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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도 귀향도 멈춰버린 섬 ‘교동도’
- 강화도에 접어들어 관광객이 붐비는 도로를 벗어나 한참을 달리다 보면 앳된 군인이 차를 막아선다. 그가 전해준 비표는 이미 많은 이의 손을 거쳐 낡아 있었지만, 잃어버렸을 때 간첩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쥐어든 손에 힘이 들어간다. 때마침 잘 나오던 라디오 음악에 잡음이 끼어들며 괜한 으스스함을 더한다. 그렇게 언덕을 넘으니 교동대교가 시야에 들어온다. 다리 앞에서 다시 군인의 출입통제 시간에 대한 당부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아름다운 이 섬과 마주할 수 있다. 시간이 멈춘 섬 교동도와 말이다. 키가 큰 오동나무[喬桐]라는 의미를 담아 지은 이름 교동도는 강화도 서쪽에 자리 잡은 섬으로 면적으로는 14번째로 꼽힐 만큼 큰 섬이다. 섬 사이의 물살이 거세 조선시대 때는 탈출이 어려운 유배지로 활용되었다. 연산군은 이 섬에 유배돼 생의 마지막을 보냈고 광해군과 임해군, 고종 황제의 조카 이준용도 교동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고려 때는 중국과의 교역 중심지 중 한 곳이었지만, 교동도가 무엇보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부분은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집성촌이라는 것이다. 교동도는 수영으로 바다를 건너오는 탈북자가 있을 정도로 북한 황해도와 가깝게 마주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위해 교동도로 월남했던 황해도 도민들이 휴전 후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서 집성촌이 형성됐다. 교동도의 대표적 관광지로 꼽히는 대룡시장을 황해도 연백군의 연백시장을 본떠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이들의 슬픈 사연도 시간의 흐름에 바래버린 것인지 대룡시장에서 만난 한 실향민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제 이 시장에서 실향민은 별로 없어요. 다들 일흔이 넘은 나이이니까요. 많이 돌아가시기도 했고 아이들은 모두 인천이나 서울로 떠나 남은 실향민 가족도 거의 없어요.” 실제로 대룡시장의 명물 중 하나였던 시계방도 이곳을 지키던 주인의 죽음으로 멈춰버렸지만, 이어받은 이가 없어 문을 닫았다. 시간이 멈춘 것이 이 때문인가 싶을 정도다. 실향민의 한, 켜켜이 쌓인 곳 이전까지 교동도는 북한 땅과 맞닿아 있는 탓에 출입제한이 있었고, 강화도에서 건너오는 뱃삯은 차량 편도가 1만6000원이나 되어 관광지로 환영받지도 못했다. 유동인구도 적었다. 이런 외부와의 단절은 시간이 지나도 그 시절을 붙잡아둔 듯 과거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만들었다. 약국이며 양복점이며 시계방, 잡화점 할 것 없이 예전 모습 그대로다. 교동도의 대룡시장이 유명해진 것은 지난 2010년 KBS2 TV 예능 프로그램 을 통해 소개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197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모습은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얼마 후인 2014년 7월, 교동대교가 완공되면서 사람들의 높은 관심은 밀려드는 관광객으로 이어졌다. 교동도 토박이들은 아직도 이런 관심에 의아해한다. 대체 이곳에 볼 게 뭐가 있다고 몰려오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관광객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있다. 바로 교동다방이다. 이 마을에 살면서 15년째 다방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장은 섬의 변화를 가장 크게 체감한 이 중 하나다.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동네 장사였죠.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섬에 사람이 꽤 많았어요. 다들 쌀농사를 크게 지어 풍족했죠. 술 마시다 흥에 겨워 2차, 3차 오는 모임도 몇 개나 됐으니까요. 그러다 사람들이 서울로 빠져나가면서 한동안 섬이 조용했다가, 다리가 생기면서 관광객이 밀려들었어요. 여기 사방에 붙어 있는 메모도 다리가 생기면서 다녀간 관광객들이 하나둘씩 써놓고 간 것들이에요. 장사가 잘될 때는 쌍화탕을 하루에 100잔까지 팔아봤어요. 이후 석모도에 다리가 생기면서 서울 사람들이 그리로 갔고, 요즘은 손님이 좀 줄었어요.” 대룡시장에서 관광객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간식 ‘꽈배기’다. 관광객들의 배를 채울 만한 먹거리가 마땅치 않아 교동도의 한 주민이 만들어 팔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시장의 대표 상품이 됐다. 일부 상인이 놀러온 사람들이 물건은 안 사고 꽈배기만 입에 물고 다닌다며 볼멘소리를 한다. 최근에는 외지 상인들이 대룡시장의 빈 가게들을 채우면서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복각해 곳곳에 붙여놓은 군사정권 시대의 포스터들도 시장의 옛 모습 위에 개성을 더하고 있다. 1970년대의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진관 등 일부 가게의 수익은 마을 공동체를 위해 쓰인다. 북한과 맞닿은 땅 키가 낮은 시장 건물의 처마를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제는 낯선 제비집이다. 교동도 사람들에게 제비는 지켜야 할 귀한 손님이라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건물 안에 집을 지어도 내쫓는 법이 없다. 바다 건너 고향 연백평야의 흙을 물어다가 집을 짓는 제비를 마치 북한의 가족처럼 대하는 실향민들의 마음 때문이다. 시장 곳곳에는 제비집에 손대지 말라는 안내문까지 붙어 있다. 동네 주민 중 한 사람은 실향민들이 고향 땅을 맘껏 드나드는 제비가 부러워 소중하게 여기는 모양이라며 심지어 이곳 사람들은 간식도 제비콩을 즐겨 먹는다고 말한다. 대룡시장에서 차로 30분 정도 달려가면 망향대를 만날 수 있다. 실향민을 위한 작은 쉼터와 고향을 바라볼 수 있는 망원경 두 대가 설치되어 있다. 섬에 많지 않은 높은 장소 중에 군사시설을 피해 고른 탓인지 접근도 쉽지 않고 전망도 그리 시원치 않다. 그래도 지척에서 황해도 땅을 볼 수 있다는 게 위로가 된다. 북한 땅이 가깝다는 것은 실향민에게는 작은 위안이 되지만 외지 출신 주민들에게는 공포가 되기도 한다. 2010년 바로 옆 연평도에 떨어진 포탄은 이곳 주민들에게도 큰 충격을 줬다. 한 주민은 자다 깨면 눈앞에 간첩이 서 있는 것 같은 환영에 시달리기도 했다며 한동안 불안장애로 신경정신과 치료도 받았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교동도는 다리가 생긴 지금까지도 일부 통제가 이뤄진다. 교동대교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는 왕래가 완전히 차단된다. 여행지 정보를 미처 챙기지 못한 남녀가 어쩔 수 없이 이곳에 갇혀 밤을 지새울 수도 있겠다는 괜한 걱정이 든다. 섬 안에 대형 숙박시설은 아직 없지만 몇몇 민박집이 운영 중이다. 인력으로 만들어진 평야 교동도의 또 다른 이색적인 모습은 벼 이삭으로 가득한 넓은 평야다. 섬에 무슨 평야가 있을까 싶지만 육지에서도 보기 힘든 대형 농기계들을 길에서 쉽게 마주친다. 섬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정미소가 이곳의 쌀농사 규모를 짐작케 한다. 교동도의 쌀은 맛이 좋기로 소문나 섬 주민의 넉넉한 생활을 보장해주는 수단이 되어왔다. 섬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교동 평야를 가로지르는 도로는 곧고 길게 쭉 뻗어 있어 한국전쟁 때 활주로로 사용되었을 정도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넓게 펼쳐진 논이 바다처럼 보이고, 가운데 작은 동산이 황금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느껴진다. 교동도가 산으로 둘러싸인 평야, 즉 분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이유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땅이기 때문이다. 3개 섬 사이의 바다였던 이곳은 고려시대 때 대대적인 간척이 이뤄져 평야가 됐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최영 장군이 간척을 주도했던 인물로 전해진다. 섬 초입에 자리 잡고 있는 고구저수지와 난정저수지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고구저수지는 가물치와 베스가 잘 잡히는 낚시 명소로 낚시꾼들이 사랑하는 곳이다. 난정저수지는 농업용 저수지로 지정돼 낚시는 불가능하지만 아름다운 풍광으로 영화,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종종 이용되고 있다. 교동도에서 손꼽히는 관광지로 교동향교와 연산군 유배지가 있다. 교동향교는 고려시대인 1127년에 창건돼 국내에 남아 있는 향교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초입을 따라 펼쳐진 코스모스와 해바라기 군락이 빚어내는 풍광은 이곳이 지역 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또 하나의 이유다. 교동도를 느긋하게 걸어보고 싶다면 강화군에서 만든 강화나들길 중 두 개의 교동도 코스를 추천한다. 바로 ‘교동도 다을새길’과 ‘교동도 메르메 가는 길’이다. 한 코스당 소요시간은 6시간. 만만치 않은 거리이지만 그래야 교동도의 멋진 풍광을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
- 2017-10-27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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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매 예방은 40대부터
- 치매에 걸린 남편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남편이 밥을 먹는데 아내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 밥을 먹던 남편이 휴지에 밥을 싸기 시작한다. 누굴 주려고 밥을 휴지에 싸냐고 묻자 남편은 “너 먹어” 하며 휴지에 싼 밥을 아내에게 내민다. 아내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껄껄 웃고 만다. TV에서 보았던 다큐의 한 장면이다. 아내 사랑이 지극했던 남편이 치매 때문에 기억을 하나씩 지워가고 있는 걸 지켜보는데 코끝이 찡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겪는 치매는 다큐처럼 찡하지도 다정하지도 않다. 그저 힘겹고 혹독한 시간의 연속일 뿐이다. 외출했다 돌아오는 시아버지는 대문에서부터 손녀딸을 큰 소리로 부르며 들어왔다. 예쁜 손녀를 위해 매일 스펀지케이크를 사왔다. 이걸 누가 먹는다고 매일 사오냐고 시어머니는 현관에서부터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케이크를 다른 빵으로 바꾸어 오기도 하고, 어느 날은 환불해 달라는 미안한 부탁을 하러 제과점으로 뛰어다니긴 했어도 시아버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우리는 몰랐다. 가끔씩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올 때도 있었다. 길을 잃어 힘들었다며 히쭉 웃었다. 아버님이 좀 이상하다고 하니 어머니는 “얘는 별말을 다 한다”며 서운해했다. 그때 아버님은 60대 중반을 막 넘긴 나이여서 가족들은 아버님에게 다가오는 치매 증상을 얼른 알아채지 못했다. 왜 이렇게 늦게 찾아왔냐는 의사의 말에 반성할 새도 없이 아버님은 무섭게 나빠졌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모르고, 사랑했던 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해 가족 모두를 고통에 빠뜨렸다. 가끔씩 정신이 돌아올 때면 수줍게 웃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아내를 향해 고함을 지르고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해댔다. 과묵하고 점잖던 집안의 가장이 심술쟁이 욕쟁이 할아버지로 변해갔다.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욕설은 정확히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것이 아내의 의무라 생각했는지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뽀얗던 어머니 얼굴이 새까맣게 변해가는 걸 보고 그 고생을 짐작해볼 뿐이었다. 치매에 걸려 고생하다가 돌아가신 아버님을 본 후 치매가 암보다도 더 무서운 병이라는 걸 알았다. 가족들은 말은 안 하지만 치매에 대한 불안증을 안고 산다. 만일 치매에 걸린다면 본인에게는 물론, 가족들에게도 엄청난 고통을 준다는 걸 생생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치매는 노화의 일부이고 누구든 걸릴 수 있는 병이지만 건강한 생활습관만 길러도 발병률이 50%나 감소된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생활습관을 몸에 익히는 것이다. 삼성서울병원 나덕렬 교수는 헬스장에서 근육을 키우듯 뇌도 열심히 훈련하면 건강해지고 근육이 생긴다며 술, 담배를 끊고 바른 식습관으로 체중을 조절하고 운동을 하는 등 바른 생활을 할 것을 권했다. 그러면서 독서나 글쓰기, 악기와 외국어 배우기 등 앞쪽 뇌를 자극하는 활동이 치매 예방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그가 권한 것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실천하기 어렵지 않은 항목들이다. 치매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질환이 아니고 발병 후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 20년 이상 긴 잠복기를 거친다. 60대에 온 치매는 이미 40대에 내 몸속에 잠복해 있던 것이다. 그러니 치매가 걱정된다면 40대부터 미리미리 치매 예방습관을 들여야 한다. 이것이 치매로 아버님을 떠나보낸 나와 우리 가족이 얻은 가슴 아픈 교훈이다.
- 2017-10-19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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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케줄 겹침 스트레스
- 필자는 스트레스가 별로 없는 편이다. 스트레스가 생길 것 같으면 의도적으로 미리 피하기 때문이다. 만나서 스트레스를 줄 사람은 아예 피한다. 그래서 비교적 편안한 마음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한다. 금방 알 수 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소화도 안 되고 머리도 무겁다고 느낀다. 그러니 신진대사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자다가도 꿈자리가 좀 뒤숭숭하면 바로 깬다. 그대로 비몽사몽간에 누워있다가는 잠이 깨고 그 다음날 하루 종일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해진다. 그러나 바로 깨서 꿈이라고 정의하고 잊어버리고자 하면 금방 잊게 된다. 필자는 여기저기 사회 활동이 많은 편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 만나는 스케줄이 겹칠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런 스케줄은 다음에 또 보면 되기 때문에 하나만 집중한다. 그전에는 스케줄이 겹치면 앞 스케줄 사람들에게는 양해를 구하고 먼저 일어나서 뒷 스케줄 후반부에 참석하는 부지런을 떨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몸에 무리가 온다. 앞 스케줄 사람도 먼저 간다고 섭섭해 하고 뒷 스케줄 사람들은 자기네들끼리 이미 분위기가 무르익어 분위기 적응이 어렵다. 그래서 요즘은 선약 위주로 스케줄 우선순위를 정한다. 이런 스트레스를 안 받기 위해서 사회 활동을 많이 줄였다. 그런데 사회 활동을 줄인 대신 문화 활동이 늘었다. 음악회, 오페라 등 공연 초대를 자주 받는다. 이런 공연은 한번 지나가면 다음에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른다. 사람들과의 만남 스케줄과 다르다. 그런데, 선약이 사람 만나는 스케줄이었을 경우 공연 관람 기회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스트레스가 온다. 두고두고 공연 관람 기회를 놓친 것을 후회한다. 이럴 때 사람들과 만나는 선약을 깨고 공연을 가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모처럼 만날 약속을 했는데 공연 관람 때문에 선약을 깬다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다른 핑계를 대더라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므로 찜찜한 것이다. 묘하게 스케줄은 한꺼번에 몰린다. 요즘 같으면 미국에 이민 갔던 친구들이 줄줄이 들어온다. 이맘 때 쯤이면 치과 치료도 받으러 오고 건강검진도 받으러 온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아 미국에 비해 치료비나 검진비가 훨씬 싸기 때문이다. 가을철이라 음악회, 오페라 등 공연도 많다. 공식적으로 무료 공연도 많고 유료지만, 초대권을 보내주는 경우도 많다. 하나 같이 놓치기 아까운 것들이다. 여행 가자는 사람도 많다. 날씨 좋고 단풍까지 들어 행락 철이기 때문이다. 자기네들 스케줄 다 소화하고 나니 남는 스케줄은 주말에 몰리기 십상이다. 사회 활동을 줄이고 나니 아무 스케줄이 없는 날도 있다. 워낙 스케줄이 많을 때는 이런 날이 쉴 수 있어 좋았다. 밤늦게까지 영화도 보고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날 수 있어서였다. 그런데 아무 스케줄이 없는 날이 며칠 계속되면 그것도 스트레스가 된다. 그래서 우울증이 오는 모양이다. 너무 쉬어도 곤란하고 너무 바빠도 문제이니 어느 정도 리듬을 유지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다.
- 2017-10-18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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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노래는 4분의 4박자가 많을까?
- 대중가요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4분의 4박자로 되어 있다. 같은 4분의 4박자에서 댄스 곡이든 트로트 곡이든 발라드 곡이든 템포가 좀 빠르고 느리고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가끔 4분의 3박자의 왈츠 풍도 있기는 하다. 댄스를 해보면 초보자들은 3박자의 왈츠는 상당히 어려워한다. 좀 빠른 템포의 왈츠인 비에니즈 왈츠도 마찬가지이다. 3박자에 발을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발을 모으고 나면 그 다음 스텝이 어느 발이 나가야 할지 헤맨다. 물론 체중을 3박자로 놓는 연습이 숙달되고 나면 잘 한다. 3박자로 발을 모으면서 체중 이동을 하는 것이 요령이다. 댄스도 대부분 4분의 4박자로 되어 있다.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자이브, 룸바, 차차차, 퀵스텝, 폭스트로트가 4분의 4박자이다. 삼바와 파소도블레, 탱고가 4분의 2박자이지만, 왈츠처럼 홀수 박자가 아니고 짝수 박자이다. 왜 노래에 4분의 4박자가 많은지 명확한 이론은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사람은 두발로 걷고 짝수 박자로 걸을 때 편안하다. 생각해 볼 것도 없는 것이다. 걸을 때 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아도 오른발 왼발이 저절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홀수 박자라면 머릿속으로 염두에 두지 않으면 스텝이 꼬인다. 군대시절 완전군장을 하고 행군을 하거나 구보를 할 때 졸리거나 몸은 지쳐서 기진맥진해도 다리는 왼발 오른발이 교대로 자동적으로 나가는 것을 체험했을 것이다. 짝수 박자로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마라톤을 해보면 왼발 오른발 교대로 짝수로 발이 나가고 짝수로 호흡을 해야 한다. 홀수로 호흡을 한다면 굉장히 힘들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잘 하는 월드컵 응원구호는 ‘대~한민국’ 4박자에 박수 다섯 번‘짝짝~짝~짝짝’하며 엇박자의 비밀이 숨어 있다. 이 때문에 4박자에 익숙하던 서양 선수들이 홀수 엇박자가 나오는 이 구호에 불안감이나 불편함을 느꼈다는 보도가 관심을 끌었다. 필자는 발라드 곡을 좋아한다. 대부분 느린 4분의 4박자이다. 그런데 박자 맞추기가 만만치 않다. 이은미의 ‘녹턴’이나 ‘헤어지는 중입니다’를 들어 보면 가사가 잔잔하게 많고 계속 이어지는 편인데 피아노 소리가 오히려 박자를 헷갈리게 한다. 발라드 곡은 한 마디 안에 첫 박자와 세 번째 박자에 액센트를 주어 노래를 부르는 것이 박자 맞추는 요령이다. 소리로는 특별히 강조하지 않아도 부르는 사람이 1, 3 박자에서 조금 더 힘을 주면 박자를 타기 좋다.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세 명이 여행을 기면 한 사람은 같이 보조를 맞추지 못한다. 셋 중 둘은 가까운데 그러다 보면 한 사람은 처지는 것이다. 그러나 짝수로 여행을 가면 그런대로 둘 씩 보조를 맞춘다. 단 둘이 갈 때는 물론 잘 맞는다.
- 2017-10-1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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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 당구 선수들의 표정 관리
- TV 당구 채널이 생겨 하루 종일 당구 시합을 볼 수 있다. 국내 경기도 있고 국제 경기도 있다. 아무래도 국내 프로 선수들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이제는 국내에서도 프로 선수들은 얼굴이 알려져 연예인 급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아직 당구 대회가 많지 않고 상금도 약하지만, 프로 당구 선수들은 당구 만으로 생업이 가능해졌다. 상금 외에 유명세 만으로도 레슨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꽤 되는 모양이다. 'LG U+' 대회는 올해 우승 상금이 8천만 원이었다. 앞으로 더 높아질 것이라 하니 우승하고 나면 상금만으로도 상당한 수입이다. 지난 'LG U+' 대회에서 우승한 이탈리아의 자네티 선수는 경기 중에 스트로크 할 때마다 다양한 개성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었다. 멋진 기술이 통했을 때는 자기 자신을 뿌듯해 하기도 하고 실수를 했을 때는 안타까운 표정도 잘 지었다. 너무 경망스러워 보이는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었지만, 해설자도 “프로 선수들은 그래야 한다”라고 거들어 줬다. 4대 천왕이라고 불리는 산체스, 쿠드롱, 야스퍼스, 브롬달 선수를 보면 자네티 만큼은 아니더라도 얼굴 표정에 여유가 있어 보인다. 약간의 익살이나 쇼맨십도 있다. 그런 것을 잘 할수록 팬이 늘어난다. 물론 베트남의 응유엔 선수나 프랑스의 뷰리 선수는 큐를 다루는 모습이 불량스러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선수들도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프로 당구 선수들의 경기하는 모습을 보면 모두 너무 비장해 보인다. 노련한 프로 당구 선수나 이제 갓 성년이 된 젊은 선수나 또는 여자 선수들까지도 남녀노소가 모두 같다. 웃음 띤 모습은 전혀 볼 수 없고 항상 진지하고 심각해 보인다. 경기가 끝나고 나서야 승자는 웃음을 보이고 패자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악수를 받아 준다. 물론 승패가 걸렸으니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 그리고 일단 자기 차례가 왔을 때는 스트로크, 당점, 큐 스피드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하여 공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너무 경직되면 스트로크 또한 경직되게 나간다. 점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공략법이 있는데 시야가 좁아지니 제 페이스를 못 찾고 공타가 늘어난다. 선수도 아니고 동호인끼리 당구를 치면서도 표정 관리는 중요하다. 너무 심각한 표정으로 플레이를 하게 되면 지나치게 승부욕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경하는 사람들까지 경직되게 만든다. 승패 이전에 같이 즐기는 게임이라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댄스에서도 표정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초보자들은 스텝을 익히기 바쁘지만, 정작 경기 대회에서는 스텝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당연히 스텝은 연습하면 익힐 수 있는 것이고 수없이 반복 연습을 하면서 경기 대회에서 스텝을 틀리는 선수는 거의 없다. 틀린다 해도 선수들마다 루틴이 다르므로 심사위원들이 잡아내기 어렵다. 그렇다면 결국 심사위원들의 시선은 최종적으로 선수들 얼굴 표정으로 간다. 스텝을 틀린 사람은 얼굴 표정에서 나타난다. 파트너를 믿지 못하는 선수는 파트너의 스텝이 불안해서 시선이 아래로 떨어진다. 그러나 파트너를 믿게 되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위를 향하며 여유가 있어 보인다. 춤을 추는 동안에 심사위원들과 눈도 맞추고 객석의 응원하는 사람들과도 소통한다. 프로는 얼굴 표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 2017-10-14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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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나폴레옹'
-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그의 유명한 말이 생각난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이 문구를 보고 많은 사람이 정말 불가능은 없을 거라며 희망을 품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필자 개인으로도 나폴레옹은 의미 있는 이름이었을 때가 있었다. 대학 시절 한창 미팅이 성행할 때였다. 여대에 다녔던 필자는 유능했던 과대표 덕분에 주로 연세대나 고려대 학생과의 미팅을 많이 했다. 과 전체가 한꺼번에 참석한 미팅도 있었으니 정말 미팅 전성시대라 할 수 있었다. 언젠가의 미팅에서 쪽지에 서로 맞는 인물을 찾아 파트너가 되는 방법을 썼다. 춘향과 이몽룡, 로미오와 줄리엣,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등이었는데 필자가 선택한 쪽지는 조세핀이었다. 필자는 조세핀이 되어 나폴레옹을 찾았더니 정말 첫눈에 쏙 들어온 그런 사람이어서 가슴 설레고 즐거웠던 추억이 있다. 그렇게 나폴레옹은 필자에게 다가온 멋진 첫 남자친구였다는 기억이다. 뮤지컬 나폴레옹을 관람할 기회가 생겼다. 잠실 롯데 씨어터는 뮤지컬 대작을 많이 올리는 공연장이다. 좌석도 무대와 가까운 VIP석이라 기분 좋은 관람을 할 수 있었다. 출연진도 최정상 뮤지컬배우로 필자가 관람할 날의 남자주인공 임태경씨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멋진 뮤지컬배우여서 시작 전부터 기대가 매우 컸다. 나폴레옹의 이미지답게 첫 장부터 웅장한 라이브 오케스트라가 울렸다. 뮤지컬 나폴레옹은 나폴레옹과 그의 연인 조세핀, 그리고 나폴레옹을 이용했던 정치가 탈레랑, 이 세 사람의 야망과 갈등, 러브스토리와 배신의 대서사시로 시대를 재현한 화려한 무대와 의상이 어우러져 웅장하고 멋진 뮤지컬로 탄생했다. 로마제국 이후 가장 넓은 유럽을 정복한 인물인 나폴레옹은 어린 날 프랑스에서 공부하다 자신의 고향인 코르시카의 독립을 위해 당시 권력자인 파올로에게 저항하다 고국에서 추방당한다. 고국에서 쫓겨난 나폴레옹은 힘을 키워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세상을 바꾸기로 다짐한다. 그의 명민함을 알아본 정부 관료 탈레랑의 도움으로 두각을 보이는데 프랑스 정부의 신임을 독차지하고 사랑하는 조세핀과 결혼도 했으며 프랑스에 위협이 되는 유럽 여러 나라에 대한 정복 전쟁을 시작하여 승승장구하게 된다. 계속 승전한 나폴레옹은 내친김에 부패한 프랑스 정부를 무너뜨리고 동생 뤼시앙의 도움으로 프랑스의 지배자가 된다. 일인자가 된 나폴레옹에 불안을 느낀 세력의 암살시도가 있자 더 큰 권력으로 제압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아예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황제가 된 후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지만, 왕비인 조세핀이 아이를 갖지 못하자 후궁을 들이라는 탈레랑과 다툼을 벌이게 된다. 결국, 자신의 감정보다 왕권이 중요했던 그는 조세핀과 이혼하고 마리 루이즈라는 여성과 결혼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조세핀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뮤지컬을 한 장면 중에 전장에서 지친 병사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기억해 불러주며 격려하는 장면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역시 훌륭한 지휘관이라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다. 만민이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프랑스 혁명 정신을 계승한 위대한 프랑스의 황제, 멈추지 못한 정복욕으로 수많은 젊은이를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했지만 엘바섬으로 유배당한 후에도 그를 그리워하는 국민이 많아 다시 권좌에 올랐던 그는 진정한 혁명가였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그대로 재현한 황제대관식과 궁중무도회 장면이 화려하고 볼만 했다. 붉은색에 하얀 털이 달린 망토를 걸친 주인공의 모습이 정말 위대한 황제의 모습을 연상하게 해주는 등 참으로 웅장하고 멋진 뮤지컬 ‘나폴레옹’이었다. 그가 부르는 ‘빅토리’ 의 강한 멜로디가 뮤지컬이 끝났을 때까지도 귓가에 남았다.
- 2017-10-14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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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상견례
- 조카는 어릴 때 성당에서 같이 봉사하던 남자 선배를 만났다. 선배는 자신의 친구 소개팅을 부탁했다. 조카는 마침 미혼인 친구가 있어 소개하기로 했다. 둘 다 결혼적령기를 훌쩍 넘긴 나이들이라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이었다. 약속 장소에서 4명이 함께 만나 서로 소개를 해주고 좀 거들다가 둘은 빠져나왔다. 둘은 몇 번 만나더니 뭔가 삐꺽거리는 것 같았다. 조카는 중매를 잘해야 밥을 얻어먹는다고 상대의 장점을 설명하며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고민에 빠졌다. 소개받은 남자도 고민에 빠졌다. 서로에게 느끼는 호감을 감추기 힘들었다. 조카는 친구의 남편이 될 수도 있는 남자를 밀어내고 있었다. 남자는 남의 부인을 탐하는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어느 날 친구를 통해 조카가 이혼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안도하며 데이트 신청을 해왔다. 조카는 응했고 둘은 사랑에 빠졌다. 문제는 남자가 안동 양반가의 장손이라는 사실과 그 집에서는 손자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카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둘은 사랑하지만, 양가 어른들을 설득해야 하는 숙제가 무겁게 느껴졌다. 안동으로 처음 인사 가던 날 조카는 여린 참새처럼 떨었다.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놓치고 싶지 않아서 두려움이 더 컸으리라. 안동에 도착하자 그의 부모님은 따스하고 정중하게 조카를 환영해주었다. 며칠 전 시어머니가 꿈을 꾸었는데 아들이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뒤에 남자아이가 함께 오더라는 말을 했다. 조카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랬다. 그때까지도 시부모님께는 알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조카에겐 전 남편과의 사이에 중학생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효자였고 집안에서는 믿음직한 아들이었다. 그 무게로 부모를 설득하고 세상이 변해간다는 것을 이해시켰다. 그의 부모님이 아직도 서당을 운영하는 깨어난 선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부터 갈등으로 연결될 일들을 얼마나 멋지게 서로 존중하며 풀어가는지를 얘기하고 싶다. 예비 조카사위와 처음 만나는 날,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다. 어떤 조건이라도 살아봐야 비로소 알게 되는 인생이 아니던가. 더구나 결혼에 대한 상처를 이미 겪은 조카는 더 조심스러웠다. 총각과 애 딸린 이혼녀. 조카와 아들은 친정에서 부모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원래 계획엔 상견례 날 중학생 아들은 그 자리에 있을 예정이 아니었다. 외할머니는 손자를 데리고 딸 상견례에 참석했다. 사돈 될 분과 나란히 앉아 아이를 소개했다. 모두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 부모의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르신께서 어려운 결정을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바깥사돈 될 분은 머리를 숙이더니 장래의 손자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어려운 결정은 네가 했구나. 잘 왔다.” 안사돈도 촉촉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비로소 조카는 찬란한 빛 속에 서 있는 천사처럼 보였다. 사랑과 존경이라는.
- 2017-10-08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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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安全자산’ 달러의 가치
- 시절이 하 수상하다. 북한이 핵실험을 단행할 때마다 국내 증시가 빠지고 원화 가치가 추락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 경고음이 울린다. 북핵 외에도 미국 금리인상, 중동 불안, 유럽 부채 등 정치·경제 이슈들이 수시로 국내 자산의 가치를 위협한다. 경제·금융 전문가들은 “자산의 일부(10~30%)는 외화(달러)로 가져가라”고 한목소리를 낸다. 위기 시 자산을 지키기 위한 차선의 방어책이다. # 제약회사 임원을 지낸 뒤 정년퇴임한 지모(62)씨는 요즘 북핵 관련 뉴스를 들을 때마다 걱정이 앞선다. “혹여나 전쟁이 발발하면 집과 주식의 가치가 사라질까 두렵다”며 “위기를 대비해 안전자산인 금과 달러 매입을 서두르고 있다”고 말했다. # 중견기업에 다니는 김모(51)씨는 매월 급여일마다 가슴을 졸인다. 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송금해야 하는데 환율에 따라 금액이 크게 변동되어서다. 김씨는 “연초에는 5000달러 송금에 약 600만원이 필요했는데, 지난달에는 원·달러 환율이 1130원 수준으로 내려오면서 대략 550만원이 들었다”며 “환율이 떨어질 때마다 꾸준히 달러를 사서 적립해놓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따라 환율이 널뛰기를 하고 있다. 연초 1210원까지 치솟았던 원·달러 환율은 9월 11일 현재 1130원 수준으로 밀렸다. 우리나라는 ‘신흥국의 자동인출기(ATM)라고 불릴 정도로 유독 조그만 충격에도 자금이 크게 출렁이는 특징이 있다. 작은 폭격에도 충격파가 매우 큰 국내 금융환경에서 생존 자산, 가치보존 자산으로 외화(달러) 자산이 주목받는 이유다. 위기 때 강한 ‘가치보존 자산’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7월 개인 달러화 예금잔액은 105억2000만 달러로 역대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전월보다 5억3000만 달러가 증가했다. 이 중 달러화 예금이 48억4000만 달러가 증가했고, 엔화 예금이 4억7000달러 늘었다. 박해영 하나은행 Club 1 PB센터 PB팀장은 “전쟁을 경험한 어르신 세대는 가격(환율 등)에 상관없이 금과 달러에 관한 매수 문의가 많다”며 “대한민국에 위기가 오면 달러가 제값을 한다는 것을 경험상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전쟁과 같은 극단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국내 자산 가격이 폭락하고 달러 가치가 치솟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은 수시로 반복 재현되고 있다. 실제 북한의 핵실험이 단행될 때마다 코스피지수는 어김없이 하락했다. 환율도 크게 요동쳤다. 6차 북핵 실험이 단행된 9월 3일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영업일 대비 달러당 10.20원 상승했고, 코스피는 전 거래일 대비 28.04포인트 내려앉았다. 뿐만 아니라 (금리가 오를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국고채 3년물의 금리는 0.04%포인트 상승 마감해 주식과 원화, 채권 가치가 동시에 하락하는 ‘트리플 약세’를 기록했다. 비단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만이 국내 자산의 가치를 위협하는 요인이 아니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과 유럽 부채 문제, G2(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 등 끊임없이 불거지는 대내외적 불안 요인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한국 경제가 구조적으로 위기에 취약한 허약체질이어서 국내 주식, 채권, 부동산 등의 분산투자뿐 아니라 ‘통화분산이 필수’라고 강조한다. 장호준 SC제일은행 자산관리본부 전무는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 금융 선진국 투자자들은 자산의 40% 정도를 달러 등의 해외 통화로 보유하지만, 국내 투자자들은 대개 연수나 여행 목적으로 외화를 매입하는 수준으로 그 비율이 자산의 5% 이하에 그치고 있다”며 “자산 포트폴리오의 통화 다변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달러화 등을 자산 포트폴리오에 넣으면 위기상황에 급락할 위험이 있는 원화 자산의 실질적인 가치를 상당 부분 보전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수익을 낼 수 있다. 오세준 알펜루트자산운용 펀드매니저는 저서 에서 원·달러 환율의 높은 변동성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오히려 ‘축복’이라고 강조했다. 대한민국에 보릿고개가 찾아왔던 1997년 외환위기(IMF)로 되돌아간다고 가정해보자. 코스피지수는 역대 최저치인 280선까지 밀렸고, 부동산시장도 폭락했다. 원·달러 환율은 종전 900원을 밑돌다 순식간에 1900원대 중반까지 치솟았다. 만일 이때 달러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가치가 급등한 달러를 팔아 국내 주식과 부동산을 헐값에 사들여 경제 회복 후 막대한 차익을 얻었을 것이다. 통화분산, 달러 외에는 대안이 없나 부침이 심한 국내 자산의 국제적 실질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통화분산은 다양한 통화에 이뤄질수록 효과적이다. 그러나 통화시장에서 미국 달러화는 기축통화로서 단연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달러의 역습이다. 이민구 한국씨티은행 WM상품부 부장은 “전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위기의 원인은 미국에 있었지만 미국 달러화의 가치는 더 치솟았다”며 “불확실한 금융환경에서는 안전자산으로 금이 우선 주목받지만, 진짜 위기가 오면 달러가 상승한다”고 말했다. 미국 달러 외 통화분산 차원에서 주로 고려되는 통화는 현재 일본 엔화, 유로화, 중국 위안화 등이다. 신동일 KB국민은행 대치역 PB센터 부센터장은 “자산가들이 통화분산 차원에서 주목하는 통화는 단연 미국 달러화로, 외화 거래의 70~80%가 미국 달러화에 집중되고 있으며 일부 위안화나 엔화 등도 매입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중국이 미국을 위협하는 강대국으로 빠르게 성장 중이지만, 위안화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게 중론이다. 이민구 부장은 “미국 달러화의 가치는 시장에 의해 결정되지만, 중국 위안화는 펀더멘털(기초체력)에 상관없이 중국 정부의 정책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가 많아 안전자산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달러화에 비해 위안화나 엔화, 유로화 등으로 투자할 곳은 제한적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 2017-09-30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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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꿈꾸는 소녀 양수경, 인생 2막을 다시 가수로 데뷔
- 제목만 말해도 그 시대의 풍경이 떠오르는 노래들이 있다.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당신은 어디 있나요’ 등등 발표될 때마다 가요 차트를 점령하며 시대의 유행가로 자리매김한 그 노래들. 특유의 여린 목소리로 그 시절의 애절한 감성을 노래했던 양수경(52)이 무려 27년 만에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긴 세월을 넘어 그대로 도착한 듯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녀는 여전히 꿈을 꾸는 소녀와 삶의 부침을 겪고 거듭난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을 함께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철두철미한 가수였다. 그녀가 인생 2막을 열면서 발견한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가수 양수경의 귀환은 요즘 한창 일어나고 있는 ‘8090’ 가수들의 복귀 붐 속에서도 특별한 느낌을 준다. 작년부터 여러 음악 방송 프로그램에서 무대를 가진 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단독 콘서트를 27년 만에 연 것이다.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었음이 짐작된다. 후회 없이 할 수 있는 일, 답은 노래였다 “준비하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몇 번이나 들었어요. 추억 속에 있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이들 엄마이기에 나만 생각할 수는 없었어요. 사업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어요. ‘내가 잘하는 일이 뭘까’, ‘눈감는 날까지 후회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를 무지 많이 고민했죠. 답은 노래였어요.” 양수경은 공연을 앞두고 2014년 일기를 봤다. 공연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써놓은 자신의 글이었다. 그 막연했던 희망이 3년 정도 지나 이제야 이뤄진 셈이다. 그러나 막상 그런 무대가 찾아오니 갈등과 두려움이 올라왔다. ‘이번만 하고 다시는 못하는 것 아닌가, 무대에 섰는데 노래가 잘못 나오지 않을까, 차라리 안 보여주면 망신이라도 안 당할 텐데….’ 공연 끝나고 다음 날 아침까지 잠 못 자 “요즘 공연 시장도 안 좋지, 음반업계도 안 좋지. 내 나이에 뭔가 시작한다는 것도 두려웠고. 공연 날 표가 백몇 석이 비었다는 얘기를 듣고 무대를 올라갔어요. 그런데 막상 올라가 보니, 객석이 꽉 차 있었어요.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어요. 그리고 노래를 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했는데… 모르겠어. 시작했는데 끝나 있었어요.” 성공이었다. 공연 직전까지 떠올렸던 모든 어둠과 고통을 날려버릴 정도의 성공. 공연 전날 불안감에 잠을 못 잤던 양수경은 공연이 끝나고 정반대의 이유로 그다음 날 아침 여덟 시까지 잠을 못 잤다. 공연을 본 사람들에게서 들은 “다시 또 오고 싶어요”라는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울고 웃는 게 상상을 초월했죠. 우리 밴드는 최고의 세션이에요. 최고의 가수들과 해외 공연을 다 해본 사람들이라서 무대에서 설렐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친구들이 나처럼 잠이 안 온다면서 전화를 했어요. ‘누나, 이상해. 아직도 안 가셔. 모르겠어. 어떤 힘인지 모르겠는데 아직은 설레’라고.” 세상의 무수한 따스함과 마주하다 양수경은 이번 공연을 기획하고 추진하면서 자신을 도와주는 따뜻한 사람들을 무수히 만났다. 그 만남들은 그녀로 하여금 지난 시간을 후회하게 만드는 계기도 됐다. “옛날에는 제가 말을 잘 안 했어요. 그게 너무 후회스러웠어요. 좀 어렸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말하고 사귀면 그게 추억으로 남는 건데 그걸 못한 거죠. 어렸을 때는 너무 가난해서 똑바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너무 포장했어요. 지금은 내가 풀어놓으니까, 많은 걸 내려놓고 나니까 세상이 따뜻해요. 전보다 가진 것도 없고, 모든 걸 다 잃은 줄 알았는데 여기 이렇게 따뜻한 분들이 계셨어요.” 그녀가 세상의 따뜻함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과정은 슬픔과 인고의 세월이기도 했다.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 인간 양수경은 내비게이션 아니면 어디에도 갈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자꾸 ‘수호천사’들이 나타나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뜻밖에 누군가가 나타나 나에게 손을 내밀어줄 거라곤 생각 못해봤어요. 단절된 삶, 이슬에 젖어 산 세월이 참 길었지. 해 뜨는 것도 싫고 해 지는 것도 싫었던 때가. 너무나 많은 배신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녀는 사람을 볼 때 눈을 본다고 말했다. 눈은 숨길 수 없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자신에게도 해당되었다. 그녀는 힘든 시간에 ‘제 마음에 분한 게 없게 해주세요, 내 눈에 사악한 게 없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 소원 덕분일까, 그녀의 눈은 30여 년 전처럼 여전히 해맑았다. “아직도 아픈데, 그 아픔이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날 보고 울고 웃고 용기를 얻으면 좋겠어요.” 내년 데뷔 30주년 공연도 하고 싶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서 고통을 보지 않고 힘을 얻으면 좋겠다는 말은 철저한 대중가수로서의 양수경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제2의 인생 또한 첫 번째 인생처럼 가수로서 다시 문을 연 셈이다. 컴백 공연 전에는 조관우의 ‘늪’, 김범수의 ‘약속’을 만든 베테랑 작곡가 하광훈과 손잡고 신곡 ‘애련’을 발표했다. 그것은 과거에만 함몰되지 않는 ‘현역’ 가수로서의 양수경을 증명해주는 의지처럼 보였다. “지금 리메이크 앨범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런데 참 돈이 많이 들어가더라(웃음). 과거에는 음반을 내면 많은 수입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음반이 안 나가요. 그래도 우리 또래 사람들은 CD를 가끔씩 사는데 젊은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죠. 우리의 낭만은 산업에 묻혔어요. 음반이나 예술 하시는 분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시대를 따라가다 보니까 앨범 한 장을 만들면서 생기는 추억이나 낭만이란 게 묻혀서 없어졌어요. 그래도 난 앨범을 만들 거예요.” 그러고 보니 그동안 양수경이 소화한 장르는 굉장히 넓다. 트로트, 발라드, 댄스, 탱고 등등. 자연스럽게 그녀가 어떤 가수가 되길 원하는지 궁금해졌다. “저는 대중가수예요. 그럼 대중이 좋아할 쉽고 편한 노래를 부르면 되죠. 노래는 안 되면 언제든지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내가 노력이라는 걸 잊지 않는 가수면 좋겠고 확실한 내 색깔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전 분명 이선희, 현미 언니와도 다르니까요.” 비굴하게 살지 말자는 다짐 인터뷰를 하면서 양수경은 그 소녀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직업적으로 완고하고 고집이 센, 흡사 장인에 가까운 의식이 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타고난 성정일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굴곡진 삶을 이겨내고 최고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만들었던 힘일지도 모른다. “가수를 딴따라라고 부르는 게 싫었어요. 그런 시선들이 좋지 않았고, 나라도 똑바로 살아야겠다 싶었죠. 연예인은 우리가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계속 쳐다보는 직업이에요. 그럼 많은 걸 포기해야 해요. 외로운 것도 받아들여야 하고요.” 어렸을 때부터 연예계에 몸을 담아야 했기에 체득해야 했던 그 완고함을 도와줬던 것은 책이었다. “어렸을 때는 책을 많이 읽었죠. 맨 연애소설만 읽었지(웃음). 특히 시드니 셀던 소설을 즐겨 읽었는데, 사람들은 그 소설에서 연애를 읽지만 잘 읽어보면 가난한 여자가 상류사회로 진출하면서 변화되는 모습이 나와요. 전 그 여자의 성공 과정에 대한 내용을 계속 읽었어요.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인문학 서적만 찾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시드니 셀던 소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도 발견했고, 과학, 경제,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도 읽었어요.” 소설에서 인생을 배웠다는 신선한 관점. 그렇다면 그녀가 삶을 살면서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비굴하게는 살지 말자. 누군가 내 눈동자를 봤을 때 무엇을 감추려 하거나 비굴하게 보이지는 말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나이 아름다움은 눈빛에서 나오는 것 양수경은 화가 날 때면 하늘을 보며 웃는다고 말했다. ‘예쁘게 살기도 힘든데’라는 말이 그녀의 반문이었다. 예쁘게 살고 싶다는 희망은 그녀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다. 그녀는 여자로서 당당하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예쁘게 사는 것 또한 당당한 여성으로서의 삶의 일부였다. “우리 나이의 아름다움은 눈빛에서 나와요. 그러니 잘 때도 웃으면서 자야 해요. 그건 돈으로도 할 수 없고 시술로도 안 되는 부분이죠.” 그녀는 여성의 삶에서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딱 잘라 대답했다. “아, 그건 없어. 내가 신데렐라가 돼야 해요.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만큼 되어야 하는 거예요. 연애? 예전에는 연예인이라서 다 막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어요. 하지만 지금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그리고 내가 타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내 스스로 일어나고 싶은 거죠.” 그녀가 여유가 없다고 말한 이유, 바로 내년이 데뷔 3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른 생각들보다 다음 공연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게 더 급해 보였다. “이번 콘서트가 끝나고 다른 가수들의 공연을 본 뒤에 ‘난 아직 좋아할 때가 아니다. 다음 공연을 어떻게 할지 그걸 짜야 한다’ 했어요. 3년 전에 생각한 걸 이제야 한 거잖아요. 그래서 공연 다음 날 바로 다음 공연 기획을 짰어요. 물론 아무리 계획을 세워봤자 우리 뜻대로 되는 건 없죠. 꿈과 희망을 가질 수는 있는데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진 않아요. 그래서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세상이 예뻤으면 좋겠어요” 최근에 양수경은 예능 프로그램인 에 출연했다. 방송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대답은 지극히 ‘가수 양수경’다웠다. “방송? 불러줘야 나가죠. 그런데 방송 욕심보다는 공연 욕심이 더 커요. 그렇다고 방송국에서 절 안 부르는 건 아니에요(웃음). 부르긴 불러요. 하지만 난 대중가수예요. 대중들을 위해 쇼를 하는 가수이고 싶어요.” 가수로서의 삶 외에도 양수경에게는 또 다른 삶에 대한 꿈이 있다. “혼자 사는 여자들, 싱글맘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여유가 생긴다면 그런 삶을 살고 싶은 거죠.” 양수경 본인은 몰랐을지라도, 그녀를 그리워하는 팬들은 항상 있었다. 그들에게는 남편과 사별하고 세 아이의 엄마로서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이 고마운 선물 같았을 것이다. 힘겹게 먼 길을 돌아 자신의 자리로 다시 도착한 그녀는 그 시절 그때처럼 여전히 꿈꾸는 소녀 같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꿈을 꾸면서 살고 싶었어요. 지금도 꿈을 꿔요. 밝고 맑은 세상에서 그렇게 예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 2017-09-3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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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혼의 발목
- 기분이 참 우울하다. 지인이 중매를 서겠다고 하여 좋다고 승낙 했었다. 중매인이 꽤 오래 유심히 관찰했는데 필자가 괜찮은 남자로 눈에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 여자가 재력이 좀 있는 여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역인 필자 역시 재력은 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나름대로 이만하면 노후 대책은 탄탄할 정도로 자신 있었는데 상대 여자의 스펙을 들어보니 새발의 피였다. 강남에서 사업을 크게 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나가는 모임의 구성원들이 이름만 대면 알 정도로 사회적으로도 쟁쟁했다. 소위 상류층 사람들이었다. 중매를 서려니 신상 조사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필자가 기분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는 얘기했다. 둘 다 앞으로 25년을 반려자로 살아야 하니 신중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 붙었다. 필자는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부동산을 먼저 물었는데 고가가 아니므로 별로 참고할만한 수준은 안 된다고 했다. 문제는 고정 수입이 좀 약하다는 것이었다. 국민연금 외에 고정 수입이 아니라 수입이 변동 적이므로 불안하다는 분석이었다. 해외여행도 자주 다니고 하려면 월 고정수입이 500만원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여행비 300만원에 쇼핑비 200만원은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돈 있는 사람 기준으로는 그럴 수 있으니 비난할 일은 아니다. 혼자 살게 된 이유도 사별인 경우보다 이혼은 좀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전 부인이 살아 있으니 신경 쓰인다는 것이다. 여전히 왕래가 있을 수도 있어 안심이 안 되기도 한단다. 여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혼한 남자가 잘 되는 꼴을 못 본다는 것이었다. 상대녀가 사별 후 재혼을 했는데 남자가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바람을 피우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재력 있는 남자를 얻고 싶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공인으로 그동안 오점 없이 지내왔다고 얘기했으나 댄스 관련 얘기는 선입견이 있으니 절대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재혼 남자가 그녀의 자녀들과도 불화가 잦았던 모양이다. 필자도 자녀가 있고 그녀도 자녀가 있으니 자녀 문제도 중요한 요소라고 했다. 필자의 자녀는 각각 독립하여 잘 살고 있고 상대녀도 자녀들이 장성해서 독립했을 테니 문제 안 된다고 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상대녀의 성씨가 필자와 같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법에는 동성동본도 결혼할 수 있게 법이 개정되었다. 2세를 낳을 것도 아니므로 문제가 안 된다고 했다. 다만 양가 친척들이 관습을 이유로 반대할 수는 있다. 중매인과 상담을 끝내고 나니 기분이 우울해졌다. 사람을 경제적인 기준으로 평가한다는 것에 기분이 상했다. 사람이 우선인데 아직도 우리 사회는 경제적인 수준을 먼저 본다. 객관적인 기준으로는 이만하면 꿀릴 것이 없었는데 상대가 바라는 수준이 못 되므로 자괴감이 드는 것이다. 중매인의 공격적인 질문에 상대녀에 대해서는 제대로 묻지도 못했다. 나이가 몇 살인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못 물어 봤다. 기분은 중매를 포기하라고 하고 싶지만, 사주에 올해 결혼 운이 좋으니 일단 상대녀를 만나는 볼 것이다. 재혼이 어렵다는 것이 상대녀가 재력을 포함하여 스펙이 너무 좋다거나 그 반대로 너무 없는 경우가 많다. 재혼의 발목이다. 재력 보다는 사람 중심으로 평가 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 2017-09-27 15:26