는 오피니언 리더가 절실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 2017-08-11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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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문학 역사를 찾는 여행의 출발점에서
- 1883년 개항을 계기로 외래의 근대문화를 받아들인 인천은 근대도시로 성장했다. 이에 의미를 둔 인천광역시와 인천문화재단은 개항장에 한국근대문학관을 세워 한국 근대문학을 수집, 보존하고 있다. 근대계몽기(1894~1910)에서 해방기(1945~1948)까지의 문학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한국근대문학관을 소개한다. 근대문학관으로 변신한 창고 인천역에서 나와 중구청 방향으로 약 10분간 걷다 보면 붉은 빛을 띠는 건물이 하나 있다. 옛날 건물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투박한 모습을 간직한 이곳은 2013년 새롭게 문을 연 한국근대문학관이다. 개항기 시절 물류창고로 쓰던 건물을 인천광역시와 인천문화재단이 리모델링하여 한국 근대문학과 인문학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한국근대문학관 안으로 들어가면 아직도 창고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흔적들은 전시되어 있는 근대문학 작품을 더 실감나게 관람할 수 있도록 해준다. 보고, 듣고, 느끼며 배우는 한국근대문학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한국 근대문학의 출발점과 마주하게 된다. 1908년 발행된 최남선의 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의 , 1910년대 소설을 대표하는 이광수의 등 시대별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누렇게 변한 표지는 100여 년의 세월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뿐만이 아니다. 박목월의 초판, 윤동주의 초판, 박태원의 초판 등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는 희귀본을 만날 수 있다. 시대의 순서대로 문학작품을 배치한 전시관은 우리 근대문학의 흐름을 한눈에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자칫 지루하게 다가올 수 있는 ‘문학’이라는 주제를 한국근대문학관은 다양한 체험시설을 마련해 즐길 수 있는 전시로 만들었다. 현진건의 속의 한 장면과 문인들이 자주 찾던 다방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벽화 앞에는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다. 작품 중간중간 설치된 오디오 시설은 작품을 노래로 들려준다. 또 전시장 중앙 벽에는 한국 근대문학사의 주요 문인들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 벽화에 휴대폰을 가까이 대면 작가에 대한 간단한 정보와 작품설명이 전송된다. 다채로운 체험시설에선 관객을 향한 배려가 돋보인다. 2층에는 인천의 근대문학과 근대 대중문학의 흐름을 보여주는 전시가 마련되어 있다. 우리나라 근대문학에 인천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인천에서 태어난 문인들은 누구인지를 소개하며 인천의 근대문학을 소재로 한 영상물을 상영한다. 문학관을 나서기 전 전시를 통해 만나본 작가의 모습이 담긴 스탬프와 간단한 OX퀴즈도 놓치지 말자. 캐리커처로 표현된 염상섭, 최남선, 현진건 등 총 11명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 제작과정이 궁금하다면 상설전시관 옆에 마련된 기획전시관 ‘소설, 애니메이션이 되다’에서는 9월 10일까지 , , , , 등 총 다섯 편의 한국 단편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실제로 사용된 대본, 원화 등을 관람하고 2층에 마련된 공간에서 직접 콘티 완성, 애니메이터 체험, 캐릭터 그리기, 일러스트 색칠 등을 즐길 수 있다. 관람 정보 주소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로 15번길 76 전화 032-455-7165 관람시간 10:00~18:00 (입장은 관람시간 종료 30분 전까지 가능) 휴관일 매주 월요일과 법정공휴일 다음 날, 1월 1일, 설날 및 추석 당일 입장료 무료
- 2017-08-11 0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