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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송시월과 나누다] 정동골2
- 지금의 강북 삼성병원 입구쯤에서 내 중년의 한 시절을 보낸 탓에 정동은 길 하나 사이의 낯익은 동네다. 하지만 살기에 바빠 막상 정동을 문화적 역사적으로 접근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특히 이화여고와는 인연이 깊다. 이화여고를 다닌 큰 딸이 전체 1등을 해서 조회시간에 상을 받으러 단상으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운동화가 구멍이 나서 친구 신발과 바꿔 신고 나갔다는 에피소드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 시절 남편의 사업이 잘못되는 바람에 과외는 커녕 워크맨 하나도 못 사주다가 고 3이 되어서야 청계천에서 중고를 사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와중에서도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건전하게 자라 주었다. 어느덧 자라 중년이 된 지금도 엄마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보살피는 착한 딸이어서 고마울 뿐이다. 정동 맞은편 신문로는 80-90 년대 군부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 시위대로 자주 교통이 통제되곤 했다. 큰 아이는 늘 교정을 울리는 시위행렬의 “군부독재 물러가라”는 외침이 익숙해서인지 사회학과에 입학했고 1학년부터 시위에 참여한 일이 비일 비재했다. 때로는 경찰의 곤봉을 피해 같은 과 동료 선배들이 우르르 우리 집으로 숨어드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오랜 세월이 흘렀고 그 아이가 벌써 중년의 징검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오늘, 나는 다른 지역에 살지만 때마침 유관순 기념관 탐방 기회를 얻어 이화의 교정에 첫발을 딛는다. 물오른 바람이 마중 나와 초여름의 풋풋함을 한 아름 안겨준 유월의 오후였다. 유관순 기념관에 들어서는 순간, 복잡하게 얽인 생각의 밑바닥에서 정체가 불분명한 울렁거림이 고개를 들었다. 사진 속 16세의 어린 유관순이 왜 그렇게 아픈 역사를 잊고 살았냐고 질책 한 것 같아 발걸음이 주춤, 온 몸에 열이 오름을 느끼기도 했다. 삼일 운동의 시위대가 고종의 시신이 있는 덕수궁 주변으로 몰려가며 부르는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교정을 울릴 때 고등과 1학년이었던 유관순은 여섯 명으로 조직한 시위결사대와 함께 담장을 넘기로 했단다. 교장 프라이는 자신을 밟고 가라며 애원하듯 말렸지만 그들의 의지는 너무 확고해서 기어이 담을 넘고 말았다. 그 후부터 3.1운동 진원지의 핵이 되어 고종의 장례식을 마치고 대거 참여한 시위대에 합류했다가 자신의 온 몸을 조국에 바치겠다고 결심한다. 사촌 언니 유예도와 같이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고향 아우내(병천)로 내려간다.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은 일찍 감리교 신자가 되어 향리에 홍호학교를 세우고 민족 교육과 계몽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유관순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아버지와 같이 시위를 주도하다가 헌병들의 총검에 아버지 어머니를 한꺼번에 잃고 오빠도 투옥되었다. 그리고 유관순은 체포되어 공주감옥에서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서도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감옥에서 순국한다. 이화학당의 담장을 넘은 후 토막 난 시신으로 프라이 교장과 월터 선생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늘 우리가 어느 제국의 식민지로 살고 있다면 나도 담을 넘어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들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해본다. 실은 지금도 문화식민지의 그물을 보이지 않게 펴 놓고 걷어 올릴 기회만을 기다리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나라를 지킬 것인가를 국민 모두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이화여고 교정의 늙은 은행나무 아래에서 유관순이 빨래하던 빨래터가 남아 있었다. 어린 그녀가 식민지란 오욕을 두드려 빨아 헹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아래와 같은 박두진의 시를 음미해 본다. 유관순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3월 하늘에 뜨거운 피 무늬가 어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대지에 뜨거운 살과 피가 젖어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조국 우리들의 겨레는 우리들의 겨레 우리들의 자유는 우리들의 자유이어야 함을 알았다. 아,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우리들의 가슴 깊이 피터져 솟아나는 , 우리들의 억눌림, 우리들의 비겁을 피로써 뚫고 일어서는 절규하는 깃발의 뜨거운 몸짖을 알았다. 유관순 누나는 저 오를레앙 잔다르크의 살아서의 영예, 죽어서의 신비도 곁들이지 않는 , 순수하고 다정한 우리들의 누나, 흰 옷 입은 소녀의 불멸의 순수, 아, 그 생명혼의 고갱이의 아름다운 불길의, 영웅도 신도 공주도 아니었던, 그대로의 우리 마음, 그대로의 우리 핏줄, 일체의 불의와 일체의 악을 치는, 민족애의 순수 절정, 조국애의 꽃넋이다. 아,유관순 누나, 누나, 누나, 누나, 언제나 3월이면 언제나 만세 때면, 잦아 있는 우리 피에 용솟음을 일으키는 유 관순 우리 누나, 보고 싶은 우리 누나, 그 뜨거운 불의 마음 내 마음에 받고 싶고, 내 뜨거운 맘 그 맘 속에 주고 싶은 유관순 누나로 하여 우리는 처음 저 아득한 3월의 고운 하늘 푸름 속에 펄럭이는 피깃발의 펄럭임을 알았다. -박두진의 “3월 1일 하늘” 전문 *의사와 열사의 구분 총이나 칼등 무기를 가지고 싸웠던 안중근 같은 분을 의사라 하고 맨손으로 싸웠던 유관순을 열사라 한다. 시인 송시월은 전남 고흥 출생, 1997년 월간 으로 등단, 계간 편집 위원 저서로는 시집 이 있다.
- 2017-06-29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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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송시월과 나누다] 정동골
- 가문 땅을 적시는 단비가 내린 다음날 아침, 서울시가 주최하고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가 주관하는 서울 詩 기행을 나섰다. 미세먼지도 말끔히 걷히고 길가의 초여름 나무들은 상큼하고 싱그러워 내 삼십대를 떠올리면서 정동골로 향했다. 정동은 근대사가 곳곳에 살아 쉼 쉬는 곳이요 덕수궁 돌담길은 내 데이트 코스이기도 했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덕수궁의 동문인 대한 문을 들어서자 비운의 역사가 되살아나는 듯 마음이 침울했다. 고종이 야심차게 자주적으로 선포한 이란 국호와 란 년호의 맥이 끊긴 곳이기도 하다.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 했던 곳도 다시 돌아온 곳도 이 곳 경희궁(덕수궁)이었다. 1918년 경술국치로 완전히 국권을 일제에 빼앗겼으며물론 외교권도 빼앗겼다 얼마 후 이곳에서 강제 퇴임 당하는 치욕의 장소이기도 했다. 비운의 왕 고종의 승하는 3.1운동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주인 잃은 석조전은 유일한 서양식 건축물인데 고종이 귀빈을 만나거나 외국 손님을 만날 때의 장소였다. 지금 봐도 품위 있고 멋이 있었다. 그 앞 느티나무 한 그루가 옛 주인을 생각한 듯 푸른 잎을 떨어뜨려 날리고 있었다. 배재학당 박물관에 가니 보수중이어서 들어가지 못했으나 부활절 아펜젤라의 기도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조선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고 자유와 빛을 주옵소서”라는 간절함을 담은, 그는 한양 정동에 한옥을 구입하여 4명의 학생으로 교육을 시작하고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란 학교명을 부여 받고 배재학당을 세웠다고 한다. 이곳에서 서재필과 이승만이 나왔고 시인 김소월이 나왔다. 그리고 후에 카프문학의 발상지가 되기도 했다. 카프문학의 주 멤버인 박세영 박팔양 나도향 이런 시인들이 배재학당 출신들이다. 박세영의 그 유명한 시 는 노래로도 불려져 북한에서는 성악가 조청미가 불렀다 한다. 1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흘러 내리고 뭇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냐 2,3 단원 중략 남극에서 왔나 북극에서 왔나 산상에도 상상봉 더 오를 수 없는 곳에 깃들인 제비. 너희야말로 자유의 화신 같구나, 너희 몸을 붙들자 누구냐 너희야말로 하늘이 네 것이요 대지가 네 것 같구나 녹두만한 눈알로 천하를 내려다보고, 주먹만한 네 몸으로 화살 같이 하늘을 꿰어 마술사의 째찍 같이 가로 세로 휘도는 산꼭대기 제비야 중략 나는 차라리 너희들 같이 나래라도 펴 보고 싶구나 생략 나더러 진달래꽃을 노래하라 하십니까 이 가난한 시인더러 그 적막하고도 가냘픈 꽃을 이른 봄 산골짜기에 소문도 없이 피었다가 하루 아침 비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을 무슨 말로 노래하라 하십니까?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사실이외다 백일홍처럼 붉게붉게 피지도 못하는 꽃을 노래하느니 차라리 붙들고 울 것이외다 친구께서도 이미 그 꽃을 보셨으리라 이분들의 시를 읖조리다보니 역사의 숨결이 아프게 다가오는듯 하다. 시인 송시월은 전남 고흥 출생, 1997년 월간 으로 등단, 계간 책임 편집. 저서로는 시집 시문학사 이 있다.
- 2017-06-19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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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으로 간 까닭은
- 긴 가뭄의 갈증(渴症)은 해소되지 않은 채 30도를 오르내리는 한낮의 열기는 때 이른 초여름으로 접어들었다. 때 이른 더위에 온종일 직장에서 시달리던 몸은 퇴근 후에는 파김치가 되어 가까스로 저녁 한 술 뜨고 TV앞에 앉지만 이내 밀려오는 피로에 눈꺼풀은 천근만근 견디지 못하고 스르르 감기곤 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반복되는 생활패턴에 생체리듬은 자꾸만 다운되고, 먹고 바로 자는 버릇 때문에 내장지방은 쌓여만 가니 반갑지 않은 배만 불룩 나왔다. “이러면 안 되는데…”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한번 길들여진 육체는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는다. 오늘은 큰맘 먹고 집을 나선다. “기필코 운동을 시작해야지…” 집을 나서자 거센 바람이 몰아쳐 으스스 한기가 느껴지는 바람에 황급히 되돌아가 바람막이를 걸치고 나왔다.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에는 달은커녕 별님조차 보이지를 않은 채 먹구름만 잔뜩 끼었다. 백운산 숲속으로 발길을 옮겼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느새 어둠이 장막처럼 내려와 코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깜깜했다. ‘휘리릭~’ 다소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가지가 우수수~ 흔들리니 섬뜩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내려간다. ‘저벅저벅, 달그락 달그락’ 고요한 적막을 깨고 필자의 발자국 소리만 유난히 크게 울려 퍼진다. 초입(初入)을 지나 한참을 올라가니 산비둘기 구구대는 소리에 이어 ‘소쩍소쩍’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소쩍새 울음소리가 잃어버린 추억을 살려낸다. “아~ 얼마 만에 들어보는 소쩍새 울음소리이던가!” 정겨움이 샘솟는 한편 짙은 어둠속으로 진입하는 낮설음에 순간 무서움이 엄습한다. 더구나 올라가는 중간에 예비군 훈련장이 있었는데, 교육보조재료로 설치 해 둔 시설물들(모조집, 동굴, 돌무덤, 적군의 형상 등)이 어둠속에서 불쑥 불쑥 나타나니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쫄깃해졌다. 발걸음은 빨라지고 어느새 등줄기에서는 송골송골 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할 무렵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백운산 중턱 어디쯤에 필자의 고향친구가 살고 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친구는 필자와는 초등학교 동기동창인데, 졸업 후에 한동안 왕래를 하지 못했다. 필자가 전·후방 각지에서 많은 세월을 보내는 동안 친구는 고향의 터전을 지키면서 살았다. 드디어 희미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친구의 집이 가까워졌음을 알 수가 있었다. 밤늦은 시간에 불쑥 찾아온 필자를 친구는 반색을 하며 맞아준다. 사실 산속에서 저녁 아홉시쯤이면 한밤중이나 다름없는 시간인데도 스스럼없이 반겨주는 친구가 고마웠다. 잠시 땀을 식히며 친구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얘기꽃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깊어가는 시간에 마냥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다시 오마” 작별을 하니 거실 한 귀퉁이에 캐다 놓은 햇감자 한바가지를 봉지에 담는다. 많이는 필요하지 않다고 극구 사양하는 필자에게 가득 한 봉지를 담아 배낭에 넣어준다. 밭에 금세 나가 이것저것을 뜯어다 줄 기세인 친구를 뒤로 하고 황급히 하산(下山)하기 시작했다. 친구는 이 산속에서 닭이며 염소를 키우는데, 필자에게 주말쯤에 미리 전화를 하고 올라오면 토종닭 한 마리를 잡아놓겠다고 신신당부를 한다. 내려오는 내내 어린 시절 친구의 따뜻한 정이 마음속을 촉촉하게 적셔준다. 무기력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숲으로 들어간 필자에게 어둠속에서 들려오던 소쩍새 울음소리는 멀리 지나가버린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어 좋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적막한 산길을 홀로 걸어보니 태고적 신비를 체감할 수 있어 또한 좋았다. 뭐니 뭐니 해도 가진 것 아낌없이도 주고 싶어 하는 친구의 따뜻한 정과 마음을 얻었으니 이 또한 큰 행운이 아니던가, 이제부터라도 가끔씩 어둠이 짙게 깔린 숲으로 들어가 보아야겠다.
- 2017-06-1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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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수섬
- 수억 년 전 바다였다가 다시 육지로 변했다가 이젠 또 그 무엇으로 변할 것이라는 곳. 바다 위의 작은 섬으로 오롯하던 수섬이 시화방조제로 인해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되면서 넓디넓은 짭짤한 땅에 뿌리를 내린 삘기가 해마다 가득가득 피어나는 곳이다. 군데군데 불긋불긋한 함초들은 들판의 풍경이 되었다. 줄기 하나 뜯어 맛을 본다. 짭짤한 맛이 입안에서 감칠맛을 느끼게 해준다. 초여름이 시작될 무렵부터 절정인 삘기꽃의 장관을 보러 사람들이 모여든다. 드넓은 들판에 쏟아지는 초여름 무더위가 한창이다. 가끔 불어주는 바람에도 땀은 쉬지 않고 흐른다. 1년 전에도 2년 전에도 찾았던 이 수섬이 개발로 인해 곧 사라진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풍경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연일 찾아들고 있다. 이전 같았으면 방목된 소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정경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한국의 세렝게티라 불렸던 것도 소떼들 덕분이었다. 반짝이는 삘기들의 일렁임에 바람도 노을도 머물다 가고 별빛도 달빛도 숨 막히게 아름다웠던 곳이다. 이 멋진 풍경을 무참히 없애기로 결정해버리는 무자비한 행정가들이 답답하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섬이 또다시 인간의 손으로 뭉개질 처지다. 도시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운 자연이 사라진다. 필자가 찾아갔을 때는 이미 주차장이 폐쇄된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철조망이 쳐진 커다란 구멍으로 삘기밭으로 들어섰다. 멀리 철탑이 보이고 형도가 뿌연 안개에 반쯤 가리어진 채로 마주 보인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을 준다. 이국적인 풍경에 모델들까지 대동한 촬영 팀들도 군데군데 보인다. 그 일행들이 삘기꽃의 숲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 나타나곤 한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듯한 풍경이다. 해가 지면서 노을빛에 더욱 반짝이는 삘기의 아름다움에 경탄한다. 점점 노을이 깊어간다. 이때쯤 저 멀리에서 사자 한 마리 어슬렁거리며 걸어온다면 저절로 아웃오브아프리카(Out Of Africa)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아낼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곳곳에 카메라를 세팅해놓고 기다리던 사람들 앞에서 노을이 온 대지를 물들이면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끊이지 않고 셔터 소리가 경쾌하게 터진다. 가슴 뿌듯하게 행복한 시간이다. 한낮엔 수섬의 바람과 한판 놀고, 저녁엔 황금빛 삘기의 반짝거림에 가슴 뛰던 하루. 그동안 멋진 자연 속에 있게 해준 수섬이 고맙다. 그러나 이젠 안녕.
- 2017-06-12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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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신발달, 봉수대와 스마트폰
- 가뭄에 농민의 가슴이 타들어가는 초여름이다. 친구 몇 명과 성곽길을 따라서 남산에 올랐다. 하늘은 맑고 서울타워가 더 높게 보인다. 남산광장 북쪽에는 도심 쪽으로 평소 별 관심 없이 지나쳤던 남산봉수대가 있다. 때마침 근무교대식을 볼 수 있었다. 봉수대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옛날의 통신수단이다. 높은 산봉우리에서 봉화나 연기를 이용해 먼 거리에서 일어나는 위급한 소식을 전달하던 곳이다. 밤에는 횃불인 봉화, 낮에는 연기를 피워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한양으로 신속하게 전달하였다. “전국의 봉수대는 남산에 있는 5개소를 최종 목적지로 편제되었다. 남산봉수대는 중앙 봉수소로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무악ㆍ봉화ㆍ아차산 봉수대는 한 개이고 이곳은 왜 5개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남산봉수대는 동쪽의 제1봉부터 서쪽 방향으로 제5봉에 이르는 다섯 개의 봉수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봉의 봉수대는 함경도-> 강원도-> 광진구 아차산에 닿은 신호를 받았고, 제2봉은 경상도 해안ㆍ경상도 내륙-> 충청도 내륙-> 경기도 광주로 이어진 봉화를 받았다. 제3봉의 봉수대는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내륙-> 한성의 무악 동봉에 전해진 신호를 받았고, 제4봉은 평안도ㆍ황해도의 바닷길-> 경기도 육로-> 한성의 무악 서봉에 연결된 봉화를 받았으며, 제5봉은 전라도 해안-> 충청도 내륙-> 경기도 해안-> 강서구의 개화산으로 전달된 봉수를 받았다. 신호는 횃불이나 연기의 수를 조정하여 위급함의 정도를 나타냈다. 한 번 드는 것을 일거라 하여 평상시에는 일거, 해상이나 국경 부근에 적이 나타나면 이거, 변경이나 해안 가까이에 적이 나타나면 삼거, 적이 국경을 침범하거나 병선과 접전을 하면 사거, 적이 상륙하거나 국경을 침범한 적과 접전을 하면 오거를 올리도록 하였다. 옛 적 봉수제도를 생각하였다. 우선 위급한 정보가 모든 사람에게 공유되었다. 특정인을 위하여 기밀이라는 이유로 숨기거나 해킹할 수단도 없다. “안개ㆍ비ㆍ바람으로 기후가 나빠 봉수가 불가능해지면, 포성과 뿔 소리로 인근의 주민과 수비군에게 상황을 전달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각 봉수대의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알리기도 했다.”는 해설에서 만지작거리던 스마트폰을 잠시 멈췄다. 통신수단 발달사가 한 곳에 있다. “그 당시에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상상의 날개가 하늘로 치솟았다. 요즈음 미세먼지ㆍ오존 재난경보가 수시로 전파되었다가 해제되곤 한다. 하지만 정작 시급한 지진이나 대형사고 전파는 너무 늦는 일이 잦아서 불편하다는 이야기가 많다. 스마트폰 속 사진으로 남겨진 남산봉수대를 다시 생각하였다.
- 2017-06-12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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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멈추고, 분위기가 흐르는 캠핑 바비큐 맛집
- 초여름, 캠핑하기 알맞은 시기다. 캠핑의 꽃은 단연 바비큐! 같은 고기라도 야외에서 불을 피워 구운 고기는 더 맛있게 느껴진다. 찌르르르 산벌레 울음소리, 타닥타닥 피어오르는 모닥불, 살랑살랑 불어오는 은은한 바람이 천연조미료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캠핑의 낭만을 경험할 수 있는 곳, ‘모노캠프’를 찾아갔다. 자연이 빠지면 진짜 캠핑이 아니다 경기도 용인에 자리 잡은 모노캠프는 인근에 고기리유원지와 고기리계곡, 광교산 등이 있어 자연과 벗 삼아 캠핑 바비큐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주변 경관도 볼거리이지만, 모노캠프 안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풍경을 만나게 된다. ‘개굴개굴’ 개구리 울음소리가 맞이하는 연못과 가지런히 쌓여 있는 참나무 장작, 캠핑 천막을 두른 야외 테이블까지, 마치 숲속의 아지트를 발견한 듯하다. 저녁 시간에 가면 야외 정원에 모닥불이 빨갛게 피어오르고 연못 분수에 조명이 들어와 별빛처럼 반짝인다. 일반적인 식당은 실내 테이블에서 고기를 먹고, 야외로 나와 커피나 차를 마시는 게 대부분인데, 이곳은 그 반대라 생각하면 된다. 고기는 야외 테이블에서, 디저트는 실내에서 즐길 수 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아요 한때 캠핑 스타일의 바비큐를 모방한 맛집들이 유행했다. “캠핑 도구로 꾸민 실내에서 간이의자 몇 개 놓고 고기 구워 먹는다고 해서 캠핑 분위기가 나는 것은 아니다.” 모노캠프 주인장의 이야기다. 가게를 운영하기 이전에도, 또 현재까지(아마 앞으로도 계속) 캠핑을 사랑하는 주인장은 자신이 느끼는 캠핑의 매력을 공유하기 위해 공을 쏟았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소리’다. 바람소리, 물소리, 음악소리 이 세 가지는 꼭 넣고 싶었다고 한다. 본래 이곳은 라이브카페였는데, 정원을 개조하며 연못 분수를 만들었다. 그렇게 바람소리와 어우러진 물소리를 낼 수 있었고, 연못 안 개구리 울음소리도 덤으로 얻었다. 또 가요 대신 잔잔한 재즈와 팝 음악이 흘러나오도록 했다. 식사 중 음악이 거슬리지 않게 ‘리스닝(listening, 듣는 것)’이 아닌 ‘히어링(hearing, 들리는 것)’을 의도한 것이라고. 분위기를 사는 힐링 맛집 강릉에서 올라와 2주에 한 번꼴로 모노캠프를 찾는다는 단골은 “이곳은 고기가 아닌 분위기를 사는 맛집이다. 번거롭게 캠핑을 떠나지 않고도 캠핑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게 매력이다”라고 설명했다. 대부분 고기와 야채, 소시지, 새우 등을 함께 구워 먹을 수 있는 세트 메뉴(캠핑 훈연 바비큐 세트 4인 6만9000원, 와규 프리미엄 꽃등심 세트 4인 9만9000원)를 주문한다. 구이용 메뉴 못지않게 손님들의 반응이 뜨거운 것은 바로 ‘라면(2000원)’. 캠핑을 가본 사람이라면 야외에서 끓여 먹는 라면 맛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분위기를 재현하기 위해, 라면은 끓여서 내지 않고 봉지라면과 달걀, 양은냄비,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준다. 직접 끓여 먹으라는 것인데, 분위기 덕분인지 수고스럽기보다는 흥미롭게 느껴진다. 캠핑에서 빠질 수 없는 것 또 하나, 시원한 맥주가 아닐까? 이곳에서는 얼음이 든 양동이에 소주, 맥주, 음료 등을 한꺼번에 담아와 먹을 수 있다. 이 또한 독특한 풍경이다. 야외에서의 시간이 아쉽게 느껴진다면, 실내로 자리를 옮겨보자. 다양한 카페 메뉴는 물론, 주류와 안주까지 마련돼 있어 1차를 마치고 가장 빠르게 2차를 즐길 수 있다.
- 2017-05-25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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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 상춘정,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봄의 끝, 여름이 시작되는 즈음이다 그 들판엔 뜨거운 한여름의 태양을 방불케 하는 더위가 쏟아지고 있었다. 언덕으로 오르는 길 옆 냇가에는 여름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고 몸부림치듯 엉킨 덩굴들이 옥천의 들길에서는 자유로워 보인다. 나무 그늘에는 더위를 피해 동네 사람들이 쉬고 있었고, 언덕 아래엔 초여름의 강태공들이 텐트를 치고 하세월 유유자적한 모습이다. 옥천의 보정천, 그리고 그곳에 섬처럼 떠 있는 정자 상춘정이 보인다. 시인 정지용의 고향 옥천 땅. 그의 시처럼 아름다운 땅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어릴 적 여름방학 때 고모네 집에 놀러가던 길, 그 들판에서 사촌들과 뛰어 놀았지. 순진무구했던 어린 시절의 필자가 거기 아직 있는 듯하다. 그리움에 가슴에 뭉클해져 온다. 온몸으로 땀이 흐르던 날이었다. 그럼에도 그 들판을 걸으면서 마냥 행복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그리고 저 넓은 냇가에 안개가 휘감겨 있을 새벽에 올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 실개천이 휘도는 그 넓은 벌을 떠나오며 문득 돌아보니 상춘정이 내게 인사를 하는 듯하다. “안녕, 잘 가요.” “안녕, 다시 오고 싶을 거예요.”
- 2017-05-24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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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덩굴장미를 보며
- 산책길에 나섰더니 어느새 새빨간 덩굴장미가 지천이다. 이제 연분홍 벚꽃이나 샛노란 개나리, 백목련, 자목련 등 봄꽃이 지나간 자리에 이렇게 예쁜 장미꽃이 피었다. 높은 축대가 있는 집 담장에도 흘러내릴 듯 빨간 장미가 넝쿨 졌고 산책길 한 편에도 무리 지어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고 있어 보기에 여간 예쁜 게 아니다. 이렇게 탐스러운 덩굴장미를 보니 옛날 장미로 뒤덮였던 장미 터널이 떠오른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필자는 돈암동 한옥 한곳에서만 살았다. 우리 집, 골목에는 문화재급 되는 한옥도 여러 채 있었고 대부분의 집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한옥의 멋을 자랑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동네의 명칭은 동소문동이었고 미아리 쪽으로 한 정거장 올라간 곳에 돈암동 전차종점이 있었다. 필자는 전차 세대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전차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겠지만 필자는 여중 시절 전차로 통학을 했다. 필자가 살던 돈암동에 전차종점이 있었고, 또 동대문에 있는 종점, 경전이라는 곳에서는 한 달씩 쓸 수 있는 자유 티켓, 패스권을 팔았다. 그 패스권을 사면 한 달 동안은 무제한 프리로 전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용무가 없어도 을지로나 시내 쪽으로 타보기도 하면서 필자는 프리패스 권을 잘 이용하였다. 우리 집이 돈암동이어서 필자는 돈암동에서 전차를 타고 종로4가 광장시장 앞에서 내려 갈아타고 동대문 밖 창신동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돈암동에서 종로4가까지 가는 동안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가는데, 잊을 수 없는 건 봄이 지나 초여름 될 때쯤 로터리의 철제 터널에 하나 가득 피어있는 새빨간 덩굴장미다. 상상해보시라. 전차에 앉아 빨간 장미로 온통 뒤덮인 꽃 터널을 지나는 기분을... 지금 생각해도 너무 로맨틱하고 아름답던 광경이다. 3년 내내 봄, 여름이면 꽃 터널을 지나다니며 동화 나라를 지나는 듯한 상상을 하며 필자의 감수성을 키웠다. 필자가 고등학생이 되는 무렵 전차는 없어졌다. 그 낭만도 따라서 사라져버렸다. 전차가 지나가는 철로를 둘러싸고 있는 로터리에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무덤이 하나 있었다. 도시 한복판의 무덤이라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는데 오랫동안을 그 무덤이 그곳에 있었던 건 그 무덤을 훼손하는 사람은 죽는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미신이었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없어진 걸 보면 누군가 용감하게 그 무덤을 옮겼나 보다. 이제 둥그런 로터리 동산은 없어지고 일직선으로 차가 다니게 되었다. 오늘도 그 혜화동 로터리를 직진으로 지나왔는데, 동그란 모습이었던 로터리와 댕댕댕~하며 달리던 전차의 기억. 어린 날의 예뻤던 추억이 그리워 가슴이 서늘하다.
- 2017-05-24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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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속의 영웅을 떠나보내며
- 필자는 41년 전인 1976년 군대에서 만난 한 장교와의 인연을 뒤돌아보려 합니다. 1979년 전역 후에도 2011년까지 35년 동안 만남을 이어오던 중이었습니다. 담도암이라는 재활할 수 없는 병에 걸려 일찌감치 삶을 마무리한 옛 전우와의 안타깝고 못다 한 아쉬운 인연을 추억해봅니다. 오늘 이 화창한 초여름에, 따뜻한 체온을 함께 나눌 수 없는 누군가와 영영 작별을 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이별의 섭섭함과 안타까움이 쓰나미처럼 가슴속을 덮쳐옵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이셨지만, 뿜어져 나오는 정기는 어느 누구도 당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셨습니다. 올곧은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셨습니다. 허스키한 음성에 호탕한 웃음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둘러앉아 같이 나누던 음식도 맛나게 드시며 아낌없이 나눠주곤 하셨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담소하며 함께 즐기던 시간들이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님은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에 직업군인으로 청춘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그즈음엔 누구나 어렵고 힘들은 시절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남다른 학구열과 집중력을 발휘하시어 사병에서 영관 장교까지 진급하신 자수성가, 대기만성의 표본이셨습니다. 설악산 뒤편 깊숙한 골짜기에서 모래배낭을 메고 산악구보 훈련으로 체력단련을 해야만 했죠. 구보 후에는 배낭에 쓸려 전투복 등판에 배어나온 검붉은 핏자국을 개울가에서 같이 빨아 말려야 했습니다. 한여름 6·25를 전후로 하는 혹서기 천리행군과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진행했던 혹한기 천리행군도 생각납니다. 그때도 잰걸음으로 항상 선두에 나서서 팀원을 이끄셨죠. 고공낙하 훈련 시에는 팀원들의 무사 귀대를 기원하며 아내와 함께 성당에 나가서 기도를 드리기도 하셨다죠. 저희 팀원들은 전우애로 느끼기 전에 훈훈한 인간애로 함께했었습니다. 주도면밀한 전략과 반복적인 철저한 훈련으로 탁월한 팀 전투력을 평가받았습니다. 짧게나마 같이했던 힘겹고 즐거웠던 시간들을 이제 우리들 가슴속 깊이 서글픈 마음으로 묻어두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들끼리 모여 옛일을 얘기할 때마다 한 장씩 한 켜씩 꺼내 들춰보게 될 것입니다. 전역 후엔 인생의 선배로서뿐만 아니라 혈육으로 맺어진 친형제처럼 지내왔습니다. 계절마다 만나서 회포도 풀고 정분도 쌓으며 이승에서의 여정을 함께함이 즐거웠습니다. 퇴촌 산자락에 수십 개의 벌통을 줄 세워놓고 양봉을 하셨죠. 자나 깨나 망투를 덮어쓰고 따가운 벌침에 쏘여가며 돌보신 향긋한 꿀을 우리들과 주위 이웃들에게 나눠주시곤 하셨습니다. 꿀보다 더 달콤한 인간의 정을 건네주셨기에, 안타까이 보내드려야 하는 우리들 가슴이 더욱 메워져옵니다. 남들보다 더 투철한 사명감과 국가안보관을 가지시고 국방 업무에 30여 년 젊음을 받치셨습니다. 그동안 아내께서는 묵묵히 다정하신 손길과 따뜻한 미소로 손발이 되어주셨습니다. 아름다운 내조자로서 가시는 님에게 너무도 잘 어울리는 반쪽이셨습니다. 그 어떤 서방님이시고 그 어떤 애들 아버지이셨는데, 이렇게 먼저 떠나보내야 하시다니 억장이 무너지실 겁니다. 서글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누가 대신 알아줄 수 있겠으며 어느 누가 보듬어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 젊고 건실한 두 아들과 함께 못다 이루신 님의 뜻을 받들어 이어가셔야 합니다. 기도드리며 님이 떠나가신 커다란 공간을 채워나가셔야 합니다. 속상하고, 처절하고, 불쌍하고, 안타까워 눈앞이 캄캄하시겠지만 앞으로도 저희들이 함께할 것입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시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우리들이 함께해왔던 것처럼 친근한 모습 이어가기를 먼저 가시는 님은 믿고 기대하고 계실 겁니다. 평상시 혈육의 정을 나눠오시던 일가친척분들과 이웃의 형제자매님들 모두 오셨습니다. 멀리 떠나시는 길을 배웅하며 우리들 모두 두 손 모아 빕니다. 하느님의 품에 따뜻하게 안기시어 연년세세 평안하시고 아름다운 곳에서 영면하시길 비옵니다.
- 2017-05-12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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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퇴역군인의 죽음 앞에서
- 임이시어! 홍 경호! 홍 요셉! 형제님 이시어 오늘 이 화창한 초여름에, 따뜻한 체온을 함께 나눌 수 없는 먼 길로 영영 긴 작별을 해야만 하는 섭섭한 안타까움이, 쓰나미 해일처럼 우리 가슴 속을 덮어 옵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셨지만, 뿜어져 나오는 정기는 누구도 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강인함과 올곧은 모습은, 주위 세상을 이끌어 가기에도 충분하시었고, 매사에 정도를 택하시어 빈틈없는 이승의 행로를 거룩하게 마무리하셨습니다. 허스키한 음성에 호탕한 웃음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둘러앉아 식사할 땐 음식을 그리 맛있게 드셨습니다. 밥억고 담소하며, 함께 즐겼던 시간이 서글프게 마음에 쌓여갑니다. 혈기 왕성한 젊은 청춘 시절엔 직업군인 가난을 달고 사셨습니다. 누구나 그즈음엔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겠지만 남다른 학구열과 집중력을 발휘해 병사에서 영관장교까지 진급하신 자수성가, 대기만성의 표본이셨습니다. 설악산 뒤편의 깊숙한 골짜기 속에서 30kg 모래 배낭을 메고 산악구보할 땐 전투복 등판에 배어나온 검붉은 핏자국을 개울가에서 같이 앉아 빨아 말리기도 하셨습니다. 한여름 한국전쟁 기념일 전후로 하는 혹서기 천리행군과, 12월 크리스마스를 앞에 두고 강행했던 혹한기 천리행군 때는 잰걸음으로 항상 선두에 나서 팀원을 이끄셨습니다. 고공낙하 훈련 시에는 팀원들의 무사 귀대를 기원하며 부인과 함께 성당에 나가서 기도를 드리기도 하셨습니다. 당시 팀원들은 전우애를 알기 전에 이런 훈훈한 인간애를 함께하셨습니다. 주도면밀한 전략과 반복적인 철저한 훈련으로, 맡겨지는 임무수행에서도 탁월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짧게나마 같이했던 힘겹고 즐거웠던 시간, 이제 우리 가슴속 깊이 묻어두고, 끼리끼리 모여 옛일을 얘기할 때마다 한 장씩, 한 켜씩 꺼내 들춰보게 될 것입니다. 전역 후엔 인생의 선배로서뿐만 아니라 혈육으로 맺어진 친형제처럼, 계절마다 만나서 회포도 풀고 정도 쌓으며 이승에서의 여정을 함께했습니다. 퇴촌 산자락에 수십 개의 벌통을 줄 세워 앉혀 놓고 자나 깨나 그물망을 덮어쓰고 따가운 벌침에 쏘여가며, 향긋한 꿀맛을 주위의 이웃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셨습니다. 꿀맛보다 더 달콤한 인간의 정을 함께하셨음에 보내 드리는 우리 가슴이 더욱 메워 옵니다. 남들보다 더 투철한 사명감과 국가관을 갖고 조국의 국방에 30여 년 젊음을 받치는 동안, 부인께서는 묵묵히 다정한 손길과, 따뜻한 미소로 서방님의 손발이 되어 빛나지 않는 아름다운 내조자로의 역할을 충분히 다하셨습지다. 가시는 임의 너무도 잘 어울리는 반쪽이셨습니다. 그 어떤 서방님이고 그 어떤 아버지셨는데, 이렇게 먼저 떠나보내야 하시다니…. 서글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누가 신 알아줄 수 있겠으며, 어느 누가 보듬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 젊고 건실한 두 아들과 함께 못다 이루신 임의 뜻을 받들어 기도드리며, 임이 떠나가신 커다란 공간을 메워 나가셔야 합니다. 속상하고, 처절하고, 불쌍하고, 안타까워 눈앞이 캄캄하시겠지만 앞으로는 저희가 함께할 것입니다. 조금만 힘을 더 내시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함께하는 지금 같은 친근한 모습을, 오늘 먼저 가시는 임은 기대하고 계실 겁니다. 평상시 혈육의 정을 나누시었던 일가친척분들 모두, 하느님의 자식인 성당의 형제ㆍ재매님들 모두, 그리고 임의 떠나시는 먼 길을 배웅하기 위하여 모여 있는 우리 모두가 두 손 모아 빕니다. 하늘나라 주님의 품에 따뜻하게 안기시어, 연년세세 평안하시고 편하신 곳에서 영면하시길 비옵니다. 삼가임의 명복을 빕니다.
- 2016-06-16 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