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해방은 독립투사의 활약에 힘입은 바 크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온 가족과 전 재산을 바쳐 독립투쟁을 하였다. 그러나 큰 공적에 비하여 잘 알려지지 않았고, 명예나 지위를 탐하지 않았다.
온가족과 모든 재산을 바쳐 독립투쟁
6월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신교동 소재 ‘우당기념관’을 찾아 그의 공적을 살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1867년 이조
창경궁에서 숲 해설과 왕실 역사 강의가 있다 하여 갔다. 그런데 창경궁을 창덕궁으로 잘못 알고 갔다. 종로3가에서 내려 돈화문 쪽으로 10분 정도 걸었다. 입장료 3000원을 내고 창덕궁에 들어갔으나 창경궁은 창덕궁 안쪽으로 가서 다시 표를 끊고 가야 한다 하여 대략 둘러보고 바로 나왔다. 시간이 늦어 빨리 가야 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담장을 끼고 원남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만 3년1개월의 종지부를 찍고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었으나 전쟁의 후유증으로 피폐해진 농촌은 더욱 먹고살기가 어려워졌다. 필자는 휴전이 끝난 직후인 53년 8월 14일 경기 부천시 영종면 중산리 1385(현 인천 중구 중산동)에서 5남 3녀의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소녀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은 대구시 삼덕동이었다. 그곳 삼덕동의 중앙초등학교에서 4학년까지 다니다가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와서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교동초등학교로 전학하던 그때가 소녀에게는 서울 사람의 시작이었다.
어린 시절 삼덕동 소녀의 집에는 동네에서 제일 큰 마당이 있었고 여름에는 그 마당 한가득 형형색색의 이름 모를 꽃이 피고 졌
바로 위 사진을 보라. 여기가 어디로 보이는가. 놀랍게도 서울 시내 한복판이다. 도시를 벗어나야만 볼 수 있을 법한 풍경이 펼쳐진 이곳은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이다. 세련된 도시 이야기 대신 달래간장 만들어 콩나물밥 해먹을 궁리와 텃밭에서 막 자란 채소 이야기가 오간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기막힌 산뜻한 바람과 아카시아 향기가 어우러진 에어비앤비 ‘그김가네’
사실 필자는 아직도 IT도사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블로그에 글을 쓰고, 강의안 파워포인트를 작성하고, 대학원 과제물을 제출하거나, 스마트폰의 유용한 앱을 이용하는 데는 크게 불편하지 않을 정도이다.
필자 또래의 세대는 IT에 익숙한 세대는 아니다. 필자는 30년 이상 직장생활을 했지만 직장생활 초기에는 IT의 활용이 미미한 시대였고, 퇴직 전 1
서울 종로구 원서동, 창경궁 돌담길을 지나 걷다 보면 고즈넉한 분위기의 고아한 한옥들과 만나게 된다. 그중에서도 옹기종기 장독들이 따스한 햇볕을 머금는 곳이 있으니, 바로 ‘궁중음식연구원’이다. 1971년 궁중음식의 대가이자 인간문화재인 황혜성(黃慧性·1920~2006) 선생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인 ‘조선왕조 궁중음식’을 전수하기 위해 마련한 곳으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던 청년은 광복을 6개월 앞두고 고통 속에
생을 마감했다. 윤동주,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기억되는 그의 숨결을 찾아갔다.
윤동주는 1941년 24세가 되던 해, 연희전문학교 후배 정병욱과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약 4개월간 하숙을 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이 시기에 윤 시인을 기억하게 하는 대표 시 ‘
광복 이후 한국인을 설명하는 말은 ‘빠르게’다. 무조건 ‘빠르게’에만 집착한 우리는 너무 오래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놓치고 부수고 망가뜨렸다. 이제 우리는 걷기에 대해 물어봐야 할 때다. 신정일(辛正一·62) 우리땅걷기 이사장은 걷기를 하나의 문화로 정립하고 전파한 독보적인 인물이다.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동학을 복권시킨 황토현문화연구소
시니어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일’이다. 샐러리맨 사회로 만들어진 대한민국에서 시니어가 되어 마침내 만나게 되는 ‘은퇴’라는 단어에는 인생의 패배자라는 좌절감과 괴리감을 심어주게 만드는 힘마저 담겨 있다. 수많은 시니어가 은퇴 이후의 삶을 꿈꾸면서 계속해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은퇴 후 다시 일을 하는 어려움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새로운 경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